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4:28:25

토트넘 홋스퍼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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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초창기 (1882~1949)2.2. 첫 리그 우승과 리빌딩 시기 (1949~1958)2.3. 최전성기
2.3.1. 빌 니콜슨 체제 (1958~1974)
2.4. 몰락과 부활을 경험한 포스트 니콜슨 체제 (1974~1987)2.5. 테리 베너블스 체제 (1987~1992)2.6. 암흑기
2.6.1. 암흑기였던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초창기 (1992~2004)
2.7. 유럽 대항전 단골로 도약한 안정기 (2004~2014)2.8. 중흥기2.9. 과도기 (2019~)
2.9.1.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체제 말기 (2019)2.9.2. 주제 무리뉴 체제 (2019~2021)2.9.3. 라이언 메이슨 감독 대행 체제 (2021)2.9.4. 누누 산투 체제 (2021)2.9.5. 안토니오 콘테 체제 (2021~2023)2.9.6. 엔지 포스테코글루 체제 (2023~)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프로 축구 클럽인 토트넘 홋스퍼 FC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역사

2.1. 초창기 (1882~1949)

1882년 9월 5일 토트넘에 있는 바비 버클[1]을 중심으로 올 할로우 교회 학생들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창단 당시 팀명은 홋스퍼 FC였다. 몇 년후 팀원들은 존 립셔 교사를 초대 회장으로 모셔다가 팀을 재조직하고 팀을 위한 땅을 찾으면서 아이들을 지원해준다. 그리고 1884년 현재의 팀명인 토트넘 홋스퍼 FC로 팀명을 바꾸었고, 1895년에는 아마추어에서 프로 팀으로 전환하였다.

토트넘은 1896-97 시즌부터 지역별 리그인 남부 리그에 참가함과 동시에 주중 리그와 채리티 컵에 참가하였다.

1896-97 시즌부터 1898-99 시즌까지 주중 리그로 유나이티드 리그에 참가하였으며, 세 시즌간 8위, 2위, 3위를 기록하였다.
1899-1900 시즌에는 사우던 디스트릭 콤비네이션(Southern District Combination)에 참가하여 2위를 기록하였다.
1900-01 시즌부터 1907-08 시즌까지 주중 리그로 서부 리그에 참가하였으며, 8시즌간 우승 1회, 2위 1회, 3위 2회, 4위 3회, 8위 1회를 기록하였다.
1901-02 시즌부터 1903-04 시즌까지는 서부 리그와 함께 런던 리그도 참여하였으며, 세 시즌간 2위, 우승, 2위를 기록하였다.

토트넘은 1896년 초대 감독으로 볼턴을 지휘했던 프랭크 브레텔을 부임시켰다. 브레텔 감독은 에버튼 등지에서 뛰던 존 카메론을 사들여 팀을 정비하고 1899년에 카메론이 감독직까지 도맡아 1899-1900 남부 리그에서 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9년부터 화이트 하트 레인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1901년에는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결승전 재경기(1차전 2-2)에서 3대1로 꺾으며 창단 첫 FA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2] 이는 풋볼리그 창설 이후 논리그 클럽이 FA컵을 우승한 첫 사례이자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3]

1908-09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2에 참가하면서 풋볼 리그 주관 대회에 합류하기 시작했고[4], 해당 시즌 2위를 기록하며 1시즌만에 풋볼 리그 디비전 1으로 승격하였다.

1부 리그에서의 첫 시즌인 1909-10 시즌에는 고전했으나, 최종전에서 첼시 FC에 승리하며 첼시를 강등시키고 15위로 잔류에 성공했고, 이후 리그 하위권에 머물며 생존하였다.

토트넘은 처음에는 북런던의 유일한 팀이었으나, 1913년 아스날 FC가 울리치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이전하면서 북런던 지역 팬들이 갈라져 라이벌이 성립되었다.[5]

1914-15 시즌 제1 차 세계대전으로 리그가 조기 종료되었고, 토트넘은 당시 리그 꼴지였다. 전쟁 중 화이트 하트 레인은 정부 소유가 되어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환됐다. 이 기간에 토트넘은 아스날의 홈구장이었던 하이버리와 클랩튼 오리엔트( 레이튼 오리엔트 FC의 전신)의 홈구장 호머튼 그라운드를 전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리그는 재개되었고 1부 리그는 기존의 20개 팀에서 두 팀을 늘려 22개 팀으로 확장했다. 21번째 클럽은 전 시즌 1부리그 19위였던[6] 첼시 FC가 되었고, 22번째 클럽으로는 다름아닌 디비전 2에서 5위였던 아스날이 되며 토트넘은 디비전 1 참가 후 처음으로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7][8][9] 이로 인해 북런던 더비는 런던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를 형성하게 됐다.

토트넘은 이후 디비전 2에서 우승하며 한 시즌 만에 곧바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1921년 4월 23일에는 FA컵 결승전에서 울버햄튼을 상대로 1-0으로 이겨 통산 2회 우승을 차지했다. 1921-22 시즌에는 리버풀 바로 아래인 2위로 시즌을 마치며 1부 리그 최고 성적을 경신하였다. 하지만 이후 10위권 밖의 중하위권에 머물다 1927-28시즌 매킬럼 감독이 떠나고 토트넘은 21위로 다시 강등된다.[10] 토트넘은 디비전 2에서 5시즌을 보내다가 1932-33 시즌 디비전 2 2위를 기록하며 다시 승격했다. 1933-34 시즌에는 3위를 기록하며 좋은 시즌을 보냈으나, 1934-35 시즌에 부상자가 속출하며 최하위인 22위로 다시 강등되었다. 이후 8시즌간 2부 리그에 머물며 1949-50 시즌 디비전 2를 우승하며 승격하였다.

2.2. 첫 리그 우승과 리빌딩 시기 (1949~1958)

1949년에 아더 로위 감독 취임 후 빌 니콜슨 등을 중심으로 '푸시 앤 런'이라는 스피드를 중시한 공격축구를 선보이며 팀은 새로 변모했다. 알프 램지를 영입한 1949-50 시즌에 15년 만에 1부로 승격시켰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50-51 시즌 빌 니콜슨의 활약으로 1부 리그 승격에 이어 1부 리그에서 첫 우승에 성공하였다.(토트넘 1위, 맨유 2위, 블랙풀 3위, 뉴캐슬 4위, 아스날 5위 등) 첫 경기에서 스탠리 매튜스 경이 이끌던 블랙풀 FC에 1:4 패배를 당하며 출발했지만 10월과 11월 재키 밀번의 뉴캐슬에 7-0 대승을 거두는 등 파죽의 8연승을 기록했다. 최종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1:0으로 꺾고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3점이 앞서며 승격하자마자 창단 첫 1부리그 우승을 따낸 것이다. 다음 시즌인 1951-52 시즌에는 버스비의 아이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4점이 뒤쳐져 2위에 그쳤다. 그러나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 리그 10위와 16위에 그치며 삐걱거렸고, 1954-55 시즌에도 또다시 16위에 그치며 아서 로우 감독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1955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떠나기 전 한 선수와 계약을 맺었는데, 그 선수는 대니 블랜치플라워로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두번이나 받은 엄청난 선수였다.[11]

로위의 후임으로 수석 코치였던 지미 앤더슨이 선임되었다. 1955-56 시즌 거의 강등될 뻔 했다가 18위로 겨우 잔류했고, 1956년 빌 니콜슨이 코치로 부임한 뒤 블랜치플라워와 바비 스미스의 활약에 힘입어 1956-57 시즌 2위로 마쳤다.[12] 1957-58 시즌도 3위로 마쳤다. 앤더슨은 클리프 존스, 테리 메드윈, 피터 베이커, 론헨리, 테리 다이슨, 모리스 노먼, 바비 스미스 등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거나 유스에서 승격시켜 팀을 잘 리빌딩했다.

2.3. 최전성기

2.3.1. 빌 니콜슨 체제 (1958~1974)

토트넘의 리즈시절.

1958년 10월, 초반 성적 부진과 함께 건강상의 이유로 앤더슨이 사임하고 수석코치 빌 니콜슨이 감독을 맡았다. 니콜슨 감독은 데이브 맥키, 존 화이트와 계약을 맺었고 팀의 최고의 선수이자 리그의 탑 티어 선수라고 할 수 있는 지미 그리브스를 영입하였다. 이외에도 마틴 치버스, 팻 제닝스, 스티브 페리맨, 조 키니어 등을 영입하여 팀을 새로 꾸려서 1967년 FA컵, 1971, 1973 두 번 리그컵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하고, 1972년 UEFA컵 결승에선 같은 잉글랜드 팀인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꺾어 UEFA컵 초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에버튼 FC와의 데뷔전에서 10:4 대승을 거뒀으나 그 시즌은 18위로 마쳤고, 1959/60 시즌 우승팀 번리 FC에 승점 2점이 부족한 3위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해당 시즌 FA컵에서 크루 알렉산드라에 13-2 대승을 거뒀는데 이는 토트넘 역사상 최다점수차 승리로 남아있다. 데이브 맥키와 존 화이트를 영입한 토트넘은 1960-61 시즌 리그와 FA컵을 모두 우승하며 1897년 아스톤 빌라 이후로 64년 만에 역대 3번째로 더블을 달성했다. 리그에서 아직까지도 잉글랜드 내 최고 기록[13]으로 남아있는 파죽의 개막 11연승을 기록한 토트넘은[14] 2위 셰필드 웬즈데이를 승점 8점차로 여유롭게 따돌리고 압도적인 2번째 1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5] FA컵에서는 레스터 시티를 결승에서 2-0으로 꺾고 3번째로 우승했다.

1부 리그 우승으로 1961-62 시즌 유러피언 컵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토트넘 역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인 지미 그리브스의 맹활약으로 4강에 진출했으나 대회 우승팀이었던 SL 벤피카에게 탈락했다.[16] FA컵 결승에서 번리를 3-1로 꺾고 연속으로 우승하여 유러피언 컵 탈락의 아쉬움을 달랬다. FA컵 우승으로 1962-63년에는 UEFA 컵 위너스컵에 처음 참가했고, 레인저스와 브라티슬라바, OFK 베오그라드를 꺾은 뒤, 로테르담에서 열린 5월 15일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으며 영국 팀 최초로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60-61 시즌 우승 후 리그에서 3위-2위-4위로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1964-65 시즌은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 문제, 그리고 존 화이트가 골프를 치던 중 벼락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터지며 6위에 그쳤고 빌 니콜슨 감독은 팀을 리빌딩할 결심을 했다. 앨런 멀레리, 팻 제닝스, 시릴 노리스, 마이크 잉글랜드, 테리 베너블스, 지미 로버트슨, 필 빌, 조 키니어, 앨런 길질로 팀을 새롭게 꾸렸다. 리빌딩에 성공하며 1966-67 시즌 3위와 함께 FA컵 결승에서 런던 라이벌 첼시 FC를 2-1로 이기고 FA컵 5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1967/68 시즌에서 1969/70 시즌까지 리그는 7위와 6위, 11위 그리고 위너스컵은 2라운드 탈락으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맥키와 존스, 로버트슨, 베너블스는 이 시기에 팀을 떠났다. 스티브 페리맨과 레이 에반스, 존 플렛,그리고 마틴 치버스가 이들의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지미 그리브스는 마틴 피터스와의 트레이드로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1971년에는 랄프 코티스를 영입하며 또다시 팀을 리빌딩했다.

새롭게 리빌딩 된 팀은 1970-71 시즌 리그 3위와 함께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톤 빌라에 2-0 승리를 거두며 리그컵 첫 우승을 거뒀다. 1971-72 시즌은 UEFA컵 4강에서 이탈리아의 강호 AC 밀란을 제압한 뒤 결승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1,2차전 합계 3-2로 첫 번째 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UEFA컵 우승으로 토트넘은 두 개의 유럽대항전에서 우승한 최초의 영국팀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972-73 시즌에는 리그컵 결승에서 노리치 시티를 1-0으로 이기며 2년 만에 우승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한 UEFA컵에서는 4강에서 대회 우승팀 리버풀 FC를 만나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하여 아쉽게 탈락했다. 1973-74 시즌에는 2년 만에 UEFA컵 결승에 올라갔으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상대로 1차전 홈에서 2-2 무승부, 2차전 원정에서 2-0으로 패배해 합계 4-2로 준우승했다. 당시 토트넘의 훌리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UEFA는 6년간 토트넘의 유럽대항전 출전권을 박탈했고, 이는 빌 니콜슨이 스스로 사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17]

2.4. 몰락과 부활을 경험한 포스트 니콜슨 체제 (1974~1987)

1974/75 시즌 도중에 니콜슨 감독이 사임하자, 아스날 출신이던 테리 닐이 감독이 됐다. 1974/75 시즌 간신히 강등을 모면한 뒤 글렌 호들이 데뷔한 1975/76 시즌 9위로 마쳤다. 아스날에서 주로 선수생활을 보냈던 닐은 토트넘에서 엄청난 족적을 남긴 전임자의 그림자와 함께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친정팀인 아스날 FC의 감독으로 떠났다.[18] 1976년 케이스 버킨쇼 코치가 팀 감독을 맡았으나 1976/77 시즌에 최하위인 22위로 27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당했다. 강등과 함께 토트넘의 수호신이었던 팻 제닝스가 라이벌 아스날 FC로 이적하는 아픔도 겪었다. 70년대 초반 컵대회 우승멤버들은 대부분 팀을 떠났다. 충격적인 강등에도 불구하고 구단주는 버킨쇼를 신임했다. 버킨쇼 감독은 구단주의 신임에 보답하며 토트넘은 1977-78 시즌 치열한 승격 경쟁 끝에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과 승점이 같은 상황에서 골득실에서 앞서 3위로 강등 1년 만에 1부 승격에 성공했다.[19] 1978년 여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듀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리카르도 비야를 깜짝 영입했다.[20] 또한 유스에서 마크 팔코, 폴 밀러, 크리스 휴튼, 미키 하자드를 발굴하고 그레이엄 로버츠, 토니 갈빈, 그리고 공격수인 가르스 크룩스와 스티브 아치발드를 영입해 두 시즌을 리빌딩했다.

1980-81 시즌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시티를 재경기 끝에 리카르도 비야의 결승골로 3-2로 이겨 통산 6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 레이 클레멘스가 영입된 1981-82 시즌에도 FA컵 결승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재경기 끝에 1-0으로 승리해 2연속&7번째 FA컵 우승에 성공했다. 해당시즌 리그컵에서도 결승전에 올랐으나 리버풀 FC에 3-1로 패배하며 준우승했고, 8년 만의 유럽대항전인 UEFA컵 위너스 컵에서는 AFC 아약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21]를 꺾으며 8강에 진출했으나 8강에서 FC 바르셀로나에 1차전 홈에서 1-1 무승부, 2차전 원정에서 1-0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1982-83 시즌 게리 마벗을 영입하여 리그에서 4위를 했으나 위너스컵에서 2라운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조기 탈락했다. 1983-84 시즌에는 UEFA컵에서 페예노르트와 바이에른 뮌헨, 오스트리아 빈, 하이두크 스플리트를 꺾고 결승전에서 벨기에의 RSC 안데를레흐트를 만나 두 경기 모두 1-1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겨 통산 두 번째 UEFA컵(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이는 토트넘의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으로 남아있다.[22]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끝으로 버킨쇼 감독은 스스로 팀을 떠났다.

버킨쇼의 후임은 수석코치 피터 슈리브스였다.[23] 전반기에는 1위를 기록하며 우승에 도전했으나 후반기 성적이 급락해 에버튼 FC 리버풀 FC에 밀려 3위로 마쳤다. UEFA컵 진출권을 따냈으나 헤이젤 참사가 터져 잉글랜드 클럽들이 5년간 유럽대항전 출전권 박탈당하는 바람에 없는 일이 되었다. 1986년에는 스티브 페리먼이 19년의 토트넘 선수생활을 마치고 팀을 떠났다. 1985/86 시즌 크리스 워들과 폴 알렌의 영입이 있었으나 10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고 슈리브스는 시즌 막판 경질되었다. 루턴 타운 FC의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플리트가 신임 감독이 됐다.

1986/87 시즌 토트넘은 호들과 아르딜레스, 알렌, 워들, 스티브 호지를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인 미드필더를시도했다. 원톱인 클라이브 알렌은 이 시즌에만 전체 대회를 합쳐 49골을 기록했는데 여전히 클럽 최고 기록이다. 토트넘은 리그와 두 개의 컵대회에서 우승에 도전했으나 무관에 그쳤다. 리그컵에선 준결승에서 나이얼 퀸, 마틴 헤이스가 버티고 있던 숙적 아스날 FC에 패했고, 리그에서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에버튼과 리버풀에 밀려 3위로 마쳤다. 마지막으로 FA컵 결승에서는 코번트리 시티를 상대로 종료 직전 게리 마벗의 뼈아픈 자책골로 인해 3-2로 져 준우승했다. 시즌을 마친 뒤 팀의 간판 스타였던 글렌 호들 AS 모나코로 떠나며 한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2.5. 테리 베너블스 체제 (1987~1992)

1987/88 시즌이 진행중인 1987년 10월에 데이비드 플리트 감독은 개인적인 이유로 사임했다. 과거 토트넘 선수이자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했던 테리 베너블스가 부임했다. 그가 맡았을 때 토트넘은 호들이 팀을 떠난 공백 때문인지 리그에서 고전하며 강등권 근처에 있었다. 베테랑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베너블스는 테리 펜윅과 폴 월시를 영입하며 반전을 시도했으나 13위에 그쳤다. 간판 공격수였던 클라이브 알렌은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988년 3월 지롱댕 보르도로 이적했다.

1988년 여름 국내 최다 이적료인 200만 파운드를 들여 뉴캐슬 유나이티드 폴 개스코인을 영입했다. 또한 맨체스터 시티의 스트라이커 폴 스튜어트를 17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은퇴한 클레멘스의 대체자로 노르웨이 대표팀 골키퍼인 에리크 토르스트베트를 영입하기도 했다. 1988/89 시즌 토트넘은 초반에 강등권을 전전했지만 반등하여 연말에는 9위로 도약한 뒤, 최종적으로는 6위로 마쳤다. 1989년 여름에는 월드컵 득점왕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수 개리 리네커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영입했다. 하지만 크리스 워들은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로 425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리네커와 개스코인이 모인 1989/90 시즌 토트넘은 리그에서 3위로 마쳤다. 1990/91 시즌 토트넘은 시즌 초반 10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했지만 후반기 성적이 떨어지며 10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FA컵은 달랐다. 준결승에서 라이벌 아스날 FC을 개스코인의 30야드 떨어진 지점에서의 환상적인 프리킥골과 리네커의 2골로 3-1로 제압했는데 이는 역대 FA컵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리고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결승전에서 2-1로 꺾어 8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24] 그러나 폴 개스코인은 이 경기에서 치명적인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입어 1991/92 시즌 전체를 날렸다. 개스코인은 SS 라치오의 영입 대상이었고, 그가 무릎 부상에서 회복하자 1992년 여름 550만 파운드에 그를 영입했다.[25]

1991년 6월 앨런 슈가가 토트넘의 신임 회장이 되었고 베너블스 감독은 클럽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리고 피터 슈리브스가 감독으로 재신임을 받아 6년 만에 1군 감독이 됐다. 간판 골잡이 게리 리네커는 1991년 11월, 1991/92 시즌을 끝으로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기 위해 토트넘을 떠날 것을 선언했다. 리네커는 리그 28골을 득점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토트넘의 성적은 영 신통치 않았고 42경기에서 15승7무20패 승점 52점으로 15위에 그쳤다. 지난해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7년 만에 나간 유럽대항전인 UEFA컵 위너스컵에서는 하이두크 스플리트 FC 포르투를 꺾고 8강에 올랐으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합계 1-0으로 밀려 탈락했다.

1992년 여름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슈리브스가 경질된 가운데 베너블스는 프런트 업무를 내려놓고 현장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했으나 1군 팀 코치였던 덕 리버모어와 레이 클레멘스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았다. 베너블스는 슈가 회장과의 갈등 끝에 1993년 해고됐는데 토트넘 팬들의 반발이 거셌고 법정 공방까지 갔다.

2.6. 암흑기

2.6.1. 암흑기였던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초창기 (1992~2004)

  • 토트넘의 암흑기

1992년 앨런 슈가가 회장으로 부임한 이래 연거푸 감독을 교체해가며 테디 셰링엄, 위르겐 클린스만, 다비드 지놀라 같은 거물들을 더 영입했다. 연이어 솔 캠벨같은 유망주들도 등용했으나 우승은 커녕 유럽대항전 진출 경쟁에서도 밀려 6위 안에도 들지 못하며 대부분 중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좋은 편으로 희망고문하다가 곧 추락하며 시즌이 끝날 때에는 10위 언저리에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나마 성과라 할 만한 것은 1999년 워딩턴컵(현재의 EFL컵) 우승 뿐이다. 이 시기 토트넘에 대하여 구너 한준희 해설위원은 많이 투박했다고 평했다.

1992-93 시즌 윙어 대런 앤더튼, 수비수 닐 러독, 공격수 테디 셰링엄이라는 굵직한 보강이 있었다. 셰링엄은 당시 클럽레코드인 210만 파운드에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영입되었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첫 시즌 토트넘은 8위로 마쳤다. 셰링엄은 22골(1골은 노팅엄에서 넣은 골)로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일본으로 떠난 리네커의 공백을 없앴다.

그러나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했던 베너블스가 슈가와의 불화로 떠나며 리버모어&클레멘스의 공동감독 체제는 막을 내렸고 토트넘의 1980년대 초반 스타플레이어였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가 신임 감독이 됐다. 1993-94 시즌 초반에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테디 셰링엄이 부상을 당하자 팀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9경기 연속 무승과, 7연패가 포함된 10경기 연속 무승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토트넘은 강등에 대한 걱정을 해야했다. 다행히 셰링엄이 부상에서 복귀한 뒤 승점을 쌓기 시작하며 최종전을 앞두고 겨우 잔류를 확정지었다. 최종 순위는 15위.

1994-95 시즌 전 토트넘은 1980년대 어빙 숄라 회장 시절 부정선수 영입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았고,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며 60만 파운드의 벌금과 함께 FA컵 출전권 박탈, 리그 12점 승점 감점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자칫 강등 위기에 몰릴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행히 슈가 회장의 항소로 벌금만 더 내고 승점 감점과 FA컵 출전 박탈은 없는 일이 됐다. 징계에도 불구하고 1994 FIFA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3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루마니아 국가대표인 일리에 두미트레스쿠와 게오르게 포페스쿠, 그리고 독일의 간판 스트라이커인 위르겐 클린스만을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아르딜레스 감독은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하며 공격진에 클린스만과 셰링엄, 앤더튼, 밤비, 두미트레스쿠를 세웠다.

1994-95 시즌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개막전에서 토트넘은 웬즈데이에 셰링엄과 앤더튼, 밤비, 클린스만의 골로 4-3으로 이겼다. 그러나 지나친 공격몰빵전술은 수비불안과 실점 증가를 가져왔고 성적도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결국 아르딜레스는 1994년 11월 경질되었다. 후임은 QPR의 감독이었던 게리 프랜시스였다. 부임 후 팀을 안정화시키며 프리미어리그를 7위로 마쳤다.[26] FA컵에서 준결승까지 갔으나 에버튼 FC에 4:1로 패배하며 4년 만의 FA컵 결승전과 UEFA컵 진출이 무산되었다. 위르겐 클린스만은 모든 대회를 합쳐 29골을 득점하며 맹활약했으나 토트넘이 우승 경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옵션을 발동하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다. 클린스만의 이적을 시작으로 두미트레스쿠와 포페스쿠, 밤비까지 팀을 떠났다.

1995년 여름에는 루엘 폭스와 크리스 암스트롱을 영입했고 훗날 토트넘의 주장이 되는 레들리 킹을 스카웃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토트넘 이적에 관심이 있었고 글렌 호들의 팬이었던 데니스 베르캄프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전력이 다소 약화된 토트넘은 1995/96 시즌과 1996/97 시즌 각각 유럽대항전과 다소 거리가 먼 8위와 10위로 마쳤다. 이에 30세가 넘어간 테디 셰링엄은 우승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27] 셰링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뉴캐슬의 공격수였던 레스 퍼디난드를 클럽레코드인 600만 파운드를 들여 데려왔으며, 또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던 다비드 지놀라까지 250만 파운드에 뉴캐슬에서 영입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퍼디난드는 부상으로 초반에 쓰러졌고, 1997년 11월 리버풀에 4-0으로 대패하고 하위권으로 떨어지자 프랜시스는 사임했다. 스위스 리그에서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크리스티안 그로스를 프랜시스의 후임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로스 감독이 온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등권으로 추락해 강등권 탈출이 시즌 목표가 되었다. 1997년 12월 위르겐 클린스만이 임대를 통해 토트넘으로 복귀했다. 클린스만이 후반기 절반의 시즌에만 9골을 득점, 곧바로 클린스만 효과를 보며 토트넘은 승점을 쌓기 시작해 강등권에서 빠져나왔고, 37라운드 윔블던 FC 원정에서 클린스만이 4골을 득점해 6-2 대승을 거두며 잔류를 확정지었다. 최종 순위는 18위 볼튼에 승점 4점이 앞선 14위였다. 클린스만의 임대 후 활약으로 토트넘을 강등 위기에서 구한 것은 EPL에서 손꼽히는 임대의 전설 중 하나로 남아있고 이 때문에 클린스만은 토트넘에서 불과 1년 반만 활약하고도 토트넘 팬들로부터 영웅이자 레전드로 평가받고 있다.

1998-99 시즌 개막 후 3경기에서 1승2패로 저조하게 출발하자 그로스 감독은 임기 1년도 못채우고 경질당했다. 그런데 후임은 전 아스날 감독이었던 조지 그레이엄이었다. 아스날 출신인 점도 있지만 롱볼축구와 수비적인 축구로 악평이 높은[28]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당연히 매우 좋지 않았다. 당장 라이벌 팀인 아스날 FC 벵거볼을 앞세운 공격적이고 매력적인 축구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레이엄은 부임 후 팀 셔우드와 슈테펜 프로인트를 영입했다.

1998-99 시즌 리그는 중위권인 11위로 마쳤으나 토너먼트에 강했던 그레이엄답게 리그컵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1년 FA컵 우승 이후 8년 만의 트로피였다. 리버풀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6강과 8강에서 제압했으며 준결승에서 윔블던 FC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 뒤 결승전에서 퇴장으로 인한 수적 열세에도 레스터 시티 FC를 앨런 니엘센의 후반 45분이 지난 뒤 추가시간이 끝나기 직전 결승골로 1-0으로 꺾었다. 다비드 지놀라는 맨유의 트레블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FA컵에서도 준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2-0으로 졌다. 리그컵 우승으로 토트넘은 1991-92 시즌 이후 8년 만에 유럽대항전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리그컵 우승은 토트넘의 좋은 성적으로 이끄는 터닝포인트가 되지 못했다. 1999-00 시즌 UEFA컵과 리그컵, FA컵 모두 조기 탈락했고 리그 성적도 겨우 10위에 그쳤다. 2000년 여름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 키예프의 챔피언스리그 돌풍을 이끌었던 세르게이 레브로프를 클럽레코드였던 1,1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첫시즌에만 리그 9골을 넣은 뒤 두 번째 시즌에 단 1골만 그치고 임대를 전전하며 토트넘 역사상 최악의 영입으로 전락했다.

2000-01 시즌 도중에 지속적으로 토트넘 팬들로부터 공적이 되었던 슈가 회장은 클럽의 지분을 팔 의사를 보이기 시작했고, 조 루이스와 다니엘 레비로 구성된 ENIC 그룹으로의 매각과 함께 2001년 2월 클럽 회장에서 사임했다.[29] 그리고 레비가 신임 회장이 되었다. 레비가 부임한지 한 달이 지난 3월 많은 돈을 썼음에도 리그에서 중위권에서 저조한 성적을 내고 있던 조지 그레이엄을 전격 경질하고 사우스햄튼 FC의 감독으로 있던 토트넘의 레전드 글렌 호들을 신임 감독으로 데려왔다. 아스날과의 FA컵 준결승이 데뷔전이었는데 2-1로 졌다.

2001년 여름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던 주장 솔 캠벨 보스만 룰을 통해 이적료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라이벌 아스날로 이적한 일이었다. 이 일로 캠벨은 토트넘 팬들에게 "유다"라는 멸칭과 함께 공적이 되었다. 한편 테디 셰링엄이 3년 만에 토트넘으로 복귀했고 거스 포옛 크리스티안 치게를 영입했다.

2001-02 시즌 첼시를 준결승 2차전에서 5-1로 꺾고 2년 만에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승격팀이었던 블랙번 로버스에 2-1로 져 준우승했다. 리그에서는 꾸준히 6-7위권을 지키며 유럽대항전 진출에 도전했으나 9위로 마쳤다. 여담으로 시즌 초반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3골을 먼저 넣으며 앞서다가 3-5로 대역전패를 당하기도 했다.

셰링엄의 토트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2-03 시즌 로비 킨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700만 파운드에 영입하고 자유계약으로 리버풀의 제이미 레드냅을 데려왔다. 3승1무의 호성적으로 8월을 마치며 호들은 월간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3년 2월까지도 TOP 6를 유지하며 UEFA컵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러나 62실점이나 허용한 허약한 수비 때문에 10위로 떨어지며 호들 감독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일부 선수들은 호들의 리더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2003-04 시즌에는 유망주 프레데릭 카누테 엘데르 포스티가를 영입했다. 그러나 초반 6경기에서 승점 4점으로 강등권에 머물자 호들은 전격 경질되었고, 단장이었던 데이비드 플리트가 감독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이끌었다. 이때 3강 제외하고 유례없는 혼전이었기 때문에 토트넘 역시 롤러코스터를 탔다. 플리트 부임 후 잠시 좋은 흐름이 이어지다가 2003년 연말에 4연패에 빠지며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2004년 연초 로비 킨이 연일 득점을 터뜨리는 맹활약에 힘입어 6경기 중 5경기에서 승리해 2월에는 챔피언스리그 티켓이 주어지는 4위와 승점 5점차까지 좁히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내리막길을 걸으며 1997-98 시즌 이후로 최악인 14위로 마쳤는데 해당 시즌 라이벌 아스날 FC은 무패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2004년 4월 25일 홈에서 열린 북런던 더비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라이벌의 우승을 확정지어주고 말았다. 그나마 겨울이적시장에서 데려온 저메인 데포가 후반기 7골을 기록하며 로비 킨과 함께 팀의 희망이 된건 위안거리. 포스티가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단 1골만 넣으며 최악의 실패작이 됐다.

2.7. 유럽 대항전 단골로 도약한 안정기 (2004~2014)

2004년 여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자크 상티니를 신임 감독으로, 네덜란드인 마틴 욜을 수석코치로, 프랑크 아르네센을 스포팅 디렉터로 선임하며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또한 폴 로빈슨, 마이클 캐릭, 페드로 멘데스, 누레딘 나이베트, 에릭 에드만 등이 영입되었고 거스 포옛과 크리스티안 치게, 대런 앤더튼, 엘데르 포스티가, 마우리시오 타리코, 게리 도허티, 스티븐 카 등이 팀을 떠나며 선수단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막 후 1과 0이 많은 이진법 축구의 지루한 스코어가 이어지던 2004년 11월 상티니 감독은 개인 사정(이면에는 아르네센과의 불화)을 이유로 리그 11경기만 치른 채 돌연 사임했다.[30] 상티니의 후임은 수석코치였던 마틴 욜이었다. 부임 후 첫 경기였던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4-5 패배를 당했지만 곧 리그 5연승과 함께 UEFA컵 진출권 경쟁에 합류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마이클 도슨이 합류하고 제이미 레드냅과 케이시 켈러는 팀을 떠났다. 지난 10여년과는 다른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쉽게도 최종전 끝에 9위로 마감하지만 컵대회에서의 선전과 함께 지난 10여년과는 다른 수비력과 경기력으로 토트넘 팬들에게 기대감을 주기엔 충분했다.[31]

2005년 여름 아르네센 단장은 첼시로 떠나고 다미앙 코몰리가 신임 단장이 됐다. 지난 시즌에 이어 대대적인 선수 영입과 방출이 있었다. 프레데릭 카누테(세비야)와 에릭 에드만(스타드 렌), 션 데이비스, 노에 파마로, 페드로 멘데스(이상 포츠머스)가 떠난 대신 수많은 폭풍영입들이 있었다. 톰 허들스톤(더비 카운티), 폴 스톨테리(베르더 브레멘), 아론 레넌(리즈 유나이티드), 티무 타이니오(오세르), 웨인 라우틀리지(크리스탈 팰리스), 호삼 미도(AS 로마 임대[32])를 영입한데 이어 8월 3일 네덜란드 국가대표 수비형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를 인테르에서 자유영입했다. 그리고 여름이적시장 마지막 날에는 5명의 영입이 이루어졌는데 이영표(PSV)를 포함 저메인 제나스(뉴캐슬 유나이티드), 그레고리 라시아크(더비 카운티), 호삼 갈리(페예노르트), 대니 머피(찰튼)이 대거 팀에 합류했다.

2005-06 시즌 토트넘은 한번도 6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후반기에는 라이벌 아스날을 따돌리고 꾸준히 4위를 유지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도전했다. 리그컵 준결승과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많은 일정을 소화한 아스날과는 다르게 다른 두 컵대회에서 하위리그 팀에게 첫 경기에서 탈락하며 리그만 집중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었다. 2006년 4월 30일 마지막 홈경기였던 볼튼전에서 1-0으로 이겼을 때 두 경기 덜 치른 5위 아스날에 승점 7점차로 앞선 4위로 챔피언스리그를 눈앞에 뒀다. 하지만 아스날은 두 경기를 다 이기며 최종전에서 4위 여부를 가리게 됐는데 최종전 웨스트햄전을 앞두고 식중독 사건을 겪으며 주전 선수들이 컨디션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최종전에서 웨스트햄에 2-1로 패하고 아스날이 하이버리 마지막 경기에서 앙리의 해트트릭으로 위건에 4-2 역전승을 거두며 다 잡았던 4위와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놓치게 됐다. 하지만 이것도 1989-90 시즌 이후 16년 만에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고 헤이젤 참사 이후 컵대회 성적이 아닌 리그 순위로만 유럽대항전에 진출한 첫 번째 시즌이었다. 리그에서 38실점만 내주며 1971년 이후 35년 만의 최소실점이기도 했다.

2006년 여름에는 유럽대항전을 병행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많은 영입이 있었다. 베누아 아수에코토, 디디에 조코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스테드 말브랑크, 파스칼 심봉다의 영입이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캐릭이 맨유로 이적하며 전력의 큰 누수를 겪게 됐다. 2006-07 시즌 전반기는 주전들의 부상과 새로운 선수들의 적응 문제로 중위권에서 머물렀다. 그래도 그 와중에 첼시 FC에 2-1 역전승으로 16년 만에 승리를 거두는 쾌거도 있었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로비 킨의 강력한 투톱이 자리잡은 마지막 12경기에서 1패만 기록하며 2년 연속 5위로 마쳤다. 그러나 리그 20경기 연속 실점을 포함, 54실점이나 허용한 수비력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33] 그래도 UEFA컵 8강[34], 리그컵 4강[35], FA컵 8강[36]에 진출하며 지난해 40경기에서 21경기나 늘어난 총 61경기[37]라는 많은 경기를 치렀음에도 리그 순위가 추락하지 않고 5위를 유지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38] [39]

2007-08 시즌 4,000만 파운드 가량의 이적료를 쏟아부으며 가레스 베일 대런 벤트, 유네 카불 등을 영입했고 올해는 다르다를 외치며 빅4 체제를 깰 대항마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즌 초반부터 수많은 실점을 허용하며 10경기 1승으로 19년 만의 최악의 출발으로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시즌 전부터 구단주와 마찰이 있던 욜 감독은 결국 성적부진으로 경질당했다.[40] [41]

마틴 욜 감독의 후임은 프리메라 리가에서 세비야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후안데 라모스였다.[42] 라모스 감독은 2007-08 시즌 중간에 부임했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팀을 재정비할 수 없는 상태에서 11위와 마무리했는데, 이 때 아스날과 첼시를 꺾고 칼링컵을 들어 올리며 서포터들의 지지를 얻어냈다.[43] 그 성공을 등에 업고 2008-09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루카 모드리치 데이비드 벤틀리, 에우렐류 고메스 등을 사는 등 팀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이영표도 이 시기에 팀을 떠났다. 하지만 로비 킨과 베르바토프, 데포(2008년 1월 포츠머스 이적)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빈자리에 벤트와 파블류첸코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고, 모드리치는 힘든 적응기를 겪으며 리빌딩은 실패했고, 개막 후 8경기에서 구단 역사상 최악인 2무6패로 최하위로 떨어졌다. 결국 라모스는 부임한지 정확히 1년만인 2008년 10월 25일 결국 경질당했다. 또한 코놀리 단장도 감독과 함께 경질되었다.

라모스의 후임으로는 포츠머스 FC 해리 레드냅 감독을 선임했다. 유럽식 단장 시스템에서 감독이 코칭과 선수 이적을 담당하는 전통적인 영국식 매니저 시스템으로 회귀했다. 레드냅은 부임하자마자 4경기에서 아스날, 리버풀, 맨시티를 상대로 3승1무를 거두며 빠르게 회복시켰고 모드리치가 적응에 성공하고 수비가 크게 안정되면서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리버풀과의 최종전에서 3-1로 져서 아깝게 7위 풀럼에 승점 2점차로 유로파리그 진출이 무산되었다. 이는 2021년 기준으로 마지막으로 유럽대항전에 나가지 못한 시즌이 됐다. 칼링컵에서 2년 연속 결승에 올라 2연패에 도전했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어 0-0 무승부 이후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졌다.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진출 등, 4시즌 동안 빅 4를 위협할 수준의 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 저메인 데포[44],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스콧 파커 등 주요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가레스 베일의 포지션을 윙어로 변경하며 기량을 꽃피우게 하기도 했다. 강호로 떠오른 맨체스터 시티, 중상위권 단골 아스톤 빌라, 클롭 이전까지의 암흑기의 스타트를 끊은 리버풀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즌 4위로 마감하면서 빅4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며,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이루어냈다. 2010-11시즌엔 49년 만에 진출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디펜딩챔피언인 인터 밀란을 꺾고 조별리그 1위, AC 밀란을 꺾고 챔스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2011-12 시즌 전반기 2위 맨유와 승점 동률이 리그 3위로 순항하던 레드냅은 파비오 카펠로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설이 나오면서 회장과 마찰을 빚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FA컵 준결승에서 첼시에 대패를 당하고 잠시 5위까지 추락하다가 한때 승점 12점차로 뒤져있던 아스날에 승점 1점차로 간신히 4위를 했다. 그러나 6위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좌절되며 사임했다.

해리 레드냅 감독의 후임으로 아카데미카, 포르투, 첼시에서 감독직을 맡은 바 있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됐다. 공격적이고 라인을 끌어올리는 전술을 선호하는 빌라스보아스와 베일과 레넌, 워커, 데포 등 빠른 선수들이 즐비했던 토트넘은 궁합이 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임기 1년 차에는 가레스 베일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때문인지 스트라이커들이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차엔 베일을 판매한 금액으로 7명을 데려왔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에릭센을 제외한 6명이 베일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커녕, 오히려 팀의 구멍이 됐다. 심지어 지난 시즌 주전 센터백이었던 베르통언의 부상으로 도슨과 키리케슈(+카불)가 센터백 듀오를 하는 일이 꽤 잦았는데, 올라간 라인 때문에 뒷공간이 계속해서 노출하면서, 리버풀이나 맨시티 같은 팀들에게 대패를 연거푸 당하고 시즌 중 결국 경질되었다. 래드넵이 로테이션 문제로 욕을 먹었다면, 빌라스보아스는 부족한 스쿼드에 지나친 자기 전술 고집으로 욕을 먹고 떠나게 되었다.

감독대행으로는 수석 코치였던 팀 셔우드가 선임됐는데, 이후 관뚜껑에 들어가 있던 아데바요르가 살아나는 신기함을 보였다.[45] 하지만, 선수 기용 면에서 선수들과 불화가 있었으며, 빅 4에게 약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볼란치를 두지 않는 파격적인 전술을 감행했는데, 강팀을 상대로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라이트백 카일 워커를 중미로 활용하는 등의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그리 효과적이진 못했다. 다만 해리 케인, 나빌 벤탈렙 등 재능 있는 유소년 선수들을 1군에 데뷔시킨 점은 칭찬받는다.

전체적으로 스피드에 있어서만큼은 프리미어 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팀이고 그러한 스피드를 잘 살리는 전술을 구사했었다. 대표적으로 베일 - 데포 - 레넌의 빠른 삼각편대의 역습은 상대팀을 항상 긴장하게 하는 요소였다. 이러한 스타일은 가장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축구를 한다는 평을 받았다. 때문에 토트넘의 경기는 화끈한 공격력과 부족한 수비력이 어우러져, 이기든 지든 다른 팀들의 경기보다는 재밌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13-14 시즌 가레스 베일의 이적 이후 이를 살리지 못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8. 중흥기

2.8.1.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체제 (2014~2019)

  • 우승컵을 들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지만 경영진들의 잘못된 경영으로 인하여 진정한 빅클럽으로의 부상에 실패해버린 비운의 시기.[46]

시즌이 끝나고 구단은 그를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으로 사우스햄튼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를 선임했다. 포체티노는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고 끈끈한 수비 조직력과 스쿼드 장악력을 뽐내왔다. 소위 "베일 머니"를 값비싼 먹튀 영입에 모조리 써버렸으나, '홋스퍼 웨이'라는 최신 훈련시설을 막 마련한 토트넘 입장에선 한정된 자원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포체티노가 상당히 매력적인 카드였고, 막장으로 유명한 토트넘의 수비력을 한 단계 높여주리라 기대를 받았다.[47]

2014-15 시즌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는 부임 후 첫 여름 이적시장에 영입한 선수 전원이 수비와 관련있을 정도로 수비에 신경썼지만, 리그 내 클린시트를 9번 밖에 달성하지 못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데바요르와 솔다도로 대표할 수 있는 부족한 공격진은 그대로 였기에 리그 53실점, 득실차 +5라는 암담한 결과가 되었다. 그나마 케인의 활약으로 리그 5위의 무난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다음 시즌인 2015-16 시즌 팀 분위기를 해치는 먹튀들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한 주축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초강수를 뒀다.[48] 또한 사우샘프턴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준 수비수 토비 알더웨이럴트를 영입하여 같은 국적의 얀 베르통언과 리그 최고의 수비진을 형성하였다. 강도높은 훈련으로 유명한 그는 수비수들의 공격 가담과 공격수들의 전방압박을 강조하여 높은 활동량을 바탕으로한 전술을 시도하였고, 다행히 잘 어우러져서 리그 최소 실점(35골)과 최고의 골 득실(+34)을 이루는 쾌거를 낳았다. 선수 운영 측면에서 델레 알리를 불과 5백만 파운드에 영입해 잉글랜드의 차세대 스타로 키워놨고,[49] 유망주 센터백이었던 에릭 다이어를 4백만 파운드에 영입 후 포지션을 변경하여 리그 베스트급 활약을 펼쳐 토트넘의 반등을 이끌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손흥민이 영입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토트넘은 시즌 막판까지 2위를 달리며 레스터 시티 FC와 우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젊은 스쿼드로 베테랑이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였는지 시즌 내내 많은 찬사를 받았던 젊은 선수들[50]이 우승 실패가 확정되자 멘탈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줬다. 옐로카드 9개를 받으면서 EPL 신기록을 세운 36라운드 첼시전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결국 마지막 세 경기 동안 1승이라도 거두면 2위 확정인 상황에서 1무 2패를 거두며 라이벌 아스널에게 2위를 내주면서 아쉽게 3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발전 가능성이 있으므로 여러모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시즌이 되었다. 리그 3위는 토트넘의 프리미어리그 최고 순위이기도 하다.

2016-17 시즌은 전 시즌의 활약으로 기대를 한껏 받았지만 시즌 초 토비와 케인의 부상으로 잠시 주춤하였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본인이 잘 하는 4-2-3-1 전술은 물론 3백이 유행하던 당시 트렌드와 다이아몬드 4-4-2 등 매 경기 다양한 전술을 시도하면서 팀을 재정비 하였고, 전술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발전한 부분은 수비로 리그 19경기 클린시트를 달성하였으며 1경기당 최다실점은 2점에 불과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공격진 역시 한층 발전하여 홈경기 16경기 무패(14승 2무)라는 뛰어난 기록을 달성하였고, 리그 후반기 9연승을 하기도 하였다. 팀이 한결 정돈되면서 리그 2위로 마무리하며 팀이 기록한 최고 순위를 다시 경신하였다. 강팀으로 거듭나는 시즌이었지만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케인 백업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비주전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지 못하여 안정적이지 못한 문제점도 공존하였다.

2017-18 시즌은 신구장 건립으로 인해 웸블리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51] 사용하였고, 이는 원정경기보다 홈경기에서 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토트넘에게 악재가 되었다. 이후 웸블리에도 어느정도 적응하면서 후반기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3위로 마무리하였다.

2018-19 시즌은 구장 건립으로 인한 재정 압박과 주축 선수들의 재계약 시기가 몰리면서 선수 영입을 한명도 하지 못했고 에릭센에 대한 이적설이 부각되며 어수선하게 시작하였다. 포체티노의 탓은 아니지만 토트넘이 파죽지세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덩달아 선수들에 대한 빅클럽들의 관심 또한 올라갔으며 이로 인한 주급 논란에 휩쌓이기도 하였다. 토트넘은 타 팀들보다 주급 체계가 적으면서도 예외사항을 두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회장인 다니엘 레비가 THST[52]와의 미팅에서 밝힌 바론, 토트넘은 EPL내에서 보너스를 가장 많이 지급하는 구단이라고 한다. # 기본 주급은 적지만 선수의 성적으로 급료를 더 받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 선수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클럽을 떠나려 하진 않는다고 밝히면서 팀 주급에 대한 논의는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다. 2018년 6월 8일, 팀 내 최고의 스타인 해리 케인이 보너스 포함 주급 30만 파운드[53]라는 거액으로 2024년 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이는 프리미어 리그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고액 주급으로, 프랜차이즈 스타를 지키겠다는 다니엘 레비 회장의 굳은 의지가 보인다. 또한 토비 알데르베이럴트와의 재계약에도 성공하며 달라진 주급 체계를 예고하였다. 시즌 초반 고전하였으나 중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상승세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주축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겨울 이적시장에도 영입을 하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가라앉고 만다. 다행인지 첼시를 제외한 경쟁팀들도 모두 후반기에 부진하였기에 리그는 챔스 진출권에 안착하였다. 또한 구단은 2007년부터 준비해왔던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이라는 새로운 홈구장이 마침내 1년만에 완공되어서 4월 3일 크리스탈 팰리스전 경기에 치룬다고 발표하였다. 챔스 준결승전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따내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로 결승까지 진출하였으나, 아쉽게도 우승을 하지 못하였다. 팀은 리그 4위, 구단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이라는 엄청난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경기력은 내려가면서 그동안 쌓아온 힘으로 근근히 버티는 모양새가 되었다.

2.9. 과도기 (2019~)

빅클럽으로의 도약과 중위권 이하로의 후퇴 사이의 갈림길

2.9.1.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체제 말기 (2019)

2019-20 시즌에는 전 시즌에서 선수보강이 없었던 것을 메꾸려는 듯, 다니엘 레비 회장은 프리시즌에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완공을 시작으로 새로운 토트넘 리빌딩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포체티노에게 지원을 약속하면서 은돔벨레나 로셀소등 감독이 원하던 선수들을 대부분[54]영입하면서 의욕을 뽐내었다. 하지만 필요한 포지션들을 영입을 안하거나 제대로 방출을 못한 채로 시즌을 시작해서 주축 선수들의 기량하락과 영입한 선수들이 계속된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하였고, 포체티노 감독 역시 챔스 결승 패배 이후로 우승에 대한 번아웃 증후군을 느끼게 되면서 전술적으로 타파하지도 못하여 지난 시즌들의 성과들이 무색하게도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초 12라운드에서는 리그 14위까지 추락하였고, 결국 시즌 도중에 포체티노는 감독 자리에서 경질되었다.[55]

포체티노와의 동행이 마무리 된 이후 그를 돌아보면, 토트넘이 한층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나 부족한 점 역시 존재했다. 포체티노는 트렌디한 전술을 활용하면서 유연하게 적용하였지만, 탑 감독이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하였다.[56][57] 뛰어난 활약에 비해 우승컵이 없는 것도 발목을 잡는다. 최고 성적이 2016-17 시즌 프리미어리그 2위,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등으로, 부임기간 동안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떠올랐으나 우승컵을 따내지는 못했다.

토트넘은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려 본 적이 클럽 역사상 한번도 없으며, 유로파 및 1부 리그 또한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지 40년이 넘어가는 수준이다. 심지어 가장 최근 우승 컵을 들어올린 기록이 무려 13년 전 칼링컵일 정도로 실적이 다른 EPL 라이벌 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레스터시티만 해도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BIG 6로 불리는 상위권 빅클럽들 중에서 "유일하게" 프리미어리그 우승 기록이 없는 클럽이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클럽은 있으나 당장 21세기 기준 21년 동안 들어올린 트로피가 토트넘 핫스퍼는 딱 한개다. 타 BIG 6 클럽 들은 같은 기간 동안 14개~23개에 육박하는 트로피들을 들어올렸다.

2.9.2. 주제 무리뉴 체제 (2019~2021)

  • 리그컵 결승에 진출하면서 우승컵을 드는 줄 알았지만 경질으로 인해 우승을 놓쳐버린 안타까운 시기

2019년 11월 19일에 #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을 전격적으로 경질한 이후에 바로 다음날 11월 20일에 주제 무리뉴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우승 청부사라 불리며 상당한 우승경력을 지닌 무리뉴 감독이 새롭게 취임하면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를 모았다. 다니엘 레비 회장 역시 무리뉴의 엄청난 팬이어서, 그동안 계속 무리뉴를 추척하다가 실패하였지만, 이번 시즌 계기로 무리뉴 감독을 선임하게 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말하였고 2019년 12월에는 다니엘 레비 회장이 무리뉴 감독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4위 챔스권과 우승 트로피를 원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즌 중간 부임한 무리뉴 감독의 전술을 그대로 입히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고, 선수들도 계속된 부상에 시달리고 토트넘에 매우 필요한 포지션들을 영입하지 못한 상태여서 특히, 손흥민과 케인이 없었을 때 안 좋은 성적 계속 기록하였다. 그나마 토트넘은 코로나 유행 시작으로 인한 오랫동안 공백 기간 끝에 주전 선수들이 모두 돌아왔지만, 강등권 팀, 하위권 팀에게 무승부나 패배를 당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챔스 진출이 좌절된 6위로 마무리 되었다.[58] 한편, 다니엘 레비는 토트넘 공식 서포터즈인 THST와의 인터뷰에서 돈을 투자하는 것이 우승과 연관이 없다는 발언, 클럽 월드컵에 토트넘도 참가하고 싶다는 발언, 토트넘은 이미 우승 경쟁권에 속했다는 발언, 토트넘은 스타 선수들을 키운다는 발언을 인터뷰로 밝히면서 여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토트넘의 리빌딩에 대해 쉽게 보고 있었으며 무리뉴에 대해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20-21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 주전급 선수들을 4명이나 영입하여 19-20 시즌에 문제로 삼았던 토트넘의 얇았던 포지션들을 보강하면서도 작년보다 지출이 덜 한 알짜배기 영입을 하였다. 하지만, 수비수 밀란 슈크리니아르를 데려오려고 했다가 실패하였기에 수비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하였다. 시즌 초반에 손흥민과 케인의 활약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1위에 오르는 등 무리뉴 2년차 징크스와 함께 기대를 모았었다. 하지만 곧이어 뻔한 구식 전술로만 일관하는 무리뉴 감독의 축구 스타일와 호이비에르를 제외한 토트넘 미드필더들의 심각한 빌드업, 수비진에서 일어나는 잦은 실책과 강등권 수준 이하의 수비력, 선수들과 감독간의 불화, 심각한 선수단 내부 분열 문제로 패배를 거듭하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59]

유일하게 리그컵만 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 가능성이 있었다.[60] 하지만 부진한 성적[61]으로 유로파 탈락 및 리그 5연패 시기에 일찍 감독 교체 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기에, 에버튼과의 2:2 무승부로 인내심을 잃은 보드진은 결국 무리뉴 감독을 4월 19일 경질하였다. 남은 시즌은 전 멤버였고 코치로 활동중이던 라이언 메이슨이 감독 대행을 맡는다. 그러나 팬들과 전문가들, 선수들조차 애매한 시기에 갑작스러운 무리뉴 경질 결정으로 놀라워 하는 반응으로 대부분 경질할 시기가 이미 지나가서 시즌 끝나고 경질했어야 하는 반응들이었다.토트넘이 5월이 되고나서 감독 후보 리스트들을 작성했고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는게 밝혀지면서, 사실상 유력한 토트넘 다음 감독 후보를 생각을 안한 채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우드워드가 무리뉴를 갑자기 짜르고 올레 군나르 솔샤르를 임시 감독으로 선임하여 연승을 거두는 사례를 따라서 다니엘 레비도 라이언 메이슨을 임시 감독으로 내세워 성적을 상승시키는 효과에 대한 기대로 도박한 것으로 보여졌다.

2.9.3. 라이언 메이슨 감독 대행 체제 (2021)

라이언 메이슨은 경기 준비 시간이 단 2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리뉴의 스타일을 탈피하고 포체티노식 운영으로 돌아오면서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다음 경기였던 맨시티와의 카라바오컵 결승전은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하며 또 우승 문턱에서 멈추고 만다. 그래도 나름 아직 경험이 없는 감독이어서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리즈 경기, 아스톤 빌라 경기처럼 챔스권과 유로파권 결정하는 중요한 경기들에서 무리뉴 체재에서 나름 활약했던 로든, 모우라, 은돔벨레를 주전으로 쓰지 않으면서 다이어, 윙크스 같이 매우 부진하는 선수들을 계속 기용하는 잘못된 선발 선택 및 기용과 느린 교체와 시소코나 라멜라 같이 부진한 선수들을 교체로 사용한 잘못된 교체 선택으로 패배하게 되면서 유럽대항전 대회를 못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다니엘 레비 회장은 독단적인 권련 운영 및 결정, 포체티노 경질로 중요한 리빌딩 시기에 추락하고 있는 감독인 무리뉴를 믿고 선임한 점, 실패한 영입을 계속 하고 있는 토트넘 보드진, 스티브 히첸 같은 영입 스카우터에 대한 계속된 신뢰, 계속되고 있는 방출 실패와 방출해야 할 선수들에 대해 재계약을 하면서 생긴 선수단의 내부 분열 문제들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가 결정적으로 토트넘이 슈퍼리그에 참가 하는 것이 밝혀지면서, 슈퍼 리그에 대해 매우 반대적이었던 현지팬들의 레비에 대한 민심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이에 다니엘 레비 회장은 공식 홈페이지에 £250M 이상의 돈을 선수 영입에 투입했지만 성적이 안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유로운 흐름, 공격, 그리고 재미로 축구하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새로운 감독을 원하고 팬들을 위해 클럽 자문 위원회를 설립하여 팬대표가 최초의 완전한 투표권을 가진 보드진의 비상임이사로 매년 임명될거라고 발표하면서 관중석에서 많은 팬들의 자리를 그리워했고 다시 유럽 대항전 자리를 확보하기 바란다고 밝힌다면서 팬들의 민심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다니엘 레비의 서명 직후에 해리 케인이 팀에 떠나고 싶다는 언론들의 소식과 다니엘 레비 회장과 토트넘 보드진들의 리빌딩 행보에 크게 비판하고 맨시티에 이적하고 싶다는 암시를 보낸 인터뷰로 인하여 챔피언스 리그 결승 이후로 리빌딩 할 시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들과 운영으로 인하여 2~3년간 계속 안좋은 성적으로 팀이 위기에 맞이하였고 팀에 충성하던 케인의 마음을 바뀌게 만들어버리게 만들었다면서 레비와 ENIC, 토트넘 보드진들은 민심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더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 경기 레스터전에도 메이슨 감독이 윙크스와 산체스를 주전으로 내세온 여전히 잘못된 선발 기용으로 후반전 초반까지 2대0으로 유럽대항전 대회를 못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아주 다행히 케인, 손흥민, 베일이 대활약을 하게 되면서 레스터전을 힘들게 승리로 거두게 되면서 순위는 7위가 되었고 21-22 시즌부터 시작하는 유로파 하위리그인 유로파 컨퍼런스리그에 간신히 나가게 되면서 사실상 11년만에 6위 밑으로 내려가서 유로파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를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다니엘 레비의 새로운 홈 경기 건설을 통해서 2년 동안 준비해왔던 토트넘 프로젝트가 대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9.4. 누누 산투 체제 (2021)

  • 무리뉴 하위호환이라는 우려는 틀리지 않았다. 최악의 위기

토트넘은 20/21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감독을 찾지 못하였다. 그나마 텐하흐, 포터, 마르티네스 등등으로 감독 후보가 알려졌지만, 6월에 사실 몇 주 동안 포체티노를 목표로 하면서 재선임하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파리 생제르맹에서 포체티노 NFS 선언하게 되면서 결국 몇 주 동안 포체티노를 목표로 하는 것이 시간 낭비가 된 채 허무하게 끝났다. 포체티노 재선임이 무산된 이후로 콘테에 접근하였지만, 구단 예산을 어떻게든 아끼려 팀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를 대며 짜게 제안한 이적 예산과 더불어 당장 우승전력감을 원하는 콘테한테 제대로 리빌딩 플랜을 가져오지 못한점, 레비 특유의 협상할때의 습관때문에 의구심을 품은 콘테는 결국 협상 중단되었고 팀의 위상에 창피함을 남겨주었다. 결국 계속된 비판으로 다니엘 레비는 파비오 파라티치을 선임하였다. 이후 파라타치의 추천으로 폰세카를 선임하려고 했지만, 세금 관련 이슈로 취소시키고 가투소와 협상하였다. 하지만, 가투소 역시 논란이 있었던 발언들 때문에 팬들의 반발로 결국 가투소 또한 선임 취소하였다.

이후, 파라타치는 누누를 추전하려고 했지만,[62]레비는 초반에 누누를 선임한다는 것이 무리뉴와의 비교, 70일 동안 기나긴 협상 끝에 안 좋은 결과로 팬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파라티치가 누누가 울브스 처럼 3백 만 쓰는 것이 아닌, 발렌시아 시절에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다고 레비에게 영상을 보여주면서 누누가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면서 선임하도록 설득시켰다. 결국 한국 시간 7월 1일에 누누 감독이 선임되었다.

누누 감독은 리그 초반 3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순항하나 했지만, 3연승 중에 개막전 맨시티와의 경기를 제외한다면 심각한 경기력 속에서 어거지로 승리한 것이였고 결국 4R부터 누누의 심각한 전술이 드러나며 6R까지 모두 3실점을 내주며 3연패했다. 7R에서는 그나마 나아진 모습을 보이며 3연패를 간신히 끊었다. 8R 뉴캐슬전에서도 승리했으나, 토트넘은 TOP 10안에 있는 팀 중에 유일하게 득실차가 마이너스이며 누누 감독은 교체카드 3장을 전혀 쓰지 않은 점, 매우 단조로운 전술 등으로 리그 5위임에도 계속 비판받고 있다. 누누 감독은 뉴캐슬전에서 교체카드 3장을 쓰지 않은게 옳은 결정이라고 밝혔고 이후 뉴캐슬전에 풀타임을 뛰었던 선수들을 제외시키고 교체 명단에 있던 선수들 + 유스 스쿼드로 피테서 원정을 갔지만, 누누는 피테세전에서 고질적인 전술 문제와 느린 공격 전개를 보여주면서 심각한 경기력으로 피테서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피테서 경기 이후, 윙크스는 누누의 뉴캐슬전에 교체카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폴타임 뛴 선수들을 피테세 원정에서 제외시킨 결정에 대해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나 자신감에 영향을 준다면서 누누의 그런 결정에 의문이 들었다고 밝혔다. 결국 9R 웨스트햄전에서도 후반전 슈팅 0개로 패배하게 되면서 사실상 런던 더비에 4연패를 하게 되었다.

11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누누 감독은 맨유의 올레 군나르 솔샤르 감독과 함께 단연 경질 순위 1순위 감독이다. 누누의 무전술, 너무 늦은 교체, 이상한 선수 활용의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패색이 짙은 경기에서도 활발하게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며 독려하기는커녕, 하프라인에서 그저 팔짱만 끼고 경기를 지켜보기만 한다. 특히 토트넘이 9라운드에서 4패를 기록하는 것은 14 - 15시즌 이후로 7년만에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누누 같은 경우에는 14 - 15 시즌보다 더 훨씬 좋은 기존 스쿼드에서 영입 보강을 잘했고 프리 시즌도 치루면서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감독을 맡았지만 리그 성적이 최악이라는 것이다.[63]그러나 토트넘의 더 큰 문제는, 누누를 경질하더라도 마땅히 데려올 만한 감독 매물이 없다는 것이다. 젠나로 가투소는 팬들의 거센 반발에 무산된 것이고, 가장 뛰어난 감독 매물인 안토니오 콘테는 이미 토트넘의 플랜에 대한 의심으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파울루 폰세카는 협상이 거의 완료되었다가 토트넘 측에서 폰세카 딜을 중단해버린 것이라 다시 오려고 할지도 의문이다.

결국 10월의 마지막 경기까지 누누 감독은 호러쇼를 보였고, 급기야 선수 교체를 할 때마다 홈 관중들이 감독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믿을 수 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운영진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감독 교체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재 누누 체제는 반 시즌도 되지 않아 끝나게 될 것이 유력하다.

결국 11월 1일, 누누 산투는 부임 4개월 만에 감독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토트넘 보드진은 콘테의 선임을 최우선으로 한 뒤 협상을 진전시켰고, 파브리지오 로마노의 Here we go까지 나오면서 안토니오 콘테의 토트넘 부임이 매우 유력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2.9.5. 안토니오 콘테 체제 (2021~2023)

  • 3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진출 성공, 그러나 그 다음 시즌의 불협화음

한국 시간 기준 2021년 11월 2일, 안토니오 콘테가 토트넘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부임 이후 NŠ 무라와의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G조 5차전에서 2:1로 패배하고,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스타드 렌전 몰수패를 당하며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에서 부임 이후 9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토트넘 역대 감독 중 부임 후 리그 최장 무패 기록을 경신하였으며, 이는 1월 23일 첼시에게 2-0으로 패배하며 마감되었다.

카라바오컵은 4강전에서 첼시에게 합산 스코어 0-3으로 완패하며 4강에 머물렀다.

이후 성공적으로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은 겨울 이적시장 영입생인 로드리고 벤탕쿠르 데얀 쿨루셉스키, 부활한 케인, 살라와 공동득점왕을 차지하게 되는 손흥민 등의 맹활약으로 토트넘은 다시 4위로 올라서며 3년만에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시즌 중도에 부임한 콘테가 이끄는 토트넘은 득점, 실점, 득실차를 모두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려 4위 경쟁팀이던 맨유와 아스날에게서도 우위를 점했다.

22-23 시즌 시작 전부터 구단주 조 루이스가 150m 파운드를 토트넘에 투자한다는 소식과 함께 구체적인 이적시장 플랜이 하나하나 짜여지고 있어 다음 시즌에 드디어 우승컵 하나쯤 들 수 있을 것이라 벌써부터 기대하는 서포터들도 존재한다.

그렇게 시작된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인터 밀란에서 영입한 베테랑 풀백인 이반 페리시치, 드디어 에버튼에서 구한 해리 케인의 백업인 히샬리송의 영입과 이브 비수마 등 재능있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더블 스쿼드를 구축하였고, 방출 면에서도 지오바니 로셀소 탕기 은돔벨레(임대 이적)를 각각 비야레알 나폴리로 보내며 현재 방출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22-23 시즌 도중, 콘테 감독조차 이어지는 좋지 않은 성적과 경기력에 불만을 표하는 인터뷰를 하여 구단 수뇌부 및 선수단 일부까지와 마찰을 빚고 3월 27일 사임했다. 그 뒤로 그의 사단 수석코치인 크리스티안 스텔리니가 팀을 맡았지만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게 1:6으로 대참패 당하며 감독의 대행마저 경질로 이어졌다. 이어 감독 대행의 대행이라는 파행적 운영 아래 라이언 메이슨 2년 만에 다시 팀을 이끌어 최종 8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토트넘의 무관을 종식시키지도 못했고, 엎친데 덮쳐 리그 8위로 14년 만의 유럽대항전 진출 실패라는 아쉬운 기록을 남겼다.


2.9.6. 엔지 포스테코글루 체제 (2023~)

마침내 새로운 감독 엔지 포스테코글루가 선임되었다. 국내 팬들에겐 오현규 선수가 소속돼있는 셀틱 FC의 전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선임 전 루머가 있던 율리안 나겔스만에 비해 아쉬운 경력을 갖고 있어 팬에게 큰 기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 여름 이적시장에 클럽을 떠나게 될 요리스의 대체자 굴리엘모 비카리오 골키퍼와 에릭센 이후 전무했던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메꿀 제임스 매디슨, 공격수 마노르 솔로몬, 젊은 유망주 애슐리 필립스 알레호 벨리스, 큰 문제로 지적받고 있던 센터백 보강을 위해 미키 판더펜을 영입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3명의 선수를 더 영입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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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트넘의 초대 주장 [2] 이 경기는 녹화되어 현재도 짧은 영상이 남아 있는데, 이는 현재 남아있는 FA컵 경기 영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는 1899년 FA컵 결승전이었던 셰필드와 더비 카운티 사이의 경기가 최초로 녹화된 FA컵 경기였는데, 해당 영상은 완전히 손실되고 몇 장의 사진만 남아있는 상태다. [3] 20세기의 토트넘은 이 우승컵을 시작으로 세 차례를 빼고 1로 끝나는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는 좋은 징크스가 있었다. 1901, 1921, 1961, 1981, 1991년 FA컵 우승, 1971년 리그컵 우승, 1951, 1961년 리그 우승을 거뒀다. [4] 당초에는 거부되었으나 스토크 시티가 재정문제로 인해 풋볼 리그에서 탈퇴하면서 새로운 멤버로 참가하게 됐다. [5]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수의 현지 팬들은 아스날을 울리치 FC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북런던 원조가 아니라 "굴러온 돌"이라는 비아냥. [6] 전쟁이 없었다면 1915/16 시즌에는 디비전 2로 강등되는 상황이었다. [7] 공교롭게도 아스날은 이 시즌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게 1부 리그에서 강등되지 않고 있다. [8] 아스날의 헨리 노리스 구단주는 토트넘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런던의 울위치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 지역으로 홈구장을 이전한데 이어 잉글랜드축구협회 관계자들에게 아스날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로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 여담으로 1908년 아르헨티나 투어를 끝내고 잉글랜드로 돌아올 때 사용한 배의 선장한테 앵무새를 선물로 받아, 이후 11년간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앵무새를 키웠으나, 토트넘의 강등이 결정된 날에 앵무새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0] 4위였던 더비 카운티와 21위 토트넘의 승점차는 겨우 6점일 정도로 혼전이었다. 시즌 전 토트넘의 공격수 지미 시드가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했는데 얄궂게도 웬즈데이는 강등이 유력하다가 막판의 대상승세로 잔류에 성공했고 다음 두 시즌은 웬즈데이가 우승했다. [11] 블랜치플라워의 등장으로 알프 램지는 선수에서 은퇴하고 입스위치 타운 FC의 감독이 되었고, 훗날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감독으로서 조국의 첫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12] 우승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토트넘에 승점 8점이 앞섰다. [13] 유럽 5대리그로 넓혀도 2018/19 시즌 파리 생제르맹이 개막 15연승을 달성할 때까지 58년 간 5대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4] 개막 16경기에서 15승1무였는데 이 기록은 맨체스터 시티가 2017/18 시즌 17경기 16승 1무로 경신했다. [15] 이는 2022년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 [16] 2010-11 시즌 전까지 토트넘의 유일한 유러피언 컵 참가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또한 2018-1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전까지의 최고 기록이다. [17] 리버풀 케니 달글리시 힐즈버러 참사 이후 얼마 뒤에 사임한 것과 비슷하다. [18] 닐은 아스날에서 1983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며 FA컵 우승 1번, FA컵 준우승 2번, UEFA컵 위너스컵 준우승 1번을 기록했다. 현재는 스포츠 바를 열고 아스날 구단 TV에서 논평하는 등 평범한 현지 구너로 살아가고 있다. [19] 시즌 초반 신인 콜린 리의 4골에 힘입어 홈에서 브리스톨 로버스를 9-0으로 꺾은 것이 유리한골득실 확보에 도움이 됐다. [20] 영국&아일랜드 출신이 아닌 선수를 보는 것은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다. [21] 1차전 토트넘의 2-0 승, 2차전 프랑크푸르트 2-1 승이었는데 차범근이 토트넘을 상대로 합계 2-2로 만드는 득점을 했다. 하지만 글렌 호들이 종료 10분을 남기고 8강을 결정짓는 골을 기록했다. [22] 이후 유럽대항전 결승에 오르기까지 35년이나 걸렸다. [23] 애버딘 FC의 SPL 우승을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에게 감독직을 제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24] 당시에는 토트넘이 최초로 8번째 FA컵을 들어올린 팀이었다.(199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경신) 그리고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FA컵 우승이자 FA컵 결승전으로 남아있다. [25] 무릎 부상 전 그의 몸값은 790만 파운드였다. [26] 2016-17 시즌 전까지 아스날보다 순위가 높았던 마지막 시즌이었다. [27] 맨유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 셰링엄은 맨유의 트레블에 기여했다. [28] 그레이엄의 아스날 시절을 묘사하는 말이 "Boring Boring Arsenal"이다. 영국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뻥축구과 질식수비를 구사하던 팀이었다. [29] 2007년까지는 슈가 전 회장도 토트넘의 지분 일부를 유지했다. [30] 역대 토트넘 감독 중 최단 재임기간이다.그리고 그 기간을 누누 산투가 리그 10경기로 깨버린다. [31] 9위였지만 7위 미들즈브러와 승점차 3점, 4위 에버튼과의 승점차는 9점으로 이전의 시즌들에 비하면 매우 선방한 시즌이었다. [32] 1년 후 완전이적 [33] 이는 수비의 핵심 레들리 킹이 유리몸이었던 것과 마이클 캐릭의 이적이 컸다. 이 문제는 윌슨 팔라시오스가 2009년 1월 위건에서 영입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34] 우승팀 세비야에 탈락 [35] 아스날에 2차전 연장전 돌입 끝에 탈락 [36] 첼시에 재경기 끝에 탈락 [37] 이마저도 UEFA컵 32강 페예노르트전이 페예노르트 훌리건 문제로 부전승해서 2경기를 아낄 수 있었다. [38] 평소에 유럽대항전과 거리가 멀었던 팀이 갑자기 유럽대항전을 치를 경우 많아진 일정으로 인한 엄청난 체력소모로 리그 순위가 갑자기 추락하고 심지어 강등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 [39] 2년 연속으로 유럽대항전에 진출한 것도 1985년 이후 처음이었다. [40] 다니엘 레비 구단주는 4강 진출 실패에 적잖은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1] 사실 여름이적시장에서부터 욜 감독이 원했던 영입은 없다시피 했고, 코몰리 단장의 입김이 강했다. 토트넘의 문제점은 수비였는데 EPL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젊은 카불을 데려오고 엉뚱하게 안그래도 공격수가 많았는데도 중복자원인 벤트를 데려왔다. [42] 시즌 전부터 접촉이 있었다. [43] 2023년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트로피이다. [44] 2008년 1월 포츠머스로 이적했으나 다시 영입했다. [45] 빌라스보아스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선수 본인도 멘탈갑으로 유명하고. [46] 진정한 빅클럽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리그나 챔스, 하다못해 유로파같은 메이저급 대회의 우승이 필요하다. 돈시 내지는 졸부 구단이라고 불렸던 첼시도 2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그 말이 사라졌고, 맨시티도 극적의 리그 우승 이전에는 그저 시끄러운 이웃 내지는 돈시티같은 멸칭으로 통하다가 연속적인 프리미어리그 우승, 심지어 최근에는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진정한 명문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토트넘은 근래 성장한 구단의 규모, 선수단의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국내 Fa컵이나 리그컵조차 우승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챔피언스 리그나 유로파 리그에 비해서도 확연히 위상이 낮은 대회인 컨퍼런스리그조차 자팀의 함량미달급 로테자원들로 인하여 탈락했다. [47] 토트넘의 1순위 옵션이었던 루이 판할을 맨유한테 뺏기고 차선책으로 택한 게 포체티노였는데, 이후 포체티노의 성과를 보면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48] 포체티노가 감독을 맡은 두 시즌간 선수 방출로 벌어들인 이적료만 1억 파운드에 이른다. 같은 기간 영입 시장 지출은 7730만 파운드. 타운젠드 등 몇몇 선수를 제외하곤 별 군말 없이 나간 걸 보며 그의 선수단 장악력이 강했을 것이란 의견이 있다. [49] 실제로 델레 알리의 응원가 가사 중 "He is only cost 5 mil, he is better than Ozil(그는 500만 파운드밖에 안 하는데 메수트 외질보다 잘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심지어 외질을 국대에서 은퇴하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 같은 팀에 있다 [50] 다이어, 알리, 워커 등 [51] 16-17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경기만 홈구장으로 사용하였으나, 17-18시즌 부터는 전경기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52] Tottenham Hotspur Supporters' Trust [53] 기본급 20만 파운드+보너스 10만 파운드로 추정. [54] 쿠티뉴, 디발라도 여러 유명 축구 언론들에서 영입 근접이라는 소식이 떴지만, 아쉽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영입 실패하였다. [55] 무리뉴 감독 시기에 다른 팀으로 이적한 전 토트넘 선수인 완야마에 의하면, 챔피언스 리그 결승 패배가 사실상 포체티노 포함한 토트넘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부수게 되면서 후유증이 심하였고 매우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밝혔다. [56] 부임 초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교체로 분위기를 끊어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7] 유스를 육성하고 선수들을 북돋는 매니저 역할은 월등하지만 적재적소에 뛰어난 전술을 적용하는 헤드 코치로서의 역할은 아직 모자랐다 할 수 있다. 젊은 감독이기에 경험 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점점 발전하긴 하였다. [58] 유로파리그는 아스날이 FA컵 우승으로 유로파 리그 본선 진출했기 때문에 2차 예선에서부터 출발하였으나 플레이오프를 모두 이기며 결국 유로파리그에 진출하였다. [59] FA컵과 유로파리그에서 매우 부진한 선수들의 연이은 계속된 실수로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탈락하였고 리그 순위도 자력으로 탑4에 도달하기도 어려워졌다. [60] 여담으로 토트넘 핫스퍼의 가장 최근 우승 기록이 13년전의 리그컵(당시 칼링컵)이다. 이번 리그컵을 우승하면 13년간의 무관을 똑같은 리그컵으로 극복하는 셈. [61] 32라운드 기준 승점 50점 7위, 컵대회 포함 최근 5경기 1승 2무 2패 [62] 파라티치가 유벤투스 시절에 누누를 감독 후보로 보았다고 한다. [63] 토트넘에서 비판 받은 그 무리뉴조차도 19 - 20 시즌 도중에 포체티노가 경질되어 갑자기 부임하였고, 20 -21 시즌에 20 라운드에서 4패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