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0:53

태평천국 운동/경과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태평천국 운동
1. 개요2. 배경3. 금전기의4. 난징행
4.1. 금전촌 탈출4.2. 영안건제
4.2.1. 사의도 전투: 풍운산의 죽음
4.3. 장사 진출 및 소조귀의 죽음4.4. 무창 점령4.5. 난징 함락
5. 군사 전역 확대
5.1. 북벌5.2. 서정5.3. 1차 강남대영 격파
6. 천경사변7. 익왕 이탈8. 쇠퇴의 조짐9. 소수의 충신10. 멸망

1. 개요

태평천국 운동의 경과를 정리한 문서.

2. 배경

태평천국 운동의 전개[1]
태평천국의 건국자인 홍수전은 본래 광동성 화현(花縣)[2] 관록보촌(官禄布村) 출신의 유생이었다. 객가 출신 중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홍수전이 다른 형제들보다 낫다고 생각한 부모는 그에게 공부를 시키고, 오래도록 그의 학업을 지지해 주었지만 홍수전은 14년 동안 향시에 네 차례나 연달아 떨어졌고 이에 절망해 병이 들었다. 어느 날 홍수전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한 백발의 신선이 나와 홍수전이 자신의 아들이며 "이 검으로 사악함을 물리치라"는 말과 함께 파사검(破邪劍, 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주고 세상을 정화하라는 계시를 내렸으며, 한 중년 남자로부터는 요사스러움을 물리치는 도끼를 받았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겪은 홍수전은 예전에 서양인 선교사에게 받아 두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처박아 두었던 《권세양언》(勸世良言)[3]이라는 선교서를 읽고, 자신은 조물주(造物主) 천부상주황상제(天父上主皇上帝) 야훼의 둘째 아들이며, 천형(天兄) 예수의 동생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태어난 제2의 천왕(天王) 메시아라는 교리를 성립시켰다. 이후 홍수전은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 단체 겸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농촌 지방 등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권세양언》의 기독교 교리에 중국 토착 종교의 모습이 가미되어 일신교적 단체가 형성되었고, 공자상을 파괴하는 등 그 활동이 점차 과격해졌다.

물론 이런 과격한 활동은 홍수전의 고향인 화현에서는 씨알도 안 먹혔고, 풍운산의 포교를 통해 광서성 계평현(桂平縣) 금전촌(金田村)[4]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런 식으로 금전촌에서 약 3,000명의 신도를 모았으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당연히 근처 주민들은 이런 집단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시 불안한 치안상 촌락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자경대와 충돌이 잦았으며, 토호들도 배상제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고 민심이 진동하여 폭발 직전이었는데 구체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종 건륭제의 치세 말 대외 원정에서 시작된 재정 악화와 그에 따른 향촌 사회 및 농촌의 붕괴, 이민족 왕조의 통치에 대한 불만,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 등이 1840년대에 착실히 쌓여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 폭증과 학정이었다.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토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졌으며 부정부패는 이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수의 농민들이 광서, 광동, 사천, 동북 3성 등 기존에는 인구가 적었던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했다.[5]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료의 확충과 제도 개정 등의 개혁이 필요했으나 건륭제 말기의 청나라는 제도적 모순과 부정부패로 인해 통치력을 잃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향신들이 마을을 직접 통제하고, 각 지방 관아가 이를 감독하기도 했으며 계투가 빈발해지고 무뢰배와 토호, 부패 관료들이 결탁해 나라를 좀 먹고 인민들을 착취했다. 인구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감세나 구휼 같은 기존의 해법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효과만 냈다. 관료들은 홍수와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를 불러올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토지를 잃은 주민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이들에게 산의 벌채를 허용했다. 여기에 제1차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열강의 침략은 전국적인 자연재해와 반란, 인구 과잉 같은 '내우'에만 고통받던 청나라가 '외환'에까지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 1840년부터 1849년까지 광동과 광서에선 매년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혼란이 심했다.

둘째, 제1차 아편전쟁을 전후로 청은 아편의 결제 수단으로 은을 지불했고, 이 때문에 엄청난 양의 은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은납을 원칙으로 하는 지정은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은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인민의 세 부담은 커졌고 제1차 아편전쟁의 패전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연간 40,000개의 상자가 수입되던 아편이 난징 조약 이후로, 50,000개까지 반입되면서 은의 유출이 더 극적으로 증가했다[6]. 또 청 조정은 아편전쟁으로 지출한 막대한 군비를 주요 전장이었던 양광(광동, 광서)에서 징수해서 지역 주민들의 부담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패전 후 제대한 군인들이 양광 지역을 유랑하기 시작해 치안이 붕괴되고 빈민들이 늘어나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전쟁 이후 여러 항구가 개항하면서 새로운 물류망이 형성됨에 따라 기존 유통망의 비중이 급감해 여기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 불만이 증대되었다.

셋째, 당시 광서성은 매우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고, 토착민들의 생활도 고단했다. 문제는 제1차 아편전쟁의 여파로 광동성에 살던 많은 객가들이 서쪽의 광서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토착민들과의 갈등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인구는 많은데 토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객가 이주민들은 척박한 산지나 불모지를 개척했다. 송아지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서 그 소가 죽을 때까지 산 위에서 농사를 지을 정도로 객가들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객가 특유의 동족 의식과 근면함으로 이주민들은 어느 정도의 부를 이뤘고 자연스럽게 토착민들이 원래 일구던 집과 땅 같은 재산을 구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토착민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돌이 설치는 격이니 당연히 뭉쳐서 재산의 판매를 거부하고, 토착 신앙이 발달한 광서의 제사나 신앙 숭배의 행사에서 객가를 배제했으며, 사건이 생기면 덤터기를 씌우는 등 반발하기 시작했다. 또한 객가 상인들이 고리대를 씌우거나 토지와 주택의 가격을 후려치는 일도 광서 사람들의 반객가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객가 이주민들이 많던 강남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홍수전의 배상제회는 '제사신'(除邪神)[7]을 적극 선전했는데 이는 앞서 말한 대로 광시의 토속신앙에서 배척당하고 불이익을 받던 당시 객가인들에게 더 없이 좋은 이야기였으며, 풍운산이 교리를 개정해 모두가 같은 형제 자매이며 평등하다고 설득하니 많은 이들이 새로운 종교 집단을 안식처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홍수전의 휘하 패거리가 곳곳의 사당을 깨부숴도 신성에 의해서 죽거나 하는 일 없이 설치니 그들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거기다가 배상제회는 홍수전이 기적을 일으켜서 병자를 치료한다는 소문까지 퍼뜨려서[8] 광시에서 큰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배상제회에서 구휼과 의료 지원을 비롯한 복지를 제공하니 모든 것을 잃은 빈민들이 자연히 많이 가입하기 시작했으며, 광서성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배상제회의 선전에 넘어가 합류해 오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1850년 광서성 구이현(貴縣)의 계투는 배상제회의 세력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객가인과 토착민간의 결혼 문제로 촉발된 이 계투에서 토착민들에게 밀려난 객가인들은 갈 곳이 없어 홍수전이 이끌던 배상제회에 합류했다. 객가들은 같은 객가라면 믿고 의탁하는 문화가 있어서 홍수전을 포함한 객가들이 주류를 이룬 배상제회에 쉽게 들어왔고 덕분에 홍수전은 크게 세력을 불릴 수 있었다.[9]

넷째, 천지회의 활동도 홍수전에게는 큰 호재였다. 반청 단체인 천지회에는 객가가 많았고 주 근거지는 광동성이었다. 그런데 제1차 아편전쟁의 여파로 청 조정은 광동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많은 수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광동에 흐르는 거대한 주강의 물길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관군과 외국인의 큰 함선들은 작은 배로 해적 노릇을 하던 천지회가 절대로 공격할 수가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천지회는 물이 얕고 자잘한 강들이 흐르는 광서성으로 이동했다. 청나라의 관료들은 중앙정부의 엄중한 문책에 걸리고 싶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덮어 버리는 일을 관행으로 삼았다. 그래서 광동의 관료들 입장에서 천지회가 광서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광시의 관료들이 계투를 방임했기 때문에 천지회는 객가와 토착민, 소수민족 간의 계투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객가나 토착민, 소수민족 등 다양한 집단의 용병으로 일했으며 광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여기서 객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던 천지회 인사들은 태평난 발발 이후에 태평군에 들어가 청군과 싸웠다. 태평군에 참여한 대표적인 천지회 인사로는 나대강과 소삼랑 등이 있다. 천지회 출신들은 수전에 능숙하고 전투력이 높아 태평군의 전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선박과 선원을 제공하고 수로를 통해 물자와 인력을 보급해 태평군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태평군과 천지회는 반청이라는 같은 목적만 공유할 뿐이지 서로 섞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태평군에 합류한 천지회의 상당수가 태평군의 교리나 엄격한 군율에 반발해 탈퇴했다.

3. 금전기의

만주족은 하얀 여우와 붉은 개의 자손이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었으며, 야생 여우를 사악한 황제로 앉혔다. 만주족의 궁정은 여우 떼와 개 떼가 몰려 사는 곳이다. 여기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중국인 관료들은 개나 돼지보다 못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만주족들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인들에게 변발을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전통 의상에 어긋나며, 짐승과 오랑캐 같은 모욕이자 만행이다. 또한 만주족들은 중국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모두 궁궐로 끌고 가서 첩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3,000명의 미녀들은 구역질나는 짐승들에게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기근이 들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거나,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해도 만주족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저들은 우리들이 가난해져 약해지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봉천토호격>(奉天討胡檄)[10]
이런 흐름 속에서 홍수전은 약 13,000명의 인원을 확보했고 마침내 청나라 타도를 위한 시도로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에 뿌렸는데 거기에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11]

1850년 7월 홍수전은 총동원령을 내려 약 13,000명을 배상제회의 본영인 금전촌(金田村)의 단영(團營)에 모으고 자신을 포함한 노형제들을 각 군의 주장으로 임명하면서 무장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남녀로 나눠 모두 군에 입대하게 했으며, 개인의 재산을 모두 공동창고인 성고(聖庫)에 기부하게 했고, 모든 의식주를 공동으로 처리하게 하면서 군사적인 색채를 띄기 시작했다.

또 같은 해 10월에는 경보체계를 강화하고 동원령을 강화해서 반란 준비에 전념했으며 부자였던 위창휘의 집을 주무대로 하여 각 가정에서 무기를 만들고 우물에 숨기는 등 무장 강화에도 전념했다.[12] 또 홍수전과 풍운산의 가족들 역시 광동을 떠나 금전촌으로 오도록 했다.[13]

10월 29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렸으며, 풍운산의 발상으로 군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호 체계와 부대 단위가 설치되었다.

이때만 해도 청나라는 이 집단을 천지회나 기독교의 일부로 생각했고 당연히 토벌을 시도했다. 1850년 12월 심주(潯州)의 협부장(協副將) 이전원(李殿元) 휘하의 청군이 평남현(平南縣)[14] 사왕우에 와서 화주(花洲) 산인촌(山人村)에 있는 홍수전의 저택 들 중 하나를 포위했다. 이곳은 태평천국의 네 군데 근거지 중에서도 가장 험지에 있었다. 홍수전은 은밀히 뒷길을 통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양수청은 금전촌에서 지원군을 보내 이전원의 청군을 물리쳤으며 관헌과 관병 50여 명을 살해했다. 이에 홍수전과 풍운산은 금전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청나라는 귀주(貴州) 진원진(鎮遠鎮)의 총병(總兵) 주봉기(周鳳歧)를 사령관으로 삼고, 부장(副將) 이극탄포(伊克坦布)를 선봉장으로 한 3,000여 명의 토벌군을 보냈지만 1월 1일 금전촌 전투에서 선봉이 풍운산과 석달개의 군사를 치던 중 채강촌에서 양수청과 소조귀의 군사들한테 양옆으로 공격받아 이극탄포를 포함한 군관 10명과 병사 300여 명이 전사했다.[15] 배상제회는 이 승전을 홍수전의 생일과 함께 축하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상제회는 20,000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16]

4. 난징행

4.1. 금전촌 탈출

태평천국이 세력을 떨치자 다양한 세력이 합류했고, 이때문에 기존 집단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이를 통제하기 위하여 홍수전은 5개조의 명령을 반포해 군기를 다졌는데 다음과 같았다.

1. (십)계명을 준수할 것
2.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를 구분할 것
3. 사소한 규율이라도 위반하지 말 것
4. 상관의 말에 복종하며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할 것
5. 합심단결하여 전장에서는 물러나지 말 것

또 지휘를 위하여 홍수전은 천왕(天王)에 오르고 각 간부를 5군 주장(五軍主將)에 봉하니 양수청이 중군, 소조귀가 전군, 풍운산이 후군, 위창휘가 우군, 석달개가 좌군 주장을 맡았다.

1851년 1월 14일, 태평천국군은 심강(潯江) 기슭에 있는 대황강구(大湟江口)[17]를 점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대강과 소삼랑이 이끌던 천지회 2,000명이 합류했다. 이들의 합류를 통해서 태평천국군은 보급과 수로, 수전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소식에 놀란 문종 함풍제는 흠차대신(欽差大臣)[18]에 이성원(李星沅)을 임명하고 광서제독 향영(向榮), 귀주(貴州) 진원진(鎮遠鎮) 총병(總兵) 주봉기(周鳳岐), 운남(雲南) 임원진(臨源鎮) 총병(總兵) 이능신(李能臣)에게 명령을 내려 대황강 나루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때 태평군은 숫적으로 밀려 무선현(武宣县)[19]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근거지 쪽으로 후퇴한 태평천국군은 삼리우(三里圩)[20]에서 교착상태로 전황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4월 3일, 광서순무 주천작(周天爵)과 향영 휘하 6,000명의 청군 병력을 패퇴시키고, 그들이 이끌던 군대의 숫자가 적어 공격을 미루던 2개월 동안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5월 16일, 태평천국군은 포위를 돌파하여 상주(象州)[21]로 향했다.[22]

이에 청군은 새상아(賽尙阿)를 흠차대신으로 삼고, 새로 부임한 광동부도통(廣東副都統) 오란태(烏蘭泰)[23]가 이끌던 군대를 배치시켰으며 향영은 태평천국군의 북상을 막도록 역할을 분담시켰다.

6월 초, 양산촌(梁山村) 마안산(馬鞍山)에서 태평천국군은 오란태에게 승리를 거두고 1개월 정도 대치했지만 양산촌 북부 독오령 전투에서 오란태가 다시 우위를 확보했다. 이에 7월 2일 태평천국군은 상주에서 근거지인 계평현 자형산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태평군은 단순한 도적 집단이 아닌 실력을 가진 집단임을 보여줬고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인원 역시 증가하여 30,000명이나 되었다. 새상아의 보고에 따르면 태평천국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24]

하지만 태평천국은 오란태와 향영이 이끌던 청군의 지속적인 압박에 시달렸는데 특히 오란태의 공격에 의해 상주(象州)에서 약 1,000명을 잃고, 근거지인 계평(桂平)에서 하루 7번을 패배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은 9월 11일에 근거지의 집을 태우고 모든 식량을 징발하여 출병에 나섰는데 목표는 영안(永安)이었다.[25][26]

4.2. 영안건제

쫓아오는 향용을 평남현(平南縣) 관촌(官村)에서 풍운산 소조귀의 역습으로 대패시킨 태평천국은[27] 등현(藤縣)을 거쳐서[28] 그해 9월 24일 영안에 도착했고 10월 1일 800명의 수비군을 물리친 후 영안(永安)[29]을 접수했다.

그리고 영안에 주둔하면서 군령을 엄격히 적용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서양의 양력을 도입했으며, 역법을 고치고 영안의 인쇄시설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등 반란의 색채를 확실히 보여줬는데 이를 영안건제(永安建制)라고 칭한다.

당시 협조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다소간의 압박은 있었지만 객가인이 많이 살던 영안에서 세력을 다시 튼튼히 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뒤질세라 영안 점령 다음날, 오란태의 청군이 영안성 10km 근처에 도달했다. 새상아의 감독하에 오란태가 영안성을 공격했는데 수두촌(水竇村)[30][31]을 지키던 소조귀가 중상을 입고 태평천국군은 포위되었다.

이로 인해 태평천국 내의 권력 구조에 변동이 일어났는데 소조귀가 중상을 입게 되어 '천형하범'이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지난 3년 동안 큰 영향을 준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력으로 끊어진 후 조직 정비에 나섰는데 우선 천왕(天王) 홍수전은 만세지주(萬歲之主)로 추앙되었다. 또한 양수청은 동왕(東王)으로 봉해지고, 구천세(九千歲)로 불렸다. 소조귀는 서왕이자 팔천세로, 풍운산은 남왕이자 칠천세로, 위창휘는 북왕에 봉해지고 육천세로 불렸다. 아직 20세 초반에 불과했지만 전공이 컸던 석달개는 익왕(翼王)에 봉해지고 오천세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홍수전을 제외한 모든 왕들의 지휘는 동왕 양수청이 맡게 되었다. 이것이 12월 17일의 일이었으며 영안봉왕(永安封王)으로 불린다.

한편 병을 치료한 향영이 12월 29일 영안성 근처에 도착해서 영안성의 포위가 강화되었다. 다만 청군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영안의 포위에는 성공했지만 총대장인 새상아가 군략에 능하지 못해 향영과 오란태가 전장을 주도했는데 이 둘의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 북쪽을 담당한 향영은 퇴로를 열어준 후 공격하자고 주장했고, 남쪽 방면을 포위한 오란태는 포위를 더욱 굳히자고 했다. 이 때문에 둘 사이의 협력은 원활하지 않았다. 또한 오란태가 계속하여 공격을 재촉하고, 해를 넘겨 봄이 오자 봄비가 계속 내려서 청군은 피곤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봄비가 오는 1852년 4월 5일 밤 10시 경, 태평천국군은 식량과 화약이 부족해지자 청군의 방어선이 약한 동문을 통하여 동남쪽으로의 탈출을 기도했다. 동문을 나온 태평군은 연기와 소리가 발생하는 지뢰와 화약을 매설하여 청군을 혼란시키고, 고소(古蘇)[32]에서 승리를 거두어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영안성에 남아 있었던 태평군 후발대 2,000명이 전사하자 분노한 잔여 태평군은 비가 오는 날씨를 활용하여 대동산(大峒山)[33]에서 매복작전을 수행했다. 지뢰를 매설하고 돌을 쏟아부으며, 오란태가 이끌던 추격군을 맹공했고 결국 총병 장서(长瑞), 장수(长寿), 동광갑(董光甲), 소학령(邵鹤龄) 등의 장군 4명과 청군 5,000명을 전사시켰다.

4.2.1. 사의도 전투: 풍운산의 죽음

영안성 탈출 후 태평천국군은 광서성의 성도인 계림을 목표로 하여 신속히 북상하여 청군보다 먼저 계림에 도착했다. 오란태는 추격 중 계림성 남문 근처의 장군교(将軍橋)에서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탄을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고 양삭(阳朔)[34]으로 후퇴하여 20일 후 사망했다. 향영은 다시 총독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태평천국군의 나대강은 병사를 청군으로 변장시켜 계림 점령을 시도했지만 향영이 발견하여 무산되었다. 정공법을 시도한 태평천국군은 33일 동안의 공성전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곳곳에 청군이 있어서 한 군데에 머물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었다.

결국 5월 19일에 계림성의 포위를 푼 후 다시 행군하여 5월 23일 태평천국군은 흥안(興安)[35]을 무혈점령하고 그곳의 영거 운하[36]를 활용하여 이강(漓江)과 상강(湘江) 수계를 건너 전주(全州)로 향했다.[37]

5월 24일, 전주(全州)[38]에 도착한 태평군은 성이 튼튼한 것을 보고 우회하려고 했으나 정말 공교롭게도 청군이 쏜 대포 한 발이 고급 가마에 명중했다. 하필이면 그 가마에 탄 사람이 풍운산이었는데 이에 분노한 태평천국군은 총공격을 퍼부어 6월 3일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2일 동안 잔혹한 살육을 벌였다.[39][40]

전주성을 점령한 후인 6월 5일, 태평천국군은 머물지 않고 다시 출발했는데 긴 원정으로 지친 나머지 정찰에 소홀했고 전주에서의 승리와 학살로 청군을 얕보게 되었다. 태평천국군은 수•륙으로 나뉘어 진군했는데 목표는 호남성이었다. 청나라 장수인 강충원(江忠源)이 이끄는 매복 병력을 사의도(蓑衣渡)[41]에서 만났다.

태평천국군이 상강의 물길을 따라서 이동하던 중, 강굽이를 지나 얕은 저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강충원이 물을 막기 위해 깔아놓은 나무 토막에 배가 부딪혀서 진격이 정체되었고, 혼란스러워진 틈을 탄 맹렬한 기습을 마주하게 되었다.[42] 이 습격의 주력인 강충원의 군대가 강의 서안인 사자고개[43]에서 공격하는 동안 청군이 강 근처의 퇴로를 끊지 않아서 격렬한 포위전에 비하면 태평천국군의 피해는 적었으나 약 10,000명의 병력과 300척 정도의 배를 잃었으며 풍운산이 전사하고, 주력군은 상강 동안으로 피신했다.

이때 큰 비로 인하여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는 성벽이 허물어졌고, 급히 수리한 성벽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만약 침공을 당할 경우 무주공산이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전주를 공격하는데 힘을 쏟은 나머지, 시간을 허비하여 태평천국군의 진격은 큰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4.3. 장사 진출 및 소조귀의 죽음

이후 태평천국군은 상강 동안의 숲을 가로질러 영주(永州)[44]로 가려고 했지만 청군이 교량을 폭파하고 배를 치우자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도주(道州)[45]로 갔는데 이곳 주민들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쉽게 점령하고 1개월 동안 머물며 세력을 정비했는데 이때 다시 인원들이 보충되어서 약 50,000명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호남성의 지리와 물산 등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태평군 내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고향인 광서로 내려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동왕 양수청의 의견을 따라 북상을 결정했다.[46]

북상하던 중 마침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보고가 있었고, 부상에서 완쾌한 소조귀는 침주(郴州)[47]에서 진격하여 장사를 공략하려 했는데 이끄는 부대는 불과 2,000명이었다.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는 중요한 곳이었고 청군 역시 호남순무 낙병장(駱秉章)[48]이 강충원 및 10,000명의 병력으로 침공에 대응했다. 여기에 계림에 남아 있다가 양광총독 서광진(徐廣縉)의 탄핵을 받아 신강으로 잠시 유배를 갔던 향영 역시 9월 16일에 출발하여 10월 2일에 장사성으로 들어와 태평군에 대항했다.

9월 12일부터 장사성을 공격한 소조귀는 공교롭게도 9월 17일에 총에 맞아서 전사했다.[49] 이 참담한 소식을 듣고 놀란 홍수전이 10월 초에 도착했을 때는 청군 역시 화춘(和春)과 장국량(張國梁)을 파견하고 수비병을 50,000명까지 늘려서 강력하게 대응했다.

석달개를 포함한 장수들이 부교(浮橋)를 장사성 양쪽에 설치하고 광서와 호남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파기 및 화약 폭발을 통해 성벽을 3번이나 무너뜨리는 등 80일 동안 맹공을 퍼부었지만 향영이 가지고 온 대포 및 청군의 분전으로 인해 장사성의 공략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에 홍수전은 12월 초에 상강 근처의 배를 빼았아 호북성을 향해 북상했다.[50] 새상아는 상강(湘江) 서안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향영은 악록산(岳麓山) 밑에 주둔했다. 이때 태평군은 이미 상강을 건너 수륙주(水陸洲)[51]를 점령하고, 부교를 만들어서 상강 서안과 동안을 모두 이용하여 행군했다. 10월 31일에 향영은 태평천국군을 분할시키기 위해 수륙주를 공격했지만 1,000여명의 장병만 잃고 말을 탄 후 도망쳤다. 그리고 난 후 오직 향영만이 태평천국군을 다시 추격할 뿐 다른 군대는 태평천국을 두려워하며 진군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4.4. 무창 점령

가는 길에 익양(益阳)을 점령한 태평천국군은 상당한 선박을 얻어서 25일간 480km를 진격했는데 중간에 선원을 모집하고 필사적으로 부교를 만든 성과였다. 신중해진 태평천국군은 방비가 단단한 무창을 단숨에 공격하지 않고 12월 13일 호북 제독이 머무르던 악주(鄂州)를 공격했다. 악주는 당시 호북제독 박륵공무(博勒恭武)가 자강(資江)에 진을 치고 수비하고 있었다. 이때 악주 내에서는 태평천국에 찬동하던 안중무(晏中武)가 약 300명을 이끌고 호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밀고가 있었지만 박륵공무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12월 13일, 태평천국군의 공격에 맞춰서 안중무가 이끄는 300 여명의 내부자가 호응하니 박륵공무는 악주의 물자를 그대로 두고 도망쳤고 태평천국군은 악주를 무혈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악주에 있는 수많은 배를 얻어서 정식으로 수군을 편성하고 수륙병진의 기세를 더했다.[52]

악주를 무혈점령한 후 태평천국군은 기세를 타고 한구(汉口), 한양(漢陽)을 우선 점령했고[53] 12월 22일부터 무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추격해 온 향영은 12월 24일에 성 밖의 백목령(白木嶺)에 다다라 탁도천(卓刀泉)에 군영을 설치했고 1853년 1월7일에 태평천국군이 홍산(洪山)에 설치한 영루 15개를 점령했지만 태평천국군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천국군은 둥팅호 장강을 근처에 둔 지형을 이용하여 장강에 두 개의 부교를 설치하여 공격했고 화약을 통한 성벽의 폭파까지 도모하여 마침내 1853년 1월 12일에 문창문(文昌門)을 폭파하고 무창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54] 이는 태평천국이 처음으로 점령한 성도였으며 많은 재물을 얻어서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추격자 향영은 다시 광서제독에서 잘렸지만 잠시 후 호북순무와 흠차대신을 부여받고 본격적인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4.5. 난징 함락

1853년 2월 10일 태평천국군은 양수청의 조언을 따라서 무창을 버린 후 수로를 통해 960km를 나아가서 난징을 목표로 했다.

가는 길에 구강(九江)을 함락시킨[55] 태평천국군은 2월 24일에 소고산(小孤山)을 지난 후[56] 석달개의 지휘에 따라서 군사를 둘로 나눴다. 망강(望江)으로 향한 부대는 망강의 지현인 위군선(衛君選)을 패배시킨 후 살해하고 전진했다. 또 다른 부대는 안경으로 향했는데 안경은 장강 중류의 요충지로 안휘순무(安徽巡撫) 장문경(蔣文慶)이 약 1000명의 수비대를 이끌며 지키고 있었다. 양강총독(両江総督) 육건영(陸建瀛)은 무창 인근에서 패배한 후 난징으로 도주했고 다른 책임자들도 도주했다. 안찰사(按察使) 장희우(張熙宇), 총병(総兵) 왕붕비(王鵬飛) 역시 도주하니 조운총독(漕運総督) 주천작(周天爵)은 장문경에게 노주(廬州)로 피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태평천국군은 신속한 기동을 통해 안경을 습격했으며 2월 28일에 성을 점령했다.[57]

3월 4일, 역시 요충지인 무호(蕪湖)에 다다른 태평천국군의 상대는 복산진(福山鎮) 총병(總兵) 진승원(陳勝元)이었다. 무호의 하류인 동량산(東梁山)과 서량산(西梁山)을 지키는 진승원의 부대는 석달개를 상대로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진승원은 살해당하고 무호 역시 점령당한다.

뒤이어 태평천국군은 3월 6일에 태평부(太平府)[58], 화주(和州)[59]를 점령했고 난징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당연히 청군은 요격에 나섰지만 태평천국을 겁낸 자들이 많아서 싸움에 소극적이었고 태평천국군도 큰 도시나 방비가 단단한 곳은 피해 버리면서 한 달 만에 난징에 도착했다.

당시 난징성은 40㎞의 규모를 자랑했는데 도리어 큰 규모가 방어선을 얇게 만들어 방어가 취약했고 장강을 가까이 둔 성의 서북 방면을 태평천국군이 포격하여 기어이 3월 19일에[60] 난징 외성의 의봉문(儀鳳門)을 폭파하여 뚫고 다음날에 내성까지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양강총독 육건영은 사살됐다. 이후 3월 29일까지 학살을 통해서 불순분자나 만주족을 죽였다.[61][62][63]

3월 29일, 홍수전이 입성한 후 난징을 수도로 삼고 천경(天京)이라고 칭했다. 태평천국군은 가난한 출신들이 많아서 번화한 난징의 많은 재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얼이 빠진 사람마냥 행동했다고 전해진다.

홍수전과 지도층은 풍운산이 처음 태평군에 도입시킨 군사사상을 발전시켜 군에서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천경에서도 네 집의 가족이 오장의 가족과 연결되어야 하고 25개의 가족 단위가 양사마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도록 했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공동의 곡물창고를 건설하고 예배를 위한 예배당도 세워야 하며 양사마는 이 예배당에 거주했다. 안식일이 되면 오장은 자기 가족과 나머지 네 가족을 예배당으로 인솔해 와서 예배를 보게 했다. 남녀는 따로 떨어져 앉아 양사마의 설교를 듣고 천부(天父)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으며 일곱번째 안식일마다 모든 고위급 장수들은 자기 휘하 양사마의 교회들 중 한 곳을 방문하여 신도들에게 설교를 해야 했다.

홍수전 본인도 종교에 크게 심취하여 당시 난징성은 매일 대포를 10발씩 2번 발사했는데 이는 홍수전이 기도하는 시간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또 홍수전은 400여명의 인원과 시설을 동원하여 교리를 설파하는 인쇄물, 노래 등을 간행하도록 했고 태평천국은 혐오하는 아편 중독자들을 처형시키고 성벽에 효수시켜 버리는 등 자신들의 수도를 지상낙원이자 하늘의 수도인 천경(天京)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5. 군사 전역 확대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후 나대강, 총제(總制) 오여효(吳如孝)의 지휘하에 전장을 점령했다. 지관정승상(地官正丞相) 이개방(李開芳), 천관부승상(天官副丞相) 임봉상(林鳳祥), 춘관부승상(春官副丞相) 길문원(吉文元) 등의 인솔 하에 강포(江浦)를 함락하고 의정(儀征)을 탈취했으며 양저우를 점령했다. 양저우와 전장은 각각 태평천국의 앞문과 뒷문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끈질기게 추적한 향영은 난징성 점령 2일 후 3월 31일에 성 동쪽의 종산(鐘山) 남쪽 기슭의 명효릉(明孝陵)[64] 일대로 선회해 청군 강남대영(江南大營)을 세웠다. 또한 양저우 근처에 흠차대신 기선은 강북대영(江北大營)을 건설하여 천경의 숨통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 태평천국의 군대는 총합 10만명 정도였는데 다음 목표를 어디로 잡을 지를 두고 논쟁 끝에 양수청이 내놓은 방안은 다음과 같았다.

1.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의 병력은 단촐하므로 우선 서정과 북벌을 개시한다.
2. 점령지가 난징, 양저우, 전장 밖에 없으므로 북벌과 서정을 통해 황하 이남에 영역을 확대하여 안정을 가져온다.

나대강은 여기에 반발하면서 3가지 방안들을 제시했다.

1. 전력을 다해서 북벌만을 진행한다. 허난성 카이펑을 우선 점령한 후 홍수전을 포함한 모든 간부 및 군대의 역량을 동원해서 베이징 함풍제를 처리한다.
2. 장강 남부 지역을 모두 얻은 다음 3갈래로 군대를 보낸다. 한중, 허난성, 산둥성 방면을 통해 진격한 후 최후에는 베이징을 공격한다.
3. 수군을 증강하여 장강을 장악한 후 남방을 평정한 다음 북벌한다.

하지만 나대강이 소조귀와 친했으며 당시 홍수전, 양수청이 자신감에 차 있던 탓에 태평천국은 양수청의 방안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5.1. 북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평천국의 북벌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853년 5월, 태평천국군 9군 22,500 명은 포구(浦口)에 도착한 후 북벌을 시작했다.

또 태평천국 내에서는 전쟁 방향을 두고 함풍제가 있는 베이징을 공략해서 전쟁을 끝내자는 북벌(北伐)론과 우선적으로 장강을 따라 거점을 확보하는 서정(西征)론이 대립했는데 실권자인 양수청은 북벌과 서정을 동시에 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1853년 5월 북벌군 지휘관에는 임봉상과 이개방,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해서 보냈는데 안 그래도 인해전술 전략을 쓰던 청나라의 녹영군과 팔기군에 비하면 병력이 열세인데 거기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책을 범한 것이다.[65]

서정은 석달개의 지휘 하에 증국번의 상군과 장강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거점을 점차 확보해나가고 있었지만 북벌군이 문제였다. 청군 근왕병들이 몰려있는 베이징을 공략하면서 불과 2만명의 군대만 보냈는데 사실상 자살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66] 물론 베이징을 전격적으로 기습해서 함풍제를 제거하면 수뇌부가 사라진 청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겠지만, 이를 감안해도 베이징을 공략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병력이었다.

특히 초기에는 이러한 핸디캡을 우회기동으로 극복하며 빠르게 북상하였지만 베이징에 가까워질수록 우회할 수 있는 지역이 점점 좁아졌으며 화남과 달리 화북인들이 태평천국군에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태평천국군은 1853년 10월 톈진 인근에서 청군에 패하며 후퇴했다. 그러나 북쪽까지 올라오는 동안 주변의 청군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온 격이었고 후퇴하던 중 정해에서 몽골 친왕 셍게린첸[67]과 흠차대신 싱포가 이끌던 청군에 포위되어 이듬해까지 농성한다.

하지만 태평천국군의 상당수가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한 화남 사람들로 이뤄졌으며 익숙하지 않았던 화북지방의 추위로 인해 동사자까지 속출했다. 한편 양수청은 북벌군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급히 파견했지만 이 역시 청군에 패했다. 북벌군은 셍게린첸과 싱포의 불협화음을 틈타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이내 허베이성에서 청군 추격대에 포위되었다. 임봉상과 이개방은 1년 이상 농성하다가 결국 1855년에 청군의 총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으며 이때 청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68]
  • 5월 8일: 북벌군 출발
    원래는 대운하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양저우 쪽의 강북대영(江北大營)[69] 때문에 우회기동으로 진격.
  • 5월 28일: 안후이성 펑양(현 추저우시 펑양현) 점령.
  • 6월 9일: 보저우 점령.
  • 6월 18일: 허난성 카이펑 점령
    이후 황하를 건너려고 했지만 청군이 배를 다 치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 2주에 걸쳐 도하에 성공했다.
  • ~ 9월 1일: 심양(현 자오쭤시 친양시)성을 공격했으나 점령 실패 후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 9월 12일: 핑양 점령
  • 9월 14일: 산시성 훙둥(현 린펀시 훙둥현) 점령
  • 10월 2일: 싱타이 점령
  • 10월 4일: 스자좡 점령
  • 10월 7일: 후퉈강 도하.
  • 10월 11일 ~ 19일: 허베이성 심주(현 헝수이시 선저우시)에서 교전, 점령.
  • 10월 23일: 헌(현 창저우시 셴현) 점령.
    이후 청군은 바오딩의 수비를 강화했지만 오히려 북벌군은 톈진 쪽으로 갔다.
  • 10월 27일: 징하이(현 징하이구)와 두류(独流, 현 두류현) 점령
  • 11월 7일: 양류칭(杨柳青, 현 양류칭진)을 지나 톈진 진입을 시도하지만 실패.
    이후 징하이에서 농성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청군이 공격해 왔다. 그러나 다 패배하고 특히 12월 23일에는 대패했다. 이로 셍게린첸과 싱포가 서로를 비협조하게 되었다.
  • 1854년 2월: 정해 탈출
    하지만 연진(连镇, 현 창저우시 둥광현 리안첸진)에서 포위당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1만의 원군이 파견되었고 양수청은 성 점령하지 말고 구출만 해 오라고 했다.
  • 3월 30일: 원군이 임청(현 랴오청시 린칭시)에 도달해 2주 간의 공방전 후 점령했지만 싱포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바보들도 아니고 결국 포위망 돌파하다가 대부분 죽어 일부만 천경으로 돌아왔다.
  • ~ 1855년 3월: 농성하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임봉상은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해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 1855년 6월: 이개방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능지형을 당해 죽었다. 이로 인해 북벌은 완전히 실패했다.

한편, 태평군의 북벌이 태평천국의 쇠퇴를 부르고 태평군이 상군과 회군에게 격퇴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개방, 임봉상 등이 이끌던 북벌군과 싸운 군대는 셍게린첸과 싱포가 이끄는 팔기 주력군과 각 성의 지방군인 녹영이었다. 게다가 북벌군은 하남, 직예성(지금의 허베이성)을 공격해서 청 조정이 군사적 역량을 하남, 직예 방어에 집중하게 하고[70] 남쪽의 서정군에게는 신경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서정군은 1854년 말부터 석달개의 원군과 합류하여 증국번의 상군을 격파한 뒤 무창[71], 구강, 안경을 차지하고 안휘, 강서, 호북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56년에 양수청이 지휘하던 천경의 태평천국군이 청의 강북 대영과 강남 대영을 격파하여 태평천국은 매우 유리한 상태에 있었으며 태평천국의 북벌에 영향을 받아 하남의 염군이 봉기하여 청군을 괴롭혔다. 따라서 북벌은 상당한 성과가 있었고 태평천국의 쇠퇴를 불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5.2. 서정

태평군의 갑작스런 북벌에 놀란 청 조정이 급히 베이징으로 병력을 재배치하는 동안 석달개의 서정은 점차 증국번의 상군을 밀어붙이면서 그럭저럭 성공을 거뒀다. 후퇴하는 와중에 증국번은 자신의 불효와 불충을 탓하며 장강에 몸을 던져 자살기도를 했으나 부하들이 급히 건져내서 목숨은 부지했다.[72]

이 소식을 들은 함풍제는 증국번을 신임하게 되었고 훗날 태평천국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아무튼 패퇴를 거듭하던 증국번은 남창(南昌)에 고립되었는데 양수청이 석달개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천경 바로 옆에 자리잡던 청군 부대인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태평천국으로서도 수도 바로 옆에 적군이 있는 상황은 매우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양 대영은 태평천국의 공세에 무너졌다. 비록 베이징 공략은 실패했지만 서정을 통해 장강 유역의 영토를 상당수 확보한 데다 눈엣가시 같았던 강남, 강북 양 대영을 물리쳤기에 겉보기에 태평천국은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 5월: 증천양 뢰한영이 지휘하는 2~3만 병력의 서정군 출발.
  • 6월 10일: 안경 점령.
  • 6월 24일: 강서성 성도 남창성에 도착해 3개월 간 공방전을 벌였지만 하필 두 왕을 보내 버린 강충원이 지키고 있었던 데다 병력 부족으로 실패하고 호북성으로 갔다.
  • 9월 말: 석상정 위준(위창휘의 동생)이 구강을 점령했다.

5.3. 1차 강남대영 격파

6. 천경사변

그러나 태평천국 내부에서는 점차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천왕(天王) 홍수전 아래의 다섯 왕인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은 각각 독립적인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분기 이전에 서왕 소조귀와 남왕 풍운산은 호남 지역 공략전에서 전사했으니 천형( 예수)의 대행자(천형하범)를 자처했던 소조귀(1852년 9월)와 초창기 홍수전 대신 조직을 구축했던 풍운산의 죽음(1852년 6월)은 양수청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을 겸임한 양수청은 스스로 신탁을 받는 방식[73]으로 배상제회의 신도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전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까지 했다.[74] 그래서 더는 두고볼 수 없었는지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를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는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양수청에게 원한[75]이 있던 위창휘는 양수청과 그의 가족, 부하, 동왕부 병력 2만명을 학살하고 이를 만류하던 석달개 역시 의심하면서 마찬가지로 석달개의 가족, 부하들을 학살하고 익왕부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석달개는 겨우 피신해서 살 수 있었다.

이에 경악한 홍수전은 위창휘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위창휘가 홍수전을 무시하고 핍박하면서 전횡을 일삼자 위창휘한테 위협을 느낀 홍수전은 위창휘의 부하인 연왕 진일강을 포섭해 위창휘를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인 진일강이 위창휘를 공격하여 패배시킨 다음 그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동왕부 병력의 최후를 기억하던 북왕부 병력과 천왕부-연왕부 병력 간의 시가전이 벌어지고 홍수전은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히려 진일강을 도성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그리고 홍수전은 사태 수습을 위해 양수청이 죽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했다고 발표했다.

7. 익왕 이탈

천경사변이 종료된 후 피신했던 석달개가 돌아오고 태평천국은 안정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양수청, 위창휘를 숙청한 홍수전이 1857년에 인척인 홍인발, 홍인달을 안왕과 복왕에 봉하고 권력을 나누어 주어 홍씨 가문의 친정 체제를 세우면서 태평천국의 내분은 더 악화되었다. 특히 인척들에게만 권력을 나누어 준 것도 문제인데 하필이면 이들이 모두 무능하고 부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망이 있고 자기 세력도 상당한 석달개를 심하게 견제하고 시기했는데 결국 이들의 시기와 견제를 견디다 못한 석달개가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태평천국의 역량은 훨씬 더 약화되었다. 또 같은 해에 홍수전은 군사, 행정 업무를 몽득은에게 맡겼는데 몽득은도 무능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홍수전과 그 형들의 시기와 핍박을 이기지 못해 천경을 탈출하듯 빠져나온 석달개는 쓰촨성()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양광, 호광, 운귀, 사천 지역을 휩쓸면서 청군을 격파하고 농민 봉기를 촉발시켰지만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탈한 까닭에 태평천국 본국의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여러 전투에서 태평천국이 밀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데다 석달개의 군대는 본국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산적처럼 생활해야 했다. 결국 10만이 넘던 석달개의 대군은 대부분이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탈영하고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2천으로 급격하게 줄었다.

1863년 사천성 대도하에서 석달개와 그의 군대는 사천 총독 낙병장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에게 전멸당했다.[76] 태평천국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집단 지도 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8. 쇠퇴의 조짐

태평천국의 쇠퇴는 상술한 대로 1856년 9월에 양수청이 숙청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지도자들의 내부 분열이 주요한 원인이었고 이로 인해 1856년 12월에는 무창을 빼앗겼다. 그리고 다음해인 1857년 여름에는 석달개가 이탈하고 천경이 다시 포위당했다. 1858년부터 태평천국은 수세로 몰렸고 이전보다 세력이 줄어들어 서정군이 점령한 구강도 빼앗기고 장강의 통제권마저 증국번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태평천국에는 내부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했는데 태평천국의 중앙 정부와 지방의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이수성을 비롯한 태평천국의 군 지휘관들은 중앙에 있던 홍인발, 홍인달 형제를 불신하고 경멸했으며 이들의 전횡에 불만을 터뜨렸다. 북벌군을 이끌었다 전사한 이개방 역시 이들 형제를 싫어했었다. 예전부터 이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9. 소수의 충신

그나마 태평천국에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등장하여 분전한 덕분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 최후의 명장이자 충신이라고 불리는 이수성만 해도 아예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 홍씨 파벌에 맞섰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홍인발, 홍인달도 이수성을 매우 싫어했으며 홍수전을 충동질해 이수성의 권력을 줄이거나 아예 숙청해 버리려 했다. 태평천국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홍수전이 이수성을 쳐내자는 형들의 제안은 거부했다. 다만 이수성에 대한 견제는 이어갔으며 이 때문에 이수성은 본인 가족들을 천경에 묶어 두어 홍수전의 의심을 피해야 했지만 홍수전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기 때문에 이수성은 홍수전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아예 독립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징으로 와서 최후까지 싸웠다. 결국 이수성은 홍수전이 사망한 후에도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을 대피시키려다가 청군에게 생포되어 처형당했다.

상황이 이랬다 보니 태평천국은 중앙 정부와 지방의 군 지휘관들 간에 소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선의 군 지휘관들끼리 상호 지원과 연합 작전을 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태평천국의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동왕 양수청[77]이 군사 작전과 보급을 통제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중앙과 지방이 완전히 따로 놀게 되었다. 다행히 1858년 9월에는 안휘 북부에서 상군을 격퇴하고 11월에는 안휘성 삼하에서 이수성, 진옥성의 태평군이 상군과 격돌해 상군 지휘관인 이속빈과 증국번의 동생 증국화를 패사시키고 상군 정예를 궤멸시켜 증국번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에는 강북 대영을 궤멸시켜서 안경과 천경의 안정을 되찾고 교통로를 확보했다.

10. 멸망

한편 1859년 4월에는 홍수전의 동생 홍인간이 홍콩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78] 간왕에 봉해지고 자정신편을 저술해 개혁을 시도했지만 태평천국의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860년에 태평군이 장강 북쪽의 청군을 격파해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개혁을 보조할 만한 경제적 근거지를 확보하지는 못했고 장강 중류에서 버티던 증국번의 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휘의 염군과의 연계도 불안정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이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낙하산이었던 홍인간은 이수성 등 당시 태평천국 실력자들과의 대립도 심했기 때문에 내부에서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했다.[79]

반면 청군은 초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북에서 숨을 고르며 진영을 가다듬었고 증국번의 상군으로 대표되는 한인 신사층들의 민병대인 단련들이 조직되면서 태평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상군을 모티브로 삼아 회군이라는 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회군을 지휘하여 훗날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유명한 이홍장이었다.

더군다나 서양의 열강도 '상승군'과 '상첩군'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조직하여 청나라를 지원하였다. 서양에서는 처음에는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것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정작 태평천국은 농민 공산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반외세를 외쳤으며 실제로 상하이 닝보 등의 유럽 각국의 조차지를 공격하는 등 서양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난징조약으로 자국 수출품의 주시장인 장강 유역을 얻었던 영국 등은 이 지역을 태평천국이 차지한 것을 우려해 본격적으로 청조를 지원했다.[80]

결국 천경이 청나라 군대에게 공격받아 태평천국군은 최후의 저항을 했으나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이 사망한 뒤 1달 만에 천경이 함락됐으며 태평천국의 잔존 세력인 뇌문광이 도적떼의 연합체인 장낙행의 염군(捻軍)과 연합해 4년간 청에 저항하지만 결국 이홍장과 좌종당의 상군에게 진압되는 것(1868년)으로 태평천국의 난은 끝났다. 그러나 안 그래도 멸망의 신호가 나타나던 청조는 이를 계기로 그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특히 청나라의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으로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며 청 왕조에 대한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었고 청나라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인구도 많은 강남 지역이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초토화되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최소 2천만 명의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들 중 적어도 5위 안에 드는 수준이다. 당시 청나라에서 실시했던 인구 조사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부분의 추정치가 2천만에서 3천만을 웃도는데 이는 태평천국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청나라와 태평천국 양쪽의 국민 대부분이 참가한 총력전이었다는 사실과 제1차 세계 대전에 비해 전쟁이 지속된 기간이 길다는 것, 양측의 국민에 대한 학살이 빈번했다는 것, 청나라를 제외하고 여러 열강들도 잔당 소탕전을 비롯한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설명된다. 또 앞서 언급했듯이 태평천국 운동이 벌어진 지역이 중국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강남, 즉 양쯔강 중하류 지역인 것도 한 몫 했다.

놀라운 것은 내분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군은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했는데 그 이유는 청나라는 태평군이 항복해오는 족족 처형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포로가 된 태평군에게는 용서가 아닌 청군에 의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사람이 태평군 지휘관이면 반드시 능지처참으로 처형했다. 그나마 이수성은 증국번의 호의로 능지형이 아닌 참형으로 죽었다. 사실 청나라도 전쟁에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으면 적이 죽기살기로 싸우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끈다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14년 이상 끌었지만 태평천국 점령지에서 만주족 학살이 자행되었던 터라 이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항복을 받아 주지 않았다.

실제로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을 비판하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하는 행위를 반역에 준하는 중죄로 다스렸다. 결국 태평천국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여의치 않으면 청군에 잡히기 전에 집단 자살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 문제 때문에 진압군 내에서도 충돌이 있었다. 한 예로 이홍장의 상군을 지휘하던 찰스 조지 고든 쑤저우를 공략할 당시 무혈 항복하는 대가로 태평천국군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했는데 고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홍장은 이 원칙에 따라 태평천국군을 몽땅 처형했다. 이 때문에 고든은 격노해서 이홍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날뛰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이 앙금은 이후에도 남아서 진압의 공로로 동치제가 참전 지휘관들에게 상을 내리자 고든은 이 처형 사건을 언급하면서 상을 거절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청도 태평군에서 항복해 온 장국량을 중용한 바 있고 이수성은 청군에 항복한 태평군 집단을 진압한 전례가 있으므로 전멸전이었다고만 결론 짓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1] 붉은색이 태평천국이다. 여담으로 영상을 잘 보면 태평천국 영토의 변화와는 별개로 시간이 지날수록 청나라의 영토가 계속해서 축소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2차 아편전쟁을 비롯한 외국과의 충돌로 계속해서 영토를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는 이 기간, 러시아에게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대거 빼앗겼다. [2] 현재 광저우 화두구(花都区) [3] 인쇄업자이자 최초의 중국인 목사였던 양아발(梁阿發)이 지은 책이었다. [4] 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시 진티안진(金田镇) [5] 태평천국의 발상지인 광서성의 경우, 18세기 초반의 인구는 100만 명이 안 됐지만 태평난이 일어날 무렵에는 곳곳의 난민과 방랑자들이 정착하여 무려 1000만 명이 거주하는 비좁은 땅이 되었다. [6] 다만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 내부에서 아편을 자체 제조해 아편의 '국산화'를 이루면서 아편 수입을 이유로 유출되는 은의 양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7] 사악한 신을 없애자는 것 [8] 당연히 홍수전이 예수마냥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고, 파편적으로 아는 의학 지식을 사용한 것이었다. 또 당시 태평천국에는 본명이 이준창(李俊昌)인 이준량(李俊良), 하조원과 같은 전직 군의관들이 상당히 가입해 있었다. 덧붙이자면 홍수전의 처남 뇌한영도 의사 출신이었다. [9] 당시 계투가 발생한 구이현(貴縣)과 홍수전의 외가 일족이 살던 사곡촌(賜谷村)은 가까워서 당연히 홍수전은 이런 항쟁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세력만을 흡수했다. [10] 홍수전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표한 글이다. [11] 실제로 홍수전을 비롯한 태평천국 인사들은 청나라를 가리켜 청요, 즉 요괴라고 불렀다.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한 것이다. [12] 이 무기들 중 일부는 우연히 발견한 척하여 하늘이 무기를 내렸다고 선동하는 데 사용되었다. [13] 홍인간은 반란 자체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합류를 시도했는데, 결국 합류하지는 못했다. [14] 현재 광서성 구이강시 평남현 [15] 이는 태평천국군의 군사적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석달개의 전략때문이었다. [16] 때문에 금전기의(金田起義)라고도 한다. [17] 광서성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시 강구진(江口鎭) [18] 주요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임시적인 관직인데, 청나라 말기에는 광서, 광동을 관리하는 양광총독이 겸직하는 상설직에 가까워졌다. [19] 현재 광서성 라이빈 시(来賓市) 무선현(武宣县) [20] 광서성 구이강(贵港)시 탄탕구(覃塘区) 산리진(三里镇) [21] 현재 광서성 라이빈시(来賓市) 상주현(象州县) [22] 마침 운 좋게도 홍수전의 의형제이자 배상제회 소속이었던 능십팔(凌十八)이 고향인 광동성 신의현(信宜顯)에서 같이 거병하여 청군의 이목을 끌었다. 능십팔은 3,000명을 이끌고 홍수전과 합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1852년에 패배한 후 자살했다. [23] 팔기군 정황기(正黃旗) 출신의 만주족으로, 화기 사용에 능했다고 한다. [24] "이 반란집단은 다른 유적(流賊)과 전혀 다른 자들입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성원이 다수 있어 단결도 매우 강합니다. 계략을 쓰고 첩자를 사용하여 해산시키려고 해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거듭해서 처벌하거나, 체포해도 그들이 통과하는 지방에서는 차례로 우민을 선동하여 동료로 끌어들입니다. 일단 동료로 들어가면 모두 태연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투의 선두에 서서 포로가 된 자나, 그들이 지방에 내보낸 첩자를 붙잡아 고문을 가해도 두려움을 모르고 사형을 면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습니다. 천부천형의 사설(邪說)을 믿으면서 죽어도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25] 은자 5냥만이 소유 가능했고, 나머지 재산은 공동 창고에 저축했는데 이는 군비의 확보도 목적이었지만 다른 마음을 먹고 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다. [26] 훗날 포로가 된 이수성의 진술에 의하면 출병 후에는 후회하는 자가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 [27] 향영은 이때의 패배로 광서제독에서 해임되었다. [28] 이곳에서 이수성, 진옥성, 진득재 등이 태평천국군의 행군에 참여했다. [29] 현재 광서성 멍산현(蒙山縣) 멍산진(蒙山镇) [30] 현 멍산현(蒙山縣) 수이시우춘(水竇村) [31] 영안성의 최남단 방어선 겸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수군과 육군의 연락선이기도 했다. [32] 현재 멍산현(蒙山縣) 동부 산악지대의 구수총(古蘇冲) [33] 현재 구수총(古蘇冲)과 자오핑현(昭平縣) 사이의 협곡 지대 [34] 현재 광서성 계림 양숴현(阳朔縣) [35] 현재의 싱안시 [36] 유명한 진시황이 기원전 219년부터 기원전 214년까지 5년 동안 공사하여 완성시킨 운하로 계림의 남쪽은 바다, 북쪽은 중원으로 통하도록 한 관문이었다. [37] 이 길은 진시황 백월을 점령하기 위해 개척한 유서깊은 길이었는데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황소도 이 길을 건넌 바가 있었다. [38] 현재 취안저우시 [39] 당시 청나라 추격군은 영안에서 패배를 당한 후 기세가 사그라들어, 전주성을 구원하지 않았다. [40] 풍운산이 이끌던 부대의 대부분이 광신적인 군관들이라 더더욱 분노하여 전주성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심지어 태평군의 전주성 학살은 당시 태평천국의 교리를 어기는 것이었다. [41] 전주(全州)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육로로 약 5km 가량 떨어져 있다. 25km 정도를 강으로 나아가면 호남성으로의 진입이 가능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42] 기존의 설과는 다르게 당시 상강의 수심이 호우로 인해 높아져서 강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근처의 저수지를 막은 것으로 추정된다. [43] 현대의 조사에 따르면 300m 정도의 고지였으며, 숲이 우거져서 공격에 용이했다고 한다. [44] 現 융저우시. [45] 현재 다오저우시 [46] 양수청은 장강을 따라 난징을 점경해야 하며 그런 후 군사를 내어 남북을 어지럽히면 최소한 황하 이남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47] 현재 천저우시 [48] 호남성 태평천국의 침입을 허용하여 신임 순무 장량기(張亮基)와 교체될 예정이었으나 장량기가 도착하지 않아 군사를 지휘했다. [49] 소조귀를 상징하는 큰 깃발이 오히려 표적이 되었다. 참고로 당시에는 태평천국군이나 청군이나 다 강선이 파여있는 라이플을 서양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저격이 충분히 가능했다. [50] 나중에 태평군 포로를 통해 묻힌 장소를 알게 된 청군에 의해 소조귀의 무덤은 파괴되었고, 그 시체는 훼손되었다. [51] 현재의 지에지저우(桔子洲) [52] 안중무는 태평천국군이 악주를 떠난 후 인근을 돌며 청나라의 보급선을 차단하다가 1852년 말에 붙잡혀 사살되었다. [53] 무창과 청군의 연락을 끊기 위함이었다. [54] 호북 순무 상대순(常大淳)은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55] 강서순무(江西巡務) 장불(張芾)은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56] 향영은 2월 21일에 구강에 도착했는데 앞에 파양호가 가로막고 있고 배가 없어서 전진을 못하고 보름 가량 지체하고 있었다. [57] 장문경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하인의 도움으로 탈출 중 적발당해 사살되었다. [58] 현재의 당도현(當塗縣) [59] 현재의 화현(和縣) [60] 흠차대신 기선(琦善)과 향영은 이 날 각자의 부대를 이끌고 안경에서 만나는 등 태평천국의 속도에 뒤처졌다. [61] 만주족은 기독교를 믿어도 당연히 학살의 대상이었고 태평천국에 찬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자비는 없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교리가 비슷함을 알고 일부 사람만 군대나 일터로 징집하고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렇게 끌려간 천주교인들은 대다수가 눈치껏 도망쳤다. [62] 불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라 절들은 불태워졌다. 이슬람교는 의외로 내버려 뒀다고 전해진다. [63] 홍수전이 남경을 점령하고 나서 선포한 구호는 "관군은 한 명도 살려두지 말고, 백성은 한 명도 다치게 하지 마라."였는데, 여기서 관군은 만주족 팔기군이고 백성은 한족이었다. [64] 주원장 황후인 마황후의 무덤 [65] 사실 양수청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당시 태평군들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위의 태평천국의 지도나 앞서 나온 태평천국의 활동을 보면 이들은 유랑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점령지역을 영역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세력은 증가하고 여러번 청나라의 지방군들을 격파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일어난 양광지역을 한참 벗어나서 호광지역까지 북상해 있었는데 기반이 될 지역이 한 곳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당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기반으로 삼을 지역 확보였는데 이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 청나라의 제2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66] 북벌군 2만 명도 군기가 문란한 청군에 비하면 군기가 훨씬 우수하였는데 따뜻한 남쪽 출신들임에도 북방의 추운 날씨에 시달리면서도 엄격한 대오와 높은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67] 칭기즈 칸의 형인 주치 카사르의 후손이다. [68] 다만 이때 싱포는 태평천국군보다 10배의 병력임에도 진압이 늦어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파면되었지만 몽골 귀족이었던 셍게린첸은 포상을 받았다. [69] 1853년 3월에 기선이 건설한 요새 [70] 태평천국의 북벌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남의 태평천국군이 하남, 산서, 직예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청 조정 입장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71] 태평군은 거병 초기에 무창을 점령했으나 곧장 포기하고 난징으로 향했다. 서정군이 이 시기에 다시 빼앗은 것. [72] 이게 당연한 것이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은 각 지역 마을에서 자치방위를 하던 민병대들로 지금으로 따지면 민방위 비슷한 것이었다. 증국번의 위세와 권위에 호광지역의 향신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향용들을 이끌고 조직되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부족하였고 대규모 작전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증국번 자체가 이들을 모은 이유 자체가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었지 소탕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73] 즉, 하느님이 양수청의 몸을 빌어서 명령을 했던 것이다(천부하범). 명목상의 왕은 하느님의 대리자인 홍수전이었지만 양수청의 몸에 하느님이 강림했다면 꼼짝 없이 쩔쩔매었고 실제로 하느님이 현현한 양수청 밑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천부하범은 양수청이 창조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광서성에서 무당에게 신이 빙의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의 신앙이 있었던 것을 양수청이 살짝 변질해서 써먹은 것이다. 태평천국의 핵심 집단인 광서성 출신의 노형제 집단은 무당의 신내림에 익숙한지라 자신의 몸에 신이 내려왔다는 양수청의 말에 믿음을 가졌다. [74] 기껏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게, '왜 천왕 홍수전에게는 만세를 부르고, 동왕 양수청에게는 구천세를 부르느냐. 동왕에게도 만세를 불러라'(이것이 터진 게 핍봉만세 사건이다.) 따위의 속 보이는 것이었으니… # [75] 위창휘는 지주, 석달개는 부농 출신이었고 양수청은 숯구이 출신이었으나 양수청은 지위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모욕을 자주 주었다. 서정군과 합류해 원정 중이었던 석달개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동왕 양수청을 보좌해 국정에 참여하던 위창휘는 늘 양수청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홍수전까지 위창휘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76] 안내인의 배신으로 2천 병력과 함께 절벽에 고립되었는데 석달개는 자신의 부하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낙병장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낙병장은 무심하게도 석달개의 병력을 공격하여 몰살시켰고 석달개 역시 포로가 되어 6주 후 능지형을 당해 32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같이 포로가 된 석달개의 부장인 증사화도 능지형에 처해져 죽었다. 이때 석달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능지처참에 임하였고 산채로 칼질당하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석달개가 잡힌 이유는 아들이 태어나 잔치를 벌이느라 며칠을 지체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루딩교를 건너지 못해 잡혀 죽었다고 한다. 참고로 루딩교는 대장정에서 제일 극적인 순간이 연출된 다리로, 마오쩌둥은 석달개의 실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사대를 보내어 쇠사슬만 남아 있던 다리를 차지하도록 했고 국부군은 기습을 당해 이 다리를 빼앗겨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77] 양수청은 무학의 숯구이 출신에 무자비하고 독선적인 데다 각 왕들과 갈등을 벌이고 주요 인사들까지 그에게 불만을 갖고 있을 정도로 문제 인사였다. 그러나 양수청은 정치와 행정에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정보 기관을 운용해 태평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1854년에 태평청국이 금지하고 요마로 간주한 유학을 태평천국의 이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활용하는 정책을 실시해 지식인 계층을 흡수하려고 한 것도, 1856년에 있었던 청의 강북, 강남 대영을 격파한 것도 그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78] 홍인간은 서양 학교 좀 다닌 수준이 아니라 당대 서양 최고의 중국 학자 중 한 명이자 중국 고전 영어 번역의 선구자로 꼽히는 제임스 레그의 조수였다. 서양 문물에 관해서는 태평천국은 물론 중국 통틀어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셈이다. 또 제임스 레그는 홍인간이 본토로 돌아가 태평천국 운동에 참여하려는 걸 강경하게 말렸지만 결국 홍인간은 제임스 레그와 결별하고 태평천국으로 돌아갔다. [79] 홍인간은 홍콩에서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 왔기에 전통적인 체제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졌다. 이에 <자정신편>은 <천조전무제도> 이상으로 당시 시대적으로 비현실적인 제도가 되었다. [80] 무엇보다 이 시기에 벌어진 2차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은 청나라에게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태평천국에서 열강에게 이 정도의 대우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제거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44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544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