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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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무라야마 도미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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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3283> 제12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타나베 마코토 田邊誠 | Tanabe Makoto |
|
출생 | 1922년 2월 25일 |
일본 제국 군마현 마에바시시 | |
사망 | 2015년 7월 2일 (향년 92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구제 체신관훈연습소 (졸업) |
최종 소속 |
|
파벌 |
|
종교 | 기독교 |
의원 선수 | 11 (중) |
의원 대수 | 29,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지역구 | (구) 군마 1구 |
약력 |
체신성 직원 체신성 노동조합 군마현지부 위원장 군마현의회 의원 일본사회당 집행부서기장 일본사회당 중앙집행부위원장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제12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지냈다.2. 생애
타나베는 1922년 2월 25일 군마현 마에바시시에서 태어났다. 구제 마에바시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비 지급 없이 무료로 교육을 받을수 있는 체신관리연습소에 진학했다. 연습소를 졸업한 이후에는 마에바시 우체국에 취직해 우편 관련 업무를 맡았다.1943년에 징집되어 입대하였지만,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잦은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한다.[1] 1945년 일본의 패전이후 마에바시 우체국에 복직했다. 타나베는 상사의 부당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이 모습을 본 군마현 체신노동조합에서 그를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이후 전국체신노동조합 군마지구위원장과 군마지방노조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55년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군마현 현의원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현의회에서 댐 건설과 관련된 비리를 맹렬하게 추궁했고, 키타노 시게오 당시 군마현지사가 재선을 단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군마현 제1구에서 첫 당선되었고,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지만 1967년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이후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 사회당 국회대책위원장직을 지냈다. 타나베는 에다 사부로의 우파사회당에 소속되어 당내 우파의 중진의원으로 성장했다. 한편 이시기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인 가네마루 신과 친분을 쌓으면서 사회당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요구를 자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2]
1983년 사회당 집행부서기장 히라바야시 타케시의 사망으로 인해 후임 서기장으로 취임했고 이시바시 마사시 중앙집행위원장 체제에서도 당직을 유지했다. 1985년 12월 타나베는 사회당이 기존의 일본식 사회주의 체제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개편하기 위한 사회당 신강령 작성에 중심 의원으로 활동했다.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ㆍ 제14회 참의원 의원 총선거(중참 동시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집행부서기장직에서 물러났다.
1986년 도이 다카코 신임 중앙집행위원장의 배려로 사회당 중앙집행부위원장에 취임했다. 1991년 통일지방선거 참패로 도이 중앙집행위원장이 물러나자 타나베가 제12대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가와카미 조타로 이후 28년만의 우파사회당 출신 위원장이었다. 자민당 및 공명당 등 보수 및 중도 정당에 폭넓은 인맥을 가졌던 타나베는 사회당을 기존의 좌파 일색에서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탈피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 또한 타나베도 이를 위해 당내에 그림자 내각을 두는 등 정권 교체를 위해 노력했다.[3]
1992년 "유엔 평화유지 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률" (PKO법)안에 대해 타나베는 자위대가 아닌 별도의 조직을 파견하는 대안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같은 야당인 공명당과 민사당이 이 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고, 당 내 좌파들의 반발도 있어 곧바로 PKO 법안 반대로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공명당과 민사당은 자위대 파병에 찬성 입장을 나타내고 있던 입장이었고, 사회당은 뒤늦게 공산당과 함께 PKO 법안 통과 저지를 노렸으나 결국 해당 법안은 통과되었고 그해 7월 열린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참패를 당했다.[4]
PKO 법안 저지 실패와 참의원 선거 참패로 타나베가 물러나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와중에, 그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던 가네마루 신이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실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타나베는 1993년 1월 위원장직을 같은 우파사회당 출신인 야마하나 사다오에게 넘긴 뒤 당직에서 물러났다.
1993년 55년 체제가 무너지고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하자 과거 사회당의 거물인 타나베에게 입각 요청이 들어왔으나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막후에서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유지를 위해 힘썼다.[5]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당시 민주당이 창당 될때 설립위원회에 참여했다.[6] 1997년 6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며 민주당에 합류했고, 민주당 군마현 고문을 맡으며 말년을 보냈다.
3. 소속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1955 - 1996 |
입당 정계입문 |
|
1996 - 1997 |
당명 변경 정계은퇴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탈당 |
|
1997 - 1998 | 입당 |
|
1998 - 2015 |
합당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5 | 군마 현의회 선거 | 마에바시시 |
|
- (-%) | 당선 | 초선 [7]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舊 군마 1구 | 48,238 (18.20%) | 당선(3위) | 초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8,667 (18.41%) | 낙선 (4위)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9,312 (25.00%) | 당선(3위)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127 (28.03%) | 3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285 (22.77%) | 당선(1위) | 4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4,692 (18.90%) | 5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138 (22.99%) | 당선(2위) | 6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282 (27.22%) | 당선(3위) | 7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205 (22.88%) | 당선(2위) | 8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935 (25.62%) | 9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768 (27.55%) | 당선(1위) | 10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804 (16.86%) | 당선(3위) | 11선[8] |
5. 여담
왼쪽부터 가네마루 신, 김일성, 타나베 마코토 |
- 1990년 자민당 의원인 가네마루 신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했다. 이때 북일 국교수립 관련 회담을 계기로 한동안 북한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훗날 납북 일본인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타나베는 북한이 자신을 속였다며 크게 공분해 북한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1]
한국에선 크리스천이 흔하지만 불교, 신토, 무종교인이 절대다수인 일본에선 특이 케이스다.
[2]
1992년 가네마루가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인해 실각하자 가네마루와 친분이 두터웠던 타나베도 정치자금을 받은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확인결과 아무런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게 드러나며 그의 청렴성이 부각되었다.
[3]
그러나 위원장 선거 당시
좌파사회당 출신인 우에다 데츠와 표차이가 1만표 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로 당 내 기반이 약했고, 이 때문에 당 내 좌파의 간섭을 자주 받았다.
[4]
하지만 정작 당에서 많은 세력을 차지하며 정책에 사사건건 간섭을 건
좌파사회당 인사들이 타나베가 가진 자민당 인맥에만 기대하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PKO법에 반대하면서도 해당 법안에 찬성했던 공명당, 민사당과의 선거 협력은 계속 이어나갔던 모순이 선거 패배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5]
당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렌고) 회장인 야마기시 아키라는 타나베를 새 정권의 중의원 의장으로 추천했지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전임 사회당 위원장인
도이 다카코에게 해당 직책을 양보했다.
[6]
하지만
사회민주당 당적은 1년 동안 유지했다.
[7]
1959.3 현의원직 사퇴(중의원 선거 출마)
[8]
일본 중의원 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