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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0><colcolor=#ffffff>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Cosimo di Giovanni de' Medic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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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89년 9월 27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464년 8월 1일 (향년 74세) |
피렌체 공화국 카레기 | |
재임 |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
1434년 9월 5일 ~ 1464년 8월 1일 | |
배우자 | 콘테시나 데 바르디 (1415년 결혼) |
자녀 | 피에로, 조반니, 카를로 |
아버지 |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
어머니 | 피카르다 부에리 |
형제 | 로렌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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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는 대단히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중후하고 예의바르고 덕망이 넘치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초년은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 속에서 지냈으나 지칠 줄 모르는 관대한 성향 탓에 모든 정적을 누르고 백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거부이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당대에 그만큼 국정에 통달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렇게 변화무쌍한 도시에서 그는 3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것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 정부 개혁 담론》(Discorso sopra il riformare lo stato di Firenze) 中
―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 정부 개혁 담론》(Discorso sopra il riformare lo stato di Firenze) 中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사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라고 불렸다.
2. 성격
주변의 인문주의자처럼 박식하지는 않았지만 피렌체인들을 무시하는 비오 2세로부터 '매우 교양이 풍부한 지식인으로 보통 상인보다 학식이 있다'고 인정받을 정도였으며, 어려서부터 고전 원고를 수집했다고 한다. 인문주의자들이 주로 배우는 수사학 등을 완전히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학문에 박식한 자들은 그가 피렌체 사회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고 하며,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보통 인문주의자들과 다르게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시내 거리를 돌아다닐 때 수수한 복장으로 시종 하나만 대동하면서 노인들에게 길을 양보하거나 행정장관들에게 극도의 예우를 갖췄으며, 언제나 다른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했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사업상의 조언을 구하면 조용히 신중하게 경청하면서 우정을 거부하듯이 퉁명스러울 정도로 짧게 대답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면서 신뢰했다고 한다.
아버지 조반니가 임종 직전
'부자와 강자를 거스르지 말면서 빈자와 약자에게 항상 자비로우라'
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들들에게 충고했지만 코시모는 외향적인 겸손과 조심성을 가지면서도 아버지보다 훨씬 더 야심이 많았으며, 자기 재산을 다른 용도에 사용했다.은행가로서 아버지만큼이나 기민하면서도 가족 사업을 계속 확장해 조직자로서의 명민성과 놀랄 정도의 기억력, 가끔씩 밤을 새고 일할 정도의 근면성으로 유명했으며, 지점 경영자들을 현명하게 선택해 면밀히 감독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요구했다. 지점 경영자들이 피렌체 활동 사항을 규칙으로 자세히 보고하자 그 대가로 상당히 수익을 분배했으며, 아버지 조반니의 동업자인 바르디 가문의 방식이 구식이라 여겨 로마의 지점장 안토니오 디 메세르 프란체스코 살루타티와 제노바의 지점장 조반니 디 아메리고 벤치를 동업자로 삼았다고 한다.
노년기에는 창백한 표정이 냉소적으로 보이거나 짤막하고 애매모호한 논평이 비난이나 조롱을 뜻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의 태도는 경외감보다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한다.
3. 생애
3.1. 초기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인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축일인 9월 27일에 태어나 자신이 의뢰하는 그림이나 자신을 기념하는 그림에 고스마와 다미아노를 자주 등장시켰다고 하며, 어린 시절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의 카말돌레[1] 수도회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도 대충 익혔다고 한다.이후 다른 부유한 피렌체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인 로베르토 데 로시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로시의 지도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의 토론 모임으로 고전 학문과 고전적 이상을 존중하면서 지구상의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아버지인 조반니의 동업자인 조반니 데 바르디의 장녀 콘테시나 데 바르디와 혼인해 바르디 궁으로 이사하면서 각 방에는 메디치의 표상을 눈에 띄지 않게 장식했으며, 3년 이상 로마 지점을 경영하면서 가끔 피렌체를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티볼리에 있는 저택에서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대리인이 사온 마달레나는 노예 소녀가 뒷바라지를 해주어 마달레나와 동침해 카를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를 얻게 된다.
한동안 사업상 로마에 체류하여 가문의 경쟁자들이나 피렌체의 적대국들의 질시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미누토 포폴로에 대한 지지도로 알비치 가문의 의혹을 불러오게 되었다.
3.2. 알비치 가문과의 대립
긴급 위원회인 전쟁 위원회의 10인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1429년 루카 시와의 전쟁에 알비치 가문의 지휘하에 참전했으며, 알비치 가문의 지휘하에서는 피렌체 군대가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대 루카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1430년 가을에는 불리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면 안된다는 것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도 전쟁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줄 것으로 주장하면서 피렌체로 떠나 베로나로 갔다.[2]
1432년 가을에는 또다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에 가서 무젤로 지방의 일 트레비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피렌체 은행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로마와 나폴리 지점으로 신중하게 이동시켰으며, 주화 꾸러미들을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베네딕토회 은둔 수도자들과 산 마르코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무젤로에 머무르고 있을 때 9월 첫째주에 피렌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1433년 9월 4일에 피렌체로 귀환했으며, 알비치 가문이 퍼뜨린 악성 소문 때문에 7일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갇히자 시뇨리아 궁의 감옥에서 독살 위험을 구실로 식사는 바르디 궁에서 조달받았으며, 경비원 페데리고 말라볼티가 코시모에게 동정적이라 방문객을 상대로 여러 전언과 뇌물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알비치 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반역죄를 부과하여 사형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 구아다니에게 뇌물로 1,000플로린를 먹여 투표권을 마리오토 발도비네티에게 위임하게 했고, 마리오토에게도 뇌물을 먹였으며, 이러한 뇌물과 함께 무젤로에서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군대가 모집되자 28일에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사촌 아베라르도와 함께 재판을 받아 10년간 파도바로 추방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배 길에서 칭송을 많이 받아 페라라에서 후작 집안의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파도바에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 대우를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2개월간 지내다가 베네치아에 있는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합류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산 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수도원에 정착해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이 위임했던 피렌체의 건축 작업이 잠정적으도 중단되자 베네치아까지 동행한 건축가 미켈로초 미켈로치에게 건물 설계를 맡겼으며,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 피렌체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자세히 들었다.
피렌체에서 알비치 가문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1434년 늦여름 무렵에 밀라노의 용병이 피렌체의 군대를 격파하자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면서 1년 만에 유배령이 철회되었으며, 9월 28일에 출발해 베네치아 병사 300명의 호위를 받아 피렌체로 귀환하면서 알비치 가문을 추방했다.
3.3. 권력 장악과 외교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자 수년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부유하고 관대하면서도 친근한 은행가 행세를 했으며, 정치, 외교적인 업무가 나오면 무조건 떠맡거나 국가의 경제 정책을 지도했다. 시에서 누구보다 더 높은 이율의 세금을 내면서도 다른 신중한 부자처럼 부채를 강조하면서 납세 가능한 수입을 축소시켜 정확한 재산액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3번만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되어 가식이나 허세를 피해 말보다 노새를 타고 다녔다.국가 안보와 조세 제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콘실리오 마지오레'라는 위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도 루카 피티를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시켰으며, 1439년에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공의회가 열리는 페라라에서 역병이 생기자 동생 로렌초의 설득으로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열게 하여 위신이 높아졌다.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화합은 얼마 안 가 깨졌지만 시의 무역업에 도움이 되었고,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리면서 고전 문서, 역사, 미술, 철학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30년 동안 외교 정책을 통제해 중요한 일을 메디치 궁에서 결정했으며, 외국 대사들은 종종 궁을 오가며 임무를 착수하기 전에 무조건 코시모를 방문했다고 한다. 밀라노에 대한 적대 정책을 부적절하게 여겨 피렌체인들을 설득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하던 이탈리아의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피렌체 납세자들에게 추가 보조금을 받도록 해주는 등의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해 1450년 3월에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는데 도움을 줬다.[3]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원조한 일로 네리 카포니, 잔노초 마네티 등 피렌체 사람들의 반발을 샀지만 베네치아는 레반트 지방 때문에 서로 충돌한 문제와 지중해 동부 지방을 소유하면서 오스만 튀르크와 적대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상호 이득이 되는 무역 관계를 즐겨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으며, 베네치아가 나폴리 왕과 동맹을 맺고, 코시모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베네치아 대사들이 밀라노와의 동맹을 항의하자 이들에게 '정부의 공격자'라고 비난했다.
7월에 밀라노와 동맹국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으로 베네치아와 독일 황제가 동맹을 제안하면서 나폴리와 베네치아에서 피렌체 상인들을 추방하거나 동로마 제국 황제가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모두 철회했으며, 이에 맞서 베네치아 지점을 철수해 밀라노에 새 지점을 열면서 동방 무역에 관련된 담당자들을 불러 그리스인들이 철회해 간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대신 승인받았다.
또한 피렌체의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와 교섭해 1452년 4월, 몽틸레투르에서 피렌체나 밀라노가 공격하면 원조할 것과 스포르차의 밀라노 공작위을 인정하는 것을 약속받았으며, 그 보답으로 샤를 7세가 나폴리를 공격할 경우, 피렌체나 밀라노가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 몽틸레투르 조약에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반발하여, 프랑스가 잉글랜드와의 문제로 정신이 없는 동안 3국 동맹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피렌체와 밀라노에 전쟁을 선포하자 코시모는 피렌체인들의 반발을 사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뒤늦게 프랑스군이 개입[4]한데다가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오스만의 위협이 증대되자 피렌체, 밀라노, 교황청, 베네치아가 연합체를 구성하면서 이탈리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시민들이 적대적인 발언을 하거나 200여 개의 훌륭한 가문들이 형편이 나빠져 세금을 내기 위해 소유물까지 팔 정도인데다가 새로운 세금이 부여되자 코시모가 돈을 모두 빌려줬다. 또한 관련자들이 모두 만족할 때까지 부채 상환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대중의 인심을 얻기 위해 물가가 올라 불평하는 이들에게 많은 양의 곡식을 배급했다. 이때 베네치아는 오스만군에게 고전해 제지를 당하면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으며, 피렌체의 동맹인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받았고, 나폴리도 평화 협정에 승인하면서 코시모의 선견지명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외에 토스카나 출신 의사의 아들인 토마소 파렌투첼리를 후원했는데[5] 그가 볼로냐 주교를 역임하고, 교황 니콜라오 5세로 등극하자 상호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1458년에 니콜라오 5세의 친구인 교황 비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교황청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1469년에는 교황 비오 2세를 만나 유대를 돈독히 했으나, 이 당시 통풍에 걸렸다.
3.4. 수집과 건축
코시모는 대리인들을 시켜 유럽과 근동을 헤매면서 희귀본, 귀중본, 원고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 모았고, 자신의 도서관에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피렌체를 치장했다. 1437년 그에게 큰 빚을 진 니콜로가 죽자 800권의 장서를 수중에 넣으며, 종교서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기증했지만 나머지는 자신이 가졌다.한편 메디치 가문의 돈을 퍼부어 피렌체 전체와 인근 지역의 교회, 수도원, 자선 단체의 건축, 복원, 장식에 힘을 쏟아 그의 자취를 확실히 남겼으며, '아르테 델 캄비오'가 임명한 4인 위원회의 일원이 된 이후에는 기베르티에게 은행가의 수호자인 성 마태오를 조각하는 일을 위촉했다.
바르디 궁에서 증개축된 두오모 광장에 있는 부친 조반니의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건축가인 미켈로초 미켈로치를 고용해 메디치 팔라초와 무젤로에 새 별장을 지었으며, 전원 생활을 즐겨 시간이 날 때마다 피렌체를 떠나 일 트레비오나 카레지의 별장에서 독서를 즐기면서 포도가지를 자르거나 올리브와 아몬드나무를 키워 시골 사람들과 대화했다고 한다. 도시로 올라와 시골에서 들은 속담이나 우화를 인용해 자신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거나 카레지에서 방해받지 않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몬테베키오 별장에 불러 같이 지내면서 식사하거나 체스를 즐겼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피렌체 유학생을 위한 대학을 복원하거나 예루살렘의 산토 스피리토 교회를 수리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증축했으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하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436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거의 완성되자 피렌체에 와 있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간청으로 40,000 두캇에 이르는 거액을 지불해 1437년 미켈로초가 산 마르코 수도원을 새로 건축하도록 했다. 코시모가 산 마르코에 너무 관대해 검소한 수사들이 항의하자
"
하느님을 내 장부에 채무자라 기록할 만큼 많은 것을 드릴 능력이 없다"
고 응수했으며,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소수도원장
안토니오 피에로치와는 절친한 사이라, 코시모가 사적인 용도로 마련한 큰 수도원에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가의 죄가 어떻게 속죄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6] 카레지의 별장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문제가 발생해 역병이 돌면 은둔하거나 무젤로의 시골 사람들을 그의 가족에 더 가까이 귀속시킬 수 있도록 더 먼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싶어해 1451년, 카파지올로에 미켈로초의 설계로 새 별장을 건축했다. 몇 년 후에 아들 조반니가 미켈로초를 통해 '벨칸토'로 알려진 별장을 재건축하려고 하자 그 주변의 땅이 경사가 심하면서 돌이 많아 농사에도 소용없었기 때문에 전망의 목적으로 돈을 너무 많이 허비한다고 못마땅했지만 결국 1463년에 완성하게 된다.
1434 ~ 1471년의 회계 장부에 따르면 66만 3,755 플로린이 건축과 자선 기금, 세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3.5. 학문과 예술가 지원
피렌체 공의회로 수많은 그리스인 학자가 몰렸을 때, 그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플레톤의 강의를 경청하고, 감명받아 플라톤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세워 연구에 정진하려고 했지만 플레톤이 고향에 돌아간데다가 다른 일로 바빠지자 한동안 그 계획은 연기되었다. 몇 년 후 주치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양자로 삼았을 때 피치노가 플라톤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연구 자금을 마련해줬으며, 나중에는 '몬테베키오'라는 별장을 제공해 피치노가 그리스어를 공부하여 플라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1456년에는 그리스인 학자 요한 아르기로포울로스를 불러 피렌체로 이주시켰으며, 피치노가 나이가 들고 학식이 높아지자 몬테베키오의 별장에서 인근 카레지 별장으로 불러 단둘이 만나거나 때로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철학적 문제를 밤늦게 토론했다고 한다.
조각가 도나텔로(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바르디)에게 직접 일감을 주거나 친구들에게 추천해 일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도나텔로가 다른 후견인들과 관계가 좋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재했다. 도나텔로가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자 어느 축제날에는 말끔한 복장과 붉은색 외투나 모자를 선물로 줬으며, 그가 노쇠해져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카파지올로 근방의 메디치 가 소유지에 작은 농장을 마련해 주었다. 농장에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도나텔로가 싫증을 내자 코시모는 도나텔로가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만 받아가도록 배려해줬다.
필리포 리피 수사가 여색을 밝히는 사기꾼이라는 악명을 달고 다니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단화를 그리는 솜씨를 높이 사 코시모 팔라초에서 일할 것을 요청했으며, 프라토에서 작업을 맡게 해 코시모의 사생아인 카를로를 그리게 했다. 또한 코시모는 필리포가 작업중에 유혹하여 임신시킨 수녀와 결혼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부탁해 결혼 특면장을 얻어다 주었으며, 필리포가 호색성 때문에 작업을 하다가 여자를 찾아 나가는 경우가 있자 약속된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나갈 수 없도록 방에 가두었으나 그럼에도 그가 탈출하자 애정과 친절로 돌보면서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도록 약속했다.
조반니 다 피에졸레에게는 산 마르코의 성당 회의소와 회랑 벽 등에 프레스코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성당 회의소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주면서 메디치 방의 프레스코화의 주제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추천했다. 1455년에는 관절염과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냉소적이면서 신랄해졌으며, 1458년에는 미켈로초에게 차남 조반니를 위해 피에졸레 기슭에 메디치 별장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3.6. 교우 관계
니콜로 니콜리, 포지오 브라치올리니, 레오나르도 부르니,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카를로 마르수피니 등 당시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랑 친했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니콜로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자 수집을 시작했다. 포지오가 사용한 필체로 자신의 책들을 모두 필경시켰으며, 레오나르도와는 인문학 교우였다.트라베르사리는 겸손하고 성자같았기에 코시모가 매우 존경했다고 하며, 트라베르사리는 코시모를 위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 작품의 불순한 내용까지 모두 번역해 줄 정도였다. 코시모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레에 있는 트라베르사리의 방을 자주 방문했으며, 카를로와는 인문학 교우로 그가 코시모의 모친의 장례 연설문을 써줬다고 한다.
3.7. 최후
죽기 몇 년 전에는 시뇨리아가 코시모를 카포 델라 레푸블리카(공화국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1461년에 손자 코지미노, 1463년에 아들 조반니를 차례로 잃었고, 1464년에는 통풍, 관절염 이외에도 방광염으로 자주 고열이 나 고통을 겪다가 8월 1일에 죽었다.사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라고 부르자는 법령이 통과되어 그의 묘소에 새겨졌으며, 죽기 전에 어떠한 허세나 과시없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 요구는 무시되어 묘소는 화려하게 장식되면서 그의 시신은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4. 대중 매체에서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능력치가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5,5인 세종대왕과 동일 스탯의 지도자로 나온다.[7]《용병대장과 성녀》에서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장인[8]으로 나온다.
메디치 가문의 부흥을 다룬 드라마인 < 메디치: 마스터스 오브 플로렌스>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 왕좌의 게임>에서 롭 스타크 역으로 나왔던 리처드 매든이 역할을 맡았다. 젊은 시절에는 은행가가 아닌 예술가의 꿈을 꾸지만 결국 아버지의 압력에 못 이겨 후계자로써 가문을 이끌게 되고 이로 인해 성격히 꽤나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아버지가 암살당했으며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머리도 길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길러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 로마에서 공부하며 예술에 빠지고 이를 통해 예술가의 꿈을 키운다. 그곳에서 만난 비앙카라는 평범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금세 아버지에게 들키고만다. 결국 비앙카는 제거되고 코시모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사랑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아버지인 지오반니는 가문을 위해 그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며, 어음을 대량으로 매입해주는 대가로 그를 콘테시나와 혼인시킨다. 그러나 그는 콘테시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며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부부가 아닌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니 그보다 더 차갑게 그녀를 대한다.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그는 플로렌스를 장악하려는 알비치 가문과의 대립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하여 메디치가와 플로렌스를 이끌게 되나 곧 파치 가문과 손잡은 알비치의 계략에 의해 플로렌스의 높은 탑 상층부에 유폐되고 처결을 기다리게 된다.
콘테시나의 노력으로 처형은 면하게 되지만 결국 플로렌스에서 10년 간 추방당하는 벌을 선고받고 콘테시나만을 플로렌스에 남긴 채 나머지 가문의 일원들과 베니스로 떠나게 된다.
베니스의 도제(doge)[9]와 연줄을 놓고 친해진 코시모는 아내인 콘테시나가 전 약혼자인 에지오 콘타리니에게서 빼낸 정보를 통해 콘타리니 가문과 알비치 가문의 아들의 혼인을 막고, 자신의 플로렌스 복귀를 대가로 도제의 아들을 그 자리로 대신 보내게 된다. 그 후 베니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밀라노와의 접촉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지만 이를 선수쳐 자백함으로서 도제의 신뢰를 얻고 위기를 벗어난다.[10]
코시모는 베니스에서 마달레나라는 여종을 얻게 되는데, 이는 적대 세력인 한 베니스 관료가 코시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들여보낸 첩자였다. 그러나 코시모는 이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마달레나를 그의 집에 머물게 하여 최대한 안 다치게 하면서 또한 그녀에게 최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 방법을 취하였다. 결국 위의 일을 당해버린 관료는 그녀를 죽이려 하나, 코시모가 이를 구해주고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 무렵 플로렌스에서는 밀라노의 비밀 접촉을 거부했다는 코시모의 이야기가 퍼지며 그와 메디치 가문에 대한 향수가 커지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알비치는 용병들을 모으고 그와 협력하던 파치를 설득하여 군중들을 제압하고 플로렌스를 장악하려 하지만, 파치는 그를 배신하고 알비치는 결국 반역죄로 잡혀 코시모가 갇혔던 탑에 유폐된다.
코시모는 금의환향하나 그를 살리고 또한 그에게 핵심 정보를 줬던 콘테시나 앞에 마달레나를 보여주며 그녀의 속을 뒤집고 감정의 골은 더욱 악화된다. 코시모는 그녀가 자신의 추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녀가 빼낸 정보가 전 약혼자에게서 얻어낸 것을 알고 있었다.[11] 반면 콘테시나 입장에서는 죽을 뻔한 그를 살리고 전 약혼자와의 신의를 어기며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내연녀를 데리고 귀향하자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12]훗날 밝혀지지만 마달레나와의 이 잠자리로 마달레나는 임신하게 되며, 콘테시나는 코시모에게 그냥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다며 일갈하고, 부부관계는 냉각된다.
이후 교황이 로마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플로렌스까지 오게 되고 원래 알비치 가문과 좋은 관계였던 교황이었지만 그가 죄를 짓고 유폐된 상태이니만큼 메디치가에 의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콘테시나와 코시모는 교황이 갑자기 가문에 머물게 되는 문제로 다시 한 번 감정싸움을 하게 된다.
교황이 메디치 가문에 머물면서 가문의 명성은 올라가고 지배의 정당성은 확보됐지만, 교황은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된다. 교황은 그의 친구인 알비치를 살려달라 부탁하고 코시모는 그 대신 알비치가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의 서명이 담긴 각서를 요구하지만 교황은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재판정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알비치를 죽일 것을 원하고 이를 들은 교황은 비밀리에 각서를 써준다. 그러나 알비치는 이 각서에도 서명하길 거부하며 코시모와 날을 세운다.
이후 비밀리에 작성된 각서를 알비치의 배신자인 파치가 손에 넣고 '자비로운 교황 성하의 제안마저 뿌리친 전쟁광'으로 알비치를 몰아가며 그를 죽이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연설을 통해 알비치의 형을 추방형으로 줄이는데 성공한다. 알비치를 살리려는 이 과정을 플로렌스에서 알비치의 탄압 속에서 숨죽여 살던 콘테시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둘은 또다시 싸우고 이번엔 코시모가 아예 그녀와 강제로 성관계까지 갖게 된다.
그러나 알비치는 코시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추방 도중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코시모는 그가 알비치를 죽였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된다. 알비치의 아내는 코시모를 맹렬히 의심하며 콘테시나에게 그를 비방하고, '그래도 그런 짓은 안하겠지.'라고 믿던 콘테시나조차 코시모에게 직접 묻기까지 하는 등 가족에게까지 의심당하고 이 의심은 결국 시즌이 끝날 때까지 풀지 못한다.[13] 이 일로 플로렌스를 장악하려는 파치에게 공격당하고, 교황은 살인자의 은행에 자신의 계좌를 맡길 수 없다며 메디치 은행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던 그의 계좌를 빼서 파치에게 주려고 한다.
이에 코시모는 일단 로마로 가 로마를 탈환하려는 군대를 자비로 지원하고, 아들인 피에로를 시켜 플로렌스에서 세금을 걷는 것을 동의하게 하여, 이를 보충한다. 또한 동생인 로렌조에게는 파치가 사람을 죽인 사실을 밝히도록 하고, 로렌조는 이를 추적하여 살인자와 파치의 살인 교사 편지를 확보한다.
그 후 파치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로마로 가서 살인청부업자를 잡아온 동생이 파치에게 매수당한 감옥 간수들에게 암살당하는 큰 슬픔을 겪게 되며, 동생이 구해온 쪽지를 통해 파치를 몰아내고 계속해서 교황이 이용하는 은행의 주인으로 남게 된다. 이후 마달레나가 임신한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다는 콘테시나와 극적인 화해를 하며 시즌 1을 마감한다.
[1]
까말돌리 수도회라고도 한다. 로무알도 성인이 1012년 설립했다. 최초의 은수 수도회이며,
베네딕토회와 같은 연합회 소속이다. 1450년부터 천연재료로 약품, 화장품, 와인, 식료품 등을 만들어 보급하는 사도직을 했다. 한국에는 2016년에 진출했으며,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 앞 가톨릭회관 2층에서 전통 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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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코시모가 피렌체에 없는 사이에 알비치 가문이 코시모가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공화국을 침범할 장군을 고용하여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이런 소문을 믿은 자도 있었지만 대개 지나치게 성공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라 보았다.
[3]
당시 밀라노의 상황은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이 사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를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어겨 나폴리의 아라곤 왕 알폰소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 일로 오를레앙, 독일 황제, 베네치아와 프란체스코가 서로 자기 것이라 주장해 밀라노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시의 주인이라 선언했다.(
암브로시아 공화국)
[4]
프랑스로 파견된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가 샤를 7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잉글랜드군이 보르도 지방을 침략해 설득할 수 없었다. 대신 아치아이우올리는 앙주의 르네를 설득해 동맹국의 원조를 받게 했으며, 그 보답으로 르네는 알폰소의 아라곤파를 나폴리에서 축출하기로 해 프랑스군이 개입하게 되었다.
[5]
파렌투첼리로부터 메디치 도서관 확장에 대해 여러 충고를 받거나 그를 존중해 융자 부탁을 받으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
[6]
당시 교회법으로 고리대금업자는 부당한 방법을 취득한 것을 모두 환원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7]
시작지점에선 동일 스탯이지만 공화정의 경우 연임할때마다 능력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최대 666까지 가능하다. 기본적인 공화정 리더의 능력치가 4,1,1/1,4,1/1,1,4인걸 생각하면 코시모의 초반 능력치는 괴랄한 수준.
[8]
정확히는 아내의 양아버지
[9]
베니스의 정치지도자. 베니스 공화국은 유력가문의 집단지도체제였으며 투표를 통해 그들의 지도자(도제)를 선출한다. 임기는 종신
[10]
하지만 정황 상 밀라노와의 접촉을 권유한 코시모의 사촌은 코시모를 베니스에 계속 머물게 해 이득을 취하려는 도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1]
단지 전 약혼자에게서 얻어낸 것뿐만이 아닌 둘이 호감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전 약혼자는 콘테시나가 그의 신의를 저버렸음에도 같이 떠나자고 제안했으며 서로 키스도 했다.
[12]
위에서 언급된 츤데레적 면모가 여기서 나오는데 마달레나와 관계 후 다음날 그녀가 이 모습을 보고 그에게 따지자 그 후에는 그녀를 일절 침실에 들이지 않았다. 단, 이는 금세 질리는 그의 성격과도 관계있으며 애초에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13]
코시모는 줄곧 자신이 알비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며, 이는 교황, 아내 등 누구 앞에서도 일관적이다. 그러나 아내마저 그의 죄를 논할 때, 알비치의 죽음을 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