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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7E3BD> 켄트 공작 조지 왕자 Prince George, Duke of K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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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지 에드워드 알렉산더 에드먼드 (George Edward Alexander Edmund) |
출생 | 1902년 12월 20일 |
영국 잉글랜드 노퍽주 샌드링엄 | |
사망 | 1942년 8월 25일 (향년 39세) |
영국 스코틀랜드 갈리브 몰번 산 | |
신장 | 180cm |
배우자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 (1934년 결혼) |
자녀 | 장남 에드워드, 장녀 알렉산드라, 차남 마이클 |
아버지 | 조지 5세 |
어머니 | 테크의 메리 |
형제 |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존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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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과 인도 제국의 왕자.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의 다섯째이자 4남이다.2. 작위
문장 |
- 웨일스의 조지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George of Wales (1902년 12월 20일 ~ 1910년 5월 6일)
- 조지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George (1910년 5월 6일 ~ 1934년 10월 31일)
- 켄트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Kent (1934년 10월 31일 ~ 1942년 8월 25일)
3. 생애
3.1. 문란한 왕자
1902년 12월 20일,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재임기간에 웨일스 공 조지와 웨일스 공비 메리의 5남 1녀 중 다섯째이자 4남으로 태어났다. 선대 여왕인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죽고 처음 탄생한 조지 5세의 자녀이다. 태어났을 당시에 계승 서열은 아버지 조지 왕세자, 세 형들 에드워드 왕세손, 앨버트 왕자, 헨리 왕자에 이어서 5위였다.어린시절은 자신의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둘째 형인 앨버트 왕자처럼 똑똑했고 피아노 연주와 프랑스어, 이탈리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1910년 5월 6일,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자 아버지인 조지 왕세자가 조지 5세로 즉위했다. 조지 왕자는 형들에 이어서 계승 서열 4위의 왕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형들처럼 전쟁터에 나갔다. 1920년대부터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940년대까지 육군, 공군을 모두 거쳤다.
결혼 이전 맏형인 에드워드 8세와 어울리면서 함께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겼다. 특히 조지 왕자는 에드워드 8세가 선녀로 보일 정도로 사생활이 막장이었다. 코카인과 모르핀 등의 마약 중독이 심각했고 양성애 성향도 다분해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우 색을 밝혔다. 특히 외국 출신의 어린 남창들을 많이 밝혔다고. 알려진 정사관계만 해도 영국의 배우 겸 가수 제시 매튜스, 언론인 및 소설가 세실 로버츠, 극작가 및 배우 노엘 코워드 등이 있다. 조지 왕자는 이 막장 생활을 다 가능하게 해 줄 키키 프레스턴이라는 미국인 여성하고도 오랜 관계가 있었다.[1] 이 키키라는 여성과 아르헨티나인 호르헤 페라라와 셋이서 폴리아모리 관계에 있었고, 키키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았다는 의혹도 있었다.[2]
이 때문에 현재 영국의 매체에서는 조지 왕자를 절대 다루지 않는다. 요즘에 옛 영국 왕실이 나오는 매체를 보면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 사이좋게 까이는데[3] 이 양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4] 일단 조지 왕자의 사생활이 너무 막장이어서 19금이 아니라 29금을 때려도 부족할[5]지경인데다가, 영국 왕실에서 가장 필사적으로 감추는 존재가 에드워드 8세도 아닌 조지 왕자이니 퍽이나 허락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세계구급 이슈를 터뜨린 형 덕분에 묻힌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3.2. 결혼
이렇게 막장으로 살다가 드디어 정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1934년에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6]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의외로 마리나와의 결혼생활은 무난했다고. 하지만 색을 밝히는 타고난 성향을 고칠 수가 없는지 결혼 이후에도 훗날 아가일 공작부인이 되는 마거릿 위검과 잠시 불륜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게 결혼하고 나서 그나마 얌전해진 것이다.1936년 1월 20일, 아버지 조지 5세가 타계하자 맏형 에드워드 왕세자가 에드워드 8세로 즉위한다. 그는 계승 서열이 둘째 형과 그의 딸들이자 자신의 조카 엘리자베스 공주, 마거릿 공주, 그리고 셋째 형에 이어서 다시 5위가 됐다. 하지만 동년 12월 11일,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한지 11개월 만에 형수이자 미국 이혼녀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하는 바람에 둘째 형인 앨버트 왕자가 조지 6세로 즉위하고 조지 6세의 딸들과 셋째 형인 헨리 왕자에 이어서 계승 서열 4위가 됐다.
3.3. 사망
전란 시기에 군인으로서 복무했으며 1942년 8월 25일, 스코틀랜드를 출발해 아이슬란드로 가던 중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항년 39세. 이때 막내아들 마이클 공자는 생후 2개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왕실이 관여되어 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켄트 공작 작위는 당시 여섯 살이었던 장남 에드워드 공자에게 승계되었다. 생전의 사치로 인해 저축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아서 아내 마리나는 공작가의 녹봉이 끊긴 뒤, 유가족에게 지급되는 최소한의 생활비로만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자식 셋을 홀로 힘겹게 키워야 했다고 한다.[7]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켄트 공작 조지 왕자 (Prince George, Duke of K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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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 (George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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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 (Edward V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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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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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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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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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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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카셀의 루이세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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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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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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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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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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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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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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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8] (Prince Edward, Duke of Kent) |
1935년 10월 9일 |
캐서린 월슬리[9] 슬하 2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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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아너러블 레이디 오길비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The Honourable Lady Ogilvy) |
1936년 12월 25일 |
앵거스 오길비[10] 슬하 1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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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 |
켄트의 마이클 공자 (Prince Michael of Kent) |
1942년 7월 4일 |
마리 크리스티네 폰 라이프니츠 여남작 슬하 1남 1녀 |
[1]
조지 왕자에게
코카인하고
모르핀 등의
마약을 소개한 것도 키키 프레스턴이었다. 특히 코카인 중독이 심각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조지 왕자와 같이 어울렸던 형
에드워드 8세마저 코카인에 중독된 동생을 보고 기겁하면서 당장 키키와 헤어지라고 했을 정도. 하지만 당연히 조지 왕자와 키키는 그렇게 쉽게 헤어질리가 없었고, 결국 에드워드 8세가 키키에게 영국을 떠나라고 압력을 가해서 겨우 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8세는 조지가 키키와 어떻게든 연락해서 다시 마약에 중독될까 봐 두려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키는 조지 왕자 못지않게 스캔들이 매우 많았으며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로 사교계에 군림했다. 하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 사이에 몇몇 사교계 인맥들 및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을 연달아 잃으면서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겨 결국 1946년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2]
전 웨스트민스터 공작부인이었던 도우힐의 레이디 로에리아 린지의 회고록에서도
미국인 마이클 템플 캔필드라는 남성이 조지와 키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언급했다. 여담으로 마이클은
스위스에서 '앤서니 캘슬레이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갓난아기 때 미국인다캐스&캐서린 캔필드 부부에게 입양되어 '마이클 템플 캔필드'로 개명하였다. 후일 마이클은
재클린 케네디의 여동생과 결혼하는데, 둘은 5년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했다.
[3]
다만 에드워드 8세 부부가 현대에도 여전히 까이는 이유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정도로 열렬히 나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 항목 참조.
[4]
《
더 크라운》에서도 아내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가 잠깐 등장하는 것이 다였다. 너무 잠깐이라서 등장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시즌 1부터 1950년대라 조지 왕자가 사망하고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등장시킬 거리조차 없기는 하다.
[5]
그 에드워드 8세가 마약만이라도 끊어달라고 애걸할 정도로 막장이었다.
[6]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의 3녀로
필립 공의 친사촌누나이기도 하다. 또한 남편인 조지 왕자와는 마리나의 친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와 조지의 친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가 친남매이기 때문에 6촌 지간이기도 하다.
[7]
다만 이 가난은 마리나 공주가 자처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마리나 공주는 통치 가문의 공주라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동서지간이자 둘째 형님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을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했는데, 당연히 엘리자베스도 고작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마리나에게 반감을 가져 남편 조지 6세가 마리나 가족에게 생활비를 매우 적게 주는 조치를 취하게 했다. 그래서 마리나와 세 자녀들은 왕족치고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마리나가 둘째 형님을 혈통으로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어느정도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본인이 다 차버린 셈. 그래도 조지 왕자와 마리나의 장녀인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딸들인
엘리자베스 2세와
마거릿 공주와 꽤나 친하게 지냈다.
[8]
동생인 마이클과 달리 아버지의 외모를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9]
4대 월슬리
준남작의 딸.
[10]
12대 에얼리 백작의 차남. 결혼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백작위를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1988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을 받아 Sir라 불리었으며, 1996년에
추밀원 고문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