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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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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펠리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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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da6><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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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 펠리체 주세페 마리아 디사보이아 (Carlo Felice Giuseppe Maria di Savo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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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5년 4월 6일 |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토리노 왕궁 | |||
사망 | 1831년 4월 27일 (향년 66세) |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토리노 키아블레세 궁전[1] | |||
재위기간 | 사르데냐 국왕 겸 사보이아 공작 | ||
1821년 3월 12일 ~ 1832년 4월 2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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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da6><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어머니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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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07년 결혼) | ||
자녀 | 없음 | ||
형제자매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마리아 엘리사베타, 마리아 주세피나, 아메데오 알레산드로,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안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우리치오, 마리아 카롤리나, 주세페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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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왕국의 제6대 국왕이자 사보이아, 피에몬테, 아오스타의 공작이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11번째 자녀이자, 5번째 아들이다.2. 생애
1821년의 혁명으로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물러나자[2] 왕위를 물려받은 후 10년간 통치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왕실이 사르데냐의 칼리아리로 천도했을 때, 형 대신 사르데냐 부왕으로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 때문에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사르데냐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3]토리노를 싫어하여 생애 대부분을 제노바에서 보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대부분 치세를 반동주의로 일관했으나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있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괴되었던 조상들의 영묘당 오트콩브 수도원을 복원하기도 했다. 또한 고대 이집트 관련 유물을 많이 수집했는데 그의 컬렉션이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의 기원이 되었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사후 13촌 조카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