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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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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 에마누엘레 페르디난도 마리아 디사보이아 (Carlo Emanuele Ferdinando Maria di Savo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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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1년 5월 24일 |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토리노 왕궁 | |||
사망 | 1819년 10월 6일 (향년 65세) | ||
교황청 로마 팔라초 콜론나 | |||
재위기간 | 사르데냐 국왕 겸 사보이아 공작 | ||
1796년 10월 16일 ~ 1802년 6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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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da6><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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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프랑스의 클로틸드 (1775년 결혼 / 1802년 사망) | ||
자녀 | 없음 | ||
형제자매 | 마리아 엘리사베타, 마리아 주세피나, 아메데오 알레산드로,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안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우리치오, 마리아 카롤리나, 카를로 펠리체, 주세페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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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왕국의 제4대 국왕.2. 상세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왕위를 계승하기 전까지는 피에몬테 공으로 있었다. 177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여동생 마리 클로틸드와 결혼했다. 부부의 사이는 나름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두지는 못했다.왕위를 계승하기 직전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 혁명군에게 패하고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피에몬테에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항구도시였던 니차와 왕실의 본관 사보이아를 빼앗겼고, 피에몬테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권리까지 허용한 상황이었다. 1798년 12월 6일, 프랑스의 장군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Barthélemy Catherine Joubert 1771~1799)가 왕국의 수도 토리노를 점령하고 그에게 이탈리아반도 본토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사르데냐로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이듬해 토리노를 되찾고자 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사르데냐로 도망갈 방법도 막혀 로마와 나폴리로 망명해 콜론나 가문의 식객으로 얹혀 살았다.
1802년 동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양위했고 이후 로마 근처 프라스카티(Frascati)에서 살다가 1819년 사망했다.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지 못하고 로마 퀴리날레 언덕의 산탄드레아 교회[1]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