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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제18대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Žygimantas Kęstutait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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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Žygimantas Kęstutaitis) |
출생 |
1365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 세니에지 트라카이 성 |
사망 |
1440년
3월 20일 (향년 75세) 볼히니아 세니에지 트라카이 성 |
재위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
1432년 8월 31일 ~ 1440년 3월 20일 | |
배우자 |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의 딸 |
자녀 | 미하즈우슈카 지기만티타스 |
아버지 | 켕스투티스 |
어머니 | 비루테 |
형제 | 6명 |
종교 | 발트 신화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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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제18대 대공.2. 생애
1365년경 당시 트라카이 공작이었으며 훗날 리투아니아 대공국 제14대 대공이 될 켕스투티스와 발트 신화 종교 여사제로 알려진 비루테의 아들로 출생했다. 지기만타스(Žygimantas)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 받은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전에 가졌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켕스투타이티스(Kęstutaitis)는 켕스투티스의 아들을 의미한다.1382년 아버지 켕스투티스가 요가일라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함께 수감되었고, 1384년까지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384년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튜튼 기사단이 세운 마리엔부르크 성으로 도망쳐서 그 성에 주둔하고 있던 형제 비타우타스와 합류했다. 비타우타스가 요가일라와 화해한 후에는 나우가두크(Naugardùkas)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1389년, 그는 형제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와 함께 비타우타스를 도와 빌뉴스를 점거하려는 시도에 가담한 혐의로 영지를 박탈당했다. 이후 비타우타스의 지시에 따라 튜튼 기사단에게 찾아가서 망명을 요청했으며, 비타우타스가 자신들을 또다시 배신할 것을 우려한 튜튼 기사단의 요구에 따라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 비타우타스의 아내 오나, 딸 조피아, 여동생 림가일레, 그리고 여러 추종자들과 함께 인질로 넘겨졌다.
1390년 9월 11일부터 3주간 진행된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의 빌뉴스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이후 인질로 지내다가 1398년에 풀려난 뒤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비타우타스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1399년 비타우타스가 킵차크 칸국과 맞붙었다가 크게 패배한 보르스클라 전투에 참여했으며,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과 튜튼 기사단이 맞붙은 그룬발트 전투에도 참여해 연합군의 대승에 기여했다. 또한 튜튼 기사단과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간의 평화 협상 및 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1430년 3월 17일 비타우타스가 사망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스비트리가일라가 폴란드군에 맞서는 것을 도왔지만, 1432년 2월부터 폴란드 귀족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스비트리가일라를 축출하고 자신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1432년 8월 31일 밤, 지기만타스와 추종자들이 아시미아니에 머물고 있던 스비트리가일라 가족을 습격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그의 임신한 아내인 트베리의 안나가 구금되는 동안 폴로츠크로 탈출했다. 이후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이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지기만타스는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폴란드에 양도하겠다고 밝혔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 귀족 모두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그후 리투아니아는 지기만타스를 지지하는 리투아니아 본토,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등 서부와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지하는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등 동부로 양분되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지기만타스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칸국의 셰이드 마흐메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세이드는 자국의 영역을 갉아먹던 리투아니아를 우방국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1432년 12월 8일, 지기만타스의 군대와 스비트리가일라-세이드의 연합군이 야시미아니에서 격돌했다. 양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얀 드우고시에 다르면, 스비트리가일라의 병력 중 10,000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기만타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1433년 7월과 8월, 스비트리가일라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리다, 크레바, 에이시슈케스를 습격하고 빌뉴스, 트라카이, 카우나스 교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433년 6월, 폴란드는 튜튼 기사단이 스비트리가일라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통해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스파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후스파는 4개월 동안 튜튼 기사단의 영역인 노이마르크, 포메라니아, 서부 프로이센을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그단스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후 발트해에 도달한 뒤 병에 바닷물을 채워서 자신들의 여정이 성공했음을 자축했다. 이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433년 12월 15일 웽치차에서 폴란드와 기사단간의 1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스비트리가일라에 대한 지원을 일체 중단했다.
1434년 6월 1일, 리투아니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루테니아에 가던 중 걸린 감기가 악화되던 브와디스와프 2세가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에서 사망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일전에 맺은 합의를 파기하고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원해 리투아니아에 대한 6번의 습격전을 벌였다. 1435년, 스비트리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출신의 루테니아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용병대, 킵차크 칸국 출신의 최소 500명의 타타르인, 그리고 몇명의 튜튼 기사를 포함해 총 11,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중심부의 빌뉴스와 트라카이를 향해 진격했다. 지기만타스는 이에 맞서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일대에서 동원한 리투아니아군 5,000명을 지휘했고, 야쿠브 코빌란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4,000명이 지기만타스에 가세했다.
양군은 1435년 9월 1일 빌코미에시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지점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스비트리가일라는 전군이 궤멸되는 참패를 입고 3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폴로츠크로 달아났다. 지가만타스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장에 교회를 세웠고, 훗날 포보스크 마을이 이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튜튼 기사단과 함께 1435년 12월 31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더 이상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계속 항전했지만 지기만타스의 공세에 꾸준히 밀리다가 1437년 9월 폴란드 측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이 죽을 때까지 키예프와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폴란드 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지만, 지기만타스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지가만타스는 지속적으로 공세를 퍼부은 끝에 1438년에 스비트리가일라를 왈라키아로 몰아내고 리투아니아 전역을 제패했다.
그후 그는 리투아니아 왕이 되어서 폴란드에 대한 의존성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2세에게 자신을 리투아니아 왕으로 인정해주면 반 폴란드 연합 설립에 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회수했으며, 자신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의심되는 귀족들을 잡아들여 처형하고 재산을 압류했다. 16세기에 기술된 <비호베츠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모든 왕족과 귀족들을 근절하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에 차르토리스키 공작 알렉산데르 차르토리스키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빌뉴스 총독 요나스 다우기르다스, 트라카이 총독 페트라스 렐류샤스 등은 그를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 1440년 3월 20일, 지가만타스는 세니에지 트라카이 성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스비트리가일라가 돌아와서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통치하게 되었지만, 나이가 70세를 넘긴 터라 리투아니아 대공에 폴란드 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인 카지미에시 4세가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지가만타스는 리투아니아 귀족 안드레이 오딘체비치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과 결혼해 외아들 미하즈우슈카 지기만티타스를 낳았다. 미하즈우슈카는 아버지가 살해된 뒤 사모기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리타아니아 대공위를 놓고 카지미에시 4세에 대적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마조프셰 공국에 망명해 1447년까지 지원받았고, 1448년엔 크림 칸국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스타로두보,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를 공략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격으로 체포된 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가 1452년경에 중독사했다. 사후 빌뉴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미하즈우슈카의 사망으로 켕스투티스 가문의 대가 끊어졌고,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 왕국에 이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권을 공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