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曺在學
성명 | 조재학(曺在學) |
자 / 호 | 공습(公習) / 오당(迂堂) |
본관 | 창녕 조씨[1] |
생몰 | 1861년 9월 14일 ~ 1943년 5월 14일 |
출생지 |
경상도 의령현 (현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2]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조재학(曺在學)은 1861년 9월 14일 경상도 의령현(현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에서 조익환(曺益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0살 때 최익현 문하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하고 이후 김평묵 (金平默)과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883년 전국의 유생들과 만인소에 이름을 올렸으며, 1906년 김태원 등과 같이 전라북도 태인· 진안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최익현이 의거 준비를 할 때 잠시 연락관계를 맺어 거사의 효과적 전개를 꾀하기도 하였다.
또 이후 최익현 의진의 소모 오위장(召募 五衛將)을 지냈으며, 곧 면암 의진이 순창에서 적에게 패하고 주장들이 모두 체포·유배되었을 때 최익현이 쓰시마 섬에 유배되자 그를 방문하여 버선 1켤레와 일본 돈 20냥 등을 빌려주고 돌아왔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1913년에는 임병찬과 함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총 대표로서 활약하였다. #
1914년에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기도 했으며, 곧 독립의군부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울릉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영남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
1920년 1월 18일에는 경성부 장춘관에서 열린 조선고사 연구회(朝鮮古史硏究會) 발회식에 참석하였으며, 이 때 의원으로 선출되어 #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는 이 단체를 만주에 대고려국(大高麗國)을 건설한다는 풍문이 도는 것으로 트집잡아 이들을 체포하였는데, 황옥의 주선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
그해 9월에는 양기탁 등 유림과 함께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결성하여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지역별로 유림을 조직화하고자 하였다. # 이들은 실제 모금 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취지서에 서명한 유림들은 120명을 넘었다. # 그러나, 1921년 7월 인도공의소 소속의 박승래(朴升來)·김영규(金永奎) 등이 비밀리에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구속되면서 # 인도공의소 역시 와해 수순을 밟게 된다.
이후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봉소암(鳳巢庵)을 짓고 은거하다가 # 1943년 5월 14일 사망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순창군 출신 독립운동가, 趙在學
성명 | 조재학(趙在學) |
생몰 | 1889년 ~ ? |
출생지 |
전라도 순창군 하치등면 옥산리 (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옥산리)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조재학(趙在學)은 1889년 전라도 순창군 하치등면(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하는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전개되었다.
이때 전라북도 순창과 전라남도 장성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진으로 김영백(金永伯) 의진이 있었는데, 조재학은 1908년 음력 2월에 이 의진에 가담, 5명의 의병과 함께 전라북도 순창군 상치등면 북실리(현 쌍치면 종곡리 북실) 김모(金某)의 집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사기점리(현 방산리 사기점마을) 김모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10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행적 및 사망년도에 대해선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趙載鶴
성명 | 조재학(趙載鶴) |
이명 | 조재학(趙載學) |
생몰 | 1888년 12월 23일 ~ 1952년 4월 3일 |
출생지 |
충청도 홍주부 (현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가산리) |
추서 | 대통령표창 |
조재학(趙載鶴)은 1888년 12월 23일 충청도 홍주부(현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가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홍성에서도 만세시위가 3월~4월에 걸쳐 홍성군내 각 면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앞서 3월에 홍성면과 광천면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당시 금마면 가산리 거주 민영갑은 그해 4월 1일 마을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조재학을 비롯한 김재홍(金在洪)· 조한원(趙漢元)· 최중삼(崔仲三) 등도 이 계획에 찬동하여 거사에 동참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일 저녁 8시, 마을 사람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자 조재학, 민영갑 등은 운집한 관중들 속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관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폭행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아 # 곧 항소하였으나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 곧 상고하였으나 7월 3일 고등병원에서 상고 기각당하고 # 최종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