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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85-96대 연방 상원의원 제이콥 코펠 재비츠 Jacob Koppel Javi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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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1018><colcolor=#fff> 출생 | 1904년 5월 18일 |
미국 뉴욕 주 맨해튼 | |
사망 | 1986년 3월 7일 (향년 81세) |
미국 플로리다 주 웨스트팜비치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마조리 조안 링링 (1933년 결혼, 1936년 이혼) 마리안 앤 보리스 (1947년 결혼, 1986년 사별) |
학력 |
컬럼비아 대학교 (
B.A.) 뉴욕 대학교 ( 법학 / LL.B.) |
종교 | 유대교 |
정당 |
|
소속 계파 | 록펠러 공화당, 자유주의 공화당 |
의원 선수 |
4 (하원) 4 (상원) |
의원 대수 |
80, 81, 82, 83 (하원)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상원) |
지역구 |
뉴욕주 제21구 (하원) 뉴욕주 클래스 3 (상원) |
경력 |
연방 하원의원 (1947~1955 / 뉴욕 21구) 뉴욕주 법무장관 (1955~1957) 연방 상원의원 (1957~1981 / 뉴욕 클래스 3)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가장 대표적인 록펠러 공화당원으로,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매우 진보적인 식견을 내비친 최후의 진보파 공화당원 중 하나였다.2. 생애
1904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서 공공주택에서 자랐으며 파트 타임 알바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야간반을 다녔다.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이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파산 및 소액주주 전문 변호사로 활약했는데 이걸로 돈을 많이 벌어 집안 사정을 폈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에다 가난했던 집안 배경 때문에 재비츠는 자연스럽게 정치인이 약자를 도와야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2.1. 하원의원
1920년대 뉴욕은 민주당 소속의 아일랜드 이민자 그룹을 중심으로 지연, 학연, 정경유착으로 얽힌 정치기계(Political Machine) "태머니 홀"(Tammany Hall)로 악명이 높은 지역이었는데, 변호사 일을 하며 태머니 홀의 온갖 안좋은 꼴을 목격한 재비츠는 진보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을 평생 경멸하게 된다. 1930년대, 재비츠는 마피아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피오렐로 라과디아를 지원하기 위해 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렇게 공화당에서 경력을 쌓아나갔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맨해튼 어퍼웨스트 지역을 관할하는 뉴욕주 제21구 하원의원 선거구에 출마한다. 이 지역은 공화당이 1922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민주당이 쭉 지배하고 있던 지역구였는데, 재비츠는 민주당 의원을 꺾고 당선되어 지역 정계에서 화제가 되었다.하원의원을 지내면서 재비츠는 공화당의 당론을 거스르고 해리 S. 트루먼의 인종평등 정책과 "페어 딜" 복지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심각한 국익 훼손이 우려되면 노동조합의 파업을 강제 해산시킬 수 있는 "태프트-하틀리 법"에 거부하였으며, 매카시즘적인 분위기에도 반발해 리처드 닉슨이 활약한걸로 유명한 반미위원회 설치에도 반대의 의사를 표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 거의 왕따를 당했지만 재비츠는 스스로를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로버트 M. 라폴레트의 뒤를 잇는 자랑스러운 진보 공화당원이라고 생각하며 위안했다고 한다.
2.2. 상원의원
공화당 내에서 재비츠는 비주류에 속했지만,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뉴욕에서는 재비츠의 인기가 좋았고 이를 발판으로 1954년에는 뉴욕 주 법무장관에 출마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주니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뉴욕의 주 단위 공직에서 당선된 공화당원이 재비츠 한명이어서 재비츠의 입지는 더욱 높아졌다. 재비츠는 195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상대 후보자는 뉴욕 시장 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였는데, 그 해 치러진 대선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압승하면서 재비츠도 덩달아 와그너를 50만표 차이로 꺾고 승리해 뉴욕 주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된다.상원에서도 재비츠는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원으로 평가받았다. 재비츠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외교 정책에 동조했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사안에서 민주당 진보파와 뜻을 함께했다. 대표적으로 흑인 민권에 관해 재비츠는 1957년, 1960년, 1964년, 1968년 민권법에 모두 찬성표를 던졌고, 자신의 소신이기도 했던 인두세 폐지[1]를 지지하면서 수정헌법 24조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정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인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도 재비츠가 처음 제시한 개념이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록펠러 가문과 힘을 합쳐 여러 자선 사업에 참여했고, 국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처음에는 찬성의 입장이었으나 1967년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재비츠는 베트남 전쟁에 매우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민주당 내 반전좌파와 손을 잡았는데, 1년 이내 베트남 완전 철군을 명시한 1970년 맥거번-햇필드 수정안(McGovern-Hatfield Amendment)과 캄보디아 폭격 중지를 명시한 쿠퍼-처치 수정안(Cooper-Church Amendment)에 모두 찬성 투표했다.[2]
2.3. 낙선과 그 이후
그러나 이런 진보 성향 때문에 뉴욕의 보수 지지자들은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고,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 존 린지[3] 뉴욕시장 등 뉴욕 지역 공화당 고위 정치가들이 하나같이 공화당 보수파와 대립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자 뉴욕의 보수파들은 1960년대 후반 대대적으로 공화당을 탈당해 제임스 L. 버클리를 중심으로 규합하여 뉴욕 보수당을 창당하게 된다. 1968년, 재비츠는 49%라는 득표율로 여유롭게 재선되지만 재비츠의 진보적 성향을 비난한 강경 보수파 제임스 버클리에게 무려 17%나 되는 표를 내어줬다. 6년 후인 1974년에는 불과 45%의 득표율로 재선되는 등 뉴욕주 공화당의 분열을 막지 못하며 위기에 처했다.[4]결국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레이건 혁명"이라 불리는 보수 돌풍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원의원 재선에 실패한다. 당시 재비츠의 상대 후보로 나선 사람은 알 다마토였는데 그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기도 했고 제임스 버클리에 비해 중도적인 성향이 있어 인기가 있었다. 결국 55% 대 45%로 공화당 상원의원 선거 예비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는데, 재비츠는 이에 불복하고 군소 정당인 뉴욕 자유당 소속으로 재선에 도전했다. 물론 11%라는 처참한 득표율로 대참패했고 오히려 이 때문에 진보 표가 분열되어 민주당 후보 엘리자베스 홀츠먼(Elizabeth Holtzman)[5]이 알 다마토에게 1%p 차로 패배하는 팀킬까지 저질렀다. 이미 나이도 70줄에 접어들었던 재비츠는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해 미련 없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6]
이후 1983년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고, 고향인 맨해튼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1986년 루게릭 병에 걸려 플로리다 웨스트팜비치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둔다.
3. 평가
1853년 창당 이래 공화당 내에서 언제나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진보주의 성향 공화당의 최후를 장식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7]재임 기간 도중 미국에서 4번째로 진보적인 상원의원이라고 평가받았다. #[8] 이는 에드먼드 머스키, 휴버트 험프리, 헨리 M. 잭슨 심지어는 조지 맥거번 등 당내의 웬만한 민주당 인사들보다도 진보적이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평가를 받는 존 B. 앤더슨은 평등권 수정헌법(ERA)를 지지할만큼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 동시에 테드 케네디의 건강보험 개혁안을 반대하는 등 재정보수주의자로도 분류되었는데, 제이콥 재비츠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을 지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기금을 창설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진보파로 평가받았다.
존 앤더슨이나 에드워드 브룩, 찰스 구델 같은 다른 진보파 공화당원들은 원래 보수 성향이었다가 진보화되었거나 아니면 중도보수 정도의 식견을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제이콥 재비츠는 민주당의 정경유착이 싫어 공화당에 입당한 경우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속 당만 공화당이고 실제 성향은 진보좌파 성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인 성향 때문에 공화당의 당론에 배치되는 투표를 많이 했고 그만큼 적도 많았다. 결국 제이콥 재비츠가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공화당 내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싹이 마르고 만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뉴욕 21구 |
|
46,897 (46.02%) | 당선 (1위) | 초선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7,067 (50.92%) | 재선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2,604 (61.76%) | 3선 | |||
195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9,866 (63.71%) | 4선 | |||
1954 | 미국 뉴욕주 법무장관 선거 | 뉴욕 | 2,603,858 (51.72%) | 초선 | ||
195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723,933 (53.27%) | 초선 | |||
196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272,417 (57.38%) | 재선 | |||
196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269,772 (49.68%) | 3선 | |||
197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2,340,188 (45.32%) | 4선 | |||
198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64,544 (11.05%) | 낙선 (3위) |
5. 여담
- 유명한 전시장인 제이콥 K. 재비츠 컨벤션센터는 뉴욕 지역에서 오래 상원의원을 지낸 재비츠 의원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다 붙였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정치인의 이름을 딴 공공시설의 이름이 많다.
- 진보적인 성향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맹렬하게 반대 입장을 표했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 때도 닉슨을 규탄하는 목소리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다가 한소리 듣기도 했고, 닉슨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동료 상원의원의 약점 캐는걸 좋아했던 린든 B. 존슨의 측근의 증언에 의하면, 상원의원 시절 케네디에 필적할만한 섹스광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흑인 여성과 섹스하다가 우체부한테 걸려서 팬티바람으로 도망간 적도 있었다고.
- 그는 진보 성향 답게 흑인 민권 운동에도 진심이었는데, 1950년대 기고한 칼럼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늦어도 2000년대에는 흑인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이 있어 나중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9]
[1]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흑인들에게 투표를 하지 못하게 했다. 즉 세금의 탈을 쓴 흑인 차별법이었던 셈.
[2]
다만 혈통 때문에
이스라엘 문제에서는 공화당 보수파와 뜻을 함께 했다고 한다.
[3]
1971년 공화당 탈당
[4]
버클리는 2년 후 진보 성향 표심이 민주당과 공화당/
뉴욕 자유당 후보인 찰스 구델에게 분열된 틈을 타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5]
엘리자베스 홀츠먼은 닉슨 행정부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의 맹활약, 반전좌파적인 행보, 역대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현재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이 기록을 가지고 있음)로 잘 알려져있었는데, 만약 이때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후일 대권주자로 분류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홀츠먼은 이때 낙선하는 바람에 정치 인생이 꼬여 별 볼일 없는 자리만 전전했다.
[6]
이후 알 다마토는 3선 상원의원으로 승승장구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뉴욕주 자체가 진보화되어 결국 4선에는 실패하게 되는데, 그의 4선 도전을 저지한 민주당 후보가 바로
이 사람이다.
[7]
물론 이후에도
링컨 채피,
크리스 서누누 등 중도 내지 중도진보 성향 공화당원이 가끔 나오긴 했으나 중량감 있는 진보 성향의 중진 공화당원은 사실상 재비츠가 마지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8]
참고로 3번째가
테드 케네디이다.
[9]
그러나 그도 흑인 투표의 겨우 20%대만 얻었으며, 이는 공화당이
남부 전략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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