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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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d164a,#FFC224> 정당 | 대통령 후보 | 순위 | |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민주당 | 지미 카터 | 2위 | ||
월터 먼데일 | 낙선1 | |||
공화당 | 로널드 레이건 | 1위 | ||
조지 H. W. 부시 | 당선 | |||
Ind | 무소속 | 존 B. 앤더슨 | 3위 | |
패트릭 루시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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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7-96대 미합중국 연방 하원의원 존 바이어드 앤더슨 John Bayard Ander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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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808080> 출생 | 1922년 2월 15일 |
미국 일리노이 록포드 | |
사망 | 2017년 12월 3일 (향년 95세) |
미국 워싱턴 D.C. | |
묘역 | 알링턴 국립묘지 |
학력 |
일리노이 대학교/어배너-섐페인 캠퍼스 (
법학 /
J.D.) 하버드 대학교 ( 법학 / LL.M.) |
의원 선수 | 10 |
의원 대수 |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6 |
지역구 | 일리노이 제16구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경력 |
주독일 미국 고등판무부 참모고문 (1952~1955) 미국 연방 하원의원 (1961~1981) 하원 공화당 의원 총회 의장[1] (1969~1979)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후보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육군 |
1943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하사관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법조인.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6.6%를 얻은 것으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현재는 거의 씨가 마른 록펠러 공화당과 공화당 내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명이다.
2. 생애
2.1. 정계입문 전후
스웨덴계 미국인으로,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법조인 출신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 투입되어 하사관을 지냈고, 전역 이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에는 독일로 되돌아가 미군에서 오래 복무했다. 1956년, 앤더슨은 공화당에 입당해, 일리노이 와이너바고 카운티에서 지역 검사로 선출되었다. 1960년 연방 하원 의원에서는 16구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존 B. 앤더슨은 록펠러 공화당의 일원 중 하나였고 공화당에서 가장 좌파적인 입장을 보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1960년대,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연방 민권법에 제일 먼저 찬동한 의원 중 한명이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성향은 재정적 보수, 사회적 진보에 가까웠다.
그는 하원 원내대표를 지내고 있던 제럴드 포드 파벌에서 맹활약하던 인물이었다. 1969년, 제럴드 포드 원내대표는 그를 공화당 원내 서열 3위인 의원 총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럴드 포드가 낙선하고 1979년 록펠러마저 급사하자 그의 정치적 위치는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2.2.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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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토론회에서 맞붙은 앤더슨 후보와 레이건 후보 |
The time has come to stop telling the American people only what they want them to hear, and start talking frankly about the sacrifices we must all make.
미국인들에게 듣기 좋은 얘기만 하지 말고 이제 솔직하게 우리가 무엇을 희생해야할지 얘기해야할 때가 왔습니다.
1980년 3월 12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도중.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B. 앤더슨 의원은 공화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다. 그는 북동부 주에서 레이건을 앞서며 분전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레이건, 부시에 이은 3위로 낙선하게 된다. 앤더슨은 레이건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이 미국에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화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미국인들에게 듣기 좋은 얘기만 하지 말고 이제 솔직하게 우리가 무엇을 희생해야할지 얘기해야할 때가 왔습니다.
1980년 3월 12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도중.
존 B. 앤더슨은 "국방비 인상, 세금 인하, 예산 균형"을 내세운 레이건의 공약이 불가능한 조합임을 지적하며 제3지대 후보로서 자신을 부각시켰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석유 파동과 "닉슨 쇼크"로 인한 오랜 불경기와 독수리 발톱 작전의 실패로 지지율이 30%대 초반에 간신히 걸려있던 상황이었다. 카터에 실망했지만, 레이건의 보수적인 공약에 반대했던 많은 민주당과 중도 지지자들이 대안 후보로 앤더슨을 주목하며 앤더슨은 초기 26%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앤더슨은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졌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차 토론에 불참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앤더슨은 그 기회를 잡아 자신을 레이건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설정하려 했다. 하지만 앤더슨은 레이건을 너무 가혹하게 공격한데다, 레이건의 세금 정책을 비판하며 세금 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미국인들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투의 강압적인 어조를 보인 탓에 토론 직후 지지율이 대폭락했다. 결국 2차 토론을 앞두고 앤더슨의 전국 지지율이 15% 이하로 떨어지며 2차 토론은 카터와 레이건의 양자 토론으로 굳어졌고, 앤더슨은 반등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무너진다.
결과적으로 앤더슨은 전국 득표율 6.6%를 얻으며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양당제 국가인 미국에서 특별한 지역 기반 없이 무소속으로 5% 이상을 득표하며 선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고 이후 몇차례 양당 구도에 돌풍을 일으킨 로스 페로, 게리 존슨 등 3지대 후보들의 귀감이 되었다.
앤더슨은 특히 카터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북동부 주에서 10%가 넘는 높은 지지를 얻었고 특히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인 매사추세츠[2]에서 15.15%를 얻으며 선전했다. 이로 인하여 카터는 자신의 기반인 북동부 주에서 대참패하였는데, 만약 앤더슨에게 간 표가 그대로 카터에게 갔다면 카터는 매사추세츠와 뉴욕을 포함한 수많은 주[3]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실제로 앤더슨은 출구조사 결과 보수층에서 3%만의 지지를 얻은 반면 진보층에서는 11%의 지지를 얻었다. 앤더슨을 뽑은 카터 지지층이 많았다는 얘기.
2.3. 말년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앤더슨은 미국 민주당의 무능보다 레이건을 비판하는데 더 열을 올리며 사실상 좌파 인사로 전향한다. 실제로 그는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이 아닌 월터 먼데일을 지지하며 레이건 낙선 운동을 펼쳤다. 그는 중도파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사이에서 정계 원로로 대우받으며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21세기 이후에는 민주당보다도 더 왼쪽인 확고한 좌파로 성향이 굳어졌는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를 지지했고, 2010년대에는 공화당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정의당 창당에 큰 힘을 보탰다. 또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가장 먼저 지지한 원로 정치인 중 한명이기도 했다.
2.4. 사망
|
애덤 킨징거 의원[4]의 추모 연설 |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56 - 198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0 - 2019 |
탈당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6 | 미국 일리노이주 지방 검사장 선거 | 위너베이고 카운티 |
|
11,456 (?%) | 당선(1위) | 초선 |
196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일리노이 제16구 | 115,693 (62.32%) | 초선 | ||
196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8,594 (66.92%) | 재선 | |||
196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93,051 (56.38%) | 3선 | |||
196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9,990 (73.01%) | 4선 | |||
196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11,037 (67.35%) | 5선 | |||
197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11,037 (67.35%) | 6선 | |||
197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29,640 (71.91%) | 7선 | |||
197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5,175 (55.48%) | 8선 | |||
197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14,324 (67.92%) | 9선 | |||
197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6,752 (65.43%) | 10선 | |||
198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720,060 (6.61%, 0명) | 낙선 (3위) |
5. 여담
- 후대의 정치인인 에반 맥멀린과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다. 두명 모두 공화당에서 나름 요직에 있던 정치인이었지만, 당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무소속으로 탈당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 민주당 및 기타 진보 세력과 협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다만 에반 맥멀린은 네오콘 성향이 어느정도 있는 인물인 반면, 존 B. 앤더슨은 공화당 탈당 이후 문자 그대로 좌파 성향 정치가가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1]
하원 원내대표 바로 아래에 있는 공화당 내 권력서열 3위로,
딕 체니-
리즈 체니 부녀,
잭 켐프,
마이크 펜스,
제럴드 포드 등 많은 공화당 주요 정치인이 거쳐간 자리이다.
[2]
1972년 대선에서 워싱턴 D.C.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민주당의 손을 들어준 주이고, 무엇보다 케네디 가문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3]
만약 앤더슨의 지지 까지 받으면 카터의 승리 예측되는곳은 매사추세츠(14인), 버몬트(3인), 코네티컷(8인), 메인 및 메인 1,2구(총 4인), 뉴욕(41인), 위스콘신(11인), 미시건(21인), 델라웨어(3인), 노스 캐롤라이나(13인), 아칸소(6인), 켄터키(9인), 테네시(10인), 사우스 캐롤라이나(8인), 미시시피(7인), 펜실베이니아(27명). 이 주의 선거인단과 카터 우세 지역의 선거인단을 다 합쳐본다면, 레이건 304인 대 카터 234인으로 꽤 비벼볼만한 성적이 나온다.
[4]
앤더슨의 생전 지역구였던 일리노이 16구를 물려받은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이다. 존 B. 앤더슨 의원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내에서 소신 있는 성향으로 유명했는데 도널드 트럼프의 탄핵에까지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22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극우경화를 비판하는 연설을 남기고 정치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