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정협 상무위원 | ||
정체 | 蔣光鼐 | |
간체 | 蒋光鼐 | |
한국식 독음 | 장광내 | |
영문 | Jiang Guangnai | |
자 | 경연(憬然) | |
출생 | 1888년 12월 17일 청나라 광동성 동완현 | |
사망 | 1967년 6월 8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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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난징 제4육군중학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인. 19로군 총지휘로서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했으나 복건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대항했다. 이후 반장활동을 벌이다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8년 광동성 동완현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5년, 학비를 면제해주는 동완사범학당에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6년, 광저우의 황포육군소학당 2기로 입학, 1909년 난징 제4육군중학으로 진학했다. 1911년 무창봉기가 터지자 우한의 혁명군에 가담했다.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중화민국은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독재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쑨원과 국민당이 1913년 계축전쟁을 일으키자 여기에도 참가하였으나 위안스카이에게 신속하게 진압당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했다.1914년, 쑨원이 일본에서 재조직한 중화혁명당에 가입, 1917년 호법전쟁에 참가하는 등 쑨원의 호법운동에 종사했다. 1920년 천밍수의 건국월군 1사단 4단에 들어가면서 천밍수와 차이팅카이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킨 후에도 쑨원의 곁에 남았으며 1923년, 3차 광동 군정부가 수립된 이후 1925년의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참여하여 천중밍 토벌에 참가하는 등 계속 승리했다. 1925년 7월,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이 수립되고 건국월군이 국민혁명군 4군으로 개편되자 국민혁명군 4군 10사단 부사단장에 임명되어 사단장인 천밍수를 보좌했다.
2.2.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4군과 함께 호남 전선에 참가, 큰 전공을 세워 철군의 칭호를 얻었고 1926년 겨울, 10사단이 11군으로 확충되는 과정에서 11군 부군장 겸 10사단장이 되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천밍수와 함께 장제스를 지지하는 편에 섰고 1927년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 진압에 참여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장쉐량의 동북역치를 끝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1929년 편견회의 결과에 따라 11군의 축소가 결정되어 편견구 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편견 3사단이 61사단으로 확충되면서 61사단장이 되었다.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발생하여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이 광서파와 연대한 혐의로 투옥되자 천밍수가 광동성 정부주석이 되었다. 천밍수와 광동성 군사령관 천지탕은 반장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를 지지하였는데 장광나이는 8로군 총지휘에 취임한 천지탕 휘하에 소속되어 1차 장계전쟁, 2차 장계전쟁에 참가,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와 교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천지탕은 61사단과 차이팅카이의 60사단을 독립시켜 별도의 편제로 둘 것을 건의하였고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임으로 60사단과 61사단을 합쳐 19로군이 편제되었다. 장광나이는 19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고 중원대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중원대전 종식 후에는 초공작전에 투입, 9로군 총지휘, 강서성 정부주석 겸 난창행영 주임 루디핑과 함께 제1차 초공작전에 참여하여 강서의 홍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931년의 제3차 초공작전에 참여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발하자 강서성에서 공산당과 교전하고 있던 장광나이는 차이팅카이와 더불어 내전 반대를 통전하였고 천밍수와 장제스가 연합하자 5월, 장제스 지지를 통전하였다. 천밍수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토적우익군단총지휘에 취임한 후 초공에 나섰고 9월에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거국적인 합작 분위기가 조성되자 광동파를 안심시키려는 장제스의 안배에 따라 천밍수가 경호위수총사령장관 겸 송호경비사령에 취임하였다. 이에 따라 19로군 예하 60, 61, 78사단이 강서성에서 상하이로 이동하여 난징, 상하이의 방위를 맡게 되었고 장광나이는 광저우에서 통합을 위해 북상하는 광동 측 대표들을 경호하였다.
2.3.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복건사변까지
결국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하야하고 4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쑨커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여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쑨커 내각은 경제위기와 더불어 1932년 1월에 발생한 제1차 상하이 사변에 직면하여 와해되었다. 그 뒤를 이어 장제스와 손잡은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장제스가 다시 권좌에 복귀하였다. 장광나이는 19로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세차례나 격퇴하였으나 결국 4번째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송호정전협정 체결 후 항일 성향이 짙은 19로군을 상하이에서 이동시키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복건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4차 초공작전에도 동원되어 홍군과 교전하였으나 계속 피해가 발생하면서 초공에 불만을 품었다. 1933년 천밍수가 뇌물 수뢰 사건으로 해임되면서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는 처우에 매우 불만을 품게 되었다.복건성으로 이동한 19로군은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 반일 대중 시위를 원조하면서 항일 전단지 배포, 일본 화폐 소각 시위 등을 벌였다. 1932년 12월, 장광나이는 복건성장 겸 복건성 민정청장에 임명되었고 이에 힘입어 복건성에서 더욱 항일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복건성을 광동파의 집결지로 만들어서 복건성 정부에 광동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쓰질 않았다고 한다. 11월 20일, 급기야 장광나이는 차이팅카이, 천밍수, 그리고 호남 사건으로 실각했던 리지선과 힘을 합쳐 복건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장광나이는 중화공화국 인민정부 위원에 취임했다. 하지만 제5차 초공작전에 나서고 있던 장제스는 50일만에 복건사변을 간단히 진압했고 장광나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11월 2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장광나이의 국민당적을 영구 박탈했다.
2.4. 중일전쟁과 반장활동
이후 해외에서 반장활동을 하던 장광나이는 1936년, 쑹칭링이 주도한 상하이시 각계구국연합회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을 벌임으로 장제스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비난하는 등 계속해서 반정부활동을 하였다. 허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반장활동을 중지하고 국민혁명군에 복귀, 4전구 부참모장, 7전구 부사령장관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1946년, 쑹칭링, 리지선과 함께 광저우에서 중국 국민당 민주 촉진회를 수립함으로 다시 반장활동에 돌입했다.1949년,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함으로 중공에 합류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베이징시 정부위원, 중앙방직공업부장, 정협 상무위원,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2.5. 말년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장광나이에게도 몰락이 다가왔다. 1966년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던 장광나이는 홍위병들이 준동하면서 국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불어닥친 탈권 현상으로 인하여 전국의 군부대와 당부가 습격당하는 대혼란이 닥쳐왔고 전국의 간부들이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병상의 장광나이도 끌려나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고 저우언라이가 보호하려고 노력했음에도 홍위병들의 강요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결국 1967년, 베이징에서 암이 재발하여 사망했다.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광나이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열어 그에게 헌정했다.
3. 주요경력
복건성 정부주석 | |||||||
1대 | → | 2대 | → | 3대 | |||
양수장 | → |
장광나이 ( 1932년 12월 7일 ~ 1933년 11월 23일[1]) |
→ | 천이(1883) |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삼인.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송경령 연구, 이양자, 일조각.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
[1]
중국 국민당 상무위원회 결정을 기준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