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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1909)

파일:이원조 선생.jpg
[1]

李源朝
1909년 6월 2일 ~ 1955년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본관은 진성(眞城)[2], 자는 해경(海卿), 호는 여천(黎泉), 임목아(林木兒)이다. 이육사의 동생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09년 6월 2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 1878 ~ 1941. 4. 26)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1876 ~ 1942. 4. 29)[3] 사이의 7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자라서는 정인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때 정인보로부터 '장안(長安) 3재(才)의 1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주가 비상했다고 한다. 이후 독립유공자 이관용의 딸인 이정원(李貞媛)과 결혼했다.

좌익계의 문학 평론가로, 처음에는 조선일보의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문에 입선한데 이어 1929년 동 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부문 가작에 당선되며 문예 활동으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이후 시, 소설보다는 문예 비평 쪽에 더 관심을 가지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5년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다.

좌익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카프에 참여한 인물은 아니지만 카프계와 유사한 노선을 걸으며 부르주아 문학을 비판함과 동시에 당시의 조류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알리기도 했다. 이후 1942년 이후 광복까지는 아예 절필해버리면서 친일문학과 거리를 둔다.

광복 이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고, 이어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6년, 2년 전 옥사한 형 이육사의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간행하기도 한다. 이후 월북하여 조선공산당 기관지였던 해방일보와 좌익계 일간지 현대일보의 창간에 관여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남조선로동당 숙청 사건에 휘말려 옥에 갇힌 후 1955년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사후

남한 내에서는 1990년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문민정부 이후 재발굴되어 알려졌다. 모교였던 교남학교의 후신인 대륜고등학교에 그와 형 이육사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1] 한때 이 사진이 구마적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2] 원촌파(遠村派) 21세 원(源) 항렬. [3]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거의한 13도 창의군(정미의병)의 의병장 허위의 사촌 형 허형(許蘅)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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