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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요(전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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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생애2. 한조(漢趙) 초창기3. 영가의 난4. 제1차 장안 공략전5. 진양 전투6. 제2차 장안 공략전7. 제3차 장안 공략전8. 근준의 난9. 전조 건국10. 관동 평정11. 구지 정벌12. 전량 정벌13. 후조와의 전쟁14. 최후

1. 초기 생애

유요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친척 아저씨였던 유연이 그를 양자로 삼아 길렀다. 유요가 8살이 되었을 때, 유연을 따라 서산(西山)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우연히 비바람을 만나 나무 밑으로 피했다. 그때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나무가 흔들리니, 수행인들 중 놀라 자빠지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어린 유요만은 안색의 변함이 없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 모습을 본 유연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 아이야말로 우리 가문의 천리마로다. 사촌 형님네 집안도 망하지는 않겠구나."
이후 장성한 유요는 키가 9척 3촌[1]에 달했고, 손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팔이 길었다. 또, 태생부터 하얀 눈썹이 있었으며, 수염은 100여 가닥도 채 되지 않았으나, 모두 5척의 길이를 자랑했다. 성격은 대담하여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고,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꺼렸다. 유요는 문장을 읽을 때, 그 뜻을 세세하게 파악하기보다는 요지만 잡아내었고, 문장 짓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초서체 예서체를 애용했다. 힘 또한 보통 사람 이상이라 1촌 두께의 철판도 화살로 쏘아 뚫어버리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신사(神射)'라 칭했다. 유요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병서를 좋아해 그 내용을 모두 암기하고 다녔다.

유요는 20세가 되었을 때 낙양(洛陽)에서 유학하던 중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마땅히 주살당할 위기에 놓이자, 중서령 조순(曹恂)과 함께 태자선마 유수(劉綏)에게로 도망쳤다. 유수는 유요와 조순을 책장 속에 넣어 숨기고, 진양(晉陽)태수 왕충(王忠)에게 몰래 보냈다. 이들은 왕충의 도움 덕에 낙랑군의 소속 현 중 하나인 조선(朝鮮)으로 숨을 수 있었다.

조선에 머문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에 주어진 식량이 모두 떨어져 굶주리게 되니, 유요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현의 병사로 입대하여 배고픔을 해결했다. 어느 날, 조선현령 최악(崔岳)이 유요의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겨, 그를 따로 불러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유요는 최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일의 경위를 전부 털어놓았고, 최악은 옷과 먹거리를 주어 위로했다. 이후로도 최악이 이것저것 챙겨주어 은혜를 후히 베푸니, 유요는 감복하여 군신의 예로써 진심을 다해 그를 따랐다. 얼마 뒤, 대사면령이 내려져 죄를 사면받은 유요는 마침내 조선 땅을 떠났으나, 자신의 외모가 남들과 달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될 것이 두려워 관천산(管涔山)에 들어가 은거를 선택하고, 책과 거문고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2. 한조(漢趙) 초창기

원희 원년(304년) 10월, 흉노족의 대선우에 오른 유연이 좌국성(左國城)에서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한왕 유연은 은거하던 유요를 소환해 건무장군으로 삼고 시안왕(始安王)에 봉하였다.

원희 원년(304년) 12월, 대릉(大陵)에서 서진의 병주자사 사마등이 보낸 군대를 격파한 한왕 유연은 승세를 이용해 서진의 각 지역을 병탄해나갔다. 이때 유요는 태원(太原)을 침공해 중도(中都), 현지(泫氏), 둔류(屯留), 장자(長子)를 점거하였다.

영봉 원년(308년) 11월, 광문제 유연이 유요를 용양대장군으로 삼았다.

하서 원년(309년) 10월, 초왕 유총을 따라 여음왕 유경, 대사공 호연익(呼延翼)과 함께 정예 기병 50,000기와 보병을 거느리고 낙양 침공에 종군하였다. 한군이 다시 의양(宜陽)에 다다르자, 무려 한 달만에 재침공하리라 생각치도 못했던 서진 조정은 크게 진동하였다. 유총은 하남(河南)에서 진군을 격파한 뒤, 별다른 없이 서명문(西明門)에 주둔하여 낙양성을 위협하였다. 그때 진의 양주독호 북궁순과 호군 가윤(賈胤)은 용사 1,000여 명을 선발하고, 그날 밤에 성 밖으로 나가서 한나라 진영의 군루를 습격해 한의 정로장군 호연호(呼延顥)를 참수했다. 유총은 군대를 남쪽 낙수(洛水)로 옮겨 수습하려 했는데, 후방에 있던 호연익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대양(大陽)에 주둔해 있던 한군이 흩어졌다. 광문제 유연은 조서 내려 유총에게 돌아오라 명했지만, 유총이 진군의 나약함과 호연호, 호연익의 전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낙양 공략을 계속하기를 고집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청을 허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11월, 유총은 유요에게는 상동문(上東門)을, 왕미에게는 광양문(廣陽門)을, 유경에게는 대하문(大夏門)을 각자 맡아 공략하게 하고, 본인은 선양문(宣陽門)에 주둔해 공성하였다. 그러나 사마월의 방비는 무척 단단했고, 낙양성은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유총은 군대를 안양왕 유려(劉厲), 관군장군 호연랑(呼延朗)에게 잠시 맡기고, 신령에 기도라도 드리기 위해 스스로 숭산(嵩山)에 올라갔다. 이때 사마월이 참군 손순(孫詢)의 제안에 따라 손순과 장수 구광(丘光), 누부(楼裒)에게 용사 3,000명을 주어 유총의 진영을 습격케 했고, 손순 등은 선양문을 열고 나아가 한군을 습격해 대파하였다. 호연랑은 적에게 붙잡혀 참수당했고 유려는 목숨을 구했지만, 유총이 패전의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스스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유총은 급히 보고를 받고 내려왔지만 이미 군사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고, 광문제 유연까지 황문랑 부순(傅詢)을 보내 퇴각을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하고 낙양을 포위하던 모든 군대를 거두어 유요 등과 함께 평양(平陽)으로 귀환하였다.

하서 2년(310년) 7월, 진동대장군 석륵, 안북대장군 조고, 평북대장군 왕상을 이끌고 진의 하내(河內)태수 배정(裴整)이 지키는 회현(懷縣)을 포위하였다. 서진 조정에서는 정로장군 송추, 관군장군 양거(梁巨)를 보내 회현을 구원케 했으나, 장릉(長陵)에서 석륵과 왕상에게 요격당해 궤멸당하고 송추는 전사하였다. 이에 하내 사람들은 배정을 붙잡아 유요에게 투항하였다.

광문제 유연의 병이 위독해지자, 유요는 정토대도독, 영 선우좌보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문제 유연이 붕어하고, 태자 유화가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도성 밖에 군대를 거느리던 동생들을 제거하려다 초왕 유총에게 역으로 제거당하고 황제 자리까지 찬탈당하였다.

3. 영가의 난

광흥 원년(310년) 10월, 소무제 유총이 유요, 하내왕 유찬, 정동대장군 왕미에게 40,000명의 군사를 주어 낙양으로 진격케 하였다. 이때 병주자사 석륵 또한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대양(大陽)에서 이들과 합류해, 면지(澠池)에서 서진의 감군 배막(裴邈)을 격파한 뒤 낙천(洛川)으로 들어갔다. 이후 유찬 등은 환원(軒轅)으로 나가 양(梁), 진(陳), 여(汝), 영(穎) 일대를 노략질하여 성채 100여 개를 떨어뜨렸고, 석륵은 성고관(成皋關)으로 나가 창원(倉垣)에서 진류(陳留)태수 왕찬(王讃)을 포위해 격파시켰다. 왕찬은 패잔병을 이끌고 문석진(文石津)으로 패퇴하였다.

광흥 2년(311년) 5월, 안동장군 조억(曹嶷)이 청주(靑州)를 장악하고, 석륵이 허창(許昌)을 함락시키자, 드디어 때가 되었다 생각한 소무제 유총은 위위 호연안(呼延晏)을 사지절, 전봉대도독, 전군대장군으로 삼아 금군 27,000명을 이끌고 의양으로 들어가 낙양성을 압박하게 하였다. 그리고 낙양 인근을 정벌하던 왕미, 유요, 석륵에게도 명을 내려 호연안과 합류해 낙양성에 맹공을 퍼부을 것을 명했다. 호연안은 진격하면서 하남(河南)에 이를 때까지 서진군과 12번 싸워 전승하고 적군 30,000여 명을 죽였다. 예상보다 서진군의 방어가 쉽사리 뚫리면서 왕미, 유요, 석륵이 합류하기도 전에 호연안은 낙양성 7리 밖에 이르러 장방고루(張方故壘)[2]에 치중을 두고 공성 준비를 하였다.

광흥 2년(311년) 6월, 이윽고 준비를 모두 마친 호연안은 다른 군대의 합류를 기다림 없이 낙양의 남문인 평창문(平昌門)을 공격해 부수고, 성 내로 진입해 여러 관청들과 낙양의 동문인 동양문(東陽門)을 불살랐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실컷 노략질을 하며 회제 사마치가 도망치려고 준비해둔 낙수가에 대기시켜둔 배까지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며칠 뒤, 왕미의 군대가 낙양성 선양문에 도착하자 호연안은 그와 합류하고 남궁(南宮)으로 들어가 다시 약탈을 재개하였다. 회제 사마치는 화림원(華林園)을 통해 황궁을 빠져나가 장안으로 도망치려다 한군에게 붙잡혀 단문(端門)에 유폐당했다.

왕미가 궁성을 약탈할 때, 유요는 왕미가 자신보다 먼저 약탈하는 것에 원망을 품고 약탈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왕미가 따르지 않자, 유요는 왕미의 아문 왕정(王延)을 죽였고, 격분한 왕미는 유요군을 공격하기 시작해 서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왕미의 장사 장숭이 간언하자, 왕미는 깨달은 바가 있어 공격을 멈추고 유요에게 가 사죄하였다. 유요 역시 무의미한 싸움임을 알고 있었기에 왕미를 용서하였다. 이때 왕미가 유요에게 말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요, 사방이 험준한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여있어 방어가 굳건합니다. 또, 성곽과 황궁을 새로 지을 필요도 없으니, 평양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요는 왕미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서명문(西明門)을 통해 낙양성으로 들어가 무기고에 주둔한 뒤, 태자 사마전(司馬詮), 오왕 사마안, 경릉왕 사마무, 원찬왕 사마곤(司馬緄), 좌복야 화욱(和郁), 우복야 조복(曹馥), 상서 여구충(閭丘沖), 하남윤 유묵(劉黙) 등 서진의 왕공과 병사, 백성 30,000명을 학살해 낙수(洛水) 북쪽에 경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진의 여러 능묘를 파헤쳐 도굴을 자행하였고, 황궁을 약탈하면서 사당과 관청을 불태워 없앴다. 이를 본 왕미는 노하여
"도각놈의 자식에게 무슨 제왕의 뜻이 있으리오! 네놈이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 한탄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 항관(項關)에 주둔하였다. 이후 유요는 약탈할 때 발견한 서진의 제2대 황제인 혜제 사마충의 황후 양헌용을 부인으로 삼았고, 회제 사마치와 전국옥새는 평양(平陽)으로 보냈다.

4. 제1차 장안 공략전

가평 원년(311년) 8월, 낙양이 무너지고 회제가 잡혀갔지만, 아직 서진의 제후왕이나 군벌들도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소무제 유총은 우선 관중 평정을 목표로 잡아 평서장군 조염과 안서장군 유아(劉雅)에게 20,000명의 기병을 주어 장안을 공격케 하고, 하내왕 유찬과 유요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그 뒤를 받치게 하였다. 조염의 군대는 동관(潼關)에서 사마모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패사시킨 후 하규(下邽)까지 진격하자, 양주독호 북궁순이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장안에서 나와 조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모는 다시 장수 순우정(淳于定)을 보내 조염을 공격해보았지만, 또 패하여 창고의 군량은 소진되었고 병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결국 병력과 물자를 모두 탕진한 사마모는 장안성을 들어 투항하였고,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옹주목으로 삼아 장안을 지키게 함과 동시에 중산왕(中山王)에 봉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사마모가 유찬에게 살해당할 때, 빙익태수 삭침(索綝)은 안이호군 국윤, 빈양현령 양숙(梁肅)과 함께 안정(安定)으로 도망쳐 안정태수 가필과 서진 부흥을 모의하였다. 당시 삭침 등이 음밀(陰密)에서 한군을 습격해 인질로 끌려가던 가필의 아들을 구출해주었기에, 가필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평서장군으로 추대받았다. 가필이 50,000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하자, 아직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던 부풍(扶風)태수 양종(梁綜), 옹주자사 국특(麹特), 신평(新平)태수 축회(竺恢)도 이에 호응하여 100,000 군사를 일으켜 가필의 무리와 합류하였다.

신풍(新豐)에 주둔하고 관서의 나머지 지역을 평정하던 하내왕 유찬은 조염과 유찬으로 하여금 신평을 치게 하였으나, 유아와 조염이 신평을 구원하러 온 삭침에게 패하였다. 황구(黃丘)를 공략 중이던 유요 역시 가필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한의 양주자사 팽탕중이 전사하였고, 신풍에 있던 유찬은 국특 등의 습격으로 대패하여 유요만 장안에 내버려둔 채 평양으로 도주하였다. 이로 인해 관중의 이민족, 한족 할 거 없이 한나라에 들고 일어났고, 예주자사 염정에 이끌려 관중으로 진입한 진왕(秦王) 사마업은 가필의 호위를 받으며 옹성(雍城)으로 들어갔다.

가평 2년(311년) 4월, 장안성에서 농성하던 유요는 여러 차례 가필에게 패하여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병사를 풀어 장안의 백성 남녀 80,000여 명을 겁박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장안을 빠져나와 평양으로 돌아갔다. 가필은 옹성에 머물던 진왕 사마업을 장안성으로 모셨고, 그곳에서 제2의 서진 조정을 꾸렸다. 패배하고 돌아온 유요는 용양대장군, 행 대사마로 강등당하였다.

5. 진양 전투

가평 2년(312년) 7월,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이 진양현(晉陽縣)령 서윤(徐潤)의 참소만 믿고 자주 간언을 올리던 호군 영호성(令狐盛)을 죽였다. 영호성의 아들 영호니(令狐泥)가 한나라로 도주해 소무제 유총에게 유곤 세력의 허실을 전부 털어놓으니, 유총은 무척 기뻐하며 유요와 하내왕 유찬에게 영호니를 길잡이로 삼아 병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를 들은 유곤은 상산(常山)과 중산(中山)에서 병력을 끌어오기 위해 근거지인 진양에서 나오고, 동맹인 탁발의로에게 구원을 청하는 동시에 장수 학선(郝詵)과 장교(張喬)를 보내 유찬을 막게 하였다. 유찬은 학선과 장교를 모두 무찔러 전사시킨 뒤 곧바로 진양을 포위하였고, 태원태수 고교(高喬), 병주별가 학율(郝聿) 등은 진양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양성에 입성한 유찬은 상서 노지, 시중 허하(許遐), 태자좌위솔 최위(崔瑋)를 평양으로 압송하였다.

가평 2년(312년) 10월, 유곤 세력과 동맹 관계인 탁발부 탁발의로가 아들 탁발육수에게 수만 대군를 주고, 그를 선봉에 세워 탁발보근(拓跋普根), 위웅(衛雄), 범반(範班), 희담(姬澹) 등과 함께 궁지에 몰린 유곤을 구원하도록 명하였고, 스스로는 친히 200,000 대군으로 그 뒤를 이어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곤은 패잔병 수천 명을 겨우 수습하고 탁발부의 군대를 위해 길을 안내했다. 유요는 분수(汾水) 동쪽에서 탁발육수의 군대를 영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도망치던 중 유시에 맞고 낙마하여 몸 일곱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그때 토로장군 부무(傅武)가 자신의 말을 유요에게 내어주니, 유요가 사양하며 말했다.
"남 신경쓰지 말고 스스로 빠져나갈 길을 생각하라. 나는 어차피 상처가 깊으니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겠다."
이에 부무가 울면서
"저는 한낱 소인의 불과하였으나, 대왕께서 저를 돌봐주신 덕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 은혜를 보답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인가 봅니다.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대왕께서는 천하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라 답하고는 유요를 말 위에 태워 분수 너머로 가게 한 뒤, 다시 전장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유요는 무사히 진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유요가 패하고 온 것을 본 유찬은 탁발부의 군대가 강해 진양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풀어 진양의 백성들을 실컷 약탈한 다음 몽산(夢山)을 넘어 몰래 평양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탁발의로는 유찬과 유요를 추격해 남곡(藍谷)에서 그들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3,000여 명이 전사하였고, 한군의 시체가 수백 리에 걸쳐 널렸으며, 여러 장수들이 사로잡혔다. 다만, 그 와중에도 유찬과 유요는 겨우 살아남아 평양으로 돌아갔다. 유요로부터 부무의 희생에 대해 보고받은 소무제 유총은 부무를 유주자사로 추증함으로써 그 충절을 기렸다.

6. 제2차 장안 공략전

가평 3년(313년) 4월, 민제 사마업이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자, 유요는 소무제 유총의 명령을 받들어 평서장군 조염, 사예교위 교지명과 함께 장안성을 다시 침공하였다. 진나라의 옹주자사 국윤도 장안에서 나와 황백성(黃白城)에 주둔하여 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에 유요는 군대를 포판에 주둔시키고 국윤의 서진군과 더불어 여러 번 전투를 벌였다.

가평 3년(313년) 10월, 국윤은 유요, 조염과 수 차례 격돌하였으나 번번이 격파당해 황백성에서 간신히 농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제 사마업이 삭침을 정동대장군 삼아 군사를 보내 황백성을 구원케 하니, 그 틈을 노린 유요가 조염에게 기병 5,000명을 주어 장안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조염이 밤에 기병대를 이끌고 장안을 급습하여 장안의 외성(外城)을 점거하자, 민제 사마업은 사안루(射雁樓)로 피신하였다. 조염은 해가 뜰 때까지 장안성의 용미(龍尾)와 여러 군영들을 불태워 없애고, 1,000여 명을 죽인 뒤, 소요원(逍遙園)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이후 아성(阿城)의 장수 국감(麴鑒)이 5,000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을 구원한다는 소식에, 조염은 철수하여 유요의 군영으로 복귀했다. 국감은 조염을 추격했다가 영무(零武)에서 마중나온 유요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가평 3년(313년) 11월, 거듭된 승리로 자만한 유요는 군영의 방비를 게을리하다가 국윤의 기습으로 인해 패하고 관군장군 교지명이 전사하였다. 유요와 조염은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수도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유요는 다시 소무제 유총의 명령에 따라 석량오(石樑塢)를 공격해 서진의 하남윤 위준을 사로잡아 죽이고, 위준을 구원하러 오던 서진의 연주자사 유연(劉演)과 하내태수 곽묵도 모두 격파하였다.

7. 제3차 장안 공략전

가평 4년(314년) 정월,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가평 4년(314년) 6월, 재차 장안 공략에 나서서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을 따로 신풍에 주둔하게 하자, 장안성에서 태위 삭침이 나와 조염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조염은 패배했어도 피해가 크진 않았기에 남은 군사들로 곧장 장안성으로 향하면서 빙익에서 옹주자사 국윤을 무찔렀으나, 패잔병을 수습한 국윤이 야습으로 한군을 격파하고 장수 은개(殷凱)를 죽였다. 이에 당장은 장안성 공략이 힘들 것이라 생각한 유요는 군대를 돌려 회(懷)를 포위해 하내태수 곽묵을 압박하였다.

곽묵은 성 안의 식량이 금방 떨어져 처자식을 인질로 보내 유요로부터 양식을 얻자마자 다시 성문을 잠그고 농성하였다. 분노한 유요는 곽묵의 처자식을 모두 황하에 빠뜨리고 군대를 더욱 세차게 휘몰아 공성하자, 곽묵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신정(新鄭)에서 세력을 기르고 있는 형양태수 이구에게 의탁을 청하였다. 이구는 자신의 조카 곽송(郭誦)을 보내 곽묵을 영접하였고, 유요는 곽묵이 버리고 간 회를 점거하여 하내군을 장악한 뒤, 포판(蒲板)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유요는 조염을 보내 북지(北地) 공략을 시도했지만 청백성(青白城)에서 국윤과 싸우던 조염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건원 원년(315년) 8월, 유요가 상당(上黨)을 침공해 양원(襄垣)에서 유곤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곤의 본거지인 양곡(陽曲)까지 밀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 소무제 유총이 장안 함락이 우선이라며 유요를 제지하니, 유요는 다시 포판으로 돌아가 주둔하면서 가는 길에 곽매(郭邁)를 토벌하였다.

건원 원년(315년) 9월, 유요가 다시 장안으로 진격을 시작하자, 민제 사마업은 국윤을 대도독으로 삼아 유요를 막게 하였다. 하지만 유요는 길을 가로막는 서진군을 모두 무찔러 마침내 빙익을 점거하였고, 빙익태수 양숙(梁肅)은 만년(萬年)으로 도망쳤다. 이후 유요는 상군(上郡)을 침공하여 서진의 수비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는데, 그때까지도 국윤은 유요군에 비해 식량과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도 못하고 영무(靈武)에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건원 2년(315년) 7월, 유요가 다시 북지 공략을 시도해 북지태수 국창(麴昌)을 포위하니, 대도독 국윤이 보•기 30,000명을 거느리고 구원하였다. 이에 유요는 병사들에게 명해 북지성 주변에 불을 질러 연기를 마구 피우게 하였고, 북지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국윤군에 퍼뜨렸다. 국윤의 군사들은 그 소문을 믿고 두려워 나아가려 하지 않다가 반석곡(磻石谷)에서 유요의 습격을 받고 궤멸당했으며, 대패한 국윤은 영무로 돌아가 지켰다. 결국 북지마저도 유요에게 함락당했고, 경양(涇陽)까지 진격한 유요의 군대는 위수(渭水) 이북의 여러 성들을 점거하였다. 이때 유요는 건위장군 노충(魯充), 산기상시 양위(梁緯)와 그의 처 신씨(辛氏)를 사로잡았는데, 투항을 거부한 노충과 첩이 되기를 거부한 신씨에게 검을 주어 자결케 하였다. 유요는 노충과 신씨의 시신을 수습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건원 2년(315년) 8월, 유요가 장안성 공격을 개시하니, 남양왕 사마보가 장수 호숭(胡崧)을 보내 민제 사마업을 구원케 하였다. 호숭은 영대(靈臺)에서 유요군을 격파했으나, 서진이 다시 부흥하면 국윤과 삭침이 다시 세를 떨칠 것을 염려하여 괴리(槐裡)로 돌아갔다. 구원군이 철수하자 유요는 이내 장안의 외성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고, 국윤과 삭침은 소성(小城)으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하였다.

건원 2년(315년) 11월, 민제 사마업이 시중 송창(宋敞)으로 하여금 유요에게 항복 서신을 전달케 하였다. 그러나 삭침이 송창을 억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의 아들을 유요에게로 보내
"지금 소성 내에는 1년치 식량이 있으니, 삭침을 거기장군, 의동삼사로 삼고, 1만 호의 군공(郡公)으로 봉할 것을 약속한다면 소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라는 말을 전달토록 하였다. 삭침의 거짓말을 간파한 유요는 그 자리에서 삭침의 아들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삭침에게 돌려보내면서
"천자의 군대는 의(義)를 따라 움직여야만 하므로, 나는 15년간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면서 거짓된 계략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성 안의 식량과 병사가 그리 많다면 그것이 다할 때까지 성을 지키고 천명(天命)을 깨닫도록 하라."
라는 말을 전했다. 결국 삭침은 종창을 풀어주었고, 종창은 유요에게 항복 서신을 전달하였다.

민제 사마업이 양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어깨를 드러낸 채 입에 둥근 옥을 머금고, 수레에 관을 실은 채 소성 동문(東門)으로 나와 유요에게 항복하였다. 서진의 신하들은 이 모습을 보고는 모두 통곡하였고, 어사중승 길랑(吉朗)은 자결하였으며, 민제 사마업 역시 스스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유요는 사마업이 가져온 관을 불태우고, 그 옥구슬을 받은 다음, 종창에게 명해 사마업을 잠시 궁성에 모시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에 사마업과 서진의 공경들을 평양으로 압송하였다. 소무제 유총은 유요가 서진을 완전히 멸망시킨 공을 인정하여 가황월, 대도독, 독섬서제군사(督陝西諸軍事), 태재로 삼고, 작위를 진왕(秦王)으로 개봉하여 장안을 진수케 하였다. 이때 패상(霸上)에 주둔해있던 산기상시 화집(華輯)의 지휘 아래 장안을 구원하기 위해 모인 여러 군의 태수 연합군은 장안성이 함락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장안성이 함락된 직후에 유요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고, 상서 양윤(梁允), 시중 양준(梁濬)을 비롯한 수많은 서진의 태수들이 전사하였다.

8. 근준의 난

인가 3년(318년) 7월, 병으로 쓰러져 눕게 된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승상, 석륵을 대장군으로 삼고, 둘 모두 녹상서사에 임명해 나란히 보정을 맡긴다는 유조를 내렸다. 두 사람 모두 굳게 사양했으나,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끝내 승상, 영 옹주목(領雍州牧)으로 삼았고, 석륵 또한 대장군, 영 유기2주목(領幽冀二州牧)으로 삼은 뒤 붕어하였다. 유총 사후 황제로 즉위한 은제 유찬이 주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다가 근준에게 놀아나 자신의 동생들을 모조리 숙청하니, 심상치 않은 낌새를 직감한 태부 주기(朱紀)와 수상서령 범륭이 평양을 빠져나와 장안의 유요에게로 도망쳤다.

한창 원년(318년) 8월, 은제 유찬이 석륵을 정벌하기 위해 상림원(上林苑)에서 군대를 열병하고 유요를 상국, 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장안을 계속 지키게 하였다. 하지만 대장군 근준이 황제가 연회를 즐기는 틈을 타 조서를 위조해 군권을 장악하였고, 이내 반란을 일으켜 은제 유찬과 한나라의 황족들을 몰살하면서 한천왕(漢天王)을 자칭하였다. 여기에 유요의 모친과 친형도 휘말려 근준에게 목숨을 잃었다.

광초 원년(318년) 10월, 유요는 장안에서 변고를 듣고 출진하여 적벽(赤壁)에 도착하였고, 대장군 석륵 역시 50,000 군사를 거느리고 양릉(襄陵)의 북쪽 언덕에 주둔하였다. 평양성에 있던 태보 호연안 등이 성을 빠져나와 유요에게 귀부하면서 태부 주기 등과 더불어 유요에게 칭제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유요는 그곳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근준의 가문만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연호는 '광초(光初)'로 개원하여 주기를 사도, 호연안을 사공으로 삼고, 범륭 이하 백관들의 직위는 이전의 것으로 회복시켰다. 또, 석륵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9석(九錫)을 내리고, 10개의 군을 그의 봉지로 하여 조공(趙公)에 봉하였다. 이후 정북장군 유아와 진북장군 유책(劉策)을 분음(汾陰)으로 보내 석륵과 함께 평양을 공략하게 하였다.

광초 원년(318년) 11월, 근준은 시중 복태(卜泰)를 보내 석륵에게 승여 어의를 바치고 화친을 청했으나, 석륵은 복태를 사로잡아 황제 유요에게 보냈다. 황제 유요는 복태와 대면한 뒤, 그에게 말하길
"선제께서 말년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대한 도리를 저버리시고, 환관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면서 충량한 자들을 주멸하셨으니, 진실된 의사(義士)라면 이를 토벌하여 조정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공(근준)의 마음은 충렬하여 단지 이윤과 곽광의 고사에 의거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였고, 짐은 그 덕에 즉위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 큰 공훈이 있다. 짐은 큰 어려움을 이겨낼지언정 명령을 함부로 내려 군자나 현인을 주살하는 일은 기필코 하지 않을 것이다. 사공이 만약 진실로 충량하여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짐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공을 조정에 들여 정사를 보게 할 생각이다. 경은 성으로 돌아가 이러한 짐의 뜻을 사공에게 전하도록 하라."
라 하며 풀어주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복태로부터 유요의 말을 전달받은 근준은 항복할 의사가 있었음에도 평양성의 유씨들을 몰살할 때 유요의 어머니 호씨(胡氏)와 친형을 처형한 바 있었기에 그 진의를 의심하면서 망설였다.

광초 원년(318년) 12월, 좌거기장군 교태(喬泰), 우거기장군 왕등(王騰), 위장군 근강 등이 근준을 살해하고 상서령 근명을 주군으로 옹립하였다. 근명은 복태를 유요의 군영으로 파견해 전국새를 반납한 후 투항할 뜻을 전했다. 이에 유요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전국새를 손에 넣음으로써 제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대의 공이로다!"
한편, 자신이 근명을 토벌하고 전국새를 얻을 속셈이었던 석륵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근명을 더욱 매섭게 공격하였다. 근명은 평양성에서 석륵과 여러 번 맞서 싸웠지만 전부 패하여 유요에게 구원을 청했고, 유요는 유아와 유책을 보내 근명을 영접케 하였다. 덕분에 근명은 평양의 병사와 백성 15,000여 명을 이끌고 유요에게로 달아날 수 있었다. 유요는 속읍(粟邑)에서 도망쳐온 근명을 맞이하였으나, 이전에 한 말을 번복하고 근명을 포함한 근씨 성을 가졌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참수하였다. 또, 유아를 평양으로 파견해 자신의 어머니 호씨의 시신을 수습하고 속읍에서 장사를 지냈다.

9. 전조 건국

광초 2년(319년) 2월, 석륵이 평양에서 근준이 파괴한 능을 복구하고, 좌장사 왕수(王脩)와 부관인 유무(劉茂)를 사자로 보내 유요에게 보고하자, 유요는 그의 공을 치하하며 석륵을 조왕(趙王)으로 진봉시키려 하였다. 또, 사자로 온 왕수와 유무를 모두 장군으로 삼고 열후에 봉하려 했는데, 왕수의 수행인 조평락(曹平樂)이 유요에게 접근해
"대사마가 왕수 등을 보낸 것은 사실 이곳의 동향을 살피려 함이 목적입니다. 왕수가 돌아간다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라 참소하였다. 유요는 조평락의 말만 믿고 왕수를 저자에서 참수하고 그 임명을 모두 취소하였으나, 살아서 석륵에게로 돌아간 유무가 이를 석륵에 보고하였다. 이에 석륵은 대로하여
"내가 유씨를 섬기면서 숱한 공을 세운 덕에 지금의 한나라가 있는 것 아니더냐! 그럼에도 자신의 뜻을 이루자마자 나를 해치려 들다니, 조왕은 물론이요 조의 황제의 자리도 나의 힘으로 직접 얻으리라!"
라 소리쳤다.

광초 2년(319년) 4월, 유요가 소무제 유총의 폭정에 이어 근준의 난으로 황폐해진 평양을 대신 장안을 수도로 삼고, 앞에는 광세전(光世殿)을, 뒤에는 자광전(紫光殿)을 두었다. 그리고 부인 양헌용을 황후로 삼고, 양현용의 아들인 유희를 태자로 삼았으며, 아들 유습(劉襲)은 장낙왕(長樂王), 유천(劉闡)은 태원왕(太原王), 유충(劉沖)은 회남왕(淮南王), 유창(劉敞)은 제왕(齊王), 유고(劉高)는 노왕(魯王), 유휘(劉徽)는 초왕(楚王)에 봉하여 여러 종실들을 군왕으로 삼았다.

광초 2년(319년) 6월, 장안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국호를 조(趙)로 고쳐 흉노족 대선우의 후예임을 강조하며, 한나라(전한, 후한, 촉한) 역대 황제[3]의 제사를 금함으로써 한 황실 계승을 버렸다. 그리고 남교와 북교를 설치해 묵돌 선우에게 제사를 올리고, 광문제 유연을 상제(上帝)에 배향하였다.

광초 2년(319년) 11월, 석륵이 양국에서 또 다른 조나라를 세웠기에 흉노족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갈족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로 구별한다.

10. 관동 평정

광초 2년(319년) 12월, 당시 신평과 부풍에서 거병한 흉노족 도각부의 노송다(路松多)가 서진의 남양왕 사마보와 연합하였다. 사마보는 양만(楊曼)을 옹주자사, 왕련(王連)을 부풍태수로 삼아 진창(陳倉)을 점령케 하고, 장의(張顗)를 신평태수, 주용(周庸)을 안정태수로 삼아 음밀(陰密)을 점령케 한 후, 노송다는 초벽(草壁)에 주둔시켰다. 이로 인해 진주(秦州)의 저족과 강족이 반란하여 사마보에게 호응하자, 유요는 거기장군 유아와 평서장군 유후(劉厚)를 파견해 이를 토벌케 하였다. 하지만 20여 일이 지나도록 전조군은 이기지 못했고, 답답해진 유요는 친히 정예군을 인솔해 옹성(雍城)으로 들어갔다.그때 태사령 변광명(弁廣明)이 유요에게 진언하였다.
"어젯밤 요성(妖星)이 달을 범하였으므로 이 이상 나아가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이에 유요는 옹성에 그대로 머무른 채 유아에게 포위를 풀고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진을 수비하고만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장안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황후 양헌용이 정사에 관여하면서 음란해지는 징조를 보였다.

광초 3년(320년) 정월, 유요가 다시 진군을 재개하여 유아와 마침내 합류하였고, 진창(陳倉)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만이 왕련에게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적 진영에 다섯 개의 우기(牛旗)가 세워진 것을 보건대, 호주(胡主: 유요)가 직접 이른 것 같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라 성이 포위되면 100여 일도 지나지 않아 우리 병사들이 자멸할 것이 뻔하니, 차라리 나가서 결전을 벌이느니만 못하다. 만약 우리가 승리한다면 관중의 격문을 기다림 없이 밀고 나아갈 것이고, 패한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 일찍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 말하고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성 밖에 진을 쳤다. 유요는 양만 등의 군대를 공격하여 궤멸시켰고 왕련은 여기서 전사하였으나, 양만은 살아남아 남저(南氐)로 도망쳤다. 진창을 함락시킨 유요는 이어서 초벽을 공격해 노송다를 격퇴시켰고, 아울러 음밀까지 차지해버렸다. 노송다는 패하여 농성(隴城)으로 달아났고, 위협을 느낀 사마보 역시 상성(桑城)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진주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 유요는 유아를 대사도로 삼았다.

광초 3년(320년) 2월, 낙양성을 지키던 전조의 좌중랑장 송시(宋始), 진위장군 송서(宋恕), 홍농(弘農)태수 윤안(尹安), 장수 조신(趙慎) 네 장수가 전조를 배반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요는 광평왕 유악(劉岳)을 정동대장군으로 삼아 낙양을 탈환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유악의 군대에 역병이 퍼져 유악은 민지에서 진군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석륵이 석생을 보내 또다시 배반하여 이구에게 투항한 4명의 장수들 중 송시만 사로잡으니, 석생의 군세가 강성한 것을 본 유악은 섬성(陝城)에 들어가 지켰다. 얼마 뒤, 석생은 다시 황하 이북으로 돌아갔고, 송서, 윤안, 조신을 포함한 낙양의 백성들은 이구가 보낸 영천태수 곽묵을 따라 이구에게로 귀순하면서 낙양성이 텅 비었다.

광초 3년(320년) 5월, 남양왕 사마보의 부하인 장춘(張春)과 양차(楊次)가 사마보를 살해하고, 그 종실의 아들 사마첨(司馬瞻)을 세자로 세워 대장군이라 칭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마보가 사망했다는 것을 안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전량으로 달아났고, 농서의 군벌 진안을 이를 기회로 삼아 유요에게 사마첨 토벌을 주청하였다. 유요가 진안의 청을 허하자, 진안은 사마첨을 공격하여 사마첨과 양차를 죽였고, 장춘은 부한(枹罕)으로 도주하였다.

광초 3년(320년) 6월, 장수교위 윤차(尹車)와 장수 해호(解虎)가 파족 추장 구서(句徐), 사팽(厙彭)과 결탁하여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윤차와 해호는 주살당했다. 유요는 그들과 모반을 꾸미던 구서, 사팽 등 50여 명을 아방(阿房)에 감금하여 전부 죽이려 하니, 광록대부 유자원(游子遠)이 간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유자원도 물러서지 않고 피를 흘릴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간했다.
"성왕(聖王)이 형을 내릴 때는 그 원흉에게만 책임을 묻고, 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과 같이 원한 살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요는 크게 분노하여 유자원을 투옥시킨 후, 구서 등을 모조리 죽여서 그 시체들을 10여 일간 저자에 방치하다가 썩은내가 진동할 때 즈음에 강물에 던져 버렸다.

유요의 이러한 처분에 파족 무리는 모두 반란하여 추장 구거지(句渠知)를 주군으로 추대하고, 대진(大秦)이라는 나라를 세워 개원하였다. 여기에 저족, 강족, 갈족 등 300,000여 명이 같이 호응하니, 관중 일대는 큰 혼란에 잠겨 성들은 낮에도 문을 단단히 걸어잠가야 했다. 유자원은 옥중에서도 간언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를 받아든 유요는 심히 노하여 그것을 찢어버리고
"대려(大荔)의 종놈이 자신의 목숨도 걱정치 않고 감히 이와 같은 글을 올리다니, 늦게 죽기 그리 싫은 것이더냐?"
라 말하며 좌우에 명해 유자원을 처형케 하였다. 이때 유아, 주기, 호연안 등이 간언하였다.
"유자원은 유폐된 마당에도 간언을 아끼지 않았으니, 이는 사직을 향한 충성이 앞서 장차 죽으리라는 생각조차 잊은 것입니다. 설령 폐하께서 그를 쓰시지 않더라도 어찌 이런 인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만약 유자원이 조정에서 주살된다면 신들 역시 그 날 저녁에 목숨을 끊음으로써 폐하께서 잘못을 깨닫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천하의 사람들은 마땅히 폐하를 떠나 서해(西海)에서 죽음을 맞이할 텐데, 그때가 되어서 폐하께서는 누구와 함께 일을 도모하시겠습니까!"
유요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유자원을 사면하였다.

유요가 성 안팎으로 계엄을 내려 구거지 토벌에 친정하려 하니, 유자원이 나아가 말했다.
"폐하께서 우매한 신의 계책을 써주신다면 폐하의 어가를 직접 움직일 필요도 없이 한 달여 만에 반란을 평정해 보이겠습니다."
유요가 말했다.
"경은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이에 유자원이 답했다.
"적들에게는 큰 뜻이나 황위를 찬탈하려는 마음은 없고, 단지 폐하의 강경한 처분이 두려워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이미 죽은 자를 추궁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모든 역적 집안의 노약자를 사면하고, 여러 번 보살펴주어 그 업(業)을 복원케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처럼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어찌 투항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구거지가 자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알고 투항을 거부한다면, 그때는 신이 약한 병졸 5,000여 명만으로 폐하를 위해 그를 평정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도적 무리들은 강과 계곡 지형을 잘 활용하기에, 폐하께서 하늘의 위세를 업고 힘으로만 밀어붙인다면 1년 안에 평정하기는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유자원의 계책을 들은 유요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도독옹진정토제군사(都督雍秦征討諸軍事)로 삼고, 대사면령을 내려 반란한 무리를 용서하였다. 과연 유자원이 옹성(雍城)에 주둔했을 때, 100,000여 명이 귀순하였고, 그 군대가 안정에 이르렀을 때는 음밀의 구씨 종족 5,000여 호를 제외한 모든 반란군 무리가 항복하였다.

유자원은 음밀을 쳐 구씨 종족을 멸하고, 농우(隴右) 일대를 순회하면서 상군에서 100,000여 호의 강족, 저족을 이끌며 진왕(秦王)을 자칭하던 추장 허제권거(虛除權渠)를 정벌해 다섯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허제권거는 두려워 장차 투항하려 했으나, 허제권거의 아들 허제이여(虚除伊余)가 무리에게
"유요가 친정했을 때도 우리는 무사했거늘, 하물며 유자원 따위에게 어찌 투항할 수 있으랴!"
라며 큰소리치고, 새벽에 정예병 50,000명으로 보루 문을 박차고 나와 유자원 군영의 루문(壘門)을 공격하였다. 유자원의 부하들은 모두 나가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유자원이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내 듣기로 허제이여의 용맹함은 마땅히 당해낼 자가 없다 하였고, 그 병사와 말들도 강성하여 우리로서는 이에 필적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 패한 것에 노기가 가득하니, 지금은 그들과의 전면전만큼은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는 보루를 굳게 지키면서 응전하지 않았다. 유자원이 겁먹은 것이라 판단한 허제이여는 교만한 마음이 생겨 경계를 게을리 하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유자원은 한밤중에 장병들에게 배식하여 배를 채우게 하고,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우니, 유자원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라 외치며 스스로 앞장서서 전군과 함께 보루에서 나와 허제이여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허제이여와 그 무리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한 채로 생포당했고, 이를 들은 허제권거는 두려움에 머리를 산발하고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낸 뒤 항복을 청하였다. 유요는 허제권거를 정서장군에 임명하고, 서융공(西戎公)에 봉하였으며, 허제이여 형제들과 부락민 200,000여 명은 나누어서 장안에 거주하게끔 하였다. 또, 이번 정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유자원은 대사도, 녹상서사에 임명하였다.

진주를 완전히 평정한 유요는 내치로 눈을 돌려 장락궁(長樂宮) 동쪽에 태학을 설치하고, 미영궁(未央宮) 서쪽에 소학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성들 중 13세 이상 25세 미만인 자를 선별하여 교육에 적합한 인재 1,500명을 고르고, 조정의 어진 유학자를 선발해 그들을 가르치끔 하였다. 이에 따라 중서감 유균(劉均)이 국자좨주를 겸하게 되었고, 숭문좨주라는 관직을 새로 만들어 경서에 정통한 산기시랑 동경도(董景道)를 그 작책에 임명하고 봉록은 국자좨주에 준하는 만큼 주었다.

유요는 장안성에 풍명관(酆明觀)과 서궁(西宮)을, 장안성 서남쪽에 위치한 호숫가 호지(滈池)에 능소대(陵霄臺)를. 한문제의 능묘 패릉(霸陵) 서남쪽에 자신의 능묘인 수릉(壽陵)을 지으라 명하면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행하려 하였는데, 시중 교예(喬豫)와 화포(和苞)가 상소로 간하여 궁궐과 대 건축은 그만두었다. 능묘도 패릉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작은 규모로 만들었고, 간언을 올린 교예를 안창자(安昌子), 화포를 평여자(平輿子)로 책봉해 나란히 간의대부로 삼았다. 또, 황실 소유 어장인 풍수유(酆水囿)를 빈민들을 위해 개방하였다.

광초 4년(321년) 5월, 장안 동남쪽에 위치한 종남산(終南山)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이때 장안 사람 유종(劉終)이 무너진 산주변을 돌다가 사방으로 1척 길이에 달하는 백옥을 발견하였는데, 백옥에는
황망, 황망, 패조창.(皇亡,皇亡,敗趙昌.)
우물물이 메말라 오량을 만들고, 닭 우는 소리도 쇠약하여 고요해졌네.(井水竭,構五梁,咢酉小衰困囂喪.)
오호! 오호! 안장 끈을 당기던 붉은 소가 그 힘이 다하였도다.(嗚呼, 嗚呼, 赤牛奮靷其盡乎.)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유요의 산하들은 모두 입을 모아 석륵의 멸망을 가르키는 것이라 주장하니, 유요는 매우 기뻐하며 태묘에 백옥을 바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때 중서감 유균이 나아가 불길한 징조라는 해석을 내놓자, 유요는 자신이 그동안 부덕한 행실을 엄격히 조심해왔는데 그럼 왜 이 재앙이 닥친 것이냐며 한탄하였다.

11. 구지 정벌

광초 5년(322년) 2월, 유요가 친정하여 구지 양난적을 공격하였다. 양난적이 유요를 당해내지 못하고 구지(仇池)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니, 구지에게 복종했던 여러 강족, 저족 무리와 사마보 사후 구지에 의탁하고 있던 장수 양도(楊韜), 도구(韜懼), 농서태수 양훈(梁勛) 등이 모두 유요에게 귀순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이리하여 순조롭게 정벌이 진행되던 와중에 갑자기 군영 내에서 역병이 돌아 유요까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유요는 자신이 철수할 때 양난적이 뒤를 습격할 것을 걱정해 광국중랑장 왕광(王獷)을 보내 이해득실을 따지며 양난적을 설득케 하였고, 양난적은 사자를 파견해 전조에 칭번하였다. 이에 유요는 양난적을 사지절, 시중, 가황월, 도독익녕남진량양파6주농상서역제군사(都督益寧南秦涼梁巴六州隴上西域諸軍事), 상대장군, 익녕남진3주목(益寧南秦三州牧), 영 호남저교위(領護南氐校尉), 녕강중랑장(寧羌中郎將), 무도왕(武都王)으로 삼고, 그 자제 15명을 모두 공후나 장군, 2,000석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구지 정벌을 마친 유요가 장안으로 돌아가면서 안정 교외에 이르렀을 때, 진주자사 진안이 알현을 청했으나 유요는 병이 심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잔안은 분노하여 유요는 이미 죽었는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라 섣불리 단정하고, 반란을 일으켜 대거 약탈하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유요는 병이 위독해 진안을 차마 막지 못하고 일단 계속하여 장안성으로 진군했으나, 진안이 정예 기병으로 회군하는 유요군의 후미를 쳐 치중을 감독하던 장수 호연식(呼延寔)과 그 장사 노빙(魯憑)을 사로잡았다. 호연식은 진안의 투항 요청에 굴하지 않고 모욕하다가 사망하였고, 노빙은 투항하여 진안의 참군으로 임명되었다. 진안은 아우 진집(陳集)에게 기병 30,000기를 주어, 장수 장명(張明)과 함께 유요군의 뒤를 추격케 하였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위장군 호연유(呼延瑜)가 요격하여 진집은 전사하였고 그 병사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제서야 두려운 마음이 든 진안이 일단 상규로 돌아오고, 장수 유열(劉烈)과 조한(趙罕)을 파견해 견성(汧城)을 뽑으니, 농상(隴上) 일대의 저족과 강족들이 진안에게 귀부하였다. 이리하여 100,000명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된 진안은 대도독, 가황월, 대장군, 옹양진양4주목(雍涼秦梁四州牧), 양왕(涼王)을 자칭하고 조모(趙募)를 상국으로 삼음으로써 전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때 참군 노빙이 울음터뜨리며
"나는 차마 진안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다!"
라 절규하자, 진안은 격분하여 노빙을 참수하라 명했다. 노빙은 처형되기 직전에
"죽음은 본래 나의 몫이나, 내가 죽으면 조(趙)가 진안을 참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내 머리를 진주(秦州) 길가에 걸어다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노빙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요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현인은 천하의 희망이다. 현인을 해하는 것은 천하의 정(情)을 해하는 것으로, 태평성대의 군주는 감히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는 법이 없거늘, 하물며 천하면 어떠하랴! 진안은 어진 인재를 구해야할 이 시기에 군자를 해쳐 작금의 희망을 끊어놓았으니, 나는 이로써 그 무능함을 짐작할 수 있구나."

광초 6년(323년) 6월, 진안이 남안으로 진격해 전조의 정서장군 유공(劉貢)을 포위하였다. 이때 흉노의 휴도왕(休屠王) 석무(石武)가 상성(桑城)에서 나와 상규를 공격하자, 근거지가 털리는 것을 염려한 진안은 남안의 포위를 풀고 황급히 상규로 향했다. 퇴각하던 진안은 석무의 군대와 고전(瓜田)에서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진안의 병력이 훨씬 많아 전세가 매우 유리하였다. 석무는 중과부적으로 잠시 후퇴하여 예전에 장춘이 세웠던 보루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신이 난 진안은 석무의 뒤를 추격하며 외쳤다.
"역적 오랑캐 종놈아! 곧바로 저 종놈을 생포한 후에 유공(劉貢)도 참하리라!"
하지만 진안이 보루를 공격하는 사이에 유공이 남안에서 나와 진안의 후군을 치니 진안군 10,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진안은 보고를 받고 얼른 군사를 돌려 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이로 인해 진안군은 서로 엉키면서 더 큰 혼란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을 파악한 석무가 보루에서 나와 유공과 협공하였다. 결국 앞뒤로 공격받게 된 진안군은 대패하여 궤멸당했고, 진안은 살아남은 기병 8,000기만 수습해 농성(隴城)으로 도망쳤다.

광초 6년(323년) 7월, 진안의 패주 소식을 들은 유요는 이번 기회에 진안을 뿌리뽑고자 친정하여 농성을 포위하고, 따로 군대를 보내 상규도 포위하였다. 진안은 여러 차례 성 밖으로 나와 전조군과 싸웠지만 번번이 패했고, 그 와중에 전조의 우장군 유간(劉幹)이 이끄는 별동대가 평양(平襄)을 함락시키자, 진안에게 투항했던 농상(隴上)의 여러 현들이 일제히 전조에 항복하였다. 이에 유요는 농우 일대에 진안과 그 측근인 조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더욱 투항을 독려하였다. 바깥 상황을 모르던 진안은 상규와 평양의 병력을 끌어와 농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장수 양백지(楊伯支), 강충아(姜沖兒) 등을 남겨 지키게 하고, 수백 기의 정예 기병과 함께 전조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상규로 향했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함락당했고, 상규도 이미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진안은 이내 섬중(陝中)으로 달아났다.

유요는 장수 평선(平先)과 구중백(丘中伯)을 보내 진안을 추격하게 한 끝에 겨우 진안의 수급을 얻을 수 있었다. 진안의 사망 소식은 널리 퍼져, 양백지는 강충아를 참수하고 농성을 들어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진안의 장수 송정(宋亭)도 조모를 참수하고 상규를 들어 전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진주는 완전히 평정되었고, 유요는 진주의 대성(大姓)인 양씨(楊), 강씨(姜) 등 여러 유력 호족 2,000여 호를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진안에게 호응했던 저족과 강족들은 각각 인질을 보내 다시 전조에 복속되었고, 진안을 돕던 구지의 양난적은 동생 양견두(楊堅頭)와 함께 성한의 한중(漢中)으로 도망쳐 진서장군 유후가 그 뒤를 추격하였다. 이때 적정(赤亭)의 강족 추장 요익중도 전조에 항복하여 평서장군에 임명되고 평양공(平襄公)에 봉해졌다.

12. 전량 정벌

광초 6년(323년) 8월, 유요는 군사를 나누어 장수 유함(劉咸)은 기성(冀城)의 한박(韓璞)을, 호연안은 상성(桑城)의 녕강호군 음감(陰鑒)을 치게 한 뒤, 유요 자신은 친히 주력 2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황하 인근으로 가 전량을 위협했다. 당시 유요의 군대는 수만 많았지 대부분 강제로 끌려온 강족, 저족이었기에, 유요는 싸움을 피하고 그 위세만으로 전량을 굴복시키기 위해 곧장 전량의 수도인 고장(姑臧)으로 진격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대대적인 공격에 놀란 전량의 군주 장무는 석두(石頭)에 주둔하고, 참군 진진(陳珍)을 보내 한박을 구원케 하면서 잠시 저항할 기미를 보이다가, 압도적인 숫자에 싸울 엄두를 못해고 사자를 보내 칭번하고 각종 예물을 헌납하였다. 목적을 달성한 유요는 그를 양왕(凉王)에 봉하고, 지절과 부월을 내렸으며, 구석을 더하였다. 이후 장안으로 돌아온 유요는 장무의 아버지와 처의 묘소에 호원(胡元)을 보내 그 크기를 90척 정도 더 넓히게 하였다.

진서장군 유후가 한중으로 도망친 양난적을 추격해 치중 1,000여 대와 남녀 6,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서 돌아왔다. 유요는 대홍려 전숭을 진남장군, 익주자사로 삼아 구지로 부임하게 하였다. 그 무렵에 생사불명이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유윤이 돌아와 유희와 유윤을 사이에 두고 후계 문제를 갈등했으나, 유윤의 양보와 유희 파벌의 간청으로 유희를 그대로 후계자로 두었다.

13. 후조와의 전쟁

광초 7년(324년) 정월, 유요와 석륵이 인근 세력을 병탄해나가면서 어느덧 중원에 가장 큰 두 세력만이 남게 되자, 슬슬 갈등이 물리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후조에서 먼저 선공하여 사주자사 석생을 파견해 신안(新安)을 공격하고, 하남태수 윤평(尹平)을 살해한 후 백성 5,000여 호를 납치해 돌아갔다.

광초 7년(324년) 5월, 전량의 왕 장무가 죽자 유요는 사자를 파견해 위로했고, 장무의 뒤를 이어 양왕으로 즉위한 장준도 참군 왕즐(王騭)을 전조로 보내 화답하였다.

광초 8년(325년) 3월, 북강왕 분구제(盆句除)가 전조에 항복하자, 후조의 장수 석타(石佗)가 안문(雁門)에서 나와 상군(上郡)을 침략해 3,000여 명을 사로잡고, 가축 백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에 유요는 중산왕 유악을 보내 석타를 추격케 하고, 자신은 부평(富平)에 주둔하여 유악을 원조하였다. 유악은 하빈(河濱)에서 석타를 공격해 참수하고, 6,000여 명을 죽인 뒤,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고 돌아왔다. 이때 한중으로 도망쳤던 양난적이 돌아와 전숭을 죽이고 구지를 탈환하면서 전조는 구지의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였다.

광초 8년(325년) 4월, 후조의 서이중랑장 왕등(王騰)이 후조의 병주자사 최곤(崔崑)과 상당내사 왕신(王愼)을 살해하고, 병주를 들어 전조에 항복하였다.

광초 8년(325년) 5월, 낙양을 점거한 석생이 하남 공략을 시작하자, 이구와 곽묵이 후조에 귀부하고 원군을 청하였다. 유요는 중산왕 유악에게 정예병 10,000명과 갑사 5,000명을 주어 낙양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유악은 맹진과 석량에서 후조군을 격파한 뒤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포위하였다. 이에 석호가 성고관(成皐關)에서 40,000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낙양성 서쪽에서 유악을 격파하였고, 유악은 석량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석호가 석량을 포위 공격하면서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를 참수하니, 유요는 위기에 몰린 유악을 구하기 위해 친정하였다.

석호는 유요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30,000기를 거느리고 유요를 막았다. 전조의 전군장군 유흑(劉黒)이 팔특판(八特阪)에서 석총을 대파하면서 나름 전조군은 선전하였으나, 금곡(金谷)에 주둔해있던 유요군 진영에서 밤중에 연고를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현상이 발생해 병사들이 흩어져 해산하였다. 유요는 하는 수 없이 민지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공포 현상이 또 발생하여 병졸이 다시 달아나 흩어지니,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광초 8년(325년) 6월, 석량이 함락당하고, 유악, 왕등을 포함한 전조의 장수 80여 명과 강족, 저족 3,0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양국으로 압송되었다. 나머지 포로 9,000여 명은 석호에 의해 구덩이 파묻혀 생매장당했다. 같은 달에 전조의 영토 내인 무공(武功)에서 멧돼지가 개를 낳고, 상규(上邽)에서 말이 소를 낳는 등 여러 요사스런 현상들이 보고되었는데, 이와 같은 일들이 너무 많아 전부 기록하지 못했다고 한다.

광초 10년(327년) 5월, 전량의 왕 장준이 전조로부터 받은 관직과 작위를 버리고 진주를 침공해왔다. 유요는 남안왕 유윤을 적도(狄道)로 보내 장준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유윤은 조수(洮水)를 사이에 두고 70여 일간 전량의 군대와 대치하다가 옥천령(沃干嶺)에서 군량을 운반하던 전량군을 습격해 치중을 빼앗고, 나아가 전량의 본대도 격파한 뒤, 도망치는 전량군을 추격하여 영거(令居)를 지나 진무(振武)까지 점거하였다. 하서 일대는 크게 요동쳐 금성(金城)태수 장랑(張閬), 부한호군 신안(辛晏)이 수만 무리를 거느리고 전조에 투항하였다.

광초 11년(328년) 7월, 후조의 석호가 지관(軹關)에서 40,000 군사를 이끌고 나와 하동(河東)의 50여 개의 현이 후조군에게 호응하였고, 석호는 그대로 진격해 포판을 공격하였다. 유요는 친히 수륙으로 병행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는 동시에, 하간왕 유술(劉述)을 진주에 주둔시켜 장준과 양난적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유요가 온다는 소리에 석호는 두려워 일단 물러났는데, 운이 나쁘게도 고후(高候)에서 전조군에게 따라잡혀 크게 싸웠다가 대패하고 장수 석첨이 전사하였다. 후조군의 시체는 200여 리에 걸쳐 누웠고, 노획물은 1억을 헤아렸으며, 석호는 목숨만 구해서 조가(朝歌)로 도망쳤다. 유요는 대양(大陽)에서 황하를 건너 석생이 지키는 금용성을 쳤고, 아울러 별동대를 파견해 급군과 하내군을 공략하여 형양(滎陽)태수 윤구(尹矩)와 야왕(野王)태수 장진(張進) 등이 전조에 투항하였다. 유요는 100,000 군사로 금용성을 공성하면서 천금알(千金堨)을 파괴해 수공도 시도했으나, 100여 일이 지나도록 금용성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광초 11년(328년) 12월, 금용성 포위전이 장기화가 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지루함을 느꼈고, 군영에서 술을 마시며 도박에 빠졌다. 좌우에서 이를 간언하는 신하들도 있었으나, 모두 분노한 유요에게 참수당했다. 한편, 석륵은 이때를 틈타 성고(成皋)에서 보•기 87,000명을 모으고, 장수들과 함께 쉬지 않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 유요는 후조군이 황하를 건넜다는 보고를 듣고 황마관(黃馬關)에 군사를 보내 막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낙수(洛水) 인근에서 잡힌 갈족 포로로부터 석륵이 친정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안색이 변해 금용성의 포위를 거두고 낙수가에 100,000 대군을 남북으로 10리 가량의 진영을 세워 석륵을 기다렸다. 강 너머에서 유요의 군대를 본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40,000 병력을 인솔해 유요군을 우회하여 낙양성으로 들어갔고, 석호에게 보병 30,000명으로 낙양성 서쪽에서부터 전조군의 중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석총과 석감은 정예 기병 8,000기로 낙양성 북쪽에서부터 전조군의 선봉을 치게 하였다.

석륵이 어느새 낙양성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들은 유요는 당황하여 다시 낙양성으로 군대를 돌렸다가 서양문(西陽門)에서 후조군과 크게 싸웠다. 석호와 석총, 석감이 전조군을 향해 돌격하니, 석륵도 친히 갑옷과 투구를 입고 돌진하여 3면으로 전조군을 협공하였다. 유요는 항상 싸움에 나설 때면 적마(赤馬)를 타고 지휘하였는데, 이때는 적마가 발을 꼬고 풀이 죽어있어 하는 수 없이 그보다 다른 말에 올라 전장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술을 1두 넘게 마시는 바람에 술에 취하여 제대로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결국 대패한 유요는 도망치다가 말이 도랑 위에서 빙판에 미끌어져 낙마하였고, 후조군에게 사로잡히기까지 창과 칼에 맞아 10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유요는 석총에게 붙잡혀 석륵의 앞까지 끌려왔다. 유요가 석륵을 바라보고 말했다.
"석왕(石王)이여! 중문(重門)에서의 맹약[4]을 기억하는가?"
석륵은 서광을 통해서 말을 전했다.
"오늘의 일은 하늘이 행한 것일진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후 유요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석륵은 다시 수도 양국(襄國)으로 귀환하면서 석수에게 유요 호송 임무를 맡겼다. 당시 유요는 갑옷 곳곳이 뚫려 부상이 심했으므로, 석수는 금창의(金瘡醫) 이영(李永)을 함거에 넣어 유요의 상처를 치료하게 하면서 이동하였다. 이윽고 무사히 양국에 도착한 유요는 영풍(永豐)의 소성(小城)에 유폐되었다.

14. 최후

석륵은 유요에게 기생 하나를 첩으로 주고, 군사를 붙여 엄히 호위하였으며, 이전에 포로로 잡힌 유악, 유진(劉震) 등에게 의복을 잘 차려입은 남녀를 종자로 주어 유요를 만나보게 하였다. 그들을 본 유요가 말했다.
"내 오랫동안 이르기를 경들이 회토(灰土)가 되었다 하였는데, 석왕(石王)이 인자함을 후히 베푼 덕에 그대들 모두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니, 결국 맹약을 져버린 사람은 석타를 죽인 나였구나. 오늘의 화는 내가 불러들인 꼴이로다."
그러고는 연회를 베풀어 하루종일 유악 등과 회포를 풀었다.

석륵이 유요에게 명해 장안의 태자 유희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서신을 쓰게 하였다. 하지만 유요는 석륵의 기대와 달리
「대신들과 더불어 사직을 유지하고, 나와 바꿀 뜻은 품지 말라.」
라는 내용을 적었다. 이를 보고 기분이 상한 석륵은 후에 유요를 살해하였다.

유요의 아들들과 일족들은 모두 훗날 전조가 멸망할 때 처형당했지만 유요의 딸 안정공주 유씨는 살아남았다. 안정공주는 석호의 첩이 되어 나중에 석호가 황제로 즉위하자 귀인 유씨가 되었다. 유씨는 태조 무황제 석호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석세를 낳았다. 하지만 유요의 외손자인 석세는 제위에 얼마 있지도 못하고 석준에게 쫓겨났으며 그의 어머니 유씨와 함께 죽었다.


[1]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220cm가 나온다. [2] 팔왕의 난 당시 낙양성을 함락시킨 하간왕 사마옹의 장수 장방이 세워둔 보루다. [3] 전한 태조 고황제(유방), 후한 세조 광무제(유수), 촉한 열조 소열제(유비), 효회제(유선). [4] 광문제 유연에 명령에 따라 배정(裴整)이 지키던 하내(河内)를 공략할 때 석륵과 유요가 맺은 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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