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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점기



元干涉期(1268~1309)

몽골 간섭기(1232~1356) 동안 원나라 고려의 주권을 박탈하고 고려에 대한 직접 수탈을 본격화하는 1268년부터 원나라의 직접 수탈이 종결되는 1309년까지의 약 40여년에 달하는 시기.

1. 원(元)의 식민지(1268 ~ 1309)
1.1. 군권 박탈1.2. 외교권 박탈1.3. 무단 통치1.4. 강제 징병과 징용1.5. 농우(農牛) 수탈1.6. 쌀 수탈1.7. 공녀(貢女) 수탈1.8. 기타 수탈1.9. 일제 강점기와 비교1.10. 남송인들만 못했던 고려인들의 실상1.11. 국체유지≠독립국1.12. 부마국≠자주국1.13. 고려에 대한 외세의 평가
2. 결론3. 고려 매국노 명단4. 참고자료

1. 원(元)의 식민지(1268 ~ 1309)

8년간의 유예기(1260~1267)후 원나라가 합포(경남 창원)에 병참 기지를 설치하고 고려에 대한 수탈을 본격화하는 1268년부터 원나라의 직접 수탈이 종결되는 1309년까지 약 40여년에 달하는 시기다. 이 시기 고려는 국가 주권은 물론 신민들의 기본권마저 외세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는 개국 이래 사상 최대의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최씨 무신정권의 실책과 막장행보가 불러온 원(元)강점기(1268~1309)는 한민족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족 최대의 수난기였다.

이 시기 고려왕은 원나라에 의해 임명되고 폐위되는 원의 일개 신하로 전락했으며, 국민들의 권리를 대변해주지 못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있으나마나한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다음은 원(元)강점기 동안 고려의 국권 피탈 사건들 중 대표적인 예들이다.
① 고려는 고려인들 스스로 임금을 세울 수 없었다. 원(元)강점기 동안 고려 임금과 그 후계자는 칸이 결정하였다.[1]
② 국가 최고의결권을 원이 가지고 있었다. 고려 왕실은 국가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을 내릴때마다 언제나 상국(上國) 원나라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③ 고려는 상비군을 거느릴 수 없었고 원으로부터 수시로 병부와 군대를 사찰받았다.
④ 원나라는 두 차례 삼별초 토벌(1271, 1273)과 다섯 차례의 일본 원정(1274, 1280, 1283, 1285, 1293)을 기획하면서 전함병량도감(戰艦兵粮都監)[2]을 설치하고 농무별감(農務別監)[3]을 파견하여 고려의 인력과 자원을 수탈하였다. 그 밖에 고려는 평시에도 원나라를 위한 식량과 물자를 수시로 공급해야 했다.
⑤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원에 공녀를 바치게 되었다.[4]

이 시기 고려의 위상은 외국에 주권을 빼앗긴 채 외국(원)을 위해 경제, 군사적으로 수탈당하는 신세였다는 점에서 명백한 식민지(colony)였다. 이 시기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승인하에 미미하게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행정력도 원나라의 이익을 위해 통제당하였으므로 고려가 주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제후국(vassal)설이나 속주(province)설은 이러한 고려의 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전자는 신하가 황제로부터 영토를 분봉받아 다스리는 나라를 뜻하는데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영토를 분봉받기는 커녕 되려 침탈을 당했기 때문에 고려를 원의 제후국으로 규정할 수 없다. 또한 제후국의 주민들은 본국(本國) 천자가 주관하는 제국의 일원으로서 본국 주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 반면 고려인들은 원나라를 위한 각종 노역과 수탈에 시달리는 노예 상태였기 때문에 제후국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속주설 역시 부정될 수 밖에 없는데, 고려가 원나라의 속주였다면 원나라의 행성에 편입되 정상적인 통치(rule)를 받고 고려인들 또한 원나라의 동등한 신민[5]의 일원으로서 내륙인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아야 했건만 이 시기 고려인들의 지위는 원나라를 위해 각종 강제 노역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노예나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원나라에 귀부한 친원파들이 고려를 원의 행성에 편입시키기 위해 주동한 '입성책동' 역시 고려가 원나라의 속주가 아니였음을 증명하는 사례인 것이다. 그 외 고려를 원나라의 속주(province)로 볼 수 없는 주요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278년 여름 충렬왕은 일본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몽고군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이를 감시할 다루가치를 보내달라고 원에 정식으로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는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전후 복구를 위해 필요한 호구 조사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합포(경상남도 창원)에 진수군(鎭戍軍)[6]을 주둔시켜달라는 충렬왕의 요청도 묵살되어졌는데, 이것은 원이 고려를 보호해야할 속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여러 군대가 귀환할 때 양민(良民)을 억지로 잡아갈까 걱정입니다. 청컨대 이를 금지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말했는데 누가 감히 그대의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잡아오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황제께서 신임하는 몽골 사람 1인을 달로화적(達魯花赤,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달로화적인가? 그대가 스스로 알아서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또한 상국(上國)의 법대로 호구(戶口) 조사를 할 수 있기를 청하옵니다.[7]라고 하고, 또 합포진수군(合浦鎭戍軍)을 머물러 있게 하여 왜구(倭寇)에 대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머물러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그대의 백성에게 피해가 없겠는가? 그대는 스스로 그대 나라 사람들을 써서 진수(鎭戍)하도록 하라. 왜구(倭寇)는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호구 조사 같은 것도 스스로 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충렬왕 4년(1278), 7월 ㅡ

결론적으로, 당시 고려는 원의 정치, 경제, 군사적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과 물자가 징발, 수탈당할때만 원(元)제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식민지(colony)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1.1. 군권 박탈

이 시기 고려는 상시 병력을 거느릴 수 없었고 지방의 얼마 안되는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 병력[8]마저도 원나라를 위한 군사 작전과 치안 유지 목적 용도로 밖엔 운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고려 병사들은 원의 허락이 없이는 무기조차 소지할 수 없었고[9], 모든 무기는 몽고군으로부터 검열을 받았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 고려군이 원으로부터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군사 훈련조차도 금지당했음을 뜻한다. 다음의 기록들은 그 증거다.
갑진 부달로화적(副達魯花赤, 부다루가치) 초천익(焦天翼)이 말하기를, “병기(兵器)는 개인의 집에 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 사용한 병장기를 수거하여 전부 염주(鹽州)의 몽고군 주둔지로 보냈다.

ㅡ <고려사>, 1271년 10월, 삼별초 토벌 직후 ㅡ
임진일.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흑적(黑的)이 사람들이 활과 화살을 휴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ㅡ <고려사>, 1275년 5월, 1차 일본원정 직후 ㅡ
우리나라에 과거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있을 적에 전국 민가에 있는 활과 화살 가운데 쓸만한 것은 심지어 타포호(打捕戶, 수렵에 종사하는 가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징발해 갔습니다. 또 이전 일본 정벌당시 군사 5,300명이 지니고 갔던 갑옷과 활·화살은 이미 대부분 망실되었고 겨우 수습해 창고에 쌓아둔 것도 이미 사용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지금 새로 징집한 군사 4,600명은 애당초 갑옷과 병기가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자기 몸을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황제께 잘 아뢰어 갑옷 5천 벌, 활 5천 개, 활줄 만 개를 내려주심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바랍니다.

ㅡ <고려사>, 1280년 11월, 2차 일본원정 직전 ㅡ
다음의 기록들은 역시 고려 정부가 훈련받은 정규군(상비군)을 거느리지 못했음을 증언해준다.
"저희나라는 원래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터라 그들을 몇 달 동안이나 부역시킨다면 농사일은 어떻게 될지 우려됩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5년(1274), 2월 ㅡ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4월 ㅡ
"현재 탐라(耽羅)를 수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사 1천 명은 앞서 일본 정벌 때에 본국에서 차출한 병력 5,3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드물어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는 터에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더 차출한다면 도저히 그 수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 우려 됩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6년(1280), 11월 ㅡ
당시에 논의하기를,“본국에 백성은 있으나 군사가 없는데도 만호(萬戶)나 천호(千戶)의 금패·은패[10]를 많이 요청하고 있다. 만약 조정에 일이 생겼을 때 패의 수를 가지고 병사를 징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ㅡ <고려사 절요>, 충렬왕 14년(1288), 2월 ㅡ
원래대로라면 고려는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를 가동하고 있을테지만 몽골의 감시와 압력으로 끝내 2군 6위 체제를 복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골이 들어오기 전 이미 오래전부터 무신정권의 수탈과 사병화 작업으로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가 붕괴되었다 하더라도 원의 내정 간섭을 받는 수십여년의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군제 복구에의 시도가 없었다는 것은 고려 상비군 운영에 원나라가 방해가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카다안(哈丹, 합단)의 침입(1290)에 대응한 충렬왕의 일화는 고려왕의 무능함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되어지는 고사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고려엔 동원 가능한 상비군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카다안의 침입에 고려 정부는 원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고, 전투 경험도 없는 지방의 미천한 농민들을 소집해 맞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때 원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것은 원이 고려를 '보호해야할' 제후국이나 속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카다안 무리가 본국(元)을 위협하는 반란군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비군의 부재 상황은 공민왕 말기까지 지속되는데 다음의 기록은 이때까지 고려가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를 복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공민왕 5년(1356) 6월. 왕이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각 지역에서 추가로 별초(別抄)를 정하면서 노약자와 단정(單丁, 장정이 한 명인 집안)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멀리 수자리를 살러 나가게 만드는 바람에 이들이 오가느라 지쳐 잇달아 도피하는 실정이다."

ㅡ 『고려사』 권82, 지제36, 병(兵)2 ㅡ
공민왕21년(1372) 10월. 왜적의 전함 27척이 양천포(陽川浦,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가양동)로 침구해오자 장수들이 나가 싸웠으나 패배했다. 간관(諫官) 우현보(禹玄寶) 등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훈련받지 않은 민(民)들을 전쟁에 내모는 것은 민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하물며 전쟁이라는 것은 위험한 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평상시 미리 대비하지 않아서 민(民)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변란이 발생하면 그제야 놀라고 당황하면서 민들을 마구 몰아다가 군대를 편성하는 형편입니다. 병사들은 적과 맞붙기도 전에 멀리서 바라보고도 뿔뿔이 도망쳐 버리니 이런 식으로 싸우면 무슨 승산이 있겠습니까? 비록 손무(孫武)와 오기(吳起)를 장수로 삼더라도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미리 장수를 선발한 후에 병졸을 모아 전투를 가르쳐 익히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북소리에 귀를 익히고 깃발에 눈을 숙달시키게 해 전투에 나서도 놀라지 않고 한번 싸워볼 만 하다고 여기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도 모두 용감히 싸울 것이니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져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ㅡ 『고려사』 권81, 지제35, 병(兵)1 ㅡ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규군의 부재는 1359년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무리가 고려를 쳐들어왔을때 수도를 빼앗기고 안동으로 피신한 공민왕이 다시 원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2. 외교권 박탈

이 시기 고려의 외교권 또한 침해당하였는데 고려는 몽골을 위해 일본과 교섭하도록 강요당했고, 남송과의 교류도 끊도록 강요당했다.
계축일. 몽고에서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을 파견하여 조서에서 말하기를,“그대 나라 사람 조이(趙彝)가 와서 말하기를,‘일본은 고려와 가까운 이웃나라인데 법률과 정치가 제법 훌륭합니다. 한(漢)·당(唐) 이후로 때때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흑적 등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니, 그대는 사신이 그 땅에 도달하도록 안내하여 동쪽 사람들을 깨우치고 중국의 의를 사모하도록 하라. 이 일은 경(卿)이 책임지고, 풍랑이 험하다는 말로 핑계대지 말고 이전에 일본과 통한 적이 없다고 하며 혹시 그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보낸 사신을 거부할까 염려된다고 핑계대지 말라. 경의 충성심은 이 일로 드러날 것이니 각별히 힘쓰라.”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1266년 11월 25일 ㅡ
또 다른 조서(詔書)는 다음과 같았다. ... (중략) ... "지난해의 경우, 어떤 자가 ‘고려가 남송(南宋) 및 일본과 서로 내왕한다.’고 하기에 사실 여부를 경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은 소인배들의 말에 현혹된 나머지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었다. 금년 남송의 상선이 고려에 왔을 때 경이 우리 몰래 떠나보냈다가 행성에서 따지자 그제서야 행성에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 (중략) ... "지금 이후로 남송이나 일본이든 간에 만약 그들과 무슨 일이 발생하면 즉각 군사·군마·전함·군량을 조달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 (중략) ... 우리가 육지로 나온 뒤에 송나라 상선이 와서 정박한 것을 우리 조정에서 몰래 돌려보냈는데, 행성에서 이 사실을 탐지했기 때문에 황제가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ㅡ <고려사>, 1270년 12월 20일 ㅡ

1.3. 무단 통치

고려가 공식적으로 원나라에 입조하고 주권을 이양한 후에도 몽고군이 고려에 들어와 고려 주민들을 상대로 자행한 무차별적 인신 구속과 약탈 행위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특수한 지배(control)를 받는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토벌을 위해 진도에 상륙했을 당시 몽골 병사들은 사람과 보물을 노획했으며, 이에 앞서 강화도를 접수했을 당시에도 몽병 무리들이 섬의 곳곳을 누비며 임의로 주민들을 체포하고 약탈을 벌였다. 당시 삼별초는 이미 진도로 주둔지를 옮긴 뒤라서 전투는커녕 몽고군을 자극할만한 일체의 소란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고려 주민들을 상대로 불법을 자행하였다.
두련가(頭輦哥, 튀렝게) 국왕이 타자알(朶刺歹, 도라다이)을 보내 군사 2천 명을 이끌고 강화(江華)로 들어가게 하니, 왕이 타자알이 강화에 남아있는 백성을 반역자라고 생각하여 살육과 약탈을 저지를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타자알은 듣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서 군대를 풀어 재물을 약탈하였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였다.

ㅡ <고려사>, 1270년 6월 5일 ㅡ
"두련가(頭輦哥, 튀렝게)가 사람을 시켜 강화성 안의 민가를 불사르니, 불탄 미곡과 재물의 양을 헤아릴 수 없었다."

ㅡ <고려사>, 1270년 8월 11일 ㅡ

이에 대하여 고려왕은 어사대부(御史大夫)[11] 원부(元傅)를 쿠빌라이에게 보내어 정식으로 항의하게 하였으나 되려 쿠빌라이는 이를 소인배의 간언으로 몰아붙이며 고려왕을 꾸짖는 조서를 내려 돌려보낸다.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배신(陪臣) 원부(元傅) 등이 와서 두련가(頭輦哥, 튀렝게) 국왕과 행성(行省) 관리들이 몇 가지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켰다고 보고하였는데, 지금 직접 대질하였더니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보고 내용은 경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경의 뜻이 아니고 소인배(小人輩)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지난번에 경이 짐에게 말하기를, ‘소인배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라고 하기에 짐도 타이르며 말하기를, ‘짐이 혹시 이전에 소인배의 말을 들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경은 조심하여 소인배의 말을 듣는 것을 삼가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보니 경 또한 소인배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어찌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소인배 같은 자들은 또 전대(前代)의 고사(古事)를 늘어놓거나 조상 이래의 법도를 늘어놓을 텐데, 비록 전대의 고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경의 조상 이래의 법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겠는가? 마땅히 좋은 것을 선택하여 따르고,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이 옳다. 짐이 경에게 어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겠는가? 만약 나쁜 마음을 쓰려고 하였다면 당연히 작년에 그러했을 것이다.”

ㅡ <고려사>, 원종11년(1270), 12월 20일 ㅡ

1년 후 몽고군이 진도를 접수했을때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었다.
"적들(삼별초)에게 사로잡혔던 강도(江都, 강화도)의 사녀(士女)들과 진귀한 보석들 및 진도(珍島)의 거주민들은 모두 몽고(蒙古) 병사들에 의해 노획되었다."

ㅡ <고려사>, 1271년 5월 ㅡ

이에 고려왕이 정식으로 항의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원수(元帥) 흔도(忻都, 힌두)에게 연락하여 고려 백성으로서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자들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흔도가 듣지 않았다.

ㅡ <고려사>, 1271년 8월 ㅡ
중서성(中書省)에도 글을 보내 말하기를,“삼가 제공(諸公)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황제의 은택이 베풀어지도록 주선하여 역적에게 끌려간 백성들이 모두 돌아오게 하였으니 온 나라가 우러러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협에 의해 따라간 신민(臣民)의 친척 중에는 난리가 일어났을 때 혹은 이쪽으로 왔고 혹은 저쪽으로 가기도 하였으며, 사고로 인하여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위협 당한 자도 있습니다. 지금 귀국 군대(官軍)는 이들을 모두 역적의 무리라고 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나누어 가진 사람들을 각각 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개경(王京)·황주(黃州)·봉주(鳳州) 등지로 분산 거주시키고 있으며, 혹은 서로 앞다투어 인근 지역에 숨겨 놓기도 하고 혹은 먼저 몰래 몽고로 보내니 비록 친척이 있더라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다른 섬이나 고을에서 진도로 들어갔다가 붙들린 자도 있으며 혹은 귀국의 군대가 다른 섬이나 고을로 나뉘어 가서 잡아온 자도 있는데, 말로는 그들을 분간하여 고려나 귀국 군대에게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곳에 모아놓고 철저히 조사하여 석방을 허락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또 노비와 같은 자들은 각기 자기 주인을 따르는 자들로, 그 주인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육지로 나올 때 가산을 조사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돌아간 자들이 있는데 모두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지금 모두 잡아다가 역적의 무리와 같다고 하면 황제의 은혜를 입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ㅡ <고려사>, 1271년 8월 ㅡ
9월 경오 재추(宰樞)가 탈타아(脫朶兒, 톡토르)와 함께 흔도(忻都, 힌두)의 주둔지 오산(烏山)에 가서 역적 외의 사람들을 반환하라고 요청하였다. 흔도가 고집을 부리며 허락하지 않자, 탈타아가 황제의 명령을 거론하면서 극력 따져서 어느 정도만 추려서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71년 9월 ㅡ
그마저도 몽골인 다루가치 톡토르(脫朶兒, 탈타아)[12]가 황제의 명령을 거론하며 부원수를 설득하여 노획된 고려인들 중 일부만을 되찾아올 수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 원나라 정부가 고려에서 자행되는 몽고군의 불법 행위들을 묵인해주었음을 뜻한다. 나중에 충렬왕이 이 문제를 한 차례 더 거론하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카베(哈伯)와 보라(孛剌)가 힌두(忻都)에게, “그대 휘하의 군사 중에 고려 백성들을 처족(妻族, 처첩)이라고 속이고 데려오는 자가 있다고 하던데 그대는 황제의 분부가 무섭지 않은가?”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왕에게는,“진도와 탐라를 정벌할 당시 군대에게 포로가 된 자에 대해서는 국왕께서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마십시오.”하고 선을 그었다.

ㅡ <고려사>, 1278년 7월 ㅡ

그 외에도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로부터 영흥도(靈興島)를 탈환했을때도 몽골 장수 송만호(宋萬戶)가 삼별초에 억류되어 있던 고려 주민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 몽골은 고려에 들어와 군사 활동을 벌일때마다 민간인들을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때마다 늘 옆에 있던 고려군 지휘관들은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군사 60여인을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 등 군사 1,000 여 인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한 것을 바라보고, 김방경이 그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 이를 제지하였다. 적이 이내 달아났다. 적중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노소를 아울러 1,000 여 인이었는데, 송만호가 적당(賊黨)이라고 하며 모두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ㅡ <고려사>, 1271년 4월 24일 ㅡ

대부도(大部島)에서는 몽고군의 수탈을 참다 못한 주민들이 봉기하는 일도 있었다.
착량(窄梁)을 지키는 몽고(蒙古)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서 주민을 침탈하자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는데, 대부도 사람들이 숭겸(崇謙)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몽고인 6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ㅡ <고려사>, 1271년 2월 7일 ㅡ

또한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했을 당시 원의 장수 홍다구가 삼별초에 의해 강제 옹립된 원종의 사촌 승화후 왕온(王溫)과 그의 아들을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정부로부터 아무런 문책도, 처벌도 받지 않았다.
위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동모형(同母兄)이었다. 왕준이 왕희와 왕옹에게 당부하기를, “만약 전쟁에서 이긴다면, 마땅히 나의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홍차구가 먼저 진입하면서 왕온과 그의 아들 왕환(王桓)을 살해하였다.

ㅡ <고려사>, 1271년 5월 ㅡ

홍다구는 또한 고려 장수 김방경에게 역죄를 씌워 고려왕이 보는 앞에서 고려의 관리를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러도 고려왕은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13] 다음의 기록은 심지어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의 사소한 불법 행위들을 제재하는데도 원나라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을유. 황주(黃州)와 봉주(鳳州)의 경략사(經略使)가 사람을 시켜 원(元)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으므로 승도들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그 조서에서 말하기를, “원의 군사들이 사원에서 소란을 일으켜 불경과 불상을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하여 승려들이 안심하고 불법(佛法)을 닦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ㅡ 1273년 2월 ㅡ

원의 일개 관료들이 고려 땅에 들어와서 고려 지도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군사 작전을 비롯한 각종 불법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있었던 것은 고려의 주권이 침해당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고려 정부의 역할 마저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이처럼 당시 원나라는 원하면 언제든지 고려 정부의 행정력을 거치지 않고서도 고려의 내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고려는 몽골의 직접 지배(control)를 받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려에서 원나라 관리에 의해 자행된 각종 노역에의 동원과 물자 수탈은 이러한 직접 지배의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1.4. 강제 징병과 징용

고려 백성들은 삼별초 토벌과 일본원정을 위한 징용과 징병을 강제당했는데 변변찮은 전투 병력이 없던 고려는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징발당하였다. 또한 원정이 없는 기간에도 원나라를 위한 각종 노역에 징발당하였다. 주요 내용 몇 가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8월.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오도지(吾都止)와 함께 몽고에 보내 보고하게 하였는데, 대략 내용에 이르기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전성기에도 인구가 오히려 적었고, 하물며 신묘년(1231)부터 30년간 전쟁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사망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현재 호적에 올라있는 남은 백성도 겨우 농사에 복귀하였으며, 군대에 소속된 사람들도 건장하고 날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다방면으로 징발하여 겨우 1만 명을 확보하였고, 전함은 이미 연해의 관리에게 맡겨서 재목을 마련하여 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ㅡ 1268년 8월 ㅡ
경인일. 몽고가 명위장군(明威將軍)·도통령(都統領) 톡토르(脫朶兒)와 무덕장군(武德將軍)·통령 왕국창(王國昌) 및 무략장군(武略將軍)·부통령 유걸(劉傑) 등 14명을 보내 다음과 같은 조서를 전달했다. "경이 최동수(崔東秀)를 사신으로 보내와 병력 1만 명과 전함 1천 척을 준비했음을 보고해 왔기에 이제 특별히 톡토르 등을 그곳으로 보내 병력과 전함을 검열하도록 했다. 건조하는 전함들은 지금 보낸 관원들의 지시에 따라 만들도록 하라. 만약 탐라(耽羅 : 제주도)에 조선(造船)의 일을 맡겼다면 다시 부담을 줄 필요는 없으나, 아직 일을 맡기지 않았다면 별도로 1백 척을 건조하도록 하라."
ㅡ 1268년 10월 ㅡ
몽고(蒙古)에서 주부개(周夫介)를 보내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중략) "경은 부근에서 군사 6,000인을 뽑아 나누어 편성하여 진도(珍島)를 공격하여 점령하라." (중략) 부위병(府衛兵, 정규군)을 사열하였는데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에 문,무 산직(散職)[14], 백정(白丁)[15], 잡색(雜色)[16] 및 승도(僧徒, 승려)를 아울러 사열함으로써 이를 충원하였다.
ㅡ 1271년 4월 ㅡ
원나라에서 총관(摠管) 차쿠(察忽)를 보내 전함 3백 척의 건조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 기술자와 일꾼 및 일체 물품의 공급을 죄다 우리에게 부담 지었다. .... (중략) .... 기술자와 일꾼 3만 5백여 명을 징집(徵集)해 조선소(造船所)로 보내게 했다. 이 때문에 역마가 끊이지 않고 각종 업무가 지극히 번거로웠으며 마치 번개나 우레처럼 기한을 재촉하므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겪었다.
ㅡ 1274년 1월 ㅡ
원종(元宗) 15년(1274) 5월에 동정군(東征軍, 일본 원정군)을 뽑았는데, 각 영부(領府)에서 동반(東班, 문관)의 산직인(散職人) 및 백정(白丁)을 다투어 붙잡아 신고하였다. 혹은 사노(私奴)를 잘못 붙잡은 자도 있었다.
ㅡ 1274년 5월 ㅡ
"저희나라는 원래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터라 그들을 몇 달 동안이나 부역시킨다면 농사일은 어떻게 될지 우려됩니다."
ㅡ 1274년 2월 ㅡ
제주(濟州) 다루가치(達魯花赤, 감독관)가 사자를 파견해 수졸(戍卒)을 보내달라고 독촉하자 왕이 김광원(金光遠) 등에게 명하여 4령(領, 약 4000명)의 병력을 징발하게 했다. 심지어 왕을 곁에서 시종하는 겸직 관리라도 남김없이 뽑아들인 다음 장군 양공적(梁公勣) 등으로 하여금 인솔해 가도록 했다.
ㅡ 1275년 8월 ㅡ
신축일.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에서 중서성의 지시에 따라 전함 9백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ㅡ 1279년 6월 ㅡ
탐라와 진도(珍島)를 함락시킬 때 상국(上國)의 군대에게 포로가 된 자 중에서 도망한 자가 있으면 추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함락된 뒤에 함께 부역한 평민(平民)을 포로라고 거짓말 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충당시킨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금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ㅡ 1278년 7월 ㅡ
"현재 탐라(耽羅)를 수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사 1천 명은 앞서 일본 정벌 때에 본국에서 차출한 병력 5,3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드물어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는 터에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더 차출한다면 도저히 그 수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 우려 됩니다." ... (중략) ,,, "하물며 지금 새로 징집한 군사 4,600명은 애당초 갑옷과 병기가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자기 몸을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ㅡ 1280년 11월 ㅡ
충렬왕(忠烈王) 9년(1283) 3월에 중방(重房)에서 산직(散職)·학생(學生)·백정(白丁)을 조사하여 동정군(東征軍)에 충당하였는데, 때때로 집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있었다. 중방에서 요청하기를, "전정(田丁)을 빼앗아 종군(從軍)하는 자에게 주고, 이웃에서 고발하지 않으면 백금(白金) 1근(斤)을 징수하고, 집에 숨겨준 자는 백금 2근을 징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ㅡ 1283년 3월 ㅡ
원(元)에서 단사관(斷事官) 소독해(蘇獨海)를 보내와 시찰하고, 아울러 일본을 정벌할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ㅡ 1285년 11월 ㅡ
신축일. 원(元)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보내와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한 군병(軍兵)·초공(梢工)·수수(水手)의 명단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ㅡ 1285년 12월 4일 ㅡ
계묘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송분(宋玢)을 경상도조선도지휘사(慶尙道造船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또한 여러 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고 군량(軍粮)을 갖추게 하였다.
ㅡ 1285년 12월 6일 ㅡ
요동(遼東, 랴오닝)에 기근이 들자 원(元)에서 장수지(張守智) 등을 보내어 본국으로 하여금 군량 10만 석을 거두어 요동(遼東)으로 옮기게 하였다. .... (중략) ....감찰사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와 직사관(直史館) 진과(陳果) 등을 파견하여 배 483척과 선원 1,314명을 동원하여 쌀 64,000석(石)을 개주(盖州, 랴오닝성 가이펑)로 운송하게 하였다.
ㅡ1289년 2~3월 ㅡ
카이두(海都)의 군사들이 원나라 변방(邊方)을 침범하므로 황제가 친히 정벌에 나서고자 아단부카(阿旦不花)를 보내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홍자번(洪子藩)과 조인규(趙仁規) 등으로 하여금 봉은사(奉恩寺)에 집결해 군사를 모병하게 하는 한편 각 도(道)에서도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인후(印侯)와 김흔(金忻)을 시켜 큰 네거리에서 군사를 검열하게 했다
ㅡ 1289년 7~8월 ㅡ
나유(羅裕)가 개주(盖州)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군량을 수송하던 선박 중에서 부서진 것이 44척, 바람을 만나 유실된 것이 9척, 쌀 중에서 침몰된 것이 5,305석(石), 양식이 모두 떨어져서 훔쳐 먹은 것이 908석 4두(斗), 익사자 119명, 병사자 4명, 도망자 67명, 행방불명자 86명입니다.”라고 하였다.
ㅡ 1289년 10월 ㅡ
원(元)에서 만호(萬戶) 홍파두아(洪波豆兒, 홍바투르)를 보내어 선박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보전고부사(寶錢庫副使) 첨사정(瞻思丁)은 군량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장차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홍파두아는 곧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데, 왕궁을 바라보고는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비록 금의환향(衣錦還鄕) 하지만 직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부끄럽다."하였다.
ㅡ 1293년 8월 ㅡ
갑진일. 원(元)의 선정원(宣政院)에서 사람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당시에 황태후가 불사(佛寺, 절)를 지으려고 하자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 홍중희(洪重喜)와 홍중경(洪重慶) 등이 아뢰기를, “백두산(白頭山)에는 좋은 목재가 많습니다. 만약 심양군(瀋陽軍) 2,000명을 뽑아 보내어 벌목하고 압록강으로 떠내려 보낸 다음, 고려를 시켜 배로 실어 수송하게 하면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1309 3월 ㅡ
기사일. 원(元) 추밀원(樞密院)이 수군천호(水軍千戶) 상중신(常仲信)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ㅡ 1309년 4월 ㅡ

1.5. 농우(農牛) 수탈

원나라는 삼별초 토벌과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전국 각지에 수시로 농무별감(農務別監)을 파견해 헐값으로 백성들의 소와 농기구를 구입해갔는데, 거의 빼앗다시피한 반 강제적 수탈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되어졌다. 고려는 총 5,000여마리의 농우를 원나라로부터 빼앗겼는데 이 당시 전국 농가의 사육소 수는 1만여 마리로 추정된다.(참고로 조선초 전국의 사육소는 2~3만 마리)
또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황제의 뜻을 받들어 둔전에 필요한 소 6천 두 중 동경(東京) 등지에서 보낸 3천 두를 제외한 나머지 3천 두는 경략사(經略司)로 하여금 돈을 수령해 고려 현지에서 사들이도록 조치했소. 그 외 농기구·종자·사료 등의 물품 및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그 쪽에서 맡아 부족하지 않게 전량을 공급해 주기 바라오." 계유일. 봉주경략사(鳳州經略司)에서 비단 12,350필을 가지고 와서 농우(農牛)를 사갔다.[17]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이에 원종은 전중감(殿中監)[18] 곽여필(郭汝弼)을 몽고에 보내 고려의 사정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한다.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우리나라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그러나 고려왕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되려 고려는 농우 2,000마리를 추가로 공급하라는 원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병신일. 각 도에 농무별감(農務別監)을 보내 농우와 농기구를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와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납부할 것을 독촉하게 했다.
"여러 번 독촉하기에 농우 1,010두, 농기구 1,300개, 종자 1,500석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올해 안으로 계속 뒤진다면 농우 990두를 채울 수 있겠기에 그것으로 숫자를 재약정했습니다."
"아아! 우리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백성인데 농우·농기구·종자를 모조리 빼앗아 생업을 상실하게 만들면 그들이 모두 굶어죽게 될까 걱정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는 사람은 번다한 부역으로 힘이 다해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반면 역적 편에 선 자가 굶주림이나 고통이 없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역적 편에 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4월 ㅡ

1.6. 쌀 수탈

원나라는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고 고려로부터 각종 군사 원정을 위한 선박과 군량미를 보급받았는데, 기록에 잡히는 수치로만 미곡 약 85만 석[19], 우마 사료 46만 6천여 석, 종자 1만 5천여 석을 원 정부로부터 수탈당했다. 물론 이 수치는 최소치이며 기록에 잡히지 않는 수탈량은 누락되었다. 또한 원 강점기의 세월을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그 수치는 더 증가될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270~72년(진도 원정)
"정규군 6천 명이 몰고 다니는 말을 대략 한 명당 세필로 계산하면 모두 1만 8천 필에 달하는 바, 한 필에 하루 닷 되씩 사료를 지급한다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쳐서 상국의 단위로 13만 5천 석에 이르며, 본국의 단위로는 27만 석에 이릅니다. 거기에다 농우 4천 마리에 드는 사료가 한 마리당 하루 닷 되씩 든다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국의 단위로 3만 6천 석이며, 본국의 단위로는 7만 2천 석이나 됩니다."

ㅡ <고려사>, 원종12년(1271), 8월 ㅡ
경오년(1270)으로부터 금년 4월 그믐에 이르기까지 이미 요구에 따라 조달한 군량이 109,199석 6두, 마소의 사료가 432,005석 6두, 수도의 객관에서 사신 접대용으로 쓴 쌀이 17,151석, 종자가 15,000석으로 상세한 세목은 별도로 첨부한 도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진작부터 궁핍에 절어 전자에 할당받은 수량도 가을까지 댈 수 없을까 고민인데, 하물며 다시 첨가까지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ㅡ 1272년 4월 ㅡ
: 군량 11만여 석 + 사신 접대용 쌀 1만 7천여 석 = 12만 7천여 석 / 우마 사료 43만 2천여 석 / 종자 1만 5천여 석


1273년(제주도 원정)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忻都, 힌두)가 명령하기를, ‘탐라(耽羅) 토벌군의 군량은 반드시 3개월 분량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수량을 채우려면 반드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녹전(祿轉)으로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재추(宰樞)에게 대책을 묻자, 모두 말하기를, "강화도에서 수도로 나온 이래 각 도(道)에서 조운(漕運)으로 운송한 곡식은 모두 사용하여 창고는 비고, 경략사(經略司)와 기타 제반 공급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慶尙道)의 경오년(庚午年, 1270)과 신미년(辛未年, 1271)의 2년간의 조세를 운송하여 군량을 도와주고, 전주와 나주의 임신년(壬申年, 1272) 녹전(祿轉)[20]을 전부 우리에게 납부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ㅡ <고려사>, 1273년 4월 ㅡ
또 지난해(1273) 4월에는 대군이 탐라에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5월 그믐에야 돌아오는 통에 백성들이 농사철을 맞추지 못해 가을에 수확할 곡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관청과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여 배를 건조하는 인부와 기술자, 주둔군, 행군하는 부대, 제주 백성들에게 무려 4만 석이 넘는 군량과 사료를 공급하는 부담을 졌습니다.

ㅡ 1274년 2월 ㅡ
: 군량 최소 4만석 이상 / 기타 사료


1274년(1차 일본 원정)
정월 보름날부터 조선을 시작했는데 기술자와 일꾼이 모두 30,500명이니 1인당 1일 3식으로 계산하면 34,312석 5두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정월 19일에 받은 중서성의 공문에는, ‘힌두(忻都) 관인(官人) 휘하의 군사 4천 5백명이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까지 행군하는데 필요한 군량 1,570석(碩)과 주둔지에서 필요한 군량과 사료 및 조선감독(造船監督) 홍총관(洪摠管)의 군사 500명의 행군에 필요한 군량 85석도 부담하라.’고 했습니다. 또 제주(濟州)에 남아 있는 상국의 군사와 우리나라의 사졸 1천 4백명의 7개월 분 군량과 사료는 이미 지급을 완료했는데 모두 2,904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주(羅州)에 뒤처져있는 월로활단적(粤魯闊端赤)의 군량 8천석과 말 사료 1,325석도 모두 저희나라에서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 지원(至元) 10년(1273) 12월에 접수한 중서성의 공문에는, 제주 백성 10,223명에게 식량을 모두 공급하라고 했으니 최근에는 군량과 사료를 도저히 조달할 길이 없어 관청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량을 거둬들였습니다.

ㅡ <고려사>, 1274년 2월 ㅡ
: 일꾼 3만여 명의 식량 34,000여 석 + 군량 1,570석 + 85석 + 2,904석 + 8,000석 = 46,559석
그런데 또 다시 중서성은 문서를 보내 봉주둔전군(鳳州屯田軍)에게 매달 부족한 군량 2,047석과 소 사료 1,001석 7두를 부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농우(農牛)와 농기구, 종자와 첫 해 가을까지의 식량을 지급하였으며, 또한 지원 9년(1272)의 부족한 식량까지도 이미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작년에는 농사가 전혀 수재나 병충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구실로 내세워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우리나라가 공급하게끔 만드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없는 말을 꾸며 보고함으로써 해마다 공급하게 하고 공급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정말로 민망한 일이니 바라건대 이 부담들을 모두 면제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ㅡ 1274년 2월 ㅡ
: 봉주둔전군(몽고군)에게 첫 해 가을까지 지급한 식량은 2,047석 x 약 10개월 = 20,470석
원(元)이 여룡우사(汝龍于思)를 파견하여 견(絹) 33,154필을 가지고 와서 군량(軍粮)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곧 관견도감(官絹都監)을 설치하고 견직(絹織)을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개경(王京)에 4,054필, 충청도(忠淸道)에 4,000필, 경상도(慶尙道)에 20,000필, 전라도(全羅道)에 5,000필을 할당하여 매매하니 견 1필에 쌀 12두(斗)[21]로 계산하였다.

ㅡ 1274년 4월 ㅡ
: 4,054 + 4,000 + 20,000 + 5,000 = 33,054 x 12두 = 396,648두.
쌀 1석 당 10두에 해당하므로 396,648두는 39,664석에 해당.

∴ 1차 일본원정(1274) 기간 동안 징발당한 쌀의 양 = 46,559석 + 20,470석 + 39,664석 = 106,693석(약 10만석)


1277년
원정이 없는 기간에도 고려는 몽고 주둔군을 위한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방금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접수한 바, 그 내용은 추밀원(樞密院)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홍다구(洪茶丘)를 고려에 보내 힌두(忻都)와 함께 일본원정에서 돌아온 3천 명을 훈련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번 추밀원에서는 ‘참군(站軍) 2백 명과 환가둔전군(還家屯田軍, 일본 원정에서 귀환한 군인들) 3천 명 및 코데치(闊端赤, 대궐을 수비하는 몽골 군대)에게는 앞서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와 꼭 같이 식량과 사료를 공급하라.’고 공문으로 알려왔습니다. .... (중략) .... 추밀원의 공문을 받기 전에도 저희나라는 지원7년(1270) 이래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을 정벌했던 상국 군대의 군량을 모두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공급한 바 있습니다. 그 후에도 현재 있는 합포진변군(合浦鎭邊軍), 탐라방호군(耽羅防護軍), 염주(塩州)·백주(白州)의 귀부군(歸附軍, 몽골에 투항한 남송군), 코데치(闊端赤) 등에게 1년간 군량 18,629석(石) 2두(斗)와 우마의 사료 32,952석(石) 6두(斗)를 지급했으니 이는 모두 중국의 도량형에 따라 계산한 것으로 역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ㅡ <고려사>, 1277년 2월 ㅡ
: 중국 기준 군량 18,629석 x 2 = 고려 기준 37,258석으로 대략 3만 7천여 석 / 우마의 사료 33,000여 석


1278년
봄 정월. 서해도의 전미(轉米)를 원수 홍차구(洪茶丘)의 군대에 지급하고, 아울러 백관에게 꼴과 콩을 내어 흔도(忻都, 힌두)·홍차구의 군대에 배급할 것을 명령하였다.

ㅡ <고려사>, 1278년 1월 ㅡ


1280년~1281년(2차 일본 원정)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병선 9백 척, 뱃사공과 선원 15,000명, 정군(正軍) 1만 명 및 중국 단위로 계산해 군량 11만 석을 마련했으며, 기타 군수물자도 셀 수 없을 만큼 갖추었으니 이제 있는 힘을 다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중략)... 현재의 군량은 중국 단위로 70,727석을 제외해 놓고는 전국적으로 공적·사적인 비축분이 죄다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에, 각급 관원의 월봉과 국가에 필요한 각종 부세(賦稅)를 다 전용하는 한편 다시 전국의 민호에서도 거두어들인 결과 가까스로 중국 단위로 4만 석을 마련했는바 여기서 더 내라고 하면 도저히 더 이상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ㅡ <고려사> 1280년 11월 ㅡ
원나라에서 불팔사(不八思)·풍원길(馮元吉)을 보내어 와서 군량미를 파악하게 하였다. 또 동정군(東征軍)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군사 3백 40명을 보내어 합포(合浦)를 지키게 하고, 군사 60명에게 왕경(王京)을 지키게 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동정할 때에 지출한 군량미는 12만 3천5백60여 석(碩)이었다.

ㅡ <동국통감>, 1282년 4월 ㅡ
: 군량 12만 3천5백60여석(중국 단위) => 고려 단위로 환산하면 그 두 배인 24만 7천1백20석(중국 석수 계산법은 원종12년 8월 <고려사> 기사 참조.)


1283년 3월~5월(3차 일본 원정)
왕이 재추들에게 묻기를, "원나라 조정에서 송번의 말을 듣고 군량미 4만 석을 더 징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전번에 유주(庾賙)가 20만 석을 부과하자고 청하였는데, 집집마다 추렴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사람에게까지 모두 긁어 모아서, 겨우 그 4분의 1(=5만 석)을 마련하였는데, 만약 4만 석을 더하기로 한다면, 어찌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사람을 보내어 주청(奏請)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ㅡ <고려사>, 1283년 4월 ㅡ
: 군량 5만 석 + 추가 4만 석 = 9만 석


1285년 11월~1286년 1월(4차 일본 원정)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배 만드는 것을 독려하였다. 동지밀직사사 송빈(宋玢)을 경상도 조선 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로 삼고,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일을 독려하게 하였다.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군량미 10만 석을 징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5년 12월 ㅡ


1289년
중국 동북방에 기근이 들자 원나라는 이를 빌미로 군량(軍粮) 10만석을 요구해오고[22] 고려는 그 중 6만 8천석을 부담하게 된다.
요동(遼東, 랴오닝)에 기근이 들자 원(元)에서 장수지(張守智) 등을 보내어 본국으로 하여금 군량(軍粮) 10만 석을 거두어 요동(遼東)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명해 쌀을 차등 있게 내게 하였는데 ... (중략) ... 산직을 하사받은 자는 7두, 군관(軍官)·백성(百姓)과 공·사노비는 각각 5두와 3두로 하였다. 부상(富商, 부유한 상인)과 대호(大戶)는 3석, 중호(中戶)는 2석, 소호(小戶)는 1석으로 하였다. 동계(東界)와 평양(平壤)을 제외한 각 도(道)에 쌀을 차등 있게 옮기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9년 2월 ㅡ
감찰사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와 직사관(直史館) 진과(陳果) 등을 파견하여 배 483척과 선원 1,314명을 동원하여 쌀 64,000석(石)을 개주(盖州, 랴오닝성 가이펑)로 운송하게 하였다. .... (중략) .... 내고(內庫, 왕실 창고)의 쌀 4,000석(石)을 내어 군량(軍粮)에 보충하였다.

ㅡ 1289년 3월 ㅡ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를 파견하여 개주(盖州)로 군량(軍粮)을 수송하였다

ㅡ 1289년 5월 ㅡ


1293년(5차 일본 원정)
원(元)에서 만호(萬戶) 홍파두아(洪波豆兒, 홍바투르)를 보내어 선박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보전고부사(寶錢庫副使) 첨사정(瞻思丁)은 군량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장차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홍파두아는 곧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데, 왕궁을 바라보고는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비록 금의환향(衣錦還鄕) 하지만 직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부끄럽다."하였다.

ㅡ <고려사>, 1293년 8월 ㅡ


1295년
요양 심양에 기근이 들고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다시 식량을 징발당한다.
정사일. 장군(將軍) 지단(智團) 등으로 하여금 배 73척(艘)에 쌀 1만 석을 선적해 요양(遼陽)으로 수송하게 했다.

ㅡ <고려사>, 1295년 3월 ㅡ
기묘일. 장군(將軍) 김영손(金永孫)을 보내어 배 90척으로 쌀 12,180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4월 ㅡ
계유일. 중랑장(中郞將) 조침(趙琛)을 원(元)에 보내어 제주(濟州)의 방물을 진헌하였고, 장군(將軍) 서광순(徐光純) 등을 보내어 배 65척으로 쌀 8,568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윤4월 ㅡ
: 1만 석 + 12,180석 + 8,568석 = 30,748석


1309년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고려사>, 충선왕 원년(1309), 3월 ㅡ


그 밖에도 원나라가 요구할때마다 수시로 양곡을 반출당했다.

1.7. 공녀(貢女) 수탈

고려는 원에 공녀(貢女, 바치는 여자) 진상을 강요받았는데 이를 위해 원나라에서 해마다 매빙사(媒聘使)가 다녀가고, ‘결혼도감(結昏都監)’이라는 별도의 행정 기구까지 설치되었다. 결혼도감은 원나라 장수들과 투항한 남송 병사들을 위문할 고려 여성들을 차출해가기 위한 기구였다. 결혼도감이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만 무려 140명의 고려인 여성들이 만자(蠻子)에게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만자는 옛 남송(南宋)의 군대로서 원나라의 군대에 그대로 흡수된 것으로 강남(江南)의 신부군(新附軍) 또는 귀부군(歸附軍)이라고도 불렸다.
원나라에서 만자(蠻子) 매빙사(媒聘使) 초욱(梢郁)을 보내면서 그 편에 다음과 같은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전달하게 했다. "남송(南宋) 양양부(襄陽府, 오늘날 후베이성)에 새로 편성된 군인(軍人)들이 처를 구하기에 선사(宣使) 초욱으로 하여금 관청 소유 견직(絹織) 1,640단을 가지고 고려국으로 가게 조치했으니 해당 관청을 시켜 관원을 파견해 함께 처가 될 여자들을 물색하도록 하기 바란다." 초욱이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뽑아내라고 심하게 독촉하자 결혼도감(結昏都監)을 설치하고 그때부터 가을까지 민간의 홀어미, 역적의 처, 승려의 딸을 샅샅이 찾아내어 겨우 그 수를 채우니 원성이 크게 일어났다. 한 여자마다 혼례비용으로 비단 12필씩을 지급한 후 만자(蠻子)들에게 각각 보내주자 만자들이 즉시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통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니 보는 사람마다 슬피 흐느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3월 ㅡ

한편, 공녀 징발 대상으로는 재상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미 사위가 있는 집안도 딸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다.
탈타아(脫朶兒, 톡토르)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반드시 재상 가문에서 보려고 하자,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두려워하며 다투어 먼저 사위를 들였다. 나라에서 재상 가문 두세 곳을 적어 주고 스스로 택하라고 하였더니 탈타아가 외모가 예쁜 사람을 골라서 김련(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려고 하자, 그 집에서는 이미 데릴사위[預壻]를 들였는데 그 사위가 두려워하며 집을 나가버렸다. 김련이 그때 원(元)에 입조(入朝)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는 김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례를 치르자고 요청하였으나 탈타아는 듣지 않았다. 고려(高麗)의 풍속에 나이 어린 사람을 데려다가 집안에서 길러 나이가 차면 사위로 삼는 것을 데릴사위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 2월 ㅡ

이렇게 원나라로 보내진 공녀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곡(李穀)이 원(元)에 올린 다음의 상소문을 보자.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元)에 있었는데,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처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 두기를 청하고, 이를 위해 대신해서 소(疏)를 작성하여 말하기를, .... (중략) .... "풍문으로 들으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며,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매번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득 실색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무얼 하러 왔을까? 동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이윽고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딸을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해서는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혀서 딸들이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 사신이 한번 오게 되면 나라가 온통 소란스러워져서 비록 개나 닭이라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동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을 때가 되면,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여 같지 않은데,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놓아줍니다. 놓아주고는 다른 데서 동녀를 찾게 되므로, 1명의 동녀를 취하는 데에도 수백 집을 뒤집니다. 오로지 사신의 말만 들을 뿐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신들이 황제의 성지(聖旨)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년에 두 번, 혹은 한 번이거나 한 해씩 거르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많으면 40~50명에 이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숙왕 후4년(1335) 윤12월 ㅡ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 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본다.[23]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24]

한 번에 500여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원(元)에서 양중신(楊仲信)을 파견하여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서 귀부군(歸附軍)[25]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하였다. 왕이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26]인 정랑(正郞) 김응문(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道)로 파견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ㅡ

이렇게 원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 공녀의 가족들은 그 댓가로 원으로부터 비단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고려 정부의 '가로채기'로 빼앗기게 된다. 고려판 위안부 사건
"지원(至元) 13년(1276) 귀환하는 귀부군(歸附軍)들의 처를 맞아주기 위해 가져온 비단들은 다루가치로 하여금 거두어들여 보관토록 조치했는데 농우와 농기구의 값은 그 가운데서 치르게 해 주십시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3년(1277), 2월 ㅡ

딸을 가진 집안은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갓낫아기를 안고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고려 특단의 조치는 힘 없는 서민들의 마지막 발버둥마져도 수포로 만들어 버린다.
임자일. 장차 처녀들을 원(元)에 바치기 위하여 국내의 혼인을 금지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원년(1275), 10월 ㅡ
왕이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양가(良家)의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뒤에 혼인하고,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라."라고 하고, 허공(許珙) 등에 명령하여 어린 동녀(童女)를 선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13년(1287), 12월 ㅡ

고려인들의 반발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었는데 이곡의 상소문에서 보듯 딸과 처를 가진 자들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때마다 늘 가슴을 조려야 했고 딸을 숨기는 자는 그 이웃과 친족을 괴롭혀서라도 반드시 추쇄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인신매매뿐만 아니라 공녀를 추쇄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사신들의 뇌물 수수 역시 큰 골칫거리였다. 상기했듯 1명의 공녀를 취하는데도 수백 집을 뒤져서 주민들을 수탈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일각에서 공녀 제도를 미화하기 위해 종종 들먹이는 기황후 일화는 매우 특수한 사례로서 극히 일부의 사례를 가져다 놓고 전체를 포장할 수 없는 법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어 출세한 극소수 친일파들이 그 당시 전체 조선인들의 운명을 대변할 수 없듯이 공녀 제도를 미화하는 논리의 가장 큰 맹점은 그 당시 원에 끌려간 공녀 대다수의 실상을 철저히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기록은 공녀에 대한 현대인들의 잘못된 환상을 철저히 깨부수어 준다.
순마소(巡馬所)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의 딸을 뽑아 황제와 사신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백관들에게 몰래 딸이 있는 집을 적어서 주관하는 관청(主司)에 넣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눈을 흘기고 원망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비록 딸이 없어도 딸이 있다고 지목하였으므로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닭과 개도 편하게 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몰래 사위를 들이는 자들이 많았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4년(1298), 1월 ㅡ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의 반열에 있기도 하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한 자의 배필이 되기도 하여 공경대신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고려의 외생(外甥, 사위)입니다. 이것은 본국(고려)의 왕족과 문벌 및 호부한 집안에서 특별히 조서나 지(旨, 황제의 뜻)를 받았거나 혹은 마음으로 원하여 스스로 온 자들이며 또한 중매의 예를 갖춘 것으로 실로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익을 좇는 자들'이 이것을 끌어와 예로 삼고 있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일단 (공녀) 선발에 들어가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모여서 우는데 밤낮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그 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예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당당한 천자의 조정으로서 어찌하여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여 반드시 외국에서 취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받아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인데, 지금 궁궐에 두고 시기를 넘겨서 헛되이 늙게 하거나 때로는 혹시 내보내어 환관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끝내 후사가 없는 자가 10명 중 5~6명이나 되니, 그 원망하는 기운이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떻겠습니까?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이처럼 원에 공녀로 끌려가게 된 여성들 과반수는 중세 여성의 최고 권리 중 하나인 '자식을 보는 권리'마져도 박탈당하였던 것이다.

1.8. 기타 수탈

그 밖에 원나라가 요구해올때마다 개, 말, 쇠고기, 인삼, 진주, 백조(白鳥, 고니), 매(鷹), 은(銀), 여의주 등 막대한 양의 특산품을 수시로 바쳐야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원나라에 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응방(鷹坊)[27]의 폐해가 심각하였다.
병신일.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응방(鷹坊)에 속한 백성 205호(戶) 중에서 102호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에 모든 백성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투어 응방 소속으로 들어가버린 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한 것은 거짓이고 102호를 없앤다는 것도 9마리 소에서 털 한 가닥을 뽑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응방에서는 오히려 은(銀)·모시(紵布)·가죽·베를 그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여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매(鷹)를 먹이는 것이 고기가 아니고 은과 베가 매의 배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ㅡ 충렬왕 3년(1277), 7월 ㅡ

그러나 응방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충렬왕의 노력은 친원파의 반대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원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대장군 인후(印侯)와 장군 고천백(高天伯)이 타나(塔納)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타나가 절령참(岊嶺站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하자 옹진현(甕津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등 여러 현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타나에게, "우리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응방(鷹坊)에 예속되었으니 가난한 백성들이 무엇으로 국가의 비용을 감당하겠습니까? 차라리 주기(朱記)를 나라에 반납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들은 타나가 개경(開京)에 도착해 재상더러 이렇게 질책했다. "동방의 백성은 천자의 적자가 아니오? 백성들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구휼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책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이오?" 이에 재상들이 왕에게 응방의 폐해를 없애야한다고 건의했더니 왕이 노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回回, 위구르) 사람을 요청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 도의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조인규(趙仁規)[28]가 극력 간쟁하고 공주도 또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다.

ㅡ 충렬왕 6년(1280년), 3월 ㅡ


다음은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강탈당한 기록들이다. (추가 바람)
몽고(蒙古)에서 필도적(必闍赤, 비칙치) 흑구(黑狗)와 이추(李樞) 등 7인을 보내 궁실(宮室)을 지을 재목을 요구하였으며,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공문을 보내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자나무(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 등 물품을 요구하였다.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회보하기를,“이번 중서성의 공문을 받아보니 고려는 아직 평온하지 못하므로 황제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올해의 조공하는 폐백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금칠은 소용되는 데가 많으므로 이제 필도적을 파견하여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 축적한 금칠은 육지로 나올 때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또 그 산지는 남쪽지방의 섬인데, 요사이 역적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기회를 보아 사람을 보내 채취하여 바치겠습니다. 우선 현재 남아있는 10항아리 분을 보내고, 옻칠액을 만드는 장인은 그 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 또 흑구가 말하는 비자나무는 지역민들이 백목(白木)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를 물으니 승천부(昇天府)의 금요도(今要島)라고 하였습니다. 청등과 팔랑충도 역시 이 섬에서 난다고 하고 또 진도(珍島)와 남해(南海) 등지에서도 난다고 하며, 비자나무 열매와 동백 열매(冬栢實)도 또한 거기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은 개경(王京)에서 1,000여 리가 넘기 때문에 바로 보내기가 어렵고, 이추가 가보지도 않고 되돌아 왔기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과 함께 각기 사람을 파견하여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우선 거두어들인 무늬 있는 비자나무 몇 조각을 보내며, 팔랑충은 이추가 처음에는 교동군(喬桐郡)에서 난다고 하기에 사람을 보내 채취하게 하였으나 없고, 또 금요도에서 난다고 하므로 다시 사람을 보내 조사할 예정입니다. 노태목·해죽(海竹)·동백(冬栢)·대자리(竹簟)는 현재 보유분을 모두 보내고, 오매·화리·등석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데 예전에 송나라 상선에서 얻은 것이 약간 있어서 아울러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ㅡ 원종 12년(1271), 6월 ㅡ
태부소경(大府少卿) 장계열(張季烈)을 몽고(蒙古)로 보내어 방물(方物, 특산품)을 바쳤다.
ㅡ 1260년 4월 ㅡ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박윤(朴倫)을 몽고(蒙古)에 보내어 방물을 진상하였다.
ㅡ 1262년 4월 ㅡ
예부낭중(禮部郞中) 고예(高汭)를 보내 암컷 새매 20마리와 동(銅) 612근을 바쳤다.
ㅡ 1262년 9월 ㅡ
좌정언(左正言) 곽여필(郭汝弼)을 몽고(蒙古)에 보내 암컷 새매를 바쳤다.
ㅡ 1263년 5월 ㅡ
광평공(廣平公) 왕순(王恂), 대장군(大將軍) 김방경(金方慶),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일(張鎰)을 몽고에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방물을 바쳤다.
ㅡ 1265년 1월 ㅡ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여의주(如意珠) 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송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진헌하도록 하였다.
ㅡ 1273년 3월 ㅡ
원경(元卿) 등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진상하였다.
ㅡ 1275년 6월 ㅡ
대장군(大將軍) 윤수(尹秀)와 중랑장(中郞將) 박의(朴義)를 원(元)에 보내어 새매를 진헌하였다.
ㅡ 1276년 6월 ㅡ
원(元)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아(阿室迷里兒, 아시미리르)를 보내어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하였다. 임유간(林惟幹)이 탐라(耽羅)에서 진주를 얻지 못하자 민(民)들이 소장하고 있던 100여 개를 취하여 원(元)으로 돌아갔다.
ㅡ 1276년 6월 ㅡ
중랑장(中郞將) 정복균(鄭福均)을 원(元)에 보내어 인삼을 헌상하였다.
ㅡ 1279년 10월 ㅡ
정사일. 주(州)와 군(郡)에 명령하여 사냥개를 바치라고 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元)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진상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장군(將軍) 박의(朴義) 등 25인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ㅡ 1282년 5월 ㅡ
응방(鷹坊) 패로한(孛魯漢, 보로칸) 등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진헌하였다.
ㅡ 1282년 9월 ㅡ
낭장(郞將) 남유정(南裕廷)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박구(朴球)를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ㅡ 1283년 7월 ㅡ
장군(將軍) 이병(李㻂) 등 28인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ㅡ 1285년 6월 ㅡ
장군(將軍) 원경(元卿)과 환관인 낭장(郞將) 최세연(崔世延)을 원(元)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최세연은 일찍이 그 처가 사납게 투기하는 것에 분노하여 스스로 거세한 인물이다.
ㅡ 1285년 7월 ㅡ
장군(將軍) 원경(元卿) 등을 원(元)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ㅡ 1286년 6월 ㅡ
장군(將軍) 이병(李㻂)을 원(元)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ㅡ 1288년 12월 ㅡ
원(元)이 감찰(監察) 아로온(阿魯溫, 아루운)을 파견하여 은(銀)을 채굴하였다.
ㅡ 1289년 2월 ㅡ
대장군(大將軍) 유비(柳庇)를 원(元)에 파견하여 모시와 베를 바치고, 장군(將軍) 남정(南挺)은 새매를 바쳤다.
ㅡ 1289년 6월 ㅡ
원(元)이 아로혼(阿魯渾, 아루곤)과 이성(李成) 등을 보내와 은(銀)을 채굴하였다.
ㅡ 1289년 7월 ㅡ
홍군상(洪君祥)이 원(元)으로 돌아갔다. 장군(將軍) 홍선(洪詵)을 파견하여 홍군상과 함께 원(元)에 가서 향차(香茶)와 목과(木果) 등의 물품을 바치게 하였다.
ㅡ 1292년 10월 ㅡ
대장군(大將軍) 홍선(洪詵)을 원(元)에 파견하여 인삼(人蔘)을 바쳤다.
ㅡ 1293년 10월 ㅡ
낭장(郎將) 백견(白堅)을 원(元)으로 보내 고니 고기를 바쳤다. 고니는 하양(河陽, 경북 경산)과 영주(永州, 경북 영천) 땅에서 많이 나는데,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잡게 하였으므로 그 일대가 전부 소란스러웠으며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ㅡ 1294년 12월 ㅡ
원(元)에서 백첩목아(伯帖木兒, 이바이테무르)를 보내어 탐라(耽羅)의 말을 취하였다
ㅡ 1295년 3월 ㅡ
원(元)에서 사신을 보내어 탐라(耽羅)에서 말 기르는 일을 변통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ㅡ 1296년 2월 ㅡ
장군(將軍) 이백초(李白超)를 원(元)으로 보내어 탐라의 쇠고기를 바쳤다.
ㅡ 1298년 11월 ㅡ
대장군(大將軍) 이백초(李白超)를 원(元)에 파견하여 인삼과 쇠고기를 바쳤다.
ㅡ 1300년 11월 ㅡ
원(元)에서 환관 이삼진(李三眞)을 보내어 탐라(耽羅)의 쇠고기를 진헌하는 일을 중지시켰다.
ㅡ 1309년 7월 ㅡ

1.9. 일제 강점기와 비교

결과적으로, 고려가 원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위상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이 일제로부터 부여받았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은 왕실이 쫓겨난 반면 고려는 왕실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기 주권을 상실한 고려 왕실은 국가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을 내릴때마다 언제나 상국(上國) 원나라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고, 그 성격도 고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 지도부라기 보단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원나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괴뢰 정권에 더 가까웠다.

일제 강점하에 외국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적극 투쟁했던 조선인들과 달리 구심점이 없었던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압제하에 이렇다할만한 제대로된 저항도 한번 못해보고 속소무책으로 스러져갔다. 민간 차원에서 조직적인 저항 운동이 거세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단 한번도 그러한 움직임이 없었다.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스스로 산과 바다로 들어가 산적이나 해적이 되는게 전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황제의 자비심이나 원나라의 몰락이었다. 결과적으로, 고려의 국권 회복은 원나라의 정치변동 및 쇠퇴와 그 궤를 같이했다.

1294년 새로 원나라 황제로 등극한 테무르는 오랜 기간 계승전쟁과 정복전쟁을 치러온 쿠빌라이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치에 더 치중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원성종 테무르의 집권기에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간섭과 수탈은 선왕대(代) 보다 한층 완화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1340년대부터 홍건적의 봉기가 지속되면서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통제력은 희미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고려가 원(元)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가 동방 경략에의 관심과 의지를 스스로 내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반면, 20세기 초 이제 막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대륙 침공’이라는 그들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의 내정에 국운을 걸고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원나라 입장에서 한반도는 일개 변경에 불과했지만, 일본에게 있어서는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교두보였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이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강도를 더해간 반면,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은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 계획이 끝이 나는 1294년을 기점으로 수그러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원이 일본원정을 포기한 이후로도 원의 정치적 지원을 받기 위해 고려 왕족들이 원에 체류하면서 그것에 드는 비용이 막대했다.[29] 심지어 원의 일본원정 계획이 종결된 후에도 고려에 대한 수탈과 강제 징용이 몇 차례 더 행해지는데 1309년에야 그 마지막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진 원(元)의 선정원(宣政院)에서 사람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당시에 황태후가 불사(佛寺)를 지으려고 하자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 홍중희(洪重喜)와 홍중경(洪重慶) 등이 아뢰기를, “백두산(白頭山)에는 좋은 목재가 많습니다. 만약 심양군(瀋陽軍) 2,000명을 뽑아 보내어 벌목하고 압록강으로 떠내려 보낸 다음, 고려를 시켜 배로 실어 수송하게 하면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고려사>, 충선왕 원년(1309), 3월 ㅡ
기사일. 원(元) 추밀원(樞密院)이 수군천호(水軍千戶) 상중신(常仲信)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ㅡ 1309년 4월 ㅡ
원(元)에서 환관 이삼진(李三眞)을 보내와 탐라(耽羅)의 쇠고기를 진헌하는 일을 중지시켰다.
ㅡ 1309년 7월 ㅡ
식민지의 사전적 정의가 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수탈당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원나라에 의한 강제 노역과 직접 수탈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1309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 시기 고려를 원의 ‘식민지'로, 이후부터는 단순한 ‘속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무려 40여년간 원나라의 노예상태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또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며 원의 내정 간섭을 완전히 종결시키는 1356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속국과 주권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준은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점은 학계의 활발한 연구와 토론에 맡기도록 한다.[30]

분명한 것은, 비록 고려가 점차적으로 원(元)강점기 이전의 주권과 위상을 회복해 갔다고 한들, 그것이 원강점기의 역사가 부정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려가 결국 원나라로부터 주권을 되찾게 되니까 원강점기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조선이 1910년 한일합병 이후 35년만에 일제 치하로부터 광복하니까 일제강점기가 없었다고 우기는것과 마찬가지로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1.10. 남송인들만 못했던 고려인들의 실상

참고로, 동시대 몽골을 상대로 가장 길고 치열하게 항전했던 남송도 되려 고려 보다 나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동시대 남송인들은 명목상으로는 고려인들 보다 한 단계 아래인 4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 시대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 중 한명인 F. W. Mote 교수는 그의 저서 『IMPERIAL CHINA 900-1800』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최근 중국 학자들은 더 이상 '4계급'(class)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4계층'(rank) 또는 '4지위'(level)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4계층은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권력(social power)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특전(previlege)을 규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몽골인들이 속해 있던 계층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한인' 또는 '남인'으로 폄하되어진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몽골 정복 이전의 중국 사회에서와 같은 부와 지위에 따른 계층 구분이 계속해서 존재했다. 한때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명성과 특권을 누리던 중국 상류층들에게 있어서 원나라의 제도가 이전보단 현상 유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했던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몽골 정복 초창기에 노예상태(servitude)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 사회는 일시적인 진통을 겪었을 뿐 영구적으로 변형되지 않았는데, 몽골의 서투른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덕분이었다.
F.W. MOTE, 「CHINA AND THE MONGOL WORLD」, 『IMPERIAL CHINA 900-1800』, 492p 참조.
이에 따르면 원나라 통치 시기 '4계층' 구분은 귀족들에게나 적용되는 특전(previlege)의 정도였을뿐 일반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구분짓는 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기했듯 행정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제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한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강남을 아예 한족들의 자치에 맡겨 두고 중앙에만 신경 쓰게 되니, 이로서 동시대 남송인들은 고려인들과 달리 몽골풍을 강요당하지도 않았고,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개최하는 등 사실상 중세 유럽의 봉건 국가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남송 사회가 누릴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특혜의 배경엔 몽골 침략 당시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국가 지도부의 공덕이 있었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투항하는 남송의 귀족 및 군벌들에게 영지를 분봉하고, 왕부를 설치해 자치를 실시하도록 했는데, 전체 원 국토의 1/3을 이 왕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며, 왕부의 제후들은 원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징세권과 징병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몽골인들은 한족들로만 이루어진 군사 조직인 '한군만호부'도 두었는데, 지휘관들은 그 직위와 둔전을 대대로 세습했다. 이러한 토대가 결국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1세기만에 종식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는바[31], 몽골의 침략에 오랜 기간 항전하며 권리를 관철시켜나간 국가 지도부의 항전 의지와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국가 지도부가 국민들을 외면하고 내팽개치고 도망만 다니던 고려는 몽골 입장에서 매우 만만한 먹이감이었기 때문에 투항을 종용할 일도, 자치를 들어줘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홉 차례나 지속된 몽골 침략기 동안 고려 귀족들이 몽골을 상대로 국민들의 의사와 권리를 단 한마디도 대변하지 못했던게 고려가 원의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하게된 배경이었다.

1.11. 국체유지≠독립국

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한 후에 기존의 '국체'(國體, 국가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독립국'이였다는 주장도 순 억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의 독립은 정부의 주권(主權) 행사 여부에 달려있는거지 정부 그 자체에 딸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체가 있기 때문에 독립국이라고 한다면 홍콩은 진작에 독립국이었어야 마땅하다. 이처럼 법과 질서는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라면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서 단순히 국체가 있다고 해서 주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 즉, 국체는 독립국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국체를 유지한다고 해서 독립국이 될 수 있는게 아니다.

원(元)강점기 동안 고려왕과 그 후계자는 원나라 황제가 직접 임명했고 원나라는 고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 수시로 왕의 후계자(태자)를 선정하여 볼모로 끌고갔다. 심지어 원나라는 중간에 고려 국왕을 폐위시키고 복귀시키기까지 했는데 충선왕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으로서 외국의 간섭 없이 자국에서 자주적인 왕위 승계 후 중국으로부터 '형식적인 칭호'만을 부여받던 기존의 ' 책봉 체제'와는 전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중세 왕조의 주권을 상징하는 ‘왕위 임명권’과 '왕위 선양권'을 외국의 황제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고려 왕이 외국의 일개 신하였음을 뜻하며 당시 고려가 주권을 박탈당한 속국이였음을 뜻한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왕실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고려가 독립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 주권을 왕실의 존립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범하는 오류다. 그러나 단순히 왕실의 존립만으로 국가 주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으며 왕실이 국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되려 기존의 왕실을 뒤엎고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이전의 국가 제도를 그대로 따르는 예는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다. 몽골도 남송을 정복한 후에 남송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시켰고, 훗날 홍건적의 봉기로 원나라를 뒤짚고 명나라를 세우는 주원장도 남송의 전반적인 제도와 원나라의 제도를 일정 부분 흡수하였다. 남송의 제도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당나라와 한나라 때부터 내려져오던 것이었다.

1.12. 부마국≠자주국

고려가 강점기 동안 부마국(駙馬國, 사위의 나라)의 지위를 누린게 고려가 자주적인 증거다? 이른바 "부마국 논리"다. 이것은 애초 전혀 관련 없는 두 명제인 '부마국'과 '자주 국가'를 억지로 이어맞추기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장님 코 베어가기 식 논리'다. '자주적'이라 함은 ‘남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뜻하는데, 과연 친정이 맨날 처가한테 돈뺏기고 얻어터지고 사는데 자주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주적이고 자시고를 떠나서 왕실과 왕실간의 혼인은 전근대 시절 정치적인 이유로 빈번히 행해져오던 오랜 관습에 불과했다. 전근대 시절에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에 놓인 나라가 국력이 우세한 나라에 공주를 시집보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원나라가 고려보다 국력이 딸려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나? 왕실의 여자들을 타국에 시집보내 혼사관계를 맺는 행위는 전근대 시절 남존여비의 일환으로서 국가간 힘의 우열에 상관없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행해져오던 관습에 불과했다. 되려 상대적으로 국력이 우월한 나라가 국력이 열세인 나라들을 상대로 먼저 공주를 보내 혼인 동맹을 제안하거나 성사시킨 일은 '원나라-고려 관계' 말고도 많았다.

일례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투항해온 송나라 황제 공제를 영국공(瀛國公)에 봉하고 '보르지긴' 공주를 시집보냈다. 1294년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한 원성종 테무르가 부마(駙馬)들에게 은을 하사하는 대목은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유일한 부마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부마(駙馬) 만자대(蠻子帶, ?)에게 은(銀) 76,500냥을, 활리길사(濶里吉思, 코르구즈)에게는 15,450냥을, 고려왕(高麗王) 왕거(王昛, 충렬왕)에게는 30,000냥을 하사하였다
ㅡ <원사(元史)>, 성종 1년(1294), 4월 25일(음) ㅡ

칭기스칸은 자신의 금나라 원정을 도와준 옹구트(Ongud)[32] 족장 알라후시 테긴(Alakhush Tegin)에게 왕의 칭호를 내리고 자신의 딸 '알라가 베키'를 출가시켰다. 또한 칭기스칸 부족에 적대적인 나이만 부족 토벌에 공을 세운 위구르족 출신 바우르추크 아트 테긴(Baurchuk Art Tekin)에게도 자신의 딸 '알툰 베기'를 시집 보내었다. 투항하거나 항복한 적국의 왕족에게 답례로 공주를 시집보내는 행위는 몽골 사회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의 보편적인 전통이었다. 초기 돌궐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무칸(Mukhan)은 돌궐 보다 힘의 열세에 있던 북주 왕실에 자신의 딸 아쉬나 공주를 출가시켰다. 당시 북제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북주는 오히려 돌궐 제국의 힘을 빌리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돌궐의 카간이 먼저 자신의 딸을 북주 왕실에 보내 혼인 동맹을 성사시킨 것이다. 후기 돌궐 제국의 카프간(Qapaγan, 묵철) 역시 자신의 딸을 무측천의 아들과 혼사시키려다 뜻대로 되지않자 군사를 일으켜 당의 영토를 공격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돌궐은 당나라 보다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 나라 전성기 황제 현종 역시 투항해온 거란 족장들에게 연달아 정락공주(靜樂公主)와 영락공주(永樂公主)를 시집보내는 등 투항하거나 속국이 된 적국의 왕족에 자기 가문 여성들을 시집보내 주종 관계를 다지는 '정략 결혼'의 예는 역사상 셀 수 없이 많았다.[33]

되려 전근대 시절에 왕의 뒤를 이을 세자를 타국에 볼모로 보내는 행위는 단순한 굴욕을 넘어서 '나라의 기둥'을 뒤흔드는 일이었고 상대 국가에 대하여 속국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가 왕위를 잇는게 보편적이던 전근대 시절에 공주의 가치는 당연히 왕자보다 한참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남존여비 문제를 떠나서 가장 실질적인 문제가 왕의 후사(後嗣) 문제였다. 세자가 없는 상황에서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 왕이 귀족들로부터 받게 될 압박과 정론 분열을 고려할때 몽골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항복한 나라들의 세자를 볼모로 요구해왔는지 알 수 있다. 바로 항복한 나라의 왕권을 약화시켜서 자국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경우엔 아예 몽골이 직접 세자를 책봉함으로써 고려 스스로 후사를 정할 수 없게 만들어놔버렸는데 이것은 몽골에의 완전한 복속과 종속을 의미했다. 고려가 멸망하는 날까지 끝없이 친원 세력들에 의해 내정 간섭과 수탈을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었다.

1270년 고려 국왕 원종 원세조의 아들을 조회하려다 거절당하는 상황을 기록한 대목은 원나라의 부마로서 그 지위 역시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식(王禃, 원종)이 와서 조회하고 황자 연왕(燕王)을 보고자 하니,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그대는 한 나라의 군주이니 짐을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식이 아들 왕심(王諶)으로 하여금 황자를 만나기를 청하니 그것은 따랐다.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그대가 내부(內附)한 것이 늦었으므로 반열이 제왕(諸王, 여러 임금)의 아래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역도호(亦都護, 이두쿠트[34])가 먼저 귀부하였으므로 곧 제왕의 위에 두도록 명령하였고, 아사난(阿思蘭, 아르슬란[35])이 뒤에 귀부하였으므로 그 아래에 반열하게 하였으니, 경은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ㅡ 원사(元史), 권7, 세조4년(1270), 2월 25일(음) ㅡ

1.13. 고려에 대한 외세의 평가

다음은 고려 태자 왕전(또는 왕식)이 몽골을 방문했을때의 일화인데, 부마국 논리와 더불어 쿠빌라이가 고려를 높이 평가한 사례라는 근거로 자주 거론되는 떡밥이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어도 항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제 태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ㅡ <고려사절요> ,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 봄 3월 ㅡ
그런데 문제는 쿠빌라이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게 될 무렵의 상황이다. 당시 쿠빌라이는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었고, 칸(Khan) 자리를 놓고 동생 '아리크부카'(阿里孛哥, 아리패가)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은 아리크부카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기 때문에[36] 쿠빌라이는 비몽골족 출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그가 한화정책을 추진한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외국의 사신이, 그것도 외국의 태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 사건이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는 기뻐하는게 당연했다. 한마디로, 쿠빌라이의 저 말은 고려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거나 우대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고려 태자에 대한 기특함에서 나온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일화를 거론한 것도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때문이지 고려가 진짜 고구려의 후예라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없다. 마치 훗날 고조선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조 조선이 진짜 자신들이 고조선의 후예라고 생각해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게 아니듯 당시 왕씨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것은 신라 말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기득권의 정치적인 목적 달성과 연관이 있었다. 되려 <원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원나라가 고려를 기자의 속국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삼한(三韓)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5월에 마형(馬亨)이 아뢰기를, "신 마형이 삼가 황제폐하께 아뢰옵건대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봉한 땅으로서 한(漢)과 진(晉)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니, 지금 비롯 내조한다고 하지만 그 속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 (중략) ...

ㅡ <원사元事>, 1269년(지원 6년) ㅡ
(왕영조가) 제왕 야홀(也忽, 예쿠)을 따라서 삼한(三韓)을 공략하여 천룡(天龍, 충주)의 모든 보(堡)를 함락시켰는데, 병사들이 사납게 약탈하는 것을 금지하니 민(民)이 기뻐하며 그에게 복종하였다.

ㅡ <원사元事>, 권149, 왕영조(王榮祖) 열전 ㅡ
백번 양보해서 쿠빌라이가 정말 고려 왕족들을 우대해서 한 말이라 치더라도 그것이 곧 고려 사회 전체에 대한 우대가 되지 않는다. 쿠빌라이가 정말 고려를 우대했더라면 고려가 원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 수탈 지역으로 전락하여 명목상 원나라의 최하위 계층인 남송인들만 못한 삶을 살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위와 유사한 떡밥으로 자주 거론되는 일화는 같은해 여름 원나라 황제로 등극한 쿠빌라이가 개평부(開平府)에 머물고 있던 태자에게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전한 말이다.(당시 고려 태자는 무신 김준이 강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지금 넓은 하늘 아래에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자는 오직 너의 나라(고려)와 송나라 뿐이다."
ㅡ <고려사절요> ,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 여름 4월 ㅡ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주옥같은 문장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가 처음에 세자로서 폐백을 받들어 정성을 바치고 몸을 조정에 맡긴 채 슬픔을 머금고 처분을 청하니 참으로 가긍하고 불쌍하였다. 그러므로 네 나라로 돌려보내어 네 농토를 보전하고 네 집을 편안하게 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황제의) 큰 덕을 넓히고 전에 있던 작은 연고를 버리려 함이었다." ....(중략).... "이제 알고보니 너희 나라가 내란으로 맹세를 배반하여 우리의 변방장수가 다시 계엄(戒嚴)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인가. 과연 내란이라고 한다면 권신(權臣)[37]이 어찌 스스로 임금이 되지 않고 4세손(世孫)을 세웠으며, 전문(傳聞)의 착오라고 한다면 세자가 어째서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지경 위에서 서성거리는가."

ㅡ <고려사절요> ,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 여름 4월 ㅡ
쿠빌라이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던 때 고려에서는 최씨 정권의 가노 김준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약속한 국왕의 출륙과 환도를 미루고 있던 시점이었다. 쿠빌라이가 애둘러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당시 김준은 고려 왕실에 반란을 일으킨 대역죄인이었기 때문에 김준 정권이 고려 왕실의 의사와 정통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고려가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는다.'는 쿠빌라이의 저 말은 어디까지나 애둘러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전개되는 역사를 보건데, 김준 정권은 환도만 미루고 있을 뿐이지 원나라가 잇따라 요구해오는 조건들을 다 들어준다. 1264년에는 고려 국왕(원종)이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칸을 접견하기도 하며, 1268년부터는 합포(경상남도 창원)에 몽골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 원정을 위한 배만들기 작업에 착수하고, 이 과정에서 몽골로부터 병부와 군대를 사찰받고, 해마다 몽골에 공물, 노예, 특산품 등을 바치는 등 사실상 고려는 태자 왕전을 몽골에 보내는 1259년부터 원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되려 쿠빌라이는 고려를 "슬픔을 머금고 칸의 처분을 청하는", "가긍하고 불쌍한", "권신이 4세손을 세우고 임금을 농락하는", "세자는 몽골에 항복하러 와서 귀국하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 땅이나 서성이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를 폄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훗날 조선을 정벌하는 청태종 홍타이지가 조서를 내려 인조를 꾸짖는 대목인데, 비몽골족 눈에도 당시 고려가 타국의 눈에 외세의 지배를 받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왕조로 인식되어졌음을 보여준다.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는데 어찌 너희가 하루 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 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臣)이라 일컬었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평화를 얻은 적이 있었단 말이냐?

2. 결론

1970년대부터 군사 정권의 영향을 받은 한국 학계에서는 그동안 군인 반란분자들인 고려 무신정권을 대몽항쟁을 이끈 영웅 집단으로 미화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대로 대몽항쟁의 주역은 국가 지도부가 아닌 민중이었으며, 무신정권은 몽골과 타협하며 국민들을 수탈한 매국집단이었다.

몽골 간섭기(1232~1259) 동안 전국이 황폐화되고 고려 전체 인구의 25~30%가 소실되었으며,[38] 고려 정부가 몽골에 공식으로 항복한 후에 '8년간의 유예기'(1260~1267)를 거쳐 원(元)의 식민지(1268~1309)로 전락하여 40여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 수탈을 당해야 했다.

3. 고려 매국노 명단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고종(고려)
원종
충렬왕
충선왕
홍복원
홍다구
홍중희
홍중경
조인규

4. 참고자료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병지(高麗史兵志)》
《동사강목(東史綱目)》
《원사(元史)》
『IMPERIAL CHINA 900-1800』 by F.W. MOTE.
[1] 이를 위해 원나라 조정은 고려 세자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왕위 계승 후에 외국으로부터 형식적으로 인정받는 책봉과 달리 이 시기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에 의해 직접 임명되고 폐위되었는데 충선왕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2] 원나라의 일본원정 등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보급할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한 관청 [3] 원나라가 소와 농기구를 징발해가기 위해 고려에 파견한 관리 [4] 이 시기 끌려간 공녀 수는 수 천여명으로 추산된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공녀(貢女) 수탈' 항목 참조. [5] 흔히들 몽골이 피정복민들을 4계급으로 나누어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저 '차별'은 귀족들 사이에서만 차등 적용되는 특전의 정도였을 뿐 일반민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신분 구별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남송인들만 못했던 고려인들의 실상' 참조. [6] 군사상 요충지에 주둔하며 방어하는 군대 [7] 기록에서도 보듯 되려 호구 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한 쪽은 고려 정부였다. 따라서 고려에서 호구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주권이 인정받았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그 이전에 고려가 원나라의 호구 조사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호구 조사를 실시하는데 드는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결국 호구조사는 원나라, 고려 양자 모두에게 필요하되 누구의 경비로 실시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8] 백정군에 대해선 본 [여몽전쟁/평가] 문서의 '관군의 유명무실화' 참조 [9] 고려시대 군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마련해야 했다. [10] 몽골 시대 역참 이용 허가증 [11] 고려의 감찰기관으로 관리들의 잘못과 비행을 고발하는 일을 하였다. [12] 톡토르는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골 관리 중 유일한 친(親)고려 인사였다. [13]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기사. [14]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양반 [15] 평시에 군역의 의무가 없던 일반 농민 [16] 군역의 의무가 없는 천민 집단 [17] 고작 소 1마리 당 비단 4필에 교환된 것이다. [18] 고려 시대 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던 관리 [19] 보통 쌀 1석은 성인 한 사람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144kg에 해당한다. [20]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거두어 들이는 미곡 [21] 1두는 성인 한 명이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양 [22] 실제로는 카이두(海都)와의 전쟁을 위한 전비 확충이 목적이었다. [23] 유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 18, 1957, 34∼37쪽 [24]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 [25] 몽골에 귀부한 남송군 [26] 몽골은 병사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 [27] 원나라가 요구하는 매의 포획과 사육을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두었던 관청 [28] 고려시대 권문세족 중 한명으로 충렬왕의 몽골인 아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 [29] 이익주, 「고려 충렬왕대의 정치상황과 정치세력의 성격」, 『한국사론 권18』, 170p [30] 참고로 고려는 1347년까지 원에 공녀를 바쳤다. [31] 되려 지방 호족들의 힘을 너무 키워준게 호족들간의 내전을 유발하여 원나라가 좀 더 유지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32] 인산산맥(陰山山脈) 북방지역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부족. 칭기스칸에게 협력하여 몽골제국 건국에 공적을 세운 댓가로 역대 부족장들은 원나라의 황녀(皇女)와 결혼하고 왕의 칭호를 부여받음. [33] 당장 원세조 쿠빌라이가 하가(下家)시킨 딸들만 7명이다. [34] 위구르 왕의 칭호 [35] 카를루크의 군주 [36]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리크부카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전임자였던 몽케 칸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리크부카를 찍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37] 최충헌을 가리킨다. [38] https://m.blog.naver.com/53traian/221289724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