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승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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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원묘국사(圓妙國師) |
법명 | 요세(了世) |
자 | 안빈(安貧) |
성 | 서(徐) |
부친 | 서필중(徐必中) |
출생지 | 경상남도 합천군 |
출생 | 1163년 10월 |
사망 | 1245년 5월 (향년 81세) |
1. 개요
고려의 승려. 속성은 서씨(徐氏). 자는 안빈(安貧). 법명은 요세(了世)로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이다. 아버지는 신번현(新繁縣)의 호장을 지낸 필중(必中), 어머니는 서씨다. 천태종을 중흥시켰으며 백련결사(百蓮結社)운동을 전개했다.2. 생애
요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동문선, 만덕사지, 조선불교통사 등에 기재된 '백련사 원묘국사비문'을 제외하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 의종 17년(1163년) 10월에 합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의젓했다고 한다. 그는 12세에 강양(江陽) 천락사(天樂寺)에 출가하여 균정을 은사로 삼았으며 천태교관을 처음 접했다. 당시 강양군수였던 임종비(林宗庇)는 일개 사미승임에도 남다르게 성취가 빠른 요세를 보고 "불법이 의지할 곳이 있다."고 감탄했다. 이후 요세는 구족계를 받고 23세에 승과에 급제한 뒤 천태학을 탐구해 수 년이 못되어 대의를 확실히 깨달았다.신종 원년(1198년) 봄 요세는 36세에 개경에 올라가 고봉사(高峯寺)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명망높은 고승들이 구름같이 모여 이론이 분분하였으나 요세가 법좌에 올라 설법을 하니 모두 복종하여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세는 법담으로는 누구에게도 못지 않아 명성을 떨칠 수 있었으나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였으므로 1198년 가을에 도반 10여 명과 함께 개경을 떠나 사찰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 머물며 처음으로 법회를 열고 후진 양성에 노력하니 가르침을 청하러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이때 경상북도 영천시 팔공산에 머물며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보조국사 지눌이 요세의 명성을 듣고 시 한 수를 보냈다.
물결이 어지러우면 달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주를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
방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주를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
요세는 시를 보고 바로 지눌을 찾아가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했다. 이후 지눌과 함께 조계선법을 익힌 요세는 신종 3년(1200년) 지눌이 송광산(松廣山)으로 옮길 때 따라갔다. 그러다가 남원 귀정사(歸正寺)를 지나가던 중 절의 주지인 현각(玄恪)이 요세를 맞이하며 말했다.
어젯밤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내일 3생 동안 법화경을 지닌 법사가 올 것이니 깨끗이 청소하고 영접하라’고 하여 말대로 뜰을 쓸고 음식을 장만해 두고 기다렸더니 과연 대사께서 오셨다.
'원묘국사비문'에 따르면 요세는 이후 여러 꿈을 꿨다고 한다. 한 번은 천태대사가 여러 사람에게 교학을 강설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화장암(華長庵)에 꼼짝 않고 앉아서 참선하다가 여러 마군들에게 유혹당했지만 끝내 이겨내는 꿈을 꾸기도 했으며 산신이 절터 자리를 가르쳐주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희종 4년(1208년) 봄 요세는 월생산(月生山) 약사난야(藥師蘭若)에 잠시 머물렀다. 요세는 그곳의 물이 맑고 산이 절묘하지만 당우들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는 수리한 뒤에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정신을 모으고 관을 닦다가 문득 생각했다.
만약 천태의 묘한 해석을 밝히지 못한다면 영명(永明) 연수(延壽) 선사가 말한 120가지 병폐를 어찌 벗어날까.
연수 선사가 말한 120가지 병폐란 깨달음을 가로막는 사견(邪見)들을 말한다. 요세는 꿈 속에서 천태대사가 가르친 원교 묘법의 이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판단하고 천태 교관을 다시 강의했다. 이때 '관무량수경'의 “이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이며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는 구절을 해석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자신도 모르게 파안대소했다고 한다.
이후 요세는 천태교법만을 설법했는데 언변과 지혜에는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대중들과 함께 참회행을 닦았는데 매일 53부처들에게 12번씩 예경하고 모진 추위나 무더운 날씨에도 1번도 게을리한 일이 없어 선승들로부터 서참회(徐懺悔)라 불렸다고 한다. 어느날 탐진현(耽津縣)의 청신사 최표(崔彪)ㆍ최홍(崔弘)ㆍ이인천(李仁闡) 등이 요세를 찾아와 말했다.
지금 대중들은 점점 많이 모이는데 절은 심히 협소합니다. 우리 고을 남해 산기슭에 만덕사(萬德寺) 터가 있는데 지세가 맑고 절승하여 절을 지을 만하니 가서 보지 않으시렵니까?
요세가 가서 보니 과연 터가 좋아 희종 7년(1211년) 봄에 공사를 시작했다. 요세는 제자 원영(元瑩)ㆍ지담(之湛)ㆍ법안(法安) 등을 시켜 일을 감독하고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80여 칸 규모의 절을 지었다. 고종 3년(1216년) 가을에 절이 완공되자 법회를 열고 문도들과 함께 천태 수행을 본격적으로 행했다. 고종 9년(1221년) 봄에 대방(帶方) 태수 복장한(卜章漢)이 요세의 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관내 백련산(白蓮山)에 도량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요세가 제자를 데리고 가보니 땅이 막히고 물도 없어 돌아오려던 차에 우연히 돌 하나를 잡아 빼니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왔다. 이에 이상히 여겨 2년을 머물렀다. 그러다가 최표 등이 글을 보내 "우리 절의 법좌가 빈 지 오래입니다."라며 돌아오기를 청하자 만덕사로 돌아갔다.
고종 17년(1229년) 여름 유생 수 명이 개경에서 내려와 만나뵙기를 청하자 요세는 제자로 받아들여 머리를 깍고 '법화경'을 가르쳐 통달하게 했다. 이로부터 가깝고 먼 곳에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니 점차 큰 모임이 되었다. 고종 19년(1232년) 4월 요세는 만덕사에서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를 수행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되 오로지 천태대사의 '법화삼매참의'에 나오는 행법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사람들은 요세와 제자들을 가리켜 백련결사(白蓮結社)라고 불렀다.
고종 23년(1236년) 요세는 개경에서 내려와 출가한 유생들 중 한 명인 천책(天頙)에게 '백련결사문'을 짓게 했다. '원묘국사비문'에 따르면 이후로 30년간 결사 운동에 참여하여 '법화경'을 외운 이가 천여 명, 직접 출가한 이가 38명, 가람과 아란야를 지은 것이 5곳, 고관들로부터 서민까지 이름을 쓰고 결사에 참여한 이가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요세는 젊어서 잠시 도성에 발을 붙인 것을 제외하고는 산 속에서만 지내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꾸밈이 없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고 잠잘 때는 요가 없었다. 시주받은 공양물은 전부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고 방장에는 삼의일발 밖에 없었다. 매일 선정하고 경을 가르치는 여가에 〈 법화경〉 한 부를 외우고 준제신주(准提神呪)를 1천번, 나무아미타불을 1만번 부르는 것을 일과로 하였다. 또한 요세는 불교의 경론이 너무 많아 배우는 이들이 종잡지 못한다고 생각해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에서 핵심만을 뽑아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만들어 판각해 배포하니 후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고종 24년(1237년) 여름에 선사의 법계를 주고 그 뒤에도 여러 번 교사와 함께 세찬(歲饌)을 보냈다. 이후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던 요세는 고종 32년(1245년) 4월에 후계를 상수제자 천인(天因)에게 부탁하고 별원에 물러나 고요히 참선하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했다. 그해 7월 병을 앓게 된 요세는 객실로 옮겨 비스듬히 누워 계송을 읊었다.
제법실상은 맑고 맑아서
말하면 이치를 잃고 보여주면 종지를 어기도다.
우리가 종지로 삼는 법화경의 일대사인연을 분수에 따라 묘하게 이해한다면
오직 제법실상에 있을 뿐이로다.
말하면 이치를 잃고 보여주면 종지를 어기도다.
우리가 종지로 삼는 법화경의 일대사인연을 분수에 따라 묘하게 이해한다면
오직 제법실상에 있을 뿐이로다.
그는 매일 앉고 누울 때마다 거듭 창하면서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자에게 경쇠를 쳐서 여러 사람을 모으게 한 뒤 세수를 하고 법복을 입고 법상에 올라 가부좌로 서쪽을 향해 바라보며 앉아 대중들에게 고했다.
50년 산 속에서 썩은 이 물건이 오늘날 떠나가니 각자 노력하고 법을 위해 힘쓰라.
천인이 물었다.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
요세가 답했다.
이 생각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나타나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며,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서로 감응하여 도가 통하는 것이니 실상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을 마친 뒤 염불을 그치고 사망하니 향년 83세였는데 탐진 수령이 서리 10여 명을 데리고 와서 화공 박보(朴輔)를 시켜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가까운 읍의 사부대중 50여 명이 앞을 다투어 배례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종이 요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유사에게 명해 국사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묘(圓妙), 탑 이름을 중진(中眞)이라 하였다.
3. 사상
요세가 생전에 주창했던 '백련결사(白蓮結社)' 사상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그가 생전에 저술했다는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는 현재 전하지 않으며, 그의 사상을 다룬 서적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사라져 단지 동문선, 만덕사지 등에 전해지는 '원묘국사비문'에서만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요세가 백련결사를 결행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연수 선사의 120가지 병폐였다고 한다. 요세는 일진본심(一眞本心)을 가리는 진망(眞忘)·유무(有無)·권실(權實)·선교(禪敎) 등의 일체 분별 취사 속에 120가지 병폐가 다 들어있으므로, 이를 다스리는 수행법은 천태대사의 수행법이 아니고는 어렵다고 주장했다.이는 수행자가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에 근거해서 수행을 하더라도 마음의 본성의 통찰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양한 병이 하나의 치료법을 통해서 완치될 수 없고, 다양한 치료방법을 요구하듯이, 영명연수의 120가지 병은 깨달음과 관련해서 다양한 수행방법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120가지 병에 대한 요세의 언급은 선정절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과 수행방법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요세는 염불을 외우는 것을 백련결사의 핵심 수행법 중 하나로 삼았다. 이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지눌은 염불에 대해 "염불하지 않더라도 유심만 알면 저절로 정토에 왕생한다. 그런데 일부 사문들이 외부의 모습에 집착하여 서방을 향해 소리를 높여 부처를 부르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지눌에게 있어 정토왕생을 위한 타당한 수행법은 염불이 아니라 선정과 지혜였다. 반면, 요세는 선정과 지혜만으로는 120가지 병폐를 고칠 수 없으며, 염불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수행법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가 지눌의 정혜결사에 참가했다가 중도에 이탈해 백련결사를 개창한 것은 이러한 염불에 대한 시각차와 오직 선정을 고집하는 지눌의 행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요세는 천태종을 정통으로 삼고, 이를 토대로 삼아 '법화삼매참의'에 의거해 철저한 수행을 행했다. 또한 그는 '법화경'을 염송하고 법화삼부 중 1부를 독송하고 준제신주를 천 번, 미타불을 만번 소리내어 불렀다. 그리고 세상의 일을 논하지 않고 참선에 집중했으며, 형편이 닿는대로 경전의 소요(疏要)를 찬하여 대중들에게 반포했으며, 시주들의 보시를 빈궁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이는 그가 천태종의 참선 중시 및 사회 참여 성향을 중시했음을 의미하며, 무신정변 이래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여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킨 불교계로부터 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백련결사를 주창한 천태종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그들을 호의적으로 본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후원받았다. 그러다가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간섭기에 접어들었을 때, 백련결사는 원 황실의 원찰로 개창된 묘련사(妙蓮寺)에서 수행되었지만 현실에 타협해 형식적인 수행법에만 집착하고 고난에 처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조선 세종 6년(1424년) 선종에 폐합되어 사라졌다. 1970년 '대한불교천태종'이 결성되면서 표면상으로는 부활했지만, 실제로는 명칭만 천태종일 뿐 교리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