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2:02:43

올리버 비어호프

올리버 비어호프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위르겐 클린스만
(1994~1998)
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올리버 칸
(2000~2004)
}}} ||
올리버 비어호프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1998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위르겐 콜러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올리버 비어호프
( 우디네세 칼초)
로타어 마테우스
( FC 바이에른 뮌헨)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96
}}} ||
독일의 축구인
파일:Oliver Bierhoff.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올리버 비어호프
Oliver Bierhoff
출생 1968년 5월 1일 ([age(1968-05-01)]세)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카를스루에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91cm / 체중 83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FC 바이어 05 위어딩겐 (1986~1988)
함부르크 SV (1988~199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90)
아우스트리아 잘츠부르크 (1990~1991)
아스콜리 칼초 (1991~1995)
우디네세 칼초 (1995~1998)
AC 밀란 (1998~2001)
AS 모나코 FC (2001~2002)
AC 키에보베로나 (2002~2003)
행정가 독일 대표팀 (2004~2022 / 단장)
국가대표 70경기 37골[1] ( 독일 / 1996~2002)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득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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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축구 선수 출신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로, 큰 키(191cm)에 타점 높은 헤더로 '헤더의 달인'이라 불렸다.

데뷔 초 분데스리가에서 무명 생활을 하다가 아우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비로소 두각을 드러낸 뒤,[2] 우디네세 칼초에서 세리에 A 득점왕에 등극하고 AC 밀란에서는 스쿠데토도 차지하였다. 그리고 독일 대표팀에서는 체코와의 유로 1996 결승전에 교체 출전하여 2골을 기록, 독일의 우승에 기여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활약[3]하였다.

현역 은퇴 후에는 2004년부터 독일 대표팀의 단장으로 활동하여,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 등의 성과를 냈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두 조별 리그 탈락함에 따라 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파일:bierhoff.jpg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위르겐 클린스만 못지않은 저니맨이었는데, 비어호프의 경우는 클린스만같은 성격 문제보다 단순히 기량이 부족해서였다. 1986년 분데스리가에서 데뷔했지만 기량 부족으로 이팀 저팀을 옮겨 다니다가 1990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아우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이적했는데, 1990-91 시즌 리그 33경기 23골, 도합 36경기 26골을 터뜨리며 본격적으로 득점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이후 세리에 A 아스콜리 칼초로 둥지를 옮겨 1993-94 시즌에는 17경기 2골에 그치며 팀의 세리에 B 강등을 막지 못했으나, 1994-95 시즌 세리에 B 35경기에서 20골을 넣어 득점왕에 등극하였다. 이후 아스콜리에서 2시즌을 더 뛴 비어호프는 우디네세 칼초로 이적, 1995-96 시즌 세리에 A 31경기에서 17골을 득점하며 팀의 주포가 되었고, 계속해서 1997-98 시즌에는 32경기 27골을 기록해 카포칸노니에레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든다.

이 때 세리에 A의 명문 클럽인 AC 밀란이 비어호프에게 오퍼를 보냈고, 밀란으로 이적한 비어호프는 1998-99 시즌 34경기 19골을 기록하며 팀이 스쿠데토를 따는데 큰 기여를 했고 비어호프 본인도 생애 첫 리그 우승을 경험한다. 하지만 1999-00 시즌에는 11골에 그치고, 2000-01 시즌 9골로 노쇠화가 심해지면서 결국 AC 밀란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디비지옹 1[4] AS 모나코에서 1시즌을 보내고 AC 키에보베로나에서 1시즌을 뛴 다음 2003년에 35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파일:Oliver-Bierhoff.jpg

이탈리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나이 30에 가까워서야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처음으로 참가한 큰 대회가 바로 유로 1996. 그리고 이 대회 결승전에서 체코 상대로 골든골을 포함해 2골을 넣으며 앙리 들로네 트로피를 들어올렸다.[5]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위르겐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뤄 16강까지 3경기 연속골 등 3골 2어시스트로 맹활약한다. 그러나 마티아스 자머가 부상으로 아웃된 독일은 투톱만 축구한다고 할 정도로 독일 대표팀의 전반적인 노쇠화로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 0-3으로 대패하며 탈락했다.

월드컵 후 주장으로 선임된 그는 유로 2000에서는 조별 리그 1차전 루마니아전만 나왔고, 이후 훈련 중 부상으로 남은 2경기는 결장했다. 그가 빠진 독일은 잉글랜드에 0-1, 포르투갈에 0-3으로 패하며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해 삿포로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전[6]에서 1골을 득점하며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발기술을 비롯한 기본기는 떨어져서 항상 정통 센터 포워드의 역할에 치중했다. 현역 당시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큰 키와 탁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타겟형 스트라이커 플레이에 능했다.

그의 최대 장기는 바로 헤더. 유로 1996 체코전에서의 골도 그렇고 1998 프랑스 월드컵 16강전에서 터뜨린 입이 쩍 벌어지는 역전 결승골 등 선수 생활 내내 대부분의 골을 헤더로 만들어냈다. 스피드가 빠른 것도 아니고 발재간이 좋은 것도 아니었던 그가 위대한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한 것은 순전히 헤더 능력덕분이다.[7]

수비수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내지르는 헤더 능력은 일품이었다. 특히 공중전 장악 능력은 발군이라서, 독일에서 이에 버금갈 선수는 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오직 헤더 중심의 포스트 플레이에만 치중되었다는 점이었다. 비어호프가 주축이 된 독일 대표팀 특유의 딱딱하고 투박한 볼키핑과 공중전, 느린 주력 및 취약한 패싱 능력은 상대 팀의 수비를 아주 쉽게 만들어 줬고, 그래서 독일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후 1998 프랑스 월드컵을 망쳤다. 특히 리옹 참사라고 불리는 1998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이 처녀출전한 크로아티아에 0-3으로 대패할 때 비어호프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8]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의 준우승에 기여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우디아라비아 - 아일랜드 - 카메룬 - 파라과이 - 미국 -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꿀대진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 꿀대진에서조차 미하엘 발락 올리버 칸이 없었으면 16강 통과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당시 독일은 발락과 칸 2명에게 상당히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발락이 공격도 이끌고 조율도 책임지는 등 팀의 중심이 되며, 팀이 무너질 때 쯤이면 칸이 믿기 어려운 슈퍼 세이브로 번번이 팀을 구원했다.[9] 게다가 이 시점에서 이미 만 34세의 노장이었던 비어호프는 클로제와 올리버 뇌빌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플랜 B 정도로만 기용되었다.

4. 은퇴 이후

2004년부터 2022년까지 장장 18년 동안 독일 국가대표팀 선수단의 단장을 맡았는데, 단장이 된 이후로는 여러 가지 망언과 무개념 행동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서 행정가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단적인 예들로 2006 독일 월드컵 때 8강전 종료 직후 아르헨티나 비하 발언과 2018-19 네이션스 리그 조지아 비하 발언. 전자는 8강전 경기 직후 여러 선수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비어호프는 대놓고 "아르헨티나는 독일어를 못 알아들으니, 맘껏 욕을 해도 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독일계라서 독일어를 아는 가브리엘 에인세가 이를 눈치챘고, 결국에는 독일과 아르헨티나 양국 선수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토르스텐 프링스 훌리오 크루스를 폭행해서 징계를 받아 4강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이 공백을 메우지 못한 독일은 이탈리아한테 2:0으로 패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후자 발언은 "우린 프랑스와 네덜란드라는 매력적인 상대를 상대한다. 조지아같은 국대와의 친선경기보다는 이게 더 낫지 않나"였다. 이미 2016년 가을, 토마스 뮐러 산마리노 비하로 독일 국가대표팀의 이미지를 전 세계적으로 추락시킨 것도 모자라서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카잔에서 그렇게 처참한 참사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 발언 직후 열린 네덜란드와의 1차전에서 3:0으로 처참하게 패했다. 그리고 독일이 무시하던 조지아는 정작 리그 D에서 리그 C로 승격했고, 독일은 리그 A에서 리그 B 강등당했다.[10] 이 외에도 카잔의 치욕 당시 메수트 외질한테 집중되는 비난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망언을 내뱉으면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런 충돌을 겪어야만 더 강해진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11] 게다가 망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병크를 터뜨렸는데, 독일 국가대표 선수단의 숙소를 (경기장이 대부분 밀접해 있는) 수도 도하에서 무려 110km나 떨어진 곳에 잡은 것.[12] 이 정도면 서울에서 천안 가는 거리로, 차로는 한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다.[13] 물론 카타르의 국토가 워낙 작아서 다른 월드컵들에서의 베이스캠프-경기장 간 거리에 비하면 그래도 가까운 축에 들지만, 충분히 편하게 도하에 숙소를 잡아 이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데 굳이 먼 곳에 잡은 건 이해하기 힘들다. 단순히 경기 때 이동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공식 기자회견장도 도하에 있어서 선수와 감독이 무조건 왕복 3시간 거리를 오가야 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전을 앞두고는 선수들의 컨디션 보존을 위해 한지 플릭 감독 혼자서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DFB가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결국 독일이 2회 연속으로 조별 리그 광탈의 수모를 당하자, 대한민국 시간으로 2022년 12월 6일 새벽에 DFB가 비어호프의 경질을 알렸다. 비어호프 단장은 당초 2024년까지가 계약 기간이었으나, 카타르 월드컵에서의 부진과 그 동안의 무능으로 결국은 계약 기간도 다 못 채우고 물러나게 됐다. 후임 단장으로는 루디 푈러가 선임됐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득점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유럽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6/87 바이어 위어딩엔 분데스리가 19 3 4 4 4 2
1987/88 바이어 위어딩엔 분데스리가 12 1 1 0 - -
1988/89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24 6 3 1 - -
1989/90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0 0 1 0 - -
1989/9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8 0 - - - -
1990/91 아우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32 23 3 2 - -
1991/92 아스콜리 칼초 세리에 A 17 2 0 0 - -
1992/93 아스콜리 칼초 세리에 B 35 20 2 1 - -
1993/94 아스콜리 칼초 세리에 B 32 17 1 0 - -
1994/95 아스콜리 칼초 세리에 B 33 9 0 0 - -
1995/96 우디네세 칼초 세리에 A 31 17 2 1 - -
1996/97 우디네세 칼초 세리에 A 23 13 1 0 - -
1997/98 우디네세 칼초 세리에 A 32 27 3 2 - -
1998/99 AC 밀란 세리에 A 34 19 3 2 - -
1999/00 AC 밀란 세리에 A 30 11 3 1 6 2
2000/01 AC 밀란 세리에 A 27 6 5 1 10 2
2001/02 AS 모나코 디비지옹 1 18 4 7 3 - -
2002/03 AC 키에보 베로나 세리에 A 26 7 2 0 2 0


[1] 대표팀 역대 득점 10위. [2] 1990-91 시즌: 리그 33경기 23골, 시즌 36경기 26골. [3] 위르겐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루어 3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3골 2어시스트로 활약하였으나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 0-3 참패를 당했다. 이후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유로 2000때는 조별 리그 1차전만 출전했고 2002 한일 월드컵때는 철저한 서브 멤버일 뿐이었다. [4] 리그 1의 옛 명칭. [5] 이게 현재까지 독일의 마지막 유로 우승이다. [6] 8:0으로 이겼다. [7] 역대 헤더 통산 골수 2위다. 1위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8] 단, 리옹 참사 당시 비어호프가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으로 비어호프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전반전에 뵈른스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면서 독일이 숫적 열세에 놓였고, 그 결과 전반에 한 골, 후반에 독일 선수들의 체력이 방전되면서 막판에 연이어 두 골을 먹고 0-3으로 대패했기 때문. 게다가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야르니의 선제골과 블라오비치의 두번째 골은 도무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기가 막히게 골문 구석으로 향하는 중거리 슛이었다. [9] 클로제는 조별 리그에서만 폭발했을 뿐, 16강부터는 완전히 침묵했다. [10] 다행히(?) 개편으로 인해 2018-19 시즌 강등은 없어졌다. 강등 제도는 2020-21 시즌 실시되었다. [11] 물론 충돌을 겪어야 강해질 수 있는 건 어느 정도는 팩트다. 경기 방향을 두고 건설적인 토론과 비판을 통해 팀의 지향점을 맞추며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 그게 독일처럼 경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면 되려 팀이 와해된다는 게 문제다. 이 때의 독일은 케빈 트랍이 숙소에 애인을 데려온 것을 두고 후배 카이 하베르츠가 쓴소리를 날린 것과 더불어서 한지 플릭 감독이 니클라스 쥘레를 대놓고 저격을 하기까지 하는 등 갈등과 불화가 심각했는데, 비어호프의 이런 말은 그러잖아도 반쯤 망가진 자국 대표팀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불난 건물에 가솔린을 던져 버린 상황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12] 도하 수도권과 독립적인 생활권이라는 알호르도 도하와의 거리는 100km가 넘지 않는다. 서울 도심과 인천국제공항, 나리타 - 하네다, 대구 - 경주, 골드코스트 - 브리즈번 간 거리도 60~70km 남짓 나오는 수준이다. [13] KTX를 타면 40분이지만, 카타르에는 그런 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