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수상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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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George Orw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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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Eric Arthur Blair 에릭 아서 블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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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3년 6월 25일 | |||
인도 제국 비하르 주 | ||||
사망 | 1950년 1월 21일 (향년 46세)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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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작가, 언론인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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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colbgcolor=#fff,#1f2023>영국 서턴 코트니 올 세인츠 교회 | ||
학력 |
세인트 시프리언스 스쿨 (졸업) 이튼 칼리지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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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정치소설, 르포 | |||
신체 | 190cm | |||
소속 정당 |
(1938~1939) | |||
사상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1] → 민주사회주의[2] | |||
활동 기간 |
1928년 – 1950년 | |||
종교 | 성공회[3] | |||
배우자 |
에일린 블레어 (1936년 결혼-1945년 사망) 소니아 오웰 (1949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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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오웰의 생애와 작품 세계 |
당신은 영국 문학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정표를 세운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세대의 몇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주요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데즈먼드 매카시, 1950년 새해 인사를 전하며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더 타임스는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의 2위로 그를 선정했고[4],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 3위로 뽑혔다.[5][6]데즈먼드 매카시, 1950년 새해 인사를 전하며
2.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란 이름은 필명이며, 남성의 이름으로 흔한 ' 조지'와 영국의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 있는 '오웰' 강을 합친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 1984>에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사용한 ' 윈스턴 스미스' 역시 윈스턴 처칠의 이름에 흔한 성인 ' 스미스'를 합친 것이다.이 필명에 관한 일화 하나. 1945년 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프랑스 파리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떤 이름 모를 영국인이 자신을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기에 헤밍웨이가 퉁명스레 답했다. "그래서? 뭐?(Oh? Well?)" 그러자 그 영국인이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하지요."라고 말하기에 헤밍웨이가 깜짝 놀라 "이런 젠장, 진작 말씀하시지. 술 한 잔 하쇼! 두잔도 좋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호텔을 떠나기 직전 짧은 만남이었던 탓에 깊은 이야기는 가지지 못한 듯 하다.
<1984>를 본뜬 소설이 나올 때나 대체역사물을 쓸 때 작가들이 이 본명을 자주 쓴다. 대표적인 예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있는데, 책 맨 앞의 작가 주석에다가 '조지 오웰은 에릭 아서 블레어로 표기하겠다'고 대놓고 적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조지 오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상
사회주의는 인간의 풍요를 위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물이었을 뿐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전 인류의 형제애적 단결이다.[7]
합리주의자, 반파시스트, 반마르크스주의자, 반자본주의자, 사회주의자이다. 한국에서는 조지 오웰을 보고 아나키스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웰의 실제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정확한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조지 오웰은 반공주의적 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강력한 민주주의자로서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었던 당대 주류 공산주의적 좌익 사상에 반대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동물농장에서 주요한 비판의 대상은 소련의 공산주의이지만, 그가 러시아 제국은 물론 미국의 자본주의 진영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8]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지 오웰은 매우 이질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그의 특유한 정치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당대의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특이한 행동들[9]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자유주의자들을 '권력을 탐하는(숭배하는) 무권력자'들이라 평하였으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르포르타주에서는 영국 좌파 민주사회주의자들을 <소책자에 글줄이나 쓰며 말끝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태도로 무장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라는 저서에서 돋보이는 그의 독특한 정치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조지 오웰을 반파시스트적 아나키스트로 규정하는데,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아나키스트가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오웰은 기독교적ㆍ형제애적 단결을 위해서 반국가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세력의 침탈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으며,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홈가드에도 참여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나 우익사회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영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이용되고 있으며, 지배 계급의 이익을 확충하기 위해서만 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영국 노동당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며 지나치게 관료적으로 변하였다고 평가했다.[10]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조지 오웰이 추구한 정치적 사상은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국제주의적 관점을 지니면서도 과학적 사회주의는 물론 그 개량이나 수정주의에도 반대하는 공상적 사회주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5. 사건 사고
5.1. 오웰 리스트(Orwell List)
1949년 3월, 노동당 정부가 정보검색부 등을 통해서 반공선전을 할 때, 오웰은 친공(친소)적인 영어권 작가들을 다룬 리스트를 한때 청혼했던 여성인 실리아 커원(Celia Kirwan)에게 넘긴 적이 있다. # 리스트 명단에는 에드워드 카, 찰리 채플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2003년에야 공개되었는데, 그래서 "빅 브라더를 반대하던 그가 냉전 시대에 빅브라더의 하수인이었다니!"(동아일보)하고 경악하는 경우도 많다고. 초기에 공개된 기사 제목 가운데 하나도 'Socialist Icon Who Became an Informer'(정보원이 된 사회주의자의 아이콘)이다.리스트가 공개된 때의 충격은 아직 살아 있던 오웰의 친구[11]들까지도 경악했을 정도라고 한다.
오웰을 변호하는 측은 이 리스트는 '체제 전복 위험 인물 리스트'가 아니라 단순하게 '방첩 활동을 하기엔 부적합한 사람들'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기에 별 의미없다고 주장한다. 즉 대 소련용 선전을 맡기기엔 부적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로 치면 "이 사람은 위험하다"가 아니라 "이 사람을 대북선전 전문가로 고용하지 마시오" 정도다.
무엇보다 조지 오웰에게 스탈린주의자들은 스페인 시절부터 유언비어와 음해를 일삼고 인민전선을 짓밟은 뒤 히틀러와 붙어먹은 또 다른 전체주의자일뿐, 오웰이 이들을 보호해야할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에 경악하는 사람은 조지 오웰의 세계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인데 조지 오웰은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함과 동시에 영국을 자신의 조국이자 고향으로서 지킬려는 내셔널리즘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영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을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오웰은 동물농장을 펴내며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라는 소고에서 친소에 경도되어 출판까지도 꺼림칙해왔던 영국 지식사회를 비판했으며, 더욱이 리스트 작성 당시 영국은 노동당 정권이었다.
물론 이 리스트를 비판하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일단 당시는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그런 리스트를 작성해서 넘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당시 영국 정부가 노동당 정부라는 것은 실드가 되지 않는 것이 해당 정보기관은 반공주의 뿐만 아니라 식민지 탄압에도 힘썼고 애틀리 정부 역시 케냐의 독립운동을 짓밟는 등 평생 반제국주의자를 자처한 오웰의 행보에 견주어 보면 그들을 돕는 것은 내로남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앞서 오웰이 이 리스트를 넘긴 대상인 실리아 커원은 앞서 말했듯이 오웰이 청혼한 여성이다. 그래서 이념이고 뭐고 커원에게 잘 보이려고 (...) 넘긴 거라는 의견도 있다.
무엇보다 해당 리스트에서는 인물들을 거론하며 코멘트를 남겼는데 해당 문구부터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내용이다. 시인인 리처드 스펜더는 오웰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스탈린주의에 질려 전향한 지 오래되었지만 오웰은 그가 동성애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리스트에서 스탈린주의에 동조적이라고 진술했다. 극작가 버나드 쇼, 배우 찰리 채플린 등 역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지만 해당 리스트에 위험인물로 지목되었다.
6. 저서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 『 버마의 나날』(1934)
- 『목사의 딸』(1935)
- 『엽란을 날려라』(1936)
-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 『 카탈로니아 찬가』(1938)
- 『숨쉬러 나가다』(1939)
-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1940, 1946)
- 『사자와 일각수』(1941)
- 『 동물농장』(1945)
- 『영국 사람들』(1947)
- 『 1984』(1949)
7. 기타
- 의외로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다.[12] 그렇다고 평론가들에게 저평가 받는 경우도 아니라 오히려 세계 100대 소설이나 세계 100대 작가를 뽑는 자리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리스트에 본인이나 본인의 작품이 올라가고는 한다. 살아생전 노벨상 수상이 개시되었지만 예술적 성취와 무관히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많은데 오웰 이외에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미시마 유키오 등이 유명 사례라고 꼽힌다.
- 1950년 1월 21일에 사망한 조지 오웰의 모든 저작권은 만 70년이 지난 2021년 1월 말에 영국, 한국 등의 국가에선 완전히 소멸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저작권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 한국에서는 박홍규의 조지 오웰 평전 때문에 그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오해가 많이 퍼져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작가 생활 초기의 그의 정치관은 보수적 아나키스트(Tory anarchist)이라는 기묘한 견해였다. 이것은 그의 정치관이 특정한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과거의 일이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아나키스트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한 장신(6피트 2인치 반. 거의 190 cm)이었다. 그래서 막장을 취재할 때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막장의 갱도는 높이가 1미터 (3~4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몸을 거의 반으로 접어야 했다.
- 수필 가운데에 〈 영국 요리에 대한 옹호〉라는 작품이 있다. 원문.[13] 영국 요리가 무조건 맛이 나쁘다는 것은 오해이며 영국 요리가 맛 없기로 소문난 이유는 가정식 위주로 발달했고, 그 가정들이 가난에 시달려 제대로 요리를 할 여건이 못되어 그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을 뿐더러 외국인들이 싸구려 펍에서만 영국 요리를 접해서 그런 것이라는 내용이다.
-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후 평생을 민주사회주의자로 자처했으나 위의 내용에도 나와 있듯 정작 그의 수필들을 보면 영국에 대한 애국심[14]이 넘쳐난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영국 남부는 이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워보이는 땅이다"라고도 했다. 동물농장에서도 은근슬쩍 영국의 토지는 매우 비옥하다고 영국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며, 소설과 수필에서도 펍이나 지명같은 영국적인 요소들을 많이 추가했다.[15] 다만 원문에서는 잉글랜드라고 나오는데 국내에서 주로 영국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 한국 기자 조갑제가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정치적 신념은 정반대지만 사회적 문제에 직접 뛰어들었다는 특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의 우파 셀럽들도 조지 오웰을 종종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곤 한다. 대표적으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과 방송가 터커 칼슨을 꼽을 수 있는데, 조던 피터슨은 그가 추천하는 저서로 <1984>를 선정했고 터커 칼슨은 자신의 글쓰기 및 토킹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조지 오웰이라고 한 바 있다.[16]
-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이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받아 조지 오웰의 이름을 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놀랍게도 백남준이 표방하는 비디오 아트는 일방적으로 통신이 이루어지는 텔레비전이 아닌 쌍방향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텔레비전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텔레스크린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 의외로 음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데이비드 보위와 핑크 플로이드가 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Animals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 때리기에 집중하는 동물농장과 달리, Animals는 조지 오웰의 정치 성향과 비슷하게 자본주의와 우파 정치인들을 비판한다.[17]
- Hearts of Iron IV에서는 공산주의 지지율과 전쟁 지지도를 올려주는 정치고문 사회주의 소설가로 등장한다. 해당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대접이 조금 더 좋아졌는데 1920년대 초부터 인기 작가로 자리잡은데다가 생디칼리즘 혁명이 일어난 영국에서는 빅브라더의 2인자로 자리매김하며 정보 검열을 담당하며 당의 총서기로 취임한다. 이후 모즐리의 영국이 독일을 격퇴할 경우에는 각각 50%의 확률로 독재 정권이 되어버린 영국을 비관하며 자살하거나 모즐리를 축출하고 후임으로 취임한다. 스탈린주의에 환멸한 현실의 에릭과 모즐리에게 환멸한 카이저라이히에서의 에릭, 즉 묘한 비틀기인 셈이다.
[1]
정확히 말하면 보수적 아나키즘이라고 자칭했다. 자세한 것은 여담 항목참조.
[2]
자세한 것은 "사상" 단락 참조.
[3]
유년기에는 신앙을 가졌으나 성장하면서 종교에 무관심해졌다. 그래도 주변 사람을 따라 미사는 계속 참례했으며, 말년으로 갈수록 종교를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장례식 역시 그의 유언에 따라 별세미사로 치러졌다.
[4]
1위는
필립 라킨, 3위는
윌리엄 골딩, 4위는 테드 휴스, 5위는
도리스 레싱, 7위는 V. S. 나이폴, 8위는 뮤리엘 스파크, 9위는 킹슬리 에이미스, 10위는 앤절라 카터, 11위는
C.S. 루이스, 12위는 아이리스 머독, 13위는 살만 루시디, 15위는 얀 모리스, 16위는
로알드 달, 17위는 안소니 버제스, 18위는 머빈 피크, 19위는 마틴 에이미스, 20위는 안소니 파웰이다.
#
[5]
1위는
셰익스피어, 2위는
제인 오스틴. 4위는
찰스 디킨스, 5위는
이언 뱅크스, 6위는
J.R.R. 톨킨, 7위는
제임스 조이스, 8위는
도스토예프스키, 9위는
세르반테스, 10위는
마크 트웨인.
영어권 작가가
아닌 사람도 보인다. 1999년 2월 한 달 동안에 BBC 웹사이트에서 진행한 투표로 매겨짐.
#
[6]
다만
호메로스,
프란츠 카프카,
레프 톨스토이 같은 불멸의 작가들이 뽑히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도스토옙스키같은 비영어권 작가가 2명이나 뽑히고 픽션 장르의 작가도 뽑혔다는 점에서 나쁘지는 않다.
[7]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국제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경제결정론을 표방하여, 형제애와 같은 관념적 목표를
유물론의 시각에서 배제하므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하게 상이한 반 유물론적 관점에서 나온 발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지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물론을 비웃은 바가 있다.
[8]
사실 이렇게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부정적인 경우에는
제3의 위치, 곧
파시즘으로 빠지기 쉬운데,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한 반파시스트이긴 하다.
[9]
당대의 주류적 이데올로기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것
[10]
이는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과 같은 현대 민주사회주의자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또 이런 관점을 토대로 오웰을 좌파공산주의자 혹은 룩셈부르크주의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는데 오웰은 폭력혁명을 반대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좌파공산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11]
대표적으로 그보다 열 살 어렸던 마이클 풋 전
노동당 당수(1913~2010).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저 명단에 노동당 5인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12]
사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영국의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한 사람을 고르라는 문제가 출제 됐을 때 오웰 대신 다른 지문의 윈스턴 처칠을 골라 대다수가 탈락했다고 한다.
[13]
정확히는 잉글랜드에 해당한다. 조지 오웰은 평소 영국보다는 잉글랜드적인 정체성이 강하였다. 다만 잉글랜드는 영국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14]
정확히는 국제주의자로서의 애향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5]
조지 오웰은 그의 수필에서 "영국은 괴벨스가 말하는것처럼 지옥도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말하는것처럼 천국도 아니다. 영국은 비유하자면 천장마다 해골이 가득한 오래되고 큰 집과도 같다"라고 한 바 있다.
[16]
정작 조지 오웰은 생전에 터커 칼슨과 같은 미디어를 이용한 극단주의자들의 득세를 크게 경고한 바 있다.
[17]
참고로 이 앨범을 주도적으로 제작한
로저 워터스 역시 오웰 못지 않은 좌파 성향의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