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앵란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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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 |||||
제2회 ( 19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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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 19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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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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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숙 (돌아보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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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 (아름다운 눈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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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숙 ( 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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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8581><colcolor=#fff> 엄앵란 嚴鶯蘭 | Uhm Aeng-ran |
|
본명 | 엄인기 (嚴仁基) |
출생 | 1936년 3월 20일 ([age(1936-03-20)]세) |
본관 | 영월 엄씨 (寧越 嚴氏) |
부모 | 아버지 엄재근, 어머니 노재신 |
배우자 | 신성일 (1964년 결혼~2018년 사별) |
자녀 |
장녀 강경아 (1965년생) 장남 강석현 (1967년생) 차녀 강수화 (1970년생) |
친척 |
숙부
엄재욱 이복시조카 강석호 |
종교 | 불교[1] |
학력 |
서울미동국민학교 (졸업) 중앙여자중학교 (졸업)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가정학 / 학사) |
데뷔 | 1956년 '단종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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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배우.2. 데뷔 이전
예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2]부잣집 막내딸과도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중학생 시절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을 떠났고, 임시학교였던 대구연합중학교에 재학했는데, 이때 시장에서 떡장사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모친이 워낙 유명한 배우였기 때문에, 대구 피난 때도 노재신의 딸로 꽤나 주목을 받아 유명했다고 한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여유가 없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 노재신은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차라리 딸이 대학에 낙방하기를 빌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 고대하던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진학의 기쁨도 잠시,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던 엄앵란은 마침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게 된다.[3] 이때 그녀를 눈여겨본 영화감독으로부터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았는데 마침내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하게 된다.
3. 연예인 활동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청춘 영화의 아이콘 그 자체였다. 최초의 학사[4] 출신 배우로 풋풋하고 청순발랄한 이미지를 내세워 신성일과 콤비를 이루어 많은 청춘 영화에 출연하였다. 지금의 연륜 있는 모습만 봐온 세대에겐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엄앵란의 젊은 시절 영화를 보면 날씬한 몸매에 단아한 외모가 눈에 띈다.가족 영화에서는 주로 막내딸 같은 발랄한 역할이나, 액션영화에도 간간히 출연하였다. 활동 당시는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 겹치기로 찍던 시절이라 그가 도대체 몇 편의 영화에 나왔는지 정확하게 모를 정도로 인기있는 배우였으나 1964년 신성일과의 세기의 결혼[5] 이후 영화 배우로의 삶을 정리하고 전업 주부가 되어 내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11대 총선 낙선으로 가계가 곤궁해져[6] 대구에서 비빔밥집을 운영하거나 영화사에서 일하는 등 배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다 90년대부터 아침마당에서 부부문제 상담코너 패널로 활동을 시작,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현재는 각종 프로그램 패널로, 심지어 모 결혼정보회사의 컨설턴트로도 활동 중이다.
21세기 기준으로도 한국 배우 중 TOP에 들 정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다만 연기력으로 본다면 평론가들도 썩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다. 사실 다른 연기력은 치명적일 게 없는데, 선천적으로 음색이 탁하고 성조가 높은 목소리가 큰 단점으로, 후시녹음 시대[7]의 덕으로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는 게 중론. 당시 후시녹음 시대에 성우를 많이 쓰긴 했지만, 자기 목소리로 후시녹음(더빙)을 하는 배우들도 꽤 있어서 작품마다 성우를 썼다가 자기 목소리를 썼다가 하며 목소리가 다른 배우가 많았음에도 엄앵란은 데뷔 이후 한 번도 자기 목소리로 후시녹음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5년 영화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후시녹음을 했다. 이 영화로 1965년 제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때 후시녹음을 한다고 혼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도 점점 동시녹음 영화 시대와 방송드라마 시대가 시작하면서 다시 연기 생활하는 것을 더더욱 생각지 않았을 정도라고.[8] 당시 얼굴에 반흔이 있어 평생 맨얼굴을 남편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고 했다.
배우자인 신성일과 이혼한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실제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이혼을 못하겠다"라는 이야기도 하는 등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결국 남편을 용서하고 신성일이 사망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기혼자들 사이에서는 보살로 대우받고 있다.
그러나 "바람 핀 남편을 용서하라"거나, "나도 이혼을 하지 않고 살았으니 심각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이혼을 하지 말고 버텨야 한다"는 내용의 충고로 많은 이들의 반감과 비난을 샀다.
신성일은 결혼 전 총각시절부터 숱한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는 플레이보이였으며, 다른 여자들과 혼담이 오고간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엄앵란은 그걸 알면서도 그와 결혼했다. (과거의 여성의 삶은 현재와는 많이 다르며, "남자와 한번 사귀면 결혼까지 해야 하는 줄 알았다"와 같은 매우 보수적 관념도 제법 보편적이었다.) 이런 생활은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남성의 성적 자유는 폭넓게 용인되면서 여성에겐 참을 인( 忍)자를 새기며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요구하던 구시대적 사고 안에 갇힌 전형적인 '옛날 여자'의 한계를 보여준다.[9]
2005년 신성일이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됐을 때는 직접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100명에게서 서명을 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일은 구속 2년 뒤인 2007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10]
참고로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 나이보다 너무 들어서인지 젊은 시절에는 성우 고은정이 목소리 대역을 담당했다.[11]
채널A의 한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서 검진을 받다가 유방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돼 부분 절제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허나 실제로는 유선 전이 문제가 발견된 관계로 한쪽 유방을 완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정작 본인은 80살에 가까운 고령이라 암이 생길 수 있다는 발언으로 주위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 사족으로 수술 및 치료 과정을 담은 단독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는데, 남편 신성일의 정성어린 뒷바라지가 잠시나마 주목을 받았다.
2007년 SBS에서 방송된 <칼잡이 오수정>을 끝으로 배우 활동을 완전히 그만뒀고, 이 후에는 예능에만 계속 나오다가 2022년 건강악화로 방송생활을 쉬고 있다.
4. 영화
5. 가족오락관
※ 손미나 아나운서가 진행한 회차는 굵게 표시.- 1995년 1월 27일
- 1995년 9월 27일
- 1996년 1월 24일
- 1996년 9월 25일
- 1997년 2월 12일
- 1997년 6월 18일
- 1997년 12월 31일
- 1999년 7월 28일
- 1999년 11월 17일
- 2000년 10월 5일
- 2001년 3월 3일
- 2002년 1월 12일
- 2002년 9월 28일
- 2003년 2월 1일
- 2004년 8월 28일
6. 기타
- 장녀가 캘리포니아 출신의 미국인 사위와 결혼하여서 두 손녀가 모두 백인 혼혈이다. 첫째 손녀는 한국 이름을 뿌뿌[12]라고 지었고, 둘째 손녀는 엄앵란 본인의 이름을 따서 한국 이름을 '앵두'라고 지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엄마와는 항상 한국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손녀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다.
- 박수홍 횡령 피해 의혹 논란이 터지자 무려 8년 전인 2014년에 속풀이쇼 동치미에 나와서 했던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당시 박수홍은 이 방송에서 큰형에게 모든 재산 관리를 맡기고 있다고 밝혔다. 또 큰형이 빚에 대한 자신의 트라우마를 활용해 큰돈이 들어가는 재테크를 서슴없이 한다고도 했다. 이에 갑자기 "연예계 선배로서 한마디만 하겠다"면서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독립해라"라고 조언을 했는데, 과거에 여자 연예인들이 뭘 모르고 부모에게 모든 수익을 맡기곤 했는데, 그 연예인들이 시집갈 때가 되어 다시 돈을 받게 되자 부모자식도 없이 피 터지게 싸웠던 일들이 많았다고 조언해 줌으로써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 위에서도 보듯이 고생했던 처지였으니, 그걸 도루묵 할 상황에 뒷목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 수많은 겜덕, 스덕들로부터 아침마당을 원수로 만든 원흉이자 직접적인 장본인 중 하나이다. 당시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고 아직 까지도 e스포츠계의 레전드라고 평가받는 임요환을 거진 백수, 게임 폐인 취급을 하여 맹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 나이대 어르신들의 인식을 감안해야 하긴 하지만, 본인도 과거에 천한 취급을 받던 연예인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나게 하는 망언이다. 이 사건으로 아침마당 게시판 항의문 2만 건의 장본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으며, 시간이 꽤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결코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인물이다.
[1]
#
[2]
아버지 엄재근(嚴在槿)은 색소폰 연주자, 어머니 노재신(盧載信)은
배우,
숙부
엄재욱(嚴載旭)은 재즈 연주가.
[3]
요즘으로 치면 영화사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인 셈. 그런데 엄앵란을 본 감독님 왈, ‘너 영화배우 안 해볼래?’
[4]
그것도 유수의 명문대학. 70년대 이전까진
숙명여자대학교가 한국의 여대들 중
이화여자대학교와 더불어 가장 높은 명성을 자랑했다.
[5]
1996년 출간된 자서전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에 따르면 결혼식 이후 한국에 신부가 부케를 던지는 유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로선 드물게 결혼식 장면을 녹화하기도 했다.
웨딩드레스는 절친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제작, 결혼식장 역시 현재까지도 고급 예식장소로 손꼽히는 워커힐이다.
[6]
게다가 젊은 시절의 신성일은 제법 낭비벽이 심한 편이었다. 이후 신성일은 15대 총선에서 다시 낙선했다가 16대 총선에서 삼수만에 당선되었다.
[7]
현장 목소리 녹음 없이 영화 장면을 다 찍고 나서 장면 속 배우의 입모양을 따라 녹음을 하여 소리와 영상을 합쳐 영화를 만드는 방식.
[8]
물론 실제로는 본인의 목소리 때문에 아침방송에서 저절로 생긴 목소리 높은 아줌마 혹은 할머니 캐릭터를 엄앵란 성대모사하면 나오는 '안녕하세요 엄앵란인데~요~~' 캐릭터 배우 캐릭터 설정으로 이어가서 소수의 드라마에 나오긴 했다. 시트콤 '행진'에서 당시 드라마
해바라기로 얼굴과 이름을 알린지 얼마 안된
김정은의 언니 역할도 했었다.
[9]
여자들의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도 남아있었다.
조성민과 이혼한
최진실이 이혼 다툼을 하는 2년여의 시간동안 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했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엄앵란이 한창 활동하던 1960~70년대에는 여배우가 이혼을 하면 아예 은퇴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인식이 나빴다.
[10]
신성일은 구속된 뒤 결혼기념일마다 교도소 화단에서 꺾은 장미꽃을 엄앵란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 처음에 엄앵란은 자신의 팬이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신성일을 면회갔을 때 자신이 보냈다고 말해 알게 되었다고... 이 때 엄앵란은 감동하며 고맙지만 다시는 결혼기념일 선물은 준비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11]
성우를 기용한 경우는 엄앵란만이 아니다. 엄앵란이 배우로 활동하던 60~70년대 당시는 동시 녹음을 할 수 있는 장비나 기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사를 포함한 모든 음성 음향은 후시 녹음이었고, 목소리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비싼 몸값에 스케줄이 바쁜 배우보다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더빙이 전문인 성우를 쓰는 쪽이 여러 모로 나았기 때문. 신성일 같은 경우는 연기력도 그랬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서...
[12]
영어 이름은 플로렌스(Flo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