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23:08:51

즈엉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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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00><colcolor=#DA251D,#e72d24> 베트남 공화국 제4대 총통
즈엉 반 민
楊文明(양문명) | Dương Văn Minh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출생 1916년 2월 6일
띠엔장성 미토시
사망 2001년 8월 6일 (향년 85세)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
재임 기간 제4대 총통
1975년 4월 28일 ~ 1975년 4월 30일
형제자매 남동생 즈엉반늇
자녀 아들 즈엉민둑, 즈엉민탐
딸 즈엉마이
학력 École militaire (졸업)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 (수학)

1. 개요2. 약력3. 생애4. 평가5. 기타

[Clearfix]

1. 개요

베트남 공화국의 제4대 총통. 두옹반민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약력

3. 생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띠엔장성에서 태어나 사이공 프랑스가 설치한 학교에서 공부한 후 1940년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945년에는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그는 포로로 붙잡혔다. 이때 그는 일본 육군 헌병에게 구타당해 치아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후에도 그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다가 1952년 베트남국의 군대인 베트남 국가군에 입대한다.

55년 초 사이공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빈쑤옌을 토벌하던 사이공 전투에서 활약했다.

1955년 베트남국은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는 베트남 공화국군에서 복무를 계속한다. 이때 응오딘지엠이 종교파 세력을 배신하고 무자비한 숙청을 시작했는데, 공화국군 소속이었던 즈엉반민 역시 종교파 토벌에 동원되게 된다. 특히 56년에 있던 호아하오교 토벌전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특별히 즈엉반민이 잘 싸워서 이긴 건 아니었고.그냥 공화국군의 숫자가 호아하오교의 군대의 숫자를 압도해서 승리한 것이다.[2] 하지만 어쨌거나 승전은 승전이었고, 군부에서 그의 지위도 드높아졌다.

1960년 쿠데타 당시에는 쿠데타 진압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쿠데타군에 참여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1963년 그는 CIA로부터 응오딘지엠 정부가 전복되어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통보를 듣고 응오딘지엠을 실각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날 응오딘지엠은 총을 맞아 암살되었으며 이후 군정을 선포하고 군사정부의 수반임을 자처했으나나 즈엉반민은 베트콩과의 대결보다는 화해를 추구했고, 이는 결국 미국이 응우옌카인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응우옌카인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실각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권력은 유지해서 응우옌카인과 권력 다툼을 하기도 하여 자주 정부의 수반에 올랐다가 실각했다가 하다가 1964년 12월 19일 응우옌카인의 쿠데타가 일어나[3] 태국 방콕으로 망명했다. 쿠데타 당시의 미국 CIA의 친분을 이용해 베트남에 돌아가려 했다. 이후 1968년 귀국했고 1971년 대선에서 응우옌반티에우와 대결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한편 베트남 공화국에선 미군이 철수하고 1973년 북베트남 베트콩과 파리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이 협정을 깨고 베트남 공화국을 침공했다. 1975년 4월 21일에는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대만으로 망명했고, 쩐반흐엉 부총통에게 권력을 이양하지만 북베트남과 평화 협정을 북베트남 측이 거절하자 그는 4월 28일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즈엉반민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어떻게든 북베트남군을 막아보려 했지만 베트남 공화국군 장성들은 자살하거나 해외로 망명하고 있었다. 4월 30일 9시 30분경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이런 연설을 한다.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 공화국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 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이후 정오경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독립궁에 진입한다. 북베트남군이 독립궁에 들어가자 즈엉반민은 테이블 주위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 장교는 "당신의 정권은 이미 사라졌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넘겨준다는 거냐"며 일갈했다. 그날 오후 북베트남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트남 공화국 정부는 해체되었다고 선언했다. 남베트남의 마지막 총통으로서 그의 역할은 불과 이틀 만에 끝난 것이었다.

통일 이후에도 베트남에 머물며 8년간 은둔 생활을 해왔고 베트남 정부도 그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 1983년 망명이 허락되어 파리로 이주했다. 1980년대 말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베트남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망명 기간 동안에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것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자 베트남 정부에서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자신들에게 항복했고, 군사 정부 수반일 때도 베트콩과의 화해를 추구해서 딱히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4. 평가

당시 남베트남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프랑스 식민 정부와 지엠이 제공한 것이긴 하지만, 즈엉반민 본인도 유능하다고 보기는 힘든 인물이다. 군인으로써는 평타는 쳤으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러서 남베트남의 혼란에 크게 일조했다.

63년 쿠데타 이후로 구성된 군정 기관에서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응오딘지엠 정권 말기의 전략촌 같은 실정들을 일부 시정하긴 했으나 그게 업적의 전부였다. 민은 스스로가 쿠데타의 주역이었으면서도 군정 내 다른 장군들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응우옌응옥터가 이끄는 민간 임시 정부와의 손발도 전혀 맞지 않았다. 그 민정 수장 자리를 터에게 맡긴 것도 사실 실책이라고 할 만한데, 명목상으로는 지엠 정권의 2인자이긴 했으나 실제 2인자는 지엠의 동생 응오딘뉴였고, 터는 그냥 뉴의 꼭두각시로서 민정을 이끌 만한 지도력이 검증되었다 보기도 힘들었다. 즉 응우옌응옥터라는 인선은 지엠 정권의 폭정을 청산한다는 명분도 깎아먹고, 그렇다고 실제로 민정을 이끌 지도력 확보도 미지수라 실리 역시 챙기기 힘든 나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슷하게 집권한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와 아주 대조되는 모습이다.[4]

심지어 민의 군정은 국외로 망명해 있던 응우옌반비라는 인물을 군인혁명회의 인물 중 하나로 앉혀놓았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1955년 4월 30일 혁명 당시에 쿠데타를 꾸몄던, 즉 베트남 공화국 건국 세력들의 핵심 정적이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군인으로서 지엠 정권의 악행에 대항한다면서, 지엠 정권의 꼭두각시랑, 그 지엠보다 더한 반동주의자를 포섭해 놨으니 명분이 제대로 설 리가. 결국 제대로 돌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민의 정권은 몇 달도 안 되어 응우옌카인의 후속 쿠데타로 무너지게 된다.

5. 기타

55년~56년의 대규모 종교파 숙청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만큼 응오딘지엠 독재 체제 완성의 일등 공신이긴 하지만, 의외로 지엠에게 그렇게 충성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그가 1960년 쿠데타 당시 환멸을 느껴서(disillusioned)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호아하오교 토벌전 당시 회의감을 많이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나중에 지엠의 막장 행각을 보고 후회를 했거나.[5] 63년에 스스로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키 183cm에 몸무게 90kg으로, 당시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키가 매우 컸다. 그 덕분에 빅 민(Big Minh)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 1963년 11월 2일 ~ 1964년 1월 30일, 1964년 2월 8일 ~ 1964년 8월 16일, 1964년 9월 8일 ~ 1964년 10월 24일. [2] 영어 위키백과 즈엉반민 문서에 따르면 레꽝빈 장군이 이끌던 호아하오군의 숫자가 약 3,000명, 공화국군은 약 20,000명이었다. [3] 명목상 수반은 판칵스우였다. [4] 그들과 다르게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의회는 적어도 국민들에게 적당히 통치하고 나중에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했고 이승만 때의 악습을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경제개발 정책을 세워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반면 남베트남의 경우 최소한의 과거 청산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1960년대 내내 쿠데타가 일어나는 불안한 정국으로 갔다. [5] 사실 당시 베트남은 지금보단 불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였고 카톨릭은 소수였다. 당장 응우옌반티우만 해도 원래 불자였다가 나중에 지엠한테 잘보이려고 개종했을 정도로 지엠은 카톨릭만 편애해서 원래 불자거나 무종교인들은 싫어도 출세를 위해서 개종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이런 일로 인해 틱꽝득의 소신공양이 일어났고 쩐레쑤언의 망언으로 지엠 정권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해 없어졌다. 그 후 비카톨릭교도 탄압은 없어졌지만 이미 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