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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I de Asturias | ||
가문 | 아스투리아스 왕조 | |
생몰년도 | 693년 ~ 757년 | |
출생지 | 칸타브리아 | |
사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칸가스 데 오니스 | |
재위 기간 |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 739년 - 757년 |
아버지 | 페드로 | |
배우자 | 에르메신다 | |
자녀 | 프루엘라 1세, 비모라노, 아도신다, 마우레가투( 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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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 3대 국왕.2. 생애
693년 칸타브리아 공작 페드로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아스투리아스 초대 국왕 펠라요의 딸 에르메신다와 결혼하여 프루엘라 1세, 비모라노, 아도신다를 낳았으며, 무슬림 노예인 시살다 사이에서 마우레가투를 낳았다. 739년 파빌라 왕이 곰을 사냥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후 아스투리아스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740~743년 베르베르 대항거로 알안달루스 전역이 혼란해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수 1세는 사모라, 아빌라, 아스토르가, 레온, 시만카스, 살다냐, 아마야, 레벤다, 카르보라리카, 아베카, 세니케로, 그리고 알레산코를 공략하고 그곳에 있는 아랍인들을 주살하고 기독교인들을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후 무슬림들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지역을 완전히 황폐화했다. 이후 이 지역은 인간이 거의 살지 않는, 이른바 '두에로의 사막(Desierto del Duero)'으로 일컬어졌다. 그 대신, 정복지에서 끌고 온 이들을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스 일대에 정착시키면서 이 일대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세바스티안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수 1세는 757년에 자연사했으며 칸가스 데 오니스 시 인근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내 에르메신다도 함께 안장되었다고 한다. 사후 장남 프루엘라 1세가 아스투리아스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