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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III de Asturias | ||
가문 | 아스투리아스 왕조 | |
생몰년도 | 848년 ~ 910년 10월 20일 | |
출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오비에도 | |
사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사모라 | |
재위 기간 |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 866년 - 910년 |
히스파니아의 렉스 | 906년 - 910년 | |
아버지 | 오르도뉴 1세 | |
어머니 | 무니아 또는 누냐 | |
형제 | 베르무두, 오도아리오, 프루엘라, 누뇨 오도녜즈 | |
배우자 | 팜플로나의 히메나 | |
자녀 | 가르시아 1세, 오르도뉴 2세, 프루엘라 2세, 곤잘로, 라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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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 13대 국왕.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e rex)'를 칭한 최초의 군주이다.2. 생애
848년경 오스투리아스 왕국 12대 국왕 오르도뉴 1세와 무니아 또는 누냐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베르무두, 오도아리오, 프루엘라, 누뇨 오도녜즈가 있었다. 853년 아버지에 의해 갈리시아 총독에 선임되었고, 866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스투리아스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루고 백작 프루엘라 베르무데즈가 반란을 일으키자 알라바로 피신했지만, 1년 후 카스티야 백작 로드리고의 도움으로 프루엘라 백작을 처단하고 오비에도에 돌아왔다. 867년 에일로 백작이 알라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라바로 진군해 그곳 주민들을 복속시키고 에일로를 유폐시켰다.이리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알폰수 3세는 후우마이야 왕조가 내란에 시달리는 틈을 타 868년부터 레콩키스타에 착수했다. 그가 파견한 비마라 페레스 백작 휘하의 아스투리아스군은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그곳에 인구를 이주시켰다. 871년에는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 877년,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Adefonsus Hispaniae imperator(아돌포수스 히스파니에 임페라토르)'라는 문구가 새겨진 화폐를 주조했다.
878년, 후우마이야 에미르 무함마드 1세의 아들 알 문디르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공했다. 알 문디르 본인은 레온으로 진군했고, 살리드 이븐 기남은 오르비고로 진격했다. 한편 또다른 무슬림 별동대는 코임브라와 포르투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3세는 이에 맞서 살리드의 부대를 폴보라리아 전투에서 격파했고, 알 문디르의 군대를 발데모라 협곡에서 기습해 격파했다. 여기에 헤르메길두 구티에레스 백작이 지휘하는 아스투리아군 역시 포르투와 코임브라를 침공한 무슬림군을 대파했다. 무함마드 1세는 연이은 참패에 깊은 충격을 받고 배상금을 지불할 테니 3년간 휴전하자고 제안했고, 알폰수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알폰수 3세와 구티에레스는 코임브라 일대의 아랍 정주민인 바누 다니스를 축출하고 갈리시아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켰다. 여기에 브라가, 비세우, 라메고 일대에도 아스투리아스, 바스크, 레온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이주했다. 한편 무함마드 1세는 함대를 최대한 끌어모은 뒤 육상과 해상에서 갈리시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후우마이야 함대는 항해 도중에 폭풍으로 파괴되었고, 육군은 과다아나 강가의 옥시퍼 산에서 알폰수 3세의 기습 공격으로 참패했다.
883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은 알폰수 3세와 동맹을 맺은 바누 카시의 영역인 사라고사를 침공했다. 알폰수 3세는 아들 오르도뉴를 파견해 바누 카시를 돕게 했다. 양자는 서로의 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다가 인질을 교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884년 무함마드 1세와 알폰수 3세 모두 내부의 반란에 시달리자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는 형제 베르무두, 오도아리오, 프루엘라, 누뇨 오도녜즈가 아스토르가에서 여러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수 3세는 이 반란을 어렵게 진압한 후 형제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901년,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흐메드 이븐 알 키트(Ibn al-Qitt)는 스스로 마흐디를 칭하면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아흐메드 벤 모아비아(Ahmed-ben-Moavia) 휘하 무슬림군에게 사모라 침공을 맡겼다. 알폰수 3세는 즉시 사모라 구원에 착수했고, 양군은 그해 7월 사모라 성벽 앞 평원에서 나흘 동안 격전을 치렀다. 양측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아랍 문헌에는 '사모라의 날'이라고 특별히 지칭할 정도였다. 이흐메드 벤 모아비아는 이 전투에서 패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성벽에 내걸렸다. 906년, 알폰수 3세는 정식으로 자신을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e rex)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알폰수 3세의 말년은 매우 암울했다. 장남 가르시아 1세는 카스티야인 무니오 누녜즈 백작의 딸 누냐와 결혼한 뒤 무니오의 선동에 따라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엔 알폰수 3세의 또다른 아들들인 오르도뉴와 프루엘라, 그리고 왕비인 히메나도 가세했다. 알폰소 3세는 반란군에게 붙잡힌 뒤 왕위는 유지했지만 실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산 살바도르 데 발데디오스 인근의 볼리데스 마을로 보내졌다. 세 아들은 왕국의 수도를 아스투리아스에서 레온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나라의 이름 역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레온 왕국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910년 12월, 알폰수 3세는 가르시아 1세의 허락을 받고 사모라에 대한 원정을 떠났다.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던 그는 곧 중병에 걸려 12월 20일에 사망했다. 사후 아스토르가 시로 옮겨져 그곳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왕국은 세 아들 가르시아 1세, 오르도뉴 2세, 프루엘라 2세에 의해 각각 레온 왕국, 갈리시아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 삼분되었다.
3. 가족 관계
- 히메나(? ~ 912):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에네코이츠라고 추정하고, 또다른 학자들은 가르체아 에네코이츠와 오르티 가르세이츠 재위 초기에 활동했던 팜플로나 기사 가르체아 히메네스의 딸이라고 추정한다. 이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