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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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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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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루 1세 | 오르도뉴 1세 | 알폰수 3세 | 프루엘라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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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II de Asturias | ||
가문 | 아스투리아스 왕조 | |
생몰년도 | 760년 ~ 842년 3월 20일 | |
출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 |
사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오비에도 | |
재위 기간 |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 791년 - 842년 |
아버지 | 프루엘라 1세 | |
어머니 | 알라바의 무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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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 9대 국왕.2. 생애
760년경 아스투리아스 왕국 4대 국왕 프루엘라 1세와 가스코뉴의 바스크 영주 로페의 딸 무니아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본래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지만, 768년 프루엘라 1세가 형제 비모라노를 살해한 것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 뒤 칸타브리아 공작 프루엘라의 아들 아우렐리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에 있는 사모스 수도원에서 교육받다가 실루 왕의 치세 때 궁전에 들어와서 행정을 맡았다.783년 실루 왕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실루의 아내 아도신다는 알폰수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알폰수 왕자가 프루엘라 1세를 살해했던 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여긴 귀족들은 알폰수 1세의 사생아인 마우레가투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수는 알라바로 망명했고, 아도신다 왕비는 성 사도 요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 후 알라바에서 조용히 지내던 알폰수는 791년 마우레가투의 뒤를 이어 아스투리아스 왕이 되었던 베르무두 1세가 유수프 이븐 부흐트( Yusuf ibn Bujt)의 무슬림군에게 부르비아 전투에서 참패한 뒤 퇴위했을 때 새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오비에도로 옮겼다.
794년, 후우마이야 왕조 아미르 히샴 1세의 지시를 받든 아브드 알 말리크 빈 아브드 알 와히딘 무가이스(Abd al-Málik ibn Abd al-Wáhid ibn Mugaith)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 오비에도로 진격했다. 무슬림군은 오비에도에 순조롭게 입성한 뒤 오비에도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건물을 파괴했다. 알폰수 2세는 장병들을 이끌고 발란다스 교구에 있는 로스 로도스 계곡에 매복했다가 귀환하던 무슬림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아브드 알 말리크 빈 아브드 알 와히든 무가이스를 비롯한 다수의 무슬림이 전사했다.
795년, 히샴 1세는 형제 아브드 알 카림 이븐 아브드 알 와히드 이븐 무가이스(Abd al-Karim ibn Abd al-Wáhid ibn Mugaith)에게 1만 기병을 맡겨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재차 공격하게 했다. 여기에 갈리시아 방면 적군이 아스투리아스에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또다른 분견대를 갈리시아로 파견했다. 알폰수 2세는 아스토르가 인근에 진을 치고 주민들을 피신시킨 뒤 라스 바비아스에서 무슬림 파라흐 이븐 키나나가 이끄는 무슬림 선봉대 4,000명과 격돌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오비에도에 또다시 입성했지만, 겨울이 찾아오면서 많은 병사가 동상에 걸리자 산 속에 숨은 알폰수 2세를 추격하는 것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갈리시아로 파견된 또다른 무슬림 부대는 그 일대를 황폐화하고 귀환하다가 갈리시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패퇴했다.
무슬림들의 일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알폰수 2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795년, 아스투리아스 왕국 사절단이 툴루즈로 가서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이자 아키텐 국왕인 루도비쿠스 1세와 접견하여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 후 796년 봄에 다른 사절이 프랑크 궁정에 방문했고, 겨울에도 한 차례 찾아왔다. 카롤루스 대제는 아스투리아스 사절단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단으로 규정된 양자설(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가졌고, 하느님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를 아들로 입양했다라는 내용의 신학론)을 함께 배격하기로 했다.
796년 히샴 1세가 사망한 뒤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심각한 내전이 발발했다. 알폰수 2세는 이 때를 틈타 레콩키스타를 단행해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798년 리스본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으며, 황폐화된 포르투를 재건했고, 무슬림의 치하에서 노예로 지내던 기독교인들을 대거 구출해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로 이송했다. 또한 오비에도에 궁정을 세우고 여러 교회와 건물들을 재건했다.
중세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801년에서 808년 사이에 모종의 이유로 귀족 집단의 압력을 받아 아브라냐 수도원에 은거해야 했다. 그러다 테우다노(Teudano)라는 이름의 귀족 덕분에 복위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을 서고트 왕국과 연계시켰다고 한다. 엘비신데 연대기의 익명의 저자는 그가 교회와 궁전 모두에서 서고트 왕국의 질서를 복원했다고 밝혔다.
816년 무슬림들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침략하자 오론 강에서 저지했으며, 825년 안세오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멸했다. 또한 830년대에 콤포스텔라의 한 은둔자가 대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 무덤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고 불리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유럽 각지에서 이 무덤을 순례하기 위해 몰려온 순례자들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알폰수 2세는 모종의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알려졌으며, 이 때문에 '순결한 자(el Casto)'라는 별칭이 붙었다. 842년 3월 20일 오비에도에서 사망한 뒤 오비에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알폰수 2세의 친척 네포시아누와 베르무두 1세의 아들 라미루 1세가 왕위를 놓고 맞붙은 끝에 라미루 1세가 승리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