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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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7대 군주 Alexander II Zabinas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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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150년경 |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23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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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Alexander II Zabin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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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안티오코스 7세(아버지)?[1] | |||
참전 | 셀레우코스 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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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17대 군주. 데메트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수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하고 프톨레마이스 일대를 제외한 제국 전역을 통치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8세에 의해 폐위되었다.2. 생애
기원전 150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프로토르코스'라는 이름의 이집트 상인의 아들로, 기원전 128년경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질 때 데메트리오스 2세가 클레오파트라 2세를 돕기 위해 멀리 떠난 틈을 타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로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자비나스'(Zabinas)는 '시장에서 팔리는 노예'라는 의미로, 정체가 밝혀진 뒤 시리아인들이 멸칭으로 불렀다.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시리아 북부에 상륙한 뒤, 안티오키아로 접근했다. 당시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무능한 통치에 질릴대로 질려 있었기에, 어떤 왕이 오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에 무혈 입성한 뒤, 라오디케아와 타르수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킬리키아에서 세력을 유지했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도 그에게 충성했다. 기원전 127년 8월과 126년 8월 사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자, 클레오파트라 2세는 국고에 들어있는 금화를 전부 가지고 가서 데메트리오스 2세와 합류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2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간의 내전이 벌어져 수년간 이어지다가 기원전 126년 초 다마스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로 달아났지만, 거기에 머물고 있었던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배를 타고 망명하려 했지만, 티레 부근에서 붙잡혀 피살되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가 가지고 있었던 영역을 모조리 점령했고, 기원전 125년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를 배포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두 아들 셀레우코스 5세, 안티오코스 8세는 프톨레마이스 일대에서 왕을 자칭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파르티아로부터 안티오코스 7세의 유해를 받아낸 뒤 장례를 치러서 민중의 찬사를 받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친절하고 관대한 본성을 지녔으며, 말투와 태도가 온화하여 평민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그의 시대에 주조한 동전에 이집트의 주요 양식 중 하나인 '콘누코피아'(cornucopiae: 풍요의 뿔)가 묘사되었는데, 이는 왕과 이집트 공주의 결합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128년경, 안티파트로스, 클로니오스, 아에로포스가 라오디케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곧 반란군을 물리치고 도시를 탈환했다. 이 반란은 콜레오파트라 테아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정확한 사정은 확인하기 어렵다.
이보다 앞서, 유대 왕국은 안티오코스 7세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에 굴복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에 공물을 매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투 도중 전사한 뒤 공물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고, 대제세장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가 응징하려 하자, 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려 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2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자, 요한 히르카노스는 그의 동전 위에 그리스 문자 'alpha'를 새겼다. '알파'는 셀레우코스 왕의 이름의 첫 글자로, 학자들은 이 글자가 알렉산드로스 2세를 가리킨다고 여겼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가 날로 쇠락해져서 유대 왕국에 간섭할 여력이 없다는 게 분명히 드러나자, 히르카노스는 '알파' 글자를 지웠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집트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 2세와 화해했고, 자신의 딸 트뤼파이나를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위가 된 안티오코스 8세를 지원하고자 이집트군을 파견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고, 기원전 123년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적군에게 붙잡혀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싸움을 회피하고 야밤에 제우스 신전의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나려 했지만, 대중에게 발각되어 쫓겨났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로 도주했지만 신전을 약탈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민들이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고, 나중에 붙잡혀서 안티오코스 8세에게 끌려간 뒤 처형되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안티오키아로 달아난 후 재차 전투를 치르려 했으나, 군비를 마련할 길이 없자 제우스 신전을 약탈하게 했지만,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안티오키아에서 쫓겨나 산속으로 도주하다가 산적에게 붙잡힌 후 안티오코스 8세에게 끌려갔고, 곧 처형되었다고 한다.
[1]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