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04:26:56

안토니오 아빠스

<colbgcolor=#000><colcolor=#fff> 안토니오 아빠스
Ἀντώνιος | St. Anthony the Great
파일:attachment/st_anthony_great.jpg
출생 251년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사망 356년 (향년 105세)
이집트 콜짐 산
직업 수도자, 수도원장
축일 1월 17일 (교파 공통)
1. 개요2. 생애3. 여담4. 일화와 어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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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세기· 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출신 수도자이자 은수자. 고대 라틴어로 '안토니우스'라고도 불리며, ' 아빠스'는 '수도원장'이라는 뜻의 경칭이다. 파도바의 안토니오와 구분해 (大) 안토니오(Anthony The Great)라고도 불리며, 축일은 교파 공통으로 1월 17일이다.[1]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은수자는 아니지만, 초대 교회의 가장 모범적인 은수자로서, 느슨한 형태로나마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회를 세웠기에 "모든 수도승의 아버지" 또는 "수도 생활의 원조"로 불리며, 또한 사막에서 생활했다는 점에서 "사막의 성인(聖人)"이라고도 불린다.

상징물은 ' 두루마리 성경', 안토니오 십자가로도 불리는 '타우( Τ) 십자가' 그리고 ' 돼지'이며, 가끔 돼지와 연관해 ''도 상징물로 쓰인다.

2. 생애

251년, 이집트의 어느 부유한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은 부유했지만, 어린 시절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실질적으론 문맹에 가까웠다고 한다.

18~20살 무렵 안토니오는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과 단둘이서 살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오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깊게 고민했는데, 우연히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ㅡ 「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21절 (가톨릭 새 번역) #
복음 말씀에 크게 감명받은 안토니오는 부모님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을 마을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친분 있는 처녀들에게 여동생의 양육을 맡기고는, 마을 인근에서 수도자로 살기 시작했다.[2] 그는 자기 손으로 일하여 생계를 꾸렸고, 부단히 기도와 성경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성경의 내용대로 살기 위해 성경을 아예 통째로 외우고 다닐 만큼 열성을 보였는데, 이에 시기한 악마는 온갖 환상을 통해 유혹과 위협을 펼쳤지만 안토니오는 단식 기도로 역경을 이겨냈다. 35살 무렵에는 세속으로부터 더 떨어진 환경을 열망해,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요새를 거처로 삼고 은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때에도 악마는 온갖 환영과 유혹으로 안토니오를 괴롭혔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기이하고도 환상적이라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관련 작품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305년, 안토니오가 54살에 접어들 즈음, 안토니오의 은수 생활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선 그의 집문을 강제로 부수고(...)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를 계기로 안토니오는 많은 사람에게 은수 생활을 권했고, 그렇게 안토니오에게 모인 은수자들은 사막에서 최초의 수도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이때 수도 공동체는 평소에는 따로따로 살다가 미사나 안토니오의 설교가 있을 때 모이는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였다.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에 의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는 직접 현장을 찾아가 동료들을 위로하였고, 박해가 끝나자 그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안토니오는 몇몇 은수자 형제들과 함께 홍해 근처 콜짐 산(Mount Colzim)으로 이동하여 밭을 경작하고 본격적으로 수도회를 조직했는데, 콜짐 산에 설립한 수도원은 오늘날에도 "성 안토니오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영문 위키백과

콜짐 산 수도원에서 은수 생활을 계속하던 안토니오는 특별히 88세 때 알렉산드리아를 다시 찾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를 도와 아리우스파 이단을 단죄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안토니오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으며, 또한 안토니오와 같이 생활하며 성 아타나시오는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아리우스파에 맞서 아타나시우스파를 변호하는 임무를 완수한 뒤, 다시 산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에 열중했는데, 그 와중에도 많은 사람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도를 청했다. 그러다가 356년, 105살에 이르러 안토니오는 금욕 생활에 집중하라는 권고와 몇 가지 유언을 남기고 수도 형제들 곁에서 죽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수도 형제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를 묻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라센들에 의해 안토니오의 무덤이 훼손될까 염려해, 그로부터 5년이 지난 361년에 그의 유해를 찾아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장했다.

3. 여담

  • 상술했듯, 안토니오와 친분이 있던 주교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가 죽은 다음 『안토니우스의 생애』라는 전기를 썼는데, 이 전기가 당대 지중해 인근 여러 국가에 퍼지면서 서양 수도승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현재도 이 전기는 안토니오 아빠스에 관한 최우선 자료로 평가되며, 국내에는 베네딕도회 허성석 신부가 번역해 「사막의 안토니우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안토니오의 전기와 더불어, 안토니오가 남긴 금언과 직접 쓴 편지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4. 일화와 어록들

안토니우스의 명성이 황제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로부터 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쓰듯이 안토니우스에게 편지를 쓰며 답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의 서한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것을 받았다고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편지를 쓰기 전이나 후나 안토니우스에게 그들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안토니우스에게 서한들을 보내왔을 때, 안토니우스는 수도승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어째서 여러분은 황제가 우리에게 편지를 쓴다고 놀라시오? 한 인간일 뿐이오! 오히려 하느님이 사람들을 위해 율법을 쓰시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놀라십시오.”

안토니우스는 그러한 종류의 서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 서한들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도승들이 그에게 답신을 보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들은 황제들도 그리스도인들이며, 거절함으로써 그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수도승들에게 서한을 읽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답신을 썼는데, 그는 황제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기에 기뻐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조언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미래의 심판을 기억하며 그리스도만이 참되고 영원한 왕이심을 인정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의 서한을 받고 기뻐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81.1~6 [3]
한번은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몇몇 사람의 요청에 승복하게 되었고, 사령관이 그에게 산에서 내려와 달라고 집요하게 간청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내려갔고, 구원에 유익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계된 몇 마디 말을 하고서 서둘러 떠났습니다.

사령관이 안토니우스를 불러 잠시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더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대답했고 멋진 예를 들어 그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 물고기가 마른 땅에 오래 머무르면 죽는 것처럼 여러분 사이에서 지체하고 여러분과 함께 오래 머무르는 수도승은 힘을 잃지요. 따라서 물고기가 서둘러 바다로 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둘러 산으로 되돌아가야 하지요. 우리가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적인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지요.”

이 말을 더 들은 사령관은 탄복하며,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85.1~5 [4]
사막에서 맹수를 사냥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 아빠스가 형제들과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때때로 형제들에게 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이해시키기를 바라며 말했다. “당신 화살을 두고 잡아당기시오.” 그러자 그가 그렇게 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말했다. “더 잡아당기시오.” 그가 더 잡아당겼다. 그에게 다시 말했다. “잡아당기시오.” 그 사냥꾼이 안토니우스에게 대답했다. “너무 잡아당기면 활이 부러집니다.” 안토니우스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의 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정도를 벗어나 활을 당기면 부러져 버리지요. 그래서 때로는 형제들을 묵인할 필요가 있지요.” 이 말에 그 사냥꾼은 통회했고 안토니우스에게 큰 감명을 받고 떠나갔다. 형제들 역시 굳건해져서 그들의 거처로 되돌아갔다.[5]
『교부들의 금언』, 안토니우스의 금언, 13장 [6]
몇몇 형제가 안토니우스 아빠스를 방문해 그에게 말했다.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저희가 어떻게 해야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 안토니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 성경 말씀을 경청들 했소? 그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그들이 대답했다. “사부님, 당신께도 어떤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안토니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복음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마태 5,39)라고 말하지요.” 그들이 안토니우스에게 말했다. “저희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안토니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다른 쪽 뺨을 댈 줄 모른다면 적어도 맞는 것을 견디시오.” 그들이 원로에게 말했다. “저희는 그것조차 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말했다. “여러분이 이것조차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여러분이 받은 악을 악으로 되갚지 마시오.”( 로마 12,17) 그들이 말했다. “저희는 그렇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자기 제자에게 말했다. “이분들께 을 내드려라. 이들은 병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이것을 할 수 없다면, 다른 것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기도해야 하오.”
『교부들의 금언』, 안토니우스의 금언, 19장 [7]
안토니우스 아빠스가 말했다 “사람들이 실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미치지 않은 누군가를 보게 되면 ‘넌 미친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단지 그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교부들의 금언』, 안토니우스의 금언, 25장 [8]

[1] 콥트 정교회만이 이집트력을 써서 축일 날짜가 다르다. [2] 이 같은 안토니오의 극적인 회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 안토니우스에 관해서 듣기로도, 우연히 그에게 닥친 복음서 낭독 중에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구절이 나왔는데, 거기서 읽히던 구절을 바로 자기한테 건네진 권고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 신탁을 받고서 그 사람은 즉석에서 당신께 회심하였다는 것입니다. …" (「고백록」 8권 12.29, 성염 역) [3]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5, p.160~161 [4]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5, p.166~167 [5] 이 일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2부 2편 168문 2절에서 조금 다른 형태로 인용되었다. “Whether there can be a virtue about games?” [6]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5, p.185~186 [7]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5, p.188~189 [8]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5,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