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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Scottish Enlightenment)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발현해 넓게는 19세기 초 계몽주의 사조. 당대 스코틀랜드 대학을 나온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 교수 등 다양한 인사들이 동참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1], 조지프 블랙, 대니얼 러더퍼드, 애덤 퍼거슨 등이 있다.
보통 계몽주의라고 하면 프랑스 계몽주의를 일컫지만, 넓은 의미로는 프랑스 계몽주의로부터 지역적으로 파생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독일 계몽주의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2]
정신적으로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진행된 스코틀랜드 르네상스에서, 학문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17세기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퍼진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Cambridge Platonists)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성을 신이 수여한 인간 지성의 가장 큰 뛰어난 울림이며, 이성을 사용해 분쟁을 조정하고 논쟁을 벌임으로서 진리를 탐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세계는 물리적 실재만이 아닌 인간의 감각과 본능을 사용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는 철학적 경험주의를 펼쳤으며, 종교적 관용을 옹호해 후대에 광교회의 학문적 모태가 되었다. 또 토머스 홉스의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 행위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해 인간 내부의 본능적이고 내재적인 도덕과 선함을 발견하고자 했다.
2. 배경
18세기 스코틀랜드는 전 국민의 문맹률이 25%일 정도로 유럽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다. 또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여 18세가 초만 해도 잉글랜드에 비해 확연히 뒤떨어졌던 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아메리카 및 프랑스와의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그 결과 담배 산업과 은행업 등이 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간접자본이 건설되었고, 이렇게 경제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에 대학은 옥스브리지 단 두 곳밖에 없었던 것에 반해 스코틀랜드는 5개의 대학을 갖추고 있었으며, 법적으로 귀족과 지주 등 상류층들에게 필수적으로 초중등교육을 이수하게 했다.[3] 이런 학교들에서는 청교도 교리에 기반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수학, 경제학, 과학 등 실용적인 학문들을 위주로 커리큘럼을 편성해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그리고 한창 떠오르고 있던 계몽주의 서적 및 자료들이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시작해 애버딘 대학교, 글래스고 대학교,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등에 다니는 학생들과 교수들, 그리고 동문들을 통해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자연스레 보급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에서 벗어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덕분에 수많은 학생들과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사상이 퍼져 나갈 수 있었다.이를 계기로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살롱처럼 스코틀랜드 명사회 같이 새로운 지식과 견해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상호적인 교류를 주고 받으면서 건축학, 고고학, 공학, 경제학, 의학 등 다방면의 학문적 성장을 이룩하고, 지대한 발전을 일구었다.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학문은 유럽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당시 신흥 국가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 계몽주의와 이 영향을 받아 성립한 미국 독립선언문, 미국 헌법에도 밀접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학문별 양상
3.1. 철학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전적으로 경험주의에 기반을 둔다. 당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 경험주의의 본산이었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적 경험주의를 계승해 성립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첫 경험주의자는 도덕철학자인 프랜시스 허치슨이었는데, 학문적으로 이전 시대의 케임브리지 플라톤학파 철학자인 앤서니 애슐리쿠퍼(Anthony Ashley-Cooper)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허치슨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도덕 감정'이 존재하며, 이 도덕 감정은 인간이 이성이 아닌 본능적 감각과 경험의 기반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고 보았다. 또한 결과주의적인 입장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주장하며 공리주의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데이비드 흄이 경험론과 인식론적 회의론을 정립함으로서 스코틀랜드 철학 사조의 기반을 확립했으며, 이후 아담 스미스 등 후대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조 뿐 아니라 제레미 벤담 등 이후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18세기 미국의 지성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18세기 하버드 대학교의 도덕철학 강좌에서는 그의 철학을 교재로 사용해 강의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 등에도 반영된 '인간에게 결코 박탈될 수 없는 도덕과 권리'에 대한 개념은 그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본다.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토머스 리드 등 스코틀랜드 상식적 실재학파들은 흄이나 버클리 류의 회의론, 유아론을 반박하고, 데카르트의 관념론에도 반대하며 '상식'이라는 입장에서 실재론을 옹호했다. 그들은 흄과는 달리 인간이 본능적이고 당연하게도 믿고 정당화할 수 밖에 없는 기본적인 감각과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도덕적으로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제1원칙'이고, 이러한 '상식'을 기반으로 이후의 모든 원리와 도덕 체계가 파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외부 세계가 실재로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의 직관은 단순한 감각적 정보의 수용이 아닌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형이상학적, 물리적 구조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요소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18세기 신대륙(미국)의 지성계를 장악하다시피 해, 이후 미국의 헌법 정신과 실용주의 철학,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로 대표되는 종교적 보수 성향[4]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의 주장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듀갈드 스튜어트에 의해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초기 형태의 근대적 미학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탄생했다. 농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헨리 흄(Henry Home)은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고, 또 그러한 목적과 연관되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예를 들어 인간이 거주하는 집은 인간에게 여러 편안함과 안락함 등 장점을 가져다줄 수 있고 이는 곧 인간을 즐겁게 만들기에, 집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타심이나 관용 등 긍정적인 의도에 의해 자신 또는 타인을 이롭게 함으로서 쾌락[5]이 충족된다면, 이는 인간을 좋게 만들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볼 수 있다.
3.2. 문학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제임스 보스웰이다. 그는 전기나 여행기 등을 주로 쓰던 사람인데, 당시 전기를 저술할 때 그 사람의 공적 영역에서의 측면을 주로 다루며 명예나 지위 등을 중시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 사람이 쓴 일기를 인용하는 등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사항들을 다루며,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면모들을 중시했다. 이런 글쓰기 방식은 경험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또 다른 면에서, 스코틀랜드 고대 문학들에 대한 재발견도 이루어졌다. 앨런 램지 등 초기 자연주의 시인들은 목가적, 토착적 분위기에 관심을 가졌고 신고전주의적 웅장함보다는 인간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농촌적 태도를 더 중시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윽고 고대 스코틀랜드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고대 음유시인들의 작품들이 재발견되고[6] 번역되기 시작했다. 또 중근세 스코틀랜드 문학 양식을 근대 문학적 양식으로 변환하는 작업 또한 이어졌다. 이는 고대 전설과 서사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낭만주의 사조, 특히 괴테나 헤르더 등 독일 낭만주의의 중요한 기원이 되었다. 또, 수사학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져 주로 키케로 등 고대 수사학 작가들의 이론과 현대 수사학 이론들을 통섭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18세기 중후반부터는 스코틀랜드 낭만주의 사조가 등장한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시인은 스코틀랜드 국민시인인 로버트 번스로, 이들은 영어 대신 스코틀랜드어, 특히 방언을 선호했으며 이상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농촌, 토착적 분위기가 살아있는 풍경을 노래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민요와 고전을 수집하기도 했다.
3.3. 경제학
자세한 내용은 애덤 스미스 문서 참고하십시오.3.4. 신학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휴 블레어(Hugh Blair)로, 그는 후일 성공회 광교회의 기원이 될 국교회수호주의자(Latitudinarians)였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교리에 대해 탐구할 때 진리를 탐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보았고, 그러한 입장에서 교회 내 반대 의견을 탄압하는 것을 비판하고 교리의 자유, 신자들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렇게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에서 칼뱅주의의 과격한 인간의 전적 타락, 원죄 교리를 비판했다. 그들은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재능을 발전시킴으로서 선함을 유지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후일 자유주의 신학의 맹아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3.5. 사회과학과 인류학
현대의 비교언어학, 역사언어학의 창시자인 제임스 번넷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이 사는 환경과 주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이에 적합하게 언어 능력을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는 여러 부족들의 언어를 연구한 결과, 문명의 수준이 낮을수록 단순한 개념을 표현해야 하기에 단음절 단어들이 많고 문명의 수준이 높을수록 복잡한 개념을 표현해야 하기에 다음절이 많아진다는 기존의 통설을 반박하고, 이러한 초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언어들에서도 개념이 복잡하건 단순하건 상관없이 다음절 단어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로 그는 초기 문명 수준에서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명확한 의사소통이 중요하기에, 불필요한 음절이 첨가되거나 중복이 더해졌으며, 그 결과 모음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독일어나 영어와 같은 단어들은 문명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중복이 제거되어 좀더 명료한 의사소통이 필요해 졌기에 더 다양한 뉘양스의 말을 표현할 수 있게 되고, 모음의 수가 줄어들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래 고대 그리스어에 관심을 가졌던 번넷은 그리스어야말로 가장 완벽한 언어, 가장 많은 감정과 의도, 뉘양스를 포함할 수 있는 언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간의 언어가 단일한 곳에서 진화했다고 보았는데, 이는 곧 인간이 단일한 곳에서 기원해 언어가 점점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에서, 번넷은 진화론의 초기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7]애덤 퍼거슨은 사회학의 초기 창시자들 중 한명이다. 그는 허치슨의 경험주의와 이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가지고 있고 또 사회에서 발현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능력은 바로 유대감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유대감과 이타심을 기반으로 인간은 서로서로를 돕고 공동체를 결성해 살아간다고 보았다. 즉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인간 생활의 기본은 공동체 의식과, 이성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당한 질서이자 권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의 상업주의를 분석하면서, 물질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인간의 선천적 덕성을 쇠퇴시킨다고 보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의 멸망과 유사한 인류 사회의 쇠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 역사를 자연사와 사회사의 두가지 면으로 나누면서, 자연사적 측면은 하느님이 인간을 포함해 만물을 창조한 것을 의미하며, 사회사는 그 인간이 스스로 사회를 결성하고 살아가면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 보았다. 또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면서 우리의 완전한 독립성을 일부 제한받는 대신, 안전할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을 수 있고, 사회적 혼란은 문명의 쇠퇴와 붕괴를 가져오기에 인간은 원초적인 독립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정당한 권위와 질서 안에서 사회적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자연적 '진보'야말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궁극적 권리이며, 살아가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 사회를 이끌고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몽테스키외 등 대륙 계몽주의자들도 가지고 있던 견해이며, 이기심에 대한 견해는 아담 스미스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아담 스미스와는 달리 그는 경제적, 상업적 축척보다는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혁신을 더 강조했다.
법학자이지만 철학자로 더 잘 알려진 존 밀러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정치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이 발전을 추동하며 경제적 축적을 이루고, 궁극적으로 사회적 부의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견해에 동의하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계급과 구별은 이러한 경제적 측면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즉 인간 사회의 경제적 측면, 생산양식에 따라서 인간 사회의 요소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그가 살던 당시의 영국 정부체제, 즉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분석하며 인간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립된 가장 진보된 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3.6. 수학과 과학
매클로린 급수와 오일러-매클로린 공식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 수학자 콜린 매클로린, 모세관 현상을 발견하고 세계 최초로 공기펌프를 통해 인공 얼음 생성에 성공한 과학자 존 레슬리,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차액지대론의 기초가 되는 이론을 주장한 농학자 제임스 엔더슨, 잠열과 비열 개념을 발견하고 최초의 화학식을 사용한 화학자 조지프 블랙, 암석이 대홍수와 같은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급격히 형성되는 것이 아닌 자연적 요인에 의해 장기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한 지구과학자 제임스 허턴, 근대적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제임스 와트, 질소를 발견한 화학자 대니얼 러더퍼드 등 수많은 유명한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이 스코틀랜드의 개방적인 지적 토양 하에서 학문을 펼쳤다. 스코틀랜드의 과학 연구는 귀족이나 왕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자유로운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지식인들의 상호 네트워크를 통해 지적 교류를 함으로서 발전시켜나가는 구조였기에,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이러한 스코틀랜드의 과학적 기반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이후 시대인 19세기에도 계속되어, 열역학 제2법칙을 정의한 사람이자 켈빈 온도라는 이름의 당사자인 열역학자 윌리엄 톰슨[8], 전자기학의 아버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세계 최초로 보온병을 발명한 제임스 듀어, 세계 최초로 공기압 타이어를 발명한 존 보이드 던롭, 스털링 기관으로 유명한 로버트 스털링, 현대적인 피하 주사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우드 등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수많은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존재한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의학 방면에서도 세계 최고급의 명성을 자랑했다. 영국 최초의 의과대학 중 하나인 에든버러 왕립의과대학(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Edinburgh)이 17세기 설립된 이래 수많은 엘리트들이 의학을 공부하고 또 연구했다. 위에서 나온 인물들 중에서도 의학 학위를 가진 이들이 많았고, 엘리트들 사이에 형성된 지적 네트워크는 이러한 의학 연구의 흐름을 더욱 부추겼다. 덕분에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프랑스 의학과 함께 세계 의학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심지어는 진화의 법칙을 발견한 찰스 다윈도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부에 다녔었을 정도이다.
[1]
데이비드 흄이 계몽운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으로만 따지면 '계몽주의'에 속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철학으로서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데, 데이비드 흄은 철학적으로는 이성보다 정념(감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으로 분류할 때는 계몽주의보다 경험주의로 분류된다.
[2]
애초에 프랑스 계몽주의 자체가 영국의
뉴턴,
로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어난 프랑스 엘리트들의 지적 사회 운동이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다시 프랑스 계몽주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운동인 것.
데이비드 흄이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
반면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 같은 상류층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를 통해 가정교육을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
[4]
인간에게 당연하게도 존재하는 상식적 감각이 존재한다고 보기에, 필연적으로 기독교와 연결된다
[5]
여기서 쾌락이란 에피쿠로스적 쾌락이다
[6]
다만 이중 일부는 그걸 발견했다고 주장한 장본인이 위조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7]
반면, 헨리 흄은 저서에서 제임스 번넷과는 반대로 '환경이나 특질, 기후, 사회 등의 차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선천적인 차이'가 인종 간에 존재한다며, 인류는 한 곳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 하느님이 여러 장소에서 인간을 각기 개별적으로 창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다원론적 관점이지만, 동시에 과학적으로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초기 형태의 시도이기도 했다.
[8]
켈빈 남작이라서 켈빈 온도라고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