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Свёкор)" 1888년 블라디미르 마코브스키 作. |
[clearfix]
1. 개요
Снохачество(Snokhachestvo)전근대 동유럽에 존재했던 악습. 폴란드 학자인 아담 크라비에츠는 이는 러시아와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족 영역에서 11세기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들이 일을 하기 위해 도시로 장기간 떠나게 되었을 때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대상으로 강간, 성폭행 등을 자행하던 문화다. 해당 문화는 낙후된 시골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알렉산드르 라디셰프를 비롯해 일부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며 비판하기도 했으나 쉽사리 해결되지 못했고[1] 1950년 경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해당 풍습이 남아 있었다.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들이 많아 연구자료가 빈약한 편이다.
그래도 소련이 수립된 뒤에는 콜론타이, 아르망드 등의 여성 운동가들의 활동, 소련 정부의 강력한 대처, 의무 교육의 확대와 인식 개선 캠페인, 강한 사회적 통제, 핵가족화와 도시화로 근절되었다.
17, 18세기 러시아에는 강간을 비롯한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있긴 했으나 처벌이 미비했다. 1885년에 여성의 처녀성을 빼앗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2]이 있었으나 이는 유명무실했고 도시의 여성들에 한해서 해당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나마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이를 중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발각될 시엔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피해 여성들의 고백이 묵살되는 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영어 위키백과 문서 또는 러시아의 역사학자가 한 신문사에 기고한 글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러시아 지방의 성범죄(러시아어)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2. 상세
루스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은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낙후된 국가였다. 18세기 들어 표트르 1세 치하에서 대대적인 서구화 작업이 진행되었음에도 선진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유럽과 가까운 지역이었고 시골은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3]이런 상황에서 경제 발전과 산업 혁명, 농노 해방 등의 요인으로 우랄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볼가강 유역, 중앙 러시아와 수도권 일대 도시들로 떠나는 Otkhodnichestvo라는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나 스몰렌스크 같은 지역의 경우 단순 노동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의 40%가 지역에서 올라온 것으로 확인될 정도로 왕성하게 일어난 사회적인 현상으로 인해 농촌 지역의 청년층들은 상당 기간 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얼핏 보면 이촌향도와 비슷한 걸로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봄부터 가을까지 근무했다가 겨울에는 다시 돌아와 집에 머물고 봄이 되면 다시 떠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의 강력한 농노제 때문에 농민들이 토지에 결박당해서 영구적인 이주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오트호드니키(이주 농민)들은 지주와 미르의 결박, 농번기에 농사일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가족의 요청 때문에 부활절까지 도시에 머무르다가 부활절 연휴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남편들은 아내를 두고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북부 지역은 토지가 비옥해 부역의 비중이 높은 남부와는 달리 토지가 척박하고 경작지가 부족하여 농업 수익이 적어서 지주들은 '오브로크(Obrok)'라 부르는 화폐 지대를 농민들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북부 지역은 상공업의 비중이 상당한 편으로 아예 농사를 안 짓고 화폐나 공예품을 지대로 납부하는 마을들도 일부 존재했으며 지대를 납부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북부의 농촌에서는 장정들이 농한기에 도시로 나가는 일이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4] 많으면 200 ~ 300일 이상을 부재하는 상황에 12 ~ 13세의 남성을 16 ~ 17세의 여성과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까지 겹쳐서 스노하체스트보가 만연하게 되었다.
신혼 시기에는 꼬마 신랑이고 장성해서는 도시로 나가 일하니 남편과의 부부 관계는 없다시피했고 남편이 오트호드니키가 되어 도시로 나가 있는 기간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안정적으로 성폭행할 수 있는 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트호드니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부 지역에서는 스노하체스트보가 비교적 적었고 러시아 북부 지역에서 매우 심각했다.[5]
아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가면 시아버지는 홀로 남은 며느리에게 성관계를 강요했는데 협박, 회유 등 다양한 방법을 썼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며느리에게 성접대를 요구하거나 제공하는 경우도 빈번했다.[6] 만약 시아버지의 제안에 거절하거나 반항하는 며느리의 경우 괴롭힘이나 신체 훼손, 폭행 등이 자행되었으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겨 심하게 괴롭혔다.
며느리가 참지 못하고 이를 신고하거나 사람들에게 폭로하더라도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마을에서는 이를 "며느리는 딸과 같으니 근친혼이다. 근친은 처벌 방법이 없다."며 무마시켰고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쫒아내거나 더욱 지독하게 괴롭혔으며 도시에서 돌아온 남편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무시당하거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1927년에 제작된 소련의 무성영화인 Baby ryazanskie가 스노하체스트보를 고발하는 영화다. 해당 영화에선 아내는 남편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시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남편이 복귀하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다.
4. 관련 문서
[1]
유능한 행정가였던
알렉산드르 아프로시모프가
칼루가 일대에 대대적인 교육과 방지, 처벌을 진행해 해당 악습이 빠르게 사라진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2]
강간범죄는 채찍 15~20대에 처해졌다.
[3]
오히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표트르 대제의 귀족 특권 폐지마저 전부 무마시키고
농노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4]
농노들이 마을에 공방을 차리기도 했고 일부는 상공업을 하여 큰 돈을 벌어 지주에게 자유를 사기도 했다.
[5]
다만, 도시는 핵가족화가 진전되어 향촌 지역과는 다르게 스노하체스트보를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6]
스노하체스트보와는 별개로
성매매 사례도 많아 어머니가 딸들을 부농이나 공무원, 손님에게 보내 화대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