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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제11·13대 총리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 শেখ হাসিনা ওয়াজেদ | Sheikh Hasina Waz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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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20A0A>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 1947년 9월 28일 ([age(1947-09-28)]세) |
파키스탄 자치령 동벵골 다카 주 고팔간지 (현 퉁기파라) | |
거주지 | 인도 뉴델리 루티엔스[1] |
재임기간 | 제11대 총리 |
1996년 6월 23일 ~ 2001년 7월 15일 | |
제13대 총리 | |
2009년 1월 6일 ~ 2024년 8월 5일 | |
가족 | 父: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2] |
母: 셰이크 파질라투네사 무집 | |
배우자: M A 와제드 미아 (
1968년
결혼) 슬하: 1남 1녀 |
|
학력 |
아짐푸르 여자고등학교[3] (
졸업) (-1965년) 다카 대학교 (방글라데시문학 / B.A) (-1973년) |
약력 |
아와미 연맹 지도자 (
1981년 – ) 방글라데시 제11·13대 총리 |
소속 정당 |
[[아와미 연맹| 아와미 연맹 ]] (1980년-)
|
지역구 | 고팔간지 3구[4] |
의원 선수 | 8 |
직업 | 정치인 |
종교 | 이슬람교 |
서명 | |
SNS |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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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글라데시의 정치인이며 제11·13대 총리.[7] 독립에 큰 공을 세워 국부로 추앙받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전 총리의 딸로, 부모가 암살 당하고 정권의 견제를 받는 등의 고생을 하면서도 8선 의원 경력을 쌓으며 2009년에는 결국 방글라데시 총리가 되었고 정적인 칼레다 지아와 함께 방글라데시 정치판을 주도하는 두 여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하지만 권력을 잡은 이후 장기 집권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며 독재자로 변모, 15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노골적으로 정적들을 숙청하고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가 발생하자 군경에게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는 등의 유혈진압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사망자만 공식 수치로 650~1000명에 이르렀다.[8] 이로 인해 시위가 더욱 격해지자 결국 총리직을 사임하고 인도로 도망쳤다.
젊은 시절에는 정치 탄압의 희생자였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정치 탄압의 장본인이 된 인물로 사임할 당시 최장기 집권한 여성 정부수반이라는 기록도 세웠다.[9] 다만 타락하긴 했어도 무능한 정치인은 아니었는데, 집권기간동안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방글라데시를 최빈국에서 건져내고 여성 인권을 신장시키는 등 나름 긍정적인 업적도 남겼으나 자국민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쫓겨나면서 모든 명예를 잃고 말았다.
2. 생애
1947년 9월 28일 수도 다카 인근의 툰기파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대 및 4대 대통령이자 2대 총리였던 방글라데시의 국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고 어머니는 영부인인 셰이크 파질라툰네사 무집이었다.출생 당시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라고 하여 파키스탄의 일부였으나 언어, 민족, 문화 등에서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서파키스탄과 차이가 커서 심하게 대립했다. 서파키스탄에 있던 중앙정부는 동파키스탄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했는데 아버지 무지부르는 이러한 서파키스탄 정권의 탄압에 분노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하시나의 젊은 시절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애초에 파키스탄 자체가 예전부터 상황이 막장이었고 그러한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방글라데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게는 인구가 너무나 많았던 동파키스탄이 상당한 골치거리였는데 1970년 총선에서 인구가 많아 유리했던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이 승리했다. 그러자 중앙정부는 즉각 선거 무효와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이후 독립을 위한 긴 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시나는 이 때 할머니댁으로 보내졌고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다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룩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반대파들과 반정부 세력들의 내란 및 난동이 끝이 없었고 이에 무지부르는 대통령중심제와 민주집중제에 근거하여 헌법을 개정했지만 당시 페이비언 협회의 영향을 받은 연성사회주의자로 평가받던 무지부르의 헌법 개정은 정적들에게는 마치 공산주의처럼 보일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급진적 도입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군부 중심의 친 파키스탄 세력의 반발을 사 이들이 주도한 폭동이 계속되었으며 1975년 8월 15일에는 기어이 쿠데타가 일어나서 결국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아내인 파질라툰네사와 아들들과 함께 집안에서 살해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쿠데타를 주도한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Khodaker Mostaq Ahmad, 1919~1996)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사실상 매국노에 가까운 군부 내 친파키스탄 인사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동지를 암살한 거라는 것이다.[10]
딸인 하시나와 여동생은 당시 서독(후에는 인도)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녀는 28세에 가족 대부분을 정치 테러로 잃는 비극을 겪었고 이후의 인생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3. 정치 활동
하시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1981년 방글라데시로 귀국하였으며 귀국하자마자 아와미 연맹의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반정부 투쟁을 기획하였다.그러나 바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군부 세력의 탄압으로 사실상 가택 연금 되었다. 더욱이 당시는 폭압적인 군사정권 시절이라 독재정권은 무지부르의 세력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무지부르의 딸인 하시나 또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아와미 연맹은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군부 투쟁에 나섰으며 군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암살당하고 권력에서 밀린 구 군부 세력의 국민당도 동참하였다.
1986년 대통령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는 일부 야당에 대한 해금령을 내리고 아와미 연맹은 곧바로 동년의 총선에 참가한다. 당시 총선은 말이 많았는데 애초부터 계엄령 하에 치러진 총선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뻔할 뻔자이고 구 군부 세력의 국민당은 이러한 총선에 아예 보이콧을 선언함으로서 매우 불안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선전하기는 했으나 에르샤드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견제를 못 이기고 "이 따위 국회의원 안 해!"라며 1년 만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 의회는 곧바로 해산되었으며 1991년 제대로 된 총선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샤드 정권을 향한 민심이 폭발하여 1990년부터 전국적으로 에르샤드를 축출하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다.[11] 결국 에르샤드는 연말에 사임하였고 이듬해 총선은 성공적으로 치러져서 칼레다 지아가 이끌던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아와미 연맹은 제1야당이 되었지만 칼레다 지아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쿠데타 세력에 대한 면죄부 등으로 둘은 서로를 더욱 강경하게 적대하기에 이르렀고, 1994년 마구라 선거구 의원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보궐선거에 도전해 보지만 부정으로 인해 국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은 기대가 높아진 민심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에 아와미 연맹은 칼레다 지아 총리의 사퇴와 임시정부 구성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이를 쿨하게 씹었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사상 유례 없는 대투쟁을 벌였고 결국 칼레다 지아는 무하마드 하비부르 라흐만을 필두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사임했다.[12] 1996년 2월 15일 치러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압승했으며 이로서 하시나는 총리로 오르게 되었다.
4. 총리 재임
4.1. 1기 (1996년 ~ 2001년)
총리에 오른 하시나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자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의 아버지를 사형시킨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일명 '보상법'을 곧바로 폐지했다. 인도의 갠지스 강 물을 30년 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협약에도 서명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관영 중심의 텔레콤 사업을 민영으로 전환하는 등 개혁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외국계 회사들이 100% 자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허락하였다.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하락하였고 결국 2001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칼레다 지아가 여전히 국민당 총재였기 때문에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4.2. 2~3기 (2009년 ~ 2024년)
하시나의 아와미 연맹에게서 정권을 탈취했지만 칼레다 지아의 2기도 실책으로 가득했으며 2004년에는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테러 사건[13]이 발생하는 등 치안이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는데 이 때를 노린 아와미 연맹은 2005년 다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다시금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칼레다 지아는 2006년 말 사임했다. 이후 국민당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한 채 권한대행들만 선출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고 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40명이 사망하면서 국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졌다.2007년 셰이크 하시나는 국민당 정권의 탄압으로 강요죄 등의 누명을 씌워 구속되었으나 국민의 반발이 극심하여 국민당 정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2008년 국민당은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셰이크 하시나를 석방했으나 이미 민심은 국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2008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후 국민당은 제1야당 자리도 로샨 에르샤드의 자티야 당에 뺏겼다. 자티야당은 원래 분열된 군부 출신 대통령으로 지아우르 라흐만을 죽이고 신군부격으로 80년대 권좌에 오른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가 이끌던 당이었지만 에르샤드가 실각하고 체포당하는 등[14] 고생하면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아와미 연맹이 주도하는 대연정에 참여하여 셰이크 하시나에 협력하게 되었다.
2024년에 있었던 총선거에서도 승리하여 4연속으로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방글라데시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갱신했다. 다만 반대파를 강하게 탄압하여 야당이 대거 총선에 불참한 탓에 투표율도 80%에서 40%로 뚝 떨어지는등 논란이 많아 4기 정부 운영에 혼선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하시나의 집에서 물을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15] 가정부[16]가 3400만 달러(470억 원)을 벌어들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하시나의 부정축재 의혹도 거세지고 있다. #
4.3. 몰락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가 공무원 할당제 반발에서 총리 사임 시위 및 혁명으로 번졌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하시나는 시위 초기에 강경진압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수백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하시나는 결국 2024년 8월 5일 오후 2시 30분, 사임을 발표하고는 여동생과 함께 군용 헬기를 탄 채 인도로 출국했다.
하시나는 군부가 시위대 유혈 진압을 하지 않겠다고 항명을 하자 총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보도에 따르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하시나의 명령을 군대가 거부했다고 한다. #1 #2
하시나의 사임 후 분노한 시위대는 총리 관저를 습격, 약탈했고 라흐만의 동상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다. #1 #2 #3 #4 이것이 15년 장기집권의 말로이다. 직접 자국민에 대한 발포를 명령하여 유치원생까지 포함한 자국민 수백명을 학살한 주제에 본인은 살고 싶다는 듯 외국으로 튀어버린(...) 너무 추한 결말에 외국인 입장에서 보기에도 말문이 막힐 지경.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아예 두 번째 독립이라 할 정도로 엄청나게 기뻐하는 중.
이후 방글라데시군 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와 다양한 정당 지도자 및 시민사회 대표들과 회의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조속히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여 결정하였고 이후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폭력적인 시위 중에 구금되고 체포된 모든 사람이 석방될 것이며, 시위 중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보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칼레다 지아에 대해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
군부는 "살인과 불의에 정의를 가져오겠다. 군대를 믿어달라"는 취지 하에 과도정부를 꾸리는 중이고, 칼레다 지아 등 정치범들은 전원 석방되었으며 통금령은 해제되었고, 의회는 해산된 후 새 총선이 결정되었다. 학생대표들은 무함마드 유누스를 과도정부 수반으로 추천했으며, 시위에서 죽고 다친 이들을 위해 정의를 바로 세우고 책임자(특히 하시나)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한편 소식통에 따르면 인도에 도착한 하시나는 여동생, 조카와 함께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1 #2 이후 하시나 가족들은 인도 공군의 보호 아래 여러 보안 기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한 자택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하시나는 인도에 남을 것인지 영국으로 망명할 것인지는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고 처음 영국 망명 신청에 대해서 거부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여러 인도 항공사들은 방글라데시로 가는 모든 비행편을 취소하였고 인도 정부는 방글라데시와 접경 지역에 야간 통행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셰이크 하시나의 아들이자 아와미 연맹 고문을 역임한 사지브 와제드 조이는 인터뷰에서 어머니 셰이크 하시나는 다시는 정치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하지만 하시나의 아들 사지브 와제드 조이는 총선에 나갈 것을 밝히고 어머니 하시나의 망명도 부인했다. 미국에서 머무르고 있는 사지브 와제드 조이는 어머니 하시나도 영국을 포함하여 다른 나라로 망명할 생각이 없고 당분간 인도에 있을 것이라며 망명을 부인하였고 자신도 방글라데시 과도 정부가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면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여 방글라데시 귀국 가능성도 시사하였다. #
한편 이 와중에도 하시나는 8월 15일을 국가 애도의 날(하시나의 부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암살된 날)을 준수할 것을 지지자들에게 독려하는 등 다시 자기 아버지를 팔아서 지지자들의 결집을 시도하고 하시나 자신을 총리직에서 몰아낸 배후가 미국이라고 비난하는 등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하시나는 자신이 축출된 데에는 미국과 같은 외세가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학생들이 더 희생되지 않길 원했기 때문에 사퇴했고 과도정부가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길 바란다고 밝히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다음 총선에서 아와미 동맹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
이어 8월 13일 성명을 발표해 시위 도중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데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성명은 미국에 거주하는 하시나 전 총리의 아들 사지브 와제드 조이가 X에 대신 올렸는데, 자신에게 학살의 책임이 없다면서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마침 그 전날은 하시나가 다른 고위층 6명과 함께 시위 과정에서 식료품점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상황이었다. # 이후 하시나는 9월 초 기준 113건의 사건에 연루된 상황이 되었다.
2024년 8월 19일 방글라데시 전쟁범죄재판소[17]는 셰이크 하시나와 연관된 3건의 "대량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이 시위에 대한 학살도 포함되었다. # 체포 영장을 내린 상태이다. #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 본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전술한 살해된 식료품점 주인의 동료는 하시나 전 총리가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에 발포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상기했듯 하시나가 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것을 보면 저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렸는지 유출된 통화 내용[18]에 따르면 과도정부가 경제적으로 무능하다고 비난한 것을 넘어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어리석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라며 자신이 통치한 나라의 국민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그들은 이상한 말을 해요. 저는 그 나라에 아주 가까워요. 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요. 저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요."라고까지 말했는데, 후자는 자신이 가능한 한 빨리 방글라데시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 물론 임시정부 수반으로 임명된 무함마드 유누스부터 이제 방글라데시에 하시나의 자리는 없다고 공언한데다, 인도 정부도 방글라데시와의 관계악화와 새로 들어설 방글라데시 신정부와의 외교관계 설정을 의식해 하시나는 망명 중인 총리가 아니며 전 총리라고 선을 긋고 있어서 하시나가 방글라데시의 총리로써 방글라데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요원하며, 최악의 경우 인도 정부에게도 버림받고 방글라데시인들의 공공의 적이 된 채로 방글라데시로 범죄인 인도처리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군부 독재자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한 인물로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민주화 운동을 한 민주투사 출신이다.아와미 연맹 자체가 세속주의를 표방하다 보니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 있는 구 군부 세력의 테러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준동을 척결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학교에서도 세속주의식 교육을 학생들에게 진행시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의 불만을 산다고 한다.
경제도 2010년대 기준으로 연 6~8% 고성장 중이며 덕분에 방글라데시는 2016년 파키스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졌고 심지어 2019년엔 인도조차 제쳤다. 참고로 그녀가 재집권한 2009년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 인도 모두에 1인당 GDP가 뒤지는 것을 넘어 이제 막 극빈국을 겨우 면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찢어지게 빈곤한 나라였는데 불과 10년 만에 최빈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간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19] 2009년 698.5달러였던 방글라데시의 1인당 GDP는 2022년까지 2688.3달러로 13년 동안 3.8배 이상 성장했는데, 과거 대표적인 경제성장 국가들에 비하면 성장세가 더디긴 하나 시대상 변화를 고려하면 대단한 상과다.[20]
그녀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회적 경제모델을 따르고 이슬람권에서도 가장 높은 여성의 경제참여율을 이끌어내 봉제[21], 선박 해체[22] 등 실업률에 도움이 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외교적으로도 최대한 주변국들과 잘 지내는 노선을 펼쳐 친서방, 친인도, 친중 등을 통해 주변 환경 문제를 최대한 낮춰 수출에 집중하는 등 경제적 실익을 얻고 있고 이를 통해 느리지만 착실히 제조업 비율을 늘려 제법 안정적인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환경 보호 정책에도 앞장서 세계 최초로 약 3억 달러의 자체 기후 변화 신탁 기금을 설립했으며 연간 예산의 6~7%를 기후변화 적응에 배정하고 있다. 참고로 방글라데시는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 중 하나다. 이런 환경 정책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
2017년에 거의 백만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미얀마 군부의 학살 사태를 피해 방글라데시에 입국하자 그들에게 피난처와 지원을 제공해 글로벌 호응을 받았다.
5.1.1. 긍정적 평가/어록
'사회경제적 발전과 동시에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와 보호를 보장하는 셰이크 하시나의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전 세계가 따라야 할 가장 좋은 예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셰이크 하시나는 본국에서 새천년개발목표(MDG)를 모범적으로 달성하고 전 세계가 따라야 할 가장 훌륭한 리더십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짐 볼저 경, 뉴질랜드 총리 겸 특사
짐 볼저 경, 뉴질랜드 총리 겸 특사
'셰이크 하시나는 여성의 인권 강화,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과 테러 근절, 민주적 제도 강화를 위한 모범적인 헌신을 보여주었다.'
앤 공주
앤 공주
'셰이크 하시나는 용기 있는 여성으로서 전 세계 여성의 권리를 위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녀의 리더십으로 방글라데시는 선진적 교육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그녀의 리더십으로 방글라데시는 선진적 교육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셰이크 하시나는 남아시아 여성인권의 기념비적 존재다.'
마리-클로드 비보, 캐나다 국제개발부 장관
마리-클로드 비보, 캐나다 국제개발부 장관
'방글라데시는 국부 봉고본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꿈꿨던 '쇼나르 방글라(황금빛
벵갈)'를 충실히 건설하고 있다. 셰이크 하시나가 세계 평화와 안보에 기여한 점은 칭찬받을 만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방글라데시는 평화 유지의 상징과도 같다.'
아눌 카레, 유엔 현장지원국 사무차장
아눌 카레, 유엔 현장지원국 사무차장
5.2. 부정적 평가
5.2.1. 권위주의적 통치
2015년 있던 방글라데시 시위 진압 만평.
본인이 민주 운동가 출신으로 집권하였으나 집권 후에는 되려 본인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면서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와 비견하기도 하는데 둘 다 민주화운동가 출신이며 1990년대에 1차로 집권했다가 실각한 후 2차 집권기에서 흑화했다는 점은 오르반과 유사하다.[23]
셰이크 하시나의 독재와 부패성향은 악명이 높은데, 하시나가 집권 후 한 일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관련된 사람들을 체포한 후 사형시킨 일이었다. # 또한 반정부 시위를 무력 진압했으며 시위 사실을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체포하기도 했다. # 야당 지도부들도 각종 형사사건에 휘말려 체포되는 경우가 잦아지다 보니 현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정적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시나의 가장 큰 정적이던 칼레다 지아도 2018년 횡령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24] 또 2009년 이래 안보 기관이 연루된 실종 사건이 600건 이상이라는 집계도 있다.
2024년 1월 7일 있을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반대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진압을 단행해 2023년 7월 이후 활동가 2만 명이 체포됐고 8만 8천 명이 법적 조치를 받고 있다고 한다. # 이렇게 치러진 2024년 방글라데시 의회 선거는 야당의 보이콧 속에서 40%대로 투표율로 낮아졌고 당연히 여당의 독식으로 끝났다.
본인이 직접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부친의 후광을 입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출신임을 자처하면서 정적들을 매국노 또는 파키스탄의 추종자로 몰아붙히는 극단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모두 매국노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명분으로 귀족처럼 대를 이어 혜택을 누리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가 발생하자 7월 14일 밤 시위 참가자들에게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혜택을 줘야 하지 말라는 거면 매국노 후손에게 혜택을 달라는 게 더 좋단 말이냐" 같은 말을 했는데 이게 오히려 시위 참가자들을 자극해서 "우리가 매국노다!"라고 외치며 시위가 더욱 불타오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집권 초인 2010년 방글라데시의 자유지수( 세계의 자유에서 매긴 지표)는 정치적 권리(PR) 26점(3등급), 시민 자유(CL) 33점(4등급), 총 59점었는데 그녀의 집권 말인 2024년에는 PR 15점(5등급), CL 25점(5등급), 총 40점으로 14년 만에 19점이 추락했다.
2018년에는 디지털보안법이란 걸 만들었는데 일단 공식적인 목표는 인종차별, 종파주의, 극단론, 테러 선전, 소수 민족 증오, 음란물 등의 확산 방지이긴 하지만 현실은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하는 2023년 방글라데시의 언론자유지수는 180개 국가 중 165위로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벨라루스, 쿠바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명색이 민주국가임을 내세우는 나라치고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2023년 UN 인권 최고대표 볼커 튀르크가 하시나 정부에게 디지털보안법 적용을 중단하고 법 조항을 포괄적으로 개혁할 것을 정부에 전달했다. # 하지만 아니술 후크 법무장관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법을 계속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셰이크 하시나는 TheTopTens에서 선정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순위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담 후세인(9위)은 물론 이디 아민(8위), 김정일(7위), 폴 포트(5위), 마오쩌둥(4위), 이오시프 스탈린(3위) 같은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게 되는 악마들을 넘어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2위)까지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 그것도 자국민을 학살을 저지르기도 전인 2010년대 중반에. 이때까지만 해도 왜 하시나가 1위인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많았으나, 적어도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 이후에는 저들 수준은 아니더라도 극악무도한 독재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졌으며 방글라데시 국민들에게 하시나는 히틀러 이상, 아니 라나발로나 1세랑 동급 수준으로 취급받아도 과장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25][26] 남아시아 전문 저널리스트 제니퍼 초두리는 알자지라 기고에서 “하시나가 인권침해, 억압, 부패, 불평등을 경제 성장의 불가피한 대가로 제시했던 것은 엄청난 역효과를 낳았다”고 짚었다. #[27]
게다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경제도 2022년 이후 들어서는 추락중이다. 경상수지는 2021년부터 막대한 적자를 기록중이며, 2023년 방글라데시의 물가상승률은 9.5%에 육박해 10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방글라데시 타카화도 2022년 1월 달러당 85타카에서 2024년 1월 110타카로 25% 이상 폭락한데다, 2021년 480억 달러를 기록했던 외환보유고도 2023년 12월 190억 달러로 급감하는 등 경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28] 인도까지 추월했던 1인당 GDP도 2024년부터 다시 재역전될 전망이며, 때문에 방글라데시 내외 언론들도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비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2024년 IMF 통계 기준 방글라데시의 1인당 GDP는 2,646달러를 기록하여, 2,731달러를 기록한 인도에 추월당했고, 2029년에 들어서야 다시 방글라데시가 인도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문제는 타카화의 절하 폭이 인도 루피보다도 심해서 이대로라면 인도를 다시 추월하는 시점도 더 늦어질 공산이 크다.
2024년에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IMF는 2024년 4월 경제전망에서 방글라데시의 GDP 성장률을 종전 6%에서 5.7%로 하향, # 방글라데시 정부도 GDP 목표치를 7.5%에서 6.7%로 하향했다. # 또 인플레이션도 잡히지 않아 식품물가는 2024년 4월 다시 5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 그녀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이와 같은 경제악화와 무관하지 않다.
5.2.2. 학살
독립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자리의 30%를 할당하려 했다가 취업난에 시달린 청년층의 반발로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가 열렸다. 이에 하시나는 경찰들에게 발포를 명령해 실탄 사격까지 동원해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 무려 650~1000명[29]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셰이크 하시나는 대국민담화에서 자신도 과거에 대학생 민주화 운동가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시위대를 죽인 것은 시위대 속에 숨은 BNP 같은 야당들이라고 우겨댔었는데 군경이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하고[30] 차량으로 밀어버리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찍혀 널리 퍼져버린 데다가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들[31]까지 있었던지라 씨알도 먹히지 않고 국민의 분노만 더 불러일으켰다. 또 국경을 지키는 군대까지 시위 진압에 투입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학살 장면이 담긴 영상이 퍼지자 반정부시위를 막기 위해 인터넷을 차단하는 등의 행위도 보였는데[32], 사안이 이렇게되자 여당 지지자들조차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군부에서조차 미묘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는 하시나의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이 영상 댓글에 나온 바에 따르면 하시나는 사임하기 한 시간 전에도 군대에 더 많은 무력을 사용하라고 지시했으며 "경찰이 훌륭하게 일하고 있습니다"[33]라고 말했는데, 이때 경찰은 더 이상 '이 일'(시위 진압)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하며 사실상 진압 거부를 표명했다. 군대도 시위 진압을 거부한 마당에 명령을 충실히 따라왔던 경찰까지 하시나에게 등을 돌렸으니 하시나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5.2.3. 부정부패
셰이크 하시나의 가사도우미의 재산이 한국돈으로 410억에 다다른다는 기사가 나왔다. [34] 이 가사도우미의 주 임무는 물을 긷고 따르는 것인데, 그래서 별명이 물이라고 한다. 총리관저 주변인들의 부정부패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는 기사인데,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이미 방글라데시인들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더이상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6. 가족 관계
1968년 핵과학자인 M. A. 와제드 미아와 결혼하여 슬하 1남 1녀를 뒀는데 와제드가 2009년 사망함으로서 미망인이 되었다. 자식들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고 있으며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인 튤립 시디크(Tulip Siddiq)를 조카로 두고 있다. 하시나 총리가 시디크 의원의 이모다.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독립투사이자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이었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자택에서 살해당했으며 사후 2012년 권종에서 방글라데시 타카의 모든 권종의 모델이 되었다. 다만 하시나가 2024년 물러나면서 라흐만에 대한 격하 분위기가 생김에 따라 모델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7. 여담
전 총리인 칼레다 지아와는 선대로부터 이어진 원수지간으로 거의 아치에너미 관계 수준이다. # 90년대 이후 2020년대까지 방글라데시 정치는 이 두 여인이 싸우면서 주도했는데[35] 그러다보니 이들이 집권할 시 서로 감옥 보낼 생각만 한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2022년 기준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총 19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 특히 2004년 수류탄 공격 당시엔 후유증이 생겨 지금도 청각장애가 있는 모양. 그 와중에 다 살아남은 것도 기적적인 일이긴 하다.
2008년 방글라데시에 개교한 아시아여성대학에 후원도 했던 모양.
이웃국가 인도의 인디라 간디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독립영웅 겸 초대 국가원수의 딸이고, 두 번의 집권 사이 공백기가 있으며, 2차 집권기에 대규모 학살[36]을 저지르고는 그 대가로 같은 해, 그것도 연 나이 일의 자리가 7인 해의 생일을 넘기기도 전에 사망하거나 몰락한 점도 공통점이다.[37]
집권기간 동안 공과가 명백한 지도자로 꼽힐 만했으나 자국민을 대거 학살하면서 그간의 공도 다 말아먹고 최악의 독재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런 점은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38]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유사한데 그나마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망명에 성공해서 살해되지는 않았다는 것.
사실 하시나는 본인이 직접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딸로서 아버지의 후광을 세습한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들이 공신의 자식으로서 귀족을 넘어 왕이 되려고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민주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봉건시대의 왕족이 되고 자기 아버지의 측근들을 공신이자 음서로 신분을 세습하는 귀족 가문으로 만드려고 한 건데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 국가에서 그게 반발이 없을 리가 없고[39] 결국 수백명의 시위대 사망자를 내어 본인이 그토록 찬미한 부친의 동상과 기념관까지 파괴되었고 가문 전체가 방글라데시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어 버렸다. 객관적으로 보아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 딸의 과도한 우상화의 대한 반발로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마저 격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40]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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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2]
현행
방글라데시 타카 권종 전권의 모델이다.
[3]
Azimpur Girls High School.
[4]
다카 주 고팔간지 구 위치.
[5]
개인 계정
[6]
개인 계정이 트위터에 의해 차단당했다.
[7]
শেখ(Sheikh)는
아랍어 "شيخ"에서 유래한 어휘로서 아랍어로는
방언에 따라 '시흐' , '셰흐', '셰이흐', '샤이흐' 등으로 발음되지만
벵골어식
발음은 '셰크'다. 하지만 '셰이크'라는 발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문서의 표제어도 '셰이크 하시나'로 정해졌다.
[8]
심지어 현지에서는 2000명 내지 5000명이 죽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데, 만약 5천 명 사망설이 사실이라면,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는 명실상부
천안문 학살 이래 최악의 비전시 학살이 된다.
[9]
사임 당시 77세 생일 약 2개월 전이었다.
[10]
쿠데타 후 아흐마드는 친파키스탄 인사들을 등용하며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독립운동가 4명을 한꺼번에
사법살인하는 폭정을 저지르다가 3개월도 안 되어 축출당했는데, 그의 폭정은 매우 짧았는데도 방글라데시 사회에
이슬람 극단주의를 창궐하게 하는 등 방글라데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참고자료
[11]
재미있는건 에르샤드도 칼레다 지아의 남편인 라흐만을 살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이라 칼레다 지아도 에르샤드 정권에선 탄압을 받았고 덕분에 지아가 민주화 인사 비슷한 포지션까지 점하게 된다. 당연히 하시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
[12]
이후에도 선거 치르기 전 임시정부 구성은 방글라데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로, 서로 집권만 했다 하면 여당이 부정선거하니, 어쩌니 음모론과 반발이 심해 서로를 믿질 못하다 보니 그럼 정부는 중립적인 인사들에게 맡겨 놓고 진짜 선거 제대로 치러 보자는 목적도 있다. 이게 가능했던건 외국에서 그렇게 서로 부정선거 타령만 하고 싸우기만 할거면 해외 원조 중단한다고 일종의 협박과 회유도 했기 때문이다.
[13]
2004년
8월 17일 오전 수도 다카를 비롯한 전국 456개 지역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다.
[14]
칼레다 지아 입장에선 에르샤드가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핍박한 원수다.(...)
[15]
별명이 '물'이라고 한다.
[16]
방글라데시 가정부의 평균 월급은 한화로 환산하면 15만 원이다.
[17]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전범들의 처벌을 위해 하시나 집권 직후인 2009년 만들어졌다.
[18]
하시나와 통화한 사람은 하시나 정권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19]
그나마 인도도 방글라데시처럼 성장세이긴 하나, 파키스탄만큼은 202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완전히 박살나 조만간
네팔(하시나 2차 집권기 직전까지 아프가니스탄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 최빈곤국이었다)에게까지 1인당 GDP가 밀릴 위기다.
[20]
비슷한 시기 세계 1인당 GDP는 8842.4달러(2009)에서 12743.85달러(2022)로 1.5배도 성장하지 못했다.
[21]
특히 여성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로, 숙련도가 오르면서 생산성도 높아지고(실제 21세기 들어 방글라데시는 세계의 의류공장 소릴 듣기도 한다) 여성이 집안의 경제권을 가지니 여성 권리도 동시에 오르는 등 여러 부가적 효과도 있다고 한다.
[22]
노후된 선박을 해체해야 되는데 선박의 크기상 아직 자동화가 안되다보니 결국 많은 노동력이 달려들어야 된다.
[23]
하지만 하시나가 몰락한 상황에서 이런 비교는 오르반에게는 실례이다. 그래도 오르반은 하시나처럼 유치원생까지 포함한 자국민 수백명을 학살하는 막장 짓거리는 하지 않았기 때문.
[24]
이후 거듭된 재판을 통해 형량이 10년으로 늘어났다.
[25]
한국에서
전두환, 루마니아에서
엘레나 차우셰스쿠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단번에 이해갈 것이다.
[26]
영국으로 망명한 방글라데시 언론인 줄카르나인 사에르 칸(Zulkarnain Saer Khan)은 트위터에서 "나는 셰이크 하시나가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김정일,
오마르 알바시르와 함께 현대의 가장 잔혹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라고 언급했다.
#
[27]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로
부마민주항쟁이 있다.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며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 탄압을 받아들였지만 후진국을 벗어나고 1977년
중진국에 진입할 정도로(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50%/1000달러를 넘기고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경제사정이 대폭 나아지자 박정희의 독재를 거부하게 된 것.
[28]
심지어 방글라데시는 2023년에 imf에서 금융지원을 두 차례나 이미 받았는데, 그나마 이것도 부풀려 발표했다는 의혹이 있어 실질적인 외환 보유액은 160억 달러도 안 된다는 말도 있다.
#
[29]
이는
5.18 민주화운동의 공식 사망자보다도 많은 숫자다. 심지어 현지에서는 2차 시위에서만 무려 990명이 죽었고 총 사망자는 2000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30]
심지어
광주 학살마냥 경찰헬기에서 시위대에게
기총소사를 하는 모습까지 포착되었다!!! 영상에서 헬기에 탄 경찰이 지상을 향해 총을 쏘는 모습이 두 번이나 선명히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시나는 헬기가 불을 끄기 위해 온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영상의 17:09~17:15에 해당 장면이 나온다(영상 자체는 방글라데시 시위에 대한 한국 교민의 논평 영상이다)
장 베델 보카사,
이슬람 카리모프조차 자국민 시위대에 헬기 사격은 저지르지 않았다.
[31]
유니세프의 폭로에 따르면 학살 과정에서 총 32명의 어린이가 죽었고, 가장 어린 희생자는 5살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6~12살 사이 희생자도 1명 있었다.
# 반정부 시위를 진압한다며 어린이(그것도 유치원~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된!!!)까지 죽인 거면 이제 하시나에 대한 긍정평가는 불가능해졌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32]
당연히
VPN이 존재하는 이상 이조차 아무 소용이 없었다.
[33]
이는 경찰이 시위대 1200명을 죽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34]
참고로 방글라데시의 일반적인 가사도우미의 평균월급이 15만원 정도다.
[35]
이슬람 주류 사회에서 여성 정치가가 이렇게 활약하는 곳은 아직까진 방글라데시가 거의 유일하다.
[36]
게다가 인디라 간디는 블루 스타 작전 당시
분리주의 무장 단체 진압이라는 나름대로 타당한 명분까지 내세웠던지라 하시나가 저지른 학살의 강도가 훨씬 더 높다. 다만 학살의 규모와 잔혹성은 인디라가 하시나를 훨씬 앞선다.
[37]
하시나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사실상 정권이 붕괴되어 총리직 사임 후 인도로 도피했고, 인디라는 아예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38]
의아하겠지만 집권 초기 10년 동안은 상당히 통치를 잘 했다고 한다. 물론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이때부터 있던 거지만. 사실 차우셰스쿠 정권의 막장화는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집권 말미에 실권을 장악하며 남편을 좌지우지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39]
사실 독립유공자들, 정확히는 지도자 편에 붙은 독립유공자들의 기득권화가 국가에 얼마나 큰 폐해를 입히는지는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에서 먼저 드러났다.
구쿠라훈디 학살 과정에서 무가베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이 비무가베파 독립군들을 학살하거나 백인 농장주들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무가베파 독립유공자들이 독식하는 등 하시나도 애들 장난으로 보일 짓거리를 저지르며 짐바브웨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40]
한국에서
박근혜,
문재인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탓에 아버지인
박정희, 문재인이 따르던
노무현의 여러 업적들마저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도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