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7:10:50

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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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
成蕙琳
파일:external/tv.pstatic.net/201112201824401911.jpg
<colbgcolor=#bc0021><colcolor=#fff> 출생 1937년 1월 24일
경기도 경성부 계동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사망 2002년 5월 18일 (향년 65세)
러시아 모스크바[2]
본관 창녕 성씨 (昌寧 成氏)[3]
학력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졸업)
풍문여자중학교 (중퇴)[4]
평양예술학교 (졸업)
가족 아버지 성유경, 어머니 김원주
오빠 성일기, 언니 성혜랑
배우자 김정일[5], 리평[6]
자녀 김정남, 리옥돌[7]
손자 김한솔, 김금솔, 김솔희
조카 이한영, 이남옥

1. 개요2. 생애3. 사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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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김정일 아내들 중 하나. 김정일과는 불륜을 통해 가까워졌다.

2. 생애

대대로 갑부였던 아버지 성유경(成有慶)과 어머니 김원주의 1남 2녀 중 막내딸로 경기도 경성부 계동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성유경은 1906년 차남으로 태어나 대가 끊긴 종가에 3대 독자(아석공의 손자)로 입양되어 만석꾼의 종가의 대를 이어 매우 부유하였다. 보성고보 16회 졸업생으로 좌익 활동을 하면서 해방 후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재정부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1907년 진남포에서 태어나 서문여고(평양여고)를 졸업하고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인 <개벽>의 기자까지 했던 김원주였는데 역시 좌익 활동을 하여 해방 후 '남조선 민주 여성동맹' 문화부장을 지냈다.

이들도 말하자면 불륜 관계인데 만석꾼 집안으로 조혼했던 성유경이 신여성이였던 김원주를 만났다. 도저히 안 되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일본 유학 중이던 1933년 장남인 '성일기'를 출산하였다. 대가 워낙 귀한 종가집이라 두 사람의 결합이 인정되었다.

나중에 아버지인 성유경은 월북하여 강동정치학원 제1기 졸업생이 되었고 학원이서 강사로도 뛴 것 같다. 이후 아들 성일기를 불러들여 강동정치학원에 수학시켰는데 이것을 다룬 작품이 정원석의 장편 소설 <북위38도선>이다. 성일기는 그 유명한 빨치산 남도부 부대의 일원이 되어 남하하였다가 토벌대에 쫓겨서 함께 도심 침투를 시도했는데 1953년 12월 31일 고향인 창녕군에서 체포된 후 회유 끝에 대장인 남도부가 대구의 친척집에 있다고 신고하여 그가 체포되게 하고 그 공로로 재판 없이 석방되었다. 일설에는 이 과정에서 유일하게 고향인 창녕 집에 남은 그의 누이인 성혜분이 성일기에게 자수를 권유하였다고 한다.

결국 성혜림의 부모는 북한에서 몽땅 숙청된 남로당원이자 공산당이 가장 싫어하는 대지주이며 오빠는 배신한 후 괴뢰국가 남한에서 목숨을 구걸하여 살고 있는 반동분자다.

오빠인 성일기는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좌익 사상 때문에 경기중학교[8] 면접에서 떨어져서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언니 성혜랑은 진명여자중학교[9]에 다니다가 동맹휴학을 선동하여 퇴학당하고 이화여자중학교[10]에 편입하는 등 부모부터 형제들까지 죄다 공부를 잘 했다.

그녀는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를 거쳐서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녀가 중학교에 다닐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성유경은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인 1950년 9월에 두 딸 성혜랑과 성혜림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갔으며 성혜림은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대표작으로 <백일홍>, <온정령> 등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성혜림의 부모는 공산주의가 증오해 마지 않는 대지주였다. 게다가 그들의 배경인 남로당은 6.25 전쟁이 휴전된 지 3일 후에 미국의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지도부 전원이 사형당하였다. 이때 성유경도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전전하다가 1960년에 추방되어 소몰이꾼으로 전락했다. 어머니인 김원주도 당 기관지 로동신문 부장에서 평양신문으로 좌천되었고 얼마 뒤에 그 자리마저 잃었다.
파일:645435345.jpg
젊은시절의 성혜림

그녀에게 김정일은 첫 결혼이 아니었다.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인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했으며 딸 리옥돌을 낳은 애엄마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부녀인 그녀는 시동생인 리종륜의 죽마고우인 김정일 집에서 자주 드나들다가 김정일과 불륜 관계를 시작하였다. 덕분에 공훈배우로 입당하게 되었고 이후 아예 김정일과 살림까지 차렸다. 김정일은 리평을 성혜림과 이혼시킨 후 젊은 여자를 딸려 프랑스 주재 북한 유네스코 대표부로 발령내고 북한에 일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1971년 5월 10일에 김정남을 낳았다. 친어머니 김정숙을 일찍 여의고 편부 슬하에서 자란 김정일은 연상의 여인을 좋아했고 김정일보다 5살 연상인 성혜림은 그런 김정일의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성혜림도 리평과의 결혼이 애정이 없는 중매결혼이었던 반면 김정일과는 예술이나 취미생활에서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게 정상적인 연애가 아니라 불륜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행여 이 사실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과 성혜림은 김정남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아버지 성유경은 한때 헝가리 통조림 공장 사장을 지나다가 공장 위원장과 다투고 추방되어 성혜림의 집에서 얹혀 살았으며 어머니 김원주도 김정일의 중성동 관저에 들어가서 1994년 88세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성혜랑은 김정남의 가정교사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중성동 관저에서 함께 살았다.

이 상황에서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참견하여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한번 결혼해서 애까지 딸린 여자니까, 게다가 불륜으로 결혼했으니까 당장 꺼지시오! 물론 정남이는 내가 정성껏 키워주겠고, 언니의 노후는 잘 보살펴 주겠소. 뭐 선택은 알아서 하시오. 단, 내 제의를 거절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칠 거요.
시누이인 김경희로부터 이런 엄청난 소리를 들은 성혜림은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여기에 김정일의 애정은 이미 고용희에게 넘어간 상태라 성혜림에 대한 관심도 식어 버렸다.[11] 결국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혜림이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 김정일은 이미 고용희와 동거하며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김정일과 사랑을 나눈 지 오래지 않아 그 사랑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역시 불륜은 몹쓸 짓이다. 이후 모스크바와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유리방랑을 하다가 2002년 5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

3. 사후

성혜림은 사후 모스크바의 한 공동묘지의 이름 없는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조카인 이한영은 1982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고 13년 후 자신의 어머니이자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과 극적으로 연락이 닿아 자신이 살던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했다. 이에 성혜랑은 1996년 1월 5일 살고있던 모스크바를 탈출하였지만 이한영은 엄마와 만나지 못하고 1997년 2월 15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현대아파트[12] 현관 앞에서 북한 간첩이라고 추정되는 자가 쏜 총에 의해 암살당했다.[13][14] 이로 인해 성혜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한국으로 오지 않고 어디선가 숨어 살고 있다.

오빠인 성일기는 대한민국에서 석방된 후 고향 창녕의 부동산을 처분해서 단국대 영문과와 성균관대 사학과를 다녔으며 70년대 중반에는 '성일산업'이라는 원단수출업체를 차렸는데 직원이 400명에 이를 정도로 잘 나갔지만 친구 보증을 잘못 서 주는 바람에 홀딱 망하고 이후에는 조용하게 살았으며 가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성혜림 등 일가의 이야기를 밝히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대외 활동도 없다. 1995년엔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해서 성혜랑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

이후 한국에 잔류한 성씨 문중은 " 김정일 마누라가 우리 집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끝장이다!"라며 오랫동안 성혜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 창녕 석리 성씨고가'라는 집이 있는데 이 집이 성혜림과 관련이 있다. 석리는 창녕 성씨의 집성촌으로 1850년대에 성규호라는 사람이 이주해 와서 일가를 이뤘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번성해 한때 일대의 논과 밭이 성씨 집안의 것이었다고 하니 상당한 대지주 집안이었다. 이 집안은 양파를 국내에 처음 재배에 성공해 보급했다고 하며 그래서 양파 시배지가 집 앞에 있기도 하다. 이 집안의 일원이자 성규호의 손자 중 한 명이 성혜림의 아버지인 '성유경'이었는데 성씨 집안은 성유경의 월북 이후 큰 고초를 겪어 한때 폐허가 됐으나 2000년대에 성규호의 종손인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대대적으로 보수해 현재 소유하고 있다.[15]

4. 기타

  • 아들인 김정남에게도 동생이 필요하단 생각에 1974년, 1977년 두 차례 더 임신을 했지만 결국 유산을 했고, 이후 아이를 더 갖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16]
  •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리옥돌은 김정일이 일찌감치 유럽으로 보내 유학시켰고 적당한 북한 외교관 자제와 결혼시켜 이탈리아 로마에서 살게 했는데 장성택을 시켜서 1년에 한두 번씩 찾아가서 생활비를 챙겨 줬다고 한다.
  • 탈북기자 김길선이 평양에서 추방당한 이유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성혜림과 김정일의 동거설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말해준 사람은 이미 소리 없이 사라졌고 40여일 동안 로동당 조직지도부 10과에서 혹독한 문초를 거쳐 김책으로 추방된 후 북한에 염증을 느끼고 탈북했다. 그나마 김길선의 부모가 항일 빨치산 출신에 핵심계층인 데다 김길선이 기밀 중에 기밀인 군수 공업 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취재했고 김정일에게 여러번 표창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나중에 탈북하고 나서 알아보니 김일성과 김정일 여자 문제는 중국 조선족 농부들도 다 알고 있더라고...


[1] 본적은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로, 인근의 모산리· 창산리·효정리와 함께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 [2] # [3] 홍양공파 26세. 22세인 아석공(성혜림의 족보상 증조부) 때 가세가 흥하여 '아석공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4]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으로 갔다. [5] 불륜관계 [6] 첫번째 남편 [7] 첫번째 남편 사이에서 난 딸 [8] 경기고등학교로 성일기가 재학 중이던 일제강점기 학제에서는 대부분이 5년제 공립중학교였다. 대학예과 참조.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는 해방 후 미국식 학제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이들 구제 중학이 분리된 것들이다. [9] 현재의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진명여자중학교는 1987년 폐교되었다. [10] 현재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중학교는 1971년 폐교되었고 1992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가 신설됨 [11] 다만 제 자식을 낳아 준 여자라 정은 있었는지 필요한 건 거의 챙겨주었다고 한다. 병세가 심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병실에 찾아와 죽으면 안 된다며 울기도 했다고 한다. [12] 당시 이한영이 남한에서 하던 건설사업이 어려워져 살던 저택과 세간살이를 팔고 대학 선배네 집에 더부살이했다고 한다. 서현동 현대아파트가 바로 그 곳이다. [13] 그러나 이는 남한에 출판한 로열패밀리 일가의 폭로 내용에 대한 보복이 연유가 아니라 남한으로 망명 황장엽에게 보내는 경고성 메시지로서의 측면이 더 높았다. [14] 이한영을 살해한 간첩은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즉, 잡는 데 실패했다. [15] 성기학 회장의 아버지 성재경이 성유경의 사촌이기 때문에 성기학 회장에게 성유경은 5촌 당숙, 성혜림은 6촌 재종형제가 된다. [16] 출처: 이한영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