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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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
제6·7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철 性徹 | Seong Che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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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9A26A><colcolor=#231916> 출생 | 1912년 4월 6일 |
경상남도 단성군 원당면 묵곡리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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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 1993년 11월 4일 (향년 81세, 법랍 58세)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 |
재임기간 | 제6대 종정 |
1981년 1월 ~ 1991년 | |
제7대 종정 | |
1991년 ~ 1993년 11월 4일 | |
학력 |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
아호 | 퇴옹( 退 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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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대한민국의 승려로 한국 현대 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 중 한명이다. 생전 돈오돈수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며, 일평생 높은 학구열과 함께 철저한 수행의 삶을 살았다. 본인은 강하게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종정으로 추대하여 6·7대 종정을 역임하기도 했다.
2. 생애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언(李尙彦)과 어머니 진주 강씨[1]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며 산청 단성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진학하지 않고 17세의 나이에 불가(佛家)에 입도(入道)하여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 대종사(大宗師) 아래에서 득도(得道)하였고, 이어서 법명인 '성철(性徹)'을 얻었다.[2]당시 고승이던 동산이 거두어 계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동산은 용성의 제자인데 용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한국 불교계 최고의 고승. 이로 인해 '용성 - 동산 - 성철'이라는 한국 선종의 대표적 흐름이 생겨난다. 훌륭한 스승 덕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항상 다른 승려를 선생으로 부르는 용성이 성철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라지만 존경스러워서라고.
불가 입도 이후로는 영주라는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성철이라는 계를 받은 법명으로 활동하였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불가의 구도에만 전념하였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성전암에서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3]를 하였던 사례를 기록하여 불면(不眠)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계종 종단의 분규 와중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해인사에서 구도에 힘썼으며 속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1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출범하자 종정이 되어서 조계종을 이끌었다.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병고(病苦)를 앓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입적[4]하였다. 입적 하기 전 남긴 유언은 ' 참선 잘 하그레이(하거라).' #유언조작 반박글 다비(화장)한 뒤 사리는 해인사의 사리탑에 안치했다. 당시 110여과의 굵은 사리가 나와 세간의 이목을 이끌었으며, 1994년 충청북도 고입선발고사 1번 문제에 등장하기도 하였다.[5] 다비식 영상
3. 비판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당시에 남긴 법어가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다. 다만 이 말은 성철의 창작이 아니고,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불교서 <오등회원>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유신 선사가 남긴 말이 원본이다. 링크그러나 이 법어는 한편으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과 10.27 법난이란 큰 사건을 겪은 당시 불교계의 커다란 위기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침 당시 종교계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자 종교를 넘어선 친구인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이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과 대비되어서 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법정이나 진관, 지선, 효림의 예에서 보듯 불교계에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다.[6]
1987년 부처님오신날의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법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샀다. 당시 시국 탓에, 사탄이라면 전두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탄과 부처는 모두 허망하다' 같은 말을 과연 사람들이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올 김용옥은 이런 점을 들어 성철을 수준 낮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현실과 타협해선 안되는 것이다. 종교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방향을 돌리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낙태 문제를 생각하면 쉽다. 그렇다고 김용옥이 특별히 정치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은 아니고, 영향을 줄 수 없으면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 성철을 비판한 것.
고승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서 돈오돈수를 제시하기도 하여 불교 세간에 논란과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고승이 제시한 것을 후대 승려가 비판하고 새로운 것으로 고치려 하는 것에 불교계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조계종의 정체성을 성철이 간화선으로 놓으면서 지눌의 저서 <수심결>을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지 않은 초기 저작으로 분류하고 나중에 대해어록을 보고 돈오돈수로 선회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수심결 안에 간화선과 관련된 내용들[7]이 등장하여 학술적으로 성철의 주장은 맞지 않다.[8][9][10]
또한, 생전에 석가모니가 그토록 경계한 근본주의 움직임을 보였으며,[11] 심지어 한국 불교의 법맥을 연구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태고법통설을 옹호하기 위해 자료의 변조와 왜곡을 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링크. 선 수행과 학술을 두루 겸비한 승려로서 학술적인 연구와 성과가 많지만, 부족한 부분 또한 많다는 게 성철의 오점.
참고로 성철이 옹호하던 태고법통설과 이와 경쟁하던 나옹법통설은 전부 실제 역사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도 있으며 링크, 근본적으로는 조선 시대 억불정책 하에서 조선의 불교계가 일반적인 종파 중심이 아닌 불교 문중을 형성해 법을 전하는 문중불교 체계로 가면서 생겨난 혼란이 문제다.[12] 블로그:각 법통설 비교글
성철은 당대 대선사 만공에게 배웠는데 인가를 못 받았고 셀프 인가에 가깝게 인가를 한 후, 만공, 경허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동영상
본인이 설법한 녹음집을 그대로 책으로 옮긴 법어집인 <영원한 자유>를 보면, 초능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리 겔러를 초능력자라 말한다. 이 당시의 사회는 유리 겔러를 마술사가 아닌 초능력자로 믿는 시기였다. 하지만 "본인이 수행을 하여 깨우치면 자기 손바닥 위에 보이듯 모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런 것 하나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과연 진정 큰스님이자 깨우친 자이며 돈오돈수가 옳은 것이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이 큰스님으로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우친 자라고는 말한 적이 없다.
또한 8년간 장좌불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간화선으로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혜국의 증언에 따르면 성철을 만났을 때 어떻게 졸지 않았느냐고 묻자 내가 목석이냐? 안 졸게?라고 답했다고. 애초에 생리적으로도 그렇게 안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정과는 여러면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1968년 법정이 해인사에 머물 때, 성철을 만나기 위해 온 대학생들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3천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법정은 "예배란 간절함이 우러나와 공손하고 진중해야 하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다"며 비판하였다. 법정은 이런 취지의 글을 '굴신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불교 신문에 실었다. 굴신운동이란 말 그대로 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이다. 즉 절 횟수 채우기에 급급한 건 그냥 의미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이를 읽고 분노한 해인사의 젊은 승려들은 법정이 바깥나들이를 간 사이에 법정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치워 버렸다고 한다. 그 뒤 법정은 두 말 없이 해인사를 떠났다. 링크 또한 법정은 성철이 출가자들에게 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참선만 하게 하면서 본인은 추종자들로부터 수많은 책을 보시받아 탐독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13]
다만, 1982년 새해 첫날 법정은 성철과 대담을 통해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안 찾고 나만 찾길래 3천배를 하랬다. 실제로 3천배 하고 날 만나러 온 사람들이 심성이 편해진다더라.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3천배를 하겠느냐."는 말을 듣고 깊은 감탄을 했고 그런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14]
4. 3000배 절하기
-
생전에 성철과 만날 때는 독특한 조건이 필요했는데, 누구를 불문하고 불상에 3,000배를 올려야 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어린이는 절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나머지 "스님, 다시는 백련암에 안 오겠습니다. 다시 오면 제가
개새끼입니다."라고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성철은 화내기는커녕, 그 어린이가 간 뒤 "그래도 그 놈 대단하다. 지 할 소리는 다 하고 갔제."라며 감탄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어린이가 부모 손에 이끌려 백련암에 다시 오자 "니 그 때 안 온다던 그
개새끼 아이가?"라며 반갑게 맞이했다고.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원택 스님이 쓴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에 등장하는데, 그 당시에 이 꼬마는 나중가서는 중년의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버전으로는 한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삼천배를 하는데 성철이 "니 뭐 하러 왔노?" 묻자 "예 큰스님. 하던 사업도 망하고, 마누라도 도망가고 몸도 병이 들어서 스님한테 한 마디 들을려고 왔습니다." 그때 성철이 옆에 서 있던 아이한테 기습적으로 꿀밤을 먹이고, 아이가 놀라서 멀뚱멀뚱 노려보자 몇번 더 꿀밤을 먹이고 열받은 (철들지 않은)아이가 성철을 보고 냅따 "야 XX놈아!"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성철이 웃으면서 "야, 니는 야처럼 할말 다 하고 사나?"
- 1982년 1월 1일, 법정과의 선문답에서 성철은 "신도들이 자꾸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아니 보고 나만 만나려고 하니 안된 일이라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를 만나느냐. 그래서 내가 3천 배를 하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러 온다는 사람들에게 이를 이용해 부처님에게 기도를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께 3천 배를 하면 심적으로 변화가 오고 도움이 된다. 절대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3천 배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핑계삼아 부처에게 3,000배를 시킴으로써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도움도 안 되는 나를 보려면 3,000배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15]
- 제자 원택이 출가하기 전, 친구와 처음 성철을 찾아갔을 때다. " 좌우명 하나 얻으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성철은 "절 돈(성금) 3천 원 내놓아라"고 했다. 원택이 주섬주섬 3천 원을 꺼내자 "그 돈 말고!"란 호통이 떨어졌다. 그제야 절을 3천 배 해야 준다는 말임을 깨닫고서 "스님! 출가하면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500계, 보살은 48계를 받는다고 하는데, 저희는 고작 한 말씀 얻어가는데 3천 배 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니는 불교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니는 만 원(만 배) 내라"했다 한다. 원택은 그 첫만남에서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얻었다. 원택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좌우명을 얻었을 때는 '남을 속이지 말라는 건 어린 애들도 아는 말인데 너무 싱겁지 않나?'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뜻도 되는데 그건 참으로 어렵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후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원택은 그 뒤 몇번을 더 방문해 25년을 끝까지 모신 상좌가 되었다.
5. 내 말에 속지 마라
生平欺狂男女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彌天罪業過須彌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은 생전 종정으로 취임한 뒤 MBC 기자 김영일과의 인터뷰에서 "1,300만 불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성철 자신이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으로 이름 높았을 뿐 아니라 수행도 깊은 승려였는데 그런 사람이 자신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사망하면서 이런 게송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더욱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크리스트교,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불교를 공격하면서 으레 성철의 이 말을 가져다 인용하고 있다. 성철의 평전 <자기를 속이지 마라>의 저자 소설가 정찬주[16]에 따르면 성철이 사망하고 몇 년 동안 성철의 저 열반송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편지며 논문 형식의 글들이 우편으로 배달되었는데, 가나안 농군학교에 있다고 소개한 어느 장로는 열반송에 성철의 한과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 솔직하게 토로되어 있다며 몇 년 동안이나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으며, 성철의 열반송을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써 솔직한 고백이며(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구원받지 못하고 천당에 이르지 못한 성철 자신의 상태(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를 말한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해석이 크리스트교 특히 개신교 전도사들 사이에 등장해 "거봐라, 불교는 구원이 없다, 죽을 때야 그 사실을 안 성철은, 그래서 죽으면서 그동안 제대로 몰라 남을 속인 것을 후회했다"면서 성철이 죽기 전에야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했고 불교는 거짓이며 크리스트교만이 참종교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꽤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 #
우선 선종의 선문답에서는 은유와 반어, 역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17] 따라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 해석이 어렵고, 반어법이나 역설법의 특성상 그 문장을 문면 그대로 읽어서는 그 담긴 뜻을 완전히 풀이해 냈다고 말할 수도 없다.[18] 애초에 문면에서 성철이 "한평생 내가 세상을 속였다"는 말이 개신교의 해석처럼 불교가 틀렸고 크리스트교가 옳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행은 전부 거짓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귀결시키는 것은 저자의 뜻을 반영하지 못한 성급한 오류라고 할 수 있는데, 이중섭도 "나는 세상을 속였다"고 했고, 백남준도 "예술 그거 다 사기야. 고등 사기"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중섭이나 백남준이 말 그대로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가?
이미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악의적이고 일방적인 곡해를 경계하고 반박하는 기고를 몇 번이나 냈다.
사탄이 곧 부처라고 하는 말도 크리스트교의 관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불교가 분별[23]에서 번뇌가 시작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것은 신이고 어떤 것은 사탄이라고 처음부터 구별을 딱 지어 놓고 살지 말라는 말에 가까우며, 부처라는 말이 '신'일 뿐 아니라 '깨달은 자'라는 의미도 있음을 생각하면 사탄이 곧 부처라는 말은 크리스천들이 거의 온갖 부정하고 추악한 것들을 모두 뭉쳐놓은 사탄, 곧 악마에게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이 있기는 있다고 인정하는 말에 가깝다. 그러니까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의 다른 버전인 것이다.[24]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과 가능성인데,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영성(靈性)과도 비슷하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는 불성이 중생이라면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가르친다.[25] 이 불성은 사람과 동식물의 종을 가리지 않고, 선악의 유무나 윤리적인 잣대마저 초월해서[26]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재된 깨달음의 씨앗이자 성불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법화경에서는 인간에 내재된 불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옷 속의 구슬'이라는 비유가 등장해[27] 이미 우리 안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과 그 씨를 뿌릴 텃밭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도 말고 내가 못 찾았다고 그런 게 애초에 나한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지도 말자고 말하고 있다. 성철은 생전에 불성에 대해서 죄를 지은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다며 이러한 법문을 한 적이 있다.
문: 죄를 지은 중생도 불성이 있습니까?
답: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문: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답: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문: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은 다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28]
답: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문: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답: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문: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은 다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28]
다소 대승불교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승불교에서 인정되는 경전인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교단을 분열시키고 석가모니 자신을 죽이려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사촌동생 데바닷타에 대해서도 "데바닷타는 내 전생의 스승 아사타 선인이었고 전생의 나인 당시 국왕이 그에게서 가르침을 얻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지옥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지옥에서 그가 치러야 할 과보(죗값)를 모두 치르고 나면 그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고 천왕여래(天王如來)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29]라고 단언해 말했다. 데바닷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서[30][31] 지옥에 가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고, 데바닷타도 일단 전생에 선업을 한 것이 있으니까 그 선업은 선업대로 죗값 다 치르는 대로
부패한 성직자들이 종교적 믿음을 앞세우며 피해자들에게 저지르는 일명 그루밍 성범죄들을 보면 성철의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법어는 더욱 와닿는 부분이 있다.
6. 유일한 혈육 불필
속세의 아버지 성철의 사진과 같이 찍힌 불필.(1937~)
성철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딸이 두 명[32] 있었는데 둘째 딸이 태어나기 직전인 1936년에 출가를 해 승려가 되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수경(壽卿)이라고 대신 지어주었다.
불필에게 아버지 성철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는,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궁금증 등 복합적인 감정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승려의 딸"이라는 얘기가 너무 싫었기에 불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서울로 유학을 보내달라 하였고 다행히 집안이 넉넉하였기에[33] 어렵지 않게 서울로 올라와 혜화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성철의 동생(불필의 삼촌)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묘엄이라는 비구니가 불필을 찾아와 성철이 현재 기장 묘관음사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자는 말을 하였고 삼촌도 담임선생에게 허락을 받고 가보자고 하였다. 참 미워했던 아버지이지만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으므로 불필은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로 향한다. 하지만 묘관음사에 있다는 성철을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성철과 함께 있던 향곡이 오늘 성철이 이상한 손님이 온다더라는 말을 하고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해줄 뿐이었다. 즉, 성철은 딸이 오는 것을 알고 피한 것이었는데 불필을 본 향곡은 그제서야 성철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성철을 찾으러 갔다. 잠시 후 향곡과 함께 나타난 성철. 그런데 그는 딸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가라, 가!"라는 말을 하고 상대해 주려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만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화가 나있던 불필은 그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다.
그 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불필은 전쟁을 피해 진주로 내려와 진주사범 병설중학교를 거쳐 진주사범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승려가 불필을 찾아와 통영의 안정사에 있으니 잠시 다녀가라고 했다는 성철의 말을 전해주는데 당시 불필은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데다 썩 내키지도 않았기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맞이한 여름방학, 불필은 산청의 할아버지 댁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보살계를 받아 초연화라는 불명까지 가진 할머니가 불필에게 성철을 보러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낸다. 결국 불필은 할머니, 고모와 함께 통영의 안정사로 향한다.
그렇게 다시 딸을 만난 성철은 불필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대뜸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행복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자 성철은 "행복에는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다. 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때까지 성철에게 불만이 많았던 불필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압도당하고 말았다. 어떤 것이 영원하고 어떤 것이 일시적이냐는 불필의 질문에 성철은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부처님처럼 도를 깨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의 오욕락은 일시적 행복일 뿐이다."는 말을 해준다. 이 말을 들은 불필은 뭔가를 크게 깨치고 그때 성철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출가하겠다고 하자 성철은 지금 다니는 학교는 마치라는 말을 해준다. 이때, 같이 간 고모도 출가하겠다고 하였는데 성철은 너는 몸이 약하니 안된다고 말렸다고 한다.
학교를 마친 후 불필은 성철에게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不必)의 뜻을 안다는 뜻에서 불필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는 수련을 떠나 언양 석남사에서 인홍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로는 아버지 성철을 속세의 아버지가 아닌 불가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그래도 성철은 딸에 대한 일말의 정은 있었는지 "세상에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된다. 부모만 믿어라."고 했다고.
여담으로 남편(성철)은 일찌감치 출가했고, 하나밖에 없는 딸(불필)마저 출가한데다, 시아버지도 이미 죽은 상황에서 시어머니까지 죽자 홀로 남게 된 성철의 아내 이덕명은 딸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딸이 출가한지 10년이 지난 후 딸이 언양 석남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게 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불필은 처음 자신을 피했던 성철처럼 자신도 어머니를 피했다. 그럼에도 이덕명이 석남사를 계속 찾자 석남사의 주지였던 인홍이 나서 성철은 저렇게 법명을 떨치고 있으며 딸도 참선하는데 이덕명도 힘들게 살지 말고 차라리 절에 들어와 같이 살면 딸도 볼 수 있고 좋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이덕명은 가만 생각해보니 세속에 더 남은 인연도 없고 맞는 말 같아 출가를 결심하여 50대의 나이에 일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하게 된다. 그리고는 16년간 정진하다 1982년, 사망에 들었다. 이때 성철은 조계종의 종정이었는데 소식을 듣고는 제자에게 불필의 아는 승려가 죽었으니 석남사에 다녀오라며 모래를 씻은 후 광명진언을 108번 외운 후 전달했다고 한다.
불필은 1993년에 아버지 성철이 사망했을 때 차마 다비식에 가지는 못하고 다비식이 끝난 뒤에야 산에서 9번 절만했다고 한다. 현재 불필은 아버지 성철처럼 해인사에 거주 중이다. 불필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 생애 태어나면 성철의 상좌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다. 불제자로서의 스승이자 속세의 아버지인 성철을 상당히 존경하는 듯하다.
7. 기타
- 1980년대 조계종 최고지도자인 종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속화되는 종단의 분규[34] 등을 멀리하며 해인사의 말사인 백련암에서 기거했다. 역설적으로 고승으로 점차 명망이 높아가자, 정치인과 재벌 등 여러 유력자들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성철은 아예 백련암 근처에 몇 년 동안 가시덤불을 쳐놓고, 수행하는 승려 두어 명 외에는 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있는 다른 말사인 희랑대가 성철 생전 백련암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을 만나려 했으나, 성철은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 할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며 3배를 요구하여 만남이 무산된 적이 있다. #
- 성철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는 기워 입은 누더기 승복이다. 그러나 사망 후 그려진 탱화나 입상 같은 건 죄다 어째 번쩍번쩍하다. 심지어는 꾀죄죄한 말사였던 백련암도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포장하고 높은 누대를 쌓아 웬만한 사찰 규모로 키워버렸다. 현재는 백련암 오두막 뒤편에 성철의 좌상을 모신 커다란 법당이 자리한다.
- 마찬가지 맥락으로 사망 당시 다비(화장)를 거창하게 하지 말고 사리를 뒤지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스승을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 다비식을 거창하게 열었다. 사리도 방송 카메라 앞에서 대대적으로 공개 수습했다. 다비식 당일에는 지상파/라디오 방송 3사 및 BBS에서 모두 출동하여 다비식을 생중계할 정도였다. 해인사를 비롯한 일대가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룬 것은 당연지사. 이 때 110여과의 상당히 많은 사리가 나와서 모여든 신도들도 "역시 큰스님"이라며 안도했다고 한다. 사리 항목으로. 사리탑은 해인사 경내에 있는데 상당히 현대적인 형태이다.
- 성철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성철을 보필한 원택 스님이 저술한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와, 성철의 딸 불필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등이 있다. 불필 인터뷰
-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성철의 생가가 있다. 성철이 사망한 후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산청군에서 관광의 일환으로서 생가 복원에 나섰고 불필의 동의를 구해 생가를 복원하였다. 다만 불필은 생가만 덜렁 있는 건 의미가 없으니 관리도 할 겸, 사찰이 같이 있어야 한다 했고 그래서 불사를 일으켜 겁외사(劫外寺)란 이름의 사찰이 2001년 3월 건립되었다.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바로 옆에 있으며 단성IC에서 3분이면 접근 가능하다.
-
성철은
유학자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아들이 출가하자 아버지는 "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면서 집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쳐놓고 매일 물고기를 잡아와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내가 살생하는 것이 불살생을 원칙으로 하는 석가모니에게 복수하는 것"이 이유였다고.[35] 당시만 해도
숭유억불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유학자 집안에선 승려로 출가하는 걸 매우 천시하는 편이었고, 그것도 가문을 이을 장남(맏아들)이 그리했으니 아버지 입장에선 정말 반감이 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나중에 가서 아들이 깨달음을 얻은 고명한 고승이 된 것을 보고 나서는 마음을 풀고, 15년 만에 강 앞에 쳐두었던 그물을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놈들아 나는 성철 스님에게 간다!!"고 고함을 지른 뒤 숨을 거두었다.
성철의 어머니 진주 강씨는 남편이 사망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정식 출가는 안했지만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생활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겠다"며 여생을 마쳤다. 또한 성철의 아내 이덕명은 남편과 외동딸이 모두 출가하고 시부모도 사망한 이후 딸 불필의 은사 인홍의 권유로 출가하여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고 비구니로 삶을 마감하였다.
- 1967년 해인사에서 있었던 법문에서 법정이 참관을 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질문을 하는 탓에 곤란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같은 자리에 있던 신도가 법정의 질문을 제지할 정도.
위 영상에는 질문과 스님(성철)이라 되어 있으나, 질문자가 모두 목소리를 들어보면 법정이다.
- 어린이를 대단히 좋아해서 격의 없이 함께 신나는 장난을 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남자아이가 장난으로 성철 귀에 빼액 소리를 질렀는데 그 때문에 성철은 잠시 한쪽 귀의 청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후유증을 얻었지만 그래도 성철은 그 아이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고.
- 일찌기 명망 높은 승려로 알려져 수행하는 사찰에 툭하면 별별 사람들이 만나고 싶다며 왔다고 한다. 아래에 언급할 단순히 삼천배 하고 오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무슨 도술을 겨뤄보자는 식의 괴짜들도 있었다고. 특히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며 성철에게 이를 인정받으려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철이 잘 설득해서 자신이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순순히 돌아갔지만, 가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거나 성철을 비방하는 자들도 있어서 골머리를 앓게 했다고.
- 김을 아주 좋아해서 밥반찬으로 빠뜨린 적이 없다고 한다.
- 성철의 유언은 "참선 잘 하라"다. 일부 기독교계 종교인들이 유언을 거짓으로 창작해 퍼뜨리곤 했다. #반박글 요즘도 자주 지옥은 존재한다, 불교 믿으면 지옥간다 등의 근거로 활용되며 등장하는 거짓말이 되었다.
8. 관련 자료
- 다큐멘터리
- 다큐멘터리극장: 큰스님 성철 (총 2부작 / KBS1, 1994) 1편 보기, 2편 보기
- 성철 스님을 찾아서: 붉은 한 수레바퀴 푸른 산에 걸렸다 (MBC, 1995)
- 스님, 성철 큰스님 (SBS, 1995): 백련문도회 측이 성철의 생전 캠코더 자료 등을 토대로 제작한 5부작 8시간 25분짜리 영상물이며, 1995년 부처님오신날 특선으로 80분으로 줄여 방영한 후 장경각미디어에서 비디오테이프로 냈다.
- KBS 스페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KBS1, 2012) 보기
-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 제자인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을 보좌하면서 있었던 일화를 담담하게 풀어낸 에세이이다. 2001년 초판이 나왔으며 이후 2016년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 영원에서 영원으로: 성철 스님의 혈육인 불필 스님이 쓴 회고록이다.
9. 관련 단체
- 백련불교문화재단: 산하 기구로 성철사상연구원을 둔다.
[1]
강대수(姜大遂)의 딸이다
[2]
출가하기 전에 혼인해서 딸이 2명 있었는데, 훗날 둘째 딸도 출가해 성철에게 '불필(不必)'이란 법명을 얻었다.
[3]
오랫동안 앉아서 눕지도 않았던 것을 말한다
[4]
입적(入寂)은 승려 또는 고승이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5]
당시 문제는 "얼마 전 사망하신 성철 스님의 몸에서 110여 과의 ( )가 나왔다." 선택지는 구슬, 다비 등등.
[6]
여기에는
10.27 법난이라 불리는
제5공화국 신군부의 불교계 탄압에 대한 반발도 크게 작용했다.
[7]
대표적으로 대오지심(待悟之心). 간화선에서 쓰는 표현이다.
[8]
이 때문에 학술적으로 수심결의 성립 연대는 지눌이 1198년 41세의 나이로 대해어록을 읽고 3번째 깨달음을 얻은 시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실 성철의 주장과 달리 지눌이 남긴 저술들은 정혜결사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화선을 접한 이후의 저작물들이라는 게 정설이다.
[9]
물론 성철의 지눌 비판이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국
조계종은 다양한 수행을 하던 여러 불교 문중들이 몰리면서 생겨났기에 정체성 문제 해결이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고, 실제로 지눌의 저술에는 간화선 외 다른 선종 종파나 화엄 계통의 영향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성철의 곡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리고 성철이 애써 간화선으로 종단의 정체성을 잡은 조계종은 2000년대 들어서 남전불교와 염불선의 대중화와 그동안 지속되어 온 간화선 중심주의에 대한 학계/승가/재가자들의 비판 등으로 성철이 꿈꾸던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고, 오히려
"간화선의 위기다"라는 말이 나오는 실정이다.
[10]
그리고
선종 자체가 좋든 싫든
화엄종보다 나중 나타난 후발주자인데다 원래부터 사상/교학 등의 측면에서는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종파다.
[11]
성철이 임제종의 간화선을 조계종의 정체성으로 놓은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는 당시 한국 주류 선승들의 생각이던 간화선=정통불교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고, 전술하였듯 이는 실제 불교사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12]
다만 이는 비슷한 시기
중국도
성리학이 관학을 차지하면서
불교에 대한 취급이
영 좋지 않은 편이었기에, 비슷한 문제를 보인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경우에도
여진족 자체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고 중시한지라, 중국 전래의 종파들은 생각만큼 잘 나가진 않았다.
[13]
그것도 불교 서적부터 외국 시사잡지까지 굉장히 다양했다. 책을 아주 아껴서 주기적으로 바람 쏘이고, 먼지를 제거하는 거풍을 정기적으로 행했는데 당연히 자신의 제자들을 부렸다.
[14]
성철의 상좌였던 승려의 회고로는 워낙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3천배를 할 정도로 간절한 사람, 불심이 깊은 사람이면 만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이 성철에게 법정이 해인사를 떠났다고 말하자, '법정은 절대 붓을 눕히지 않는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15]
법정은 과거 성철을 만나러 해인사에 왔다가 신자들이 3,000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신자를 돌보기는커녕 의미 없는 고생을 시킨다며 성철을 권위적인 사람으로 오해하고 비판하며 해인사를 그대로 떠난 일이 있었다. 이후 이 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오해했음을 인정하고 그런 생각을 모두 버렸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성철은 본인이 백번 신자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 보다 '답은 너희들 안에 있으니 직접 깨달으라'는 강한 철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본인도 무염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교 신자였다.
[17]
이미 성철 사후 해인사에서 열반송의 원문을 공개했을 때부터 한학자들 사이에 해석을 놓고 순서를 바꿔야 한다느니 갑론을박이 있었다. 불교계에서는 고명한 고승의 열반송은 그 뜻을 새겨서 따르고 실천하는데 의의가 있지 자구에 매달려 일일이 분석할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18]
그리스도인을 위해 쉽게 비유하자면 부정신학 및 신비신학 쪽, 특히
중세
독일 신비신학과 근대 초
가르멜 수도회 영성이 구사한 역설적 어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예: "모든 것에서 만족하려면 아무것도 만족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 네가 아닌 것이 되려면 네가 없는 곳으로 가라.", by
십자가의 요한)
[19]
불교신문에 따르면 1994년 하이텔 상담실에 올라온 질의응답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넷상에서 법정의 말로 잘못 알려졌던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고 어느 승려가 말했다는 말의 출처가 여기일 수도 있다.
[20]
성철 자신이 종정이라는 고깔을 쓰니까 인터뷰도 오고 하는 모양인데 나라고 뭐 대단한 사람이냐, 종정 고깔 벗고 나면 나라고 뭐 여느 중들과 다른 게 있는 줄 아느냐, 종정 고깔 썼다고 나보고 뭐 얻으러 오지 말고 각자가 가진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스스로 개발해 쓰라 정도의 뉘앙스.
[21]
다소
노오력 내지
의지드립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성철은 적어도 젊은 세대를 닦달만 해대는 꼰대들과 달리 "내가 뭔가 잘못 가르친 것은 없을까? 저들에게 뭔가 빠뜨리고 전한 것은 없을까? 내가 이렇게 가르친 걸 쟤네들이 저렇게 잘못 이해했다면 내가 그들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도의 자기 반성을 했기 때문에 "한 평생 세상을 속였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성철의 열반송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겸허함의 표현이다.
[22]
그도 그럴 것이 불교계에서는 성철의 저 발언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 같아서, 성철 사후에 제작된 5부작 다큐멘터리의 부제가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으므로. 애초에 불교 신자나 승려들은 성철의 '내 말에 속지 마라'는 그 말이 개신교도들에게 저렇게 트집을 잡힐 줄도 몰랐던 것이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는 것도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깨우치지 못하고 떠나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었고,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라고 한 것도 본인이 떠나는 순간을 하나의 장엄한 낙조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23]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것.
[24]
사실 중국 선종에서는 마조도일(馬祖導一)의 제자 석공혜장(石鞏慧藏)처럼 사냥꾼으로 살던 사람이 불교의 가르침(+ 선사의 카리스마)에 감화받아 깨달음을 얻은 경우도 있다.
[25]
열반경.
[26]
마태오의 복음서 5장 45절에도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라는 구절이 있다.
[27]
법화경 제8 오백제자수기품
#
[28]
출처: <성철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선종의 정통사상을 이해하는 긴요한 보전>
[29]
법화경 제12 제바달다품
[30]
불교에서 말하는 데바닷타의 죄는 크리스트교의
이스카리옷 유다에 버금간다.
[31]
그나마 유다는 죄를 지을 거란 예언이 이미 있었고 이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자결했으나 데바닷타는 그런 예언도 없었다. 죽은 이유 역시 부처를 해하려다 자신이 당한 것이다.
[32]
큰 딸은 14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33]
본래 성철의 가문은 지역 내에서 내로라 하는 지주 집안이었다.
[34]
단순히 세속화된 종교의 내부 갈등이라고 단순화시킬 순 없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사실과 정치 권력, 그리고 종단 내부의 인맥과 이권까지 얽히고 섥혀 있다. 지금도 잊을 만 하면 터져나오는 조계종 내부의 각종 분란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시절까지 연결된다.
조계종 항목으로.
[35]
지금이야 덜하지만, 유교 가풍이 많던 시절에는 집안 사람이 출가한다고 하면 불교에 대한 선입견으로 일부러 살생의 금기를 깨는 육식 위주의 식사를 대놓고 하는 집안이 많았다. 특히 절간 같은 곳에서 고기를 굽거나, 인근의 계곡 등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은 불교에 대한 도발인 셈.
[36]
대화록이 출판되었다. 저서:설전 2016 / 책읽는섬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