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雪原
설원( 雪 原, snowfield)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눈이 녹지 않아 식물등이 자라기 어려워 옛날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은 고기와 열매였다.[1] 다만 근대화가 되가며 교류가 활발해져 세계 각지의 음식들을 구하기 쉬워져 365일 고기만 먹는 문화는 대부분 사라졌다.
2. 신라의 인물 薛 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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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랑을 붙여 설원랑( 薛 原 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남모와 준정이 원화가 되었다가 서로 다툰 사건으로 진흥왕이 원화(源花)를 폐지했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 원화의 역할을 대신할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 이 때 진흥왕이 설원랑을 초대 국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임명하고 명주(溟洲)에 비석을 세워서 이를 기렸다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한편 다른 기록에는 삼국사기 악지에 실려있는 기록에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이라는 가곡이 있는데, 지은이가 원랑도(原郞徒)이라고 하였다. 이름이 유사하여 원랑도와 설원랑과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짤막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었다. 위서로 의심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초대가 아닌 7대 풍월주로 나온다.
2.1.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행적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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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초대 남모 / 준정 | ← | 7대 설원 | → | 8대 문노 |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전하는 화랑세기에만 서술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단락의 내용은 가공일 가능성이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7대 풍월주로, 풍월주가 된 뒤 설화랑으로 이름을 바꿨다. 5세 풍월주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남편이자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가 전사한 뒤 구리지의 용양신(이름 자체는 동성애 파트너를 의미. 총신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렸다'는 묘사를 봐서는...) 설성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구리지가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설성을 발견하고 그의 집에 갔는데, 그의 어머니는 옛날 출진하는 낭도와 사랑을 나눠 설성을 낳았고, 14년 동안 그를 위해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구리지는 그 여인을 첩으로 삼아 아들 셋을 보았고, 설성은 구리지의 신하가 되었다. 설성의 어머니 이야기를 설씨녀 설화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사다함의 의붓동생으로, 그의 부제가 되었다. 원래 풍월주는 부제가 잇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다함이 죽었을 때 아직 어렸기 때문에 풍월주가 되지 못 하고 김세종이 풍월주가 되었지만 부제의 자리는 유지했다.
아버지 설성의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에 무시당했으나, 미실의 사랑을 받아 전격적인 지원을 받는다. 미실의 권유로 3세 풍월주의 아내였던 준화를 아내로 삼자, 그제서야 여러 낭도들이 따랐다. 참고로 준화는 과부가 된 지 18년이 지났고 당시 나이는 38살이었다. 거기다 설원의 어머니 금진의 언니로 설원의 이모이기도 하다(어머니가 다른 자매일 가능성이 높다). 준화는 설원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이중 차남인 잉피가 원효대사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미실이 괴질에 걸리자 밤낮으로 간호하며 자신이 병을 대신하겠다고 빌어 마침내 그 병으로 죽었다. 향년 58세. 그가 죽자 미실은 크게 슬퍼하며 자신의 속옷을 관에 넣어 "곧 그대를 따라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미실과의 사이에서 16세 풍월주 보종이 태어났다.
2.1.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자세한 내용은 설원(선덕여왕) 문서 참고하십시오.3. 설화집 說 苑
《설원》(說苑)은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 유향(劉向)이 전래된 중국의 설화를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2000년 전 나라를 이끈 군주들, 그리고 그 군주를 보좌한 신하들의 이야기 모음집이다. 황실과 민간에 소장된 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은 후 선택, 분류, 정리해 편찬해 사료 가치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별록(別錄)≫, ≪신서(新序)≫ 등을 편찬한 한나라의 학자 유향이 유가의 정치사상과 윤리도덕을 알리기 위해 엮은 이 책은 통치의 흥망성쇠와 통치자의 성패의 비결을 전해 준다.
3.1. 개요
진시황이 국가 통치에 방해가 된다거나 민생에 이롭지 않다고 생각된 전적들을 모두 수거해 불태우자, 화를 당하지 않은 전적들은 자연히 민간으로 흘러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게 민간에 소장되게 된 것들과 본래 민간에 보존되었던 전적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분실되거나 훼손되어 갔다.진나라를 이어받은 한나라가 점차 안정되자 국가의 전례 제도나 문물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통치자들은 옛 전적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전적들을 다시 수집해 보관하고 정리하는 국책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한 사람이 유향(劉向)이다. ≪설원(說苑)≫은 유향이 황실과 민간에 소장된 관련 자료들을 집록한 후 선택, 분류,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고사 모음집이다.
3.2. 정치의 원리
≪설원≫은 유가의 정치사상과 윤리도덕의 관념을 깊이 반영했다. 이것은 유향이 유가사상가이자 학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려 했던 결과다. 또한 왕조가 쇠퇴하는 추세뿐 아니라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사치를 목격하고서, 제국을 바로잡아 보려는 노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임금, 우임금으로부터 진한(秦漢)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의 언행이나 사건 또는 일화를 모아 정치의 흥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거울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군주와 신하들을 권면하고 조정을 정돈하며,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유향은 각 고사를 통해서 제왕, 장상(將相), 사대부 들에게 어떻게 해야 바른 군주, 바른 신하, 바른 백성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국을 일으키고 백성을 다스리며 외교를 처리할 것인가를 제시했다.이렇게 유향이 모은 이야기들에는 백성이 치국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든가, 세금을 경감해야 한다든가, 욕구를 억제하고 사치를 경계해야 한다든가, 통치자는 현신과 간신을 구별해야 한다든가, 현사를 높이고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 등, 통치자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통치의 모든 덕목이 담겨 있다.
3.3. 학술적 평가
학술상으로 볼 때, ≪설원≫은 문헌적인 면이나 문학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전적이다. 문헌적인 면에서는, 사료를 잘 보존하고 있어서 선진시대의 많은 전적을 정리할 때에 다른 전적들과 비교해 교감을 하거나 사실을 바로잡고 증명해 내는 데에 많은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이미 도가의 ≪이윤(伊尹)≫이나 소설가의 ≪윤자설(尹子說)≫ 등, 일실된 선진시대의 문헌이나 제자(諸子)의 일설을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문학적인 면에서도, ≪설원≫에 실린 이야기들은 허구적으로 창작한 것은 아니더라도 권고와 경계를 편찬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유향은 사실 추구보다는 사상성에 관심을 두어서 원문을 일부 개편했다. 그래서 때때로 논평하는 말을 삽입하기도 하고 수사를 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우언적 수법을 채택해 생동감 있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했으며, 비유적인 수법을 채택하기도 했고, 어떤 곳에서는 위진시대의 소설 맛을 드러내기도 해서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3.4. 여담
북송 시대에는 잔본만이 남아있고, 완질본이 이미 없어진 상황이었으나, 고려에서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을 부탁하였다는 기록이 《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고려사 선종 8년(1091) 신미년 6월 병오일에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나라에서 귀국해, “송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선본(善本)이 많다는 말을 듣더니 관반(舘伴)[2]을 시켜 필요로 하는 서적 목록을 주면서 비록 완질이 아니더라도 필히 베껴서 부쳐 달라고 당부했습니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그 서적들이 고려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으면 보내달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송나라가 요청한 희귀 서적 목록 중에 설원만 남아 있었고, 고려가 소장한 설원 고려본을 송나라로 보냈다. 이 기록은 육유(陸游)의 위남집(渭南集)에 기록된 이덕추(李德芻)의 말을 인용한 글에 나온다.[3]
3.5. 관련 고사성어
-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 곡돌사신(曲突徙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