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19:31:20

샤킬 오닐/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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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킬 오닐의 커리어를 서술한 문서.

2. NBA 이전


(이 영상은 국내의 농구 잡지인 rookie 창간호에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비디오 테잎과 동일하다.)


고등학생때 이미 괴물 센터로 활약해 소속팀을 2년 동안 68승 1패의 먼치킨 팀으로 만들고 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으며 루이지애나 주립대에 진학하고 나서는 1991년과 1992년에 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뽑히고 올 아메리칸 중 한 명으로 지명되는 등 최고의 기대주로 손꼽혔다. 오닐이 1992 드래프트에서 1픽을 가지고 있던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면서 전설이 시작됐다.

3. NBA 경력

커리어 대부분을 한 팀에서 보낸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하고는 달리 팀을 여러번 옮기며 다사다난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모습은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모제스 말론[1], 디시전쇼 이후의 르브론 제임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2]

3.1. 올랜도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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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즌 올랜도 매직의 성적을 전년의 21승에서 41승으로 끌어올렸으며 23.4득점 13.9 리바운드 3.5 블록을 기록해 루키 시즌에 올스타전 주전으로 선발되는 위엄을 과시했고 그 시즌 신인상을 차지한다.[3]

이듬해 마이클 조던이 야구 하러 떠난 사이 오닐은 득점왕 경쟁에 뛰어들며 두 시즌 만에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로 떠오르는 경악스러운 포스를 자랑했다. 경쟁 상대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몰아받으며 71득점을 기록해 득점왕은 로빈슨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아무튼 1993 드래프트 직후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된 다음 올랜도 매직에서 데뷔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신생팀이던 올랜도를 신흥 강팀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에서도 NBA 붐이 막 일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닐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다.[4]

첫 플레이오프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만나 시리즈 스코어 0-3으로 탈락했다.[5]

오닐의 상승세는 3년차에도 거침없었다. 지난 시즌에 실패했던 득점왕 타이틀 획득에 성공하고 올랜도 매직을 57승 25패로 동부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보스턴을 3-1로 격파, 2라운드에서 마이클 조던이 갓 복귀한 시카고를 4-2로 꺾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에게 4-3으로 승리하면서 설욕까지 완료한다.

파이널 상대는 하킴 올라주원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끌던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 로키츠였는데, 사실 당시에는 늙은 6시드[6]였던 로키츠보다는 젊고 에너지 넘치는 매직이 이길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닐은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리즈 평균 28.0득점 12.5리바운드로 최선을 다했으나 더 괴물같았던 올라주원의 퍼포먼스[7]와 휴스턴의 관록 앞에 0-4로 스윕당하고 말았다. 오닐이 이 시기를 회상하기를, 마이클 조던을 꺾은 이후 너무 빨리 축배를 든 것이 독이 됐다고 한다.[8] 이런 활약상에 그 때 당시 위대한 50인의 NBA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되지만 그 때 반응들은 너무 시기상조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9]

1995-96 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초반에 결장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60승 22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72승의 시카고 불스. 결국 시카고에 0-4로 탈탈 털리고 만다.[10][11] 이후 앤퍼니 하더웨이에게 더 호의적인 구단과의 불화와 악담을 계속하던 지역 언론 때문에 올랜도 매직을 버리고 7년 $121M 계약을 맺으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24년 2월 13일, 그의 번호 32번은 매직 최초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여담으로 영구결번식에는 그의 은사였던 브라이언 힐 감독을 비롯해 닉 앤더슨, 데니스 스캇, 앤퍼니 하더웨이 등의 레전드들도 함께했다.

3.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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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초기에는 유타 재즈 칼 말론& 존 스탁턴 듀오[12] 팀 던컨을 얻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밀렸으나 명장 필 잭슨의 지도 및 코비 브라이언트가 정상급 슈팅 가드로 성장하며 오닐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하킴 올라주원 등이 내리막길을 걷는 반면 경험이 쌓이고 몸을 불린 오닐이 리그의 지배자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9-00 시즌은 오닐의 선수생활 중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7승 15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뒤 득점왕, 올스타전 MVP 그리고 정규시즌 MVP를 모두 차지했는데[13], 이 과정에서 MVP 투표 121표 중 120표를 싹쓸이[14]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이어 플레이오프에서는 새크라멘토, 피닉스, 포틀랜드를 차례로 꺾은 뒤 노장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와의 2000 NBA 파이널에서 평균 38.0득점 16.7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61%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시리즈 스코어 4-2를 만들며 첫 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고 파이널 MVP까지 수상하면서 시즌을 완벽하게 마쳤다.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포틀랜드, 새크라멘토, 샌안토니오를 모조리 스윕해버리는 위엄을 과시했다. 이후 열린 2001 NBA 파이널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앨런 아이버슨이 투혼을 불태우며 첫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줬지만 오닐과 코비 원투펀치는 이후 무자비하게 4연승을 거두며 두 번째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다.[15]

이듬해 200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던 새크라멘토 킹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다시 파이널에 진출한다.[16] 2002 NBA 파이널에서 만난 제이슨 키드가 이끌던 뉴저지 네츠의 양민 골밑부대는 오닐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며 3연패에 성공했다. 2000년대 초 오닐은 1990년대 마이클 조던의 뒤를 잇는 말그대로 대마왕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티팬들을 무수하게 양산한 시기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기에 NBA 시청을 끊었다는 반응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다.[17][1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오닐의 장기집권은 영원할 줄 알았지만 오닐은 발가락 부상 때문에 수술을 받고 오닐 본인은 이 때를 기점으로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레이커스 왕조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사실 레이커스 왕조가 3연패를 끝으로 무너진 것은 오닐의 기량 하락보다는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갈등 문제가 장기집권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코비는 결코 팀 내 2인자 자리에서 만족할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닐과 코비 사이의 권력다툼은 점점 심해져갔다. 사실 둘이 힘을 합치면 3-peat을 넘어서 과거 1960년대 보스턴 셀틱스만 달성했던 4-peat 이상의 성과를 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둘에게는 본인이 메인이 되어서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오닐이 골밑을 흔들다가 수비가 견고해지면 코비 쪽으로 가거나 혹은 코비 쪽에서 흔들고, 난사하다 안 되면 오닐 쪽으로 가는 등 당시 레이커스에게 팀 플레이란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코비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인 로버트 오리 데릭 피셔 등은 정상적인 자신들의 포지션보다는 오닐과 코비를 받쳐주기도 바빴다. 오닐 아니면 코비라는 극단적인 전술이니 타 팀들은 파훼법을 찾기가 쉬워지니 점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19]

여튼 오닐과 코비의 레이커스는 4-peat를 노렸지만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점점 전설의 파워 포워드가 되어가는 팀 던컨과 현역 마지막 시즌을 맞이한 데이비드 로빈슨, 당시에는 기복이 있었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그래도 팀에 잘 적응하였던 토니 파커 마누 지노빌리가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꺾이고 만다. 오프 시즌에 오닐은 우승을 위한 염가계약을 맺으라고 칼 말론 게리 페이튼을 꼬드겨 그 유명한 전당포 라인업을 만들지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재계약 협상에서 잡음이 일고, 코비는 덴버에서 성추문에 휘말리며 팀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다.[20]

그 와중에도 휴스턴, 샌안토니오, 미네소타를 격파하며 어찌어찌 파이널에는 진출했지만 래리 브라운 감독의 디트로이트에게 1-4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만다. 당연히 여론은 최악이 되었으며 코비와의 파워게임[21]에서 패배한 오닐은 카론 버틀러, 라마 오돔, 브라이언 그랜트와 트레이드되어 마이애미 히트로 향한다.

3.3. 마이애미 히트

파일:attachment/Heat_Shaq.jpg
마이애미 히트에 온 오닐은 우승을 안겨주겠다고 장담한다. 발가락 부상 이후 전성기가 끝나 과거 같은 영향력은 더이상 아니었으나 마이애미 이적 첫 시즌에도 평균 22.9득점 10.4리바운드를 달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전 시즌 동부 4위였던 소속팀을 59승 23패로 동부 1위 겸 전체 2위로 이끌며 2004-05 시즌 MVP 투표에서 피닉스 선즈 스티브 내시를 턱밑까지 추격했다.[22]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재회하였으나 상대 센터 벤 월러스, 베테랑 엘든 켐벨 등의 분전에 밀려 아쉬운 성적을 남겼고, 팀도 7차전 끝에 패배했다.

그래도 MVP 2위 성적을 바탕으로 5년 $100M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 연장계약에는 뒷얘기가 있는데 레이커스와 오닐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돈 때문이었다. 오닐은 1996년에 7년계약을 맺으며 레이커스로 왔고 2000년에 3년 연장하며 (마지막 1년은 선수 옵션) 2005-06 시즌까지 계약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0대가 넘어가고 부상이 잦아지던 오닐은 2003-04 시즌 도중 연장계약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문제는 당시 규정으로 (맥스계약 도중) 가능한 최대기간인 3년 연장계약을 할 경우 오닐에게 지급할 액수가 3년간 약 1억 500만 달러에서 1억 15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었다는 것. 오닐의 연봉은 1996-97 시즌부터 매년 액수가 올라가 2005-06 시즌에는 3천6십만 달러를 받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34세가 된 오닐에게 연평균 3000만 달러 이상을 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선택이었다. 레이커스가 오닐을 포기하게 된 것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는데, 오닐을 잡기 위해선 지출하는 기존의 금액은 그럴만 하다고 쳐도 노장 오닐에게 저 돈을 지불해야했기 때문.[23] 반면 오닐은 그 높은 자존심 때문에 코비에 이은 2인자로 여겨지기 싫어했고, 이 때문에 연봉/팀내 입지에서 확실한 넘버원이란 걸 확인받고 싶어한 것이다.

그런데 히트 이적 후 상황이 달라진다. 오닐은 코비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드웨인 웨이드에게 호의적이었고, 알아서 '이 팀은 웨이드의 팀이다'라고 할 정도로 유한 태도를 보였다. 위에 언급한대로 2005-06 시즌 3000만 달러를 받게 되어있던 오닐은 2005-06 오프 시즌 당시 이 옵션을 포기하고 히트와 1억달러/5년 계약을 맺는다. 이 액수는 당시 그가 받을 수 있는 최대액수보다 상당히 삭감된 액수이며, 심지어 다른 팀과 일체의 접촉도 하지 않고 히트와 바로 계약한 것이다. 물론 플로리다는 주세가 다른 주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다른 팀과 더 많은 액수로 계약하는 것보다 이득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당시 오닐 정도 위상이면 맥스계약을 요구할 만 했으며, 이미 보장된 3천만 달러를 포기한 것만 해도 꽤나 팀을 배려한 선택이었다.[24]

다음 시즌에는 오른쪽 발목부상으로 18경기를 결장하고, 감독이 팻 라일리로 바뀐 후 출장시간을 제한받으며 스탯은 많이 낮아졌어도 개의치 않아했다.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마이애미의 떠오르는 샛별 드웨인 웨이드를 보좌해 조역으로서 네 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계속 부상을 입으며 하락세를 겪다가 2008년 2월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된다.

사실상 오닐의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마이애미 시절까지였고 그 이후에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한 저니맨 행보를 보이게 된다.

3.4. 저니맨이 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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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시즌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출장도 못해보고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 탈락하면서 이제는 퇴물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오닐은 뛰어난 피닉스 의료진의 힘을 받고 스티브 내시의 지원에 힘입어 2008-09 시즌에 폼을 약간 회복, 2009 올스타전에서 악연이 많았던 코비와 오랜만에 같은 팀에서 뛰었고, 공동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면서 올-NBA 서드 팀에도 들었다. 하지만 팀은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피닉스는 연봉 문제 때문에 오닐을 트레이드시킨다. 사실 피닉스 시절은 오닐이 올 NBA팀과 올스타에 선정된게 마지막일 정도로 오닐 최후의 불꽃이었다고 평가하는 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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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닐의 다음 행선지는 청년가장 르브론 제임스가 혼자 애쓰고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클리블랜드는 2009년 동부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인사이드를 털렸던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는 이를 막기 위해 오닐을 영입했다. 오닐은 클리블랜드에 오면서 '킹에게 반지를'("Win a ring for the king") 이라 선언했으나 어느덧 리그 최고령이 된 그에게 큰 힘은 없었고, 2라운드에서 폴 피어스- 케빈 가넷- 레이 앨런으로 구성된 BIG 3의 보스턴 셀틱스에게 2-4로 걸려 탈락한다.[25] 르브론은 이후 디시전 쇼를 벌인 다음 마이애미 히트로 떠나고 오닐은 자유 계약 신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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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의 5번째 우승에 자극 받았던 건지 오닐은 베테랑 미니멈 계약으로 보스턴 셀틱스와 2년 계약을 맺고 마지막으로 파이널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여러 부상 때문에 37경기만 출장했고 커리어 로우를 기록, 플레이오프에서도 두 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2011년 6월, 현역 은퇴선언을 하면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보스턴 셀틱스 시절의 오닐은 많은 이야깃거리는 없지만, 심판에게 뭐라고 한 소리 했다가 3만 5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어 라커룸에서 Whhhhhy Whhhhhy Kevin[26] Whhhhhy라며 명장면을 남겼다. 이 장면은 샥틴 어 풀의 오프닝으로도 활용되었다. 억울한 샤킬 오닐[27]

2013년 4월 2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레전드 제리 웨스트, 필 잭슨과 수많은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면서도 그답게 유쾌한 영구결번식이 열렸다.
2016년 2월 9일, 마이애미 히트도 오닐의 32번 저지를 영구결번하였다.

2023년 2월 13일, 올랜도 매직에서도 실질적인 첫 영구결번이 되었고, 오닐의 32번 저지를 영구결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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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모제스 말론은 전성기 시절부터 대부분 팀의 의지로 트래이드되었지만 (한창 때이던 휴스턴, 필리, 워싱턴 이적 모두 타의로 이뤄진 것) 오닐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이적했다는 것이 다르다. 1996년에 점점 커가는 앤퍼니 하더웨이와 팀내 에이스 자리를 두고 약간 불편한 관계가 되자 (다만 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때문에 은퇴 이후에도 앤퍼니를 많이 칭찬하는 편) 이전부터 자신이 관심 있는 엔터테인먼트 활동도 할겸 FA 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옮겼고, 코비와는 에이스 역할+성폭행 혐의 사건 당시 코비의 실언+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둘이 몇년 간 서로의 성질을 긁는 바람에 거의 원수 사이가 되어 이후 마이애미로 옮길 때는 트래이드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 본인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둘은 경기 전 악수와 포옹을 할 때 거의 의무적으로 눈도 안 마주치고 했으며, 몇년 뒤가 되어서야 서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2009 올스타전 공동 MVP가 되어 서로 웃고 떠들고 했으니 앙금을 많은 부분 떨쳐버린 듯) 하락세가 시작된 이후 피닉스와 캐브스 이적은 팀의 의지, 마지막 보스턴 이적은 자유계약으로 자기 의지. [2] 어찌보면 트렌드를 앞서간 선수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전까지 NBA에서 MVP급 선수들은 웬만해선 팀을 안 옮기는 것이 추세였다. 옮기더라도 전성기가 지난 후에 옮기거나(1996-97 시즌 휴스턴 빅3), 누가봐도 옮겨야 될만큼 상황이 답이 없을 때(피닉스로 간 바클리, 보스턴으로 간 가넷)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자발적으로 팀을 옮긴 거물급은 거의 없었다. MVP급 실력을 지닌 선수가 팀전력도 우승후보급인데다가 프랜차이즈도 나쁘지 않은데 두 번이나 팀을 자발적으로 옮긴 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다.(특히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2010년대부터 선수들이 프랜차이즈에 대한 loyalty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커리어나 삶 위주로 거물급들도 자유롭게 옮기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는데, 오닐은 1972년생임에도 이런 모습을 벌써 보여준 것. [3] 여담이지만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고 MVP 투표에서 7위에 올랐음에도 올-NBA 서드 팀에도 오르지 못한다. NBA는 해마다 리그 최고의 가드 2명, 포워드 2명, 센터 1명을 올-NBA 퍼스트 팀으로 선정하고, 그 다음 다섯 명을 올-NBA 세컨드 팀, 그 다음을 올-NBA 서드 팀에 선정한다. 보통 이 정도 성적을 거두면 올-NBA 팀은 아주 무난하다는 걸 감안하면 1990년대 센터 포지션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듬해에는 더 심했는데 MVP 투표 상위 5명 중 4명이 센터여서 패트릭 유잉은 MVP 투표 5위에 오르고도 올-NBA 서드 팀에도 못 올랐다. 참고로 이해 유잉의 성적은 24.5점 11.2리바운드 2.7블록에 팀은 동부 2위였다.(승률로는 1위 애틀랜타 호크스와 동률) 비록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4대 센터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4] 다만 이 인기는 올랜도 시절 한정이며 레이커스 이적 후 쓰리핏을 달성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안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게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안티가 아니라 혼자서 너무 압도적인 플레이를 펼쳐 매 시즌 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NBA를 재미없고 시시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생긴 안티들로, 어찌 보면 오닐의 위엄이라고 할 수 있다. [5] 여담이지만 이때 올스타전에서 2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득점왕 직전까지 가는 등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던 오닐이 좀 아니꼬았던 건지, 당시 그가 득점을 하려고 하면 하킴 올라주원, 칼 말론, 찰스 바클리, 데이비드 로빈슨 등 서부의 슈퍼스타 빅맨들이 달려들어 블록을 하거나 득달같이 파울을 해버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닐은 동부에서 두 번째로 많은 26분이나 뛰고 슛을 12개나 시도해 고작 2개밖에 못 넣고 자유투를 11개 던져 4개 성공해 고작 8점에 그쳤다(참고로 그와 주로 매치업된 올라주원은 개인파울을 네 개나 했지만 블록을 다섯 개나 했다.). 그의 백업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24분 뛰고 20점을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짜증이 난 건지 경기 종료 몇분전에 수비가 좀 느슨해지자 림을 쥐어뜯을 기세로 어마어마한 파워의 슬램덩크를 두 차례 꽂아넣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올스타전은 지금처럼 단순한 이벤트전이 아닌 선수들의 자존심 싸움 측면이 강했기에 일어난 해프닝. [6] 우승팀 중 최저 시드 [7] 32.8득점 11.5리바운드 [8] 컨파가 끝난 직후 파이널을 준비해야 할 팀이 하면 안되는 짓들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덕분에 올라주원과 로키츠에게 패배한 경험은 오닐에게 '너무 일찍 마음이 들떠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9] 샤킬 오닐은 NBA 선수들 중에서도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그런 오닐이 나중에 회상하기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시기상조였다'' 라고 할 정도였다. [10] 사실 이때 정규 시즌 성적 차이만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해설진은 "Many consider this to be the two best teams in the NBA(많은 이들이 이 두 팀이 NBA 최고의 두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고, 시카고 선수들도 "올해 내내 올랜도를 '이겨야할 팀'으로 겨냥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골밑이 허약한 (주전센터 룩 롱리는 당시 29개팀 주전 들 중 최하위수준이며, 데니스 로드맨은 리바운드는 뛰어나지만 신장이 크지 않았다.) 시카고 불스 입장에서는 오닐에다 올스타급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까지 버티고 있는 올랜도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게다가 외곽은 시카고가 유리했지만, 이 팀에는 조던조차 부담스럽게 여길 만한 떠오르는 슈퍼스타 앤퍼니 하더웨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1차전에서 호레이스 그랜트가 부상으로 물러나고 데니스 로드맨의 기습적인 수비에 오닐이 부담을 느끼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39점차 안드로메다 관광을 타버리고, 결국 나머지 시리즈 역시 내주고 만다. [11] 여담이지만 이처럼 오닐은 스윕(한 경기도 못 이기고 시리즈에서 전패하는 것)당할 전력이 아님에도 스윕당한 적이 많았는데 이 점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도 1986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 연속 스윕당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팀이 플레이오프에 턱걸이로 올라가는 반면 상대가 역대급 강팀이었고 패배하는 과정에서 역대급 활약을 펼쳤다. 반면 오닐은 이때처럼 본인의 팀도 우승후보이거나, 1995년 플레이오프처럼 오히려 본인의 팀이 전력상 우세라고 평가받거나( 1995 NBA 파이널 당시 휴스턴은 겨우 정규 시즌 서부 6위인데다가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올랜도에게 있었고, 전력상 올랜도가 앞선다고 전문가들이 평했다.), 2007년 플레이오프에서처럼 동부 4-5위의 대결이었을 때도 스윕당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실제로 오닐은 승부근성이 꽤나 강하긴 하지만, 마이클 조던이나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역대급 선수와 같은 독기는 없었기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감독 필 잭슨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가 농구에만 독하게 집중했다면 10번은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중요한 것은 스윕 그 자체가 아니라 스윕당할 전력이 아니었는데 한 번 밀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1995년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는 더 강한 전력에도 1차전을 패한 이후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팀이 전력에 비해 모자라는 실력을 보이면 그 팀의 에이스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팀이 잘하면 에이스에게 공을 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12] 1997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 재즈에게 4-1로 패한 다음 1998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스윕까지 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한 오닐은 화장실 거울을 깨부수고 문짝까지 뜯어내며 난리를 치자 제리 웨스트 단장이 그걸 보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파이널 진출을 8번이나 한 끝에 겨우 첫 우승을 했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놀란 오닐은 "8번이요?"라고 반문한 뒤 조용해졌다고 한다. ( 2016 NBA 파이널 2차전을 앞두고 NBA TV에서 제리 웨스트를 인터뷰했는데 이때 옆에서 오닐이 밝힌 이야기다) [13] 이 과정에서 61득점 23리바운드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60-20을 달성하는 경이로운 경기도 있었다. [14] 기자 1명이 앨런 아이버슨에게 투표했다. 훌륭한 팀원들 없이 혼자의 힘으로 팀을 이끈 공로를 높이 샀다는 것이 그 이유. 디켐베 무톰보:...? 훗날 2012-13 시즌 MVP 투표에서도 1표가 카멜로 앤서니에게 가는 바람에 르브론 제임스가 만장일치로 MVP에 선정되는데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후 이 전인미답의 고지는 2015-16 시즌 스테판 커리가 달성한다. [15] 1차전 44득점을 넣고도 졌으나 2차전에서 거의 쿼드러플 더블(28득점 20리바운드 9어시스트 8블록)을 달성할 뻔하기도 했다. [16] 나중에 승부조작 스캔들로 구속된 팀 도너히 심판은 이 시리즈 6차전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실제로 석연찮은 판정들 때문에 말이 많았다. [17] 마이클 조던은 1990년대에 쓰리핏 두 번에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시대의 지배자였음에도 이런 반응까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우아하고 멋진 플레이로 타팀 팬들에게도 일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던 조던과 달리 오닐의 플레이 스타일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팀들의 골밑을 깡그리 때려부수는 식이었기에 타팀 팬들에게 더욱 밉보인 감이 컸다. [18] 사실 레이커스 시절 오닐은 대중적인 인기가 마이클 조던이나 동시대 코비 브라이언트, 후대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폭발적으로 많은 선수는 아니었다. 농구특성상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따돌리는 저런 선수들보다 우직하게 골밑으로 밀고 들어가는 정통 빅맨들은 인기가 비교적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느린 속도로 속공 참여가 적은 오닐이 팀의 중심이 되면 페이스가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본인의 플레이스타일도 상당히 단조로운 편이다.(확률높은 공격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올스타전에서는 다양한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팀의 승리 하나가 매우 중요한 정규시즌이나 플레이오프에선 로우포스트에 자리잡은 뒤 하는 포스트업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90년대에 다른 센터들이 건재했고 인기원톱인 마이클 조던이 있어 오닐은 특이한 캐릭터성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이런 스타일이 지속된 레이커스 시절엔 농구화 판매 부진을 겪기도 했다. 물론 당시 그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지 우람한 외견에 비해 뛰어난 예능과 엔터테이너성도 크게 가지고 있어서 당대 최고의 인기선수 중 하나이긴 했다. 당장 리복이 나이키와 나름 대등했던 것도 오닐이 모델이였던 시기였다. [19] 쓰리핏 첫 번째 시즌에는 그나마 샬럿 호네츠에서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던 베테랑 포워드 글렌 라이스가 시즌 평균 15득점 정도 올려주면서 오닐, 코비의 뒤를 받쳐줬으나 그 이후엔 오닐, 코비가 도합 55점 정도 합작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데릭 피셔가 간신히 10득점 정도를 올릴 뿐 죄다 한자리수 평득이었다. 원투펀치가 엄청나게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원투펀치와 팀 내 다른 선수들의 공격비중이 차이나는 팀은 당대 우승경쟁 팀 중에선 없었다. [20] 이때 코비의 멘트는 더 가관이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나도 오닐처럼 돈으로 입막음했어야 하냐는 식으로 말을 해 팬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인터뷰한 것은 아니고 경찰 취조 과정 도중 이렇게 얘기한 것이 세어나가 기사화된 것이다. 물론 어찌되었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망언이라 훗날 코비가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고, 2008년에 코비의 레이커스가 파이널 패배 후 오닐이 파티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할 때 "코비 때문에 내가 이혼당했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21] 정확히 말하면 오닐과 코비 둘 다 2인자가 되기는 거부했고, 두 선수 모두에게 맥시멈 계약을 주기는 힘들었던 (오닐의 경우 맥시멈을 줄경우 연평균 3000만 달러에 가까웠고, 이때 그는 삭감을 거부했다. 근데 정작 마이애미 히트에 가니까 약간 삭감된 금액에 계약했다.) 레이커스가 더 젊은 코비를 택한 것이다. 특히 이때 레이커스 프런트는 필 잭슨 감독과의 갈등도 있었는데, 오닐은 "날 잡으려면 무조건 잭슨 잡아라"라고 공언한 판이라, 잭슨까지 동시에 잡아야될 상황이었다. 결국 레이커스 프런트는 잭슨과 오닐을 포기하고 코비 위주로 팀을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 둘을 보내고 맞이한 2004-05 시즌이 34승 48패를 하면서 11년만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잭슨 감독을 연평균 1000만 달러가 넘는 초거대 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모셔온다. 그리고 그 잭슨은 2007-08 시즌 레이커스를 오랜만에 파이널에 진출시키고, 이후 2008-09 시즌과 2009-10 시즌 백투백 우승을 다시 레이커스에 안겨준다. [22] 전직 농구선수들이 모여 노가리를 까는 Open Court란 프로에서 최근에 오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4-05 시즌 당시 내시는 진짜 MVP가 아니라 동정심으로 탄 MVP(sympathy vote)" 자기가 너무 크고 강해서 매년 탈 수 없으니 준 거라고. 원래 오닐이 떠벌이 이미지가 있지만 이 멘트에 대해서는 미국이건 한국이건 팬들 반응이 매우 안 좋다. 사실 당시 내시는 플레이오프도 못 오르던 팀을 전체 1위로 이끈 대활약을 펼쳤는데 그걸 '동정심'으로 폄훼하니... 게다가 매년 탈 수 없느니 뭐니 할 수도 없는 게 그는 MVP를 평생 한 번 수상했다. [23] 실제로 오닐은 2005-06 시즌까지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나 이때부터 하락세가 시작되어 이후 2008-09 시즌 올-NBA 서드 팀 1회 선정에 그친다. [24] 오닐같은 노장의 경우 계약기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조금 삭감해서 장기계약을 맺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레이커스의 경우 코비가 오닐과 더불어 필 잭슨 감독과도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필 잭슨파였던 오닐이 코비 말고 자기 편을 들라고 사실상 엄포를 놓은 것이지 저 나이에 평균 3000만 달러 이상으로 다년계약은 어딜 가도 힘들다. 즉 5년/1억 달러 자체는 어느 정도 삭감은 해주었을지언정 엄청나게 디스카운트된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선수옵션으로 보장된 3000만 달러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배려인데, 당시 히트는 오닐에게 이를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댈러스 매버릭스는 오닐의 레이커스 시절 말기부터 노골적으로 오닐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으며, 괴짜 억만장자 마크 큐반은 얼마든지 지갑을 풀 의향이 있는 인물이었다. 즉 2004-05 오프 시즌 당시 MVP급이었던 오닐은 히트를 선택해준 것이라, 옵션 포기를 강요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저 정도 배려를 할 만큼 오닐이 히트와 웨이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5] 만약 이 때 클리블랜드가 파이널에 진출했다면 오닐의 친정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되어 코비, 그리고 새로운 파트너인 파우 가솔과 서로 상대팀으로 대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클리블랜드가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26] 케빈 가넷 [27]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평생 번 돈이 억달러를 훌쩍 넘어가는 오닐 입장에서 그렇게 큰 돈도 아니었고, 선수들이랑 웃으면서 장난치는 모습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