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사도(영화)
1. 개요2. 프롤로그3. 첫째 날 (1762년 7월 4일)4. 25년 전 (1737년)5. 둘째 날 (1762년 7월 5일)6. 18년 전 (1744년)7. 셋째 날 (1762년 7월 6일)8. 13년 전 (1749년)9. 넷째 날 (1762년 7월 7일)10. 10년 전 (1752년)11. 다섯째 날 (1762년 7월 8일)12. 5년 전 (1757년)13. 여섯째 날 (1762년 7월 9일)14. 1년 전 (1761년)15. 나경언의 고변, 그리고 세자16. 일곱째 날 (1762년 7월 10일)17. 여덟째 날 (1762년 7월 11일)18. 14년 뒤 (1776년)
1. 개요
영화 사도의 줄거리를 정리한 문서.2. 프롤로그
비가 거칠게 내리던 깊은 밤, 궁궐 후원의 무덤에서 나온 세자는 검을 들고 수구(하수도)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한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나 그 사이 세자는 영조의 거처에 도착해 창호를 사이에 두고 영조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영화가 시작된다.3. 첫째 날 (1762년 7월 4일)
의복을 갖춰입는 영조에게 영빈은 세자의 죄를 고하며 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요청한다. 채제공의 반대에도 영조는 강건한 입장을 내보이며 가마를 타고 경화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오며 세자를 호출한다.영조의 명에 따라 나갈 준비를 하는 세자를 옆에 두고 혜경궁 홍씨는 내관에게 영조가 어떤 문을 통과했는지 묻는다. 이에 내관이 경화문이라는 답변하자, 순간 세자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 듯[1] 홍씨에게 영조가 총애하는 세손이라도 데려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는다. 그러나 묵묵부답인 혜경궁. 이러한 혜경궁의 모습에 세자는 남편보다 자식이 먼저인가 보구나 한탄하며 섭섭해한다.
창덕궁 인정전 앞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영조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있는 세자. 영조는 세자에게 용포를 벗으라 명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궁궐 문을 닫는 한편,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세손은 문틈 사이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본다.
세자가 용포를 벗자 속의 상복이 드러나고, 그러한 세자의 모습을 보며 영조는 자신을 죽이려 하기에 미리 상복까지 입었냐고 나무란다. 이에 세자는 대비마마와 중전마마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쭉 상복을 입어왔다고 답한다. 그러자 영조는 그들의 3년상은 이미 진작에 끝났다고 분노하며 세자가 궁궐 후원에 만든 무덤에서 발견한 관짝과 무기들을 들이라 명한다. 곧이어 군관들이 관짝과 무기들을 들고 들어오자 영조는 그것들을 가리키며 네놈이 자신을 죽이려고 저주한 것이 아니냐 캐묻자, 세자는 부왕이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기에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라 답한다.
차마 어제 있었던 참담한 사실까지 제 입으로 언급하지 못한 영조는 세자 앞에 검을 던지며 지금 자결하면 세자의 칭호는 지킬 수 있다며 세자로 하여금 자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세자는 조선의 국법에 자결이라는 형벌도 있냐며 자신에게 정말 죄가 있다면 차라리 의금부로 넘기라 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것은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이고, 자신은 지금 아비를 죽이려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라 답하자, 세자는 자신을 세자는 커녕 자식취급이라도 한 적이 있냐 따져 물으며 분노한다.
이러한 상황에 세자를 모시던 일부 신하들이 자신과 가문이 해를 입을까 걱정하자, 채제공은 자기보존에만 신경쓰는 신하들을 꾸짖는 가운데 세자는 검을 들어 올리며 자결하려 한다. 이에 신하들이 닫힌 문을 박차고 난입하여 검의 날을 쥐어가며 자결을 시도하는 세자를 만류하고, 영조에게는 자비를 요청한다. 그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검을 뺏긴 세자는 스스로 돌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계속해서 자결을 시도[2]하였고, 채제공은 영조에게 아무리 국왕이라고 한들 대명률에도, 경국대전에도 없는 이러한 처분은 내릴 수 없다며 피가 철철 흐르는 세자의 이마를 감싼다.
그러나 강고한 영조는 이에 연연하지 않고 군관들에게 신하들을 모두 끌어내라 소리친 뒤, 바닥에 놓여있는 관과 신하들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뒤주를 가져오라 명한다.[3] 그렇게 세자 앞에 뒤주가 놓이고,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 명한다. 이에 군관들이 세자의 양 팔을 붙들고 세자를 뒤주에 집어넣으려 하자 세자는 이를 뿌리친 뒤 묵묵히 스스로 뒤주에 들어간다. 이후 뒤주의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영조가 직접 못질을 한다. 이를 보고있던 세손이 뒤늦게 난입하여 통곡하며 아버지를 용서해달라 간청하나, 영조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는데 왜 세손이 들어오게 하냐며 어서 끌어내라고 한다. 그러자 다급하게 홍인한[4]이 세손을 데리고 나간다.
4. 25년 전 (1737년)
세자의 나이 3살. 세자시강원에서 붓글씨로 '사치( 奢 侈)'라는, 그 나이에 익히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한자를 외워 써낸 세자에게 영조는 무엇이 사치이고 아닌지를 묻는다. 그러자 세자는 용포를 가리키며 비단은 사치이고 속의 무명 저고리를 가리키며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 답하며 그 뜻을 정확히 아는 총명함을 보인다. 이에 영조와 신하들은 흡족해한다. 영조가 그 글씨를 누구에게 줄거냐 묻자, 세자는 대신들에게 걸어가더니 나이 든 노신에게 하사하자, 노신은 감격해하고 영조는 더 흡족해하며 웃음짓는다. 이후 영빈과 중전, 대비마마가 있는 자리에서도 총명과 효를 보인다.그러나 가끔은 시강원에서 조는 모습을 보이는 세자. 이에 스승 이천보가 세자의 얼굴에 물을 튀기며 세자를 깨우고, 세자에게는 공부가 곧 효도라는 말을 한다.
날이 깊어지자 잠자리에 들려는 어린 세자는 어머니 영빈을 찾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빈은 오늘만이라도 자신이 재우면 안되겠느냐 하며 상궁에게 청하지만, 상궁은 그것은 왕가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불가능하다며 반대한다. 나아가 세자는 더 이상 영빈이 아닌 중전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5] 한편 영조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다는 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세자를 위해 밤을 새며 책을 쓰는 등 세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5. 둘째 날 (1762년 7월 5일)
영조는 세자를 모시던 내관들과 무당, 여승, 기생 등을 붙잡아 들인 뒤 채제공을 비롯한 승지에게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하라는 교지를 쓰라 명하나 승지들이 쓸 수 없다며 거부하자 영조는 자신이 직접 교지를 작성한다.[6]김귀주는 차라리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밝힌다. 이에 김상로와 김한구는 만약 세자에게 사약을 내린다면 조선의 국법에 의해 세자는 공식적인 역적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연좌제로 인해 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도 역적이 되는 것이라며 사약을 내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탐구]
이후 세자를 모시던 사람들이 참수당하는 가운데 김상로가 영조의 교지를 읽자, 뒤주 속에서 이를 전부 듣고있던 세자는 자신에 대한 대처분을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 영빈 이씨가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며 절망한다.
6. 18년 전 (1744년)
세자의 나이 10살. 세자가 혜경궁 홍씨와 혼례를 올린다. 영조는 엄숙하게 며느리에게 왕실에서 조심해야할 것들을 당부하지만, 세자는 바로 앞에 있던 여동생 화완옹주의 짖궂은 장난에 그만 웃음보를 터트린다.곧이어 날이 저물자 내명부에서는 영빈 이씨를 비롯한 윗전들이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에 대해 각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을 자세히 알려주는데, 그 사항은 아래와 같다.[8]
• 말을 가려 하는데,
죽을 사(死)와
돌아갈 귀(歸)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 정무회의에서나 밖에서 입었던 옷은 갈아입고 궁 안에 들어간다.
• 불길한 말을 들으면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으며, 미워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말을 붙이고, 부정을 태운다.
• 길할 때와 흉할 때 궁궐을 출입하는 문이 다른데, 길할 때에는 만안문을, 흉할 때에는 경화문을 통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장소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한다.[9]
• 사랑과 미움을 드러냄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하다.[10]
• 정무회의에서나 밖에서 입었던 옷은 갈아입고 궁 안에 들어간다.
• 불길한 말을 들으면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으며, 미워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말을 붙이고, 부정을 태운다.
• 길할 때와 흉할 때 궁궐을 출입하는 문이 다른데, 길할 때에는 만안문을, 흉할 때에는 경화문을 통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장소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한다.[9]
• 사랑과 미움을 드러냄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하다.[10]
이후 날이 밝고 밖에서는 세자가 신하들과 격하게 놀고 있는 한편,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 홍봉한의 당부를 받으며 서럽게 눈물짓는다. 이에 홍봉한은 그러한 혜경궁을 울게 놔두며 왕가의 친인척이 되는 일에 남들은 기뻐하겠지만 우리는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이어 세자에게 가례선물로 청나라 황제가 보낸 강아지가 오게 된다.
궁에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겁에 질려있던 혜경궁에게 세자는 선물받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혜경궁의 모습을 그리며 "내가 있으니 괜찮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편네를 얻었으니 늘 웃는 얼굴로 대할 것이다." 라며 달래주던 중, 때마침 방문한 영조는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세자의 모습에 섭섭한 감정을 보이게 된다.
이후 세자시강원에서 경전을 잘 암기하지 못하고 나아가 공부 자체에 별다른 의욕을 가지지 않는 세자의 모습에 영조는 세자를 엄히 꾸중한다.
7. 셋째 날 (1762년 7월 6일)
깊은 밤, 정신이 쇠약해진 세자는 뒤주 안으로 수많은 지네들이 들어오는 환상을 보게된다. 이에 견디다 못한 세자는 한껏 소리치며 뒤주의 벽을 부수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한 군관이 놀라 검을 떨어뜨리는데, 그 검을 들고 군관들에게 문을 열 것을 명한다. 그렇게 군관들이 문을 열자 세자는 곧바로 뛰쳐나가 혜경궁과이 세손이 있는 전각으로 향한다. 그 앞에서 어서 문을 열으라 소리치지만, 세손과 혜경궁이 당황하는 사이 한 군관이 뒤를 쫓아오자 결국 세자는 검을 버리고 후원으로 전력질주한다. 세자는 후원의 연못에 몸을 던지고 그 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마침 입궐해 있었던 장인 홍봉한과 처숙부 홍인한이 달려와 이러다가는 세손까지 죽는다며 세자를 연못에서 건져 올리려 하지만, 울화가 가시지 않은 세자는 이럴거면 차라리 사약을 내려 빨리 나와 가족들을 전부 죽이고 그 늙은이가 천년만년 임금 해쳐먹으라고 소리치며 광분한다.난리통에 소식을 접하고 후원으로 찾아온 영조는 개의치 않고 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두라 명한다. 이에 세자는 비통해하며 영조에게 그동안 당신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고,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떳떳하다면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에게 너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차갑게 말하며 개의치 않는다. 처음 뒤주에 들어갈 때와는 반대로 세자는 계속해서 거세게 몸부림치고, 뒤주가 닫히는 순간까지 이게 임금이 할 짓이냐며 울분을 토한다.
그렇게 영조는 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두었고, 홍봉한은 그 찰나의 순간 "훗날을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뒤주 안으로 청룡부채를 넣어준다. 한편 영조는 세자가 다시는 뒤주를 부수고 나오지 못하도록 뒤주를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고 그 위를 풀더미로 덮어버리라 명한다.
8. 13년 전 (1749년)
세자의 나이 15살. 세자와 함께 종묘를 거닐던 영조는 세자에게 왕가에서는 자식을 원수처럼 여기는데, 왜 그런지 아느냐며 묻는다. 이에 세자는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본심이야 어찌 다르겠냐며 답하는데, 영조는 다르다며 잘라 말한다. 이후 자신은 이곳 종묘에 올 때 마다 조상들의 피울음 소리를 듣는다며 부인에게 사약을 내린 숙종,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소문이 퍼져있는 경종, 이 외에 본인들의 형제와 조카까지 죽여가며 왕위를 지킨 조선 왕실의 험난한 사례를 말해준다.이후 25년의 기다림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며 돌연 성인이 된 세자에게 자신의 보위를 전위할 뜻을 내비친다. 그러나 세자와 신하이 모두 세자는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며 반대의 입장을 내놓는다.[11] 그러나 영조는 뜻을 굽히지 않고 원래 본인은 형님인 경종대왕에게 마땅한 후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잠시 왕위를 맡은 것이기에 왕위에 미련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에 신하들은 주상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더욱 열심히 보필하겠다며, 세자 또한 엎드린 채 궁의 모두가 전교를 거두어 주시라 간청한다.
이에 영조는 한발짝 물러나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후 세자시강원의 이천보 등은 세종 시기 대리청정을 한 문종의 예를 들며 세자에게 조언을 해주었고, 세자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세자의 대리청정 첫 날, 세자는 영조를 마중나간다. 그러한 세자에게 영조는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며 잘 하자는 당부를 남기며 세자의 익선관을 고쳐씌워준다.
한편 조정에서 균역법 시행을 놓고 김상로가 반대의 뜻을 내비치자 세자는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 소식을 들은 인원왕후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도 세자의 결단력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영조는 세자가 자신이 쌓아왔던 조정의 탕평을 무너뜨렸다며 세자를 질책한다.
그런 영조는 세자를 못마땅해하며 세자가 판단을 내리는 족족 대놓고 질책하며 뒤집어버리고, 대리청정의 범위를 벗어난 중요한 건은 자신에게 아뢴 뒤 자신의 의견에 따라 처리하라 명한다. 이러한 영조의 행보에 세자는 결국 안건을 무엇 하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하지 못하고 영조의 눈치만을 살피며 매번 영조의 의견을 물어보게 된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 세자를 향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것 없이 매번 나를 번거롭게 한다며 또 질책한다. 이후 세자에게 호남지방의 가뭄에 대해 보고하는 신하를 향해 영조가 가뭄은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인데 어찌하여 세자를 향에 그러느냐는 말을 하자 결국 세자는 '내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으니 전부 주상이 아닌 내가 덕이 없어 그런 것'이라며 신하들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듯 말한다.
이후로도 영조의 세자를 향한 어처구니 없는 질타는 계속된다. 영조가 나주 괘서 사건의 주동자들을 친국할 때 세자는 '앞에선 화합을 외치면서 뒤에선 신하 눈치나 보는 게 탕평이냐'며 친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홀로 친국하던 영조는 죄인들에게 자신의 콤플렉스인 정통성을 대놓고 공격받자 죄인들의 주둥아리를 찢어버리라고 명한다. 이후 그 화를 세자에게 풀며, 세자가 친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질책한다.
이 와중에 영조는 귀씻개 물을 떠다준 젊은 궁녀 문씨에게 첫 눈에 반한다. 본인도 쪽팔린 줄은 아는지 다급히 세자를 뒤로 물린다. 이후 내관이 눈치껏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12] 또한 세자가 신하 이의경에게 시를 써준 것을 질책하고[13], 나아가 거룩한 숙종의 능행길에 비가 내리자 그것 역시 세자 때문이라 세자는 숙종을 참배할 자격이 없다고 질책하며 세자만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
9. 넷째 날 (1762년 7월 7일)
매미가 울어대는 한 여름속 더운 날씨. 뒤주 속에서 여태 물 한방울 마시지 못한 세자는 극심한 갈증을 호소하며 물을 가져오라며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뒤주를 지키던 병사들은 뒤주에 물을 끼얹었고 세자는 천장 틈새로 새어 떨어지는 물을 마시지만 턱없이 모자르다.조금 뒤 아직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세자는 소변이 나오자 그것을 청룡부채로 받아 마신다. 그러다 문득 그 부채가 자신이 아들을 위해 그려줬던 청룡의 모습이 담긴 부채라는걸 인지하고 대성통곡한다.[14]그리고 세자는 뒤주안에서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0. 10년 전 (1752년)
세자의 나이 18살. 세자는 태몽에 나온 청룡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세자빈이 아이를 낳고 있는 곳으로 급히 가져오고, 아이가 아들일 것이라 장담한다. 그 뒤 세자빈은 정말로 아들을 출산하게 되고, 인원왕후를 비롯한 가족들은 기뻐한다.그 과정에서 옆에 있던 홍봉한이 세자에게 청룡 그림을 달라고 청하며 이것을 부채로 만들고 장차 세손이 성장하여 왕이 된다면 그에게 바칠 것을 약조한다.
100일 뒤, 세자는 100일을 맞은 세손과 함께 세자빈 혜경궁 홍씨,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함께 영조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문안인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영조는 아이를 다시 데려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곧이어 아이를 건네받은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중전마마의 환갑이 코앞인데 아직 주상의 말씀이 없어 난감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냐" 라고 질문하자, 옆에 있던 소원 문씨[15]가 영빈 이씨에게 "바쁘신 전하께 후궁들까지 나서서 그까짓 일로 전하를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냐" 라며 무례한 발언을 한다.
영빈은 "문 소원, 자네!" 라며 문 소원에게 화를 내지만 영조는 "시끄럽다, 다들 물러가라" 라고 다그치며 아무 당부없이 전부 내보낸다. 그러나 문 소원의 무례를 전해들은 인원왕후는 "감히 세자의 생모에게 대들어?" 라며 문 소원을 꽤씸하게 여기며 내명부의 법도를 바로 세우겠다면서 상궁에게 만삭인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치게한다.
인원왕후는 세자, 세자빈, 영빈이 보는 앞에서 상궁에게 문 소원의 종아리를 치게 하지만, 문 소원은 울먹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끝내 잘못을 빌지않고 버티자, 인원왕후는 "독한 년, 내 그 버르장머리의 뿌리를 뽑겠다" 라며 아예 자신이 직접 회초리를 치는데, 이 소식을 접하고 다급히 대비전으로 온 영조는 인원왕후에게 "지금 뭐하시는 거냐" 라며 버럭 소리지르며 따진다. 인원왕후는 "중전의 환갑을 챙기는 영빈의 뜻이 얼마나 아름답냐, 그런데 저것이 같은 후궁의 처지로서 그 뜻을 배우지는 못할 망정 감히 영빈에게 대들었다기에 내 내명부의 법도를 바로세웠다" 라고 말하자, 영조는 "대비께서 이러시면 저는 임금 노릇 못한다" 라고 고집을 피우자, 영조의 난데없는 고집에 분노한 인원왕후는 영조에게 "뭐요? 저 천한 것 뱃속에 주상의 씨앗이 들어 지금 나에게 역성을 드는 거냐" 라고 되묻고, 자신도 천한 무수리의 자식이였던 영조는 자신의 출생 콤플렉스에 과민반응 하게 되어 그만 자신의 후궁이 천하다면 나 또한 천한 임금이니 세자에게 보위를 넘기고 자신이 임금에서 물러날 것을 윤허하라 소리친다. 이런 영조의 태도에 기가 막힌 인원왕후 역시 분노하여 이를 윤허하게 된다.
눈이 내리던 인정전 앞에서 세자와 신하들은 윤허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나, 영조는 이를 거부하며 문씨와 함께 궁 밖 별궁으로 나간다. 이에 세자가 추운 밤에 눈을 맞으면서까지 윤허를 거두어 줄 것을 기다리니, 세자시강원 스승들과 영빈 이씨가 이제 그만 들어가라 만류하지만 세자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정성왕후와 영빈 이씨, 혜경궁 홍씨는 인원왕후에게 윤허를 거두어달라 청하나, 인원왕후 역시 이참에 영조의 저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요지부동인 상황. 이렇듯 정성왕후와 영빈의 청에도 "내가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대왕대비인데 한 번 내린 윤허를 거둘 순 없다" 라고 버티던 인원왕후였으나, 혜경궁이 눈물로써 간청하고 혜경궁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 정조를 보자 결국 인원왕후는 영조와 자신간의 기싸움에서 고통받는 건 세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본인이 죽어야 해결되겠다며 오늘부터 수라를 들이지 말라고 하더니 내 귀가 어두워 주상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실수로 윤허를 내렸다고 전하라는 명을 내리며 끝내 윤허를 거두는 동시에 훙서하게 된다.[16]
그렇게 훙서한 인원왕후의 장례를 치르는 가운데 영조가 세자를 향해 왜 대비마마께서 윤허를 거두시게 하여 돌아가시에 만드냐며 한탄하자 세자는 그런 부왕의 행보에 끝내 참았던 울화가 터져서 다 자신의 탓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렇게 궁궐 밖 사당에 인원왕후의 초상화를 두고 만조상해원경을 부르며 인원왕후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술을 마시며 기생을 부르고, 궁궐 후원에 무덤을 파게 한다.[17]
그 뒤 공부와 대리청정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방황하고 상중에 술까지 마신 세자의 행보에 영조는 분노한다. 빈전에 영조가 들이닥쳐 함경도의 병마절도사가 금주령을 어겨 참수된 사례를 언급하며, 세자인 너가 어찌 술을 마실 수 있느냐고 세자의 비행을 꾸짖는다. 이에 세자의 유모 최 상궁이 세자는 술을 못 드시는 체질이니, 정말 술내가 나는지 맡아보라며 세자를 변호하였다. 하나 일개 상궁에게 임금이 욕을 본 상황이라 세자는 내가 이미 마셨다고 아뢰었는데 자네가 지금 어찌 나서 다른 말을 하느냐며 유모를 질책하는데, 도리어 이게 영조의 화를 돋우고 만다. 영조는 어른 앞에서는 개나 말도 꾸짖지 못하는데 자신 앞에서 감히 상궁을 꾸짖은 것이 대해 야단을 치고, 세자도 유모가 감히 변명을 하기에 그랬다며 물러서지 않고 대든다. 그러자 영조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급하게 귀를 씻은 뒤, 분을 참지 못하고 아예 세자에게 물을 끼얹어버리며 너 같은 놈을 자식이랍시고 세자로 세운 것이 내 잘못이라며 폭언을 한다.
이후 영조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세자는 빈 놋사발로 곁에 있던 신하를 힘껏 내리치며 어찌하여 나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서는 자 한 놈이 없느냐며 울분을 토해낸다. [18]
11. 다섯째 날 (1762년 7월 8일)
고집을 부리며 세자를 풀어주지 않는 영조의 행보에 혜경궁 홍씨는 영빈 이씨, 홍봉한, 홍인한 등과 함께 세손을 보호할 방도를 찾으려고 하나 별다른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는 한편 홍인한은 제 살길을 찾아 새 중전인 정순왕후와 노론들을 찾아가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간택 시절의 총명한 모습과는 다르게 영조를 두려워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19]12. 5년 전 (1757년)
새 중전인 정순왕후에게 문안인사도 드리지 않는 세자의 태도에 영조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나무라자 영빈 이씨와 혜경궁 홍씨는 후원에 있는 무덤에서 굿을 하고 있는 세자를 찾아 어서 새 중전에게 문안을 드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에 세자가 혜경궁에게 나는 내 어머니께도 문안 안 드리는 불효자식인데 그 여자에게 문안을 왜 드리느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어머니 영빈이 간청하자 이기지 못하고 내일 날 밝으면 중전께 문안인사를 드리겠노라 약조한다.[20]그러나 문안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 이미 곯을만큼 곯아버린 정신 상태 탓에 의대증이 생긴 세자는 옷 한벌 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였고 끝내 옆에서 옷을 입혀주던 애꿎은 내시의 목을 베어 살해한다. 그 뒤 그의 목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영빈 이씨, 세손, 화완옹주, 혜경궁 홍씨 앞에 나타난다. 이에 다들 기겁하며 세자의 시선을 피하는데, 세자는 검을 드리민 채 그 늙은이랑 도저히 같은 궁궐에서 살 수가 없다며 당장 영조를 경희궁으로 옮기게 하지 않으면 다 같이 죽는 것이라고 일가족을 협박한다. 다들 겁에 질린 상황 속에 여동생인 화완옹주가 자신이 무조건 옮기게 하겠노라 답하게 된다.
13. 여섯째 날 (1762년 7월 9일)
사도세자가 살아있는지 포들이 뒤주를 흔든 후 세자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자 세손은 세손빈과 함께 물을 떠다드리려 한다. 그러자 내금위장 김도수가[21]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영조의 명에 따라 그들을 가로막는데, 세손은 그러한 김도수의 이름과 직책이 무엇이냐 묻는다. 이에 김도수가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밝히자 꼭 기억하겠다 협박하며 다시 비키라 명한다. 끝내 김도수가 물러나자 세손은 뒤주로 다가간다.그러나 아직 어린 세손에게 굳게 닫혀진 뒤주를 열 방법이란 없었고, 세손은 슬퍼하며 며느리가 물을 가져왔다고 뒤주 속의 세자에게 그저 소리치고만 있는다. 그러자 영조가 나와 이게 무슨 소란이냐며 어서 세손을 끌어낼 것을 명하고, 이에 세손은 영조에게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드릴 수 없냐며 대성통곡한다. 이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세자는 힘없이 뒤주를 두드리며 살아 있다는 신호를 아들에게 보내고, 그러자 세손은 더 구슬피 운다. 영조는 별도의 하교가 있을 때까지 외가에 가서 근신하며 처분을 기다리라는 명을 내리고, 세손은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14. 1년 전 (1761년)
세자의 나이 29살, 세손의 나이 9살. 영조가 보는 주강에서 세손이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보이자 영조는 300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아가 세자는 데려가지 않았던 숙종의 능행길에 세손을 동참시키는 등 세손을 무척이나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자신이 받지 못한 총애를 받는 세손의 모습에 세자는 내심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세손 역시 할아버지의 기대때문에 원치도 않는 공부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고, 그 말을 들은 세자는 화살을 하늘 높이 쏘아올리며"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라는 말을 한다. 차가웠던 부자 관계는 이를 계기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세자도 세손과 세손빈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깊은 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물려줄 뜻을 내세우며 세자시강원인 이천보, 이후, 민백상에게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리라고 요구한다. 따를 수 없다는 이들에게 영조는 세자가 저리 된 것은 잘못 가르친 세자시강원의 스승들 때문이고 더군다나 이는 어명이니 상소를 올리라고 강경히 요구하였으나, 이천보는 영조에게 세자를 감싸는 상소를 올린 뒤 자결하였고, 이를 보던 세자를 모시는 다른 신하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 깨닫는다. 이에 민백상은 세자에게 잠시동안이라도 조용히 공부만 하며 지내시라 충언하지만 세자는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영빈 이씨의 환갑을 맞아 세자는 혜경궁 홍씨와 화완옹주, 세손 부부를 데리고 절을 올리는데, 이때 영빈에게 중전의 대례복을 입히고 중전에게만 올리는 사배를 올리려 하자 혜경궁이 불가하다며 머뭇거린다. 그러나 세자는 오늘만큼은 영빈 이씨가 중전이니 세손에게 절을 올리라고 호통치고 가족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한편 옆에서는 풍악이 울리며 자신의 어머니의 환갑을 성대히 축하한다.[22]
이윽고 장면은 세자가 영빈이 탄 가마를 모시고 후원을 행차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행차 도중에 후원에 벌레들이 꼬이자 세자는 팔을 휘적이며 벌레를 쫓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이내 뒤따르는 군관의 칼을 뽑아들고는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벌레를 죽이려 든다.
"물럿거라! 물럿거라! 내 어머니 중전마마 행차하신다!"
라고 울부짖으며 칼을 휘두르는 세자.[23] 과분한 대우를 받는 당사자 영빈도, 다른 가족들도, 수행하는 수행원들도 모두들 차마 법도에 어긋남을 지적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15. 나경언의 고변, 그리고 세자
1762년 5월, 세자의 나이 30살, 세손의 나이 10살. 세자시강원 스승들의 잇다른 자결 이후 어떻게 세자를 폐할지 고민하는 영조를 위해 김상로는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가 저지른 그간의 비행을 영조에게 모두 고하게끔 한다. 그렇게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밝히는 고변서와 함께 영조에게 세자의 역모 가능성 주장하니, 세자가 소식을 듣고 다급히 현장으로 찾아와 나경언에게 어찌하여 거짓 고변을 하느냐며 네놈의 배후가 무엇이냐 따져 묻는다. 이후 세자를 옹호하는 채제공 등은 세자의 무죄와 더불어 거짓 고변을 하는 나경언의 배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장하며 세자가 직접 나경언에게 대질케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영조는 그러한 신하들와 세자의 요구를 묵살하고 중요한 증거인 고변서를 불태워버린 뒤, 나경언처럼 하찮은 사람도 나라를 위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데 녹봉을 먹고 사는 신하라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동안 자신에게 세자의 비행을 알리지 않았느냐며 신하들을 질책한다. 이에 김상로가 자신들의 불충을 감안하여도 나경언이 임금을 기만한 죄가 크다며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영조는 그에 공감하며, 나경언에게 감히 세자의 역모 가능성을 운운하며 임금인 자신을 놀라게 한 죄를 물려 참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떠나간다.그 이후 세자가 영조가 머물고 있는 전각 앞에 찾아가 엎드린 채 나경언의 주장에 따라 자신을 역적으로까지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냐며 창호 너머로 따져 물으니, 영조는 창호를 벌컥 열어 째끼고 그간 세자가 저지른 비행을 언급하며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라고 꾸짖는다. 이에 세자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의 울화 때문에 벌어졌다고 변명하며 이해를 촉구한다. 그러나 영조는 그러한 세자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여 되물으며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이고, 그렇게나 심한 울화가 치민다면 차라리 미쳐 발광을 하라며 폭언을 한 뒤 꼴도 보기 싫으니 금천교에서 대죄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세자는 영조의 명에 따라 비가 퍼붓는 야밤까지 금천교에서 무릎을 꿇고 목이 찢어질 듯 통곡하며 대죄하였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영조는 금천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억눌러왔던 자신의 모든 감정이 폭발해 버리고 만 세자는 궁궐 후원에 파 놓은 무덤(굿판)의 관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영조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한 뒤, 칼을 찬 채 자신의 자객들을 이끌고 경희궁으로 향한다. 이후 내관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한 혜경궁 홍씨는 거세게 내리치는 비를 뚫고 다급히 세자의 앞길을 막아선다. 그녀는 차갑게 비키라고 명령하는 세자의 다리를 붇들으며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며 제발 거동을 멈추어달라 간곡히 호소하지만,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 세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역모라고 주장하는 영조에게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그녀를 뿌리치고 경희궁을 향해 꿋꿋이 나아간다. 이에 자신의 힘으로는 세자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혜경궁 홍씨가 시어머니인 영빈에게 찾아가 지금 세자가 경희궁으로 칼을 차고 갔다며 세자를 막지 않으면 세자는 물론이고 세손까지 모조리 죽는다 소리치지만, 소식에 충격을 받은 영빈 또한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결국 마침내 영조가 있는 전각 앞까지 도착한 세자. 창호에는 영조와 세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세자는 잠시 멈추어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그들의 대화 소리를 엿들어 보았다. 그러자 얼마 전 세손이 영빈에게 사배를 올린 것에 대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하여 영빈을 향해 사배를 올렸느냐 영조가 묻자, 세손은 할아버지가 임금이 아니라고 한들 자신은 할아버지에게 마땅히 백배, 천배를 올릴 수도 있다며 사람이 있기에 예법도 있는 법인 만큼 그 날 자신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했다 답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같이 영조와 공감대를 맞추며 총명한 모습을 보이는 세손을 본 세자. 그런 세자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이대로 영조의 목을 내려친다면 자신마저 저런 총명한 아들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다시말해 본인 또한 세손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영조의 모습과 같은, 원망스러운 아버지로 생각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세자는 역모를 포기하고 날이 선 검을 힘 없이 내리며 세손의 총명함에 대한 기특함과 자신의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뒤섞인 눈물을 흘린다.
16. 일곱째 날 (1762년 7월 10일)
1762년 임오년 7월 10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될 운명의 날. 영조와 사도세자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간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다.[24]영조 : 너의 형
효장세자가
죽고,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네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핏덩이인 널 세자로 책봉하고 두 살때부터 제왕의 교육을 시켰겠느냐? 그때 네가 보여준 총명과 슬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랬던 네가 칼장난하고, 개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할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사도세자 : 그래서 신하들 앞에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병신 만들었소?
영조 : 너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더냐.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사도세자 : 그게 어찌 내 실수 때문이겠소? 아버지가 왕이 된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혀 전전긍긍한 것이지.
영조 : 너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운명을 모르느냐? 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이 되지 못했다면 나는 그때 죽었다.[25] 내가 죽었으면 너도 없는 거야.
사도세자 :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울먹이며) 공부가 그리 중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한 것이오?
영조 : 임금이 공부 모자라고, 대님 하나만 삐딱해도 멸시하는 것이 신하다.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고, 예법이 국시야.
사도세자 : 내가 왜 그날 밤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는지 아시오?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26]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조 :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감정이 북받치며)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영조 :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사도세자 : 그래서 신하들 앞에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병신 만들었소?
영조 : 너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더냐.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사도세자 : 그게 어찌 내 실수 때문이겠소? 아버지가 왕이 된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혀 전전긍긍한 것이지.
영조 : 너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운명을 모르느냐? 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이 되지 못했다면 나는 그때 죽었다.[25] 내가 죽었으면 너도 없는 거야.
사도세자 :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울먹이며) 공부가 그리 중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한 것이오?
영조 : 임금이 공부 모자라고, 대님 하나만 삐딱해도 멸시하는 것이 신하다.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고, 예법이 국시야.
사도세자 : 내가 왜 그날 밤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는지 아시오?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26]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조 :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감정이 북받치며)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영조 :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체제공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사초에 기록하지만, 이후 사초는 모두 파기되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뒷이야기로 남게 된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뒤주를 연 영조는 아들의 사망을 확인한 뒤 오열하고, 영빈 이씨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오열하며 혜경궁 홍씨 역시 눈물을 흘린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리라고 지시한다. 신하들은 자식 죽여놓고 개선가를 울리는 독한 영조의 행보에 기막혀하는 한편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구겨진 청룡부채를 씁쓸히 바라본다.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며 금천교를 건널때, 다리 위에서 세자가 석고대죄를 하는 환영을 본다.
17. 여덟째 날 (1762년 7월 11일)
세자의 장례가 진행되면서 영조는 세자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준다.[27] 장례 도중 화완옹주는 세손을 끌어내며 상복을 벗기려 하였고 이를 만류하려는 혜경궁에게 더 이상 세손이 호적상으로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비통한 현실을 알려준다.[28]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참가할 수 없다는 사실에 통곡하는 세손에게 혜경궁은 뺨을 때리고 세손을 붙들며, 네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세손을 진정시킨다. 이후 세손의 청으로 임오화변의 승정원일기는 세초되나 영조는 그 일은 순전히 대의에 의한 것이며 추후에도 절대 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29]18. 14년 뒤 (1776년)
임오화변이 발생한 지 어느덧 14년. 영조가 승하한 뒤 마침내 정조는 보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며 미처 그때 드리지 못했던 물 한잔을 드리고 오열한다.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 날 아버지가 그린 청룡부채를 들고 사도세자를 추모한다. 그리고 정조, 아니 사도세자 이선의 아들 이산의 흥겨우면서도 서러운 부채춤이 계속되다, 마지막에 산이 청룡부채를 '촥!' 소리가 나도록 펴 얼굴을 가리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1]
극에서 영조는 좋은 일이 있으면 만안문을 통해, 흉한 일이 있으면 경화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출입한다.
[2]
실제 역사에서 이는 자결 시도가 아닌, 용서를 간청하는 목적이였다고 한다.
[3]
사약을 내리자니 세자가 공식적으로 역적이 되게 하는 꼴이기에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살려 두자니 역모를 용서하는 꼴이기에 불가능하니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다는, 앞선 두 가지의 걸림돌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4]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5]
영조와 그의 정실부인
정성왕후 사이에는 친자식이 없었다. 둘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후궁
정빈 이씨 사이의 아들이었던
효장세자가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되는데, 그는 9살의 나이에 돌연
요절해 버리고 만다. 이후 7년 동안 슬하에 아들 없이 지내던 영조는 불혹를 넘기고 나서야 마침내 후궁
영빈 이씨를 통해 아들 사도세자를 낳았고, 매우 기뻤던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그를 향후 왕세자로 임명하기 위해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시킨다.
[6]
바로 전 장면에서 세자를 위한 책을 직접
필사하던 것과 오버랩된다.
[탐구]
하지만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아들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 사례는 이미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세손을 비롯한 세자의 후손들의 정통성을 위함이 더 높다.
[8]
이를 유념하고 영화를 다시 본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장면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9]
사랑하는 사람을 언급할 때에는 영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언급할 때에는 중전을 비추는 모습은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영조와 중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묘미이다.
[10]
이 부분만 대비가 일러주는데, 어머니로서 아들의 그 까탈스러움에 진절머리가 나있는 것이 그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11]
이 때 홍인한은 형 홍봉한에게 "주상이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라고 속삭인다.
[12]
실제 역사에서는 나주 괘서 사건이 아닌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의 장례를 치를 때 문씨가 영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3]
자신은 호남 선비들에게 '진짜 왕이 아닌 찬탈자'라는 욕을 들었는데, 세자는 호남으로 발령된 신하 이의경에게 시를 써 주며 인망을 얻고 있다는 소식에 질투가 난 것이다.
[14]
홍봉한의 훗날을 생각하라는 말은 결국 세손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15]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조의 승은을 입어 그의 아이를 임신해서 만삭이었다.
[16]
영화에서는 정조가 태어난 해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승하한 것으로 묘사되나 실제로는 정조가 태어나고 약 5년 뒤에 승하하게 되며, 정성왕후가 먼저 승하하고 약 2달 뒤 인원왕후가 승하하게 된다.
[17]
신하가 '저하는 술을 잘 못 잡수는 체질이시니 그만 드려라'며 술을 따르는 기생을 꾸짖고, '그러다 몸 상하신다'고 세자를 만류하는 것을 보면 이 시점의 세자는 본인의 주량을 한참 웃도는 술을 폭음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8]
원 역사를 일부 반영한 장면이나, 원 역사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은 채 그냥 풀어헤쳐진 모습으로 잠들었을 뿐인 세자를 영조가 트집잡아 혼을 내고, 자다가 창졸간에 부왕의 질책을 받게 된 세자를 상궁이 변호하다가 사달이 났다. 세자는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하여 신하들을 내쫓다가, 하필이면 신하들이 쫓겨나는 와중에 촛대가 넘어져서 낙선당에 불이 났다.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왜 지르느냐'라며 더 혼을 냈다. 두 번이나 억울하게 혼이 난 세자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말려 겨우 살아났다.
[19]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음모론의 중심이 정순왕후와 노론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온 시기는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갈등이 이미 곪을대로 곪은 시기인 만큼 정순왕후가 관여했을 여지는 적어보인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전임자이자 사도세자의 첫번째 적모인
정성왕후와 달리 본인은 적모의 자격으로서 영조를 말리거나 중재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사실 정도가 있겠지만, 이조차도 사실 사도세자가 이미 정순왕후를 못마땅하게 여겨 문안도 안 가는 등 불손하게 행동한데다 정순왕후 역시도 계비로서 정성왕후와 달리 사도세자와 지낸 시간이 적었기에 마냥 관여했다거나 잘못했다고는 판단할 수 없는 편이다.
[20]
한중록에서 '세자가 아무리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광증을 드러내어도 생모인 영빈께는 효성을 다하려 했다'는 혜경궁의 회고가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묘사로 보인다. 아직 광증이 심해지기 전에는 그래도 영빈에게는 효성을 다하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부왕의 질책이 가혹해지고 세자의 광증도 더 심해지자 영빈에게마저 성화를 부리고 불효를 끼쳤다고 한다.
[21]
실제 역사에는 없는 인물로 포도대장
구선복을 모티브로 따온 인물로 추정. 다만 뒤주에 갇힌 세자 앞에서 방자하게 굴었다는 풍문이 있고 정조 대에서도 역모나 꾸미다 죽임을 당한 구선복과는 달리, 김도수는 세자가 광증이 도져 뒤주를 빠져나와 문을 열으라 명할 때 묵묵히 세자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22]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어머니에게 6년만에야 뒤늦게 환갑을 축하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을 아껴준 적모
정성왕후를 친모
영빈 이씨에게 투영한것이다. 일전에 정성왕후의 환갑은 영조에 의해 파토났고, 그 후 6년뒤인 1757년 정성왕후가 사망했으며, 그 후 6년여 뒤인 작중 시점에서 영빈이 환갑을 맞으면서 환갑도 못치르고 사망한 정성왕후의 환갑을 대신 치르는 것이다. 이를 혜경궁 홍씨도 아는지 왕비 옷 정도만 입어도 큰 일이라며 얘기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묵묵히 환갑을 같이 치렀다.
[23]
이 또한 이미 훙서한 적모 정성왕후를 친모 영빈에게 투영하며, 두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애통해하는 세자의 모습이 들어 있다.
[24]
정말로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부자 간의 정을 통해 마음으로 서로의 뜻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25]
실제로
신임옥사때 영조는 폐세제를 자처할 정도로 벌벌 떨어야만 했었다.
[26]
세자가 칼을 들고 경희궁을 찾아갔던 밤, 세손이 영조에게 했던 말 그대로이다.
[27]
영화에서는 영조가 세자를 생각하며 슬퍼했기 때문에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세자가 저승에서 자신에 죄에 대해 생각하려 함으로써 = 생각할 사(思) 요절함 = 슬퍼할 도(悼) 이라는 뜻으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28]
실제로 정조는 임오화변 직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다.
[29]
실제로 정조는 끝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하였고 후일 고종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