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Wilhelm Reich 빌헬름 라이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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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오스트리아 | |
출생 | 1897년 3월 24일 |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도브자우 도브리아니치(Dobrianychi)[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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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7년 11월 3일(60세) | |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 루이스버그(Lewi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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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무종교 | |
학력 | 빈 대학교 의학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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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태생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로 알려져있다.2. 생애
18세 때인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2년여 동안 싸웠다. 전쟁에서 무공이 뛰어났는지 2년 후에는 소대장으로 휘하에 40여명의 병력을 이끌었다.1918년말 전쟁이 끝나면서 제대했고 1919년 빈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법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반면 1학년때 지그문트 프로이트 교수의 수업을 듣고 그의 정신분석학에 큰 흥미를 느껴 의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지도하에 정신분석학을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허락하에 1920년 학부생 신분임에도 부분적인 임상을 시작했다. 당시 패전국 오스트리아(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_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고 기근까지 겹쳐 그 역시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프로이트를 통해 임상에 참여하면서 그는 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상 환자인 로어 칸(Lore Kahn)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칸의 부모가 그들의 만남을 금지시켰기에 칸은 라이히가 마련한 추운 방에서 지내다가 추위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칸이 죽은 지 두달 후 칸의 친구인 19세 의대생 애니 핑크를 분석 환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재학연한 단축 대상이 되어 1922년 조기졸업하여 학사를 취득했다. 이후 시립대학병원과 프로이트 클리닉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의 셸쇼크 환자가 많아 클리닉은 성황을 이루었다. 1922년 자신의 환자였던 애니 핑크(애니 라이히)와 결혼했다.
라이히는 자신의 치료법을 정신분석학 상담과 마르크스주의 조언, 피임법의 혼합이라 하였다. 그는 성적 억압이 히스테리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오르가즘을 긍정하여 프로이트와 이론적 간격이 생겨났다. 그는 성기의 오르가즘을 통해 노이로제에서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혼자들과 청소년을 포함한 성적 허용성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위한 피임기구의 보급에 나섰고, 또 성교육 팜플렛을 만들어 집집마다 배포하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다른 정신분석학자들과 좌파 정치인들에게 동시에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학계에서 성기와 성행위, 오르가슴에 탐닉하는 그에 대해 괴짜, 사이비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프로이트 역시 아꼈던 제자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1929년 직접 소련을 방문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본 소련은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인민을 극도로 억압하는 권위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고 돌아온다.
이후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기계론적 관점의 한계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섹스-정치(Sex-pol)를 주창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공산당의 계급 투쟁 노선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모독이라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권위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판했고, 아울러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섹스-정치(Sex-pol)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업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공산당은 그를 영구 제명, 추방하였다.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에도 그는 열렬한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지만, 현실사회주의자(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에서 자신을 암살할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정신분석학계에서도 점차 그의 주장이 정신분석학의 왜곡이라는 비판이 커져갔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결합을 주창하자, 정신분석학회는 정신분석학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그의 저서의 출판을 거부했다. 1933년 그가 덴마크로 이주하자, 독일 정신분석학회는 그가 스칸디나비아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해야 한다면서 그를 제명했다.
자신의 신념에 맞게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추구했던 라이히는 결혼 기간 중에 여러차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결국 1932년 엘자 린덴베르크라는 댄서와 관계 이후 그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고, 1933년 애니와 이혼했다.
라이히가 이혼하기 몇달 전에 나치당이 집권을 시작했고, 1933년 3월 나치당 신문에 라이히의 섹스-정치를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1933년 이혼 소송이 마무리되자 라이히는 엘자 린덴베르크와 함께 덴마크로 이주했다. 하지만 1933년 11월 덴마크 공산당은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전력을 들면서 그가 반혁명적이며 십대들의 성행위를 조장하고 낙태를 촉진한다면서 그를 덴마크에서 추방했다. 심지어 라이히는 덴마크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34년 덴마크 비자가 만료된 후 갱신받지 못했고, 그는 덴마크 거주 허가를 잃었다. 그는 영국으로의 이주를 위해 영국 기자들과 접촉하여 인터뷰했으나 영국 매체들은 그가 프로이트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영국 입국 허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웨덴 말뫼를 거쳐 노르웨이 오슬로로 이주하여 이곳에 엘자 린덴베르크와 함께 정착했다.
1934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학회에 참석했는데, 학자들은 그가 정신분석학에 혁명적 사상을 결합했고, 심지어 정신분석학보다 사회주의를 우선시하는 시도를 통해 정신분석학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며 그에게 탈퇴를 요구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정착한 그는 지인인 심리학자 하랄 슈옐데루프의 도움을 받아 섹스와 오르가즘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붙인 섹스 실험 참가자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온 독일인 연인이 있었는데, 나중에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와 그의 내연녀인 게르트루트 마이어(게르트루트 가슬란드)였다. 섹스에 매우 강한 흥미와 집착을 보이던 브란트와 매우 친해졌고 그의 동거녀인 게르트루트는 아예 라이히의 비서이자 오르가즘 실험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라이히는 여러 여성 환자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그럼에도 그는 엘자 린덴베르크와 결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엘자는 그의 난잡한 생활에 고통을 받았다. 라이히는 자신의 문란한 성생활에도 불구하고 엘자와 작업하던 작곡가의 관계를 의심하여 그를 폭행하는 등 문자 그대로 내로남불을 시전하였다. 결국 1930년대말 엘자 린덴베르크와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937년경부터 그의 연구에 대해 노르웨이의 학자들이 격렬한 반대가 일기 시작했다. 일부 노르웨이 학자들은 1938년 2월 만료되는 그의 비자 갱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938년 라이히를 비판하는 기사가 13개의 노르웨이 신문에 개재되었고, 미국 최대 신문에도 이것이 보도되기도 했다.
1939년 그는 미국 비자를 신청했고 4개월이나 초조하게 기다린 후에 8월 비자를 받아 8월 19일 미국행 여객선에 승선했다. 불과 10여일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참으로 운 좋게도 그가 탄 배는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객선이 되었다. 노르웨이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비서이자 조교인 게르트루트도 라이히와 함께 미국행 여객선을 탔다. 하지만 엘자 린덴베르크는 미국으로 떠나길 거부하고 노르웨이에 남았다. 한편 빌리 브란트는 동거녀인 게르트루트가 만류를 뿌리치고 라이히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자 큰 실의에 빠졌다.
미국으로 오기 직전 노르웨이에서 극렬한 반대를 경험한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대인 기피 증상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적국 출신인 그에 대해 FBI가 며칠 동안 수사하기도 했다. 당시 FBI가 그의 가택을 수색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블라디미르 레닌 전기, 레온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 어린이를 위한 러시아어 교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공개된 FBI 보고서에는 그의 공산주의 활동 관여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보안 조사를 했으나, 그는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또한 오르곤 프로젝트 등 그의 연구와 활동은 파괴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어떤 법령도 위반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3]
미국에서 그는 게르트루드 가슬란드를 통해 알게된 29세의 일세 올렌도르프와 관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임신했지만 라이히는 낙태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계속 지속되었고, 결국 1944년 임신했을 때 낙태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고, 1946년 결혼했다. 그러나 1951년 9월 이혼했다. 사유는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그녀는 3년간 그의 연구소에서 더 일했다. 이혼 후에도 그는 그녀를 여러차례 비난했고, 심지어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로이스 와이벨이라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내로남불 행태를 보였다. 1954년에는 자신의 환자이자 제자의 아내였던 그레테 호프와 바람을 피웠다. 그녀가 라이히와 동거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법적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 라이히는 연구원인 오로라 카러와 또다른 관계를 맺었고, 그녀와 관계를 위해 워싱턴 D.C.에 아파트를 마련하여 두집 살림을 했다. 워싱턴에서 그는 월터 로너 박사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 이후로 미국에서 오르가즘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미국에 정착한 이후 그는 그동안 계급 지배와 성적 억압을 함께 연관하려던 생각에서 계급 지배에 대한 사고를 점차 버리고 성적 억압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오르가즘 연구를 발전시켜 '오르곤 에너지(Orgone Energy)'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오르곤 에너지를 통해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적 질환은 물론이고, 암과 같은 각종 신체적 질병까지 모두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수 차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전자기 에너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생물학적 에너지를 발견했으며 이것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에서 사용될 무기로 만들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오르가즘을 통한 성적 억압 해방을 외치는 그의 주장에 미국 매스컴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의 주장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가 심화되던 194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비판적인 반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이 언론에 언급되자, 1951년부터 라이히는 오르곤 에너지가 방사능을 중화시킬 것이라고 믿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의 산물로 그는 기구를 발명했고 클라우드버스터(cloudbuster)라 명명했다.
이후 그는 오르곤 에너지를 적용하기 위한 기구를 발명하여 특허를 출원했다. 하지만 이 특허 신청은 기각되었다. 그는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50년대에 그는 학계로부터 고발당했다.
로스웰 사건 이후 1953년부터 그는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UFO가 단순한 우주 공간의 물체가 아니라 지구 공격을 기도하는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했고, 이미 지구가 UFO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UFO가 오르곤 에너지를 이용하여 비행하며, 그 뒤를 따라 치명적인 검은 오르곤 방사선 흐름을 남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 UFO를 타고 지구 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이 UFO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UFO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라이히 부자는 망원경과 쌍안경을 통해 밤새 UFO를 찾았다. 그리고 실제로 UFO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라이히는 그 중에 일부를 격추시켰고, 애리조나 기지국에 불시착한 외계인들과 라이히 본인이 개발한 오르곤 에너지 무기인 클라우드버스터(cloudbuster)를 이용하여 행성간 교전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는 오르곤에 기초한 의식(ritual)을 수행함으로써 UFO로부터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우주에서 온 존재일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학계 등으로부터 고발이 이어지자 1954년 그는 FDA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의료사기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오르곤 기계의 사용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라이히는 과학과 법원의 판결은 무관하다며 법원의 이행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법원 명령에 따르지 않는 법정 모욕죄로 기소되어 1956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펜실베니아 루이스버그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라이히는 수감 이후에도 동료, 지지자들과 활발한 서신을 주고 받으며 그의 사상과 작업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였다.
1957년 11월 향년 6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이론
라이히 사후에 그에 대해선 오르가즘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만 알려져있지만 미국 이민 이후론 주로 오르곤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했다.3.1. 오르가즘 이론
라이히는 <<오르가즘의 기능>> , <<파시즘의 대중심리>> 를 저술했는데 이는 권위주의로 인한 성적 억압은 인간이 자유, 평등, 박애보다는 차별,혐오,억압에 순응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을 지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라이히가 정의하는 파시즘은 68혁명 이전까지 통용되던 국민생디칼리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유, 평등, 박애를 억압하는 인간의 심리를 의미한다.오해하지 말 것은 라이히가 말하는 성해방은 야동, 성매매같은 성상품화나 난교, 비생식 성교 허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적 공상, 욕망을 양지에서 표출하지 못하고 음지로 숨겨야하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성적 억압 상태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성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때문에 사회적 사도마조히즘이 만연된 체제를 지지하여 성욕을 대리만족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현상이 나치 독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좌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와 일제 사회, 기독교 우파 사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권력자에 대한 숭배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현재 정치적 올바름 관점에서 호모포비아라고 지탄받을만한 주장이 있는데 당시 라이히는 동성애를 성적 억압으로 인한 현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4]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성애는 타고난 성적 지향이기보다는 불교 승려들의 남색이나 조선 궁녀들의 대식 같이 억압적인 환경에서의 이성애자들의 성적 일탈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3.2. 오르곤 이론
라이히가 오르가즘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론인데 인간의 신체에서는 한의학에서 언급하는 기(氣)처럼 오르곤(Orgone)이라는 에너지가 존재하고 인간이 겪는 질병은 오르곤이 교란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라이히는 오르곤의 흐름을 바로 잡으면 내과적 질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오르곤으로 동력 장치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오르곤은 신체 밖인 우주에서까지도 존재하고 지구의 생명도 오르곤이 질서있게 흐르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르곤의 흐름을 조정해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 기계 장치인 클라우드버스터(cloudbuster)라는 물건까지 만들어가며 자신의 이론을 실제로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는 라이히가 1957년에 당시 미국 과학계에게 고발당하는 명분이 되었고 그가 구속되었을 당시 그의 연구작들이 분서되거나 철거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일부 지식인들에게 규탄되었지만 사후에 오르곤 이론은 대중적으로 잊혀졌다.[5]
4. 평가
그의 후기 이론인 오르곤 이론은 대중적으로 전승되지 못했지만 전기 이론인 오르가즘 이론은 1960년대 성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긍정 지지자들이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빌헬름 라이히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다만 이는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이 제대로 전승된 것이 아니었는데 당시 라이히는 사회적 사도마조히즘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지닌 성욕 표출을 허용한 것이지만 성해방 운동 당시엔 당시 주류 사회가 금지했던 야동, 성매매, 성상품화, 성소수자, 난교, 혼전, 혼외성교의 양지화를 지지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기독교 우파 같은 종교적 우파나, 사회보수주의, 대안 우파는 빌헬름 라이히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음모론적 정의를 내세우며 매우 적대시하고 있으며 라이히때문에 성범죄, 가정해체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빌헬름 라이히의 아들 피터 라이히는 1973년 A Book of Dreams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했다. 1985년 영국의 팝 가수 케이트 부시는 이에 영감을 받아 Cloudbusting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5. 여담
- 라이히가 초기 에리히 프롬과 초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초기에도 사실 매우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사상가로서 자신의 이론을 가지게 된 프롬과 마르쿠제는 결국 라이히를 부정하기에 이른다.[6][7] 그들은 라이히의 주장과는 다르게 성 해방은 더 이상 전복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현존 억압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8][9]
[1]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이다.
[2]
현재
Medical University of Vienna
(빈의과대학교)
[3]
뉴저지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서점에서 공산주의 자료를 배포하던 윌리엄 라이히(William Reich)라는 인물과 혼동하여 빌헬름 라이히를 조사했다는 추측이 있다.
[4]
라이히 생전엔
성소수자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히 사후인
스톤월 항쟁 이후로 성소수자 운동권들이 세계화된 것이다.
[5]
무한동력을 믿는 일부 뉴에이저들은 오르곤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6]
프롬은 성격유형론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하던 빌헬름 라이히의 견해에 가까웠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억압되지 않은 생식기적 성욕의 해방 효과에도 라이히의 이론에 동조한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프롬은 그 뒤 몇 년 동안 라이히의 견해에 점차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치즘의 사례에서 성적 자유가 반드시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지 않음이 증명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노명우 옮김, 동녘, 2021, p.191)
[7]
마르쿠제는 라이히의 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동료 망명객(라이히)보다는 성기에 덜 고착되어 있었다. 『에로스와 문명』에서 그는 오르가즘의 양이나 질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았다. 라이히의 실수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 질병에 대한 만능치료제로서 성 해방"을 주장한 것이라고 마르쿠제는 지적했다. "그(라이히)의 이론에서 승화의 문제는 축소되었다. 억압적 승화와 비억압적 승화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구별도 하지 않았고 자유의 진보는 그저 성 해방으로 나타났다."(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9, p.399~400)
[8]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는 자유로운 방종의 60년대를 칭송하기보다는 땅에 묻어버렸다. 1960년대 사회가 허용해준 것은 겉보기와 달리 엄격한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였다. "이 사회는 손대는 족족 모든 것을 체제 발전을 위한 잠재적 원천이자 착취와 고역과 만족, 자유와 억압의 원천으로 바꾸었다. 섹슈얼리티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마르쿠제는 썼다. 과거에는 섹슈얼리티의 좌절이 불만족의 저장고를 만들어내고 사회적 질서를 위협했다면 마르쿠제가 묘사한 사회에서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것이 성 해방을 통해 극복되었다. 이제 성 해방은 전복적이지 않고 그보다는 현존 억압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마르쿠제는 생각했다. 헤겔의 '불행한 의식'은 가능한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성적 좌절은 불행한 의식의 한 형태이다. 하지만 억압적으로 탈승화된 사회에서 불행한 의식은 극복되었다. 일차원적 사회의 구성원들은 행복한 의식이 되어서 성적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마르쿠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었다. (중략) 마르쿠제가 찾아낸 일차원적 사회의 악마적 천재성은 쾌락을 억압의 도구로 만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성적 노출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일차원적 인간은 자신을 성혁명가로 생각하게 된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9, p.439)
[9]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오락산업을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한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 된다. 우리의 성격 또한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해진다. 마침내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서, 남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 매력 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 된다. 이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유쾌한 태도와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한다. 남자들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려고 하고, 여자는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고자 한다. 하지만 이로서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기껏해야 '받은 만큼 준다'는 자본주의의 공정한 거래 윤리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1976(2019 개정5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