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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앤 소울/퀘스트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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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온라인 게임 블레이드 앤 소울 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퀘스트 저널의 '지난 이야기' 탭의 내용을 서술한다.

메인 퀘스트의 진행만으로는 알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로, 메인 퀘스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거나 현황, 메인 퀘스트가 관계된 사건의 전말 등을 알 수 있고, 퀘스트 저널에서만 뿌려지는 떡밥도 상당히 많다. 한마디로 블소 스토리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문서.

1. 서막. 깨어나기 싫은 꿈
1.1. 1장. 무일봉의 아침1.2. 2장. 수련 준비1.3. 3장. 무성 사형의 행방1.4. 4장. 사부님의 부름1.5. 5장. 홍문파 입문1.6. 6장. 수련의 시작1.7. 7장. 통과의례1.8. 8장. 멸문의 위기
2. 1막. 상처받은 자들
2.1. 1장. 구사일생2.2. 2장. 대사형 도천풍2.3. 3장. 자경단장의 아들2.4. 4장. 남소유라는 이름의 여인2.5. 5장. 생명의 은인2.6. 6장. 수상한 촌장2.7. 7장. 도적들의 정체2.8. 8장. 해적과 손잡은 산적2.9. 9장. 어두운 등잔 밑2.10. 10장. 해적의 소굴2.11. 11장. 검은 기운2.12. 12장. 탁기의 시체2.13. 13장. 괴팍한 독초거사2.14. 14장. 어둠 속 출수2.15. 15장. 곰 사냥2.16. 16장. 예정된 기연2.17. 17장. 팔부기재의 시험2.18. 18장. 이독치독2.19. 19장. 망자의 역습2.20. 20장. 잃어버린 봇짐2.21. 21장. 겁먹은 아이2.22. 22장. 첩자의 정체2.23. 23장. 경국지색2.24. 24장. 거짓 서신2.25. 25장. 결전을 위한 준비2.26. 26장. 남소유 구출작전2.27. 27장. 불타는 대나무 마을
3. 2막. 사막의 검은 흔적
3.1. 1장. 수상한 마을3.2. 2장. 원군 요청3.3. 3장. 거만한 수비대장3.4. 4장. 의문의 마교집단3.5. 5장. 원수의 흔적3.6. 6장. 위기의 무녀들3.7. 7장. 어둠의 구멍3.8. 8장. 운국의 감찰관3.9. 9장. 낭인무사의 정체3.10. 10장. 불타는 환영초 밭3.11. 11장. 절사명의3.12. 12장. 배신자의 집3.13. 13장. 끌려간 미령3.14. 14장. 심마3.15. 15장. 무신의 비보를 노리는 장군3.16. 16장. 보물사냥꾼3.17. 17장. 연꽃의 도적3.18. 18장. 도적의 행방3.19. 19장. 동업3.20. 20장. 무신삼원로3.21. 21장. 고대의 살수3.22. 22장. 무신릉의 단서3.23. 23장. 번갯불을 찾는 도공3.24. 24장. 가마의 제3.25. 25장. 주정뱅이 기인3.26. 26장. 천씨 성을 지닌 자3.27. 27장. 죽음 위의 연꽃3.28. 28장. 명장의 석상3.29. 29장. 은조패3.30. 30장. 배신한 사형과 만남3.31. 31장. 애꾸눈의 사연3.32. 32장. 무신을 가리키는 나침반3.33. 33장. 춤추는 바늘3.34. 34장. 이이제이3.35. 35장. 무신의 후예3.36. 36장. 다시 만난 거지 노인3.37. 37장. 뼈가면의 전사들3.38. 38장. 앙숙3.39. 39장. 무신의 날개3.40. 40장. 복수의 길, 홍문의 길3.41. 41장. 다시 만난 팔부기재
4. 3막. 동쪽에서 부는 검의 바람
4.1. 1장. 뒤틀린 용맥4.2. 2장. 과거와 현재의 인연4.3. 3장. 동맹을 위한 탈출4.4. 4장. 환귀와 붉은 꽃4.5. 5장. 경천맹주의 명4.6. 6장. 바람의 늑대4.7. 7장. 깨어난 신시4.8. 8장. 행방불명된 회주4.9. 9장. 귀농하는 강호인4.10. 10장. 돼지와 인간 사이4.11. 11장. 위기의 일심4.12. 12장. 다시 만난 충각단4.13. 13장. 그림자 맹주4.14. 14장. 개구리의 왕4.15. 15장. 최강의 전투종족4.16. 16장. 귀도시를 지키는 자들4.17. 17장. 장수의 망령4.18. 18장. 탁기에 물든 백성들4.19. 19장. 왕이 되는 의식4.20. 20장. 천하사절의 등장4.21. 21장. 익산운의 아들4.22. 22장. 원숭이 왕과 비무4.23. 23장. 경천패의 주인4.24. 24장. 고립된 병사들4.25. 25장. 위기의 경천맹4.26. 26장. 제국의 대용맥4.27. 27장. 대봉기4.28. 28장. 마도의 길
5. 4막. 복수의 시작(리부트 전)
5.1. 1장. 어둠의 길5.2. 2장. 농민 탄압5.3. 3장. 제국의 개5.4. 4장. 음지의 세력5.5. 5장. 독살의 음모5.6. 6장. 운국을 일으키려는 자들5.7. 7장. 역병 정화5.8. 8장. 녹림왕의 귀환5.9. 9장. 수도 입성5.10. 10장. 하오방주를 체포하라5.11. 11장. 복운회의 회합5.12. 12장. 조장원 침투5.13. 13장. 승상의 정체5.14. 14장. 황궁 비무연5.15. 15장. 사라진 공주5.16. 16장. 공주 구출 작전5.17. 17장. 태사 진서연5.18. 18장. 뇌옥5.19. 19장. 팔부기재와 결투5.20. 20장. 깨달음의 의식5.21. 21장. 비움과 회복5.22. 22장. 도천풍의 과거5.23. 23장. 후궁 남소유5.24. 24장. 위기의 백림사5.25. 25장. 얼어붙은 숨결5.26. 26장. 속세의 정5.27. 27장. 검의 무덤5.28. 28장. 비극의 전모5.29. 29장. 천명제5.30. 30장. 작별5.31. 외전. 끝나지 않은 위협
6. 4막. 복수의 시작(리부트 이후)
6.1. 1장. 백청산맥으로6.2. 2장. 녹림도6.3. 3장. 소녀의 부탁6.4. 4장.소양상을 찾아라!6.5. 5장. 녹림도 주둔지 소탕6.6. 6장. 추적자6.7. 7장. 목숨을 건 도박6.8. 8장. 여인의 순정6.9. 9장. 소양상 체포 작전6.10. 10장. 강류시 입성6.11. 11장. 정체불명의 저격수6.12. 12장. 탄포사의 주인6.13. 13장. 황궁 비무연6.14. 14장. 재회6.15. 15장. 적의 적은 동지다.6.16. 16장. 진상 손님?6.17. 17장. 수상한 백일기도6.18. 18장. 뇌옥 폭동6.19. 19장. 천벌6.20. 20장. 필요 없는 그릇6.21. 21장. 철가면6.22. 22장. 팔부기재의 희생6.23. 23장. 도천풍의 회상6.24. 24장. 백림사 습격6.25. 25장. 비밀의 정원을 찾아서6.26. 26장. 작전 상 후퇴6.27. 27장. 얼어붙은 땅6.28. 28장. 유지를 받드는 자6.29. 29장. 겨울잠6.30. 30장. 검의 무덤6.31. 31장. 그 날 이후6.32. 32장. 황제의 귀환6.33. 33장. 폭풍전야6.34. 34장. 전우6.35. 35장. 흑룡의 천명제6.36. 36장. 권토중래6.37. 37장. 최종결전6.38. 38장. 작별
7. 간막. 시작되는 음모
7.1. 끝나지 않은 위협
8. 5막. 사라진 아이들
8.1. 1장. 유명세8.2. 2장. 불청객8.3. 3장. 사부님 오 나의 사부님8.4. 4장. 강호의 납치 사건8.5. 5장. 드러난 진범8.6. 6장. 되살아난 귀환8.7. 7장. 마성의 피리소리8.8. 8장. 아이들을 찾아서8.9. 9장. 지옥에서 돌아온 자8.10. 10장. 뜻밖의 부탁8.11. 11장. 외롭지 않은 무일봉
9. 6막. 흑룡의 그림자
9.1. 1장. 희망의 조각9.2. 2장. 새로운 시작9.3. 3장. 아픈 서연9.4. 4장. 뜻밖의 사건9.5. 5장. 악연의 시작9.6. 6장. 어둠의 징후
9.6.1. 변경 전9.6.2. 변경 후
9.7. 7장. 기둥 속 아이들
9.7.1. 변경 전9.7.2. 변경 후
9.8. 8장. 검은 기둥9.9. 9장. 흑룡의 배후9.10. 10장. 악연에서 인연으로9.11. 11장. 제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10. 7막. 구름 밑 인연
10.1. 1장. 단서의 시작10.2. 2장. 조력자10.3. 3장. 항구도시 채운항10.4. 4장. 조우10.5. 5장. 팔부기재 손반10.6. 6장. 정면돌파10.7. 7장. 석척족의 보물10.8. 8장. 검은 함선10.9. 9장. 기억을 품은 곳10.10. 10장. 불타버린 고향10.11. 11장. 간발의 차10.12. 12장. 깨지않는 서연10.13. 13장. 흑룡교주의 정체
11. 8막. 탁기에 물든 대륙
11.1. 1장. 서락으로11.2. 2장. 여정의 시작11.3. 3장. 번양의 행방11.4. 4장. 패랑족 암굴11.5. 5장. 추락한 제독 함대11.6. 6장. 호운촌 탈환을 위한 준비11.7. 7장. 호운촌 탈환11.8. 8장. 위기를 기회로11.9. 9장. 앞선 마음11.10. 10장. 뜻밖의 기연11.11. 11장. 숨겨진 마을11.12. 12장. 알현 준비11.13. 13장. 권모술수11.14. 14장. 죽은 자들의 땅11.15. 15장. 천건수가 메마른 마을11.16. 16장. 사라진 신녀11.17. 17장. 천건석을 찾아서11.18. 18장. 금조의 영역11.19. 19장. 하늘의 기운11.20. 20장. 되찾은 서연
12. 9막. 왕이 되는 자
12.1. 1장. 몰려오는 어둠12.2. 2장. 비밀 임무12.3. 3장. 수상한 연회12.4. 4장. 그릇된 휴식12.5. 5장. 천명궁의 실체12.6. 6장. 대장군부 진입12.7. 7장. 은밀한 탈출12.8. 8장. 구름 밑 그림자12.9. 9장. 제자들과 함께12.10. 10장. 어둠의 끝자락12.11. 11장. 제자들을 찾아서12.12. 12장. 천인의 피12.13. 13장. 수상한 흑룡교12.14. 14장. 검은 음모12.15. 15장. 배신당한 충성심12.16. 16장. 모두를 위한 선택12.17. 17장. 원치 않는 광명의 길12.18. 18장. 보낼 수 없는 마음
13. 10막. 빛이 가둔 진실
13.1. 1장. 혼돈의 시작13.2. 2장. 퍼져가는 탁기13.3. 3장. 천하사절13.4. 4장. 동귀어진13.5. 5장. 실마리13.6. 6장. 연합전선13.7. 7장. 새로운 인연13.8. 8장. 굳게 닫힌 삼도문13.9. 9장. 서운성 천무궁13.10. 10장. 사제의 연
14. 11막. 검게 물든 낙원
14.1. 1장. 다시 움직이는 흑룡14.2. 2장. 조력자14.3. 3장. 다시 눈뜬 아침14.4. 4장. 황실 비무제14.5. 5장. 깨어나기 싫은 꿈14.6. 6장. 선인들의 마을14.7. 7장. 하늘과 맞닿은 길14.8. 8장. 잿빛 하늘 속 투지14.9. 9장. 뜻밖의 동행14.10. 10장. 무신의 진의14.11. 11장. 낙화14.12. 12장. 저마다의 갈림길14.13. 13장. 혹독한 진실14.14. 14장. 인과 연
15. 간막 : 풍운지회
15.1. 1장. 새로운 행보15.2. 2장. 희망이 싹트는 계절15.3. 3장. 구름과 바람의 노래15.4. 4장. 축제의 밤15.5. 5장. 하늘에 수놓인 소원15.6. 6장. 찰나의 휴식
16. 12막. 북녘의 붉은 달
16.1. 1장. 악몽16.2. 2장. 불길한 일식16.3. 3장. 잊혀진 북녘의 땅16.4. 4장. 북방으로16.5. 5장. 무법자 속 비무법자16.6. 6장. 다시 닿은 인연16.7. 7장. 약육강식의 법칙16.8. 8장. 심마16.9. 9장. 산적은 산적이다16.10. 10장. 약을 부추기는 기운

1. 서막. 깨어나기 싫은 꿈

1.1. 1장. 무일봉의 아침

폭풍우 치던 밤, 한 자경단원이 다급히 숙소를 찾았다. 남쪽 바다에서 불기둥이 보였다는 보고다. 도천풍은 충각단이 아니란 말에 한숨을 놓긴 했지만 문뜩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쪽 바다는 무일봉이 있는 곳이다.

이십오 년 전, 도천풍은 무일봉을 떠났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사부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사길에 올랐다. 비록 사문을 떠난 몸이었지만 그는 하루도 사부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배는 어느덧 무일봉 앞바다에 이르렀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무일봉이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2. 2장. 수련 준비

종일 세 게으름뱅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진영의 하루는 다 갔다. 새벽부터 일어나 무공을 수련하는 영묵 대사형과 무성 사형과는 너무도 비교가 되는 못난이 삼총사였다. 이들이 자신과 함께 홍문파의 뒤를 이을 동문이라 생각하니 진영은 한숨이 나왔다.

저 멀리 사부님 안채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성 사형이 계속 탕약을 달여 올리지만 사부님의 병세는 나아지지가 않았다. 밤에도 기침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 같아 진영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오늘따라 밥 짓는 장작불이 맵다고 생각했다.

1.3. 3장. 무성 사형의 행방

조례시간을 앞두고 무표정한 영묵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매일 사제들이 늦잠을 자고, 수련을 게을리하는 일도 걱정이지만, 사부님마저 편찮으셔서 대사형으로서 문파를 돌보아야 된다는 책임감이 더 커서였다.

그나마 믿을만한 사제는 무성뿐인가. 영묵은 이른 새벽부터 무성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영묵은 무성이 또 어디선가 개인 수련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무성은 홍문파에 입문한 뒤 오직 홍문신공을 전수받겠다는 일념으로 수련에 매진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그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영묵은 그런 무성을 보면서 섬뜩함마저 느낀 적이 있었다.

1.4. 4장. 사부님의 부름

막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사부의 뒤를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진영은 살짝 기대에 부풀었다. 사부님이 막내를 정식제자로 받아들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영묵은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아침 수련을 마치자고 말했다. 진영은 막내를 연무장에서 보기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1.5. 5장. 홍문파 입문

영묵은 막내가 건넨 책을 보고 놀랐다. 그 책은 다름아닌 홍문신공의 비급이 적힌 책이었다. 영묵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부님은 수제자인 자신도 아니고, 출중한 무성도 아닌, 막내를 홍문신공의 계승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실망감보다 당혹감이 더 컸다.

어젯밤 사부는 영묵을 조용히 불렀다. 무조건 자신의 결정을 따라달라는 말과 함께 내일부터 막내의 수련을 맡아달라는 말을 건넸다. 이제서야 막내가 홍문파의 정식제자가 되는구나란 생각에 그는 기뻐하며 내일 수련을 준비했다. 그런데, 사부님의 결정이 이렇게 당황스러운 것인 줄 상상하지 못했다.

1.6. 6장. 수련의 시작

한눈 팔지 말거라. 무성은 진영에게 주의를 줬다. 진영은 막내의 첫 수련을 보다가 다시 목각인형에 집중했다.

진영은 무성 사형이 오늘따라 분위기가 무겁지 않냐고 길홍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길홍은 평소와 다른 게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어서 아침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투덜댔다. 여자에겐 직감이란 게 있다구요. 진영 사저가 여자였어요? 화중의 말에 길홍은 뒤로 넘어갈 듯 깔깔댔다.

진영은 두 멍청이의 아침밥은 개들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1.7. 7장. 통과의례

제가 하겠습니다.

늦은 밤, 무성은 영묵의 숙소로 찾아왔다. 내일 막내가 정식 제자가 된다는 걸 그도 안 모양이다. 홍문파에 첫 입문한 제자에게 우리 동문들끼리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다소 장난끼가 있긴 하지만, 운기조식 등을 가르쳐주는 수련의 일종이기도 하다. 무성은 그 통과의례를 자기가 맡겠다고 말했다.

사부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영묵은 자기가 할 테니 굳이 수고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무성은 다시 한 번 자기가 하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여태껏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하고, 부탁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던 무성이다. 게다가 지금의 말투는 부탁보다 결의가 느껴졌다.

1.8. 8장. 멸문의 위기

진서연...!

홍석근은 눈앞에 나타난 여인을 보고 놀란 채 서 있었다. 긴 머리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한이 서린 저 눈매. 분명 그녀는 진서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살귀는 익숙한 기운을 내뿜었다. 홍석근은 그녀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손에 쥔 지팡이를 꼭 다잡았다.

2. 1막. 상처받은 자들

2.1. 1장. 구사일생

남소유는 아기 때부터 도천풍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때 도천풍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일렀다. 도천풍은 남소유를 친자식처럼 대해 줬지만, 그녀는 가슴 한 구석에 늘 외로움이 서려 있었다. 남들이 그녀의 미색을 칭송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어도 그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그녀 뒤에서 한 환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도천풍이 며칠 전 바다에서 구출한 소협이었다..

2.2. 2장. 대사형 도천풍

도천풍은 저 멀리서 며칠 전 바다에서 구한 소협을 발견했다. 사경을 헤매던 자답지 않게 그는 충각단에 맞서 무공을 펼쳤다. 소협의 무공은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한 기본기가 갖춰져 있어 충각단을 상대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도천풍은 확신했다. 저 소협 또한 자신과 같은 홍석근 사부의 제자임을.

2.3. 3장. 자경단장의 아들

도단하는 마을의 골치덩어리였다. 자경단장인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에게 거들먹거리는 데다가, 나타나면 늘 사고만 쳤다. 게다가 자주 종적을 감춰 사람들로부터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

도단하도 자신에 대한 풍문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마을을 위해 애쓴다고 했는데,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서둘러 공을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결과는 충각단의 포로신세였다.

2.4. 4장. 남소유라는 이름의 여인

도단하는 그때 겨우 네 살짜리 아이였지만 지금도 그 모습이 잊을 수 없다.

운국 황실경호대장이었던 아버지는 그날따라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온 기척에 잠자던 도단하는 일어나 문으로 갔다. 문 앞에 아버지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한 팔에 비단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도단하는 피를 뒤집어 쓴 아버지보다 그 아기의 얼굴에 넋을 잃었다. 붉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달처럼 그 아기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도단하는 아버지와 함께 유랑생활을 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어린 아이에게는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아기가 웃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다. 도단하는 아버지에게 아기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소유라고 답했다. 성도 물었다. 아버지는 망설이다 답했다.
섭... 아니 남씨다. 남소유다.

2.5. 5장. 생명의 은인

도천풍은 촌장이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요즘 들어 촌장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마을에 첩자가 있다는 일 때문에 촌장도 나름대로 알아보는 것 같았다. 자경단 범박을 만나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는 이유도 그것이라 생각했다.

도천풍은 마을 사람들이 도단하를 첩자로 본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아무리 모자라도 그럴 위인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다. 늘 바깥일에만 신경 쓰느라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들이 저렇게 엇나가는 것도 자신의 탓 같았다.

2.6. 6장. 수상한 촌장

도단하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께 임무를 달라고 졸랐다. 마침내 임무를 받았지만, 그 임무라는 게 기분 나쁘게도 혈강시와 원한령이 들끓는 공동묘지로 가는 일이다. 아버지는 거사의 준비와 관련된 일이니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하필이면 공동묘지로 심부름이라니. 도단하는 어릴 때부터 귀신과 요괴라면 질색이었다. 늘 집을 비우는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집안에 혼자 있으면 늘 귀신 생각이 들어 겁을 먹었다. 어린 남소유 앞에서 그런 내색은 못 했다. 도단하의 허세는 그때부터 길러졌다.

2.7. 7장. 도적들의 정체

역기산은 머리통을 매만졌다. 커다란 혹이 뒤통수에 확실히 자리잡았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도천풍 단장님이 지시한 유황을 입수해서 월영공동묘지로 가던 중이었다. 거의 다 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 앞에 별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깨어났을 땐 이미 유황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크게 경을 치실 게 뻔했다. 유황은 이번 거사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다. 충각단 기지를 제룡림에서 몰아낼 거사 말이다.

2.8. 8장. 해적과 손잡은 산적

흑룡채는 녹림도의 지방 조직으로 이 일대를 주 무대로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녹림도는 도적왕 소양상이 이끄는 강호의 대표적인 산적 모임이다. 이들은 원래 의적이었지만, 소양상이 행방불명된 후 구심점을 잃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시정잡배 집단으로 타락했다.

바다에는 충각단, 산에는 녹림도가 판을 치고 다니는데도, 운국의 문무관리들은 아무도 백성을 살피지 않았다. 도천풍이 대나무 마을을 찾았을 때만해도 이곳은 도적이 들끓던 피폐한 마을이었다. 쫓기던 도천풍이었지만, 이런 사정을 두고 볼 수만 없었다. 도천풍이 고강한 무공으로 도적들을 물리치자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을에 남아있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도천풍도 더 이상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만 다니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마을에 정착했고, 마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했다. 썩어빠진 조정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 황궁에 있었던 도천풍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9. 9장. 어두운 등잔 밑

충각단. 중원 사대륙과 내외대양을 누비며 해적질을 일삼는 패도의 무리다.

이들은 원래 바다 여기저기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오합지졸의 해적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악태후가 수렴청정하고 운국의 힘이 쇠약해지던 시기, 검은 군함을 이끌고 나타난 철무괴라는 제독이 나타나 흩어져 있는 해적들을 일통했다. 철무괴는 자신의 해적 연합을 충각단이라 부르며 강호에 그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선과 마을을 약탈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고, 훔친 물건을 밀매하고 밀수품을 운반하는 등 돈이 되는 일은 모두 손을 뻗쳤다. 게다가 뭍의 패도 집단들과 손을 잡고 육지까지 세력을 넓히는 등 강호의 사마외도를 규합하는 매개자 역할까지 겸했다.

제독 철무괴는 충성 서약과 일정액의 상납금만 바친다면 각 지부의 일은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실력만 뛰어나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중임을 맡겼다. 강호를 떠돌던 무인들은 실망스러운 조정과 정사파의 무의미한 싸움만 벌이는 천하쌍세에 이미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충각단에 들어가 한몫 챙기거나 뜻을 펼쳐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충각단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남해함대에 있는 은씨 형제도 그런 무인들 중 하나였다.

2.10. 10장. 해적의 소굴

은광삼은 오늘도 부하들을 한 바탕 휘어 잡았다. 저번 대나무 마을 침공도 실패하고, 함께 손 잡은 흑룡채마저 어떤 강호인에게 털려 내부 정보가 자경단 쪽에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대로 있다간 은광일 형님도 함대장이 되기는커녕 자신도 충각단에서 위상이 흔들릴 판이었다.

한 바탕 호통을 치고 나니 그는 배가 고팠다. 숙소로 들어오니 탁자 위에 고기와 생선, 과일 등이 먹기 좋게 놓여 있었다. 자기의 심기가 심상찮음을 알고 부하들이 알아서 준비해놓은 것이리라. 다른 일도 이렇게 눈치껏 해결하면 오죽 좋아라고 생각하며, 탁자 위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은광삼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진 걸 알았다. 누군가 음식에 약을 탄 것이다.

2.11. 11장. 검은 기운

차갑고 무거운 기운 때문에 눈을 떴다. 하지만 무성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어둠만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유가촌 시절, 무성은 마영강군에게 반항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동굴 안에 갇혔다. 불빛 하나 없는 그곳에서 무성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억울함과 분함 때문에 뜬눈으로 지냈다. 어둠을 바라보니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억울한가? 억울하면 강해져라. 이게 다 네가 나약한 탓이다.

그가 풀려났을 때 이미 부모와 누이는 죽어 있었다. 장례는커녕 제대로 수습되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둠이 말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손엔 피투성이의 칼이, 바닥엔 마영강군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그날의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은 몸 안에 들어오는 음습한 기운과 섞여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무성은 어둠이 말하는 소리를 또 다시 들었다. 강해져라. 그날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무성은 말없이 어둠을 받아 들였다.

2.12. 12장. 탁기의 시체

도천풍은 오래 전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다. 30년 전, 홍문파에 입문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사부님과 강호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던 중, 인적 드문 숲 속에서 괴이한 시체를 발견했다. 몸은 말라 비틀어져 진기는 모두 빨렸고,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는 분명 마공을 익힌 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홍석근 사부는 그것을 탁기의 시체라 불렀다. 사부는 도천풍이 시체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하도록 물렸고, 단번에 시체를 불태워 없앴다. 도천풍은 사부님의 얼굴이 그렇게 심각해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부님은 수월평원의 고도시로 가셨다. 저 멀리 보이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2.13. 13장. 괴팍한 독초거사

땅에 붙어 다닐 정도로 작은 키, 그런 몸의 반을 차지하는 덥수룩한 수염. 얼굴의 전부를 차지하는 커다란 안경. 괴이한 생김새의 독초거사는 보기와 달리 소문난 무공의 고수다.

각지의 강호인들이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 찾아왔다. 그 중에서도 용맥을 타는 비법을 가장 배우고 싶어 했다. 용맥은 세상 곳곳에 흐르는 대륙의 기운으로, 심후한 내력을 지닌 강호의 무인들은 용맥을 타고 먼 곳을 오간다.

하지만 독초거사는 수련이랍시고 이리저리 실컷 시켜 부려먹고는 그냥 내쫓아버렸다. 이 일대에는 벌써 괴팍한 노인네로 소문이 자자했다.

2.14. 14장. 어둠 속 출수

무명인은 어둠 속에 몸을 숨겨 기다렸다. 그도 독초거사에게 경공 한 수 배우러 왔다가 헛물만 켜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거사로부터 약조 받은 게 있다. 동굴로 온 한 무인을 쓰러뜨리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굳이 독초거사의 명이 아니라도, 그는 누군가 겨누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다른 무인과 겨뤄 확인하고 싶은 건 강호인의 본성이다.

2.15. 15장. 곰 사냥

군말 않고 시키는 일들을 묵묵히 하는 걸 보니 홍석근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군. 독초거사는 안주를 씹으며 생각했다.

독초거사에게 여러 무인들이 무공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실컷 부려만 먹고 다 돌려보냈다. 기본도 안 된 것들이 검부터 쥐고 하늘로 날아오르려고만 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무공은 몸의 수양 이전에 마음의 수양이다. 마음가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무공을 익힌다 해도 진전이 없다. 다행히 저 소협은 마음가짐이 제대로 되어 있어 보여 그는 안심했다.

2.16. 16장. 예정된 기연

팔부기재는 강호무림의 정사파를 초월해 모인 무림고수의 집단이다. 이들은 소속 문파 장문의 명으로, 앞으로 닥칠 마황의 침공에 대비해서 천하사절을 찾기 위해 강호로 나왔다.

팔부기재는 자신들만으로도 마황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마황의 수하인 진서연에게조차 상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황에 대적할 수 있는 건 신공을 지닌 천하사절이란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수소문 끝에 천하사절 중 한 분인 역왕 홍석근 무일봉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남쪽으로 왔다. 그러나, 이미 무일봉에 갔을 땐 홍석근과 그의 제자들은 진서연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모두 낙담하고 떠나려 할 때 감마등이 말했다. 홍석근을 대신할 그릇 묵화의 상처를 안고 이곳에 나타난다고.

2.17. 17장. 팔부기재의 시험

오랜 세월 동안 마황은 세상을 탁기로 물들이고 마족의 세계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마황과 맞서 싸우던 네 명의 무림고수가 있었다.

강호인들은 이 네 명의 고수를 천하사절이라 부르고 그 이름을 칭송했다. 검선 비월, 무신 천진권, 환귀 익산운, 그리고 역왕이라 불리는 홍문파의 장문, 홍석근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탁기가 창궐하고, 마물이 날뛰는데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호는 이미 무림맹과 혼천교로 나뉘어 정파와 사파간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정사파의 각 장로 중 마황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다급해졌다. 장로들은 마황을 물리치는 일은 정사를 다툴 수 없다고 마음을 합했다. 그리고, 각 문파의 무림고수를 차출해 천하사절을 찾는 일을 시작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들이 바로 팔부기재다.

2.18. 18장. 이독치독

탁기는 마계에서 온 기운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기운에 오염되면 마물로 변한다. 마물이 된 자의 혼은 마계로 빨려 들어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영령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탁기가 오염되면, 마물이 되기 전에 자살을 시도한다. 차라리 제 정신일 때 죽는 것이 그나마 구원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호인 중에는 이렇게 위험한 탁기를 이용해서 마공을 익히려는 자들도 있다. 잘만 활용하면 단시간 내에 내공을 상승시킬 수 있고, 마족처럼 마공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자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결국 탁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2.19. 19장. 망자의 역습

녹명촌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풍대혜는 조심스레 창문 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기괴한 요괴의 꿀렁거리는 소리가 스믈스믈 다가왔다.

풍대혜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 밖을 나갔다 그 잠시 찰나에 마을은 강시와 망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한 마리도 보기 힘든 천령강시가 여기저기 등장해서 그 존재를 꼿꼿이 드러냈다. 방금 전만 해도 평화로운 마을이 어느새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2.20. 20장. 잃어버린 봇짐

홍문파 소협 눈 앞에 황금색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륙 곳곳에 흐르는 용의 기운, 바로 용맥이다. 내공을 쌓은 무인들은 저 용맥을 이용해서 먼 곳을 이동하고, 걸어서 갈 수 없는 곳을 이동하기도 한다.

소협은 끊어진 녹명교 앞에 있는 용맥을 향해 달렸다. 그 앞은 천길 낭떠러지다. 바닥에 솟아난 용맥의 기운에 몸을 맡긴다. 소협의 몸은 어느새 바람을 탄 연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말 그대로 용맥을 타는 것이니, 용맥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순 없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따르는 것. 어찌 보면 도를 깨우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2.21. 21장. 겁먹은 아이

송림사의 동자승인 동동은 꽤나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소협은 이 아이가 분명 무언가 보았다는 걸 직감했다.

소협은 아이를 진정시키고, 얘기를 들어보려 했다. 우선은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게 해야 한다. 아이들은 무엇을 좋아하지? 소협은 어릴 때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하게 무일봉에 오기 전 일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2.22. 22장. 첩자의 정체

도천풍은 범박이 첩자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중한 침묵을 보였다. 한편은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론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범박이 평소 자리를 비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의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은광삼을 생포했다던 범박이 실수로 놓쳤다는 보고가 왔을 때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다만 심증 뿐, 물증이 없어서 지켜두었다. 괜히 그를 취조해서 아니었다간 자경단 내 불신만 더 커질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2.23. 23장. 경국지색

도천풍은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남소유 충각단 지부장 은광일에게 납치되었다는 비보가 왔기 때문이다. 녹명촌 사건과 거사 준비로 마을을 비운 것이 화근이었다.

도천풍은 그 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남황후가 군마염 대장군과 몸을 피하면서 부탁한 그 약속. 도천풍은 당혹스러웠다. 주군에게 미안했고, 황후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군마염이 더 없이 야속했다.

2.24. 24장. 거짓 서신

서문범은 초조했다. 충각단 남소유를 납치한 덕에 지금까지 준비한 거사가 물거품 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은광일이 예전부터 남소유를 탐했다는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사적인 이유로 남소유를 납치했을지 몰라도, 어찌 되었건 그는 꽤나 효과적인 인질을 붙들고 있다. 남소유는 자경단장의 수양딸 같은 존재이자,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 받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경단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면치 못 할 것이 분명하다.

2.25. 25장. 결전을 위한 준비

서문범은 충각단 전서구의 서신을 확인했다. 그의 생각대로 남소유 남해함대지부에 갇혀 있었다.

전서구를 보니 왠지 낯이 익었다. 전서구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서문범은 이들을 구분하는 눈을 지녔다. 자경단에 처음 들어와서 한 일이 전서구를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전서구를 대나무 마을에서 창문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창문에는 남소유가 서 있었다.

2.26. 26장. 남소유 구출작전

남소유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은광삼의 치근덕거림이 짜증났다. 자기가 은광일을 택했다고 이런 뚱보 변태까지 자기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 동안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탐내고 접근해왔다. 하지만 하나 같이 별볼일 없는 시골 무지렁이들이거나 가진 거 없고 나약해 빠진 자들이었다. 아무리 외롭고 기대고 싶어도 그럴 만한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눈에 띄던 남자가 은광일이었다. 충각단을 이끌고 마을을 점령하러 왔을 때 그가 보여준 강인함과 거친 매력. 여태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남자였다. 남소유는 은광일이 자신을 이 숨막힌 곳에서 구출해줄 수 있는 희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냄새 나고 추잡한 충각단 소굴에 들어와보니 자신의 판단에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2.27. 27장. 불타는 대나무 마을

도천풍은 하늘을 향해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손엔 남소유 앞으로 온 범박의 서신이 들려 있었다. 서신에는 남소유가 충각단과 내통한 첩자임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 일어난 불들도 어느덧 잦아들었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고치고, 빼앗긴 물건은 보충하면 된다. 하지만, 믿었던 남소유로부터 배신당한 이 마음은 도천풍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당장 남소유를 찾아가 묻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무엇이 부족했었냐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왜 저버렸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을을 위해, 아들을 위해, 그리고 사부님의 복수를 위해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3. 2막. 사막의 검은 흔적

3.1. 1장. 수상한 마을

한시랑은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환영초의 기운이 몸 안에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기운이 퍼지지 않도록 눈을 감고 정좌를 한 뒤 호흡을 조절했다. 하지만, 사마교의 침공으로 소란스러운 상황이 그의 집중을 흩트렸다. 자칫하면 그대로 환영초의 음독이 그를 덮칠 판이었다.

그때 따스한 기운이 어디선가 흘러왔다. 한시랑은 그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남몰래 가슴에 품은 큰무녀 백무의 기운이었다.

3.2. 2장. 원군 요청

거만하의 수비대는 외톨이 마을을 지키는 한시랑군과 달리 중앙군 소속이다. 중앙군은 운국 황실 수호와 수도 방어를 위한 병력으로 조정 직속의 군대다. 중앙의 소속답게 거만하는 지방군을 깔보고 그 위에 군림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했던가. 운국 황실과 문무백관이 사리사욕에 빠져 민생을 돌보지 않는데, 백성의 곁을 돌볼 관군이 자신의 본분을 행할 리가 만무했다. 거만하는 이름처럼 거만하게 한시랑의 원군 요청을 늘 거절했다.

3.3. 3장. 거만한 수비대장

길동은 높은 곳에서 돌아보며 녹림도 산채의 일을 떠올렸다. 녹림도는 몇 달 전부터 안팎이 소란스러웠다. 대두령 소양상이 행방불명되어 구심점을 잃자 각지의 조직들은 제멋대로 행동했고, 소두령들은 공석이 된 대두령 자리를 놓고 눈독을 들였다.

대두령의 딸인 소연화가 그 자리를 맡고자 나섰지만, 그 동안 아무 공적도 없는 어린 소녀가 녹림도의 수장을 맡겠다고 하니 다들 콧방귀만 쳤다. 소연화는 도적왕에 걸맞은 최고의 보물을 도적질을 해오겠다며 호언장담하고 녹림도를 나왔다. 그 보물은 다름아닌 무신의 비보다.

3.4. 4장. 의문의 마교집단

소연화는 무신의 비보를 훔쳐오겠다고 산채에서 호언장담을 할 때만 해도 계획은 있었다. 사마교가 무신전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입수했기 때문이다. 무신전은 무신의 비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고 하니, 그 지도만 손에 넣으면 만사형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교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포로신세가 되었다. 그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지. 문 정도는 쉽게 딸 수 있다고! 라고 처음엔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문 따는 기술이 녹슬었는지, 자물쇠가 그 동안 발전했는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녹림도 소두령의 체면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3.5. 5장. 원수의 흔적

팔부기재는 각자의 장로들로부터 또 다른 임무를 받았다. 만약 천하사절을 찾지 못한다면 그 뒤를 이을 그릇을 찾고, 그 그릇을 자신들이 속한 세력의 편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이다. 천하사절의 뒤를 이을 자가 같은 편이 된다면 정사파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팔부기재는 대의 앞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셈하는 장로들이 못마땅했지만, 일단은 그 명을 따르기로 했다. 각 세력의 장로들은 홍삼과 수삼을 붙여 주었다. 둘은 팔부기재를 보필하면서도 그릇을 영입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쳤다.

3.6. 6장. 위기의 무녀들

백무는 한시랑의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탁기의 시체가 된 영령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다며 무녀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수백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한시랑이지만, 백무 앞에서는 쩔쩔맸다. 백무도 한시랑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녀로서 할 일이 있기에 속세의 정에 이끌릴 순 없었다.

한 남자는 전장에서 칼을 쥐고 살았고, 한 여인은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영령과 함께 살았다. 둘 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서툴렀다.

3.7. 7장. 어둠의 구멍

지혜는 탁기굴 입구에서 뿜어 나오는 탁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미끄덩하고 차가우며 목을 죄여오는 답답함이 온몸을 스치고 있었다.

탁기는 마계의 기운이다. 현계와 마계가 통하는 틈이 생긴 듯, 중원에는 탁기와 마물이 수시로 쏟아졌다. 사마교가 외치던 종말의 날이 다가온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마계의 문이 열려 탁기가 세상을 모두 덮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혜는 끔찍한 생각이 그림처럼 떠오르려 할 때 머리를 흔들었다. 잡념과 번뇌를 버려야 한다. 탁기는 그 틈을 노리고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온다는 백무 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3.8. 8장. 운국의 감찰관

소현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환영초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는 빙글 돌았고, 속은 뒤집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붕 뜨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소현과 감찰대장은 환영초의 출처가 이곳 사마교 분타인 것을 알고 물증을 얻고자 왔다. 하지만, 소현은 그만 환영초 연기에 중독되고, 뒤따르던 감찰대장까지 놓쳐버렸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자기가 정신을 잃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같이 온 상관까지 위험해진다라고 생각하며 소태도를 꺼냈다.

소현은 주저없이 소태도로 허벅지를 찔렀다. 정신은 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마교도들이 우글거리는 환영초 밭을 서서히 기기 시작했다.

3.9. 9장. 낭인무사의 정체

최진아는 긴장했다. 악태후가 자신을 은밀히 처소로 불렀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십 년 가까이 행해지던 수렴청정이 끝나고 황제의 친정은 선포되었지만, 여전히 권력은 악태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의 관료들도 환락에 빠진 허수아비 황제보다는 악태후에게 모든 국정을 보고하고 따르고 있었다.

발을 드린 너머로 악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자하니 건원성도 내 환영초 밀반입 조사를 맡았다고 들었네만, 감찰대장으로서 수고가 많군. 최진아는 예를 다해 태후의 말에 답했다. 악태후는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내 자네를 이렇게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라는 운을 띄웠다.

3.10. 10장. 불타는 환영초 밭

진서연은 또 다시 홍문파 마지막 제자를 살려줬다. 유란은 진서연이 왜 저 애송이를 계속 살려두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저 애송이가 묵화의 상처를 입고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진서연이 왜 저 애송이에게 묵화의 상처를 입혔는지부터가 알고 싶었다. 무일봉에 가기 전부터 이미 진서연은 홍석근의 제자에게 묵화의 상처를 내고자 마음먹은 듯했다.

진서연은 원하던 무신반을 얻자 주저없이 자리를 떠났다. 무신의 피에 반응하는 무신반을 얻은 속셈은 안 봐도 뻔했다. 유란은 앞으로 이래저래 바빠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3.11. 11장. 절사명의

백운은 보자마자 묵화의 상처인 걸 알았다. 무인의 기혈은 완전히 뒤틀렸고, 탁기가 가득한 묵화의 꽃잎들이 무인의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이 상태로 용케 죽지 않고 버틴 것이 용하다면 용했다. 비록 대사막의 절사명의로 소문난 그였지만, 이 상처만은 치유할 수 없었다. 오히려 치료하기 위해 밖에서 손을 썼다간 그대로 절명할 것이다.

방도가 있다면 몸 안의 내공이 충만하여 이 묵화의 기운을 스스로 몰아내는 것밖에 없다. 상승무공의 오의를 터득하여 신공의 경지에 이르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자는 백운도 단 네 명밖에 보지 못했다.

3.12. 12장. 배신자의 집

미령은 집 안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 때문이었다. 유성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령은 집 안을 들어서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무인 한 명이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미령은 낯선 이를 보고 경계했다. 하지만 그 무인이 유성과 같은 문파의 사람이라고 하자 긴장을 풀었다.

유성은 마을을 떠나기 전날, 미령을 찾아왔다.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마영강군을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로 보였다. 유성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무일봉에는 천하제일의 고수 한 분이 있다고. 그분 밑에서 무공을 익혀 죽은 부모님과 누이의 복수를 하겠다고. 유성은 마을 어귀에 있는 부모님의 시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떠났다. 하지만, 미령은 아직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3.13. 13장. 끌려간 미령

미령의 예상대로 마영강군은 유성의 부모님의 유골이 없어지자 노발대발했다.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한 역모의 시체를 누가 건드렸냐며 색출에 나섰다. 미령은 그 무인에게 화가 가지 않기 위해 자신이 했다고 말했다.

미령은 마영강군에게 끌려가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오랫동안 들어주지 못했던 유성의 부탁을 드디어 들어줬기 때문이다. 물론 무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유성도 자신의 동문이 부모님의 유골을 수습해준 것을 알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3.14. 14장. 심마

백운은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경고했었다. 홍문파 무인에게 묵화의 상처가 어두운 마음을 자극하고 심마에 빠뜨릴 거라고 말이다. 마음을 다스리라고 그리 일렀건만,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에 결국 무인의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홍문파의 무인은 심마에 빠져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무공을 펼쳤다. 분명 심마에 빠져 헛것을 보고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몇몇 마을 사람들은 심하게 다쳤다. 유성 부모의 유골을 수습하고, 마영강군을 해한 일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미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일까지 있고 나니 모두가 입을 모아 저 외지인을 쫓아내라, 마영강군에게 넘겨라 하며 아우성이다.

백운은 마을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무인을 여기에 방치하다간 마을 사람들이나 무인 모두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3.15. 15장. 무신의 비보를 노리는 장군

우장군 마영강은 모두가 꺼리는 대사막의 주목을 일부러 자처해서 부임했다. 이곳 대사막 어딘가에 무신의 비보가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부채질을 연신 해대며 마영강은 생각했다. 입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무신의 비보만 얻는다면 강호를 제패하고 천하를 군림하는 것도 가능하지. 게다가 황제의 자리도 가능할지 몰라. 군마염도 해냈는데 나도 못 하려구!

하지만, 여태까지 상황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다 못해 화가 나게 만들었다. 사마교로부터 무신전의 지도를 얻었지만 무신전은 되레 도적의 손에 넘어갔고, 부하들은 무인 한 명에게 유린당해 오합지졸 부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마영강은 땀을 훔치며 자기 밑에 쓸만한 부하가 없다는 걸 개탄했다.

종리추가 얼굴을 찌푸리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막사 안으로 대사막의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왔다. 하지만 그의 보고는 한빙장으로 얼린 물만큼 시원한 소식이었다.

3.16. 16장. 보물사냥꾼

진소아는 총포의 가늠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뛰어난 총격술을 지닌 보물사냥꾼으로, 마영강이 무신의 비보를 찾기 위해서 고용한 또 하나의 용병이었다.

더 이상 부하들과 주변 사람을 믿지 못한 마영강은 진소아 같은 용병을 시켜 잃어버린 무신전을 찾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마영강은 그녀를 단순히 솜씨 좋은 사냥꾼 정도로만 봤지만 그녀는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격사 중 한 명이다. 강호인들은 그녀가 대사막에 온 이유를 무신의 비보를 찾기 위해서라고 여겼다. 하지만, 진소아는 한 노사의 가르침을 얻은 후 속세의 가치를 탐하지 않고 바람처럼 떠도는 생활을 즐겼다.

허나 속세의 가치를 탐하지 않더라도 치솟는 물가와 탄약 값은 그녀를 압박했다. 가끔은 여비를 벌기 위해 용병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도 먹고는 살아야 했다.

3.17. 17장. 연꽃의 도적

진소아 소협의 무공이 낯이 익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협은 홍석근 사부의 제자라고 했다. 진소아는 한때 홍석근 사부에게 신세를 진 적 있다. 아니, 신세라기보다 인생의 길을 열어준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도 복수의 길을 걸은 적 있다. 진소아의 아버지는 운국의 조정관료였다. 뛰어난 무관이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가족과 식솔들은 모두 죽고 어린 진소아만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

진소아는 복수를 다짐하며 오랜 세월 총격술을 익혔다. 마침내 원수를 찾아 복수를 거행했지만, 그자의 권세와 병력 앞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진소아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빠져나왔다. 큰 상처를 입고 도와줄 사람조차 없던 그녀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그녀를 살린 것이 홍석근 사부였다.

3.18. 18장. 도적의 행방

대사막의 열기는 뜨거웠다. 몸 안의 진기가 다 빠져나갈 지경이다. 길동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안경 뒤의 눈을 매만졌다.

저 멀리 신기루처럼 한 소협이 보였다. 사당의 지하에서 소연화를 구한 그 소협이다. 길동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연화가 안 된다면 저 소협이 대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석근의 제자가 그 때까지 살아남을지는 의문이다.

3.19. 19장. 동업

갑자기 방문이 열렸지만 소연화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간신히 떨쳐 버린 길동이 쫓아온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당황했다. 웬 무인이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것이다. 무신전을 노리고 온 강호인인가? 소연화는 일단 무인을 향해 출수했다. 무공 수준은 일천하지만 그래도 녹림도 소두령으로서 버텨온 건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다. 첫 번째 가르침은 선방부터 날려라였다.

무인은 소연화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 응수했다. 수세에 몰린 소연화는 두 번째 가르침을 생각했다. 상대가 나보다 세면 일단 빌어라.

가만 보니 무인은 낯이 익었다. 사당의 지하에서 자신을 구한 그 무인이었다. 세 번째 가르침을 수행할 때다. 안면이 있으면 무조건 친한 척해라.

3.20. 20장. 무신삼원로

백운은 오랜만에 나류사원을 찾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대륙을 호령하던 옛 영광은 간데 없고, 세월에 쓸려 퇴색된 돌벽만이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운은 두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백운과 동료들, 즉 무신삼원로는 선계의 임무를 받고, 마황의 손에서 세상을 구할 영웅호걸을 찾고 있었다. 이들은 나류국의 대장군이자 서자인 천진권을 낙점했다. 천진권은 뛰어난 권법가로 강호에서는 무신으로 추앙받는 무림 고수였다.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자애심은 신공을 부여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라 여기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란 것을 천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3.21. 21장. 고대의 살수

진소아 홍문파 소협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홍석근 사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비록 홍문파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깨달음을 주신 강호의 어르신이 비명에 돌아가신 것도 못내 슬펐다. 게다가 천하사절이라 불리는 무림의 고수를 살해할 무인이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홍석근의 제자는 복수를 위해 무신의 비보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심히 걱정되었다. 과연 홍석근 사부는 제자가 복수하는 것을 원하실까? 자신이 복수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마음을 돌려주신 것이 홍석근 사부였다. 길을 잃고 헤매던 강호인에게도 복수보다는 협의를 펼치는 홍문의 길을 걸으라 말씀하셨는데,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복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진소아는 어느덧 술 세 병을 다 비웠다. 술이 너무 늘었어, 끊어야 하는데 라며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

3.22. 22장. 무신릉의 단서

백운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소연화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단서를 풀기 위해 소협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예하랑에게 해석도 부탁했지만,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었다.

이때 길동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끼어 들었다. 길동은 젊은 시절에 대두령 소양상을 따라 온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꽤나 거들먹거리며 길동은 사지석림을 돌아다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3.23. 23장. 번갯불을 찾는 도공

모든 물건이 다 그렇지만 도기는 흙, 물, 돌, 불, 나무 등 음양오행의 이치가 깃들어져 만들어진다. 도공이 아무리 정성과 기술을 쏟아도 천지만물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도기가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기방은 매년, 한 해 동안 도기가 잘 구워지기를 하늘에 비는 가마의 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 준비에는 도기방 도공들이 모두 동원이 되어 심혈을 기울인다. 춘삼도 다른 도공과 마찬가지로 가마의 제 준비를 하느라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고생 중이었다.

3.24. 24장. 가마의 제

도기방 총타주이자 도공장인 포청은 은조패라는 말을 듣더니 난색을 표했다. 은조패는 도기방의 비보로, 천 년 전에 무신 천진권의 부탁으로 만든 신물이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물건인데, 한 강호인이 찾아와 대뜸 은조패를 빌려달라니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 이 강호인은 무공만 앞세우는 잡배와 달리 예를 갖추고 있었고, 다소 순진한 구석도 보였다. 포청은 잘만 구슬린다면 이자를 이용해서 가마의 제 준비를 수월히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5. 25장. 주정뱅이 기인

적운은 맨 정신으로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인간들 하는 짓이 어리석고 경망스러운지는 알고 있었지만, 산 사람의 생명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보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막 태어난 어린 생명을 취하려는 도기방의 행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늘의 도가 땅에 떨어져서도 이토록 떨어지다니. 언제까지 이 더러운 꼴을 보며 현계에 머물러야 하나. 적운은 한탄을 뿜어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 없이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세상이었다.

3.26. 26장. 천씨 성을 지닌 자

예사랑이 천무령과 혼례를 올리던 날, 마을은 떠들썩했다. 마을 최고의 선남선녀가 만났다며 다들 기뻐하고 축하했다. 하지만 그날 장정원만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남몰래 예사랑을 짝사랑했다. 그는 처음 본 순간 예사랑과 사랑에 빠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땅에 있다면 그건 예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예사랑의 여동생 하랑은 술잔을 건네며 격려했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하는 거라고요! 장정원은 술 기운을 빌어 고백을 해버릴까 했지만 포기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저 두 쌍은 하늘이 점지어준 천생연분으로 보였다. 게다가 천무령은 고대 나류국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명망 높은 가문의 후손이었다. 기골도 장대하고 머리도 비상했으며 무신의 후예답게 고강한 무공까지 겸비했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몸도 불편한 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한 촌부의 아들에 불과했다.

3.27. 27장. 죽음 위의 연꽃

예하랑은 멍하니 호수에 핀 한 연꽃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났는데 이젠 눈물도 말랐다. 그녀는 가져온 술을 들이켰다. 남은 술은 예를 갖춰 연꽃의 가장자리에 부었다.

언니가 죽은 지 벌써 십오 년이 흘렸다. 예하랑은 언니의 혼례식만 보고 마을을 떠났다. 언니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다가, 오래 전부터 강호를 떠돌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형부와 형부의 집안은 풍운전쟁에 모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언니마저 흑창족에게 당해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언니가 죽은 연꽃호수에 와 보았지만, 십 수 년 전 죽은 언니의 시체가 남아 있기 만무했다. 예하랑은 호수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저 연꽃이 언니라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도 그 연꽃이 예사랑의 시신 위에 피어난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뜻밖의 얘기도 들었다. 자신의 조카가 있었으며, 조카는 그날 살아남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떠났다고.

3.28. 28장. 명장의 석상

천무령은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랍에서 낮에 적은 한 장의 서찰을 조심스레 품 안에 넣었다. 문을 열자 딸 아이의 옹알거림이 들려 왔다.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에 아내 예사랑과 딸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내일이면 저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왔다.

천무령은 조용히 문을 닫고 거 장군 석상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밤 공기 탓에 그의 마음은 더욱 스산해졌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에 비친 거 장군의 얼굴이 차갑고 날카롭다 느꼈다. 거 장군님이시여, 우릴 굽어 살펴주소서. 천무령은 거 장군 석상 밑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품에 넣었던 기름 먹인 서찰을 아래에 고이 묻었다.

거 장군 석상 밑이라니 그 생각을 못 했군. 인기척에 급히 돌아봤다. 하지만, 친구 철우인 것을 알고 피식 웃었다. 내 유서는 여기 묻고 있는 걸 봤으니 따로 말할 필요는 없지? 철우는 답했다. 난 자네 꽁무니만 따라 다닐 거야. 제국군도 자네가 무신의 후예인 걸 알면 벌벌 기며 달아날걸. 두 사람은 달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3.29. 29장. 은조패

백운은 자신들의 마지막 기회라며 홍석근 제자에게 희망을 걸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적운은 석연치 않았다.

저번에 적운이 그 자를 보았을 때 그는 아직까지 속세의 탐욕에 물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두 눈에 비친 복수심과 가슴 속에 품은 묵화의 상처는 마음에 걸렸다. 이런 자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나. 두 번 다시 무신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순 없다.

적운은 머리 속이 복잡해지자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홍석근의 제자가 부디 사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를 바라며 적운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납골당의 문이 열렸다. 홍문파의 제자가 그 문 뒤에 서 있었다.

3.30. 30장. 배신한 사형과 만남

날카로운 비명이 위층에서 들렸다. 예하랑은 황급히 소리가 난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 밖에서부터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 안엔 소연화가 한 켠에 쓰려져 있었고, 홍문파 소협 한 괴한으로부터 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음산한 기운의 정체는 그 괴한이었다. 예하랑은 괴한이 탁기에 물든 자임을 직감했다. 예하랑은 서둘러 출수해 괴한으로부터 소협을 구했다.

갑자기 나타난 고수에 괴한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응수를 했다. 예하랑은 가벼이 괴한의 기공을 흘려 보내고 상대를 바닥에 내꽂았다. 이미 강호의 모든 무공서를 본 예하랑에게 괴한의 어설픈 마공은 무용지물이었다.

그 순간, 예하랑은 괴한의 품에서 무언가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았다. 무신반. 무신의 피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무신반은 청량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돌아 눕더니 흔들리던 바늘을 고정했다. 바늘은 쓰러진 소연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3.31. 31장. 애꾸눈의 사연

당여월은 무릎을 꿇고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산이 버티고 있었다. 소양상이라는 거대한 산이.

산은 이윽고 붉게 물들었다. 후두둑 후두둑. 바닥에 피가 떨어졌다. 피는 오른쪽 눈에서 뿜어져 나와 한 쪽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눈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피는 마치 화산이 터지는 뿜어져 나왔다. 온몸의 피가 그 곳으로 달아나는 듯했다. 당여월은 피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당여월은 잠에서 깼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손을 오른쪽 눈으로 가져갔다. 눈 대신 꺼끌하고 딱딱한 안대가 손 끝에 느껴졌다. 안대 뒤에는 이제 눈이 없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잃은 고통보다 패배의 수모가 더 컸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리라. 하지만, 당여월은 눈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양상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3.32. 32장. 무신을 가리키는 나침반

격물선사는 회랑촌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회랑족들은 격물선사가 또 일이 제대로 제대로 풀리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몇 달 동안 격물선사는 무신반을 재현하기 위해 고심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분노가 치밀었다. 격물선사는 점통을 붙잡았다. 격물이 통하지 않으니 천수신의 말씀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점괘는 이방인이 이롭다고 나왔다. 뜻을 풀이하니 한 인간족이 나타나 무신반의 완성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족이라... 탐욕에 물들고 자연을 파괴해서 잇속을 챙기는 인간족 따위가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하지만, 천수신께서 하신 말씀이니 일단 따라야지 라고 생각했을 때 한 인간족이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왔다. 격물선사는 또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기쁨에 겨운 소리였다.
진서연 사마교 분타에서 무신반을 취한 이유도 분명 마지막 남은 무신의 후예를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녀보다 먼저 무신의 후예를 찾아 신공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3.33. 33장. 춤추는 바늘

무신 마황과 함께 봉인된 후, 무신의 신공도 함께 사라졌다. 무신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만이 신공에 다가갈 수 있도록 미리 신공을 감춰둘 준비를 해두었다. 그리고, 훗날 후예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피에 반응하는 무신반을 만들라고 회랑족에게 일렀다. 하지만, 무신반은 풍운전쟁 때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격물선사는 왜 무신이 선계로부터 받은 신공을 사사로이 감추려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신은 다시 현계로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그런 일을 준비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대신 핏줄이라도 천하를 제패하기를 원한 것일까? 인간족의 속내는 참으로 알 수 없다고 격물선사는 생각했다.

3.34. 34장. 이이제이

당여월은 길동을 잡고 의기양양했다. 이 괴상하고 땅딸막한 사내는 분명 소양상의 심복이었다. 이자를 족치면 사라진 소양상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소양상의 딸을 붙잡아 소양상을 불러들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길동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소연화가 무신의 비보를 얻는 열쇠 중 하나인 은조패를 가지고 있다며, 소연화를 구해준다면 은조패를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당여월은 복수도 복수지만, 무신의 비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비보만 얻게 된다면 복수뿐만 아니라, 천하를 제패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3.35. 35장. 무신의 후예

무신 마황과 함께 귀천검을 맞고 동귀어진 했을 때, 그의 몸에 마황의 기운이 들어오는 걸 느꼈다. 무신은 그 기운에 저항했지만, 어느새 그 기운과 한 몸이 되었다.

무신이 현계로 다시 나왔을 때 그는 온몸에 흐르는 탁기를 느꼈다. 극마지체. 그는 마공의 최고수준에 이르러 신공에 버금가는 힘을 얻은 것이다. 애써 무신릉에 감춰둔 신공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물론 자신의 피는 이미 탁기에 물들어 무신릉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무신은 이 힘으로 천하를 제패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귀천검이 떠올랐다. 그 검이 존재하는 한 자신도 마황의 신세와 다름없다. 귀천검은 그를 다시 어둠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극마지체에 이르면 탁기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천하사절에 자연스레 접근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신은 기회를 노렸다. 귀천검을 손에 넣어야 한다. 저 검만 없다면 천하는 자신의 것이다. 하지만, 비월의 제자 손에 어이없이 당할 줄은 생각 못했다.

길동은 일이 꼬여만 가자 속이 부글거렸다. 비월의 제자가 끝까지 자신을 막고 있다는 것에 분이 치밀어 올랐다. 저 무성이란 놈도 그 비월의 제자가 만든 녀석이라 생각하니 당장에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나설 때가 아니다. 길동은 분을 삭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홍석근 제자가 잘 해주길 빌 뿐이었다.

3.36. 36장. 다시 만난 거지 노인

청운은 백운, 적운과 함께 긴 얘기를 나눴다. 무신이 봉인해둔 무신의 신공을 전수해줄 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였다. 무엇보다 화제의 중심은 홍석근 제자였다.

백운은 그만한 자가 없다고 했지만, 묵화의 상처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적운은 홍문신공을 전수받은 자에게 애써 신공을 부여할 필요가 있냐고 역정을 부렸다. 청운은 말 없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던졌다. 배가 고프군... 백운과 적운이 눈총을 줬다. 청운은 헛기침하며 다시 고쳐 얘기했다. 모든 건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에 맡기세...

3.37. 37장. 뼈가면의 전사들

골면족은 뼈 가면을 쓴 대사막의 원주민으로 포악하고 사납기로 유명하다. 나류국 시절, 사람들은 이들을 미개한 종족이라 멸시하고, 이곳 변방에 격리시켰다.

하지만 나류국 대장군이었던 무신은 이들의 용맹함과 전투력을 높게 샀다. 자신의 용병으로 거두어 용맹스러운 전사로 탈바꿈시켰다. 골면족은 자신을 알아주는 무신을 주군으로 섬기고, 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족과 싸웠다.

무신이 사라진 후 골면족은 무신을 신처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신이 부활해서 자신들에게 광명을 비춰주리라 믿었다. 그들은 무신의 부활을 위한 제 준비를 서둘렀다. 이들은 인간의 산 제물을 바친다. 오늘의 제물은 진소아 당여월이었다.

3.38. 38장. 앙숙

무신반이 소연화를 가리켰을 때부터 예하랑은 직감했다. 길동이란 자가 십 수 년 전, 소양상과 함께 대사막을 여행했다는 말을 듣자 직감은 확신이 되었다. 언니가 흑창족에게 당했을 때, 어린 조카를 안고 간 거구의 사내는 분명 소양상이다. 소양상이 그 아기를 딸처럼 키웠다면, 소연화가 언니의 딸임이 분명했다.

조카를 찾기 위해 대사막 한가운데에 객잔을 세우고, 무신에 대한 고서를 찾고, 무신의 비보에 대한 소문을 강호에 흘렸다. 각지에서 몰려온 강호인들로부터 잃어버린 조카와 거구의 사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란 희망에서였다. 이제서야 원하던 조카를 찾았는데, 잠시 객잔을 비운 사이 마영강이 조카를 납치해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토록 찾던 조카를 다시 잃어버릴 순 없었다. 예하랑은 내공을 끌어올려 더욱 재빨리 발걸음을 놀렸다.

3.39. 39장. 무신의 날개

무성 진서연으로부터 무신반을 건네받았다. 진서연은 무신반으로 무신의 후예를 찾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원수를 비롯한 그와 연관된 자는 모두 없애야 한다며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상승의 마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무성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무성은 마음이 바뀌었다. 대사막을 돌아다니면서 무신이 감춰둔 신공이 있다는 사실과 그 신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신의 후예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문신공을 얻기 위해 사부까지 배신했다. 무신의 신공을 얻기 위해서 두 번 배신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3.40. 40장. 복수의 길, 홍문의 길

백운, 적운 그리고 청운은 무너지는 무신릉 속에서 홍문파 제자 무신 후예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백운과 적운의 염려처럼 홍문파의 제자는 마도로 빠지지도 않았고, 무신의 비보를 탐내지도 않았다. 사부의 가르침대로 자신보다 어려움에 빠진 남을 먼저 구하는 홍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임무가 끝났다. 신공을 무사히 적임자에게 전했다. 이제 선계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백운과 적운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하지만, 청운은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저 두 사람은 이제 한 고비를 넘긴 것일 뿐, 어둠이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3.41. 41장. 다시 만난 팔부기재

예하랑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언니와 형부가 사이좋게 서로 보듬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모습으로 예하랑을 바라보았다. 예하랑은 반가워서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달려갈수록 점점 멀어져 갔다.

형부가 말했다. 처제, 처제는 아직 여기 오면 안 돼.
언니가 말했다. 하랑아, 조카를 꼭 지켜줘.

예하랑은 눈을 떴다. 매캐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바닥에 처박힌 코를 통해 들어왔다. 일어서서 돌아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벌떼처럼 달려들던 마영강군이 모두 전멸해 있었다.

검은 옷의 여인. 예하랑 일행이 마영강군과 치열하게 싸울 때, 그 여인은 마치 꿈처럼 전장 속을 유유히 걸어 왔다.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은 꽃잎이 휘날렸다. 그리곤 사방에 굉음과 불꽃...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무신의 날개가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예하랑은 날개 위에 탄 사람을 보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조카를 향해.

4. 3막. 동쪽에서 부는 검의 바람

4.1. 1장. 뒤틀린 용맥

촌장 유태월은 떠나가는 익산운의 뒷모습을 봤다.

옆에선 구은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유태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은지 옆에 익산운이 있기를 바랬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익산운을 노리는 마족의 수하가 이곳으로 온다는 점괘 때문이었다.

유태월은 처음 익산운을 본 날을 떠올렸다. 구은지가 마을 입구에 쓰러진 그를 부축해 유태월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월은 한눈에 그가 천하사절 중 하나인 환귀임을 알아봤다.

익산운은 심각한 내상으로 몸이 많이 상했고 공력도 상당히 잃은 상태였다. 대체 누가 천하사절을 상대로 이런 상처를 냈단 말인가. 유태월은 서둘러 치료를 했고, 다행히 익산운은 한 달 후쯤 거동을 할 수 있었다.

익산운은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마을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고, 마을 사람들도 넉살좋고 유쾌한 그를 좋아했다. 특히 익산운을 곁에서 돌본 구은지는 유달리 그에게 마음을 썼다. 고아인 그녀는 정에 목말랐었다. 익산운과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웃을 수 있었다. 유태월은 그녀의 마음씀이 걱정됐지만 스쳐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4.2. 2장. 과거와 현재의 인연

어린 시절 일심은 등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늘 느낄 수 있었다.

아비 없는 자식, 처녀가 낳은 애. 어쩌다 익산운이란 말도 나왔다. 익산운은 이 마을의 원수라고 하던데 왜 대체 그런 자의 이름이 자신과 함께 오르는지 일심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수군댈 때마다 유태월이 나타나서 호통을 쳤다. 그런 허튼 소리는 입밖에 꺼내지 말라고. 일심이 침울할 때마다 유태월은 꼭 안아 주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까지 잃은 일심에겐 유태월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일심은 커서 꼭 유태월 촌장님과 같이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익산운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를 잃은 것도 모두 익산운이 이 마을에 왔기 때문이야. 천하사절이란 자가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남겨두고 혼자 도망치다니. 일심은 유태월의 품을 꼭 끌어 안았다.

4.3. 3장. 동맹을 위한 탈출

동방대륙에 풍제국이 들어선 지 이십 년, 영린촌이 제국군에게 점령된 지 십육 년이 흘렀다.

처음 제국군은 안개숲에 있는 운국 잔당 세력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영린촌에 기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이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영린촌에 있는 영석 광산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제국군은 부역을 명분으로 영석 채굴에 영린족을 하나 둘씩 동원했다. 풍제국 태사가 익산운을 찾기 위해 온 다음날부터 이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절맥대못으로 마을을 고립시키고, 영린족을 노예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유태월은 평화를 위해 처음엔 협조했지만, 제국군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더 이상 보아 넘기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상인이 은밀히 그를 찾아왔다. 제국군과 거래하기 위해 온 상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경천맹이라 불리는 반 제국군 세력의 일원이었다.

4.4. 4장. 환귀와 붉은 꽃

익산운은 서둘러 해나무 마을에 있는 예전의 거처로 갔다.

예전엔 그곳도 영린촌이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어찌된 일인지 마을은 둘로 쪼개졌고, 유태월이 살고 있는 마을 쪽의 용맥은 끊어져 있었다.

익산운이 수월평원에 오는 건 십육 년 만이다. 그 동안은 진서연의 눈을 피해 계속 강호를 숨어다녔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이곳을 찾은 건 세 가지 기이한 점괘 때문이다.

첫 번째는 묵화의 상처를 입은 홍석근 제자가 자신을 만나러 그 곳에 온다는 것이다. 점괘는 그 제자가 진서연을 처단하고, 마황의 부활을 막을 그릇이라 했다. 만약 그릇이 틀림없다면, 잃었던 희망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내용을 해석하기 힘들었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는 괴이한 점괘였다.

해나무 마을에 당도할 무렵, 그는 멀리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의 직감은 소리가 난 곳으로 인도했다. 소리는 풀숲에서 났었고, 거기엔 붉은 무사 복장의 한 소녀가 신음을 내며 쓰러져 있었다.

익산운은 그것이 마지막 점괘임을 알았다. 세 번째 점괘는 붉은 꽃의 인연이 그릇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4.5. 5장. 경천맹주의 명

경천맹주는 발길을 서두르면서도 머리는 복잡했다.

과연 이 길이 옳은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하늘의 뜻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지금 [[진서연(블레이드 앤
소울)|진서연]]을 멈추지 않는다면 풍제국은 물론이요, 세상이 마황의 손 안에 들어갈 것이 자명하다.

맹주님, 조심하십시오. 홍화대원의 말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주변에서 음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기운을 느낀 적 있다. 태사와 그 부하들로부터 느꼈던 차갑고 무거운 그 기운이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소태도 하나가 날아왔다. 그녀 주변을 지키던 홍화대는 기척을 느끼고 피했지만, 몇몇은 목에서 선혈을 뿜으며 쓰러졌다. 소태도는 빙그르 돌며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소태도를 움켜쥔 자가 어둠 속에서 나왔다. 칼날에 묻은 피를 날름거리며 나온 자는 좌태사령이었다.

4.6. 6장. 바람의 늑대

풍제국은 이십 년 전, 운대륙군 대장군 출신인 군마염이 동방대륙에 건립한 나라다.

풍제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동방대륙은 혼란스러웠다. 운국의 폭정과 수탈에 견디다 못한 식민지 백성들이 조정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주의 제후인 섭광은 막내 동생 섭환이 황위에 오른 것을 불만에 품고 자기가 황제가 되겠다며 천명제를 지내다가 동방대륙 전체를 탁기로 물들일 뻔한 사실도 있었다.

앙시족을 비롯한 동방대륙의 원주민들은 더 이상 운국 황실을 믿을 수 없었고, 수인족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다. 동방대륙 전체는 독립에 대한 열기로 들끓었고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운국 조정은 풍부한 자원의 보고인 동방대륙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황제 섭환은 군신들 중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우장군 군마염을 급파, 이 봉기의 진압을 명했다. 군마염은 황제의 믿음에 보답하려는 듯 신속하게 난을 수습했다. 그 공을 높이 산 황제는 군마염을 대장군의 자리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조정의 총애를 받던 충신이 역적이 되어 운국에 대항하는 풍제국을 세울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4.7. 7장. 깨어난 신시

수월평원 종족들은 저마다 믿고 따르는 영수신이 있다.

앙시족은 늑대의 신인 신시를, 홍돈족은 돼지의 왕인 홍노돈을, 수와족은 수와대왕, 악교족은 악교노장, 그리고 원숭이 숲의 낙원족은 낙원대성을 숭배하고 있다.

영수들은 천하사절과 함께 어둠에 맞서 수월평원의 평화를 지켜 왔다. 그 동안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졌지만, 요즘은 그것이 흔들리고 있다. 어둠의 기운이 날뛰는데도, 하늘의 도를 지키고 따르려는 인간들이 줄고, 천하사절마저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악행이 커질수록 어둠의 기운이 더 커나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계속 이들을 실망시켰다.

영수들도 이제 지쳤다. 인간들이 계속 실망만 안겨 준다면, 언젠가 자신들도 어둠의 편에 설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4.8. 8장. 행방불명된 회주

홍문파 제자는 모처럼 평화로움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돌다가 모처럼 사람들이 땀흘리며 일하는 농촌의 전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물론 돼지농장 여기저기에 제국군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곳 생활도 겉보기와는 다르리라.

본의 아니게 농부들의 부탁으로 논밭을 뛰어다니고 씨를 뿌리며 땀을 흘렸다. 땀이 바람에 날아가니 어깨를 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들도 날아간 느낌이다. 진서연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동문들과 함께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끝내고 나면 강호를 떠나 평범한 필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홍문파의 제자는 왠지 그럴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복수가 끝나면 분명 자신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수렁 속으로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는 느낌을 그는 지울 수 없었다.

4.9. 9장. 귀농하는 강호인

풍제국은 사대륙 정벌을 위해 법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법기는 천지만물의 이치와 원리를 다루는 격물을 근간으로 제작된 기구다. 법기 내부는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로 이루어진 구조물 뼈대를 갖추고 있다. 단순한 움직임이라면 그 구조는 간단하지만, 정교하고 다양한 움직임이라면 구조는 얽힌 실타래마냥 복잡하다.

이 구조물을 움직이기 위한 동력으로는 가벼운 무게와 강한 영기를 지닌 영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영석의 기운으로 인위적인 움직임을 창조하고 제어하기 위해서 움직임의 규칙을 상세히 기록한 행술서란 부적을 부착했다. 이 행술서는 고도의 격물지식을 지닌 학자가 아니면 작성이 불가능하다. 구조와 움직임이 복잡할수록 행술서의 작성도 만만치 않다.

초기의 법기는 고위층의 여흥을 위한 장난감에서 출발했다. 이후 점차 인간의 힘을 대신하는 도구로 발전, 농작일, 공사 작업 등에 활용됐다. 풍제국은 여기서 더 나아가 법기를 무기로 활용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미 오래 전, 고대 나류국은 법기를 이용해서 사대륙을 평정했다는 기록도 존재했다.

풍제국은 격물학자와 조사단을 중원 각지에 보내 나류국의 법기 기술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법기 무기를 제작, 법기 부대까지 창설했다. 제국군이 영석을 확보하려는 이유도 이 법기의 동력원을 확보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4.10. 10장. 돼지와 인간 사이

평범한 촌부로 위장한 익산운은 농장을 돌아다니며 홍노돈을 찾았다.

예전의 돼지농장은 홍노돈이 이끌던 홍돈족의 터전이었지만 이제는 인간밖에 보이지 않는다. 평온해 보이는 농촌의 전경이지만 이곳에서 어떤 피바람이 불었을지 가히 짐작됐다.

익산운은 상처가 난 곳을 움켜쥐었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가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다행히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깊었어도 그는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익산운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비월의 제자가 배신해서 귀천검을 훔친 일. 그것을 막으려다 자신과 무신이 귀천검의 칼날에 당한 일. 그리고 비월이 숨진 일...

그날의 일로 익산운은 내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진서연이 자신을 쫓고 있어도 피해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익산운은 홍석근 제자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가 마황을 물리칠 그릇이라면 서둘러 그릇을 채워야 한다.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익산운은 그렇게 다짐하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4.11. 11장. 위기의 일심

일심은 발길을 서둘렀다.

경천맹주의 회합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 반달호수로 가야 했다. 맹주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말이 오갔지만, 현재로선 그곳에 가서 맹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심은 유태월 촌장님이 자기 손을 꼭 붙잡으며 한 말을 떠올렸다. 영린촌의 운명은 너에게 달렸다. 꼭 경천맹주를 만나 우리가 동맹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야 한다. 일심의 손이 떨렸다. 유태월은 무서우냐고 물었다. 일심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을 믿어 주고,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겨 줘서 너무나 고맙고 감격했다고 말했다. 유태월은 말없이 일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때 일심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손이 떨린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일심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진심을 알고 대의를 알면 촌장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4.12. 12장. 다시 만난 충각단

말 그대로 살을 찢는 고통이었다. 의원의 시술이 행해질 때마다 창자를 후벼 파는 고통이 엄습했다.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광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 날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과 그 일당 들이 자신과 부하들에게 한 짓을 행각하면 분하고 원통해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남소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계집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매몰차게 자기를 차버리고 그 일당들을 따라 가 버릴 줄이야. 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남소유를 찾기 위해 남해함대를 습격한 자들이었다. 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남소유에 집착할까.

은광일은 또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은광일은 다짐했다. 남소유, 그 계집을 잡아서 이 고통의 열 배, 스무 배로 되갚아 주겠다고.

4.13. 13장. 그림자 맹주

진서연이 눈치챘을까?

유란은 대체 진서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겉으로는 무신 그 후예를 놓친 것을 탓했지만, 자신과 무신이 이미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내비쳤다.

진서연이 못마땅해도 유란은 명분이 없다. 진서연은 마황의 명을 직접 받은 대리인이며, 귀천검도 그녀의 손에 있다. 천명제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고, 이제는 때만 기다리면 된다.

진서연이 자신을 내치지 않는 이상 자기가 먼저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유란은 생각했다. 어차피 서로 필요에 의해서 함께 가는 것 아닌가. 다시는 고도시 때와 같은 실패는 하지 않아야 하기에 그녀는 진서연의 곁을 당분간 지키기로 했다.

4.14. 14장. 개구리의 왕

낚시꾼으로 위장한 익산운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 기운은 그에게 익숙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이들과 맞서 싸워 왔는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마족의 기운이었다.

해나무 마을을 떠나면서 줄곧 이 마족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시답잖은 마족 하나라면 혼자서 감당하겠지만, 이 녀석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적어도 마왕급이었다.

이런 하찮은 변장 하나로 마족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는 건 익산운도 잘 안다. 내력을 잃긴 했지만 그는 천하사절 중 하나다. 인간 속에 숨어 있는 그의 기운을 마족이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다.

그 동안은 요기와 탁기가 가득한 곳에서 기거를 하며 진서연과 마족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숨어 다녔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속세를 이대로 돌아다니다간 발각되기 십상이다. 다행히 이 근방에는 탁기가 그득한 귀도시가 있었다. 익산운은 서둘러 그릇을 수와대왕에게 인도하고 몸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4.15. 15장. 최강의 전투종족

전사의 결투장에서는 오늘도 전사들이 피와 땀을 튀기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강함이야말로 악교족의 긍지이자 본능. 악교천왕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곳을 찾아 악교족 전사들의 기운을 보고, 듣고, 맡으며 충전했다.

경기가 한창인데 벌써 가는가? 장로 강한턱이 일어서는 악교천왕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인간족 망령들이 또 성가시게 해서 말이야. 악교천왕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또 그 인간족 친구 때문인가... 강한턱은 경기장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악교족은 동방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포악하기로 악명 높다. 수월평원의 종족들은 악교족을 두려워했지만, 아무도 이들을 사악한 요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악교족은 사명이 있다. 귀도시의 탁기와 마물들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들의 강인한 피부와 막강한 투지가 아니면 탁기와 마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종족은 이 평원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은 악교족을 경외했다. 이들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종족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인간족이다.

4.16. 16장. 귀도시를 지키는 자들

오랜만에 찾은 귀도시는 여전히 음산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한때는 고도시라 불리는 동방대륙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화려한 옛 위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익산운은 과거의 고도시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며 생업을 이었고, 곳곳엔 상인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으며, 밤이 되어도 빛과 활기가 넘치던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탁기와 마물만이 가득 찬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이게 모두 삼십 년 전, 그 일 때문이었다.

유주의 제후 섭광의 야욕 때문에 도시의 운명이 바뀌었다. 한 사람의 탐욕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었다. 왕의 자리가 무엇이길래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까. 왕이란 자리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귀한 것인가.

익산운은 섭광보다 더 위험한 인물을 여기서 만났다. 섭광은 한 도시를 파괴시켰지만 그녀는 세상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익산운은 왜 그때 비월을 말리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조금만 더 모질게 굴었더라면, 세상은 화평했고,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후회해 봐야 부질없었다. 익산운은 과거의 일을 뒤로 하고, 악교노장들을 서둘러 찾았다.

4.17. 17장. 장수의 망령

악교천왕은 악교노장님들이 그 인간족을 둘러싸고 주문을 외는 것을 지켜봤다. 이윽고 도융의 망령에 붙어 있던 한의 끈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악교천왕은 울컥했다. 도융은 그 때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하고, 공주와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토록 한이 되었구나. 한의 끈은 인간족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악교천왕은 이 인간족이 이곳에 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 인간족이 묵화의 상처를 지녔고, 기혈이 뒤틀려 산 몸도 죽은 몸도 아니었기에 도융의 한을 타고 시간의 용맥을 거슬러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놓은 길이라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하늘은 왜 이런 시련을 계속 주시는 것인가. 강한 힘만을 갈구하는 악교족으로서는 그 깊은 뜻을 알 도리가 없었다.

4.18. 18장. 탁기에 물든 백성들

아버지의 부하들이 백성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운국의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칼날을 휘둘렀다. 대피소 동굴 안은 피와 비명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 도유한은 병사의 손에 끌려가면서 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칼에 쓰러지는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였다.

도유한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니에게 달려갈 생각도 못 했다. 어머니의 피를 뚝뚝 흘리는 검을 쥔 아버지를 본 순간,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살고 싶다. 도유한은 자신의 손을 쥔 병사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4.19. 19장. 왕이 되는 의식

섭광의 마음 속엔 불만이 가득 찼다.

형님들과 자신을 제치고 황위를 계승한 막내 섭환에 대한 불만이었다. 바다 건너 식민지 대륙의 제후 자리로 물러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는 포악해졌고, 백성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으며, 술과 여자로 세월을 허송했다. 이름난 기생은 모조리 고도궁으로 불렀다. 유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방대륙 최고의 기녀라는 명성답게 유란은 혀 위에 섭광을 놓고 마음대로 굴렸다. 섭광을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천명제를 지내면 하늘이 내린 진정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 그는 당장 천명제 준비를 서둘렀다.

천명제는 실패했다. 물론 유란은 실패를 원했다. 섭광 따위의 인간이 하늘의 간택을 받을 리가 만무하다. 예상한 대로 선계의 문은 열리지 않고, 마계의 문이 열렸다. 탁기가 쏟아지고 도시는 마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문으로 마황을 불러들이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마황은 직접 자신이 대리인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마음이 급해 너무 서둘러 계획을 진행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탁기가 쏟아지는 천명제의 자리를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4.20. 20장. 천하사절의 등장

익산운은 한숨을 돌렸다.

다행히 탁기가 고도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막았다. 도시를 날뛰던 마물들도 거의 다 수습했다. 천하사절 세 명이면 힘들었겠지만, 수월평원의 영수들과 다시 부활한 무신 덕에 수월히 끝냈다.

무신이 마황과 동귀어진한 후 익산운은 늘 그를 안타까워했다. 무신과 익산운은 죽이 잘 맞았다. 찬바람 부는 비월과 늘 성인군자 같은 홍석근보다는 장수 출신의 무신과는 격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가 마황과 함께 마계로 몸을 던진 후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자 가장 마음 아팠던 게 익산운이었다. 그런데, 무신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자 누구보다 기뻐했던 게 익산운이었다.

하지만, 단지 하나가 익산운의 마음에 걸렸다. 비월이 고도시의 잔해에서 구한 여자 아이 때문이다. 이미 탁기에 오염되어 곧 있으면 마물이 될 아이였다. 비월은 자신의 내력을 주입해 아이의 탁기를 달래고, 마물이 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그 아이를 원래의 몸으로 돌리지는 못한다. 비월이 자신의 신공을 모두 주입하지 않는 한 말이다.

차가운 얼음 공주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마물이 될 뻔한 아이를 살렸는지 익산운은 알지 못했다. 그저 비월이 그 아이에게 마음을 쏟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천하사절에게 인정은 사치이자, 자기 몸에 꽂는 비수이기 때문이다.

4.21. 21장. 익산운의 아들

유란은 익산운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내력을 잃었다 해도 천하사절은 천하사절이다. 그들은 신공을 얻기 전에도 강호를 주름잡던 천하제일 고수들이었다. 진서연 무성이 탄 독약을 마신 홍석근을 상대로 그토록 애먹지 않았던가.

천하사절의 약점은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이다. 홍석근이 죽은 것도 사랑하는 제자를 살리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마음의 빈틈을 노리고 그것을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천하사절도 이를 알고, 이들은 속세와 인연을 맺고 정을 쌓는 것을 금기시했다. 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비월도, 홍석근도 모두 그 정을 쏟은 일 때문에 모두 죽었다.

유란은 진서연이 일심을 이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콧방귀를 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진서연은 자신의 사부가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천하사절에게 되갚아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4.22. 22장. 원숭이 왕과 비무

지금은 익산운이 낙원대성 앞에서 살살거리며 천연덕스레 대화를 나눴지만, 예전엔 아예 그 옆에도 가지 못했다.

싸우기만을 좋아하는 저 영수는 세상이 마족 손에 넘어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황이 나오면 한판 붙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낙원대성이 이렇게 큰소리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선계에서 불사의 신단을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선계의 신들은 낙원대성을 벌하고자 했지만,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그에겐 어떤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선계는 낙원대성이 어둠의 유혹에 빠져 마왕이 되지 않기만을 바랬다.

죽지 않는 낙원대성은 두려움이 없었다. 평원의 다른 영수들을 괴롭혔고, 고강하다는 무림인을 찾아가 늘 싸움을 걸었다. 동방대륙은 낙원대성의 횡포로 시끌벅적했다. 선계는 천하사절에게 이 영수를 잘 길들여 동료로 삼으라고 했지만, 그의 무지막지한 위력에 익산운은 혀를 내둘렀다.

내가 한번 나서보지. 역왕 홍석근이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낙원대성 앞으로 나갔다. 낙원대성은 얼씨구나 하고 역왕에게 덤볐다. 하지만, 태산을 날려 버린다는 괴력을 지닌 역왕답게 홍석근은 그의 발 아래 낙원대성을 굴복시켰다.

이후 낙원대성은 천하사절과 함께 마족을 물리치는 데 함께 힘을 보탰다. 그 외의 시간은 원숭이 사원 안에 틀어박혀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이게 다 홍석근 덕분이었다.

4.23. 23장. 경천패의 주인

정말 이 길을 걸을 것입니까.

옆의 정하도가 물었다. 군마혜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생각했지만 이 길밖에 없었다. 아바마마가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진 태사가 꾸미고 있는 천명제는 분명 마족의 음모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조정은 진서연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총명하고 어진 아버지도 어느새 진서연의 편에 서서 패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군마혜 주위에는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분명 역모라 할지라도. 저 멀리서 여명이 밝아왔다.

4.24. 24장. 고립된 병사들

무슨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도유한은 부하 우금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날이 밝진 않았다. 꿈 속에서 병사를 쥐었던 손을 바라봤다. 땀이 흥건했다. 도유한은 바람을 쐬기 위해 처소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손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장성한 도유한은 아버지가 이끌던 군사들의 수장이 되었다. 도유한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도융 장군을 따르던 장수들이 단지 명분을 위해 자신을 추대한 것이다. 반풍복운의 구호는 그의 가슴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믿는 장수와 병사들을 위해 끝까지 풍제국과 싸웠다.

이제 아버지를 따르던 측근들은 모두 죽고 자기만 남았다. 밖의 병사들이 도유한이 가진 전부였다.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기도 부족하고 군량도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도유한군은 제국군에게 전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책을 강구했다. 다행히 한 세력가가 자금 지원에 대한 뜻을 비쳤다. 하지만, 그 조건은 군권을 넘기는 것이었다. 도유한은 치욕스러웠지만 이대로 전멸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그 세력가와 협상을 체결하기로 한 날이다.

저 멀리서 여명이 밝았다. 여명을 뒤로 하고 한 여인과 무사가 붉은 복색의 여검객들에 둘러싸여 처소 쪽으로 오고 있었다.

4.25. 25장. 위기의 경천맹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국군의 항쟁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답게 도유한이란 자는 날카로운 눈매와 맹장의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군마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홍화대가 가져온 군자금 상자를 내려놓자, 그녀는 품에서 비단을 꺼내 탁자에 펼쳤다.

경천맹. 세 글자가 비단 우측에 적혀 있었다. 도유한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앞으로 우리 조직의 이름입니다. 하늘의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한 혈맹이지요. 군마혜는 손가락을 깨물어 경천맹 옆에 경천맹주 군마혜라고 썼다.

도유한은 군마혜란 이름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군마혜는 이를 저지했다. 명목상 제가 맹주이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부맹주께서 맡아 주십시오. 도유한은 입을 굳게 다물고 칼끝으로 손가락에 찔렀다. 비단은 도유한 손끝의 피를 빨아들였다.

4.26. 26장. 제국의 대용맥

도유한은 군마혜란 이름을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우금이 옆에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군마라는 성이라면 혹시 풍제국 황실의... 도유한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이 명부에 적힌 경천맹주의 이름은 절대 밖으로 누설하지 말라고 일렀다.

도유한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건 함정인가? 풍이 우릴 섬멸하려는 술책인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 올 필요까지는 없다. 사지로 딸을 보낼 아비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보통 딸도 아니라 일국의 공주다.

오히려 기회 아닌가. 공주를 인질로 삼아 제국군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지로 공주가 제 발로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황실과 그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진짜 공주가 아니라면 고스란히 제국군에게 지금 전력만 노출된다. 그리고, 공주라는 인질 따위는 무시해 버린다면 어쩔 건가. 여자 아이 목숨 하나만으로 조직의 운명을 건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도유한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분명 무슨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4.27. 27장. 대봉기

너만 믿는다. 진서연은 일심에게 단검 하나를 건넸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게 됐다. 반드시 익산운을 처치하고 일족의 독립을 이루는 영웅이 되리라. 일심은 굳게 다짐하고 단검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일심의 말에 진서연은 미소지었다. 물론이다. 익산운만 아니었다면 그 날의 참극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너의 어미도 그리 되지 않았을 거고. 익산운만 없애준다면 너의 종족을 이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주지.

일심은 진서연의 확답을 받고 예를 갖췄다. 살에 맞닿은 차가운 단검의 기운은 온몸을 얼어붙게 할 만큼 섬뜩했다.

4.28. 28장. 마도의 길

그것은 깊은 어둠이었다. 어둠마저 삼킨 어둠의 공간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어둠만 보였다. 난 죽은 것인가? 차갑고 고독했다. 시간은 멈춘 듯했다. 옛 일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천진권은 왕실 가문에서 배척당했다. 후궁마마였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바마마인 나류국왕은 국사에 바빴다. 형제들도 서자인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왕실 삼원로만이 그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가 어긋나지 않도록 바른 가르침을 주었고, 근심을 잊게 하기 위해 무공 수련도 시켰다. 천진권은 총명한 머리와 강인한 선골 덕에, 학식과 인품 그리고 무공을 겸비한 청년으로 자랐다.

장성한 천진권은 나류군의 장수가 되어 사대륙의 식민국 난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숨 막히는 왕실을 나가자 천진권은 움츠린 날개를 펼치듯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군사와 백성으로부터 무신이라 불리며 존경과 신임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왕실의 직계 왕자들은 이런 천진권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들은 천진권의 능력과 인물됨을 시기해서 나류국왕에게 이간질했다. 병권을 쥐고 있는 천진권을 조심하라고. 천진권이 왕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결국 어명으로 그는 전장에서 바로 포박당했다. 역모를 계획한 대역죄인이라는 죄목이었다. 끌려가는 수레 안에서 그는 눈물을 삼켰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운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억울함과 분함이 몰려왔다. 그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스믈스믈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자기 주변을 둘러싼 이 어둠과 같은 기운이었다.

5. 4막. 복수의 시작(리부트 전)[1]

5.1. 1장. 어둠의 길

죄인은 들어라! 우장군 거거붕은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관직을 파하고, 참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

운국 조정에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꾀한 역적 군마염을 도운 점!
군마염이 황후마마와 공주마마를 납치, 살해하려 한 대역죄에 동조한 점!
죄를 뉘우치긴커녕 이 모든 것이 귀비마마의 음모라는 망발을 한 점!

그 외에도 열거하기 힘든 죄목들이 있으나 위의 잘못만으로도 삼족을 멸할 대역죄에 해당한다. 황명에 따라 내일 아침 해가 뜰 무렵 그대를 참형에 처하노니 죄인 거거붕은 명을 받들라!

거거붕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주위의 판관과 감찰관들은 당황했다. 판관은 그의 웃음을 듣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듯 두려웠다. 그는 서둘러 거거붕을 옥사로 옮기라 명했다. 거거붕은 끌려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씁쓸함과 모함에 대한 억울함, 그리고 군마염 형님과 황후마마와 공주님이 안전히 피했구나 하는 안도감 등이 포함된 듯한 웃음이었다. 거거붕의 웃음은 그것이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사실 무덤 속에서도 계속 울려 퍼졌다. 단지 아무도 듣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 한이 서린 웃음을 들은 자가 있었다. 그는 이제 막 풍제국의 태사로 부임한 진서연이었다.

5.2. 2장. 농민 탄압

군마염이 풍제국의 건립을 세상에 알리자 운국 조정은 곧바로 전쟁을 선포했다. 동방대륙으로 파병된 운대륙군과 군마염의 제국군이 동방대륙에서 치열한 격돌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이를 풍운전쟁이라 불렀다.

군마염이 명장이었지만, 그가 동방대륙으로 원정올때 데려온 군사만으론 천년왕국을 이어온 운의 대군에 맞서기 버거웠다. 이때 한 여인이 군마염을 찾아와 책사를 자처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그녀는 뛰어난 지략과 기묘한 주술로 운대륙군을 농락했고, 직접 전장에 참여해 뛰어난 무공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등의 수훈을 세웠다. 수세에 몰렸던 풍제국은 그녀의 활약으로 되살아났고 동방대륙에서 운대륙군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풍운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군마염은 전쟁으로 어수선해진 내정을 돌보고, 공을 세운 군신들을 치하했다. 풍운전쟁의 일등공신인 검은 옷의 여인은 태사로 임명되었고, 황제의 자문과 나라의 제사장 격인 국무의 역할까지 맡았다.

여인의 이름은 진서연이었다.

5.3. 3장. 제국의 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웬 잔말이 많아!

상관은 황보석의 면상에 술잔을 던졌다. 명 받들겠습니다... 황보석은 묵묵히 보고서를 말아 쥐고 얼굴에서 술을 뚝뚝 흘리며 돌아섰다.

제국은 썩었다. 실력보다 혈연과 인맥, 뇌물과 아부로 관직이 결정되는 조정이었다. 늙고 무능한 개국공신들과 그들에게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간신배들이 고위관직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칼을 휘두르고 배를 불렸다.

황보석은 다짐했다. 저 늙고 추악한 여우들을 몰아내고 반드시 위로 올라가리라.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인지, 그들의 무능함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리라. 그리고, 비명에 간 아버지의 대장군 자리를 반드시 되찾으리라. 황보석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겠다 마음 먹었다.

5.4. 4장. 음지의 세력

운국이 귀주의 강류시를 지배하던 시절, 어린 소양상은 귀주의 판관 진태평의 저택에서 관노로 일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고, 계속해서 노비였다. 빚 때문에 부모가 팔았다는 얘기도 있고, 모반을 꾀한 역적의 자식이라 관노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뭐가 사실인지는 어린 소양상은 알 도리가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비 생활은 열두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버겁고 고달팠다. 한때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탈출을 감행했지만 진 판관의 부하들에게 곧바로 추포 당했다. 머리에 난 십자 모양의 상처는 그때 생긴 것이다.

양상아, 소아 아씨가 부른다. 소양상은 진 판관의 무남독녀의 거처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이마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도 가끔 욱신거린다. 그때마다 상처가 말을 했다.

왜 너는 노비지? 저 아이는 왜 판관의 딸이지? 어떤 사람은 왕으로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왜 개보다 못한 천민으로 태어나는 거지? 이런 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거야? 정말 엿 같지 않아? 이런 세상, 바꿔보는 거야. 뒤집어 버리는 거야.

5.5. 5장. 독살의 음모

여태까지 목숨 바쳐 충성한 대가가 역모의 죄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좌장군 황무량은 탁자를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주위에 앉은 다른 장수들도 다들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이었다. 상석에 앉은 대장군 군마염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분을 삭히지 못한 좌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계속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벼슬까지 내리며 어깨를 두드리더니 이제는 등에다 칼을 꽂다니요? 게다가 모반의 이유가 대장군께서 황후마마와 정분이 나서 황제를 암살하고 황위를 노린다? 이 무슨 망발입니까!

군마염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반은 틀렸지만 반은 맞다고 인정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설린을 사랑했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날 둘은 혼인하기로 약조했지만, 그날이 하필 남설린이 운국 황실의 황후로 간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후 둘은 군신의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가슴에는 어쩔 수 없이 연모의 정은 품었지만 그것뿐. 황제에 충성을 다하고 장수로서 신의를 다했다.

본국에서는 이미 대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대로 그냥 계실 겁니까? 운림원에서 거거붕이 죽고 난 후 새로 부임한 우장군 천종우는 백전 노장답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혼자 있고 싶네. 군마염은 일어서서 막사를 나갔다. 기나긴 회의로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백청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그의 한숨을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한숨 속에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어둠 저편에서 남설린이 걸어오고 있었다. 딸을 잃은 슬픔 때문에 그녀의 두 뺨엔 눈물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5.6. 6장. 운국을 일으키려는 자들

풍제국의 폭정은 도를 넘어섰다.

강류시 재건과 천명제 준비로 백성들은 높은 세금과 고달픈 부역으로 힘들어했고, 하층민들은 운국 시절과 다름없는 강압 정치에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다. 능력을 펼치고자 하는 유객과 무인은 부패한 조정을 보고 발길을 돌렸고, 상인들 또한 가혹한 규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풍제국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할 때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풍복운. 피로 새긴 이 네 글자 아래 모인 그들은 스스로를 복운회라 불렀다. 그들의 대부분은 귀주의 전 관료, 살아남은 운대륙군 장수, 강호를 떠나 은둔한 학자와 무인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역적 군마염을 죽이고 풍제국에 빼앗긴 동방대륙을 운국의 땅으로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복운회는 어둠에서 소리 없이 준비했다. 자금을 확보하고, 무기를 사들였으며, 뜻있는 자들은 동지로 받아들이고, 강호의 내로라하는 협객들을 모았다. 이미 많은 적을 만들어낸 풍제국 덕분에 일은 수월히 풀렸다.

그 중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익명의 후원자는 복운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자의 이름과 얼굴은 아무도 몰랐다. 수장과 몇몇 측근만이 정체를 알 뿐이었다.

5.7. 7장. 역병 정화

그렇다면 일부러 탁기를 퍼트리라는 말씀입니까?
무녀 건은 재차 확인했다. 흑무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과 동료 무녀들은 태사관 앞마당에 모여 흑무장 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풍제국의 국무로, 일명 흑무라 불렸다. 검은 무녀복을 입은 탓도 있지만 이곳의 무녀들은 사악한 주술과 영력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건 그녀 또한 어릴 때 흑무에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처참한 주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태사 진서연이었다.

그녀는 빈민촌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매일마다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보기만 하면 초주검이 될 때까지 때렸다. 그녀는 맞을 때마다 눈을 감고 어둠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 내 몸이 내 몸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둠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또 맞고 있어? 저런 인간이 아비라니. 저건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야. 쓰레기.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아주 쉬워. 그냥 분노를 폭발시켜. 그래, 그러면 내가 나갈 수 있어. 넌 그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아비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진서연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들어왔다. 진서연은 그녀의 아비와 어미가 되었고, 그녀는 삶의 의미를 태사의 말에서 찾았다. 그것이 태사님이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건은 흑무장에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5.8. 8장. 녹림왕의 귀환

주모, 술 더 가져 와!

주모는 부리나케 술병을 가져왔다. 소양상은 매가 먹이를 낚어채듯 술병을 받고 들이켰다. 도망치는 신세였지만 술이 너무 고팠다. 그가 산채를 나와 떠돈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제국군이 산채를 급습했을 때 부두령 왕수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왔지만 제국삼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 계속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부하들은 잘 있는지, 왕수는 자길 대신해서 산채를 잘 이끌고 있는지 소양상은 걱정했다. 자신이 사라지자 녹림도는 구심점을 잃은 채 예전의 산적 집단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 연화가 너무 보고 싶었다.

소문에 듣자하니 황보석이라는 제국 장수가 강호의 무인을 풍객으로 두고 자신을 잡기 위해 풀어놨다고 한다. 그 풍객 중에는 애꾸눈의 여검객이 집요하게 자신을 쫓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녀가 누군지 소양상은 가히 짐작이 되었다.

어느 날 산채로 찾아와 녹림왕의 명성을 확인해보고 싶다며 다짜고짜 비무를 청한 여인. 살기가 가득한 검을 휘둘렀지만 소양상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만하지. 소양상은 돌아섰지만 그 여인은 포기를 몰랐다. 비겁하게 뒤에서 어검을 날렸고, 그는 단지 받아쳤을 뿐이다. 그게 하필이면 그녀의 눈으로 날아갔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쳇, 여자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어느새 새로 받은 술병이 동 났다. 주변에서 자신을 힐끔거리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이런 것에 주눅들 녹림왕이 아니었다. 주모, 한 병 더!

5.9. 9장. 수도 입성

이 무슨 소란인가?

진태평은 서재에서 나와 물었다. 담장 밖으로 요란한 함성과 칼들이 부딪히는 소리, 불파는 매캐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넘어 들어왔다. 판관 나으리, 대장군 군마염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하 조승우는 헐레벌떡 뛰어와 고했다.

진태평은 소란 속에서도 강류시의 명판관다운 위엄을 잃지 않고 부하와 식솔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딸이 어느새 다가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직 6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은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봤다. 별일 아니다. 곧 떠나야 하니 채비를 하거라. 딸은 아비의 바지 자락을 꼭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어미를 잃은 지도 얼마 안 되어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니 싫을 법도 하다.

진태평은 무릎을 굽히고 딸과 눈을 마주쳤다. 곧 돌아올 것이다. 잠시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뿐이야. 그는 평소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닌 서슬 퍼런 판관이었지만, 하나뿐인 딸 앞에서는 백청산의 만년설을 녹일 만큼 따스한 미소를 지우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일그러졌다. 뜨거운 것이 아래에서 치밀어 올랐다. 역류한 피가 입으로 쏟아졌다. 진태평은 뒤를 돌아봤다. 조승우가 피묻은 칼을 그의 등에서 뽑고 있었다. 이미 대세는 군마염입니다. 저도 살려면 이 방법밖에 없군요. 진태평은 힘겹게 딸 아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딸의 얼굴은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아야, 도망쳐라... 어서...!

5.10. 10장. 하오방주를 체포하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비월은 서슬 퍼런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은 제자 앞에 나뒹굴며 신음하는 군관들과 군관들에게 얻어 맞아 초주검이 된 소년으로 향했다. 모처럼 사람 사는 곳에 나온 제자가 치기어린 정의감으로 사고를 친 게 틀림없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는 군관들에게 비월은 조심스레 물었다. 거, 검선의 제자였소? 제자 교육 좀 똑바로 시키시오. 우린 지금 공무 수행중이었단 말이요! 마, 맞소. 이 아인 진 판관 어른의 관노요. 도망치는 것을 잡아 끌고 가던 참이었는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부덕한 탓에 제자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서연아, 어서 사죄하고 용서를 빌거라. 갓 어린 티를 벗어난 제자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부의 다그침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군관들은 몸에 밴 거들먹거림으로 제자에게 모멸감을 주려 했다. 하지만 천하의 검선이 지켜보고 있는지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제자는 억울하고 분한 얼굴로 만신창이가 된 소년을 끌고 가는 군관들을 바라보았다. 분을 못 이겨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비월이 돌아가자는 말도 듣지 못했다. 비월은 제자의 몸 주위로 탁기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월은 소리쳤다. 서연아!

그제서야 사부의 말을 들었는지 제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만 가자는 비월의 말에 제자는 힘없이 답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내 혼절했다. 놀란 비월은 쓰러진 제자를 안아 올리고 소리쳤다. 서연아, 정신 차려라! 서연아! 비월의 외침 속에 제자의 의식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5.11. 11장. 복운회의 회합

기녀의 웃음 소리와 흥겨운 풍악이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예하랑은 구석진 탁자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초승달은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다그친 게 잘못이었어. 천신만고 끝에 조카 소연화를 찾았지만 구름 속으로 숨은 달처럼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예하랑은 연화가 서둘러 신공의 힘을 체득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놀기 좋아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조카는 힘든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연화는 사독한 마공의 고수에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예하랑은 자신이 지닌 강호의 정보력을 모두 동원해 찾은 행방을 찾았다. 단서는 바다 건너 동방대륙의 하오방으로부터 왔다. 기녀 복장을 한 여인 긴 흑발의 젊은 남자가 연화 또래의 여자를 데리고 강류시로 들어온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보통이 아닌 자들임은 확실하다. 아직 신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연화지만 그 정도 내력을 품은 몸을 제압했다는 건 뛰어난 고수임을 뜻했다. 필시 연화의 신공을 노린 사마외도들이렷다. 아니면... 예하랑은 더 최악의 사태를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기녀가 단서다. 하오방의 말로는 그 기녀는 남루한 주막이나 거리의 유곽에나 볼 수 있는 기녀는 아니라고 했다. 예하랑이 강류시 최고의 기루인 이곳 풍월관에 들어온 이유도 그녀의 육감이 이곳에 범인이 있다고 말을 해서였다. 여보게, 예 행수. 특실에서 또 말썽이 생겼네. 예하랑은 풍월관 주인의 말에 탁자에서 일어났다.

5.12. 12장. 조장원 침투

비밀 창고 안은 촛불이 산을 이루었다. 바닥엔 흑룡교의 마방진이 그려져 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울 가면을 쓴 네 명의 사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진태평은 검은 교도복을 입고 이들에게 예를 갖춘 후 무릎을 꿇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어둠의 전언은 수행했느냐? 네 사자들 가운데 가장 가녀린 자가 말문을 열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말씀하신 대로 비월의 제자가 저의 관노를 구하게끔 했습니다. 진태평은 사자들 외에 어둠 속에 다른 이가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비월의 제자가 야음을 틈타 이곳에 올 것이다.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진태평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존명을 받들겠다고 답했다. 부디 살살 다뤄주게. 검선을 잡을 유일한 약점이니까. 어둠 속에 있던 자가 불빛으로 나왔다. 그는 흑룡교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긴 흑발의 젊은 남자로 비범한 기품과 고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강호인이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진태평의 물음에 여인의 목소리는 답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구한 분이시지. 천하사절 무신이라 불리는 분이시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할 새로운 왕이시지.

5.13. 13장. 승상의 정체

네 얘기는 들었다. 관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관노의 탈주를 도왔다고?

진서연은 핏물로 가려진 눈을 겨우 떴다. 강류시의 진태평 판관이 차갑게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판관의 저택 마당엔 횃불을 든 관군들이 밧줄에 묶인 진서연을 둘러 싸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역모의 죄이거늘, 감히 조정대신의 저택에 칼을 들고 잠입을 해? 여봐라! 국법에 따라 이자를 참수형에 처하겠다. 당장 시행하라! 커다란 도를 든 한 군관이 진서연 앞에 다가왔다. 오늘 낮 하오동에서 관노 소년을 폭행했던 군관 중 한 명이었다. 군관은 꼴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를 높이 쳐들었다.

진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부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도시에서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사부님. 검은 기운으로 고통 받을 때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달래주신 사부님. 혹독한 수련으로 엄하게 다루었지만, 멍든 팔 다리를 위해 설산의 약초를 구해 치료해주신 사부님. 부모도 모른 채 갓난아기 때부터 노비로 천대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난생 처음 사람의 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사부님. 그녀에게 비월은 스승이기보다 어머니였다. 죽기 전에 사부님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이게 다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탓이야. 진서연은 피로 범벅된 눈물을 흘렸다.

5.14. 14장. 황궁 비무연

황제 폐하 납시오!

총내관의 외침 속에 법기 갑옷을 두른 황제 군마염이 근정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채만한 몸집과 무거운 발걸음, 얼굴을 가린 투구 속에서 뿜어나오는 숨소리리는 병색이 짙은 환자이기보다는 철갑을 두르고 포효하는 거대한 맘모수 같았다.

도천풍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군마염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분을 삼키고자 뼈마디의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며칠 전 담벼락에서 뜯은 방문이 손 안에서 무참히 구겨졌다.

동방대륙으로 잠입한 자경단원으로부터 남소유 풍제국의 태사 손에 이끌려 이곳 황궁으로 온 얘기를 듣자마자 도천풍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풍제국 수도 강류시에서는 후궁으로 들어온 남소유가 천명제의 날에 황후로 책봉될 거라는 얘기가 이미 돌고 있었다. 도천풍은 어떻게든 황궁으로 가 소유가 누구인지 군마염에게 전해야했다. 군신의 도를 어긴 군마염이 하늘의 도까지 어기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철통 같은 제국의 황궁을 무슨 수로 들어간단 말인가? 방법을 강구하던 도천풍에게 구원과 같은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황궁 비무연. 풍제국 황제가 황궁에서 비무연을 개최하니 자웅을 겨룰 강호의 고수들을 초빙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무연 우승자는 하사품과 함께 황제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영광도 얻는다고 하는 글귀도 있었다. 도천풍은 방문을 뜯고 예선전이 열리는 곳으로 발길을 급히 돌렸다.

5.15. 15장. 사라진 공주

군마혜는 눈이 가려진 채 복운회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실려오는 은은한 나무향과 축축한 흙내음이 코의 기억을 깨웠다. 분명 자작나무 숲 어딘가임이 분명했다.

대체 왜 풍제국의 공주가 제국에게 반기를 든 경천맹의 수장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놀랍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군마혜는 말 그대로 놀랐다. 하지만 짚이는 데가 없진 않았다. 자신에게 비밀리에 군자금을 지원한 승상 조승우가 복운회의 배후 중 하나라는 걸 얼마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조 승상이 자신을 지원한 것은 충정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고 조정의 실권이 태사 진서연에게 넘어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 조승상은 군마혜를 선택했다. 군마혜도 승상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진서연으로부터 아바마마를 구해내고 그녀의 위선과 음모를 온 천하에 밝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경천맹을 알선하고 군자금을 댄 것은 모두 조 승상의 계획이었다. 그는 군마혜를 왕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반이었지만 군마혜 입장에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천맹만으론 제국과 태사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동방대륙의 종족 동맹이 유일한 방편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조 승상이 그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이 복운회였으리라.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조 승상이 왜 이들과 손을 잡았는지 이해가 갔다.

5.16. 16장. 공주 구출 작전

백청산 위로 햇귀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동자승 하도는 하품을 쩌억하며 살얼음이 낀 계곡으로 털레털레 내려갔다. 아침 공양 시간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절 안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대체 누가 온다 길래 저렇게 설레발이지? 하도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물을 긷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첨벙! 하필이면 발을 디딘 바위가 살얼음판이었다. 하도는 백청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계곡물에 엉덩이를 깔고 넘어졌다. 몸 속에 들어온 한기는 없던 머리털까지 솟구치게 만들었다. 엉터리 현담 스님! 가르쳐준 보법 따윈 아무 짝도 쓸모없잖아! 콧물이 튀어나올 정도로 큰 재채기를 하며 하도는 투덜거렸다.

자, 내 손 잡아.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고개를 든 하도는 잠시 멍해졌다. 하얀 얼굴에 흑발을 곱게 늘어뜨린 한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아침해를 등지고 손을 내민 소녀의 모습은 자기 또래였음에도 수련굴의 천수관음상이 현계로 내려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소녀의 손은 따뜻했다. 가슴에서 불덩이가 콩닥콩닥 뛰면서 얼음장 같던 몸이 갑자기 따스해졌다.

공주마마, 여기 계셨군요!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제국의 노장수가 내관들과 함께 헐레벌떡 뛰어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곧 황후마마의 위령제가 시작되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소녀는 노장수의 호위를 받으며 백림사 쪽으로 돌아섰다. 발길을 떼려던 찰나 소녀는 하도에게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그걸로 닦아. 감기 들겠다. 꿈이었을까. 하도는 추운 줄도 모르고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벌겋게 언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펼쳤다. 손수건에는 '혜'라는 글씨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5.17. 17장. 태사 진서연

천명제는 무녀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대제례다. 흑무 건은 이 천명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운국이 건립한 이후 천 년 동안 천명제는 지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운국 황실에 대한 반란이자 역모였다. 왜냐하면 천명제는 왕이 되고자 하늘에게 자격을 묻는 의려이기 때문이다. 한 번 천명을 받은 왕족은 피로 이어진 세습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한 번, 아니 두 번은 있었던 듯했다. 무녀 사이에 알려진 건 삼십 년 전 고도시에서 운국 황실의 셋째 왕자이자 유주 제후인 섭광이 치른 천명제다. 파편화된 사료 속에서 천명제의 문헌만 모아 제례를 재구성해보려 했던 모양이지만, 결과는 참혹한 귀도시로 남았다. 또 한 번의 천명제는 서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서방대륙의 제후이자 황실의 장자인 섭무 또한 막내 왕자인 섭환이 황위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하고 자신이 진정한 황제임을 보여주기 위해 천명제를 지내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서방대륙은 탁기가 가득한 지옥의 땅, 서락이 된 것도 천명제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죽음과 어둠의 땅이 된 이후 서락을 가본 이는 아무도 없어 확인할 길은 없었다.

천명제의 실패는 알려진 바와 같이 참혹하다. 왕을 꿈꾸는 자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세상의 운명까지 걸고 나서야 한다. 세상을 다스릴 자격이 없는 자,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자는 땅이 노하고 하늘이 벌한다. 천명제의 무게를 잘 알기에 흑무 건은 그 준비에 성심을 다했다. 그녀는 이런 천명제의 자격을 갖춘 군마염 황제를 섬기고, 천명제의 절차를 잘 아는 진서연 태사를 모시게 된 것을 하늘이 준 기회와 축복으로 생각했다.

5.18. 18장. 뇌옥

도천풍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뇌옥의 깊숙한 아가리로 끌려오면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도 왜 그때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는지 모를 일이다. 특별수감실이라 불리는 곳 앞에 빼곡히 서 있던 간수들, 그들의 틈과 그 너머 창살의 좁은 틈 사이로 남루한 죄수 하나가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눈빛을 반짝였다 사라졌다.

그 짧은 찰나, 용맥을 훑고 가듯 모든 기억이 지나가면서 그 죄수와 같은 눈빛을 지닌 자를 기억해냈다. 군마염! 죄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나자 그 동안의 일들이 모두 짜맞춰졌다. 그리고 그가 품었던 군마염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고, 바깥의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남소유가 위험하다! 도천풍은 서둘러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 죄수를 반드시 밖으로 데려나가야 했다.

이자인가, 남귀비가 처리하라고 말한 자가? 그래, 여기는 곧 아수라장이 될 거야. 죄수들이 알아서 할테니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도천풍을 호송한 간수들은 쇠창살문을 잠근 뒤 히히덕대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도천풍은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목에 걸린 항쇄는 손과 발, 그리고 허리의 형틀과 사슬로 연결되어 기를 운용하거나 무공을 펼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어떤 주술력마저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혹시 도천풍 어르신이십니까? 도천풍은 뒤돌아봤다. 어두운 감옥 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맞군요, 역시 제 점괘가 틀림없습니다! 허리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도천풍은 고개를 숙였다. 검은 주술복의 린족 소년 하나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똘망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5.19. 19장. 팔부기재와 결투

생자필멸.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감마등의 말이 끝난 후 흐르던 무거운 정적 속에 태왕의 목소리가 담담히 흘렀다. 간묘월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고, 하오방주 이오락은 나지막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른 팔부기재들도 감마등의 말을 이미 예견한 듯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팔부기재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현 무림 최고의 여덟 고수를 칭하는 말로, 이들은 각자의 문파와 정사를 대표해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들이 잠시 칼을 내려놓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무림공적 진서연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닥쳐올 마황의 재림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원래는 마황에 대적할 수 있는 네명의 천하사절을 찾기위해 모였다. 하지만, 검선과 무신은 오래 전 사라졌고, 환귀는 행방이 묘연하며, 역왕마저 유명을 달리하자 감마등은 이들에게 다음 점괘를 전했다. 천하사절이 세상에 없다면 이를 대신할 그릇을 찾고, 그 그릇의 완성을 돕는다. 그리고 그 일에는 이들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래도 예정된 날보다 일주일은 더 살지 몰라요. 감마등 점괘는 늘 일주일씩 틀리잖아요? 이오락의 농에 다들 웃음을 슬며시 흘리더니 모두들 주변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감마등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동료의 모습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남기려는 듯이.

5.20. 20장. 깨달음의 의식

무성은 이른 아침부터 홍문의 제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물론 다른 동문들도 부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제수 주문을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살펴 보고, 없는 물건은 상인들에게 주문을 하고, 조금이라도 경비를 덜어보고자 흥정을 하는 등의 일을 며칠 전부터 한 무성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바빴다.

특히나 올해 더 신경이 가는 이유는 늦깎이로 들어온 막내가 처음으로 홍문의 제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성 자신도 처음 이 제를 올릴 때 자신이 드디어 홍문파에 들어왔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막내도 이 제를 올리게 되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거라 생각하니 제 준비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제사상을 차리는 동안 무성은 그 동안 무일봉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유가촌에서 도망친 후 거지 행색을 하며 돌다니다가 쓰러진 것을 홍석근 사부가 데리고 온 일, 홍석근 사부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홍문파의 장문이라는 걸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자로 받아 달라고 사정한 일, 삼 년 간 무일봉에서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떼고, 허드레일을 하며 영묵 사형의 무공 수련을 곁눈질한 일, 마침내 정식 제자로 받아 들여져 시험의 동굴에서 영묵 사형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맞은 일. 그때는 영묵 사형과 자신밖에 없었는데 어느덧 무일봉의 제자는 여섯 식구로 불어났다.

앞으로 막내가 정식 제자가 되고, 막내 밑으로도 또 다른 제자가 들어오겠지. 그리고 그 밑으로 또 막내가 들어오고, 또 그 밑으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동문들과 함께 무일봉에서 계속 수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다. 하지만 그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위해 언젠간 이 무일봉을 떠날 날이 올 것이다. 제사상을 모두 차린 후 무성은 일어났다. 아침해가 제사상 위에 기다란 무성의 그림자를 던져 놓았다.

5.21. 21장. 비움과 회복

정하도는 오랜만에 계곡에 내려와 주변을 돌아봤다. 나지막이 들리는 불경 소리가 휘감는 산사, 현담대사와 함께 수련하던 수련굴, 새벽부터 나와 물을 긷던 옥빛의 계곡물. 스님들 품에 키워졌던 아기 때나, 무과 시험을 위해 강호에 수련을 떠나겠다며 십년 전 그때나, 백림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이 계곡에서 처음 본 공주의 모습은 솜씨 있는 황실 화원의 정밀화처럼 머리에 박혀 있었다.

떠들썩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지승인 현담과 녹림왕 소양상이 계곡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양상은 덩치에 맞지 않게 궁시렁대며 현담 뒤를 따랐다. 그때 스님만 안 만났어도 그냥 노략질이나 하면서 산채서 배나 두드리고 있었을 텐데! 내가 미쳤지, 의적 활동은 왜 해서 이런 도망자 신세인지 원! 소양상의 하소연을 현담대사는 흐뭇한 미소로 대꾸하며 앞섰다.

정하도는 다가온 현담에게 합장을 하며 예를 갖췄다. 네가 데려온 시주 분이 눈을 뜨셨단다. 물은 소양상이 길어 나를 테니 어서 가보거라. 정하도는 서둘러 별채로 향했다. 뒤통수에서 소양상이 자기가 이런 허드렛일이나 할 사람이냐며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5.22. 22장. 도천풍의 과거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남설린은 밖으로 나섰다. 출산 후 아직 몸은 불편했지만 감옥 같은 황궁에서 나와 얻은 모처럼의 자유를 방구석에서만 보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군마염과 마주하는 시간을 더 만들기 위해서였다.

밤공기가 찹니다. 황후마마, 안으로 드시지요.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대장군 군마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의목소리에선 군신의 예를 다 할 뿐이라는 엄숙과 경직만이 묻어 있었다.

남설린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온 일을 기억해냈다. 절친인 상장군 군마천의 아들이라며, 오늘부터 같이 지낼 거라고 말했다. 그 동안 어떤상처를 입었는지 몰라도 소년은 말이 없었다. 남설린은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 동생임에도 그를 늘 챙겨주고 돌봤다. 소년도 소녀의 다정함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이내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어느덧 둘은 성인이 되었고 연모의 정이 싹 트기 시작했다. 청년이 된 소년은 말했다. 무관 시험을 통과하면 아버지께 혼인을 허락 받겠다고, 남설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그가 무관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을 때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남설린은 운국 황제의 황후로 간택해서 황궁으로 불려갔다.운명은 사랑을 군신의 관계로 만들었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운명을 거슬릴 순 없었다. 빌어먹을 운명을 저주하며 청년은 전장으로 달려가 칼을휘둘렀고, 남설린은 황궁에서 박제된 삶을 살았다.

남설린과 대장군이 된 소년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지만 그 사이엔 용맥으로도 다 다를 수 없는 세상의 끝 같은 거리감이 존재했다.

5.23. 23장. 후궁 남소유

어서 서둘지 못 해, 이 빌어먹을 것들! 천명제가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공사 감독관은 석재를 이고 가던 인부의 등짝을 몽둥이로 갈겼다. 피죽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은 앙상한 몸뚱이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감독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릿자루 두들기듯 쓰러진 인부에 발길을 휘둘렀다. 주변엔 많은 인부들이 있었지만, 괜히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일에 열중했다. 도단하도 그 인부들 틈 속에서 묵묵히 목재를 들어 올렸다.

대나무 마을이 충각단에 의해 불탄 지 열흘 후, 도단하는 사경을 헤매다 겨우 눈을 떳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졌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만신창이었다. 사랑했던 남소유의 배신 때문이었다. 한달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도단하는 방을 나서다가 아버지와 자경단원의 얘기를 엿들었다. 남소유가 풍제국 태사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가 황후 책봉을 맞이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밤, 도단하는 목발을 짚으며 집을 나섰다. 절뚝이는 발검음으로 가기엔 풍제국은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도단하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남소유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바다를 건너 풍황궁을 휩쓰는 불의 용이 되어 있었다. 물론 문밖을 나설 때 고붕에게 들켜 시작부터 고비를 맞았지만, 고붕을 설득해 긴 여행길의 동반자로 삼은 탓에 오는 길이 한결 편했다.

고봉은 도단하와 함께 긴 통나무를 어깨에 매보려고 낑낑 댔다. 그때 기분 나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며 통나무가 들어 올려졌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우린 외나무를 같이 들게 되었군. 뒤돌아 볼 필요도 없이 도단하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그는 은광일이었다.

5.24. 24장. 위기의 백림사

무과 차석, 황보석! 앞으로 나오시오. 황보석은 불쾌한 심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가 예를 갖췄다. 자신이 장원이 아닌 차석으로 급제한것에 심사가 튀틀린 것이다. 풍제국 무관이 되기 위해 십 년 간 강호를 돌며 갈고 닦은 무공은 과거장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과 장원, 정하도! 자신의 옆에 다가와 예를 갖추는 자를 황보석은 곁눈질로 쳐다봤다. 이름난 명문의 자제도, 무림의 이름난 문파의 후기지수도 아닌 허름한 행색에 근본도 알 수 없는 촌놈이 자기 옆에서 장원급제증을 받고 있었다. 그래,이자다. 과거장에서 자기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심사관과 응시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 자가, 대체 어디서 빌어먹던 자가 그토록 고강하고 아름다운 무공을 펼칠 수 있었지? 황보석은 놈의 그 정체가 궁금했다.

이자가 장원인가? 어느새 황제폐하가 정하도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백관들과 두 급제자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황제에 대한 예를 올렸다. 정하도라 했는가? 장원을 한 자는 자신이 원하는 관직을 택할 수 있네. 어디 맡고 싶은 자리라도 있는가? 황보석은 두말할 거 없이 정하도가 중장군 정도의 고위 관직을 말할 거라 생각했다. 젠장 그 자리는 내가 올라야 한다구!

정하도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은 공주마마님의 호위무사직을 맡고 싶습니다. 황보석은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장원씩이나 차지한 자가 공주의 뒷수발이나 들겠다고? 그 자리는 공을 세울 수도 없고,출세를 할 수도 없는, 한마디로 황궁의 귀신으로 살겠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장원이 그 정도 자리를 택한다면 차석인 자신은 더 낮은 관직에 임용될 수밖에 없다. 황제는 갑자기 호방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다른 군말하지 않고 총내관에게 정하도를 공주의 호위무사로 임관하라 일렀다. 황보석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5.25. 25장. 얼어붙은 숨결

인사하거라, 내 아들 단하다.

고붕은 엉거주춤 쭈뼛쭈뼛 도천풍의 뒤에서 나와 꾸벅 인사했다. 고개를 들고 자기 앞에 선 아이를 처다 본 고붕은 그만 넋을 잃었다. 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큰 눈동자, 윤기가 흐르는 흑발과 가지런한 입, 총명함과 귀티가 흐르는 자태, 늘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다 이렇게 눈 앞에서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단하의 모습은 용가만 소설에 나오는 나오는 소년 영웅이 책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았다.

반면 고붕은 거무튀튀한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뭉개진 주먹코 주변엔 여드름 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했으며, 옷은 언제 빨았는지 때국물이 줄줄 흐르고, 신발은 양쪽 모두 발가락 두어 개가 나온 게 기본이며, 몸에서는 생선 비린내를 넘어선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추화연과 함께 양대 왕따로 마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고붕은 다시 엉거주춤 쭈뼛쭈뼛 도천풍의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 이 아인 누구예요? 도천풍은 얼마 전 배를 타고 나갔다가 충각단의 습격에 목숨을 잃은 고씨의 아들이라고 했다. 달리 의지할 데도 없는데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경단원이 되겠다고 졸라대서 도천풍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호자 노릇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붕은 단하가 자신의 꼬질꼬질한 손을 덥썩잡아 당긴 것에 깜짝 놀랐다. 야, 잘됐다.너 내 부하해라! 고붕은 단하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집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자기 손을 잡은 단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이 소년과 함께라면 소설 속 영웅들처럼 신나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5.26. 26장. 속세의 정

진소아는 뼛속까지 들어오는 한기를 이겨내며 무거운 눈을 벌렸다. 주위는 온통 얼음의 세계였다. 몸은 말 그대로 얼음덩이 신세로, 얼음에 파묻혀 옴싹달싹할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옆에서 당여월도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리며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둘은 한 동안 말이 없이 주변을 느끼고자 긴장했다. 굴을 타고 울어대는 바람소리만 맴돌았다.

왜 너랑 나랑은 이렇게 맨날 엮이는 거냐? 당여월스러운 투덜거림이었다. 진소아도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와 계속되는 악연이 신기하기는 했다. 대체 왜 그녀와 어떻게 만나 어디서부터 으르렁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 동안 칼과 총을 섞으면서 나눈 몸의 대화는 마냥 미워만 하기에는 애매한 정 같은 게 쌓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미운 정인가.

진소아는 몸이 얼어붙자 술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 갑자기 당여월과 밤새도록 술잔을 나눠보는 것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속을 털어 놓고 마음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 그녀가 왜 오락당 당주가 되었는지, 한쪽 눈은 왜 잃었는지 라던가, 자신이 운국 고관대작의 외동딸이었다가 왜 보물사냥꾼이 되었는지 따위 같은 얘기를 주고 받기 보다는 그저 술잔만 주고 받아도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말이다.

5.27. 27장. 검의 무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다시 나타났느냐! 백청파 장문인 건야행은 검을 치켜 들고 외쳤다. 그의 시선 저편엔 눈보라 속을 뚫고 나타난 진서연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부모와 같은 스승을 죽이고 달아난 패륜아가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스승의 거처로 다시 가겠다는 거냐? 그 신성한 곳에 더러운 너의 발을 한 발짝도 들이게 놔둘 성 싶으냐? 뭣들 하느냐! 장문의 호령에 백청파의 제자들은 진서연의 주변을 둘러싸며 칼날을 번뜩였다.

검선의 처소가 있는 비월봉은 백청파 본산을 지나쳐야 오갈 수 있는 곳이다. 백청파의 시조께서는 수련여행 중 검선을 만나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비월봉으로 가는 용맥 아래 움막을 지었다고 한다. 물론 검선은 어떤 가르침도 주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소리처럼 조언을 해주신 모양이다. 그것이 백청파의 시작이었다. 건마는 어릴 때부터 줄곧 진서연을 지켜봤다. 검선에 품에 안기어 비월봉으로 간 거적때기 아이에서 검선의 제자가 되어 강류시에 심부름을 나서는 소녀가 될 때까지. 밝고 환한 그 소녀가 스승을 죽이고 귀천검을 가지고 달아난 천인공노의 악행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진서연은 백청파의 칼날들이 모두 자신을 겨눈 가운데에서도 조용하고 담담했다. 건마는 나지막이 건야행에게 말했다. 아버님, 서연이 그럴 리 없습니다. 이건 필시 흑막이 있을 겁니다. 서연의 말도 들어보심이... 말이 끝나기 전에 건야행의 일격이 건마의 복부를 강타했다. 미련한 놈! 너도 저 사악한 마귀에게 혼을 빼앗겼구나! 저자는 그런 정을 이용해 사부를 살해한 걸 모르느냐! 건마는 급소를 맞은 탓에 꼬꾸라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파의 큰 어른이신 검선을 돌아가시게 만든 자다! 죽여라!! 건야행의 공격을 시작으로 문파원들은 일제히 진서연에게 달려들었다. 건마는 진서연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물 스물 피어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5.28. 28장. 비극의 전모

방 안엔 평소와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로 비월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진서연은 진태평 판관 집에서 매질 당한 고통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사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난 내일 조정에 출두할 것이다. 관군에 무력을 행사하고 국법을 어겼으니 죄값을 받아야 할 터.
- 사부님, 그건 저를 구하기 위해서...!
- 게다가 난 선계의 맹약을 어겼다. 속세의 인간에게 해악을 끼쳤다. 그리고...사사로운 정을 품었다.

진서연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천하사절은 속세의 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맹약을 깬다면 더 이상 천하사절일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진서연은 눈물을 흘렸다.
- 슬퍼하지 말거라. 이미 널 구하기 위해 칼을 뽑았을 때 각오한 일이다. 이 자리 에서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뒤돌아 앉거라.
- 사부님, 설마...?
- 그 동안 나의 내력으로 너의 탁기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나의 신공을 모두 전하면 네 몸의 탁기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부님이 위험합니다!
- 그저 필부로 돌아갈 뿐이다. 널 마물이 되게 둘 순 없다. 넌 나의 제자이자...자식이다. 어서 뒤돌아 앉거라.

진서연은 눈물을 흘리며 사부에게 등을 내주었다.
- 울음을 참고, 호흡을 가다듬어라, 몸을 움직이거나 정신이 흩어지면 둘 다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으니. 그리고, 너의 뒤는 홍석근에게 부탁했다. 역왕이라면 널 천하사절의 뒤를 이을 훌륭한 재목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다.

비월의 두 손이 진서연의 등에 닿았다. 진서연은 따스한 기운이 몸 안으로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신공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5.29. 29장. 천명제

모든 것이 끝났다. 기나긴 복수의 여정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진서연은 모든 것을 태우고 재만 남은 영혼이 가슴 속에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슬픔도, 분노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대로 바람에 흩어져 사라지길 원했다.

홍문파 마지막 제자는 복수를 택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어둠의 밑바닥까지 갔다 온 그가 원수를 눈앞에 두고 칼을 거둔 것은 복수의 끝이 이런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홍석근은 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길래... 문뜩 그녀는 사부 비월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지금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죽은 혼백이나마 사부의 곁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영혼은 어둠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계의 문이 닫히며 거센 폭풍을 쏟아 냈다. 폭풍에 휘날리며 떨어지는 진서연은 어둠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차분했다. 후회는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검은 피와 함께 영혼이 어둠으로 빨려가는 것을 느꼈다. 어둠속에서 불빛을 보았다. 비월봉 처소의 불빛이다. 문 밖으로 보이는 사부의 그림자가 그녀를 살포시 미소 짓게 했다. 사부가 말했다. 서연아, 왔느냐.

5.30. 30장. 작별

사부님, 저 막내입니다.

가신 곳은 평안하신지요. 영묵 대사형과 길홍 사형, 화중 사형 그리고 진영 사저, 모두 함께 잘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받았지만 무력한 탓에 지킬 수 없었던 일, 복수에 눈이 어두워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신공을 탐했던 일, 익산운 어르신의 죽음, 많은 이들의 희생, 그리고 복수심에 사로잡혀 홍문의 길을 저버리고 마도로 빠졌던 일...

이 모든 일이 저를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말씀하셨지만 그저 부끄럽고 죄스러우며 후회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사부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봐주셨지요. 그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홍문신공의 깊고 넓은 오의를 깨달아 끝없는 정진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고,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홍문의 뜻을 세상에 널리 펼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부님, 지켜봐 주십시오. 막내 올림.

5.31. 외전. 끝나지 않은 위협

결국 마황을 소환하지 못했군...

빛도 소리도 없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짐승과 인간의 목소리가 뒤엉켜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나마 마계의 문이 열렸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과연 그게 다행일까? 마황께서 진서연을 대신할 새로운 대리인을 보내셨네.
이미 만났어요. 아직도 우릴 믿지 못 하시는구만.
그럴 수 밖에요. 이미 그녀는 실패의 대가를 치르고 있어요.
이젠 완전히 힘을 찾았으니 시간이 없네. 얼마나 걸릴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은 늘 우리 편이니까요...

흑룡도래 만민합일. 목소리는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았다.

6. 4막. 복수의 시작(리부트 이후)[2]

6.1. 1장. 백청산맥으로

천진권은 신중하게 소연화의 기혈을 조정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탁기의 무공을 전수받은 홍문파 제자는 천진권이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 진서연을 향한 복수에 대한 갈망이 몸 안의 탁기를 자극하여 그를 더 빨리 성장시킨 것이다. 천진권은 일단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그리고 홍문파의 제자가 정말 진서연을 처치 할수도 있겠다는 기대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계의 문은 아예 열리지도 않을 것이니, 귀천검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에 들어올리라. 그리고 오래 전부터 기달려 온 미래도… 하지만 천진권은 어떤 상황에도 남을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홍문파의 제자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을 준비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진권은 손을 거두면서 차가운 눈 빛으로 소연화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곳 모든 준비가 끝난다. 탁기에 물든 홍문파의 제자는 더 이상 마황의 그릇이 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진서연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천진권은 백청산맥을 바라보며 광소했다.

6.2. 2장. 녹림도

풍제국의 폭정은 도를 넘어섰다. 강류시 재건 후, 곧바로 이어진 천명제의 준비로 인해 백성들은 높은 세금과 고달픈 부역으로 힘들어했고, 운국 시절과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상인들 또한 강압적인 경제 정책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고, 능력을 펼치고자 하는 학자와 무인들은 부패한 조정에서 발길을 돌려 은둔했다. 이렇게 국가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나타났다.

녹림도. 그들은 스스로를 녹림도라 불렀다. 대부분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차라리 산적이 되겠다며 도망친 백성들이었으나, 귀주의 전 관료, 살아남은 운대륙군 장수, 은둔한 학자와 무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희망을 잃은 자들이 법과 질서를 등지고, 대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서로에 대한 의리를 통해 희망을 되찾게 된 것이다.

소양상이 대두령이 된 이후, 녹림도의 성장은 더욱 빨라졌다. 풍제국을 넘어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속적인 약탈을 통해 많은 자금을 확보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강호의 협객들을 동지로 받아들였다. 풍제국은 이미 오래 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소양상은 종종 이렇게 외쳤다.
"태평성대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우리 녹림도는 영원하리라!"

6.3. 3장. 소녀의 부탁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비월은 서슬 퍼런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은 제자 앞에 나뒹굴며 신음하는 군관들과 군관들에게 얻어 맞아 초주검이 된 소년으로 향했다. 모처럼 사람 사는 곳에 나온 제자가 치기어린 정의감으로 사고를 친 게 틀림없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는 군관들에게 비월은 조심스레 물었다. 거, 검선의 제자였소? 제자 교육 좀 똑바로 시키시오. 우린 지금 공무 수행중이었단 말이요! 마, 맞소. 이 아인 진 판관 어른의 관노요. 도망치는 것을 잡아 끌고 가던 참이었는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부덕한 탓에 제자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서연아, 어서 사죄하고 용서를 빌거라. 갓 어린 티를 벗어난 제자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부의 다그침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군관들은 몸에 밴 거들먹거림으로 제자에게 모멸감을 주려 했다. 하지만 천하의 검선이 지켜보고 있는지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제자는 억울하고 분한 얼굴로 만신창이가 된 소년을 끌고 가는 군관들을 바라보았다. 분을 못 이겨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비월이 돌아가자는 말도 듣지 못했다. 비월은 제자의 몸 주위로 탁기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월은 소리쳤다. 서연아!

그제서야 사부의 말을 들었는지 제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만 가자는 비월의 말에 제자는 힘없이 답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내 혼절했다. 놀란 비월은 쓰러진 제자를 안아 올리고 소리쳤다. 서연아, 정신 차려라! 서연아! 비월의 외침 속에 제자의 의식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6.4. 4장.소양상을 찾아라!

비밀 창고 안은 촛불이 산을 이루었다. 바닥엔 흑룡교의 마방진이 그려져 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울 가면을 쓴 네 명의 사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진태평은 검은 교도복을 입고 이들에게 예를 갖춘 후 무릎을 꿇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어둠의 전언은 수행했느냐? 네 사자들 가운데 가장 가녀린 자가 말문을 열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말씀하신 대로 비월의 제자가 저의 관노를 구하게끔 했습니다. 진태평은 사자들 외에 어둠 속에 다른 이가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비월의 제자가 야음을 틈타 이곳에 올 것이다.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진태평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존명을 받들겠다고 답했다. 부디 살살 다뤄주게. 검선을 잡을 유일한 약점이니까. 어둠 속에 있던 자가 불빛으로 나왔다. 그는 흑룡교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긴 흑발의 젊은 남자로 비범한 기품과 고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강호인이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진태평의 물음에 여인의 목소리는 답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구한 분이시지. 천하사절 중 무신이라 불리는 분이시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할 새로운 왕이시지.

6.5. 5장. 녹림도 주둔지 소탕

관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관노의 탈주를 도왔다고?

진서연은 핏물로 가려진 눈을 겨우 떴다. 강류시의 진태평 판관이 차갑게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판관의 저택 마당엔 횃불을 든 관군들이 밧줄에 묶인 진서연을 둘러 싸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역모의 죄이거늘, 감히 조정대신의 저택에 칼을 들고 잠입을 해? 여봐라! 국법에 따라 이자를 참수형에 처하겠다. 당장 시행하라! 커다란 도를 든 한 군관이 진서연 앞에 다가왔다. 오늘 낮 하오동에서 관노 소년을 폭행했던 군관 중 한 명이었다. 군관은 꼴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를 높이 쳐들었다.

진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부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도시에서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사부님. 검은 기운으로 고통 받을 때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달래주신 사부님. 혹독한 수련으로 엄하게 다루었지만, 멍든 팔 다리를 위해 설산의 약초를 구해 치료해주신 사부님. 부모도 모른 채 갓난아기 때부터 노비로 천대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난생 처음 사람의 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사부님. 그녀에게 비월은 스승이기보다 어머니였다. 죽기 전에 사부님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이게 다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탓이야. 진서연은 피로 범벅된 눈물을 흘렸다.

6.6. 6장. 추적자

"하오방, 이 나쁜 놈들아!"

한 여인의 날카로운 외침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뒷골목에 울려 퍼졌다. 육손은 살짝 삿갓을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변 상인들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왈패들의 히히덕 거리는 표정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다.

육손이 하오방의 방주 자리를 이오락에게 넘겨 준 뒤, 하오방은 젊은 방주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어두운 지하에서 점진적으로 밝은 지상으로 나아갔다. 더러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규칙을 지키면서 세상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오락이 갑작스레 방주 자리를 내던진 뒤 독자적으로 탄포사를 세우자, 구심점을 잃은 하오방은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오락의 본심은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얼마 후 이오락이 팔부기재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하오방 역사 상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피식, 육손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삿갓을 다시 눌러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의, 명예, 권력...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오래 전 한 줄기 바람을 따라 흘러가버렸다. 자신은 이제 어느 누구와도 아무 관계없는 떠돌이일 뿐이었다.

6.7. 7장. 목숨을 건 도박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웬 잔말이 많아!

유천을 향해 술잔이 날아들어왔다. 뒤쪽 벽에 부딪혀서 깨져 나온 유리 조각이 유천의 뺨을 스치고, 곧 핏방울이 맺혔다. 명 받들겠습니다... 유천은 보고서를 말아 쥐고 묵묵히 돌아섰다.

풍제국은 썩었다. 실력보다 혈연과 인맥, 뇌물과 아부로 관직이 결정되는 조정이었다. 늙고 무능한 개국공신들과 그들에게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간신배들이 고위관직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칼을 휘두르고 배를 불렸다. 군마혜 공주가 이런 상황 뒤에 감춰진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유천은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서 떠났을 것이다.

유천은 흘러 내리는 피를 닦지 않았다. 대신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 먹었다. 어느 누구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공명정대한 방식으로, 언젠가는 저 늙은 여우들을 다 몰아내리라.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그들의 두 눈에 똑똑히 보여주리라. 그래서 결국 돌아가신 아버지의 대장군 자리를 이어 받아 풍제국을 정상화 시키리라. 이것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은 진정한 주군, 군마혜 공주를 지키기 위해 유천이 선택한 삶이었다.

6.8. 8장. 여인의 순정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주 서있다. 매우 조용하다. 여자의 한쪽 눈에서부터 시작된 긴 핏줄기, 그것이 방울로 맺혀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남자는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하지만 미련이 남은 것일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고, 이 때 여자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지금 내 곁을 떠나면, 우리는 연인이 아닌 원수로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후우... 소양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날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고, 심신이 지친 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꿈을 꿨다. 요즘은 그 빈도가 더욱 빈번해졌다. 하필이면 애지중지 키운 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거의 연인이 자신을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이 되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버럭 성질이 났다. 이럴 때는 술을 안 마실 수 없었다. 하지만 곁에 놓여있는 술병은 이미 비어있었다. 와장창!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부하 한 명이 새 술병을 들고 달려 들어왔다. 소양상은 벌컥 벌컥 술을 들이켰다. 잔뜩 취해서 머리 속의 온갖 상념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안하오, 여월. 일이 끝나는 대로 찾아갈테니, 원하는 대로 나를 죽이시오..."

6.9. 9장. 소양상 체포 작전

운국이 귀주의 강류시를 지배하던 시절, 어린 소양상은 귀주의 판관 진태평의 저택에서 관노로 일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고, 계속해서 노비였다. 빚 때문에 부모가 팔았다는 얘기도 있고, 모반을 꾀한 역적의 자식이라 관노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뭐가 사실인지는 어린 소양상은 알 도리가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비 생활은 아무리 좋은 근골을 타고났다고 해도 열두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버겁고 고달팠다. 한때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탈출을 감행했지만 진 판관의 부하들에게 곧바로 추포 당했다. 그리고 너리에는 난 십자 모양의 상처가 생겼다.

양상아, 소아 아씨가 부른다. 소양상은 진 판관의 무남독녀의 거처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이마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도 가끔 욱신거린다. 그때마다 상처가 말을 했다.

왜 너는 노비지? 저 아이는 왜 판관의 딸이지? 어떤 사람은 왕으로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왜 개보다 못한 천민으로 태어나는 거지? 이런 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거야? 정말 엿 같지 않아? 이런 세상, 바꿔보는 거야. 뒤집어 버리는 거야.

6.10. 10장. 강류시 입성

여태까지 목숨 바쳐 충성한 대가가 역모의 죄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좌장군이 탁자를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주위에 앉은 다른 장수들도 다들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이었다. 상석에 앉은 대장군 군마염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분을 삭이지 못한 좌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계속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벼슬까지 내리며 어깨를 두드리더니 이제는 등에다 칼을 꽂다니요? 게다가 모반의 이유가 대장군께서 황후마마와 정분이 나서 황제를 암살하고 황위를 노린다? 이 무슨 망발입니까!

군마염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반은 틀렸지만 반은 맞다고 인정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설린을 사랑했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날 둘은 혼인하기로 약조했지만, 하필 그날 남설린이 운국 황실의 황후로 간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후 둘은 군신의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가슴에는 어쩔 수 없이 연모의 정은 품었지만 그것뿐. 황제에 충성을 다하고 장수로서 신의를 다했다.

본국에서는 이미 대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대로 그냥 계실 겁니까? 운림원에서 거거붕이 죽고 난 후 혼자 남은 좌장군이 마음을 가라 앉히고 노장답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혼자 있고 싶네. 군마염은 일어서서 막사를 나갔다. 기나긴 회의로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백청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그의 한숨을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한숨 속에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홀로 딸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남설린을 꼭 닮은 달이었다.

6.11. 11장. 정체불명의 저격수

군마염이 풍제국의 건립을 세상에 알리자 운국 조정은 곧바로 전쟁을 선포했다. 동방대륙으로 파병된 운대륙군과 군마염의 제국군이 동방대륙에서 치열한 격돌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이를 풍운전쟁이라 불렀다.

군마염이 명장이었지만, 그가 동방대륙으로 원정올때 데려온 군사만으론 천년왕국을 이어온 운의 대군에 맞서기 버거웠다. 이때 한 여인이 군마염을 찾아와 책사를 자처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그녀는 뛰어난 지략과 기묘한 주술로 운대륙군을 농락했고, 직접 전장에 참여해 뛰어난 무공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등의 수훈을 세웠다. 수세에 몰렸던 풍제국은 그녀의 활약으로 되살아났고 동방대륙에서 운대륙군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풍운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군마염은 전쟁으로 어수선해진 내정을 돌보고, 공을 세운 군신들을 치하했다. 풍운전쟁의 일등공신인 검은 옷의 여인은 태사로 임명되었고, 황제의 자문과 나라의 제사장 격인 국무의 역할까지 맡았다.

여인의 이름은 진서연이었다.

6.12. 12장. 탄포사의 주인

천명제는 무녀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대제례다. 흑무 훤은 이 천명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운국이 건립한 이후 천 년동안 천명제는 지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운국 황실에 대한 반란이자 역모였다. 왜냐하면 천명제는 왕이 되고자 하늘에게 자격을 묻는 의례이기 때문이다. 한 번 천명을 받은 황족은 피로 이어진 세습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한 번, 아니 두 번은 있었던 듯 했다. 무녀 사이에 알려진 건 삼십 년 전 고도시에서 운국 황실의 셋째 왕자이자 유주 제후인 섭광이 치른 천명제다. 파편화된 사료 속에서 천명제의 문헌만 모아 제례를 재구성해보려 했던 모양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한 귀도시로 남았다. 또 한 번의 천명제는 서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서방대륙의 제후이자 황실의 장자인 섭무 또한 막내 왕자인 섭환이 황위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자신이 진정한 황제임을 보여주기 위해 천명제를 지내지 않았냐는 설이다. 서방대륙이 탁기가 가득한 지옥의 땅, 서락이 된 것도 천명제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죽음과 어둠의 땅이 된 이후 서락을 가본 이는 아무도 없어 확인할 길은 없었다.

천명제의 실패는 알려진 바와 같이 참혹하다. 왕을 꿈꾸는 자는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세상의 운명까지 걸고 나서야 한다. 세상을 다스릴 자격이 없는 자,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자는 땅이 노하고 하늘이 벌한다. 천명제의 무게를 잘 알기에 흑무 훤은 그 준비에 성심을 다했다. 그녀는 이런 천명제의 자격을 갖춘 군마염 황제를 섬기고, 천명제의 절차를 잘 아는 진서연 태사를 모시게 된 것을 하늘이 준 기회와 축복으로 생각했다.

6.13. 13장. 황궁 비무연

어서 서둘지 못 해, 이 빌어먹을 것들! 천명제가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공사 감독관은 석재를 이고 가던 인부의 등짝을 몽둥이로 갈겼다. 피죽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은 앙상한 몸뚱이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감독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릿자루 두들기듯 쓰러진 인부에 발길을 휘둘렀다. 주변엔 많은 인부들이 있었지만, 괜히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일에 열중했다. 도단하도 그 인부들 틈 속에서 묵묵히 목재를 들어 올렸다.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대나무 마을이 충각단에 의해 불탄 지 열흘 후, 도단하는 사경을 헤매다 겨우 눈을 떳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졌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만신창이었다. 사랑했던 남소유의 배신 때문이었다. 한달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도단하는 방을 나서다가 아버지와 자경단원의 얘기를 엿들었다. 남소유가 풍제국 태사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갔고, 황후 책봉을 맞이하게 됐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그날 밤, 도단하는 목발을 짚으며 집을 나섰다. 절뚝이는 발검음으로 가기엔 풍제국은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도단하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남소유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바다를 건너 풍황궁을 휩쓰는 불의 용이 되어 있었다. 물론 문밖을 나설 때 고붕에게 들켜 시작부터 고비를 맞았지만, 고붕을 설득해 긴 여행길의 동반자로 삼은 탓에 오는 길이 한결 편했다.

고봉은 도단하와 함께 긴 통나무를 어깨에 매보려고 낑낑 댔다. 그때 기분 나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며 통나무가 들어 올려졌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우린 외나무를 같이 들게 되었군. 뒤돌아 볼 필요도 없이 도단하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그는 은광일이었다.

6.14. 14장. 재회

황제 폐하 납시오!

총내관의 외침 속에 법기 갑옷을 두른 황제 군마염이 근정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채만한 몸집과 무거운 발걸음, 얼굴을 가린 투구 속에서 뿜어나오는 숨소리리는 병색이 짙은 환자이기보다는 철갑을 두르고 포효하는 거대한 맘모수 같았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도천풍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주군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기에 손 안의 방문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도천풍은 남소유가 풍제국의 황궁으로 온 얘기를 듣자마자 한걸음에 풍제국 수도 강류시로 달려왔다. 이미 후궁으로 들어온 남소유가 천명제의 날에 황후로 책봉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도천풍은 어떻게든 황궁으로 가 소유를 말려야 했다. 군마염과 남소유가 하늘의 도를 어기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철통 같은 제국의 황궁을 무슨 수로 들어간단 말인가? 고민하던 도천풍에게 이 방문은 구원과도 같았다. 황궁 비무연. 황궁에서 비무연을 개최하니 자웅을 겨룰 강호의 고수들을 초빙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무연 우승자는 황족을 경호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글귀를 본 도천풍의 눈이 빛났다.

6.15. 15장. 적의 적은 동지다.

군마혜는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로 이동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실려오는 은은한 흙과 풀의 냄새가 코의 기억을 깨웠다. 조장원의 안가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역시 자신을 비밀리에 불러낸 자는 승상 조승우였다.

"왜 풍제국의 공주가 반역 단체인 경천맹의 수장이 되려 하는지 궁금하더군요. 왜요? 놀랐습니까? 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알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이..."

군마혜는 이 직설적인 말에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승상이 협박이 아닌 거래를 원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돕는 이유가 충정이 아니라 조정의 실권이 진서연에게 완전히 넘어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을...

조승상은 경천맹의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고, 군마혜는 이 더러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자신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조승상의 검은 속내가 매우 불쾌했지만, 지금은 이것 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진서연의 위선을 온 천하에 밝히고 아바마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큰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이제 군마혜와 조승상은 동지였다. 언제든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적과 같은 동지.

6.16. 16장. 진상 손님?

기녀의 웃음 소리와 흥겨운 풍악이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예하랑은 구석진 탁자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초승달은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다그친 게 잘못이었어. 천신만고 끝에 조카 소연화를 찾았지만 구름 속으로 숨은 달처럼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예하랑은 연화가 서둘러 신공의 힘을 체득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놀기 좋아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조카는 힘든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연화는 사독한 마공의 고수에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예하랑은 자신이 지닌 강호의 정보력을 모두 동원해 찾은 행방을 찾았다. 단서는 바다 건너 동방대륙의 하오방으로부터 왔다. 기녀 복장을 한 여인 긴 흑발의 젊은 남자가 연화 또래의 여자를 데리고 강류시로 들어온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보통이 아닌 자들임은 확실하다. 아직 신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연화지만 그 정도 내력을 품은 몸을 제압했다는 건 뛰어난 고수임을 뜻했다. 필시 연화의 신공을 노린 사마외도들이렷다. 아니면... 예하랑은 더 최악의 사태를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기녀가 유일한 단서였다. 그 기녀는 남루한 주막이나 거리의 유곽에나 볼 수 있는 기녀는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예하랑이 강류시 최고의 기루인 이곳 풍월관에 숨어 들어온 이유였다.

6.17. 17장. 수상한 백일기도

그렇다면 일부러 탁기를 퍼트리라는 말씀입니까?
무녀 훤은 재차 확인했다. 흑무 대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훤과 동료 흑무들은 태사관 앞마당에 모여 흑무 대장 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풍제국의 국무로, 일명 흑무라 불렸다. 검은 무녀복을 입은 탓도 있지만 이곳의 무녀들은 사악한 주술과 영력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훤 그녀 또한 어릴 때 흑무에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처참한 주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태사 진서연이었다.

그녀는 빈민촌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매일마다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보기만 하면 초주검이 될 때까지 때렸다. 그녀는 맞을 때마다 눈을 감고 어둠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 내 몸이 내 몸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둠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또 맞고 있어? 저런 인간이 아비라니. 저건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야. 쓰레기.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아주 쉬워. 그냥 분노를 폭발시켜. 그래, 그러면 내가 나갈 수 있어. 넌 그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아비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진서연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들어왔다. 진서연은 그녀의 아비이자 어미가 되었고, 그녀는 삶의 의미를 태사의 말에서 찾았다. 그것이 태사님이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훤은 흑무장에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6.18. 18장. 뇌옥 폭동

유천은 힘찬 기상을 품은 기합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군마혜가 그녀의 호위 무사인 정하도와 함께 대련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보고를 위해 군마혜를 찾아왔지만 지금은 방해할 수 없는 상황이니, 유천은 잠시 기다리며 둘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정하도는 유천과 어린 시절에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만큼 비천한 출신이었다. 명문가의 후손도, 유명한 문파의 제자도 아닌 근본도 알 수 없는 고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궁 비무연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우승을 했다. 그리고 그 특혜로 원하는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상황에서 공주의 호위무사를 선택하여, 이후 군마혜의 그림자처럼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

기합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며 대련이 마무리 되었다. 뒤늦게 아는 척을 하는 군마혜를 보고 유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었다. 정하도와는 이미 한참 전에 눈으로 인사를 나눴으니, 다른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유천은 문득 정하도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묵묵히 한 여자만을 지키는 풍제일검이라... 국가를 수호하는 큰 방패가 되어 군마혜를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지만, 이 친구라면 인정할 수 있었다.

6.19. 19장. 천벌

이 무슨 소란인가?

진태평은 서재에서 나와 물었다. 담장 밖으로 요란한 함성과 칼들이 부딪히는 소리, 불타는 매캐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넘어 들어왔다. 판관 나으리, 대장군 군마염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진태평의 심복인 조승우가 고했다.

진태평은 소란 속에서도 강류시의 명판관다운 위엄을 잃지 않고 식솔에게 대피령을 내리고 부하들을 지휘했다.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딸이 어느새 다가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직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은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봤다. 별일 아니다. 곧 떠나야 하니 채비를 하거라. 딸은 아비의 바지 자락을 꼭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어미를 잃은 지도 얼마 안 되어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니 싫을 법도 하다.

진태평은 무릎을 굽히고 딸과 눈을 마주쳤다. 곧 돌아올 것이다. 잠시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뿐이야. 그는 평소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닌 서슬 퍼런 판관이었지만, 하나뿐인 딸 앞에서는 백청산의 만년설을 녹일 만큼 따스한 미소를 지우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일그러졌다. 뜨거운 것이 아래에서 치밀어 올랐다. 역류한 피가 입으로 쏟아졌다. 진태평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모든 부하들을 처치한 진서연이 피 묻은 칼을 그의 등에서 뽑고 있었다. 진태평은 힘겹게 딸아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딸의 얼굴은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아야, 도망쳐라... 어서...!

6.20. 20장. 필요 없는 그릇

진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홍문파 제자가 진기를 끌어올리자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것이다. 탁기? 게다가 이 기의 흐름은 설마... 진서연의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가 오래 전 천진권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무공을 펼쳤기 때문이다.

천진권의 수작으로 인해 그릇이 오염되어 버렸다. 오랜 기다림이 허사가 된 것이다. 분노한 진서연은 가차없이 그 그릇을 깨버렸다. 더 이상 마황의 그릇이 될 수 없는 몸이 된 홍문파의 제자는 이제 죽던 살던 관계없는 존재였으니까. 어쩌면 이런 상황을 내심 바래왔을지도 모른다. 역왕, 환귀, 무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천하사절의 후예가 자신의 손에 의해 폐인이 되는 것을...

사실 진서연이 미련을 두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소연화라는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소연화는 처음부터 마황을 위해 존재한 것 같은 완벽한 그릇이었다. 다만 이 그릇을 가져온 것이 유란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유란을 신뢰할 수 없어서 미리 내친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천명제가 코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새로운 그릇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진서연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6.21. 21장. 철가면

도천풍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설령 뇌옥에서 나갈 수 있다 해도 다시 남소유를 설득하는 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결국 주군을 직접 만날 수 밖에 없나? 하지만..." 도천풍은 이상한 갑옷을 입은 군마염을 떠올렸다. 군마염은 과거 누구보다 강인하고 용맹했던 대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갑옷을 입고 병을 치료하고 있다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을 때 벽을 통해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뇌옥 깊숙한 곳으로부터 전달되는 아주 작은 말소리였지만, 내공을 끌어올려 집중하니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10년 동안 매일 당하는 고문이 지겹지도 않소? 그냥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말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아니오!"

짜증 섞인 고문관의 외침 후,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고문을 당하는 자의 고통에 찬 신음이 이어졌다. 도천풍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문을 10년 동안이나 당하다니, 상상만 해도 지독한 일이었다.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길래?

"후후후... 나도 잘 모른다니까, 쿨럭!"

응?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도천풍이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귀에 익숙한, 그리운 울림을 지닌 목소리였다.

6.22. 22장. 팔부기재의 희생

생자필멸.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감마등의 말이 끝난 후 흐르던 무거운 정적 속에 태왕의 목소리가 담담히 흘렀다. 간묘월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고, 이오락은 나지막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른 팔부기재들도 감마등의 말을 이미 예견한 듯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팔부기재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현 무림 최고의 여덟 고수를 칭하는 말로, 이들은 각자의 문파와 정사를 대표해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들이 잠시 칼을 내려놓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무림공적 진서연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닥쳐올 마황의 재림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원래는 마황에 대적할 수 있는 네 명의 천하사절을 찾기 위해 모였다. 하지만, 검선과 무신은 오래 전 사라졌고, 환귀는 행방이 묘연하며, 역왕마저 유명을 달리하자 감마등은 이들에게 다음 점괘를 전했다. 천하사절이 세상에 없다면 이를 대신할 그릇을 찾고, 그 그릇의 완성을 돕는다. 그리고 그 일에는 이들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래도 예정된 날보다 일주일은 더 살지 몰라. 감마등 점괘는 늘 일주일씩 틀리잖아? 이오락의 농담에 다들 웃음을 슬며시 흘리더니 모두들 주변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감마등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동료의 모습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남기려는 듯이.

6.23. 23장. 도천풍의 회상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남설린은 밖으로 나섰다. 출산 후 아직 몸은 불편했지만 감옥 같은 황궁에서 나와 얻은 모처럼의 자유를 방구석에서만 보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군마염과 마주하는 시간을 더 만들기 위해서였다.

밤공기가 찹니다. 황후마마, 안으로 드시지요.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대장군 군마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의목소리에선 군신의 예를 다 할 뿐이라는 엄숙과 경직만이 묻어 있었다.

남설린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온 일을 기억해냈다. 절친인 상장군 군마천의 아들이라며, 오늘부터 같이 지낼 거라고 말했다. 그 동안 어떤상처를 입었는지 몰라도 소년은 말이 없었다. 남설린은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 동생임에도 그를 늘 챙겨주고 돌봤다. 소년도 소녀의 다정함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이내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어느덧 둘은 성인이 되었고 연모의 정이 싹 트기 시작했다. 청년이 된 소년은 말했다. 무관 시험을 통과하면 아버지께 혼인을 허락 받겠다고, 남설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그가 무관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을 때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남설린은 운국 황제의 황후로 간택해서 황궁으로 불려갔다.운명은 사랑을 군신의 관계로 만들었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운명을 거슬릴 순 없었다. 빌어먹을 운명을 저주하며 청년은 전장으로 달려가 칼을휘둘렀고, 남설린은 황궁에서 박제된 삶을 살았다.

남설린과 대장군이 된 소년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지만 그 사이엔 용맥으로도 다 다를 수 없는 세상의 끝 같은 거리감이 존재했다.

6.24. 24장. 백림사 습격

정하도는 오랜만에 계곡에 내려와 주변을 돌아봤다. 나지막이 들리는 불경 소리가 휘감는 산사, 현담대사의 가르침을 받아 유천과 함께 수련하던 수련굴, 새벽부터 나와 물을 긷던 옥빛의 계곡물. 스님들 품에 키워졌던 아기 때나, 무과 시험을 위해 강호에 수련을 떠나겠다며 십년 전 그때나, 백림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이 계곡에서 처음 본 공주의 모습은 솜씨 있는 황실 화원의 정밀화처럼 머리에 박혀 있었다.

떠들썩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지승인 현담과 녹림왕 소양상이 계곡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동이를 든 소양상은 덩치에 맞지 않게 궁시렁대며 현담 뒤를 따랐다. 그때 스님만 안 만났어도 그냥 산채 안에서 배나 두드리고 있었을 텐데! 내가 미쳤지, 왜 세상 밖에 나와서 이런 도망자 신세가 되었는지 원! 게다가 이런 허드렛일까지... 소양상의 하소연을 현담대사는 흐뭇한 미소로 대꾸하며 앞섰다.

정하도는 다가온 현담에게 합장을 하며 예를 갖췄다. 네가 데려온 시주 분은 곧 건강을 회복할 것이니... 염려 말고 네 일을 보거라. 표정이 밝아진 정하도는 지체 없이 군마혜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현담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실언을 한 적이 없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좋은 소식을 들어 다행이었다.

6.25. 25장. 비밀의 정원을 찾아서

백청산 위로 햇귀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동자승 하도는 하품을 쩌억하며 살얼음이 낀 계곡으로 털레털레 내려갔다. 아침 공양 시간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절 안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대체 누가 온다 길래 저렇게 설레발이지? 하도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물을 긷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첨벙! 하필이면 발을 디딘 바위가 살얼음판이었다. 하도는 백청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계곡물에 엉덩이를 깔고 넘어졌다. 몸 속에 들어온 한기는 없던 머리털까지 솟구치게 만들었다. 엉터리 현담 스님! 가르쳐준 보법 따윈 아무 짝도 쓸모없잖아! 콧물이 튀어나올 정도로 큰 재채기를 하며 하도는 투덜거렸다.

자, 내 손 잡아.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고개를 든 하도는 잠시 멍해졌다. 하얀 얼굴에 흑발을 곱게 늘어뜨린 한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아침해를 등지고 손을 내민 소녀의 모습은 자기 또래였음에도 수련굴의 천수관음상이 현계로 내려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소녀의 손은 따뜻했다. 가슴에서 불덩이가 콩닥콩닥 뛰면서 얼음장 같던 몸이 갑자기 따스해졌다.

공주마마, 여기 계셨군요!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제국의 노장수가 내관들과 함께 헐레벌떡 뛰어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곧 황후마마의 위령제가 시작되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소녀는 노장수의 호위를 받으며 백림사 쪽으로 돌아섰다. 발길을 떼려던 찰나 소녀는 하도에게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그걸로 닦아. 감기 들겠다. 꿈이었을까. 하도는 추운 줄도 모르고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벌겋게 언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펼쳤다. 손수건에는 '혜'라는 글씨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6.26. 26장. 작전 상 후퇴

"황제 폐하, 곧 반역의 무리들이 들이 닥칠 것입니다. 옥체보전을 위해 이 자리에서 피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목숨을 바쳐 길을 열겠습니다!"

군마염은 풍운전쟁 후 진서연의 제안에 따라 천명제를 지내기로 했다. 반역을 통해 황제가 되었다는 세상의 평가를 뒤집고, 진짜 황제로 인정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른 뒤 우연한 기회에 진서연의 사악한 계획을 알게 되었고, 황급히 대비를 시작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지금과 같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군마염은 도주를 독촉하는 호위무사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과오를 뉘우쳤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욕심 탓이었다.

군마염은 품 안에서 옥새를 꺼냈다. 이제 와서 나 혼자 도망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니 내 마지막 명령을 들어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옥새를 진서연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야 한다. 그래야만 장차 진서연의 악행을 견제하고 내 딸을 살릴 수 있을테니... 옥새를 받은 한 무리의 호위무사들은 군마염의 단호한 명령에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났다. 군마염은 옆에 서 있는 백무기에게 자신의 무구를 건네줬다. 백무기의 임무는 호위무사들이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적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결국 둘도 없는 친우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구려.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 그대가 나의 무구를 보관해주겠소?

마지막 인사를 한 백무기와 호위무사들이 밖으로 달려 나간 뒤, 용맹한 외침과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모든 일이 다 끝난 듯 조용해졌고, 군마염은 정적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멀리 진서연과 함께 이상한 갑옷을 입은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6.27. 27장. 얼어붙은 땅

인사하거라, 내 아들 단하다.

고붕은 엉거주춤 쭈뼛쭈뼛 도천풍의 뒤에서 나와 꾸벅 인사했다. 고개를 들고 자기 앞에 선 아이를 처다 본 고붕은 그만 넋을 잃었다. 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큰 눈동자, 윤기가 흐르는 흑발과 가지런한 입, 총명함과 귀티가 흐르는 자태, 늘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다 이렇게 눈 앞에서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단하의 모습은 용가만 소설에 나오는 나오는 소년 영웅이 책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았다.

반면 고붕은 거무튀튀한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뭉개진 주먹코 주변엔 여드름 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했으며, 옷은 언제 빨았는지 때국물이 줄줄 흐르고, 신발은 양쪽 모두 발가락 두어 개가 나온 게 기본이며, 몸에서는 생선 비린내를 넘어선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추화연과 함께 양대 왕따로 마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고붕은 다시 엉거주춤 쭈뼛쭈뼛 도천풍의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 이 아인 누구예요? 도천풍은 얼마 전 배를 타고 나갔다가 충각단의 습격에 목숨을 잃은 고씨의 아들이라고 했다. 달리 의지할 데도 없는데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경단원이 되겠다고 졸라대서 도천풍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호자 노릇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붕은 단하가 자신의 꼬질꼬질한 손을 덥썩잡아 당긴 것에 깜짝 놀랐다. 야, 잘됐다.너 내 부하해라! 고붕은 단하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집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자기 손을 잡은 단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이 소년과 함께라면 소설 속 영웅들처럼 신나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6.28. 28장. 유지를 받드는 자

진소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주위는 온통 얼음 투성이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거대한 얼음 속에 파묻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굴을 타고 울어대는 바람 소리만 맴돌았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정신 없이 북쪽으로 도망쳤던 일은 기억이 나는데... 진소아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둘러보니 주변에 다른 사람들 몇 명이 냉동된 채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죽어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려운 마음에 울음이 터졌지만 눈물 마저 차가운 공기에 얼어 붙어 흐느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 때 진소아 눈 앞에 한 남자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꺄악! 진소아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쉿! 구해주러 온 거야. 다른 설인들이 들을 수도 있으니 조용히..."

하지만 비명 소리는 이미 동굴 안에 퍼져나갔고, 곧 수많은 설인들이 몰려왔다. 남자는 귀찮아졌다며 궁시렁 댔지만,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모든 설인들은 그 불꽃에 휘말려 산산조각이 났다.

진소아는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뒤따라 갔다. 얼마나 걸었을까?동굴 저편에서 밝은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의 힘이 빠진 진소아는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가 진소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진소아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세요? 너무나 궁금했지만 생존이라는 본능에 막혀 지금까지 물어보지 못했던 말, 그 질문에 남자가 답했다.

"내 이름은 이오락. 그냥 편하게 오라버니라고 불러."

6.29. 29장. 겨울잠

"젠장! 간신들이 넘쳐나는 더러운 세상, 될 대로 돼라!"

좌장군 벽개수의 손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상징인 무기가 아닌 술병이 들려있었다. 벌컥벌컥- 흠뻑 취하고 싶었지만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짜증이 난 벽개수는 눈밭에 벌렁 누워 버렸다.

벽개수는 원래 국가에 몸을 바쳐 충성하는 성실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병에 걸린 후 간신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불 같은 성격 때문에 그들의 눈 밖에 나게 된 벽개수는 결국 변방으로 좌천 되었다. 벽개수는 어차피 간신들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으니 도리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곰과 같은 덩치에 맞게 잠시 겨울잠을 자면서 때를 기다리자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할 일 없이 설원에 누워 술 마시는 일상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훌쩍 떠나서 강호를 주유해볼까? 그런 생각 마저 들었다.

그때 한 무림인이 벽개수를 찾아왔다. 자신을 홍문파의 제자라 소개한 그는 현재 강류시에 있는 황제는 가짜이며, 이제 진짜 황제가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또 진짜 황제의 복권을 위해서는 북방군단의 힘이 필요하다니? 허허... 벽개수는 몸을 일으키면서 이 무엄한 놈의 머리를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봤을 때 벽개수는 깨달았다.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드디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가 된 것이다.

6.30. 30장. 검의 무덤

그럼 뒤를 부탁하네...

백청파 검술 사범 건야행을 지나친 백무기는 비틀거리며 비월봉으로 향했다. 그가 흘린 피는 넓은 눈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건야행의 시선에 유령처럼 눈보라를 뚫고 걸어 오는 진서연이 보였다. 부모와 같은 스승을 죽이고 달아난 패륜아가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스승의 거처로 다시 가겠다는 거냐? 그 신성한 곳에 더러운 너의 발을 한 발짝도 들이게 놔둘 성 싶으냐? 뭣들 하느냐! 건야행의 호령에 백청파의 제자들은 진서연의 주변을 둘러싸며 칼날을 번뜩였다.

검선의 처소가 있는 비월봉은 백청파 본산을 지나쳐야 오갈 수 있는 곳이다. 백청파의 장문인 백무기는 수련여행 중 검선을 만나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비월봉으로 가는 용맥 아래 움막을 지었다고 한다. 물론 검선은 어떤 가르침도 주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소리처럼 조언을 해주신 모양이다. 그것이 백청파의 시작이었다.

진서연은 백청파의 칼날들이 모두 자신을 겨눈 가운데에서도 조용하고 담담했다. 건마는 어릴 때부터 줄곧 진서연을 지켜봤다. 검선에 품에 안기어 비월봉으로 간 거적때기 아이에서 검선의 제자가 되어 강류시에 심부름을 나서는 소녀가 될 때까지. 밝고 환한 그 소녀가 스승을 죽이고 귀천검을 가지고 달아난 천인공노의 악행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건마는 나지막이 건야행에게 말했다. 아버님, 서연이 그럴 리 없습니다. 이건 필시 흑막이 있을 겁니다. 서연의 말도 들어보심이... 말이 끝나기 전에 건야행의 일격이 건마의 복부를 강타했다. 미련한 놈! 너도 저 사악한 마귀에게 혼을 빼앗겼구나! 저자는 그런 정을 이용해 사부를 살해한 걸 모르느냐! 건마는 급소를 맞은 탓에 꼬꾸라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 백청파의 장문인을 해친 자다! 죽여라!! 건야행의 공격을 시작으로 문파원들은 일제히 진서연에게 달려들었다. 건마는 진서연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물 스물 피어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6.31. 31장. 그 날 이후

방 안엔 평소와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로 비월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진서연은 진태평 판관 집에서 매질 당한 고통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사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난 내일 조정에 출두할 것이다. 관군에 무력을 행사하고 국법을 어겼으니 죄값을 받아야 할 터.
- 사부님, 그건 저를 구하기 위해서...!
- 게다가 난 선계의 맹약을 어겼다. 속세의 인간에게 해악을 끼쳤다. 그리고...사사로운 정을 품었다.

진서연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천하사절은 속세의 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맹약을 깬다면 더 이상 천하사절일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진서연은 눈물을 흘렸다.
- 슬퍼하지 말거라. 이미 널 구하기 위해 칼을 뽑았을 때 각오한 일이다. 이 자리 에서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뒤돌아 앉거라.
- 사부님, 설마...?
- 그 동안 나의 내력으로 너의 탁기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나의 신공을 모두 전하면 네 몸의탁기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부님이 위험합니다!
- 그저 필부로 돌아갈 뿐이다. 널 마물이 되게 둘 순 없다. 넌 나의 제자이자...자식이다. 어서 뒤돌아 앉거라.

진서연은 눈물을 흘리며 사부에게 등을 내주었다.
- 울음을 참고, 호흡을 가다듬어라, 몸을 움직이거나 정신이 흩어지면 둘 다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으니.

비월의 두 손이 진서연의 등에 닿았다. 진서연은 따스한 기운이 몸 안으로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신공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6.32. 32장. 황제의 귀환

전부 꿈이었을까. 무신 귀천검을 노리고 모두를 배신한 것도, 천하사절이 사부님을 죽인 것도, 어둠이 자신을 휘감아 마물로 변하게 한 것도, 역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도, 심연 속에 떨어졌을 때 마황이 속삭인 것도...

진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차가운 어둠의 폭풍이 주위에 휘몰아쳤다.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하지만 추위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 안엔 알 수 없는 힘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의 끝에 선 듯 고독하고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주변은 모두 파멸과 암흑으로 뒤덮였지만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직감했다. 건족의 고향, 서락이었다.

사부를 죽인 천하사절에 대한 복수와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썩어 빠진 세상의 파멸. 진서연은 오직 그것을 위해 마황의 대리인으로 부활했다.

6.33. 33장. 폭풍전야

무성은 이른 아침부터 홍문의 제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물론 다른 동문들도 부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제수 주문을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살펴 보고, 없는 물건은 상인들에게 주문을 하고, 조금이라도 경비를 덜어보고자 흥정을 하는 등의 일을 며칠 전부터 한 무성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바빴다.

특히나 올해 더 신경이 가는 이유는 늦깎이로 들어온 막내가 처음으로 홍문의 제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성 자신도 처음 이 제를 올릴 때 자신이 드디어 홍문파에 들어왔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막내도 이 제를 올리게 되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거라 생각하니 제 준비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제사상을 차리는 동안 무성은 그 동안 무일봉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유가촌에서 도망친 후 거지 행색을 하며 돌다니다가 쓰러진 것을 홍석근 사부가 데리고 온 일, 홍석근 사부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홍문파의 장문이라는 걸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자로 받아 달라고 사정한 일, 삼 년 간 무일봉에서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떼고, 허드레일을 하며 영묵 사형의 무공 수련을 곁눈질한 일, 마침내 정식 제자로 받아 들여져 시험의 동굴에서 영묵 사형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맞은 일. 그때는 영묵 사형과 자신밖에 없었는데 어느덧 무일봉의 제자는 여섯 식구로 불어났다.

앞으로 막내가 정식 제자가 되고, 막내 밑으로도 또 다른 제자가 들어오겠지. 그리고 그 밑으로 또 막내가 들어오고, 또 그 밑으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동문들과 함께 무일봉에서 계속 수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다. 하지만 그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위해 언젠간 이 무일봉을 떠날 날이 올 것이다. 제사상을 모두 차린 후 무성은 일어났다. 아침해가 제사상 위에 기다란 무성의 그림자를 던져 놓았다.

6.34. 34장. 전우

결국 천진권을 찾아내지 못한 채 천명제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홍석근과 익산운의 몫을 합친 것 보다 훨씬 큰 원한을 마지막까지 풀지 못하다니... 진서연은 부글거리는 분노로 속이 쓰렸지만, 이미 천하사절이 오랫동안 지켜온 이 세상의 파멸. 그 천년의 희생을 무위로 만드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라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진서연이 이런 이성적인 생각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때, 홍문파 마지막 제자에게 심어 둔 묵화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폐인의 몸으로 뇌옥을 탈출하는 등 강한 의지를 보여 줬지만, 그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유폐시킨 유란을 대신해서 보낸 거거붕의 보고는 아직 없었지만,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진서연은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유력한 마황의 그릇 후보답게 이제까지 자신에게 대항한 수많은 적 들 중 가장 인정할만한 인물이었다. 왠지 제어하기 힘든 큰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당장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천진권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냉정을 되찾은 진서연은 마황강림을 통한 세상에 대한 복수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마황강림이 이루어진다면 천진권이 어디에 숨어있던지 다른 모든 인간들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그저 순서의 문제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6.35. 35장. 흑룡의 천명제

유란의 첫 번째 보고서.

진서연님, 제가 이제까지 조사 및 연구한 흑룡의 천명제에 대해 보고드립니다. 이미 알고 계신 사항도 많겠지만 보고 및 확인을 위해 정리해봤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나류국 때부터 전해온 정식 천명제는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월식의 시기에 맞춰 천명제를 지낸다.
-천인이 선계의 주술을 통해 귀천검으로 선계의 문을 연다.
-천인이 황제로 인정받는 것으로 천명제가 마무리 되어 선계의 문이 닫힌다.

하지만 이 '백룡의 천명제'를 변형한 '흑룡의 천명제'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식의 시기에 맞춰 천명제를 지낸다.
-천인을 제물로 하여, 마황의 대리인이 마계의 주술을 통해 귀천검으로 마계의 문을 연다.
-마황강림! 마계의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은 귀천검 뿐이다.

일식의 시기가 멀지 않았으니, 천명지위제단의 건축을 서둘러야 하며, 하루 빨리 천인과 귀천검을 확보해야 합니다. 물론 마황의 그릇도 찾아내야 하고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현계에서 마황님의 완전한 능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적합한 그릇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절대 일부러 정보를 누락한 것은 아니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6.36. 36장. 권토중래

죄인은 들어라! 우장군 거거붕은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관직을 파하고, 최고의 형벌인 종신고문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

운국 조정에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꾀한 대역죄인 군마염에게 동조한 점!
군마염이 황후마마와 공주마마를 납치한 사건을 주도한 점!
죄를 뉘우치긴커녕 이 모든 것이 악귀비마마의 음모라는 망발 및 무고를 한 점!

그 외에도 열거하기 힘든 죄목들이 있으나 위의 잘못만으로도 삼족을 멸할 대역죄에 해당한다. 황명에 따라 즉시 형을 집행하노니, 죄인 거거붕은 명을 받들라!

거거붕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주위의 판관과 감찰관들은 당황했다. 판관은 그의 웃음을 듣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듯 두려웠다. 그는 서둘러 거거붕을 감옥으로 옮기라 명했다. 거거붕은 끌려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씁쓸함과 모함에 대한 억울함, 그리고 군마염 형님은 물론 황후마마와 공주님이 안전히 피신했구나 하는 안도감 등이 섞인 듯한 광소였다. 모두 거거붕의 웃음은 그것이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영원한 고통이 지속되는 감옥 깊은 곳에서도 계속 울려 퍼졌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 사람들이 거거붕을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한 서린 웃음도 점차 잦아들 무렵, 거거붕의 눈 앞에 한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바로 진서연이었다.

6.37. 37장. 최종결전

진서연 묵화의 상처를 떨쳐내고 살아 돌아온 홍문파 마지막 제자를 본 순간, 자신이 성급한 판단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패배할 것을 예감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났다. 기나긴 복수의 여정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진서연은 모든 것을 태우고 재만 남은 가슴 속의 영혼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마황강림에 성공했으니, 미련은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픔도, 분노도,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 이대로 바람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는 복수를 택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복수를 위해 어둠의 밑바닥까지 갔다 온 그가 원수를 눈앞에 두고 칼을 거둔 이유는 복수의 끝이 이렇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을까? 홍석근이 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길래... 문뜩 그녀는 비월 사부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지금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죽은 혼백이나마 사부의 곁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영혼은 어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진서연은 희미한 시야로 마계의 문이 닫히며 거센 폭풍을 쏟아 내는 것을 보았다. 설마... 성공한 것인가? 하하... 진서연은 그와 동시에 어둠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 때 어둠 속 저편에서 빛나는 작은 불빛을 보았다. 설마 이것은... 비월봉 처소의 불빛? 점점 더 커지는 빛을 등지고 걸어 나온 한 인영이 그녀를 살포시 미소 짓게 했다. 비월이 말했다. 왔느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아.

6.38. 38장. 작별

사부님, 저 막내입니다.

가신 곳은 평안하신지요. 영묵 대사형과 길홍 사형, 화중 사형 그리고 진영 사저, 모두 함께 잘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받았지만 무력한 탓에 지킬 수 없었던 일, 복수에 눈이 어두워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신공을 탐했던 일, 익산운 어르신의 죽음, 많은 이들의 희생, 그리고 복수심에 사로잡혀 홍문의 길을 저버리고 마도로 빠졌던 일...

이 모든 일이 저를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말씀하셨지만 그저 부끄럽고 죄스러우며 후회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사부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봐주셨지요. 그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홍문신공의 깊고 넓은 오의를 깨달아 끝없는 정진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고,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홍문의 뜻을 세상에 널리 펼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부님, 지켜봐 주십시오. 막내 올림.

7. 간막. 시작되는 음모

7.1. 끝나지 않은 위협

마황강림은 결국 실패했군...

빛도 소리도 없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짐승과 인간의 목소리가 뒤엉켜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마계의 문이 열렸지만 다행입니다. 과연 다행일까요? 뭐, 우리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 아니다. 마계와는 소통할 수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능성은 열어두세나. 유란은 대가를 치르고 있어요. 대가가 아니라 희생이겠지. 교주께서 이미 대신할 자를 정하셨네. 아직도 우릴 믿지 못하시는군. 그럴 수 밖에요. 이제 완전한 힘을 되찾았으니 시간이 없소. 얼마나 더 걸릴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은 늘 우리 편이니까요...

흑룡도래 만민합일. 목소리는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았다.

8. 5막. 사라진 아이들

8.1. 1장. 유명세

야심한 밤의 정적 소리를 깨는건 도천풍의 한숨 소리였다. 정하도는 순찰하던 발길을 도천풍의 처소로 옮겼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서자 탁자에 고개를 묻고 절망에 빠진 도천풍의 모습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 수라간에서 내온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도 대인, 잠시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벌써 한 달째 한숨도 안 주무시고 계십니다.

도천풍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보였다. 풍황궁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였다.

힘을 차리셔야 또 찾으러 나가실 거 아닙니까.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자리에 누우십시오.

정하도는 도천풍의 몸을 일으켰다. 도천풍이 갑자기 휘청거리자 정하도는 서둘러 부여잡았다. 몸은 야위었고, 게다가 불덩이였다.

안 되네. 이럴 시간이 없어. 어서 소유를... 공주마마를...

정하도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도천풍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도 대인의 심정, 제가 잘 압니다. 우린 둘 다 공주마마를 지키는 호위대장 아닙니까. 몸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제서야 도천풍은 엷은 미소를 띠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8.2. 2장. 불청객

아무도 없어요~? 번양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적막감만 감돌 뿐이었다. 오빠, 가지마~ 아무도 없나봐~ 가만 좀 있어 봐. 여기가 분명 그 홍문파 영웅이 있는 곳이라고 했단 말이야.

번양은 번아와 함께 무일봉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작고 초라한 봉우리가 마황을 물리친 절세고수가 탄생한 곳이라는 것이 미심쩍었다.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무공을 배웠길래 그리 강해진 걸까?

번양은 강해지고 싶었다. 자신이 강하지 못해 부모님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험한 세상 하나뿐인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독초거사는 경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도망만 잘 치면 돼. 괜히 싸우려 들다가 험한 꼴만 당한다구. 홀홀홀~

8.3. 3장. 사부님 오 나의 사부님

번양이 계속 조르는 것도 한계에 다다를 즈음, 마황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영웅의 문파가 대나무 마을 해안 근방의 무일봉에 있다는 것도. 번양은 독초거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언제나처럼 번아는 오빠가 가는 곳을 따라왔다.

계단 위를 올라가니 깔끔하게 정돈되고 기품이 어린 숙소가 나왔다. 한 쪽 벽면엔 낡은 책들이 가득 꽂힌 책장이 들어왔다. 혹시 여기에 그 무공 비급이 있을지도 몰라.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제목을 발견했다. '홍문신공 비전서'. 번양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 서책을 서서히 폈다.

계십니까? 여기가 홍문파가 맞습니까? 번양은 깜짝 놀라 책을 덮고 얼른 품에 감췄다. 밖을 나가보니 계단 아래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8.4. 4장. 강호의 납치 사건

나머지는 어디 있나? 술잔을 비운 태광은 탁자 건너편의 남궁선재에게 물었다. 그들은 건원성도로 갔소이다. 그곳에서도 사건이 비일비재 하더군.

남궁선재는 술잔 너머로 잠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남방의 외딴 촌구석 섬에 있는 남도파의 태광,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한다는 쓰레기 살수 집단인 흑사문의 은악, 북방의 미천한 곤족 덩치들이 모여 있는 한곤파의 호월령. 어쩌다 이런 사파의 무리가 강호의 명문인 도현문과 함께 강호의 팔대문파라 칭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게다가 마치 자기가 이 모임의 수장이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태광은 특히나 눈엣가시였다. 그의 아버지인 태왕이 죽고 나자 어린 나이에 장문의 자리에 오른 것도 배가 아팠다. 어차피 이인자 주제에...

남궁선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인자이긴 자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손에 든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8.5. 5장. 드러난 진범

흑사문 은악이 흑사문 장문에게 올리는 보고서

팔대문파원들과 접촉 완료. 다들 위기에 처한 문파를 일으키고,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에 차 있음. 이번 강호의 납치 사건을 해결해서 풍 황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강호에 자신들의 명성을 떨칠 기회로 삼은 것으로 보임.

풍제국 경호대장 정하도를 만나 납치 사건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들었음. 아무래도 이 사건은 흑룡교와 연관이 있어 보임. 음지에 있던 흑룡교들이 최근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하고 있다는 그간의 정보가 신빙성을 얻고 있음. 이미 녹림도, 사마교 등의 상층부는 흑룡교 측으로 넘어갔다는 정황이 포착됨.

풍제국은 신임 황제인 군마혜 등극 후 혼란스러운 상황임. 어린 여황제는 아직 제국을 통치할 그릇으로는 부족해 보임. 풍제국과 친분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태도를 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음. 물증은 없으나 풍제국 내부에도 흑룡교 세력이 침투해 있는 것으로 추정됨.

예상한 대로 홍문파 무인이 합류했음. 마황을 봉인한 무림 고수치고는 꽤나 겸손한 편. 아직까진 팔대문파에 협조적이며 강호에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은 없었음.

계속 지켜보겠음.

8.6. 6장. 되살아난 귀환

흑사문 장문이 은악에게 보내는 답신

홍문파 무인을 계속 주시할 것. 어둠은 결코 그 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함. 만약 그 자가 어둠과 손을 잡는다면 무림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것임. 혹시나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자를 제거할 것.

추신. 그 자의 과거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음. 홍문파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행적이 전무함. 지금의 모습은 외형을 바꾼 것일 수도 있음. 정보가 들어오는대로 공유하겠음.

8.7. 7장. 마성의 피리소리

군마혜는 황제로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대신들과 제국군 중에서는 이미 군마혜 반대파가 형성되었고 백성들도 황제로서 자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여인이라는 점이다. 운국 대대로 내려오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아직 뿌리 내려 있어서 사람들은 황제가 여인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사상 여인이 왕이 된 경우는 없지 않다. 서천국은 대대로 여왕이 다스렸다. 하지만 결국 나류국에게 정복당하고 지금은 지옥의 땅인 서락으로 변모했기에 좋은 선례로 남기 힘들었다. 게다가 운국이 저리 국운이 기우는 것도 악태후가 설치기 때문이라며 여인이 나서면 나라꼴이 엉망이 된다는 걸 비꼬는 이도 있었다.

둘째는 천명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공격은 군마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군마염은 군부의 지지를 받아 적극적으로 황제로 추대되었기에 아무도 그의 정당성을 비판하지 않았다. 천명을 받지 못했다고 비난하던 운국 추종자들과 국무들은 모두 숙청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천명제를 받지 못했다는 비난은 황제의 신임을 받은 진서연 태사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풍제국 조정에는 아직도 진서연의 후광 아래 있던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군마혜 황제가 등극한 후 위태로움을 느꼈다. 군마혜는 보복성 인사나 처분은 없다고 했지만. 이들은 언제 내쳐질까 두려웠다. 이들이 반대파의 주 세력이었다.

세째는 지금 중원에서 벌어지는 불길한 일들이다. 군마혜가 황제로 등극한 뒤 대륙 곳곳에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다. 탁기가 범람하고, 마물과 악한은 더욱 날뛰며, 살육과 범죄는 끊이질 않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반대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인이, 그리고 천명을 받지 않은 자가 황제가 되었기에 하늘이 노해 벌을 내린 것이라고 백성들도 수근거렸다.

8.8. 8장. 아이들을 찾아서

이름이 류라 했느냐?

정하도에 물음에 소년은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문파 대협이 구출해온 아이들은 신상명세를 파악한 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신원이 불분명한 이 소년만이 혼자 궁궐에 남아 있었다. 승상부 관원은 아무리 물어봐도 이름 외에는 답을 얻지 못 했다고 한다. 풍제국 명부를 모두 뒤졌지만 류라는 이 또래의 아이는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무엄하다! 이 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어서 일어나 예를 갖추지 못 하겠느... 정하도는 됐다며 관원의 말을 멈췄다. 소년은 여전히 구석에서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명부에도 없는 걸 보면 천민 출신의 고아이거나, 아니면 운국 쪽에서 넘어온 불법 난민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관노로 보내심이...

됐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정하도는 관원을 물리고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풍운전쟁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떠돌던 자신의 모습이 소년에게 겹쳐 떠올랐다. 그때 마침 백담사의 현담 스님이 자신을 거두워 주지 않으셨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도 결국 관군에 붙잡혀 관노가 되지 않았을까?

정하도는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높이를 같이 했다. 소년은 여전히 경계와 두려움의 눈빛을 띄고 있었다. 정하도는 미소를 띄우며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에게 절밥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8.9. 9장. 지옥에서 돌아온 자

말씀하신 대로 아이들은 잘 모아두었습니다.

귀환은 부채를 팔랑거리며 흥겨워 하고 있는 주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알렸다. 주리아는 귀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춤사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주리아 님. 왜 하필 아이들입니까? 고강한 무공 실력이 있는 자들을 데려 오는게 훨씬 더 나을 텐데 말입니다.

주리아는 여전히 춤을 멈추지 않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 세상에 찌든 어른의 몸둥아리 따윈 필요없어. 그런 시궁창 같은 곳에 묵화를 키울 수는 없잖아?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백의 땅이야말로 묵화가 피어나기 적격이란 말씀~ 게다가 아이들의 마음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어둠을 쭉쭉 빨아들인다구. 진서연을 보면 알잖아?

그, 그렇군요. 정말 탁월한 식견이십니다! 귀환은 마족의 생각이란 정말 다르구나란 걸 느꼈다. 아무런 마음의 가책도 없는 순수한 악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강한 것이다. 나도 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라고 귀환은 생각했다.

8.10. 10장. 뜻밖의 부탁

도현문 장문인 아버지는 아들인 남궁선재를 팔부기재로 천거하지 않고, 근본도 모르는 주워다 기른 곤명을 문파의 대표로 택했다. 그때는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뒤늦게 그 팔부기재라는 게 홍문파 마지막 제자에게 바칠 제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나름대로 대를 이어야 할 아들에 대한 배려였던 것이다.

곤명이 사라지자 팔부기재의 자리는 자연히 자신에게 넘어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강호와 문파의 생각은 달랐다. 나머지는 결국 이인자들이라는 것이다. 문파를 재건할 자질도, 팔부기재라는 이름을 잇기도 부족하다고 모두 생각했다. 증명을 해야 했다. 여기 모인 자들은 자신들이 문파의 일인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강호에 증명을 할 수 있는 과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요즘 중원에 떠들썩한 아이들 납치 사건을 해결하고자 나선 것이다. 게다가 황권이 불안정한 군마혜 황제를 도와서 풍제국과 신임을 돈독히 하려는 정치적인 실리까지 취할 작정이었다.

잠자코 있던 흑사문의 은악이 입을 열었다. 놀랄 만한 소식이 있소만... 우리 팔대문파를 멸문의 위기에 빠뜨린 그 자 말입니다... 옆에 앉은 호월령이 신경질적으로 술병째 들이킨 후 말했다. 그 년 얘기는 하지 말지? 술맛 떨어지게시리.

그 자가 살아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들 기울이던 술잔을 멈추고 은악을 바라보았다. 다들 문파의 원수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격분한 모양이다. 그보다 남궁선재는 감정을 누르고 머리를 굴렸다. 강호의 공적, 진서연을 처치한다면 납치사건 해결보다 더 큰 공이다! 강호에 이름을 오롯이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남궁선재는 스며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멈췄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8.11. 11장. 외롭지 않은 무일봉

도천풍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에요. 서연이!

서연이가 무일봉에 온 지 벌써 한 달이나 됐대요. 서연이는 걱정마세요. 여기는 정말 정말 좋아요. 사부님도 잘 해주시고, 먹을 것도 많고 친구도 많구요! 친친 오빠, 류 오빠, 번양, 번아, 사부님이랑 저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이 홍문파 식구예요. 서연이가 제일 막내예요~

친친 오빠는 착하고 되게 열심히 하는데 자꾸 실수해서 사부님한테 야단 맞아요, 그런데 류 오빠는 사부님한테 매일 칭찬 받아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대요. 정말 멋진 오빤데... 너무 말을 잘 안해서 친해지기가 어려워요.

번양은 맨날 땡땡이를 쳐요. 조회 시간도 빠지고. 수련할 때도 사라져요. 그런데 밥 시간에는 항상 나타나요. 덩달아 번아까지 매번 땡땡이에요. 번아는 착한 아이 같은데 아무래도 번양이 버려놓은 거 같아요.

사부님은 아직 제가 어리다고 무공은 안 가르쳐주세요. 나도 빨리 무공을 배우고 싶은데~ 많이 먹고 어서 자라서 빨리 사부님처럼 멋진 무인이 될래요. 나중에 서연이 무공하는 거 할아버지한테 꼭 보여 드릴게요.

할아버지, 예전처럼 밥도 잘 안드시고, 잠도 잘 안주무시고 소유라는 언니 찾으러 다시니는 건 아니죠? 할아버지 아프면 안 돼요~ 꼭 밥 잘 챙겨 드세요. 잠도 잘 주무시구요. 그럼 또 편지 드릴게요!

무일봉에서 서연이가 드림.

9. 6막. 흑룡의 그림자

9.1. 1장. 희망의 조각

흑귀는 야음을 타 상어항에 접근했다. 충각단 동해함대에 새로 부임한 함대장과는 승선에 대한 거래를 오전에 미리 끝내놓았다.

이런 시기에 서방대륙을 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니...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기나 하나? 서락이라구, 서락. 지옥의 땅이란 말이야. 검게 그을린 근육질의 피부를 지닌 중년의 함대장은 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남루한 여행객 차림새의 흑귀를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흑귀는 말없이 품에서 은자가 가득한 주머니를 탁자에 던졌다. 함대장은 눈이 반짝이더니 주머니의 묵직함을 확인하고 실룩거렸다. 그래도 서락까지는 안 갈 거네. 근방에 도착하면 배를 따로 내어 주지. 출항은 내일 새벽이니 짐을 챙겨서 오늘밤까지 오게나. 안 와도 우린 출발할 거니 그리 알게. 해무진호에 승선하는 걸 환영하네.

흑귀는 배에 오르기 전 물 쪽을 바라보았다. 달무리가 진 달빛 아래 백청산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피비린내 나는 과거와 안녕을 고하고 속죄의 마음으로 살리라. 세신교의 발상지인 서방대륙으로 가서 그는 세신교에 귀의할 생각이었다. 서방의 땅은 탁기로 인해 지옥으로 변했다 들었지만, 흑귀에게 그런 곳은 속죄의 삶을 살 수 있는 적지락 느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흑귀는 예상을 한 터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배의 주변에 흑룡교의 살귀들과 신임 법왕이 된 진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교주와는 이미 얘기가 끝났네. 물러 가게 흑귀는 경계를 하면서 움직임을 주시했다. 진천은 마공의 기운을 개방하며 입을 열었다. 교주는 죽었네. 이제 내가 교주네...

9.2. 2장. 새로운 시작

미령 누나, 안녕하세요. 저 친친이에요. 한 동안 편지를 못 드렸죠? 저는 여기 무일봉에서 건강히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누나도 별 일 없죠?

벌써 여기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네요. 제가 대협의 제자가 되다니, 정말 꿈이 아닌가 싶어요. 대협, 아니 사부님은 정말 강해요. 듣자 하니 사부님이 마황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무림의 영웅이시라면서요? 이렇게 훌륭한 분 밑에서 무공을 배울 수 있다니~ 저희 동문들도 참 저한테 잘해줘요. 아, 그러고 보니 제 동문들 이야기는 한번도 안 썼네요.

저한테는 네 명의 동문이 있어요. 일단 저랑 동갑인 류가 있어요. 류는 정말 열심히 해요. 그리고 우리들 중에 제일 강해요. 사부님도 늘 칭찬이에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나? 일찌감치 사부님이 수제자로 낙점했더라고요. 저도 노력은 하는데... 사부님은 전 그냥 노력하는 모습이 좋대요. 쩝...

그리고 번양과 번아라는 남매가 있어요. 둘은 맨날 붙어 다니면서 말썽만 피워요. 사부님이 가르쳐도 하는 둥 마는 둥, 틈만 나면 어디에 숨어서 땡땡이를 피워요. 그런데 밥 때만 되면 귀신 같이 나타나요.

마지막으로 서연이! 우리 동문 중에 가장 막내인데 너무 너무 귀여워요! 제 소원이 여동생이 있는 거였는데, 서연이가 동생처럼 따라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런데 번양한테 들으니 이렇게 귀여운 서연이를 팔대문파의 강호인들이 죽이려고 했다 하더라구요? 세상에, 이 작고 사랑스런 아이를 왜 죽이려고 했는지! 강호인들 중에서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곧 사부님이 오실 시간이라 이만 줄일게요. 늘 강호를 지키느라 바쁜 우리 사부님~ 저도 언젠가 사부님과 함께 강호로 나가 협과 의를 펼치는 멋진 영웅이 되겠죠? 하하! 기대하세요, 미령 누나! 친친 올림.

9.3. 3장. 아픈 서연

류 오빠, 피! 서연이가 다리 춤을 붙잡고 수건을 건네 주어서야 류는 휘두르던 칼을 멈췄다. 손에서 물집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류는 무일봉에서 누구보다 수련에 매진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미친 듯이 익히고 반복하고 연마했다. 무공을 수련할 때면 잡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자신을 키워 주시던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풍제국으로 건너가 거지처럼 강류시를 떠돌던 과거도,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매를 맞던 기억도,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때 없어 하수구를 집 삼아 지내던 일들도, 흑룡교의 피리소리에 이끌려 어두운 지하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순간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류야,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사부도 없는데 적당히 좀 해~ 힘들지도 않아? 번양은 아예 연무장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류는 서연이 건네준 수건으로 손을 동여매며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힘들긴. 너무... 즐거워.

무일봉에 와서 홍문파 제자로 지낸 나날들은 류가 지금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부는 따스하고 친절했고, 친친과 번양, 번아 그리고 서연은 친근하고 사랑스러웠다. 가족이 이런 느낌일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저잣거리를 돌아 다니는 것과 아이들끼리 다투다 져서 우는 동생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류는 늘 부러워했다. 이젠 자기에게도 부모 같은 스승과 형재자매 같은 동문, 그리고 돌아갈 집이 생겼다. 이곳 무일봉이 나의 집이고, 스승과 동문이 나의 가족이다. 손에 터진 물집 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류였다.

하지만 가끔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어떤 불길함이 있었다. 이 행복이 언제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류는 다시 검을 다잡았다.

9.4. 4장. 뜻밖의 사건

그래, 잘 어울리는구나.

도천풍은 단장복을 입은 단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철부지에 말썽쟁이로만 여겼던 옛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강건하고 믿음직한 무인의 모습이 물씬 풍겼다. 흡사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도천풍은 감개가 무량했다.

도단하는 남소유에 대한 미련을 벗은 뒤 한층 더 성숙해졌다. 그는 대나무 마을로 돌아온 후 누구보다 마을 일에 앞장 섰고, 아버지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굳은 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전에는 매를 들어도 하지 않던 무공 수련을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행했다. 원래부터 무공에 소질이 있었지만 노력을 하지 않아 도천풍은 애를 먹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무공에 매진하자 일취월장을 거듭했다. 어릴 때 도천풍이 기본기는 확실히 다져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단하는 아버지를 문 밖으로 배웅하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천풍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무인의 믿음을 전했다. 도단하도 말 없이 어깨에 놓인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동안 남소유를 찾느라 설산과 사막, 중원의 오지 곳곳을 돌아다닌 탓에 손은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고단함이 도단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울지 마라. 넌 이제 마을을 책임질 자경단장이 아니냐. 도천풍의 말에 도단하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마치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천풍은 미소를 짓고 용맥에 몸을 실었다.

9.5. 5장. 악연의 시작

곧 침몰합니다! 포화란 아씨, 나가셔야 합니다! 막소보가 갑판 위에서 소리치며 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할아버지를 두고 갈 순 없어! 해무진이 있는 함대 안쪽으로 가려던 포화란을 태장금이 막아 섰다. 태장금은 포화란의 허리를 낚아채고 어깨에 들쳐 맸다. 이게 무슨 짓이야! 포화란을 발버둥치며 빠져 나가려 했지만, 그녀의 몸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속 아파오던 가슴의 통증이 더 심해져 내공이 전혀 모이지 않은 탓이다.

갑판 위로 나오자 지옥이 펼쳐졌다. 검게 물든 하늘에서는 커다란 검은 기둥이 떨어지고, 검은 기둥이 박힌 핏빛 상어항 주변은 탁기로 가득했다. 탁기 속에서는 마족이 눈을 번뜩이고, 동해함대원들은 괴로움에 떨면서 쓰러졌다.

포화란은 어서 내려놓으라고 주먹으로 태장금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진 아프다구!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어! 태장금은 묵묵히 발길을 옮기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해무진 함대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건 자신의 책임이다. 헛된 희생은 하지 말고 떠나라. 그리고, 포화란을 잘 부탁한다... 라구요.

태장금과 막소보는 용맥에 올랐다. 포화란은 태장금의 품에서 할아버지를 외치고 또 외쳤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상어항은 눈물로 범벅된 포화란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9.6. 6장. 어둠의 징후

9.6.1. 변경 전

바닥에 널부러진 무성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몸 안에 꿈틀거리는 탁기의 고통 때문에 돌 바닥을 긁은 손의 손톱은 빠져 피로 물들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문 탓에 이빨은 모두 부셔졌다.

무성은 진서연에게 묵화의 상처를 받은 후, 이곳에서 계속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여기가 어디인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은 침묵과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통으로 혼절 후 정신을 차린 곳은 주리아라 부르는 마족 앞이었다.

오호호~ 진서연이 남긴 쓰레기로군용~ 그럼 재활용을 해보실까요? 주리아는 주변에 서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흑룡교도라 불렀고, 그 자들에게 무성을 극마의 방으로 데려가라 일렀다. 횃불로 밝혀진 극마의 방에 들어서자 무성은 자신의 몸을 보고 놀랐다. 등에난 검은 날개와 새 같은 다리, 뾰족하게 변한 손... 자신이 마족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흑룡교도들은 무성을 둘러 싼 후 주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주술이 시작되자 무성은 몸 안의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을 깨달았다. 무성은 주리아와 이들이 구세주로 느껴졌다. 그리고, 몸 안에서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도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9.6.2. 변경 후

2015년 2월 17일 업데이트 이후 내용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3][4] 이하 바뀐 내용을 서술한다.

암흑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에 널브러진 무성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 안에 꿈틀거리는 탁기의 고통 때문에 바탁을 긁던 손톱은 이미 다 빠져버렸고,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문 탓에 이빨은 모두 부서졌다.

탁기와 어둠뿐인 곳에서 무성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고 또 탓했다.
누이를 잃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자신이 비참하고 비참했다.

힘, 힘만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터였다.
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마영강도,
역모자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복수도,
날 이렇게 만든 진서연도....

- 힘을 원하느냐.

무성은 깊은 심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원한다면 힘을 주지.

무성은 자신의 몸 안에서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9.7. 7장. 기둥 속 아이들

9.7.1. 변경 전

무성 주리아 흑룡교에 의해 끌려간 후 계속해서 마족으로 변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끌려가 극마주술이라 불리는 주술 의식을 받아 다시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주술을 받은 후엔 고통도 없어지고 육신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보다 더 큰 고통이 자신을 엄습했다.

처음엔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이 사육을 당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극마주술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 주는 주술이 아니었다. 무성 몸 안에 더 크고 강한 마족을 일깨우기 위해 육신의 그릇을 키우는 주술이었다.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성은 화들짝 놀라며 공포로 몸을 떨었다. 지금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앞으로 닥칠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지금의 고통을 참고 있는 게 더 나을 것만 같았다. 무성은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차라리 날 죽여줘! 죽여 달라고!! 무성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흑룡교도들은 무성의 사지를 잡아 끌고 나갔다.

9.7.2. 변경 후

유정 누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은데...
유명한 형하고는 도대체 언제 결혼하려는 거야.
이제 곧 어머니 생신이신데... 올해는 선물을 뭘 해드리지?
홍사부님... 기침을 많이 하셨는데 괜찮으실까?
막내는 훈련은 잘 받고 있을까? 저번에 보니 제법 무공이 늘었던데...
그런데 왜이렇게 슬픈 기분이 드는 거지?

무성은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었다.

누가 그랬지?
그가...?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난 단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9.8. 8장. 검은 기둥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원을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해무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누워 있는 포화란에게 다가갔다. 해맑게 웃던 손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고, 조막만한 손은 싸늘하게 식었다. 한눈에도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보였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손녀가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의원은 해무진의 커다란 등이 들썩거리는 걸 바라보았다. 동해함대를 호령하던 무적의 사나이가 그렇게 작고 쓸쓸하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해무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포화란을 안고 성큼성큼 함대장실을 나갔다. 아니, 어떡하시려구요... 의원은 해무진을 막아서다가 흠칫 놀랐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해무진의 두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이 아이가 죽는다면 내 삻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내 육신과 영혼을 마족에게 파는 일이라도 말이다!

9.9. 9장. 흑룡의 배후

탁기에 감염된 자는 모두 죽거나 마물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몇몇 강호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탁기를 체내에 주입해서 그것을 극복한다면 극마지체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목숨을 담보로 강력한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단시일 내에.

오랜 세월에 걸쳐 내공과 심범을 단련하여 무공을 정진하는 무림정파는 이것을 마교의 사특한 방법으로 규정하고 금기시했다. 혼천교를 비롯한 사파들도 이것이 가져다 주는 폐해를 알기에 탁기를 탐하는 자를 벌했다. 하지만 강호의 강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은 무인들이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런 야망을 가진 자들이 탁기를 암암리에 구하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묵화의 상처는 아무나 얻을 수 없었다. 오직 상위 마족의 간택에 의해서만 탁기의 정수인 묵화의 상처를 입을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상처를 극복한다면 신공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전설도 있었다. 이미 홍문파의 수제자가 그것을 통해 홍문신공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도 퍼졌다.

음지에 있던 흑룡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절대 고수에 이르는 길을 갈구하는 강호인들에게 손을 뻗히는 일이었다. 묵화의 상처를 주고, 그것을 극복할 방도까지 주겠노라고, 대신 어둠의 군단이 되라고. 어둠과 함께 이 세상을 정복하자고.

9.10. 10장. 악연에서 인연으로

아무래도 그자가 깨어난 것 같네...

독초거사의 말을 듣자 백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세!

독초거사는 무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선계가 더 이상 관여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백운?

백운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그자가 깨어났기 때문이란 걸 직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복수라도 할 셈인가? 백운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발견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늘 술만 마시는 적운을 다그치던 그였지만,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술잔을 내려 놓고 다시 탄식을 내뿜은 백운은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건 이제 홍문파의 장문이 된 그 녀석밖에 없네. 녀석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독초거사는 백운이 비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글쎄... 그녀석도 이미 속세의 정에 휘둘리고 있네. 천하사절이 저지른 과오를 똑같이 범할지도 모른다구.

독초거사가 마시려고 든 술잔을 백운은 뺏아 들었다. 이번에도 단숨에 들이키고는 수염에 묻은 술을 훔쳤다. 이미 그자는 그걸 계산하고 있겠지...

9.11. 11장. 제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른 채 내달렸다. 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리는 쉼없이 움직였다. 마치 세상 끝까지 가서야 멈출 기세였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강물에 꼬꾸라졌다.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은 이렇게 살아 있으려면 어서 일어나 다시 달리라고 윽박지르듯 고동쳤다. 몸을 일으킬 때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물너울에 어른거리는 형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게 나인가? 물 속에 있는 자신과 서 있는 자신은 철장을 사이에 둔 간수와 죄수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도망칠 순 없을걸?

섬뜩해진 기분에 뒷걸음질 쳤다. 무조건 달아나야 한다.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들? 그들은 누구지? 난 대체 누구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거지? 머리에서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다리는 쉼없이 어둠을 가르고 숲을 헤집고 다녔다.

10. 7막. 구름 밑 인연

10.1. 1장. 단서의 시작

갑작스럽게 퍼져나온 알 수 없는 연기에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박무랑이 말을 잃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태후의 명으로 왔다던 이들이 수상했다.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안개가 끼기 시작한 것도, 병사들이 괴물이 되기 시작한 것도 모두 그들이 결계를 치고 돌아간 직후부터였다.

'태후는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가…!'

윤병장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쓰러진 이들을 수습하기에도 너무나 벅찼다.

지금껏 서로 도왔던 병사들은 괴물이 되어 서로를 공격했고, 죽기 싫다고 외치는 이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목을 찔렀다.

'도단장님…'

문득 자신이 자경단을 버리고 떠나올 때가 생각이 났다. 만약 지금 도단장님께서 계셨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었을까. 막막해하는 윤병장의 곁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무공이 고강해 보이는 한 무인이었다.

10.2. 2장. 조력자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갚아야지!"

해무진의 통쾌한 대답에 그간 쌓였던 앙금이 모두 휩쓸려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아무리 채운항이 항구 도시라고는 하나, 이렇게 버젓이 해적선을 몰고 가면 공격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처음 가보는 뜨내기티는 그만 내라구. 우리가 다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어?"

책망하듯 대답하는 포화란의 말에 해무진이 허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화란의 말이 맞네. 그곳도 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해무진의 설명에 따르면 채운항은 비록 운국에 속한 항구 도시이긴 하나 국경과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일종의 개방된 무역항이었다. 운국에 속해있다고는 하나 실제론 운국의 보호나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살기 위한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물론 대놓고 해적이 활동할 순 없으니 이쪽도 보이지 않는 곳에 정박한 뒤 옷 정도는 평복으로 갈아입어 주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았다. 결국은 내내 다 알면서 서로서로 눈감아주는 형국이었다.

"너무 대놓고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될 것이야."

10.3. 3장. 항구도시 채운항

번양은 알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채운항에는 충각단 뿐 아니라 타 대륙의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으니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가 낮을 수 밖에 없는 곳이긴 했다. 그런 면에서 타 세력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관대한 건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존경받는 흑룡교라니…

운국에서의 흑룡교 입지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대놓고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흑룡교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인지도가 꽤 높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운국의 수도인 건원성도에서 입지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역시 흑룡교도님들이셔."
"어쩜 저리 믿음직스러운지…"

흑룡교의 정체고 뭐고를 떠나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당할 상황이었다.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아무래도… 운국에서 흑룡교와 맞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10.4. 4장. 조우

"그리 부서진 실띠는 왜 보고 계십니까."

건향이 의아해하며 건마에게 물었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건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건마는 힘들거나 쓸쓸할 때면 항상 실띠를 꺼내어 바라보곤 하였다. 얼마나 만지고 닳았는지 실밥이 여기저기 터져 나온 데다가 그나마 달려 있던 장식은 깨져 없어진, 매듭만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낡디낡은 실띠였다. 그러나 건마는 그 실띠를 볼 때면 항상 깊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프고도 아련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선물하려던 물건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골라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음을…
그때의 향은 알지 못했다.

-

저물어 가는 채운항의 노을을 보며 향은 잠시 떠올렸던 옛 생각을 접어들었다.

'오늘은 객잔의 만두나 먹을까…'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건향의 뒷모습으로 무지갯빛 구름이 채운항의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10.5. 5장. 팔부기재 손반

손반님은 정말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정말… 정말 선대 팔부기재이신 손반님이 맞으십니까?"

눈앞에 나타난 이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태광이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곤륜파의 살아남은 단 한 명의 계승자이자, 팔부기재와 함께 진서연과 대적했던, 바로 그 손반이었다. 유일하게 낯선 점이 있다면 칠흑같이 검고 길었던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짧게 잘려 있다는 점뿐이었다.

기쁨을 감출 수 없던 태광이 재빨리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팔부기재의 후계자인 그들에게 있어서 선대 팔부기재라는 존재는 스승과도 같은, 아니 스승을 뛰어넘는 정신적 지주였다. 선대 팔부기재에게 인정받지 못한 반쪽짜리 팔부기재라는 마음 한구석 자격지심도 모두 사라졌다.

"무슨 일이든 시키십시오! 팔부기재님의 명이라면 절대 받들겠습니다!"

태광이 의욕적으로 물었다. 그런 태광의 말에 손반이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호오~ 정말 무슨 일이든지 해줄 건가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좋아요."

손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진서연이라는 아이, 그 아이를 찾아 데려와 주세요."

10.6. 6장. 정면돌파

" 대협, 천명궁의 거대한 성벽을 보시기는 하신 겁니까?"

대협을 향해 원망섞인 소리를 내는 건향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명궁은 말 그대로 철옹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웅장한 자태는 아무리 경공술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이였고, 그를 수호하는 운국 흑룡교들의 방비도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대협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이미 닫혀진 귀는 아무런 말도 듣지 않는 듯했다.

'천명궁을 상대로 정면돌파를 하겠다니…!'

건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전쟁이 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정말 이렇게 하셔야만 하겠습니까?"

건향이 마지막으로 대협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이미 대협은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건향은 대협을 쫓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팔부기재와 합류하지 않고 대협을 돕기로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곳에서 다시 한번 대협과 이야기해보는 것 정도뿐이었다.

10.7. 7장. 석척족의 보물

본래 버려진 숲은 대지의 기가 너무 강해 울창한 수풀림이 우거진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곳, 그리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 버려진 숲이었다.

그런 곳에 어느 날부터인가 두 종족이 두각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숲의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두 종족은 서로 모르고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보물을 수호하기 위한 결계가, 다른 한쪽에서는 종족의 수호석을 지닌 자들이 숲의 기운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서히 대지의 기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균형일 뿐이었다. 만약 어느 한 곳이라도 무너지게 된다면 이제껏 억눌려왔던 기운은 그 틈을 타고 거세게 뻗어 나갈 터였다. 그리되면 죽은 자는 물론이거니와, 산자도 영향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런 그곳에 낯선 발길을 내미는 자가 있었다. 그로 인해 수백 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던 숲의 기운이 용트림하며 꿈틀대기 시작했다.

10.8. 8장. 검은 함선

철무괴는 자신의 함대를 찾아온 해괴망측한 무리를 바라보았다.

제독 철무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충각단의 최상위 우무머리로, 그전까지 오합지졸의 모임이었던 충각단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하고 체계를 갖추도록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그였다. 현 운국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그들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운국의 주적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눈 앞에 서 있는 무리들의 이야기는 황당함을 넘어 한심할 지경이었다.

운으로 쳐들어 가겠다고?
겨우 이 인원으로?

그 어리석음에 기가 찼다. 이들을 도왔다가는 어떤 골치아픈 일을 겪게 될 지 눈앞이 훤 했다.

하지만 그는 매정히 돌아서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서, 자신에게서 아내와 자식을 앗아간... 그들을 향해서 혼자라도 싸우겠다 다짐했던 옛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운국 내부에 들어가기만 하는 거라면 도와주도록 하지."

철무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단, 들어가는 것 뿐이네, 그 다음은 책임지지 않을 걸세."

10.9. 9장. 기억을 품은 곳

천상분지.
본래는 하늘을 꿰뚫은 듯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은 산이었으나 일부 지역이 부상하면서 떨어져 나가자, 나머지 부분만이 남아 분지가 되었다.
이때 떨어져 나간 지역은 이제는 타락해 버려 파천성도라 불리지만 본디는 천원도라 불리었었다. 그 영향으로 아직도 천상분지 곳곳에는 유적들이 있었던 유물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류국에 존재했던 천 년 전의 기억이기에 지금에 이르러서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 이미 이곳은 그때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나류국의 기억은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에 대해 정체도 모른 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 그리고 그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곳에 있던 나류국의 유적들을 보물로 삼아 지내고 있는 버려진 숲의 두 종족이 바로 그 증거인 셈이었다.

10.10. 10장. 불타버린 고향

주리아라는 이름은 본래 예명으로, 본명이 손반인 주리아가 본래 팔부기재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전 팔부기재가 진서연과 대립할 때 스스로 동귀어진함으로써 남은 팔부기재를 구해주었던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아마 그들도 알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팔부기재가 살아있음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랐기에 일부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일지도 몰랐다. 팔부기재의 후예들이라고는 하나 정식으로 물려받지도 못했으니 정식 팔부기재들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 터였다.

때로는 차가운 현실보다, 따뜻한 거짓말에 안겨 있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여기까지인가…'

건향은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사부를 떠올렸다. 이유가 있을 거라며 진서연을 공격하려던 동문들을 홀로 막아서던 사부의 심정이 지금의 자신과 비슷했을까…

털썩.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없어진 건향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 이대로 사부님을 만나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건향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스르르 감기는 건향의 눈에 누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10.11. 11장. 간발의 차

귀천검이 가지고 있는 힘이 차원을 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조각이기에 차원이 아닌 공간에 그치긴 했으나, 조각 자체도 공간을 열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조각이 서연이의 몸속에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이제 서연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친친이 고개를 떨궜다. 동생이 생긴 것 같아 소중히 아껴주려 했는데...
소중한 사람은 모두 이렇게 잃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친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부모님을 잃었던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괴로워하는 친친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우리 사부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자. 분명 어떻게든 해주실거야. 일단 서연이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잖아?"

씩씩하게 말하는 번아의 말에 친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엔가 어두웠던 친친의 얼굴에도 환하게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10.12. 12장. 깨지않는 서연

제천 의식은 태후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식이었다. 본래 태후는 전 황제 섭환의 천명제때 열렸던 선계의 문에서 내려온 자로, 뛰어난 미모와 인간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수세기에 걸친 깊은 지혜로 인해 단숨에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 그녀가 태후가 된 뒤 연례행사로서 행하였던 것이 제천의식이다.

제천의식은 천명제와 그 방식이 유사하나, 천명제와는 달랐다.
태후의 말에 따르면 제천의식은 '그녀가 있었던 곳'의 문을 여는 의식으로,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천명제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그 문이 선계의 문이라 칭한적이 없었다. 그러나 태후는 천명제때 하늘의 문이 열려 내려온 자였으니 사람들은 응당 그 문이 선계의 문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제천의식을 통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선계로 넘어갔다.
아니 적어도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였다.

운국의 한 대장군의 반란 소식과 함깨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제천의식의 문은 우리가 알던 그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로 인해 제천의식은 더이상 거행되지 않았다. 천명제를 열기 위한 훈련이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러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0.13. 13장. 흑룡교주의 정체

'살아있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은, 생과 사의 경계에 걸쳐 있는 몸이라니...'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다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함정일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 해도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일단은 서연이 먼저였다. 서연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다음 행선지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는 곳, 명계.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땅, 서락.

함정이어도 상관없었다.
그곳으로 이끄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서락으로 가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이유는 그 뒤에 알아봐도 될 일이었다.

설사 그로 인해 어떤 희생을 지르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11. 8막. 탁기에 물든 대륙

11.1. 1장. 서락으로

" 태후마마! 제천의식을 통해 간 곳이 선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많은 백성들이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엔 제 아내도..."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실 겁니까? 태후인 절 베기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철무괴의 물음에 태후는 너무나 태연하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악태후! 답하란 말이다!"

사무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철무괴는 태후를 향해 검을 뽑았다.

"언젠가 명계로 갔던 자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뽑은 칼을 거두지 않으면 후일 명계에서 돌아오실 아내분을 맞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관의 거듭되는 설득에 결국 철무괴는 태후를 겨냥한 칼을 거둔다.

"언젠가 반드시 진실규명을 하고 태후 저 자를 벌하러 오겠다."

11.2. 2장. 여정의 시작

부유함대에 모여 있는 충각단원들.
충각단 제독 철무괴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모두를 불러세워 자신의 항로계획을 전한다.

"모두 들어라! 나는 지금부터 서락으로 향하려고 한다. 그곳은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대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

"충각단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어떤 위험 앞에서도 함대장님을 따를 것입니다."

온통 보라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하늘.
철무괴와 대협, 그리고 대협의 제자들까지, 이들은 마침내 막혀있는 해로를 벗어나 서방대륙으로의 출항을 시작한다.

배를 자욱하게 감싸고 있는 먹구름과 번쩍이는 번개를 뚫고 지나면서 웅성웅성 거리는 충각단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콰광!
이 때 제독함대를 강타하는 번개.

"어어? 사, 사부님... 사부님!"

흔들리는 함선에서 중심을 잃은 제자 친친이 끝이 보이지 않는 함대 밖 어딘가로 추락하고, 대협은 추락하는 친친을 붙잡으려다 함께 추락해버린다.

"사부님!"
손을 뻗어 추락하는 대협을 잡으려는 친친은 결국 대협을 놓치고 대협의 귓가에서 친친의 다급한 목소리는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11.3. 3장. 번양의 행방

퍽! 퍼억! 퍽!
어두운 곳간 안에서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한 소년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참이나 진행된 매 타작을 먼저 포기한 건 관리들이었다.

"에이, 독한 놈, 팔이 아파서 더 못 치겠네"

관리들이 사내를 향해 퉤! 하고 침을 뱉고 나가버리고 그제서야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소년이 바닥에 등을 대고 돌아 누웠다.

아직은 엣되던 시절, 은광일. 그의 나이 열다섯의 일이었다.

가난과 낮은 신분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무시를 받기 일쑤였던 은광일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를 인정해주는 곳이 없었다.

"이곳은 신분도... 성별도 보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 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 진정이십니까?"

"단장님, 단장님?"

지금은 서락에서 자경단장으로 있는 은광일, 잠시 과거 자신이 충각단에 있던 시절을 회상하던 은광일은 대협이 단장을 찾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대협과 은광일은 낯선 대륙 서락에서 뜻하지 않게 재회했다.

11.4. 4장. 패랑족 암굴

"살다 보니 너랑 손을 잡는 날이 다 오네."

대협은 패랑족 암굴에서 잃어버린 제자들을 찾아야 했고, 은광일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끌려욘 호운촌 사람들을 구하러 패랑족 암굴에 와 있었다.

같은 행선지에서 만난 은광일과 대협.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버린 어색한 상황에서 이들 역시 서먹하고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이제 온 거야, 사부? 늦었잖아! 나 거의 죽을 뻔했다고!"

패랑족에게 잡혀 있던 번양은 대협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괜시리 어리광을 부리듯 툴툴대며 대협을 맞이한다.

마침내 대협과 은광일의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동맹으로 호운촌 사람들과 잃어버린 제자들, 고립되어 있던 충각단원들 까지도 모두 무사히 구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왜... 왜 이런 곳에 충각단이 와 있는 거지?"

한껏 의기양양 해있어야 할 은광일이 어쩐지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다.

11.5. 5장. 추락한 제독 함대

"네가 충각단이 되면 넌 이제 우리의 형제이자 가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번 들어오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네가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오직 죽었을 때 뿐. 이를 알고도 정녕 넌 충각단에 들어오고자 하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은광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찌나 이를 꽉 깨물었는지, 은광일의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때때로 은광일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 날의 추억...

어쩌면 은광일이 그렇게도 충각단을 피하는 이유는 단지 배신에 의한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때 그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어쩌면 그들을 떠나온 것이 한 없이 미안했는지도 모른다.

11.6. 6장. 호운촌 탈환을 위한 준비

호운촌. 본래는 운이 좋은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평화로운 마을이었지만, 서방 대륙이 탁기에 물들어 서락이 될 당시 이 마을 또한 그 불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삼십 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로, 버려진 채 옛 망령들만이 마을 주변을 배회하던 이곳. 그런 호운촌에 당도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은광일이다.

충각단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된 은광일은 황폐하기만 한 서락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호운촌 피난민들을 만나 절실한 그들의 눈빛에서 '용기'를 얻었으며, 그들이 심어준 신뢰에서 '희망'과 '결의'를 되찾았다.

11.7. 7장. 호운촌 탈환

"땅거미가 짙게 깔리는 밤이 되면 스산한 기운이 나를 옭아맨다. 조금씩 숨이 차오른다. 고통스럽다.

"유...화...' 왜 자꾸 이 이름이 맴도는건가..."

언제부턴가 그는 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생각들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점점 감정제어가 힘들다.

자신이 탁기 오염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 자신이 마물이 되어 하나뿐인 딸을 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밤이 찾아오기 전 마을 밖에 숨겨진 동굴 안에 딸 유화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유화야, 아빠가 다시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렴. 아빠가 곧 돌아올게"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올 수 없었다. 유화에게 한 말은 지킬 수 없는 마지막 약속이 되어버렸다.

죽음으로 되찾은 기억은 결국 딸 유화를 지켜내지 못했다.

"유화야... 사랑하는 우리 딸 유화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라..."

11.8. 8장. 위기를 기회로

세상의 신, 깨달음은 얻은 자를 의미하는 '세신교'의 발원지 주법사.
현존하는 세신교의 선사 중 법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나율 대선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협은 잠든 서연을 깨울 방법을 찾아 나율 대선사를 찾아오지만 나율은 이미 북 서락으로 마족들을 섬멸하기 위해 출타를 나간 직후였다.

설상가상 나율 선사의 부재로 인해 주법사를 지탱하던 결계의 힘이 약화되면서 마족들이 주법사를 침공해왔고, 승려 허명과 대협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명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강한 음기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강한 정신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나율 대선사가 출타를 나간 이후, 줄곧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승려 허명은 결국 주법사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명계로 가는 차원의 문을 소환하기로 마음먹는다.

"명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음기가 가장 강한 곳에서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제가 적합한 장소를 알고 있으니, 저와 함께 가시지요."

11.9. 9장. 앞선 마음

"틀렸습니다. 명계로 가는 차원의 문이 닫혀버리다니... 어찌... 어찌하여 귀천검의 조각으도로 실패를 한 단 말입니까."

앞선 마음이 초래한 결과 였을까, 아니면 명계의 문을 막고 있는 음기가 강했던 탓일까...
승려 허명은 명계로 가는 차원의 문을 소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명계로 가는 차원의 문이 닫히자 좌절에 빠진 이가 또 있었으니 바로 귀천검 조각을 지니고 있던 충각단 제독 철무괴였다.

"역시 귀천검이 복원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단 말인가..."

아내를 찾기 위한 일념 하나로 여정을 시작한 철무괴와 대협,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했던 승려 허명까지도...
애석하게도 명계로 가는 문턱 앞에 서있던 그들 셋은 그렇게 말 없이 침묵하며 저마다의 좌절을 되삼키고 있었다.

11.10. 10장. 뜻밖의 기연

" 대협...도와주세요..."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여인. 대협의 여정 길에 그렇게 등장한 여인과의 만남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막다른 길에 있던 여인은 대협을 건족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고, 그렇게 대협은 새로운 인연을 마주하게 된다.

"모두 무사하신가요? 저 하나 때문에 모두가 이런 혹독한 일을 치르게 되다니..."

눈 앞에 순백의 백합과 같은 청초한 모습으로 등장한 여인은 서천마을의 신녀 진제연. 단아한 매무새 사이로 비춰지는 강인한 모습에 대협은 제자 서연을 되 살릴 수 있을 거란 또 한번의 희망을 빛을 품었다.

"몽한의 숲 속 별채로 저를 찾아와 주셔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대협은 뜻밖의 기연으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1.11. 11장. 숨겨진 마을

서천마을.
건족들이 태어나 자라는 곳으로 알려진 마을.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떻게 탁기로 뒤덮인 서락 땅에서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숲 속 별채에서 다시 만난 신녀 진제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전한다.

"검증되지 않은 자의 발 길을 둘 수 없는 것이 서천마을의 규율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건족들의 은인인 대협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했고, 그 진심은 곧 대협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신녀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눈 앞의 은인을 두고도 직접 모실 수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대신 저를 대신해 대협을 서천마을로 인도해 줄 동행인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베풀 줄 아는 온정, 따뜻한 배려.
제연이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네던 그 때, 대협은 묘한 확신이 든다.
이 만남이 아쉬운 끝이 아닌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 될 거라고.

" 대협의 발길이 멈추는 도착지가 부디 서천 마을 이길 소망하며, 그럼 저는 이 곳에서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11.12. 12장. 알현 준비

구름에 가렸다 다시 나타난 달빛처럼 고고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여인.
깊은 겨울밤 시린 서릿발 같은 기운이 압도하는 힘을 지닌 여인.

"달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나무 구름 바람의 힘이 피어난다..."

마침내 마주한 건족의 천녀 오비연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그녀의 힘이자 원천인 '천건수' 또한 신비롭기 이를 데 없었다.

"천건수의 뿌리는 명계까지 맞닿아 있다.
즉, 천건수는 건족의 생과 사를 관장하고 있는 힘을 지니고 잇는 것이야."

천녀 오비연은 대협의 잠든 제자 서연이 건족이라는 사실을 듣고, 천건수의 힘으로 명계에 잠들어 있는 서연의 영혼을 깨워주기로 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어린 제자 서연을 생각하니 또 다시 대협의 가슴 한 켠에 시린 아픔이 느껴져온다.

" 서연아, 더 이상은 널 혼자 두지 않을테니 조금만 버텨주렴."

11.13. 13장. 권모술수

마침내 천녀 오비연이 대협의 제자를 불러오기 위한 의식을 시작하던 그때 였다.

"성스러운 이곳에 마...마기의 기운이...?"

불길한 기운을 느꼈던 오비연의 예감은 적중했고, 이윽고 무신 천진권의 날카로운 음성이 천건수 전체에 메아리 치며 들려 온다.

"애송이 넌 여전히 어리고, 여전히 어리석구나."

결국, 대협의 모든 여정은 이곳까지 오기 위한 천진권과 철무괴의 잘 짜여진 권모술수 였단 말인가...

팔을 뻗어 천녀를 속박하는 무신, 그대로 귀천검을 오비연의 심장을 향해 날린다.

"절실한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법. 때로는 그 선택에 따라 무언가를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막아설 시간조차 없었던 그 찰나의 순간, 천건수 전체는 생명력을 읽었고, 의식을 잃은 가물가물한 시간 속에 희미하게 철무괴의 목소리만 들려 온다.

11.14. 14장. 죽은 자들의 땅

현계의 죽은 자들이 가는 사후 영적 세계 '명계'
죽은 자의 영혼은 이곳에 머물다가 명부전의 판결을 받은 뒤, 현계로 환생하거나 극락으로 가거나, 혹은 지옥으로 간다.

영령 뿐 아니라 요괴나 악귀, 망자들이 떠돌고 있기도 한 이곳은 입두고 출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명계로 통하는 차원의 문이나 아직 그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명계의 바다를 통해 갈 수 있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나루터 외길. 나루터와 마주보고 있는 다리 건너 관문에 명부사자가 대협을 막아선다.

"여기가 어딘 줄은 알고 온 것인가. 이곳은 생명력을 가진 이가 오래 머물 수 없는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곳이다."

순간 대협의 머리 속에는 자신을 도우려다 희생당한 천녀 오비연의 마지막 모습이 스친다. 천녀님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대협은 연옥마을 안으로 들어가 서연을 찾아야만 했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는 법, 대협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캄캄한 외 길 앞에서 다시 한번 두 주먹을 뒤고 연옥마을로 향했다.

11.15. 15장. 천건수가 메마른 마을

서천 마을이 마족으로 뒤덮이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건수가 시들어버린 서천 마을.
마을에 나타난 커다란 마계의 문에서 마족들이 시커멓게 쏟아져나왔다. 마을 전체에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과 근위대들의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물러어지 말고 막아라!"
"천건수가 시든 탓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외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들이 섞여 마을에 울리고 있었고, 열려버린 마계의 문에서는 끊임없이 마족들이 쏙아져 나왔다.

"천녀님이 안계시니 내가 할 수 밖에 없어. 민영아 날 도와줘."

진제연은 굳은 결심을 한 듯, 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뛰어나갔다.

11.16. 16장. 사라진 신녀

"민영... 결국 저질러버린건가..."

제연이 신녀가 된 것에 대해 민영이 계속 불만인 것은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세정이었다.

"이런식으로 혼란을 틈타 데려갈 줄은 몰랐습니다... 마을이 이렇게 위기인데..."

어려서 부터 함께 지내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오세정이었지만 서천 마을과 건족 전체의 위기를 앞에 두고 한 민영의 행동이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천녀이신 오비연님도 돌아가신 지금... 신녀님마저 마을에 안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희 서천 마을은 대혼란에 빠질 것입이다."

결국 오세정은 신녀를 도와 마을의 위기를 구해준 외지인 대협에게 조용히 그녀들을 데려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11.17. 17장. 천건석을 찾아서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옛 부터 서락에 살고있던 종족. 그들이 바로 뿌리 초목지의 그루족이다.

그루족[5]이 죽고나면 불에 태운 후 씨앗을 다시 땅에 심어 다시 태어나 생을 이어간다. 이때 수행과 깨달음으로 일정 수준에 이른 그루족들에게서는 천건석이라는 것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루족은 종죽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이 천건석을 이용해 서천 마을의 천건수에 제를 지낸다.

어느날 천건수에 제를 지내던 중 서락 전역에 천명제로 인해 탁기가 퍼지고, 천건석은 탁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만다.

오래 전부터 이어오던 자신의 삶의 터전과 탁기에 물들어버린 천건석을 뒤로하고 떠난 그루족이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현재의 뿌리 초목지인 것이다.

뿌리 초목지의 그루족은 서천마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고향을 되찾고 정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약탈을 일삼고 있는 포악한 금조족과 탁기에 물들어버린 동족들 사이에서 난처한 상황에 천건수마저 시든 것을 알아차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서천마을의 신녀[6]와 함께 한줄기 빛과 같은 한사람이 나타났다.

11.18. 18장. 금조의 영역

"어서 하늘제단으로 올라가 천건석에 하늘의 기운을 담아야 합니다. 이곳에 하늘제단으로 올라가는 용맥이 있을 것입니다."

진제연은 다급해졌다. 천건수의 기운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제단으로 올라가는 용맥을 타기위해서는 바람절벽에 자리를 잡아 버린 금조족과 먼저 맞닥뜨려야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바람기둥 또한 다시 작동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루족 족장 굵은뿌리가 보내준 선발대들이 금조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진제연과 대협 또한 하늘제단으로 올라가기 위해 그들과 함께 전투를 벌인다.

바람기둥을 동작시키고 일분 일초라도 빨리 하늘제단으로 향해야 하는 그들앞에 금조족의 대전사 아둥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11.19. 19장. 하늘의 기운

첫 번째 수호체계의 작동을 멈추고 다리를 건널 무렵이었다.

'번쩍'
안광이 빛나며 수호병이 공격을 준비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급히 반격을 준비하던 대협과 진제연 앞에서 수호병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아닌 수호무녀 사민영이었다.

진제연을 빼내어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다가 대협에게 패한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신녀님 제가 죄송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제연을 신녀님이라 높혀부르며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입장을 분명히하는 듯 보였다. 친구이기 이전에 건족의 신녀로써 대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하늘제단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제연은 품속에서 천건석을 꺼내어 하늘의 기운을 담는 의식을 시작했다.

11.20. 20장. 되찾은 서연

천녀가 된 진제연은 대협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대협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깨어나지 않는 소녀를 데려오십시오."

대협의 부름에 제자들이 서연을 데려와 제단에 눕혔다.

'살아있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은, 생과 사의 경계에 걸처 있는 몸이라니...' 순간 흑룡교주 진태평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이 의식은 육신에 연옥에 있는 혼을 다시 불러오는 의식.
쉽지만은 않은 의식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서연을 살리겠다고 서락까지 온 터였다.

순간 천녀 진제연의 손짓에 연옥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온 푸르고 반짝이는 기운이 서연의 몸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갔다.

모두 서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협은 진제연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살짝 웃음을 지었을지도...

그리고 대협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 사부님~ 저 돌아왔어요!"

서연이.
깨어났다.

12. 9막. 왕이 되는 자

12.1. 1장. 몰려오는 어둠

천둥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분명 흑빛의 신수였다. 신수는 강류시의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천둥은 온몸을 떨며 뒷걸음 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포효하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 신수를 막아내며 천둥 앞에 착지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건만 천둥은 대번에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는 천둥은 아랑곳하지 않고 용맹하게 신수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신수의 힘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신수는 마지막으로 길게 포효하더니, 풍황궁을 향해 검은 불을 내뿜었다. 풍황궁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고 그 자 역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틀림없이 신수의 불에 함께 재가 되어버린 것이리라.

"너의 예지몽은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예지몽에 충분히 대비하면 필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형 감마등은 늘 천둥에게 그리 말했더랜다.
천둥은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사형, 저, 그 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천둥은 한 자 한 자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12.2. 2장. 비밀 임무

군마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혜경은 군마혜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황제에 즉위했을 때보다도 더욱 짙은 어둠이었다.

저 어둠을 걷어낼 수는 없을까.

혜경은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노예로 팔려갈 뻔한 것을 구해준 것은 공주시절의 군마혜였다. 뛰어난 검술로 노예상인을 쓰러뜨렸던 그 모습은 혜경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혜경을 발견한 군마혜는 혜경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난 신혜라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혜경은 고개를 들어 군마혜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여인의 용모에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겨왔다.
혜경은 단번에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분은... 범접할 수 없는 분. 진정으로 귀한 분.
이 분이 누구라도 좋다. 나는 평생 이 분의 곁에서 그림자로 살리라.

혜경은 바닥에 넢죽 엎드렸다.

"제 이름따윈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군마혜는 잠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혜경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내 오늘부터 너를 혜경이라 부르겠다. 은혜와 공경을 안다는 좋은 이름이지."
"받들겠습니다."

혜경은 더욱 깊이 절했다.

12.3. 3장. 수상한 연회

너무 무섭고 불안한 기분이야. 긴장해서 그런 걸까?
운국에 간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서연의 마음은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가득찼다. 그 긴장감은 서연에게 작은 두근거임을 선사했고, 서연은 그것이 전부 긴장과 설렘 탓이라 여기며 별반 신경쓰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천명궁에 당고한 순간 서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향원루가 가까워질수록 커다락 먹구름이 서연 앞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 불안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서연 자신도 알지 못했다.

번양 오빠도 번아 언니도 친친 오빠도... 모두 아무렇지 않네.

모두 밝고 즐거워 보였다. 혼자만의 불안감을 내비치며 그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참자고, 서연은 홀로 되뇌었다.
하지만 향원루에 들어선 순간 폭풍같은 불안이 서연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서연은 향원루를 뛰쳐나갔다. 사부가 달래도 소용 없었다. 이 정도 참은 것도 잘한거야.
서연은 기다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난히 붉은 석양이 천명궁의 하늘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었다.

12.4. 4장. 그릇된 휴식

번양은 잠이 오지 않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명궁, 푹신푹신하고 향기나는 객실, 예쁜 궁녀들, 산해진미...
이 모든 것들은 번양의 마음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 학태후가 함께 나타난 류를 본 순간 그런 것들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류... 그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서... 왜 무일봉에 돌아오지 않은 거야? 왜?

류를 보면 묻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게 됐는지, 어떻게 여기오게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우리를 모른 척 했던 건지.

아니야, 우릴 못 봤겠지. 류가 우릴 모른 척 할 리가 없어. 하지만 사부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러니까 사부도 별 말이 없었을 거고...

번양의 작은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류가 어째서 거기 있는지는... 그래,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번양은 눈을 감았다. 내일은 류를 찾아갈 거야.
조금씩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12.5. 5장. 천명궁의 실체

금일 도착한 풍제국의 사신 하나가 향원루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망치고 있다.
어서 그 자를 잡아들여야 한다!

지령을 받은 최진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풍제국의, 그것도 고작해야 사신 하나가 향원루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향원루를 지키는 병사가 몇인데?
석연찮은 지령은 최진아를 직접 움직이게 만들었다. 대 두 눈으로 그 자를 직접 보고 말리라.
그리고 취향교 저편에서 뛰어오는 그 자를 보았을 때, 최진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대사막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그 협객이 아니던가.
하지만 협객의 뒤로는 낯 모르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협객 역시 대사막에서 봤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심후한 기운이 그가 얼마나 숱한 고난을 헤치고 왔는지 짐작케 했다.
그런 협객이 쫓기고 있다... 그것도 천명궁 한가운데서.

그래, 우선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이나 들어보자. 그래도 영 미심쩍다면 그때 단칼에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최진아는 지하 은신처로 가는 문을 열었다.

12.6. 6장. 대장군부 진입

어째서 대장군부에 병사들 보다 흑룡교도가 더 많은 걸까.

좀도둑의 최후를 지켜보던 최진아는 대장군부의 삼엄한 감시에 내심 놀랐다.
아무리 악태후의 신임을 얻은 몸이라곤 하나 이토록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을 줄이야.

악태후와 대장군이 무슨 관계로 엮여 있는지는 천명궁 내에서도 소문이 무성했으나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그런 뜬소문을 믿을 최전아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런 소문도 덥썩 믿어버릴 만큼 수상쩍은 것이었다. 하물며 침입자는 모조리 끔찍하게 없애버리다니.

최진아는 대장군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12.7. 7장. 은밀한 탈출

대장군의 짐무실인 대륭각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도,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던 듯 책상 위에 서신을 쓰다 만 흔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서신을 쓴 것일까. 그리고...
그 서신을 지금, 누군가에게 보낸 것은 아닐까.

만약 천명궁 내부의 인물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라면 그냥 사람을 썼으면 될 일이다.

가뜩이나 대장군에 대한 의심이 증폭되던 차라, 최진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12.8. 8장. 구름 밑 그림자

갑자기 연회장에 마물이 들이닥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토록 친절했던 운국의 관리들이 죄다 마물로 변해버렸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승아는 재빨리 몸을 은신한 채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른 무명회원들은 어떻게 됐을지 그들의 안위가 궁금했다.

모두 무사할 거야.

자취를 감추는 데 능한 이들이었다. 지금 자신이 몸을 숨겼듯이 모두 어딘가로 흩어져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천명궁의 실태를 속히 황제 폐하께 알려드려야 한다.

가까스로 향원루를 빠져나온 승아는 큰 건물이 위치한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궁녀로 위장하여 천명궁에서 외부로 서신을 보내는 서신부를 찾았다.

승아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 천명궁에서 무슨 서신이 오가는지를 조사하여 악태후의 계략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운국의 중요 기록물들을 조사하던 승아는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또 다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죄인을 심문할 것이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죄인?

입구 쪽에서 대장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12.9. 9장. 제자들과 함께

번아는 신이 났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류 오빠와 함계 무일봉에 돌아가, 모두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흑룡교가 길을 막아섰지만 사부도 있고 류도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싶었다.

그러나 류의 뒤로 나타난 악태후를 본 순간,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 류는 악태후를 적대했었고, 이 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며 일행을 성소까지 안내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류가... 어째서 악태후와 함께 성소에 나타난 걸까.

번아는 류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배신... 이라니, 아니지?

배신이라니!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 류에게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그러나 류는 싸늘한 시선으로 번아를 내려다보고는 힘껏 내팽겨쳤다.

눈앞이 흐려져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번아는 똑똑히 들었다.
번양의 비명소리를.

12.10. 10장. 어둠의 끝자락

남소유는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아름답게 펼쳐진 밤하늘과 서늘한 밤공기, 향기로운 꽃내음...
서락에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을 줄이야.

그것이 남소유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다.
넘소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장작불, 냉기를 머금은 회색벽.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출발과 행복을 꿈꾼 것이 그리고 잘못된 일이었던가.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긴 했지만 외관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남소유의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찼다.

누가, 대체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지금...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남소유는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서.
남소유는 조심스레 문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소유를 기다리고 있던 건 타오르는 듯한 적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 흑룡교도들이었다.

"어딜 가려고 그리 서두르시는지?"

까마득히 펼쳐진 아둠을 등지고서, 적의의 여인이 말했다.

12.11. 11장. 제자들을 찾아서

번아 언니, 정신이 들어?

번아는 몸을 일으켰다. 류에게 맞은 뺨이 무어올라 얼굴이 홧홧거렸다.
눈앞에 친친과 서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으나 번양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번양... 오빠는?

서연과 친친은 대꾸없이 침울한 얼굴이 되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꿈이... 아니었어?

번아는 번양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어... 그냥 가만히... 왜... 괜히 나서서... 왜...!

번아는 마구 자책했다. 곁에 있던 서연과 친친이 괜찮으냐며 걱정해 주었지만 그런 건 번아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번아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류가 진심으로 그랬을 리 없다고 부정하고 있었다.

그때 감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걱정어린 얼굴로 번아를 바라보는 그.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가장 미운 사람. 사부였다.

12.12. 12장. 천인의 피

다들 무사한가?

거친 숨을 내몰아쉬고 있는 최진아.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실은 마음 속에 누구보다 큰 마음의 짊을 짊어지고 있을 그녀였다.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온 그녀가 운국의 황후를 등지기로 한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으리라.

힘든 선택을 했던 만큼 최진아는 어떻게 해서든 눈 앞에 닥친 운국의 위기를 자신의 힘으로 막아내고 싶었다. 그것은 운국의 무사로서 오랜 시간 치열하게 외길을 걸어온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최진아, 다시금 두 손으로 말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며 다음 행보를 준비한다.

12.13. 13장. 수상한 흑룡교

좌장군 황무천,
그는 한 밤중 느닷없는 최진아 일행의 기습 방문이 썩 불쾌하지만은 않다.
아니,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현재 돌아가고 있는 운국의 실상에 반기를 들어줄 자신의 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때 운국의 대장군으로서의 위엄과 명예는 이미 오래 전 실추 되었고,
좌장군으로서 지켜야 할 나라에 대한 사명감도 시간이 지날 수록 흐릿해지던 그 였다.

천인의 피... 섭씨 황족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
과연 그녀는 운의 정당한 계승자로 새로운 운국을 열어줄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와 불신의 불씨가 한 데 뒤섞인 채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새 천명궁 내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천명궁 내성... 굳게 닫힌 성 문을 보며 황무천은 새삼 천명궁이 낯설게 느껴진다.

12.14. 14장. 검은 음모

한낱 종교쟁이인 흑룡교도가 감히 운대륙의 병사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다니.

황무천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최진아도 그랬듯 황무천 또한 흑룡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운국의 실상이 내내 탐탁치 않았다.

괘씸한 놈들! 놈들의 소행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운국을 철저히 능멸한 행위와도 같다.

황무천은 그 동안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흑룡교에 대한 반감과 황후의 대한 불신을 더 이상 감추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오랜만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피가 몸 속에 순환되는 것을 느낀다.

황무천, 그는 한 동안 운국에서 소회당하고 배척당했던 그늘진 마음과 모멸감으로 가득찼던 시간을 마치 잊지 않겠다고 다짐이나 한듯 두 주먹을 쥔 채 한참을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침묵은 끝이 났다.

기필코 이 모든 일의 배후를 밝히고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12.15. 15장. 배신당한 충성심

운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수많은 전우들, 그리고 사실이 밝혀졌을 때 도탄에 빠질 백성들을 또 어찌 헤아려야 한단 말인가

황무천은 배신감과 황후 악태후에 대한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
한 명생을 바쳐온 황무천에게 운국국이란 자신의 부모이자, 고향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어떠한 부도, 명예도, 보상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충직한 마음 하나로 나라를 살폈고 황제를 보필해왔던 그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믿었기에.

그런 황무천이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다짐한 이례 처음으로 결심을 무너뜨렸다.

맞설 것이다, 기켜 낼 것이다, 응징할 것이다.
나는 운국의 장군 황무천이다.
목숨을 걸고 운국을 위협하는 악태후에게서 만드시 운국을 지켜낼 것이다.

12.16. 16장. 모두를 위한 선택

인생을 살면서 결정해야 할 선택의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결정의 순간 앞에 어떤 가치를 최상위에 두어야 하는가.

어떤 이에게는 한 없이 보잘 것 없는 가치가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전부가 될 만큼 중요할 때가 있다.

천진권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는 것이 큰 일을 그릇치는 첫 째의 원인이라 말한다. 모두를 위한 광명의 길, 그 길을 걷기에 앞서 버려야 하는 것들이라...

나에게는 새로운 광명도, 새시대의 도래도 중요치 않다.
따듯한 체온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나의 제자들과 내 편이 되어줄 든든한 동료들...

그들과 함께 걷는 길이 나에게는 광명이고 매일이 새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2.17. 17장. 원치 않는 광명의 길

천지마명록

어둠의 숨은 자들은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현혹하여 현계의 천인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라 부추겼다.
헌계에는 많은 나라와 가짜 천인이 생겨났고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신들은 의로운 자를 간택해 귀천검을 내리고 신탁을 내렸다.

이 검으로 어둠의 왕과 추종자를 마계로 몰아내고 봉인하라.

처음 책의 내용을 접했던 그 시절, 무신 천진권의 나이는 고작 16세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 호기심은 욕심을 불렀고, 욕심은 희생을 불렀으며, 희생은 피를 불렀다...
결국 무신 천진권이 키워나갔던 그 욕망 속에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곧 우리는 새 시대의 도약에 새로운 첫 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12.18. 18장. 보낼 수 없는 마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던 번양의 기합소리...
번아의 재잘대는 귀여운 잔소리...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의 가르침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새기려던 친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나는 어째서 그 모든 순간을 지켜내지 못했나...
나는 어째서 그 모든 순간에 맞서질 못했나...

눈에 새기고,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새겨도 보고싶을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
너희의 죽음 앞에 나약하게 무릎을 꿇어 버린 이 사부를 용서치 마렴.

이 모든 마음의 짐은 고스란히 이 사부가 짊어질테니, 부디 선계에서는 좋은 생각, 옳은 마음, 곧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하루하루가 빛이 나기를 바란다.

13. 10막. 빛이 가둔 진실

13.1. 1장. 혼돈의 시작

"이거는 여기다가 이렇게… 읏차!"
서연은 먼지가 쌓인 무일봉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제 나라도 씩씩하게 사부님을 챙겨 드려야지. 우선 사부님 밥부터 지어볼까?'

서연은 분주하게 부엌의 이곳 저곳을 뒤적였다.

"에이 이게 다네."

서연이 들고 있는 그릇 속에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도 다 담을 수 있을만큼 적은 쌀이 있을 뿐이었다.

"만두도 없고…"

서연은 무언가 열심히 끄적여 놓고는 살금살금 대나무 마을로 향했다.

13.2. 2장. 퍼져가는 탁기

"우리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천둥이 평소와는 다른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자 그 누구도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못한 채 정적이 흘렀다.

사대륙 곳곳에 나타난 탁기를 팔부기재들이 각지로 흩어져 막고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남궁선재가 꽤 많이 다친 터였다. 각 문파원들까지 동원해 버티고 있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탁기와 늘어나는 마족들에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천둥을 비롯한 나머지 팔부기재들도 지쳐가는 상황이었다.

"대협께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적을 깬 것은 청운검 건향이었다. 천명궁에서의 그 일이 있은 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터였다.

"제가 함께 가서 부탁 드려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나눠드린 부적으로 다른 탁기 구멍들을 부탁드립니다." 천둥이 건향과 함께 나섰다.

13.3. 3장. 천하사절

"역적 천진권은 어명을 받들라!!"

"천진권은 사대륙 평정을 가장하고 그 역적들을 모아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역모를 꾀하여 나류국의 안위에 위협을 가한 대역죄인으로 성에 입궐하는 것을 금지하며 즉결 처형에 처한다!"

"처형관은 즉시 형을 집행하라!"

'이것 또한 나라를 위하는 길인 것인가...'
천진권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처형이 이루어지려던 바로 그때,

"멈춰라, 그 자는 천하사절이 될 몸이다!"
처형을 멈춘 것은 바로 나류국 황제에게 직접적인 조언을 하던 삼원로였다. 삼원로는 그에게 천하사절이 될 것을 권유한다.

그것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일지 예측하지 못한 채...

13.4. 4장. 동귀어진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아바마마의 명을 받든 것이 죄가 되어 역적으로 참수당할 운명을 면하기 위해 천하사절이 되었습니다."

"처음 천하사절이 되었을 때부터 각오하던 것 입니다."

.
.
.
.

'천하사절은 속세와 연을 맺어서는 안되는 법.'
'그녀와의 연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이리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
.
.
.
.

'왜 하필 지금인가… 이제서야 당신이 내게...'
'당신이 살아갈 이 세상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 고통 얼마든지 참아내겠소...'

'... 유란.'

13.5. 5장. 실마리

"수호무녀님! 여기 좀 보십시오!"

근위대원 하나가 사민영을 급히 찾았다.

하얀 깃털이 아닌 검보라색의 탁한 깃털. 탁기에 물든 것임이 분명했다.

'탁기에 물든 금조족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다면 탁기를 피해서 남하하고 있다는 것인가?'

"끄어어..."
사민영이 생각을 정리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음산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왔다.

"크윽!"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한쪽 팔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꽤나 깊은 상처였다.

"괴로워..."

"모두 진영을 정비하라!"
기분 나쁜 소리를 뒤로 한 사민영의 외침에 근위대원들은 자세를 고쳐잡고 검보라색 기운을 내뿜고 있는 금조족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13.6. 6장. 연합전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해치워 버립시다."
그루족의 곧은가지는 이번 원정을 준비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곧은가지님.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곧은가지를 서천마을 근위대장 오세정이 말리던 차였다.

곧은가지가 이렇게 애가 타는 이뉴는 지난번 바람 절벽에서의 전투에서 본인의 활약이 적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은 무슨... 당장이라도 가서 다 때려 눕히자니까."

지난 번 바람 절벽에서의 그 대협마저 합류한다는 소식에 곧은가지는 뿌리 초목지에서 급하게 주문 제작한 새총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렸다.

13.7. 7장. 새로운 인연

"귀인이 오실 것 같군요."
"귀인은 커녕 귀신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놈의 마족들만 아니라면..."

나율 대선사의 말에 커다란 언월도로 마지막 마족을 가르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소양상이었다.

"허허. 선사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소양상을 조용히 타이르던 군마염 이었지만, 점점 지쳐가긴 마찬가지였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대선사님."
군마염의 말에 나율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눈을 가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함께 북서락의 탁기를 정화하러 다닌 지도 꽤 오랜시간이 지난 터에 그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원정은 지난 번 원정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나율 대선사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는 북하통로도 지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점점 더 심해져 가는 탁기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천무궁 외성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곳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마족들도 그것을 느끼고 일제히 외성 입구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군마염과 소양상은 이번에도 대선사 앞으로 먼저 뛰어나갔다. 나타난 것이 귀인인지 귀신인지는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13.8. 8장. 굳게 닫힌 삼도문

무의식 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사부님이 자신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곤 미쳐 피할 새도 없었던 공격이 이어졌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끝나있기를 바랬던 친친이었다.

모두 무일봉에서 모여 즐겁게 수련하며, 만두를 먹던 꿈을 꾸며 눈을 떴을 땐 어느 음침한 마을이었다.

그곳엔 어른, 아이, 노인, 착하게 생긴 사람, 무섭게 생긴 사람 모두 어느 곳으론가 긴줄을 형성하며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갓을 쓴 사람들이 멀리 보이는 큰 문을 향해 움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친친은 그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명부전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할 때 즈음 갑자기 어디선가 마족들이 출몰하기 시작했고, 닥치는대로 망자들을 해치고 때로는 흡수하여 더 강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죽어서까지 마족은 조금 심하잖아...' 라고 생각하던 친친의 눈에 저 멀리서 이곳에서 절대 보여서는 안될 사람이 보인 것 같았다.

13.9. 9장. 서운성 천무궁

서방 대륙에 살던 한 젊은 귀족 부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행복했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근심이 있었다.

아내을 위해 사내는 여자아이가 열매처럼 맺혀 태어난다는 전설의 나무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그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몇 달을 헤맨 사내는 숲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름다운 여성들만이 존재하는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 한가운데에는 그보다도 더 아름다운 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저 나무가 분명해...'

밤이 깊어진 어느 날, 사내는 몰래 나무에 다가갔다.
여왕이 태어날 시기였기에 그곳에는 단 하나의 아이만이 잠들어 있었다.

사내는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숲이 최선을 다해 그를 방해했지만 사내는 절벽에서 떨어져 구르고 넘어지면서도 결코 아이를 놓지 않았다. 결국 사내는 아내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고, 두 사람은 평생 아이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이의 이름은 뭘로 할까요?"
"글쎄,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시오?"

"... 서연. 서연이라고 할까요?"

13.10. 10장. 사제의 연

사실 섭무는 줄곧 장자인 본인이 동생 섭환에게 밀려 서방대륙으로 쫓겨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선황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신하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자가 나타난 것이 그 쯤이었다. 그 자가 섭무에게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기를 수 일. 실제로 섭무는 사신단이나 본국에서 온 귀빈들의 감청을 잠시 중단 시키는 등 불안 증세가 가라 앉는 듯도 했다.

섭무는 그 후 정사를 돌볼 때에도 그 자를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천명제로 진정한 왕의 자격을 인정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서운성 전체에 퍼진 것도 이 때쯤이었다.
일각에서는 천명제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이 오가기도 했으나, 감히 입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이후 서방 대륙의 세금 징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채 갖은 수탈이 서운성 천무궁 외성까지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탐관오리들도 등장하여 주민들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그리고 섭무의 옆에서 절대 떠나는 일이 없던 그가 사라져버린 일식의 날.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악몽같던 그 날이 찾아왔다.

14. 11막. 검게 물든 낙원

14.1. 1장. 다시 움직이는 흑룡

두번의 천명제를 겪은 후, 남소유 아니 섭소유는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삶은 아니었지만, 은광일과 소박하게 살아가려 마음 먹었을 뿐인데 또다시 이런 일에 휩쓸리게 된 데다가 황녀라니... 혼자서는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한편 대장군에 복귀한 황무천은 태진석 장군 그리고 믿을만한 대소 신료들과 협력하여 궁 내부에 있던 귀비의 잔존세력과 흑룡교도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리고 어서 섭소유의 대관식을 치르고 자신이 물러나는 것. 그것이 그가 운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대장군 직을 지키고 있는 것 또한 악귀비가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흑룡교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바로 흑룡교가 대관식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였다.

"흑룡교라니..."

황녀가 알게 되면 또다시 불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첩보에 대해 태진석 장군과 의논해 보았지만 국교로까지 지정되어 많은 백성들이 믿고 있는 흑룡교를 하루 아침에 군대를 보내어 제압 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태진석이 힘들게 말을 꺼냈다.
"대협께 도움을 청해보시지요 대장군. 대협이라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14.2. 2장. 조력자

술에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20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황자가 마족이었다느니 어쩌니하는 흉흉한 소문이 돈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진 사람의 수 말이다.

"진짜 블라국으로 라도 가버린 걸까?"라니

헛소리다.

그날 내가 본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술. 술이 필요하다.
맨 정신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검디 검은 무리가 사람들을 데려가던 그 장면이 머리 속에서 잊히질 않는다.
그중에 몇은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중 분명 그 끔찍한 형체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나를 보고 웃는 것도 같았다.




술. 술이 필요하다.



- 주점거리 어느 행인의 일기 중.

14.3. 3장. 다시 눈뜬 아침

"일어나세요"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을 때 눈 앞에 있는 인물에 대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친친...
명부사자가 덕이 많이 쌓인 아이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터였다.
분명 현선로에서 강산이를 따라 문으로 들어왔을 터인데... 그렇다면 이곳이 선계일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번양과 번아가 쏘아붙였다.

"잘한다 잘해."
"우리는 이미 예전에 준비 끝났다구!"

서둘러 따라간 무일봉 연무장에는 언뜻 상상만 해본 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 그리고 친친, 번양, 번아까지...

그리고 또 하나의 그립고도 애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아 이제 네가 막내가 아니지."
멋쩍은지 긁적이며 말을 건네는 화중 사형이었다.

14.4. 4장. 황실 비무제

그야마로 축제였다.

운국의 황족들과 장수들, 팔부기재는 물론 숨은 무명의 고수들 그리고 각 대륙에서 구경온 백성들과 사대륙에서 온 진귀한 물건을 파는 상인까지.
곤륜절벽이 그야말로 떠들석 했다.

매년 벌어진다는 운국의 황실 비무제는 그렇게도 장관이었다.

대협에게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과 즐겁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게 현실이면 어떻고 현실이 아니면 또 어떠할까.

어디선가 대협을 다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어느새 이질감은 없어지고 점점 눈 앞의 세상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14.5. 5장. 깨어나기 싫은 꿈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였다.

무성이 아닌 유성. 주리아가 아닌 손반.
점괘가 잘 맞아 모두 앞다투어 점괘를 내어달라고 하는 감마등.


아니 애초에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것 조차 말이 안되지 않은가.

대협은 있을 리 없는 그 세계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론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님, 사형, 사저, 제자들까지 모두 함께 있는 무일봉이라니.

거기다 다시 무일봉으로 돌아가, 사부님과 동문들과 함께 황실 비무제 우승의 기쁨을 함께 누릴 생각에 가득 차 있던 대협이었다.


하지만...


무일봉으로 돌아온 대협의 눈앞에는 일생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똑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세상.
그런 세상이 있었으면...


깨어나기 싫은 꿈을 뒤로하고 대협은 강산이가 찾아낸 용맥에 몸을 던졌다.

14.6. 6장. 선인들의 마을

선하마을은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선연호의 유수석에서 시작된 물은 천수림을 울창하게 만들었고, 또 일부는 만월천을 덮었다.

신물인 유수석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물은 영혼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효과가 있었으며 안정을 가져다 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가고자 하는 곳을 상상하며 선연호에 뛰어들면 다른 마을을 오고 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적하게 쉬고 싶은 선인들과 현계에서의 고단함을 아직 지니고 있는 선인들이 선연호를 통해 선하마을을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선하마을의 기운이 뒤틀려 버렸고, 마을 밖으로 나가 정신을 잃고 난폭해진 영수들이 신력에 이끌려 유수석을 가지고 사라졌다. 이후 선연호가 말라버린 선하마을에는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이도 없는 마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천하사절이신 그분만 계셨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홍노돈의 앞에 현계의 존재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14.7. 7장. 하늘과 맞닿은 길

이른 새벽,
물안개가 걷히기도 전 수호신녀 성미양은 일찍이 선연호로 걸음을 향한다.
오랜 시간 하늘길을 열어왔던 그녀였건만, 어쩐지 오늘따라 긴장감이 몰려와 좀처럼 심적 안정을 찾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잠시 사색에 잠겨 있던 수호신녀 성미양, 조심스레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신이시여,
마침내 선하마을을 위해 도움을 주셨던 현계인이 이곳에 발길을 두었습니다.
그런 그분을 위해 기도로써 간청 드리옵니다.

옳은 일을 행함에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는 용기를 보았습니다.
신뢰와 진정성으로 현계를 지켜갈 새 주인의 면모를 보았습니다.

비록 선인의 자격을 얻어 하늘길에 오르는 것은 아니오나,
생에 기쁨을 함께 나누고, 생에 슬픔에 함께 눈물을 지을 줄 아는 현계인에게 하늘로의 걸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맑은 강물을 흐르게 함으로써 화답해 주시옵고,
밝은 광명의 길을 내리사 빛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수호신녀 성미양,
그녀는 그렇게 일생에 처음으로 선계의 순리를 거스르며, 현계인을 위한 하늘길을 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14.8. 8장. 잿빛 하늘 속 투지

대협과 진서연은 무사히 선계에 당도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선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마족들을 상태로 전투중인 선인들 중 누구도 그 죽음 앞에 두려워하거나 이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선계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현계의 죽음과는 달리 끝이 아닐세.
우리는 이를 '영원의 구원'이라 말한다네. 즉 환생을 뜻하는 것이지.

본디 죽음 이후에는 사후세계의 문턱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지.
명부전에 이름을 올리고 다시 삶을 살아가기에 적합한 자인지 심판받는 과정이 바로 그것일세.

그 순간 천하사절과 진서연의 뇌리를 스쳐간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유란... 어쩌면...

14.9. 9장. 뜻밖의 동행

< 윤회의 서고 계시록 > 전문 발췌본

모든 삶 속에 존재하는 요람에서 생의 끝자락까지의 순간들.

필연적 인연을 맺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 속에 공존하는 희로애락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지나온 시간과 기억 속에 메어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실체 없는 앞날의 청사진을 쫒으며 숨가쁘게 살아가고...

생명의 흐름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 속에 정답이 없다 한들 어딘가에는 그 시간들의 시작과 끝을 정의하는 축은 필요할 터,
창조주의 천명으로 그 두개의 축을 회고와 내세로 명명한다.

이는 후일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신인류의 탄생에까지 그 기록을 이어갈 것이며, 오직 자격을 갖춘 자만이 선계의 윤회의 서고에서 확인할 수 있으리라.

14.10. 10장. 무신의 진의

흥진비래 - 무신 천진권

왜 하필 지금일까.
나의 세상은 분명 힘겹고 부조리한 곳.
그런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나의 발버둥에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언제든 떠나게 되어도 상관없다.
내가 감당하는 희생이 부당할지라도 나의 오랜 결의를 잊어버린 적은 진정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고,
그것이 나의 자부심이며,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일진데...

14.11. 11장. 낙화

낙화: 떨어지는 꽃잎 - 유란

한적한 밤, 유란은 만월관을 조용히 빠져나와 길을 나섰다.
오랜기간 유란을 피붙이처림 보살펴주었던 행수 기생의 만류에도 유란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아이를 위해서라도 떠나는 거야 …

새 삶을 시작하려는 유란이었지만 온통 발길이 닿는 곳곳에 와 함께 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사실 난 민들레를 참 좋아한다오.
민들레는 꽃이 떨어져 시들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세상을 누비지 않소.
나도 이처럼 목숨을 잃는다 해도, 후세에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소.

결국, 천진권은 그 말처럼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마황을 막기위해 동귀어진의 길을 떠났다.

대의를 위한 천진권의 선택 앞에 유란은 그저 웃으며 그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천진권이 떠난 그림움의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천진권 님...

그 밤, 유란이 천진권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되었다.
새 삶을 찾아 길을 떠난 유란은 그렇게 괴한의 공격을 받아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죽음을 맞는다.

14.12. 12장. 저마다의 갈림길

운명을 마주할 줄 아는 용기

누군가 운명이란 정해진 필연적 길을 따라 순응하는 삶이라 한다.
또 누군가는 운명이란 깨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행동에 따른 결과가 결정될 뿐.

과연 운명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명확한 정답을 내릴 자가 있겠는가.
순응하는 삶, 개척하려는 삶 모두 개인의 선택이자 의지가 아닌가.

하여 선인들 중 누구도 현계의 그들에 삶에 관여치 말 것이며,
갈 길을 제시해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저 각자의 신념대로 대처한 삶의 자세가 저마다의 운명이고 미래인 것,
다만 그 운명을 마주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결국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

14.13. 13장. 혹독한 진실

진정한 힘 - 진서연

인간은 누구나 가슴속에 선악의 갈림길을 두고 산다.

나의 첫걸음은 악의 길이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배신과 비극 속에서 나는 막다른 길에 놓여 있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악의 길뿐이었다.

그리고 악의 길을 가는 이들은 그 순간 인간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그 모습을 멈출 수 없다.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던 이들이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변하지 않아도 내 뜻을 순순히 따르니 말이다.

허나, 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선의 길을 가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힘에 대해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의 근간은 너에 대한 경외심이자 굳건한 믿음이다.

너는 내게 매 순간 좋은 인연이었음을 잊지 마라.

14.14. 14장. 인과 연

홍석근은 광휘의 전당으로 돌아온 막내를 보며 더없이 흐뭇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끝내 그 마음을 감추었다.

막내야,
눈부신 성장을 통해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네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로구나.

허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자리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니겠는냐.
아직 이곳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구나.

네게 주어진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계로 돌아가거라. 너는 아직 현계에서의 삶이 남아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현계에서의 사명을 찾아 꼭 이뤄다오.

익산운 비월 역시 같은 마음으로 그저 묵묵히 끝도 시작도 아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허나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새 시대를 맞이하여 현계를 끌고 갈 그 주역은 오직 단 한명 뿐임을.

15. 간막 : 풍운지회

15.1. 1장. 새로운 행보

오롯이 인간들만의 힘으로 일구어 나가는 세상.
미약하지만 현계에서는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실천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현세 속 곳곳에는 그늘진 음모와 불편한 진실과 거짓들이 스며 있었지만 그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희망 역시 공존하고 있었다.

막내는 그렇게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 발을 디디며 긴 여정을 함께해 준 소중한 인연들을 머리속에 떠올린다.

따뜻한 온정, 상실감, 그리움, 화합된 마음, 희생...
그리고 이들의 염원을 하나하나 새기며 다짐한다.

나의 사명,
인간들의 세상, 현계를 지켜낼 것이다.

15.2. 2장. 희망이 싹트는 계절

대장군 황무천은 서신을 받고 찾아온 막내를 반긴다.

새로운 의 시작에는 항상 막내가 있었다.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운국의 실상에 모든 기대를 잃었던 황무천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가져온 것도 그였고, 악태후의 준동을 막아내고 천명궁을 무사히 지켜낸 것도 그였다.

암, 새로운 운의 시작이라면 이 친구가 함께 지켜봐 주어야 마땅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황무천은 막내의 어깨를 두드린다.
어서 금화전으로 가보게나, 자네!

15.3. 3장. 구름과 바람의 노래

그는 아직도 그 목소리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 천풍, 부탁합니다. 우리 소유를... 소유를 꼭 지켜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 서로를 아버지라, 딸이라 칭한 적은 없지만 같이 보낸 그 세월은 분명히 가족의 시간이었으리라.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 지금 남소유는 섭소유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 곧 즉위식이 열리고 섭소유는 정식으로 운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런 지금, 도천풍은 생각한다.

가족으로서, 아비로서 해줘야 할 마지막 일이 있다고.

15.4. 4장. 축제의 밤

드디어 즉위식이 시작된다.

섭소유는 심호흡 했다.
이제 대북이 울리고 이 문이 열리면 운국의 황제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문득 부끄러운 옛 기억이 떠올랐다. 황후가 되어 보이겠다며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하던 시절이. 그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옛날의 철없던 남소유가 아니다.
황제 섭소유로써 운국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이다.

섭소유는 그리 다짐하며, 한 발 내딛었다.

15.5. 5장. 하늘에 수놓인 소원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부푼 사람들. 현란한 밤하늘의 불꽃 아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즐거운 환호성이 울려 펴지고 있다.

들뜬 거리의 분위기에 늘 진중하던 팔부기재도 한껏 고양되어 있다.
그때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는 고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대협!! 빨리 주막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요!"

아무래도 축제 분위기에 고양된 건 팔부기재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5.6. 6장. 찰나의 휴식

축제의 밤하늘이 수많은 풍등으로 은은하게 수놓인다.
마침내 찾아온 평화를 축복하는 듯한 아름다운 밤이다.

막내의 염원을 담은 풍등도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이 평화로운 광경이 계속 되길...

그 염원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막내는 다시금 사명을 다하겠다 결의한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축제의 여운을 즐기도록 하자.

16. 12막. 북녘의 붉은 달

16.1. 1장. 악몽

"이보게, 정신 좀 차려보게!"
누군가 몸을 힘차게 흔드는 바람에 막내는 마치 참았던 숨을 토해내 듯 잠에서 깨어났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도천풍의 얼굴과 그의 목소리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이든다.

귓속이 울린다.
심장이 마치 온몸을 돌아다니는 듯, 손끝마저 두근거린다.
눈을 껌뻑일 때마다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팔부기재의 얼굴과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병사들의 날카로운 창 끝이 아른거린다.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자 마치 정답을 보여주듯 커다란 거울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거울!'
막내는 순간 숨을 멈추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꿈속 거울에 비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어둠.
흑룡이라 불리는 존재.
'마황'이었다.

16.2. 2장. 불길한 일식

대선사 나율은 자신이 요 근래 반복해서 꾸었던 악몽에 대한 실마리가 드디어 풀렸다.
그가 막내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날... 그날로부터 천년 전이 바로 서방대륙에 천년 일식이 일어났었다.

천년 일식과 함께 마계의 문이 열리고 마황이 강림한다.

천년 일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계에서의 전투로 천진권이라는 '그릇'이 깨어진 후 마황에겐 '새로운 그릇'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 세간 사람들에게 대협이라고 칭송받는 자가 지난밤 꾸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 나율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자가 그릇이란 말인가?'

마황은 막내를 자신의 새로운 육체로 선택했다.
이제 어떻게든 이 자를 잠식하려 할 것이다.
막내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내공은 나율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자가 마황이 된다면 세상은 파멸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16.3. 3장. 잊혀진 북녘의 땅

마황의 힘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찾기 위해 북녘의 붉은 달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이 시급했다.
이 정보들은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책 중에 있을 것이라는 대선사 나율의 조언을 받아 막내는 북방 대륙 문헌의 열람 허가를 위해 풍황궁으로 찾아간다.

상황을 전해들은 풍국 황제 군마혜는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까지 풍운의 화평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운 자가 이제 엄청난 혼돈과 어둠에 휩싸여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작 해줄 수 있는 것이 오래된 책 한 권과 다시 알현할 필요 없이 빠르게 운국으로 출발하라며 황제의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 밖에 없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풍황궁 어사부-
막내는 군마혜가 준비해 둔 문헌집을 살펴보았다.
꽤 오래된 문헌집에는 북방대륙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는 듯 했다.

- 북방대륙 문헌집 상편 -
북녘의 불라 산맥을 따라 태극의 기운이 흘러 음양 오향을 낳았으니, 대지가 일어서고 살아 숨이는 생명이 꽃을 피우리라.
창조된 이 땅 위에 대자연을 품은 봉우리여, 솟아라.
천지만물의 기운을 끌어모아 만천하에 전하여라.
그리하여 붉은 달이 떠오르면 황룡의 축복을 받은 자가 북녘땅에 걸음을 두니, 영롱한 빛의 돌을 타오르는 하늘 기둥에 실려 이 땅의 새 주인이 탄생하리라.
전설을 쓰는 자여, 대자연의 기운을 한 데 모아 새 주인을 맞으라.

16.4. 4장. 북방으로

- 북방대륙 문헌집 하편 -
운기 1000년,
운국 제후를 몰아내고, 북섬의 불라국 재건되다.
전제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왕권 통치를 시작하며 타 국가간 교류에 대한 초강경 제제 결의안 공표.
모든 수출입 화물을 선적한 상선의 입항 전면 금지,
화물에 대한 검색 의무화.
북방 대륙으로 이어지는 모든 육로 봉쇄 및 통제.
북방 해협을 지나는 해로만이 유일한 이동로로 알려져 있음.

운국 황제 섭소유는 문헌을 뒤적이며 실망하는 막내의 얼굴을 보자 살짝 조바심이 났다.
서신을 받고 문관들을 동원하여 북방 대륙의 문헌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죄 과거의 기록들 뿐이라 쓸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동안 금은보화나 영지를 하사한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던 막내였던지라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나무마을 해안에 드나들던 타국의 표국선들...
그래, 표국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북방 대륙의 근황이라면, 직접 가보는 것이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외교는 단절된 지 오래이지만 북방 대륙에도 표국은 다닐 터!
물건을 운반하는데 장소 불문하는 표국이라면 폐쇄적인 북방 대륙 사람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북방 대륙으로 향하는 표국선에 승선하는 사람들이 표사들로 위장한 학자들과 서기관 그리고 군사들이지만 말이다.

풍황국의 도움으로 위장 표국선을 준비하는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풍운의 병사들과 학자들이 막내와 함께 승선하고 섭소유와 군마혜는 사람들과 함께 그 뒤를 배웅하며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그렇게 북방 대륙을 향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16.5. 5장. 무법자 속 비무법자

배에서 떨어져 파도에 휩쓸린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감옥 안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주변에 보인다.

"야! 조용히 해! 외지인들이 어디서 시끄럽게 떠들어?"
호전적으로 보이는 덩치의 간수들이 감옥 문을 요란스럽게 치며 들어온다.
함께 갇혀있던 격물학자가 간수장이 조금 전 생물학자 원상을 격투장 대타로 쓰겠다며 강제로 끌고 갔다며 발을 동동구른다.

막내는 마침 지나던 간수를 불러 세워 거래를 제안한다.
내가 그 대신 출전하고 만약에 지더라도 당신이 건 돈의 2배를 주겠노라고!
돈 욕심이었는지 단순한 흥미였는지 간수는 거래에 흔쾌히 응하고 막내는 그들이 만들어둔 허접한 투기장으로 나선다.

배에서 떨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걸까? 몸이 생각보다 무겁다.
내력 운용도 흡사 물에 젖은 모래주머니를 수십개 지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허접한 녀석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외지인 주제에!!! 어딜 흥정을 하려 들어? 얘들아, 쳐라!"

역시나 판이 불리해지니 때로 몰려든다.
무거운 몸, 연속된 대전에 안 그래도 지치는데 장정 여러명이 덤비니 조금 버거워진다.

"이런 비열한 놈들, 도저히 못 봐주겠군!"
시원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보라색의 옷자락을 날리며 가면을 쓴 자들이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16.6. 6장. 다시 닿은 인연

소연화는 전설 속 비보를 찾아 꽤 오래전 북방 대륙으로 넘어왔다.
그녀가 가진 화술과 비상한 머리 덕에 외지인에게 적대적인 북방 대륙 사람들도 소연화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이 곳에서 크게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환영단과 소연화 또한 꽤 좋은 관계였는데,
환영단이 역천회를 습격할 때 소연화는 이들과 함께하며 역천회의 막대한 재화들을 챙기는 재미가 쏠쏠했던 터라 이들의 정보원을 자처하며 여러 임무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소연화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이만 리 타국 땅에서 대협을 만날 줄이야!
소연화는 눈앞에 있는 막내의 얼굴을 보고 오래간만에 고향에 온 것 같이 신이 났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막내와 함께 다니면 그동안 찾아다니던 전설의 비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16.7. 7장. 약육강식의 법칙

"자아~ 이십 대 후반의 체격 건장한 남성입니다. 게다가 물 건너온 외지인이군요?"
고풍스러운 모자를 눌러쓴 세련된 여성이 장내에 서서 바닥에 꿇어 앉아있는 노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이름은 화령.
피도 눈물도 없고 그저 돈으로만 움직인다는 노예 중개인.
그념의 외침에 경매장에 모인 역천회 간부들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곳은 막내가 처음 눈을 뜬 그 검문소가 있던 곳으로 백해군항이라 불리는 북방대륙의 해군시설이다.
북방대륙에 이렇다할 군대가 없다시피하자 역천회가 대륙인들의 보호를 자처하고 교역 관리나 외부 침략에 대비해 모든 군사 시설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는 대외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교역선들에게 말도 안되는 세금을 물리거나, 의 교역선처럼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선한 사람들에게 벌금등을 강제로 징수한 후 돈을 내지 못하면 노예로 파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백해군항의 건물 중 한 곳은 역천회가 노예를 사고 파는 경매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날은 풍운국의 사람들이 포함된 노예 경매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정보가 환영단에게 들어왔던 것이었다.

"화..환영단 놈들이 나타났다! 비상! 비상!"

경매장 문을 부수고 나타난 환영단 때문에 간이 경매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간부들이 황급히 무기를 챙겨 대응했지만 막내와 환영단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막내는 구출한 노예들을 데리고 환영단이 대기 중이라는 뒷 문으로 빠져나왔지만 그 곳에서 보게된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환영단원들이었다.

16.8. 8장. 심마

광물의 매캐한 냄새 때문일까?
광산에 들어선 순간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속이 울리는 듯하다.

막내는 북방 대륙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상태가 계속 좋지 않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돌아보니 왠지 소란스럽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뭐에 홀린 듯 구석에서 끓고 있던 죽 솥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죽을 퍼먹고 있다.
그 중 비루한 옷차림의 노인만이 이 상황도, 이 상황에 끼어든 외지인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노인은 이 외지인이 마음에 걸렸다.
구해준 것은 고맙긴 했지만 얼도 좀 빠진 듯하고, 전설인지 뭔지를 찾는다며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질 않나, 잘못 엮였다간 골치 아플 것이 뻔해보였다.

귀찮게 굴 것 같아서 아까 역천회 놈들이 여자애를 막장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본 것 같다고 하니 얼굴이 하얘져서는 황급히 막장으로 향한다.
노인은 그 뒷모습을 보며 뭔가 상태는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의리 하나는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소연화는 난리 통에 휩쓸려 정신을 차려보니 역천회에 둘러싸여 있었다.
호기롭게 덤벼보긴 했지만 놈들의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녀석들의 발길질에 멀리 나가떨어지는 순간, 막내가 바람처럼 나타나 역천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소연화는 막내의 실력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쓰러뜨린 악당이 몇이었나?
그의 무공에 나가떨어지는 역천회들을 보면서 소연화는 얼얼한 엉덩이를 탁탁 털며 '내가 저 대협이랑 친하다니!"라고 생각하곤 조금 흐뭇했다.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막내에게 별거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 막내의 무공이 소연화를 강타했다.

"아악! 무... 무슨 짓이야? 대협?!"

두 번째 들어오는 타격은 겨우 피했지만 그만두라는 소연화의 외침은 막내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뭐야?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야?'
급소를 노리는 막내의 다음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소연화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푹~!하고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난다.
사방이 조용하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방금 전까지 죽일 듯 달려들던 막내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16.9. 9장. 산적은 산적이다

조금 전까지 씩씩대며 절대 화를 풀 것 같지 않았던 소연화는 언제그랬냐는 듯, 사뭇 신난다는 얼굴로 삼룡단 산채 안쪽을 둘러본다.
이내 산채 안쪽에 쌓여있던 약탈품들을 보더니 눈빛까지 반짝인다.

"지형의 단차만 잘 이용하면 안으로 잠입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뒤를 따라오기만 하라는 듯 자신있게 안으로 날아든 것 까진 좋았는데 아뿔사! 함정이었다.
삼룡단이라 삼룡이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일부러 지형을 그런식으로 만들어 놓았을 줄이야!

문제는 막내도 소연화의 비명소리를 듣고 놀란 나머지 너무 성급하게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녀를 구하겠다고 돌진했다가 똑같이 함정에 걸려버린 것이다.

퍼져오는 독기운에 온 몸이 저려온다.
그 와중에도 산적들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소연화를 보면서 '저 소리를 듣고 환영단이 구하러 오기를 바라는 건 무리인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눈 앞에 펑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리고 이어 상인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으로 나타나 삼룡단 산적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독에서 완전히 풀린 소연화와 막내도 전투에 합류하자 기세에 밀린 삼룡단은 산채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쌓여져 있는 물품 중에서 마을 사람들이 빼앗겻다던 물품들을 찾고 있으니 자신을 금산호라 소개한 상인이 자신이 도와줄 것이 있겠느냐며 다가온다.
일개 상인이라 했지만 아까의 전투나 풍기는 기운이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16.10. 10장. 약을 부추기는 기운

"이런! 젠장! ...목련아!"

바닥에 가면을 내던지며 흑화사가 울분을 터뜨린다.

실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했다.
이 곳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지금까지 싸워온 적들과 얼마나 다를지도 모른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여전히 내공은 물 속에 잠겨 있는 듯 무겁기만하다.
하지만 단목련을 잃고 비통해하는 환영단원을 보고 있노라니 모든 것이 핑계같기만 했다.

"사하린님! 이두강의 행적을 찾았습니다! 대원들이 마을 뒤쪽 목초지에서 그를 보았다고 합니다!"
금산호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연화 막내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을 뒷 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목초지라고 하기엔 조금 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듯 여기저기 붉은 화염이 남아있는 새까맣게 타버린 언덕이었다.
그리고 목초지 여기저기에 설치된 거대한 검은 기둥들에서 뭔가 익숙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으으... 이거 뭔지 느낌온다고!"

소연화는 과거의 일이 생각나 메슥거린다는 듯 온 몸을 움추리며 당장 기둥을 부숴버려달라 졸라댄다.
하지만 막내는 다른 어느 때 보다 더 내력의 운용이 힘든 상태였다.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리려 했지만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광상 때 처럼 정신을 잃을 것 만 같았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하면 되잖아!"

막내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 소연화가 재빠르게 자세를 잡고 내력 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연화 혼자는 무리였다.
막내가 까마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기둥에 걸린 주술을 해제하는 것을 돕는 순간 이두강이 나타났다.

이두강은 한단 마을에서 막내를 봤을 때 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내가 지금 북방 대륙의 특별한 힘에 의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바로 눈치챘다.

그의 공격이 막내를 매섭게 공격한다.
평소 같았으면 이두강 정도는 벌써 때려눕히고도 남았어야 했을 동방대륙의 대협은 속수무책으로 이두강에게 끌려다니기만 한다.

"크크크. 멍청한 건가, 둔한건가? 지금 쯤이면 알 때도 됐는데? 네놈의 무공 따위가 여기서는 무용지물 인 것을!?"

이두강의 창이 막내의 심장에 꽂히려는 순간, 구석에 숨어있던 소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무신의 힘을 끌어내어 이두강을 공격한다.

[1] 2014년 12월 17일 [2] 2014년 12월 17일 [3] 출처: # [4] 내용 출처: 파일:external/i.gyazo.com/9f52169cf9852f29a6a76a38184ac309.png [5] 대부분이 나무가 변형된 형태로 생겼다. 그래서 그루족인가..한그루 두그루.. [6] 진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