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3:22:44

부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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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1. 개요

1104 ~ 1154년에 걸쳐 다마스쿠스와 시리아 남부 일대를 다스린 튀르크 계 왕조. 셀주크 제국의 봉신이었으며 2차 십자군을 상대하였다. 왕조의 이름은 2대 군주이자 톡테킨의 아들 타즈 알 물크 부리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에게 선물을 바치고 실질적인 독립을 얻어냈으나 아사신 본거지를 습격했다가 그 자객에게 목숨을 잃으면서 부리 조는 쇠퇴에 이른다. (1132년) 이후 우누르의 섭정 하에 십자군과 동맹하며 연명하다가 장기 왕조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 에게 멸망당한다.

2. 역사

1092년 말리크 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그의 아들들간의 내전에 휩쌓였고 이스파한의 연금지에서 탈출한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룸 술탄이 되었고 시리아의 지배자인 동생 투투쉬 1세는 술탄을 칭하였다. 그러나 1095년 투투쉬는 카쿠이 왕조와 동맹하여 이란으로 진격했다가 술탄 바르키야루크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투투쉬의 장남 리드완은 동생들을 교살하고 부왕의 영토를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의 노예들이 들이닥쳤을 때에 셋째 동생 두카크만이 알레포를 탈출하였고 그는 다마스쿠스를 접수하곤 복수를 위해 예루살렘의 아미르 일가지와 연합하였다. (1096년) 그러자 리드완은 안티오크의 아미르 야기 시얀, 일가지의 동생 소크만과 동맹을 맺고 동생과 시리아를 두고 내전을 벌였다. 유럽에선 1차 십자군이 막 결성되던 시기였다.

알레포-안티오크 군대는 두카크의 본래 상속령이던 자지라 지방을 공격하여 우르파 (에데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097년 야기 시얀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편으로 전향하였고 이에 리드완은 안티오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두카크가 구원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그틈에 알레포 군대는 주인이 부재한 다마스쿠스를 포위해버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리드완을 도와 홈스를 점령한 그의 아타베그 자나 앗 다울라가 분쟁을 겪은 끝에 알레포로부터 독립해버렸다. 혼란의 연속 그러자 자나와 사이가 안좋았던 야기 시얀은 이번엔 자신의 딸을 리드완과 결혼시키며 알레포와 동맹하였다. 새로 결성된 동맹군은 인근의 하마까지 점령해버린 리드완을 피해 다마스쿠스와 동맹을 맺은 샤이자르의 문키드 왕조를 향해 진격하였다. (1097년)

그때 1차 십자군이 안티오크 인근에 이르렀고 무슬림 영주들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다. 야기 시얀은 3일 거리에 위치한 사위인 리드완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자 옛 동맹인 두카크의 지원을 바라며 아들 샴스 앗 다울라를 파견하였다. 이에 두카크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고 1097년 12월 말 안티오크 동쪽의 하림 인근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타란토 백작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십자군 분견대와 마주쳤다. 하지만 두카크가 망설이는 동안 십자군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이어진 전투에서 다마스쿠스 군대는 패하였다. 두카크는 샴스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하마로 철수하였다. 그나마 전투 중 십자군의 식량이 소실되어 안티오크 포위전 내내 그들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게 된 것이 야기 시얀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1098년 2월, 마침내 리드완이 안티오크 구원에 나섰으나 십자군에게 포위당할 것이 두려워 호수와 강 사이에 진을 쳤다가 보에몽의 돌격에 대패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야기 시얀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모술의 아타베크 카르부카는 그해 2월 십자군에게 점령된 에데사를 먼저 공격하는 악수를 두었다가 3주간의 포위 끝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안티오크로 향하였으나 이미 도시는 내부인의 배신으로 함락된 뒤였다. 이때 두카크 역시 카르부카 측에 가담하였으나 승리할시에 그가 시리아를 노리려 할 것이라 판단하곤 전투 직전 진영을 이탈해버렸다. 이에 다른 시리아 영주들도 가담하자 카르부카 역시 제대로 전투도 못해보고 후퇴하였다. 오직 홈스의 자나만이 제대로된 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두카크는 이 틈을 노려 카르부카가 장악했던 디야르바크르를 회복하였다.

1099년 레몽의 십자군이 남하하자 라타키아 남쪽의 자블라의 카디가 다마스쿠스에 항복했는데, 두카크는 자신의 부관 톡테긴의 아들 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듬해인 1100년 5월 두카크는 골란 고원 일대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고드프루아와 탕크레드의 십자군을 습격하여 패배시켰다. 그들은 약탈물 때문에 제대로 반격도 못하였고 전사자들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패주하였다. 이후 탕크레드는 다마스쿠스 인근을 약탈하였고 이에 두카크가 돈을 줘 무마시키려 하자 특사를 보내 아미르에게 기독교 개종 혹은 도시 헌납을 요구하였다. 모욕적인 요구에 분노한 두카크는 6명의 사절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 혹은 죽음을 명하였고 그에 응한 1명을 제외하곤 처형되었다. 10여일간의 약탈에 다마스쿠스 인근의 농경지는 황폐해졌다. 이때부터 골란 고원의 제후들이 예루살렘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수모를 당한 두카크는 그해 가을 고드프루아가 죽었고 이에 그의 조카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예루살렘 왕국을 이어받기 위해 겨우 5백명의 기사들을 대동하고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마스쿠스 시민들의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두카크는 레바논 북부의 협곡인 나흐르 알 칼브 (개의 계곡)에 매복하여 그를 노렸으나 두카크의 세력 확대를 경계했던 트리폴리의 지배자 파크르 알 물크가 보두앵을 초청하여 정보를 알려주며 무산되었다.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당황한 다마스쿠스 인들은 화살을 퍼부었으나 별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서로의 무력함을 탓하다가 후퇴하였다. (1101년 10월) 한편 1101년의 십자군을 이끌다가 클르치 아르슬란에게 대패를 당한 레몽 드 생 질이 겨우 3백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트리폴리를 공격해오자 그 지배자인 파크르 알 물크는 자신이 배신했던 두카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1102년 4월, 두카크는 홈스의 자나와 함께 트리폴리 성문 앞의 레몽과 맞섰다. 십자군은 3백의 기사를 삼분하여 각각 트리폴리, 다마스쿠스, 홈스의 군대와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두카크는 홈스와 도망쳐버렸고 레몽은 트리폴리 군대 중 7천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나흐르 알 칼브에서 배신한 파크르 앗 딘에 대한 두카크의 복수는 결국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1103년 홈스의 지배자인 자나 앗 다울라가 알레포의 아사신에게 암살되자 두카크는 부관 톡테긴을 파견하여 도시를 접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쿠크는 어린 아들을 남긴채 죽었다. 이에 두카크는 그의 과부와 결혼하고 투투쉬 2세의 아타베그로 행세하며 전권을 장악하였다. 톡테긴은 곧 투투쉬 2세를 폐위시키고 두카크의 동생 이르타쉬를 옹립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추방하곤 스스로 아미르가 되었다. (1104년)

이르타쉬는 보스라의 아이테킨의 도움을 받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보두앵 1세의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1108년 4월 트리폴리의 카디 파크르 알 물크가 술탄의 도움을 청하려 바그다드로 향할 때 톡테긴은 그를 성대히 맞았으나 아직까지 다마스쿠스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카디는 성밖의 진영에서 숙영했다. 다음달인 5월 톡테긴은 갈릴리 백작의 십자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백작은 몸값을 제안했으나 톡테긴은 이를 묵살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그럼에도 그해 말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110년 4월 톡테긴은 알 타즈가 지배하던 바알벡을 포위, 점령하였고 아들 부리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111년 11월, 십자군에 포위된 티레가 톡테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그는 파티마 해군과 함께 진군하여 1112년 4월 십자군의 격퇴를 이끌어내었다.

한편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는 파크르 알 딘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으나 마우두드의 원정군에게 먼저 자왈리가 지배하는 모술부터 점령하게 하였다. 트리폴리가 함락되는 1109년에야 모술을 장악한 마우두드는 1111년 알레포의 카디 알 카샤브의 바그다드 시위 이후로 드디어 마음을 정한 술탄의 명으로 시리아로 출정하였다. 비록 알레포의 리드완이 성문을 닫아버렸고 일부 영주들이 철수해버리긴 했지만 마우두드는 샤이자르를 포위한 십자군을 퇴각시켰다. 2년 후 재차 출병한 마우두드는 이번엔 다마스쿠스로 향하였고 톡테긴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환대를 받았다. 이후 모술-다마스쿠스 연합군은 갈릴리를 휩쓴 후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였다. 이에 보두앵 1세의 십자군이 다가오자 연합군은 갈릴리 호수 남쪽의 요단강으로 향하였다. 그곳의 다리 알 산나브라에서 양측은 조우하였다.

마우두드는 선발대에게 거짓 후퇴를 지시하였고 이에 십자군이 추격해오자 나머지 군대를 통해 반격하였다. 앞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며 무슬림 군대를 과소평가하던 십자군은 대패하였고 갈릴리 호수 서쪽의 언덕으로 올라가 농성하였다. (1113년 6월 28일) 이때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의 원군이 도착하여 보두앵 1세는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알 산나브라 전투 이후 군대가 부족해진 예루살렘 왕국은 순례객들도 입대시킬 만큼 충격을 입었다. 마우두드는 분견대를 파견하여 나블루스 등의 마을들을 습격하였다. 다만 티베리아스의 수비대는 이후로도 완강히 저항하였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우두드는 다마스쿠스로 회군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2일, 다시 출정하기 전날 기도를 마친 마우두드는 톡테긴과 함께 걸어가던 중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자신의 대장을 신의 집에서 죽인 민족은 망해야 마땅하리!
ㅡ 보두앵 1세가 톡테긴에게

비록 톡테긴은 아사신을 비호하는 알레포의 리드완을 비난했지만 다마스쿠스 주민들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톡테긴은 이듬해 알레포 새 군주 알프 아르슬란과 대 십자군 동맹을 맺었으나 같은 해 그가 암살되며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편 마우두드의 사망에 분노한 술탄은 모술의 신임 아미르로 알 보르소키를 임명하고 지하드를 이끌게 하였다. 보르소키는 1114년 에데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말 마르딘을 지배하는 일 가지의 습격을 받아 모술로 패퇴하였다. 이에 술탄은 하마단의 아미르 부르수크를 새로히 임명하여 시리아로 파견하였다. 1115년 봄, 잠시 에데사를 포위해본 부르수크는 작년에 지진을 겪은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하기 위해 알레포로 향하였다. 그러나 술탄을 두려워하던 알레포의 아타베그 룰루는 마르딘의 일가지, 다마스쿠스의 톡테긴을 불러 연합 전선을 요청하였다. 톡테긴은 더 나아가 안티오크 공작 로제르까지 불렀고, 이에 그는 2천 군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안티오크에서 알레포 방향에 위치란 아따립에서 5천에 달하는 톡테긴, 일가지, 룰루의 무슬림 군대와 만난 로제르는 아파메아를 거쳐 남쪽으로 행군하였다. 그리고 부르수크의 군대가 포착되자 로제르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부르수크는 우선 하마를 점령하였고 친셀주크 노선을 유지하는 문키드 왕조의 샤이자르에 본영을 세웠다. 한편 보두앵은 로제르에게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응전하지 말 것을 명한 후 1천의 보병과 5백의 기사들과 북상하였다. 도중에 트리폴리 백작 퐁스가 이끄는 2천의 보병과 2백의 기사까지 합세하였다. 한편 부르수크는 기사들의 무모한 돌격을 유도하기 위해 로제르의 진영에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며 십자군을 자극하였다.[1] 이에 의욕이 넘치는 기사는 기사들이 응전하려 하였으나 로제르는 명령 없이 진영을 나서는 자의 눈을 뽑겠다고 위협하였고 말을 타고 칼을 든 채 진영을 순시하기도 하였다.

보두앵의 지원군이 합류하며 무슬림-십자군이 1만 이상으로 불어나자 부르수크는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연합군은 샤이자르로 진격하여 셀주크 측과 연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성채를 제외한 시내에 방화하였다. 그럼에도 셀주크 측이 잠잠하자 무슬림과 십자군 제후들은 원정이 끝났다고 여겨 해산하였다. 한편 후퇴하여 상황을 지켜보던 부르수크는 동맹이 해산된 틈을 노려 돌아왔고 샤이자르 인근의 십자군 거점인 카파르탑을 점령한 후 안티오크를 향해 나아갔다. 당황한 로제르는 2천의 보병과 7백의 기사들, 그리고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가 이끌고 온 지원군과 합쳐 안티오크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오론테스 강가의 루지아 성채에 주둔하였다. 로제르의 빠른 대응을 알지 못했던 부르수크는 안티오크에서 동남쪽으로 37km 떨어진 제르다나를 거쳐 물이 풍부한 곳에 진영을 세우기 위해 사르민 인근의 텔 다니스로 향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로제르는 빠르게 텔 다니스로 향하였다. 1115년 9월 14일, 그곳에서 흩어져 진영을 세우던 튀르크 병사들은 십자군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놀란 부르수크는 진영을 버리고 언덕 위로 후퇴하였다. 십자군은 셋으로 나뉘어 중앙의 로제르가 진영을 장악하는 좌익의 동안 보두앵의 에데사 군대가 언덕을 공격하였다. 셀주크 군대는 십자군 우익의 궁병들을 격퇴하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때 로제르가 전투에 가세하며 패퇴하였다. 부르쿠스의 8천 군대 중 3천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십자군은 30만 베잔트에 달하는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까지 5년간 안티오크 공국은 전성기를 누렸으며 모술은 향후 10년간 십자군과의 전쟁을 피하였다. 그리고 십자군이 너무 강력해졌다고 여긴 톡테긴은 이듬해인 1116년 바그다드로 향하여 술탄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렇듯 양쪽을 오가며 독립을 유지하던 톡테긴은 1117년 마르딘의 일 가지가 알레포를 접수하자 그와 동맹을 맺었다. 일 가지는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로제르 공작을 전사시키고 안티오크를 포위하였으나 십자군 지원군에게 합 전투에서 패한 후 철수하였다. 이때 아따립, 사르민, 제르다나 등이 알레포의 영토가 되었다. 1122년,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의 공격이 임박한 티레를 다마스쿠스에 매각하였다. 톡테긴은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했으나 결국 5개월간의 포위 끝에 1124년 함락되었다. 도움을 약속했던 일 가지의 후계자 발라크가 요절하고 구원병을 이끌고간 톡테긴이 퐁스 백작과 응전하자마자 퇴각한 결과였다. 한편 발라크의 후계자인 티무르타쉬는 부왕이 사로잡은 보두앵 2세를 풀어줬는데, 그 직후인 10월 8일 곧바로 군대를 모아 알레포를 포위해오자 고향인 마르딘으로 피신하곤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알레포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의 주선으로 모술의 알 보르소키가 진군해오자 십자군은 도주하였다. (1125년 1월) 보르소키는 그들을 추격하는 대신 입성하여 도시를 둘러보았다. 톡테긴은 의욕이 넘치는 그와 동맹하였고 그해 11월 함께 (1118년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이 점령한) 아자즈를 공격하였다. 이에 보두앵 2세[2], 조슬랭 1세, 퐁스 등의 십자군과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가 이끄는 1100명의 기사들과 2천의 보병이 지원군으로 당도하였다. 보두앵은 튀르크 전략인 거짓 후퇴 전술을 사용, 보르소키를 평지로 이끈 후 포위하여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알레포 측은 2천여명이 전사하였다. 보두앵은 알레포 진영을 취하였고 그곳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무슬림 진영으로부터 미래의 조슬랭 2세를 포함한 십자군 포로들의 몸값을 마련해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후 보르소키는 아들 마수드에게 알레포를 맡기곤 모술로 돌아갔다.

이에 보두앵은 재차 알레포 공격을 꾀했으나 1126년 안티오크 공국과 에데사 백국 간의 전쟁이 벌어져 무산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병력만을 동원하여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는데 톡테긴은 이를 잘 격퇴하였다. 그해 가을, 톡테긴은 재차 보르소키와 함께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11월, 알 보르소키는 금요 예배 중 모술의 대사원에서 암살되었다. 이듬해 그의 아들인 마수드까지 암살당하자 알레포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1127년 가을,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2세가 알레포 앞에 나타나자 주민들은 막대한 공물을 바쳐 이를 무마시켰다. 한편 1113년 알레포 학살 이후 다마스쿠스에 침투한 아사신 세력은 톡테긴이 쇠약해지자 자체 군사 조직까지 보유하며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1128년 2월, 서유럽인들의 기록에 '도데킨'으로 알려진 톡테긴은 자신의 아들 부리를 후계자로 지목한채 세상을 떠났다.
투그티긴의 죽음으로 프랑크 인들과 맞설 수 있었던 최후의 인물이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시리아 땅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알라께선 무슬림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ㅡ 이븐 알 아시르

그 후 다마스쿠스만은 지켜내며 연명하다가 튀르크 계 장수 무인 앗 딘 우누르의 섭정기 (1140 - 1149) 에는 레반트 (시리아 + 이라크) 통일을 추진하던 장기 왕조에 대항하여 십자군 세력과 동맹하기도 한다. 아미드 앗 딘 장기도 안티오크 공국과 동맹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십자군에게 배신을 당하고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 때 누레딘의 군대가 나타나 십자군을 격퇴했고, 그럼에도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지 않고 유유히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퇴각했다. 멋지다

그 후 누레딘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에 더욱 조급해진 부리 조의 군주는 십자군과의 동맹 강화를 시도한다. 굴종적으로 십자군과 타협하는 모습에 진저리가 난 다마스쿠스 시민들이 전에 장기 조의 쿨한 누레딘에게 성문을 열어주며 부리 왕조는 멸망에 이른다. (1154년)

여담으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영주 부리가 새부리를 가지고 자주 등장한다.

[1] 같은 튀르크인들보다 기사들이 더 상대하기 어려웠으므로 그들부터 처리하려 한 듯하다. [2] 당시 안티오크의 섭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