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1:47:15

베트콩

베트공에서 넘어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ruby(𩈘,ruby=Mặt)] [ruby(陣,ruby=trận)] [ruby(民,ruby=Dân)] [ruby(族,ruby=tộc)] [ruby(解,ruby=Giải)] [ruby(放,ruby=phóng)] [ruby(沔,ruby=miền)] [ruby(南,ruby=Nam)] [ruby(越,ruby=Việt)] [ruby(南,ruby=Nam)]
National Liberation Front for South Vietnam
파일: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기.svg 파일: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엠블럼.svg
깃발 휘장
Độc lập, Dân chủ, Hòa bình, Trung lập
독립, 민주, 화평, 중립
<colbgcolor=#da251d><colcolor=#ffff00> 활동
지역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주 활동 지역)
이외 인도차이나반도 지역[1]
목적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적화통일
소속 파일:베트남 공산당 당기.svg 베트남 공산당
결성 1960년 12월 20일
해산 1977년 2월 4일
성격 민병대
이념 공산주의
베트남 내셔널리즘
좌익 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반체제
반미주의
스펙트럼 극좌
참전 베트남 전쟁
라오스 내전
캄보디아 내전
관계
동맹 국가 및 세력 적대 국가 및 세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개요2. 명칭3. 상세4. 군대
4.1. 게릴라 전술4.2. 부비트랩4.3. 구찌 땅굴
5. 전쟁범죄6. 숙청설7. 인터넷 밈

[clearfix]

1. 개요

파일:article-small-arms-of-the-viet-cong-1.jpg.webp
<rowcolor=#ffff00> 베트콩 소년병들[2]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통칭 베트콩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화국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다.

한국에서는 1960~90년대 당시에는 배트맨과 엮어져서 농담거리가 되곤했다. 원어로는 비엣콩이지만, 한국에서 일본어 중역을 거쳐서 월의 베트남어 발음이 비엣이 아닌 베트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2. 명칭

흔히 베트콩(Viet Cong, 越共)이라고 하는데 베트콩은 '베트남 공산주의자(Việt Nam Cộng-sản, 越南共産)'의 약칭일 뿐이다. 이 말은 남베트남 초대 총통(대통령) 응오딘지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는 멸칭이었지만 지금은 공산주의자들도 사용한다. 남베트남 해방군 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의 앞글자를 따 와 NLF 혹은 베트콩(Viet Cong)을 줄여 VC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히 베트콩을 베트남인 비하발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것은 최근에 생긴 용어이고 베트콩은 원래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를 일컫는 것이지만 현재 뜻이 또 생겼긴 했으니 다의어로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다.

베트콩을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회)이랑 혼동하는 사례도 있는데 베트콩과 베트민은 서로 다른 조직이다. 베트민은 베트남 독립전쟁 당시 싸운 조직이고 베트콩은 베트남이 분단되고 생긴 조직이다.

3. 상세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스스로 남베트남의 자생적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들은 북베트남의 지령을 받는 하부 조직으로 인식했다. 현재의 베트남도 베트콩이 베트남 인민군 소속이라고 인정했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의 탄랍이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남베트남 정권 붕괴를 위해 결성되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뿐만이 아니라 남베트남 정부의 차별을 받던 농민들까지 가입했다.

4. 군대

흔히 베트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베트남 농민들의 일상복을 입고 nón lá라고 불리는 삿갓을 쓰고 소총을 들고 있는 집단이지만 실제 베트콩은 북베트남 정규군으로부터 피복, 무기 등의 물자나 교육 훈련 등 각종 지원을 받아 정규군에 준하는 차림새를 한 경우도 많았고 아예 베트콩으로 위장하고 남파된 북베트남 정규군들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의 군복에서 계급장 등만 제거하고 다니기도 했다.

한편 북베트남 정규군 자체가 이 베트콩과 혼동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놓고 남파해서 게릴라전을 펼친 북베트남 정규군도 있었고 정규전과 게릴라전이 혼재된 베트남 전쟁의 특성상 적군인 미국 입장에선 베트콩과 북베트남 정규군을 구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4.1. 게릴라 전술

베트콩의 대표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정글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미군을 공격하고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 이 때문에 미군은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 미국은 이런 정글을 없애기 위해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 고엽제를 살포하고 엄청난 폭격을 퍼부었으나 정글은 매우 넓어 별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폭격, 고엽제로 인해 많은 민간인과 동맹군들만 죽어나갔다. 베트콩들의 지속된 게릴라전으로 미군은 제대로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병력만 줄어나갔다.

4.2. 부비트랩

베트콩의 승리 전략 중 하나는 바로 부비트랩인데 최소한의 물자로 적군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최대 사망시킬 수 있는 함정을 곳곳에 설치하여 미군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펀지 스틱이라는 부비트랩은 대나무를 죽창저럼 만들어 구덩이 안에 설치하고 지푸라기와 나뭇잎을 이용해 땅인 것처럼 위장시켜 미군이 밟으면 구덩이에 빠져 가시가 발에 박혀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심지어 가시에는 동식물의 독, 대변이 묻어있어 상처 곳곳으로 독, 대변이 침투하여 심각한 질병에 걸려 부상병을 부축하느라 미군의 힘을 빼고 걸린 병사는 감염으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 이는 미군이 항상 돌아다닐 때 경계심을 유지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항상 경계를 했더라도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미군들은 전리품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정글 속 곳곳에 베트콩 깃발을 설치하고 미군이 이를 가져가려고 하면 폭발물이 터지는 부비 트랩도 있었다.

4.3. 구찌 땅굴

구찌 땅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베트남에서 처음 만들어졌는데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나서 더 많이 늘어났으며 땅 속에 넓은 굴을 파서 심지어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는 남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갑자기 땅굴로 숨어들어 미군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구찌 터널의 활용도는 매우 넓어 심지어 라오스와 캄보디아, 남베트남을 이어주는 터널까지 설치하여 북베트남군이 터널을 이용해 쉽게 남베트남으로 침투하기도 쉬웠고 베트콩들이 미군을 피하기 위해 잠시동안 터널을 이용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도망가서 물자를 보급받거나 다시 다른 터널을 이용해 남베트남 곳곳에 침투했다.

구찌 터널도 단점이 존재했는데 한국군이 대응한 방법은 최루탄이었다. 구찌 터널은 공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땅굴에 최루탄이 침투하기라도 하면 베트콩은 못 버티고 땅굴에서 나오자마자 사살되거나 질식사하기 일쑤다.

5. 전쟁범죄

남베트남 정부의 관리이거나 공무원 가족, 경찰 가족이나 미군에 협조적인 사람들이나 심지어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을 법한) 정규교육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베트남 양민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다수 처단(학살)한 흑역사가 있다. 최대 학살 지역인 후에에서는 2,500명에서 최대 6,000명이 베트콩의 학살로 사망했는데[3] 이것이 후에 대학살이다.

특히 학교에 대한 베트콩의 탄압은 가관인데, 남베트남의 교육률이 높아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로 다수의 선생들을 납치하거나 죽이고 고문했으며 심지어 아이들조차 만행의 타겟이 되어 한 아이는 통학 도중에 본보기로 손가락들을 베트콩에 의해 잘리기도 했다![4] 이는 모두 통합국제교원단체가 파견한 진상조사위원회가 밝혀낸 것이다. 6.25 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이 벌였던 군경가족 학살이나 비 협조적인 농민 학살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베트콩의 일반인 학살에 분개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을 잡는 즉시 즉결 처형하거나 고문 등 보복을 자행했다.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5]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양민을 학살했다.[6] 2001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월남전 당시 일부 주월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진상조사가 필요할 경우 이에 협조하겠다고 했을 때 베트남 측이 영 떨떠름해하며 "어차피 우리가 승전국이므로 별로 개의치 않으며, 경제협력 얘기나 하자"고 한 것은 외국군보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의한 잔학 행위가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월맹군 및 베트콩의 학살은 당시 민간인들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생략한다는 점도 같이 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측 연구 및 여론조사들 중에는 학살의 주체가 꼭 베트콩이나 공산주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제법 많다. 예를 들어 1967년 메콩 델타 지역인 끼엔장(Kiên Giang)성에서의 난민을 대상으로 한 미국 측 연구 조사를 보면 난민들 중 2/3 정도가 미국의 포격과 폭격 때문에 도망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끼엔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딘뜨엉(Định Tường)성에서는 난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최소 60% 이상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해 자신들을 전략촌에서 떠나게 만든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 반면 베트콩에 대해 비난한 비율은 22%에 그쳤다. 1970년 꽝남성에서 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미국 측 연구는 최소 80%의 난민이 미군을 포함한 남베트남 연합군이 마을을 파괴한 것에 대해 비난했고 18%는 양측의 교전에 의해 발생한 파괴에 대해 비난했으며 겨우 2%만이 베트콩을 가리켜 파괴를 초래한 것에 대해 비난한 것으로 나온다.[7]

6. 숙청설

베트콩들이 베트남 전쟁 종결 후 통일 과정에서 숙청되었다는 오해가 남아 있지만 베트콩의 대다수는 베트남 통일 이후에도 숙청되지 않고 통일 베트남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남베트남 멸망 이후 임시로 세워졌던 괴뢰정부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남베트남 공화국 각료들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친공산계 명사, 그러니까 베트콩들이었는데 응우옌 후 토는 통일 베트남에서 국가주석(1981~1982)까지 지냈고 부주석도 지내고 1990년대에 사망했다.

일부 숙청된 베트콩들도 있긴 했다. 베트콩 정부의 군대는 북에서 내려온 북베트남군 계열과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자생적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1968년 구정 공세로 베트콩 군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도 비공산주의, 민족주의 계열 부대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다. 민족주의 계열의 군대와 남베트남의 반정부 활동가로 베트콩 정부에 몸 담았던 이들은 남베트남 패망 이후 노선 차이로 인해 숙청되었다. 그런데 저렇게 북에서 남파된 인원들도 순수하게 남베트남 현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남북 베트남의 분단까지 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호찌민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가들의 고향이며 1930년 응에안 소비에트 봉기로 민족 혁명의 성지로 추앙받았던 베트남 중부의 응에안, 하띤 성 다음으로 사이공 소비에트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산업 도시들이 가장 크고 강했다.

이들 중 다수는 남북베트남이 분단되자 북베트남으로 월북하였다가 60년대 초 북베트남측에서 대남 전쟁 개전 이후 다시 재월남시킨 경우다. 즉 원래 뿌리나 출신도 남베트남인데 50년대~60년대를 북베트남에서 보내다가 전황이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변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가 다수라 "원래 남베트남인들의 자생적 조직이었던 해방전선이 북베트남 정권에게 집어 먹혔다"고 볼 수 없다. 한국으로 치면 원래 좌익 성향이 강했던 영남 지방 출신의 남조선로동당원들이 한 번 북쪽으로 올라가 정권 내에서 자리를 굳히다가 다시 남파된 경우란 의미다.[8]

남북베트남 사이에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기질적 차이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남북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 전쟁이 아닌 서로에 대한 분리를 주장했던 베트남 내 정치 세력은 소수민족들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1920년대 대불 독립 운동가들의 세대 교체 시절부터 유기적으로 현지 사정에 맞추어 발전해 온 베트남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과 이들이 설립한 월맹 정부의 성격이 딱 이렇다고 규정 짓기에는 복잡한 게 너무 많다.

민족해방전선에서 수립한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법무장관을 지낸 쯔엉니으탕(Trương Như Tảng) 등 민족해방전선 조직원 중에서 실제로 숙청당한 사람도 있고 즈엉꾸인호아(Dương Quỳnh Hoa)처럼 숙청은 당하지 않았지만 통일 베트남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일부가 숙청되긴 했지만 대다수의 민족해방전선 구성원들은 통일 이후에도 큰 불이익이나 큰 문제를 겪지 않고 통일 베트남에서 살았다. 민족해방전선 말단 회원 대다수는 숙청당하지 않았다. 북부 출신에 비해 통일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옛 민족해방전선의 간부 중에서도 90년대나 심지어 2000년대까지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들이 있다.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수반을 지낸 응우옌 후 토(Nguyễn Hữu Thọ)[9]는 통일 후에도 1992년까지 통일 베트남의 부주석을 지냈으며 같은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응우옌티빈(Nguyễn Thị Bình)도 통일 베트남에서 1992년부터 2002년까지 부주석을 지냈다. 이외에도 민족해방전선 간부 중에서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은 여럿이다. 심지어 베트콩 고위간부이면서 간첩 노릇을 하였던 남베트남 불교도 위기의 주동자 중 한 명인 틱티엔하오(Thich Thien Hao) 스님은 종교인임에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은 커녕 공산주의 정권이 유일하게 승인한 베트남불교승가협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1997년에 86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입적했다.

7. 인터넷 밈

파일:FfIv_zCXgAA-3mV.jpg
봇 방지용 CAPTCHA를 베트콩 찾기에 비유하는 짤방이 있다.

[1]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2] 왼쪽과 중간에 있는 소년병은 노획한 M79 M1 카빈을 들고 있고 오른쪽에 있는 소년은 K-50M을 들고 있다. [3]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구정 공세 관련 다큐를 보면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뻔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나온다. [4] https://gall.dcinside.com/m/war/1310756 [5] 미군 개입 이전이다. [6] 이 내용은 pbs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다큐에서도 균형있게 다룬다. [7]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 American Real War in Vietnam, Picador, 2013, p.69. [8] 이와 정반대로 응오딘지엠 집권 이전까지 세속주의 계열 반공주의의 핵심이었던 베트남 국민당이나 대월당은 원래 본거지가 하노이였다. 그러다가 30년대~50년대까지 거듭된 공산당의 폭압과 독재에 못 이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다른 반공 내셔널리즘 세력들과 합류했다. [9]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