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76767><colcolor=#fff> 박갑동 朴甲東 | Park Gap-d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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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9년 3월 11일 ([age(1919-03-11)]세)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1] | |
본관 | 순천 박씨 |
학력 |
신등공립보통학교 (전학)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 졸업) 진주고등보통학교 (전학)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다이세이중학교 (4년 수료) 와세다제1고등학원 (졸업)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 정치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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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북한의 남조선로동당 출신 정치인으로 이후 일본 도쿄에 거주했다.탈북 후에는 일본에서 평생 반북운동에 매진했다. 한국에서는 1940~50년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언으로 유명하다.
박갑동은 김일성과 북한 체제에는 일관되게 매우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전쟁 시기 서울에서 김일성이 벌인 수탈 정책의 주요 증언자이다. 한편 남조선로동당에 대해서는, 독재정권 시절 한국 정보기관이 남조선로동당에 불리한 방향으로 그의 글을 조작하기도 했고, 그의 증언이 반공(반남조선로동당)소설에 활용되기도 했으나, 사실 박갑동은 남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남조선로동당원들이 겪은 비극을 안타까워한다.
2. 생애
1919년 3월 11일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의 순천 박씨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등공립보통학교[2][3],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 진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36년쯤 원래 다니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도중에 일본의 다이세이중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남들과 달리 중학교 5년 졸업이 아닌 4년 수료 상태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4년 수료자를 받아 주는 와세다제1고등학원[4]에 진학해 졸업한 뒤 1941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일제 말기에는 학병 징집을 피해 지리산에 입산하여 활동하다 1945년 5월 조선독립동지회를 조직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세 정당이 남조선로동당으로 합당되자 중앙위원회 기관지 노력인민의 부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 10월에는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중앙위원회 이론진·선전부·기관지부 등 부처에서 블록 부책으로 재직하였다. 1950년 4월 정태식, 이주하, 김삼룡 등이 검거되자 남조선로동당 지하당 임시 최고 총책이 되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였다. 당시 전쟁 발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소장파 국회의원들에게 남조선로동당을 합법화시켜달라는 요구를 하려고 계획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1951년 3월부터 전쟁 중에는 북한 문화선전성 유럽부장을 맡아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다.
1953년 3월 6.25 전쟁 후 남조선로동당 숙청 당시 체포되었다. 다른 남조선로동당 당원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하자, 이에 북측에서 탄압을 완화하여 곧 석방되었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1957년 북한을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중국과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는 와세다대학 동문들의 도움으로 일본인 신분을 취득하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다가 1964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노모가 남한에 살아 있음을 알고 공개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과 74년에 걸쳐 박정희 정부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중앙일보에 '내가 아는 박헌영'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연재했다. 당시 박정희를 독대한 자리에서 직접 박헌영과 남조선로동당 일대기 연재를 부탁받았고, 박정희는 해방 직후 읽었던 박헌영의 8월 테제가 자신의 세계관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9년에 전 주소 북한대사 리상조를 만나 '북조선 개방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1992년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결성한 뒤 반북운동을 하고 있다.
1999년에는 해방정국 당시 우익 학생운동의 거두로 남조선로동당의 암살대상이었던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와 함께 대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
2008년에는 박헌영의 장남 박병삼(朴秉三, 원경 스님)을 만났다.
2009년에는 정추, 강철환 등과 만나기도 했으며 # 2011년에는 정추에게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 2015년 기파랑 출판사에서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가 정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 2016년 5월 27일 통일나눔펀드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 현재는 고령으로 인하여 이후 뚜렷한 활동은 없으며 근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홍순관, 김충식, 김강 등 박갑동과 함께 반북 운동을 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2010년대 이후로 근황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북한은 박갑동을 매우 미워하여 각종 테러를 계속하며, 박갑동의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남조선로동당과 초기 북한에 대해 여러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는데, 박헌영의 측근이었다 보니 박헌영 관련해서는 편향된 증언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헌영이 6.25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오히려 6.25 전쟁을 주도했다는 학계의 정설과는 정반대인 내용이다. 김일성 가짜설도 신봉하여, 박금철이 김일성이 가짜임을 간파했기 때문에 초기에 숙청되었다가 나중에 가짜 김일성 옹립에 동참하여 승진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3. 저작
- 박헌영: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인간사, 1983).
- 서울·평양·북경·동경(기린원, 1988). 박갑동의 북한 탈출기를 다룬 책.
- 갈수록 멀어지는 공화국 上, 下(기린원, 1989).
- 한국전쟁과 김일성(바람과 물결, 1990).
- 통곡의 언덕에서: 남조선로동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서당, 1991).
- 북조선 악마의 조국: 남한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악의 사실(서울출판사, 1997).
-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1998): 이철승과 공저.
박갑동의 저작들 상당수는 박갑동이 일본에서 거주한 관계로 일본어로도 출간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빙성을 의심받는 증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내재적 접근론을 통해 북한을 재평가하려 했던 진보성향 학자들에겐 믿을 수 없는 인물로 혹평당하기도 했다. 그걸 떠나서도 김일성 가짜설, 김정일 숙청설 등을 무리하게 주장한 바가 있다. 이는 박갑동의 명의를 빌어 정치적으로 유리한 주장을 하려한 세력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박갑동의 명의로 유포된 4.3 사건 김일성 배후설에 대해서 박갑동은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 신문사에서 멋대로 넣은 글이라고 해명했다.
[1]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2]
現 산청 단계초등학교
[3]
권익현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이규호 전
대통령비서실장,
박찬석
국회의원, 권복 LG디스플레이 부사장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4]
사실상
와세다대학의
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이 당시
와세다대학은 와세다제1고등학원과 제2고등학원이라는 총 2군데의 예과기관이 존재했는데 제1고등학원은 중학교 4년 수료자가 입학 대상자에 3년 코스였고, 제2고등학원은 5년 졸업자가 입학 대상자에 2년 코스였다. 박갑동 본인은 회고록에 당시 와세다제1고등학원만이 유일하게 일본의 대학 예과기관들 중에서 중학교 4년 수료자들을 받아 주었기에 입학했다고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