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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엘 발락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클럽 경력
2.1. 켐니처 FC
1995년 켐니처 FC에 입단하여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2.2.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97년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이적을 했으나 전반기 시즌은 2군에서 보냈고 98년 3월 레버쿠젠과의 리그 경기를 통해 1부리그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시즌에 팀이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1]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우승 커리어를 새기는 영광을 누린다. 다음 시즌 서서히 주전선수로 도약을 하고 98-99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출전하여 8강까지 갔으나 같은 리그 소속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게 된다.
2.3. 바이어 04 레버쿠젠
본격적인 전성기가 열린 시절로 과거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다면 레버쿠젠에선 보다 더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레버쿠젠은 에메르송[2], 루시우 페헤이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옌스 노보트니, 제 호베르투 등 2000년대 명성을 날린 선수진용을 꾸렸고 발락 역시 이 선수단의 전술의 중심이 되면서 레버쿠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활약의 백미는 2001-02 시즌. 발락은 이 시즌 리그에서만 17골을 때려박는 대활약을 펼치며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상당한 상승세를 보였으나 막판 선수단의 줄 부상으로 결국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빈손으로 시즌을 끝내게 된다. 이 당시 발락은 선수 시절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잘하면 트레블도 달성할 수 있었으나. 결국 노보트니등의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른바 콩락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지네딘 지단의 챔피언스리그 역대급 원더골이 터지기 직전, 발락은 그저 지단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4. FC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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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 시즌이 끝나고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다.
발락은 조금 더 강한 팀으로 가길 희망했고 오퍼 중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 분데스리가를 떠나지 않는 독일 선수들과는 다르게 발락은 해외리그를 경험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2006년에 독일에서 월드컵이 열릴 것을 감안해 독일 클럽에서 계속해서 뛰는게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바이에른 뮌헨을 택했다고 한다. 훗날 은퇴 후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지만 레알 마드리드로 갔어도 독일 월드컵 출전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고 밝히며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레알로 갔다면 흥미로웠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전성기를 이어가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서 분데스리가 전체가 맛탱이가 간 상황이였다. 2002/03 시즌 바이언의 과도기로 UCL에서 광탈을 하게 되고 2003/04 시즌엔 아예 무관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에 불만이 쌓여있었던 발락은 여름 이적시장에서 다시 한번 유럽 빅클럽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고, 그 중 FC 바르셀로나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왔지만 바이에른이 요구하던 이적료로 50m 유로를 지불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적은 불발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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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몇몇 빅클럽들과 발락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최종적으로 발락을 두고 맨유와 첼시가 경쟁했다. 발락은 첼시를 선택했다. 발락은 두 팀을 두고 어느 팀이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기 더 유리할지 저울질 했는데, 당시 맨유가 몇시즌간 부진했지만, 무서운 포스를 보여주던 주제 무리뉴의 첼시가 자신에게 맞는 팀이라 결정하고 첼시로 이적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첼시가 돌풍을 일으키긴 했지만 맨유 역시 첼시와 우승을 다투며 이에 못지 않은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단지 더 높은 연봉을 주는 첼시를 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발락의 발언과 달리 발락을 영입을 실제로 원했던 것은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었고, 첼시 무리뉴 감독은 발락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첼시는 전적으로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의중에 의해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무리뉴는 한동안에 이에 대해 소극적인 불만을 표하는 정도에 그쳤다. 어쨌든 발락은 무리뉴 감독의 전력 구상과는 무관하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일련의 (백인) 스타선수 영입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발락과 더불어 세브첸코, 토레스가 당시 이런 영입의 대표적인 사례. 맨유 퍼거슨 감독이 비록 발락을 원하긴 했지만 발락 영입에 그리 많은 돈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첼시가 더 많은 액수를 비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퍼거슨 감독은 쿨하게 발락을 포기했다.[4]
2.5. 첼시 FC
첼시로 이적한 발락은 이전 분데스리가에서의 압도적인 폼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소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만다. 첼시에서 풀 주전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로테이션 선수로 분류되기도 하는 등 바이에른 시절에 비하면 다소 입지가 좁아졌다. 일단 무리뉴 감독의 전술과 무관하게 구단주의 취향으로 영입된 선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발락 스스로가 EPL과 팀 내에서 자신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EPL과 첼시 스타일에 서서히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점차 풀 주전에 가까운 자원이 되어갔다. 하지만 공격 포인트 등 팀 기여도에 있어서 첼시 시절은 바이에른 시절에 비하면 수치적으로 훨씬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6년 8월 27일 블랙번 로버스 전에서 발락은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삭발까지 하면서 첼시에서의 새 출발을 각오하지만 시즌 초기에는 적응기에 애를 먹으며 바이에른 시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2005-06 시즌까지 4-3-3을 즐겨 사용하면서 역습무쌍을 선보인 첼시가 4-4-2, 그러니까 투톱으로 시스템을 바꾸면서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다.[5][6] 이렇게 되면 이미 기존의 램파드, 마켈렐레, 에시엔 등 중앙 미들진이 많은 첼시에 발락까지 가세를 하는 상황이고 당시 발락을 포함한 네 선수들 중 나이가 있는 마켈렐레를 제외하면 백업으로 두기는 쉽지 않는 상황이었다.[7][8] 시즌 초중반에는 이 전까지 팀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발락은 팀의 실질적 에이스인 램파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성기 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중후반부터는 첼시 수비진이 줄부상을 당하며 에시엔이 풀백이나 센터백으로 기용되어 발락은 꾸준히 출장을 한다. 그로 인해 본인의 컨디션도 살아난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뉴캐슬 원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을 마감했다.[9]
하지만 2007-08 시즌부터 부상 회복 후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부상당한 램파드를 대신해 투입된 이후로부터 램파드의 역할을 부여받고 팀의 중심이 되어 팀을 먹여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장 존 테리, 부주장 프랭크 램파드가 빠진 상황에서 캡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첼시에서의 50번째 경기였던 풀럼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 그리고 08년 4월 26일 리그 맨유전에서 선취골과 결승골을 기록하고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는 등 마지막까지 맨유와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에 불을 지피는데 애썼지만 이미 골득실에서 많이 앞섰던 맨유가 위건에게 대승을 하고 첼시는 경기를 비기며 승점 2점차로 리그 준우승을 한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유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모두 알다시피 테리가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킥을 실축하고, 아넬카의 슈팅이 판데르사르에게 막히며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놓치고 만다. 당시 테리가 미끄러지며 홈런을 날렸을 때 멘탈이 나간 발락이 다리에 힘이 풀려 램파드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던 것은 첼시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순간. 거기에 리그컵도 결승전에서 연장 끝에 1:2로 토트넘에게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하며 발락은 생애 두 번째로 트리플 러너업을 완성하고 만다.
2008/09 시즌에는 새 감독으로 스콜라리가 부임한다. 스콜라리가 데려온 애제자 데쿠에게 밀려 완전 주전이 아닌 1.5군으로 분류되기도 했었으나, 시즌중반으로 가면서 팀이 극심한 부진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2월 스콜라리는 경질되고 거스 히딩크가 남은 시즌을 맡아줄 임시감독으로 오게된다. 이전까지 감독들이 에시엔(혹은 마켈렐레)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두고 램파드와 발락이 박투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시했었으나, 히딩크는 여기서 새로운걸 시도하게 되는데 바로 발락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려 경기조율 및 후방에서 볼배급 역할을 맡게했고[10], 램파드가 조금 더 미들진 공격의 중심이 되게 해주고, 에시엔을 박투박 미드필더로 기용해 그의 왕성한 활동량을 제대로 활용하게 해주었다. 발락은 히딩크의 전술에 완전히 적응하며 첼시 기계 축구의 중추가 된다. 발락과 에시엔의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이미 강력했던 미들진이 더욱 호흡이 더 맞아들어가며 최상의 시너지를 일으켰다. 발락은 수비적인 롤을 부여받았음에도 빛이 났었는데 비록 민첩하지는 않지만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가 상대방의 패스를 차단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고 신체조건을 이용해 피지컬로 상대 공격진과 미들진을 밀어붙히거나 강력한 제공권을 선보였다.[11]
이 중원 조합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제공권으로 상대팀의 중원을 그야말로 압살시켰는데 그 절정이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바르샤와의 4강전. 그 시즌 내내 괴물같은 포스를 보였던 바르샤의 세 얼간이 차비-이니에스타-부스케츠 트리오와 메시가 그 2경기 만큼은 램파드-발락-에시엔 트리오에게 힘과 조직력에서 완전히 밀려 힘을 못썼다.[12] 실제로 램파드는 에시엔의 선취골을 만든 것을 포함해 여러 번의 결정적 패스를 만들어냈고, 에시엔은 앞서 언급한 램파드의 로빙 패스를 원터치 발리슛으로 연결해 선취점을 냈으며, 만 33세 노장 발락은 동 포지션에서 한창 전성기였던 그 차비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고 피지컬과 경기 조율에서 앞섰다. 특히 발락은 이 경기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지을 기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후반전 추가시간에 램파드의 코너킥이 양 팀의 공중볼 경합 끝에 발락의 왼발 근처로 떨어진 때였다. 발락은 이를 바로 슈팅으로 연결했으나, 사무엘 에투의 왼팔에 맞아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주심 톰 헤닝 외브레뵈는 에투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PK를 선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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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뚜껑이 완전히 열려버린 발락이 그를 잡아먹을듯이 쫓아가며 항의하는 이 장면은 첼시 팬들에게 굉장히 깊은 인상을 줬다. 당연하겠지만 본인에게는 굉장히 아쉽고 화가 났던 순간이라 회고했다.[13] 마지막에 이 PK 날아간 것까지 더해져서 빡돈 드록바는 카메라 앞에서 disgrace를 연일 외치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2009/10 시즌 안첼로티 체제에서도 3미들의 중추로써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중반에는 팀이 좀 부진했는데 같이 부진, 그렇지만 중후반기부터는 히딩크 시절처럼 다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소 수비적인 룰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램파드, 에시엔과 같이 안정적인 중원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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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10년 5월 15일 포츠머스 FC와의 FA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던 발락은 전반 종료 직전 상대 선수인 케빈프린스 보아텡[14]의 거친 태클에 무릎 부상을 입고 줄리아누 벨레티와 교체되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은 무산되었다.
사실 발락은 첼시에서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빅이어를 드는 것을 포함해 첼시에서 은퇴까지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첼시는 당시 젊은피로 대대적인 리빌딩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발락에게 제시된건 2년도 아닌 1시즌 단기계약이었다. 이를 알게된 발락은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와 자신이 다음시즌 구상에 있는지 의논했고, 안첼로티는 발락이 첼시에 남아주길 원하나 결정은 보드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15] 발락은 첼시에 애정이 꽤나 큰 선수 중 한명이었고[16] 주급삭감까지 해서라도 팀에 남기를 강력히 바랬으나, 보드진은 단기계약 이외에는 옵션이 없다 통보, 결국 그는 첼시를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은퇴 후 발락이 밝힌 얘기지만 1시즌만이라도 더 첼시에 남지 않았던게 큰 후회였다고 한다. 차라리 1년 계약을 하여 남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팀과 재계약을 논의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걸 고려하지 않은게 한이라고 말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2010/11~2011/12 시즌 발락의 빈자리는 첼시의 예상보다 컸다. 존 오비 미켈의 더딘 성장은 물론 대체불가 자원이었던 에시엔의 장기부상과 부진이 있었고, 그동안 하미레스와 메이렐레스 등이 미드필더진을 매꾸기 위해 영입되었지만 모두 발락 정도의 클래스를 가진 선수들은 결코 아니었다. 2010/11에는 이전시즌 성적이 무색하게 무관으로 마치는 실패를 맛봤고, 2011/12 시즌에는 FA컵과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시즌초반에는 무리한 리빌딩으로 피를 보다 후반기에 가서야 베테랑들의 저력으로 우승컵을 드는 그림이었다. 이마저도 토너먼트였기에 가능했고 리그는 6위로 마쳐 챔스 우승이 아니었다면 2012/13 시즌 챔스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2.6. 바이어 04 레버쿠젠 2기
2010년 여름일자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했다. 당시 레버쿠젠은 직전 시즌 시몬 롤페스와 아직 성장중이던 토니 크로스를 중심으로 미들진의 전술을 짜였고, 크로스의 바이에른 복귀로 인해 34세의 노장인 발락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맡게된다.
그러나 9월 하노버전에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전반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히도 빠르게 재활하며 후반기 초에 복귀하는데에는 성공했다. 발락의 복귀 이후 레버쿠젠은 10승 2무 3패를 달리며 8승 4무 3패에 그친 도르트문트를 제치고 바이언과 함께 가장 많은 승점을 쓸어담았으나 이미 벌어졌던 11점의 승점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7점차로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11-12 챔스 조별리그 첼시 대 레버쿠젠 경기에서, 동료였던 프랭크 램파드와 다시 적으로 만난 발락
2011-2012시즌 UCL에서 발렌시아 전과 행크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발락이 부상으로 빠진 16강 토너먼트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합산 점수 2-10으로 대패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유럽 클럽 대항전 무대를 쓸쓸히 마감한다. 정말 짓궃게도 이 대회에서 빅이어를 든 팀은 바로 2년 전까지 발락이 몸담았던 첼시였다.
3. 국가대표 경력
당장의 2002 FIFA 월드컵 플레이오프에서 발락이 없었으면, 독일은 진작에 우크라이나에 밀려 예선탈락이라는 최악의 암흑기가 도래했을 것이다. 또한 발락 의존증을 줄이기 위해, 하노 발리치, 파비안 에른스트, 프랑크 바우만, 시몬 치우머 등 당시 분데스리가에 날고 기는 미드필더들을 투입하며 실험을 하였으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3.1. 전성기
UEFA 유로 2000에 서브멤버로 포르투갈과의 3차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였으나 팀은 0-3으로 깨지고 성적도 1무 2패로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한다.[17]
이후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9조에서 독일은 잉글랜드와의 1위 다툼에서 그 전설의 1-5 참사를 당하면서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바로 이 때 부터 발락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플레이오프 상대는 안드리 셰브첸코가 이끄는 우크라이나였다. 발락은 1차전 0-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고 2차전 선제골, 추가골을 넣어 4-1 대승을 이끌며 독일을 탈락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 올리버 칸과 함께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다시피하여 결승까지 진출시킨 주역이다. 발락은 1-0으로 끝난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 두 경기에서 모두 결승골을 넣으며 토너먼트에서는 조별리그보단 잠잠했던 클로제 대신 해결사 노릇을 했다.[18] 당시 독일은 그나마 희망이였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와 메멧 숄,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부상, 카르스텐 얀커와 옌스 예레미스가 클럽에서 만큼 제역할을 하지 못한 상황이였고 특히 16강전부터 독일은 전술적의 고지식함을 드러내며 졸전을 펼쳤다.
한국 대표팀과의 4강전에서는 올리버 칸과 함께 독일 대표팀을 캐리했다. 그리고 후반 29분, 측면으로 뚫고 들어온 올리버 뇌빌에게 중앙 수비수 유상철과 홍명보까지 시선이 쏠리는 그 순간..
뇌빌의 패스를 결승골로 연결시키고 포효하는 발락.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순간이었다.[19]
그러나 발락은 결승골을 넣기 직전(후반 25분), 골문 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던 이천수를 태클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옐로 카드를 받아버렸고, 결국 독일은 급한 준결승전은 따냈지만 가장 중요한 결승전에서 전력의 핵인 발락을 경고누적으로 쓰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발락까지 빠진 독일은 호나우두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며 0:2으로 멸망했다.
이 당시 독일의 대진운은 '꿀대진'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무척 좋았다. 특히 독일의 천적들을 한국이 모두 박살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탈리아야 독일의 대표적인 천적이고[20] 또 다른 지구방위대급 전력[21]인 스페인을 이길 가능성도 낮게 점쳐졌다. 이 두 팀을 한국이 연장전과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처리해준 것이다.[22]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의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린 독일 대표팀은 이 때부터 다시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하고[23][24], 20대 후반 자신의 축구경력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발락에게 있어선 이 나이에 2004년 홀로 망가진 독일축구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만다. 당시 대표팀 상황은 2000년도보다 안 좋았는데, 2000년 당시에는 상술한 숄, 다이슬러 노보트니같은 걸출한 선수들이 폼이 좋았었지만 2004년도엔 앞의 세 선수의 폼이 완전히 하락한 상태였고 케빈 쿠라니, 게랄트 아자모아, 프랑크 바우만, 파트릭 오모엘라, 파비안 에른스트 등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날고기는 신진 선수들은 국대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에 그쳤다. 클로제는 이 시기 슬럼프에 빠졌고 훗날 최고의 선수로 성장해 독일 대표팀을 이끌게 되는 필립 람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이 당시 유망주에서 막 벗어나려는 시점에 있었던 신예에 불과했다.
UEFA 유로 2004에서도 졸전을 거듭했는데 특히 당시 신예 필립 람을 제외하곤 거의 혼자서 독일 대표팀을 이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3차전인 체코전에서 당시 감독인 루디 푈러 감독은 정신나간 포메이션을 사용했는데 프리드리히,뵈른스,노보트니의 쓰리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에 하만을 그리고 좌우에 프링스와 필립 람을 배치하고[25][26] 공격형 미드필더에 발락을 배치...또 그 위에 슈바인슈타이거와[27] 슈나이더를 윙으로 배치 그리고 최전방에 케빈 쿠라니를 배치하는 이른바 5-4-1 도 아니고, 3-4-3도 아닌 쓰리백에 죄우 윙을 두명 씩이나 두고 홀딩엔 기동성이 전혀 없는 디트마어 하만을 혼자 배치하는 초엽기 포메이션[28][29]을 선보였고 당연히 팀은 체코 2진에게 2-1로 깨지면서 이번에도 2무 1패 유로 12위로 8강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이는 과거 1999년 바이에른 뮌헨이 선보인 5-4-1포지션의 강력한 수비라인에 이은 위협적인 역습장면을 여러차례 만들어낸 전술을 재현하기 위해서인데 과거 에펜베르크의 역할을 발락이 어느정도 수행해냈으나 예레미스[30]의 넓은 활동량을 하만이 보여줄리 만무했고 네드베드, 포보르스키가 없는 체코2진 미들진에게 처참히 털리게 된다. 비록 이 시기 국가대표팀은 완전 막장테크를 타고 있었으나 발락의 평가는 역으로 올라갔는데 아시다시피 당시 독일 대표팀은 어쩡정한 4-4-2 전술로 최약체 라트비아에게 비기질 않나, 당시 구닥다리인 3-5-2를 끝까지 고집하질 않나 한마디로 전술적인 유연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발락은 그런 괴악한 포메이션과 최약체의 독일 스쿼드를 가지고 홀로 고군분투를 하면서 어찌어찌 팀을 꾸역꾸역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대로 전술적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3-5-2든 4-4-2든 제 몫을 해준 선수는 대표팀 내에 발락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며 막장테크의 대표팀을 혼자 이끌면서 그래도 발락 덕분에 독일 대표팀은 소위 썩어도 준치라는 소릴 듣게 된 것이다. 약체들에게 쳐발리더라도 이 시기 최악의 시기를 달린 독일 대표팀이 어찌어찌 꾸역꾸역 메이저 대회에 출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발락의 존재가 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3.2. 2006년, 그리고 황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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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4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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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발락 최고의 파트너였던 토르스텐 프링스 |
이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필립 람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페어 메르테사커, 루카스 포돌스키 등 소위 1980년대생의 황금세대들이 포텐이 터진 시기인데 비록 2006년 30줄에 접어든 발락 역시 체력적인 저하가 일어났으나, UEFA 유로 2008에서도 여전한 팀의 전술의 핵으로 활동했다. 이는 요아힘 뢰프 감독이 모든 팀의 코어를 몰빵한 발락에 대한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토마스 히츨슈페르거, 지몬 롤페스, 사미 케디라를 원볼란치, 혹은 더블 볼란치로 두는 실험을 했다. 당시 뢰브 감독은 2007년 10월 체코와 홈경기에 발락을 제외하고 프링스,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에 피오트르 트로초프스키, 다비드 오동코어의 좌우 윙을 두며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했으나 결과는 0-3 완패를 당하면서 여전히 발락 없이는 불안정한 상태였지만,[32] [33] 막상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메수트 외질 등 2선 선수들이 엄청난 활약을 했다. 특히 토니 크로스는 당시 레버쿠젠 시절 메찰라 포지션에 활동하면서 2선에서의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고, 메수트 외질 역시, 브레멘에서 유벤투스로 떠난 디에구의 공백을 잘 메꾸면서 기량 상승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발락이 빠진 중원에서의 공백은 윙어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메우면서 대표팀 세대교체가 성공하게 되자 더이상 대표팀에서의 발락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2011년 독일 축구 연맹 측은 발락을 8월에 있을 A매치에 발탁한 다음 경기를 뛰게 하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예정임을 밝혔으나 발락은 곧장 뢰프 감독을 디스하며 이 경기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출전이 결정된 것이라며 A매치 소집을 거부했다. 발락은 단지 은퇴 경기에 대한 미련이 없고, 정식 대회가 아닌 큰 의미없는 경기를 통해 은퇴 무대를 갖기는 싫다고도 덧붙혔다. 결국, 98번의 A매치에 출전해 2경기 남겨 두고 센추리 클럽 가입이 무산되었다.[34]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이건 발락이 자신이 은퇴 후 밝힌 자신의 입장을 기준으로 서술한다. 당시 남아공 월드컵이 마무리 된 후 발락 대신 월드컵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필립 람이 사전에 발락과 상의 하나 없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계속해서 주장을 맡고싶다는 발언을 했고, 뢰프 감독 또한 람이 주장직을 이어나갈 것을 지지하며 발락의 대표팀 복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발락에게는 불행하게도 남아공 월드컵에서 성공적인 세대교체로 인해 발락이 독일 대표팀에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고, 일방적으로 자신에게서 주장직을 박탈하고 대표팀에서 내친 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도 발락은 아직도 이 둘에게 앙금이 남아있는듯 하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광탈한 독일 대표팀을 크게 비판하며 특히 뢰프가 사임을 하지 않고 계속 독일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디스했고, 그 전해인 2017년 필립 람이 현역은퇴를 선언하고 함께 뛰었던 동료들과 많은 축구 관련인물들에게서 축하를 받는 가운데 발락은 아무런 인사도 건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때 발락은 여전히 자신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던 람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얘기하기도 했다.
4. 은퇴
현지시간 2012년 10월 2일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거의 홀로 지키다시피 했고 2010년 독일 축구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진 미하엘 발락은 이렇게 현역에서 물러났다.
[1]
이 시기 카이저슬라우테른은 갓 1부리그로 승격한 상태에서 97-98 분데스리가에 우승까지 이루는 그야말로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보여주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
2000년 AS로마로 이적
[3]
이적얘기가 오고갈 무렵 독일 대표팀으로 출전한 발락이 평가전에서
몰타를 상대로 4골을 넣자 이걸 핑계로 더 높은 이적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4]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3시즌간 맨유가 최전성기를 맞으며 리그 3연패와 2007/08 시즌 챔피언스리그를 그것도 결승에서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첼시를 상대로 우승한 것을 생각하면 역시 축구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스포츠다.
[5]
아시다시피 당시 로만이 끔찍히 러브콜을 보냈던
셰브첸코도 이 시기 영입되면서 드록바와 투톱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원톱을 울며 겨자먹기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6]
그러나 결국 셰브첸코가 예상 외로 부진한 탓에 첼시는 결국 기존의 4-3-3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7]
사실 마켈렐레는 이 시기에도 나름 건재하였다. 마켈렐레는 마지막 시즌인 2007-08 시즌에도 존 오비 미켈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8]
그리고 최근에는 완전히 맛이 간 에시엔도 이 시기에는 어마어마한 활동량과 피지컬로 괴물포스를 뽐냈다.
[9]
이 부상은 20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진다.
[10]
실제로 발락은 청소년시절 스위퍼와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축구를 한 경험이 있다.
[11]
에시엔이나 마켈렐레가 수미로 뛸때 가장 부족했던게 제공권이었다. 이후 나중에 들어온
네마냐 마티치와 비교해봐도, 마티치가 조금 더 수비적으로 특화는 됐지만 발락의 시야나 패스 능력에는 전혀 미치치 못했다.
[12]
은퇴 후 발락이 회고하기에 그 당시 첼시는 유럽 어느팀이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장 강력했다고 평가했고, 당시
오심으로 얼룩진 바르셀로나와의 2차전에서 승리했었다면 결승에서 맨유를 꺾고 우승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13]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경기력을 압도한 것은 물론이고, 특히나 발락 본인은 맨유와의 챔스 결승 리벤지 매치도 꽤나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바르셀로나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1-1로 승리하여 결승에 갔고 맨유까지 꺾은 뒤 우승한다.
[14]
공교롭게도 독일 출신이고 독일 청소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나, 독일 국가대표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자 부친의 조국인 가나 국가대표를 선택, 월드컵에서 독일과 맞대결을 했다. 이복동생인 제롬 보아텡은 독일 국가대표를 선택했는데, 이 태클에 대해 비난을 해서 사이가 나빠졌는지 둘은 경기에서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15]
안첼로티는 내부든 외부든 마찰을 굉장히 꺼리는 성향의 감독이며, 당시 첼시팬들의 안첼로티를 향한 비판들도 보드진의 말을 너무 고분고분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
[16]
은퇴이후에도 첼시 훈련장에 많이 얼굴을 비추는 선수중 한명이다.
[17]
이 대회에 독일은 마테우스, 헤슬러, 비어호프 등 30대 노장선수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1990년대 독일축구의 마지막 전성기를 선보인 멤버들로 이 때부터 독일축구는 녹슨전차라고 비야냥을 들어야 했었다. 비유하자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 대표팀의 엔트리라 생각하면 된다.
[18]
발락에게 골을 내주고 가장 좌절했을
이운재는 후에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페널티 키커로 나선 발락의 페널티킥을 선방해서 개인적으로는 복수를 이루었지만. 아울러 발락은 21세기 들어 성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대로 골을 넣은 유일한 독일 성인 선수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
김영권,
손흥민이 독일을 상대로 득점했다.
[19]
이때 상대팀 감독으로 만난
거스 히딩크는 훗날
첼시에서 부진하던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이 되었다.
[20]
당시 이탈리아는
프란체스코 토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크리스티안 비에리,
필리포 인자기,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잔루이지 부폰이라는 지구방위대 수준의 네임밸류에
UEFA 유로 2000 준우승이란 성적까지 챙긴 공포의 팀이었다. 당시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를 비롯해 브라질, 스페인과 함께 4강은 물론 우승까지 넘볼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
[21]
라울 곤살레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비센테 로드리게스,
호아킨 산체스,
차비 에르난데스,
페르난도 이에로,
미첼 살가도,
카를레스 푸욜,
이케르 카시야스 등 라 리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만 한 트럭이다.
[22]
그런데 2000년 8월 16일 독일은 스페인과의 친선전에서 4:1로 스페인을 완파한 적이 있다. 이 때는 발락과 함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와
메멧 숄,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건재한 상태였고,
옌스 예레미스의 컨디션도 좋았을 때였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선 발락과 예레미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전부 부상으로 대회에 불참했다.
[23]
2000년보다도 더 최악이였다. 그 때는 분데스리가 클럽팀들이 유럽대항전에서 어느정도 좋은 모습이라도 보였지 2004년도에는 그 분데스리가의 마지막 희망인 바이에른조차 유럽대항전에서 신나게 털렸다. 즉 이 시기는 국가대표로나 분데스리가 모두 최악의 시기를 달린 셈이다.
[24]
2004년엔 일본을 3:0으로 떡실신시켰는데, 여기서 발락이 한골을 넣었으며, 나머지 2골은 클로제의 골. 그러나 3일 뒤, 순수 국내파로 나온 본프레레 한국에게 1:3으로 복수당할정도의 눈물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25]
당시 프링스는 주로 라이트백에 많이 포진되었었다. 본격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본 건 클린스만 감독이 독일 대표팀을 맏으면서 4-4-2포지션을 사용할 때부터였다.
[26]
게다가 당시 람은 지금의 명성과는 차원이 다른 무명의 신예였고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중앙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중앙을 하만 혼자서 버티는 정신나간 포메이션이 탄생된 것이다.
[27]
다만, 이 당시에 슈바인슈타이거는 윙어가 주 포지션이었다. 슈바이니가 중미로 본격적으로 뛰게 된 것은 09-10 시즌부터이기 때문.
[28]
물론 하만의 경우 주 포지션이 홀딩 미드필더이나. 이번 포지션의 경우 중원에 달랑 하만을 혼자 배치시켰다.
[29]
하만을 깎아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 하만의 전성기 시절엔 유럽 최고의 수준의 강력하고 정확한 킥능력을 소유한 선수였고 이 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독일의 예능수준의 스쿼드를 보면 하만의 이런 뛰어난 능력이 거의 계륵수준이 되어버린다.
[30]
공격력이 딸리긴 해도 예레미스의 넓은 활동량으로 인해 과거 바이에른은 윙들이 자주 오버래핑에 나설 수 있었고 어느정도 예레미스가 커버를 잘 해내었는데 하만은 이게 전혀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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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링스는 발락만큼은 아니지만 중앙 미드필더의 정석다운 플레이를 선보인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발락 못지않는 호쾌한 슈팅 능력도 자랑했는데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전 코스타리카전에 보여준 득점이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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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발락은 2010년까지 독일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동했으며 발락이 월드컵 직전이었던 5월 잉글랜드 FA컵 결승전에서
케빈프린스 보아텡과 충돌하면서 입은 불의의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에 제외되면서 람이 불가피하게 주장 완장을 받았다.
[33]
이로 인해 그의 등번호 13번은
토마스 뮐러가 달았고, 발락이 은퇴하고 나서 완전히 물려받았다.
[34]
호나우두,
나카무라 슌스케도 2경기를 남기고 센추리 클럽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