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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대통령 이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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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점
2.1. 친노의 적자2.2. 풍부한 행정경험2.3. 도덕성2.4. 20대 총선 승리
3. 단점
3.1. 부족한 토론 실력, 연설 실력3.2. 정책적 어젠다 부족3.3. 의정활동 부진
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 문재인의 대통령 이전 평가 및 대통령에 도전한 18대 대선 19대 대선 출마 당시 장단점을 서술한 문서이다.

2. 장점

2.1. 친노의 적자

문재인의 최대 강점이자, 아이덴티티로 평가받는다. 노무현 자살 사건 이후 수많은 친노 후보들이 양립하였고 그 사이 치열한 다툼도 있었지만 문재인이 정계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2011년 말 이후 친노 진영은 문재인을 중심으로 단합하였다.

이러한 단합 성공은 문재인의 정계 참여 이전 친노 후보들이 대부분 선거 패배나 인지도 부족의 문제로 선두로 치고나가지 못했던 것도 한몫한다. 문재인 이전 친노중의 친노로 평가받으며 야권 대선주자 1위를 차지하고있던 유시민이 있었지만 정작 제1야당 신분이었던 통합민주당- 민주당- 민주통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무소속 혹은 진보정당에 소속되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 본인의 계파와 영향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와중에 5대 지선에서 민주당과의 단일화까지 성공하며 경기도지사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토가 득표에서도 드러나 민주당이 승리했다고 평가받은 선거에서 친이 정치인인 김문수 후보에게 패배하며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1] 이후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벌어진 김해 을 출마 잡음, 통합진보당 입당 후 벌어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등으로 이미지를 실추한 끝에 결국 2013년 초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아직까지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또다른 친노의 핵심으로 평가받은 한명숙 전 총리 역시 5대 지선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하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서울시장 선거는 경기도지사 선거와 달리 노회찬 후보가 끝까지 단일화에 응하지 않았고, 노회찬의 득표율이 한명숙과 오세훈의 득표차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한명숙 역시 서울시의원 다수가 민주당일만큼 여당심판 여론이 컸던 서울에서 패배한것 자체만으로 타격이 컸다. 더 큰 문제는 19대 총선.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 시기에 치뤄진 선거였고, 민주통합당의 과반까지도 낙관하던 상황이었지만 총선 당시 대표최고위원으로서 선거를 전두지휘한 한명숙은 통합진보당에게 질질끌려다닌 야권 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에서 당내 갈등, 임종석 사무총장 내정 문제, 비례대표 공천 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까지 쇄신한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과반을 넘겨줄정도로 예상밖에 쓴 패배를 당했고, 이로인한 민주계의 비토가 더 심해지게 된뒤 불법정치자금 수수사건 유죄와 함께 정계에서 사라졌다.

한명숙 전 총리와 똑같이 참여정부에서 총리를 맡았던 이해찬 17대 대선 경선 패배 이후 18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정도로 잠행하며 대권을 노리지 않았고, 국회 복귀 이후에도 대선 출마나 당권 확립과 같은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2] 노무현의 정치적 동반자로 여겨지던 안희정은 정작 참여정부때 실형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이 박탈당했던 상황이라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키울 기회가 없었고, 5대 지선에서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뻗지는 못했다. 비슷한 위치의 이광재는 2011년 상반기 실형을 선고받음에 따라 문재인이 정치를 시작할 당시 아예 정계에 없었다. 정세균 전 장관 역시 범친노계였지만 지방선거 승리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며 인지도가 옅어져갔다.

이와 달리 문재인은 2011년 말 정계에 나서기 전 큰 이미지 실추를 겪지 않았고,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것과 별개로 부울경 지역인 사상구 지역구에 당선되어 무난하게 국회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18대 대선 당시 이들에 비해 부정적 이미지가 없었다.

애초에 같은 친노계라고 해도 노무현의 인생의 동반자라 여겨지던 문재인의 정통성은 다른 후보들과 비교가 안된다. 그나마 문재인에 비견되는 정통성을 가진 후보로 문재인이 노무현과 함께하지 않은 노무현의 신인정치인시절을 같이한 안희정이 있었고 실제로 19대 대선 당시 친노 적자끼리의 싸움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변호사 시절부터 노무현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참여정부의 실세로 활약했던 문재인의 친노 이미지가 더 강함은 사실이다. 애초에 안희정 전 지사는 18대 대선에는 출마조차 하지 않았고, 19대 대선에 출마할 당시엔 이미 중앙정계에서 활약할만큼 활약한 문재인에게 인지도차이가 확실하게 밀렸고.

2.2. 풍부한 행정경험

참여정부의 실세로 활동하면서 민정수석비서관을 총 2년 4개월이나 역임하였고, 대통령비서실장으로 11개월을 근무하였다. 민정수석비서관 2기 이전에는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8개월을 근무했으니, 사실상 행정부에서 3년 11개월을 근무한 것이다.

단순히 4년여간의 세월을 하위공직자로 지낸것이 아니라 행정부의 실세중의 실세로 불리는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활동할 당시에도 왕수석, 실세로 불렸기 때문에 행정적인 면에서 초보적인 행동을 보여줄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된다. 노영민 전 의원은 참여정부에서 올라오는 현안의 95%를 이미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 처리했다고 밝히며, 국정현안을 파악하는데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극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

이는 18대 대선에서도 강조하였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된 이후 치뤄진 19대 대선에서는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마비되었던 국정업무를 수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중앙행정 경험이 압도적으로 풍부했던 사실을 더문캠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하였다. 당시 문재인을 제외한 유력 대권 주자들도 안철수를 제외하면 자치단체장 경험이 있고 재선까지 성공하며 6~8년간 행정경험을 쌓은 안희정, 이재명, 홍준표였지만 문재인의 중앙행정 경험에 비할수 없었다.

2.3. 도덕성

전과가 없고 도덕적 결함이 없는것 역시 장점으로 꼽혔다.[3] 오히려 보수측에서 제기한 논란인 금괴 20톤을 개그소재로 사용할 정도.

18대 대선에도 4대강, 자원외교등에서 벌어진 각종 비리논란으로 얼룩진 이명박 정부와 대비되었다. 다만 이당시 박근혜 후보도 선거 당시에는 전과가 없었고 비리 관련 의혹도 없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 심판vs정권 재창출로 이뤄지지 않고 문재인vs박근혜로 이어진 선거구도 때문에 큰 효과가 없었다.

19대 대선 경선 당시 본인을 한때 위협하기도 했던 안희정 지사와 이재명 시장은 모두 전과가 있기 때문에 경선 당시 큰 차별점으로 여겨졌다. 안희정 지사는 노무현 선거캠프의 총대를 맨 성격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불법선거자금 관련으로 실형을 받은 전과자였고, 이재명 시장은 이 당시에도 이미 전과4범인 상태였다.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과 비견될정도로 깨끗했지만 홍준표 후보는 선거법 위반으로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해본 사람이었다.

정계 입문 이후로도 개인적인 비리 사건이나 도덕적 논란이 없었기 때문에 크나큰 정치적 이미지 소모를 당하지 않고 대선 패배 이후에도 꾸준히 대권 주자로 오르내린 결과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 기존에 이야기했던대로 친노기만 하면 대권주자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친노라는 유산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5]

2.4. 20대 총선 승리

친노의 적자 타이틀이 문재인의 최대 강점이라면, 20대 총선 승리는 문재인에게 대선 승리를 안겨준 원동력이자 당선의 결정적 요인이라 평가할만하다. 실제로 20대 총선 이전에는 다른 여권후보인 김무성, 안철수와 엎치락뒤치락했고, 총선 직전인 2015년에는 오히려 서울시정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던 박원순 전 시장에게까지 밀리기도 하였지만 12년만의 민주당계 정당 승리를 안겨준 이후 지지율의 반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사실 20대 총선에서 문재인의 상황이 결과는 좋았어도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많이 겪었는데 승리를 거둠으로서 오히려 정치적 서사가 쌓이고 비문재인 계열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애초에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할것이라는 근거가 문재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탈당한 의원들이 안철수를 중심으로 국민의당을 창당하였기 때문에 원래도 새누리당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야권분산까지 되면 의석을 도저히 얻을수가 없다는 점이었는데, 오히려 친문으로만 구성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1당에 등극함으로서 안철수, 김한길, 손학규등 문재인에게 비판적이었던 의원들을 당에서 손안대고 축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20대 총선 이후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이 극심해지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며 문재인의 대권가도에 큰 영향을 준 선거이며, 사실상 19대 대선의 행방이 정해진 선거였다.[6]

3. 단점

3.1. 부족한 토론 실력, 연설 실력

상당한 눌변가로 지적받는다. 엄청난 달변가이자 정계입문 초기부터 뛰어난 토론실력을 선보인 본인의 동지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대목. 행정부 경험은 많지만 입법부에서 많은 경험을 쌓지 않아서일수도 있다.

박근혜 후보도 박근혜 화법이라는 명칭이 나올 만큼 한 눌변 한다는 지적이 있었고, 말의 논리력으로만 따지면 문재인보다 더 뒤떨어진다고 평가받았으나 박근혜 후보가 토론으로 본격적인 지적이 나온것은 18대 대선 토론회부터였고 불만이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였다. 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 과정 당시에는 오히려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과 서울시장 당시 과오를 첨예하게 지적하며 토론에서는 승리하였다는 평가도 나왔을 정도였기 때문에[7] 18대 대선 당시에 화법 문제가 심각한 이슈로 대두되지 않았다. 토론회에서도 박근혜 후보가 이정희 후보에게 공격받으며 박근혜 후보의 토론실력 이슈가 더 커졌지만 정작 문재인 후보도 호평받지 않았고, 오히려 토론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이정희 후보에게 뺏기며 난망의 자세로 보는게 맞냐는 의견도 나왔었다.

19대 대선에서 경선 상대로 나온 이재명 시장이나 대선 경쟁자였던 홍준표 지사, 유승민 의원도 토론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인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에 안그래도 여론조사 1위 후보로 '방어자'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 문재인 후보가 더 불리해지는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19대 대선 토론회에서는 정작 안철수 후보의 부족한 토론 실력이 더 대두되어 다시한번 지적을 피해갔지만 꼴찌를 피했다고 좋아하는 것이 대선 후보로서 좋아해야 할것은 아니다.

연설 실력에서 혹평을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의 평균에 미치지는 않는다고 평가받았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애초부터 웅변가로 정치에 데뷔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정계 입문부터 노무현 명패 사건, 3당 합당에 대한 비토 연설 등 언변에 관해서 상당한 인증을 받은채 데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한 단점이었다. 애초에 발음이 좋지 않아 듣기 어렵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휘를 쓰지도 않는다고 평가받았었다.

3.2. 정책적 어젠다 부족

친노의 적자라는 강렬한 아이덴티티와는 별개로 정치인으로서 달성한 화려한 업적이 없는 것도 단점으로 꼽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특별자치시 수도 이전 공약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며 충청권 표심을 돌리려 노력했고 이는 충청도민들이 충청대망론의 중심이었던 이회창 대신 노무현을 선택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사업, 환승 제도 등 서울시장 임기내 시행한 정책들이 호평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선거의 여왕으로 대비되는 당대표로서 선거 전승 기록, 그리고 이명박 정부 세종특별자치시 천도와 관련해 설전을 벌이며 여당 안의 야당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실세, 이후 더불어민주당 1대 당대표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만의 정책이 없다. 이미 세종시 천도는 위헌 판결 이후 꽤나 식은 논제였고, 다른 참여정부 사업중에 문재인이 핵심으로 참여했다고 널리 알려진 정책은 없었다. 당장 18대 대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 관련 설전을 벌였던 것이 좋은 이미지로 인식되어 충청권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것이 선거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는 특정 유권자를 확실하게 포섭할만한 승부수가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3.3. 의정활동 부진

19대 국회에서 의회 출석률, 법안발의 횟수, 상임위 출석률 모든곳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 행정적 능력으로 검증받고, 워커홀릭으로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를 구축중인 문재인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4. 관련 문서


[1] 당시 심상정 후보가 부재자투표 이후 단일화를 하며 심상정에게 간 부재자투표가 모두 무효표 처리되었다는 악재가 있었지만, 모든 무효표가 유시민에게 간다고 가정해도 김문수의 득표수를 이길수 없었다. 애초에 경기도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할만큼 여당심판 여론이 강했지만 정작 경기도지사에서 패배한것은 인물론에 큰 문제를 제기당할수밖에 없었다. [2] 이는 문재인의 당선 이후 2018년 전당대회에 출마할때까지 계속되었다. [3] 아들 문준용, 아내 김정숙과 관련된 논란이나 정부에 관한 논란은 모두 당선 이후에 지적된 논란이다. [4] 당장 한명숙에게 제일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은 서울시장 패배도, 19대 총선 패배도 아닌 불법정치자금 수수건 유죄였고, 앞서 언급한 안희정 지사 역시 차차기 대선후보로 각광받았었지만 안희정 성폭력 사건으로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5] 당장 이후 친문의 대표주자로 각광받으며 여론조사 선두권으로 일찌감치 앞서나갔지만, 이후 각종 논란과 행보등으로 친문 대권주자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를 잃은끝에 경선 통과에 실패한 이낙연이라는 사례가 있다. [6] 만일 이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당시 문재인과 대권후보 1~2위를 다투고 있던 김무성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을 것이고, 아니면 반문 계열에서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7] 이는 이명박 당시 예비후보가 더 심각한 눌변가여서이기도 하였지만 결론적으로 박근혜의 토론실력에 대한 지적사항은 커녕 호평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