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Sanctus Maximilianus Maria Kolbe
폴란드어: Święty Maksymilian Maria Kolbe[1]
1. 개요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자 순교자, 성인이다.속명은 라이문트 콜베(Rajmund Kolbe).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제였다. 시성된 가톨릭의 성인이며 성공회, 루터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추대된다. 축일은 8월 14일. 기자, 정치범, 아마추어 무선(HAM), 약물중독자, 가족, 낙태 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다.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의 선각자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천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기를 자청하여 순교하였다.
2. 생애
1894년 1월 9일 폴란드 우치키에 주(Województwo łódzkie)에 위치한 즈둔스카 볼라(Zduńska Wola)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을 했다. 1914년 로마에 유학을 가서 종신서원을 하고 성모 마리아 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1912년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1915년 이탈리아 로마의 신학교인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프리메이슨에서 반 교황 캠페인을 벌이자 이에 대항하여 6명의 동료 수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이때 콜베 수사와 그의 동료 수사들은 교리문답과 짧은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2]를 출간하였기에 이것이 언론인의 수호성인의 근거가 된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서 전간기 연간의 일본 제국으로 파견되어 6년간 머물렀는데,[3] 이때 일본에 가는 도중에 조선( 한반도)에도 잠깐 들렀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Niepokalanów)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3. 체포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4]도 체포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소장은 네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퇴회한 前 수도자의 명의로 제출된 것이었지만, 그는 독일어를 읽을 수도 없는데도 고소장은 게슈타포가 위조하여 독일어로 써 있었다. 前 수도자는 강압을 받아 억지로 사인만 한 것이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죄수 번호는 16670.
4. 순교
카를 프리츠슈 |
가요브니체크는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 신부이며,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라고 자청하여 나섰다. 프리프슈는 이를 승락했고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방이니 그야말로 상상초월인 상황. 그러나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때때로 감옥의 모습을 보러 온 통역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음식도 물도 주어지지 않은 채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독약인 페놀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팔을 뻗었습니다. 나는 보다 못해,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감시병과 보프가 나간 뒤 다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벽에 기대앉아 눈을 뜨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의 증언
콜베 신부의 시신은 그가 목숨을 잃은 다음날이자
성모 승천 대축일 날짜인
8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생전에 "성모 승천 대축일에 죽고 싶다."라고 말했던 그의 소원은 순교자로서 이루어졌다.-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의 증언
5. 시성
1971년 10월 10일에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고 시성되었다.[8]성공회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20세기의 순교자 10인의 조각상 가운데 1명으로 선정되었다.(그런데 이들 10인 중에 어쩐지 아프리카인이 많다. 심지어 중국인도 1명 있다. 정확히는 묘족.)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 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생존자가 되었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다.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시복 시성과 관련된 기적은, 1948년 7월 결핵을 앓던 안젤라 테스토니와 1940년 8월 정맥 석회화 경화증을 앓던 프랜시스 라이너가 콜베 신부에게 전구를 청하여 병이 치유된 일이다.
6. 그 외
10대 초반의 어린 시절 꿈 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는 체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성모 마리아는 어린 콜베에게 흰색, 빨간색의 왕관을 들고서 "어느 것을 원하느냐?"라고 물었는데, 콜베는 "둘 다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성모 마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고 한다. 여기서 흰색과 빨간색의 왕관은 각각 수도자로서의 순결함, 그리고 순교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9] 말하자면 본인의 미래를 암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주저없이 받아들였음을 뜻한다.[10]1930년 일본으로 가기 전 부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동생에게 편지를 남겼다.
(전략)
한국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나라였다. 그 경치를 구경하고 또 구경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부산은 한국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여기서 놀라운 일을 알게 됐다. 기차를 내려 배에 오르기 전에 4시간이나 자유로운 시간이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순경이
한국에 성당은 3개밖에 없고[11]
부산 시내에는
프로테스탄트 예배당이 6개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서는 그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거룩한
당신 아들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가! 1930년 8월 3일,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
콜베 성인을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은 한국인 사제도 있었다. 주인공은 오기순(1910년생) 신부라는 인물인데,[12] 일제 치하에서 신학생으로 일본 유학 생활을 하던 1930년대 초 나가사키에서 활동 중인 콜베 신부로부터 철학 교육을 받은 것이다. 오 신부는 1941년 일본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광복 후에는 서울대신학교(현재의 가톨릭대 성신교정)에서 철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만년에는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사목 활동을 수행하고서 은퇴, 1993년 선종했다.
가톨릭 계열의 만화잡지 내친구들에서 손옥희(스토리담당) 맹상수(그림) 부부가 성모의 기사 콜베라는 제목으로 콜베 신부의 일대기를 만화로 연재했다. 참고로 이들 부부는 몰로카이 섬의 다미안 신부,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와 같은 다른 성인들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들을 《내친구들》에서 연재했다.
2017년,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 드라마 형식의 영화가 모국 폴란드에서 제작되었다. 제목은 《2개의 왕관(Two Crowns)》이며, 위에 소개된 어린 시절 성모 마리아와의 일화에서 유래한 제목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에서도 특선영화로 방영했다.
6.1. 관련 문서
[1]
앞의 폴란드어 시비엥티(Święty)는
성인이란 뜻이다.
[2]
1922년 처음엔 5,000부로 시작한 잡지가 3년만에 1만부, 또 2년이 지나 5만부, 13년만인
1935년에는 70만부를 거쳐
1940년 체포 직전에는 100만부나 발간되었다.
[3]
일본에서 가장 천주교 교세가 강한
나가사키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 때문인지
나가사키에는 콜베 신부의 일본 시절을 다룬 기념관이 세워져있다.
[4]
유태인이나
집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비단 유력인물들 뿐만이 아니라
성직자나
수도자 등의 종교인, 교사, 기자, 학생, 학자 등의 인텔리들도 나치의 점령 지배에 대한 저항의 근원을 없애려는 의도로 집단 살해당했다. 그러면서도 '금발의 푸른 눈', 즉 당시 나치가 홍보하던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모습을 한 아이들은 유괴당해 나치에 충실한
독일인으로 양육시키는 위선을 저질렀다. 참고로
군 장교와 언론인들은 소련이 학살했다
[5]
Hauptsturmführer. 국방군
대위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6]
프리츠슈의 최후가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공식적으로는 1945년 5월 2일 이후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 상태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사망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소련 측에서는
영국 정보부
MI6이 그를
노르웨이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였다.
[7]
당시 프리츠슈의 처벌 방식이었다. 탈주자가 생긴 동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세우고 10명을 내키는 대로 골라 처형장에 보냈다.
[8]
순교자로 인정되면 시복시성 시에 필요한 기적 심사가 면제된다.
[9]
우연이겠지만 이들 두 색상은 콜베의 모국인
폴란드의 국기에 쓰인 것이기도 하다.
[10]
생전에 콜베는 성모 마리아로부터 경험한 계시를 자신의 어머니에게만 털어놓았을 뿐,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순교한 후
어머니를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11]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부산에는 이미 범일동에 성당(부산진 본당-오늘날의 범일성당)이 존재했다. (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공소도 상당했다. 다만
명동성당 같은 규모의 알려진 성당이 많지 않다는 의미였거나, 부산진 본당이 관리하는 지역 내에서 본당이
거제시
옥포,
밀양시
삼랑진 셋 뿐이라는 것이 잘못 전해졌을 수는 있다.(
울산광역시의 언양(현
울주군) 본당은 별개 분리.) 여하간 범일성당이
부산역에서 걸어서 최소한 45분 거리(3km 내외)로 떨어진 만큼, 주어진 시간 동안 콜베 신부 일행이
미사를 드리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성공회 성당인 대청동 성당이
부산역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용두산)에서 키 큰 '관광명소' 역할을 하고 있었던 점도
가톨릭 성당의 존재감을 낮추었을 수 있다.
[12]
그의 형 오기선(1907년생. 세례명 요셉)도 사제로 활동했으며, 두 사람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형제 사제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 가운데 대외 활동, 인지도 측면에서는 형 오기선이 동생보다 앞선 편인데, 교회사학자이자 다수의 문화 및 구호 활동을 펼쳐 1960년대에 문화훈장을 받았을 정도. 다만 일제 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라는 천주교계 친일 단체의 간부였다는 오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