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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주연맹 중앙집행위원 | ||
한문 | 李公樸 | |
한국식 독음 | 이공박 | |
영문 | Li Gongpu | |
본명 | 리용씨앙(李永祥) | |
출생 | 1902년 11월 26일 청나라 장쑤성 우진구 화이안현 | |
사망 | 1946년 7월 12일 중화민국 쿤밍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미국 오리건주 레이더대학 졸업 | |
직업 | 평론가, 정치가 | |
종교 | 무신론 |
1. 개요
중화민국의 평론가, 정치인. 청년시절 미국에 유학갔다가 귀국 후 여러 교육시설을 설립하고 1934년 <독서생활> 잡지를 창간한 후 평론가로 활동했다. 1930년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구국회에 가입하고 국민정부에게 "공산당과 손잡고 일제에 맞서라"고 요구했다가 7군자 체포 사건 때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중일전쟁 시기 항일투쟁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에 맞서 민주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46년 7월 12일 국민당의 독재를 규탄하는 연설을 한 직후 암살당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리궁푸는 1902년 장쑤성 우진구 화이안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빈곤해서 진강에서 견습공이 되어 근근히 먹고 살았다. 이후 진강윤주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1923년 우창 문화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가족과 떨어져 우창에 들어갔다. 그후 1925년 상하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신문화운동과 쑨원의 삼민주의의 영향으로 같은 해 중국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 무렵 5.30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 대학 연합회에 참가하여 노동인 과장직을 맡았다.1926년 초, 리궁푸는 학교를 떠나 광저우로 가서 국민혁명군 동로군의 총지휘부 정치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한 이래 국민당 내부에서 '청당'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떠났다. 1928년 8월, 그는 미국에 유학가서 오리건주 레이더대학에 정치학과에서 공부하는 한편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유학기간 동안 미국 및 세계 각국의 교육상황을 조사, 연구했고 학교를 "사회환경 개선의 발원지"라고 여겼다. 1930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리궁푸는 자비를 들여 뉴욕과 유럽으로 가서 서구의 교육 시스템을 조사하고 동년 겨울에 중국에 귀국했다.
리궁푸는 귀국 후 <환구신문> 시장을 맡았다. 또한 가오시치(高士其)와 함께 <서구통신사>를 기획했고 쩌우타오펀, 호유지(胡愈之) 등과 함께 <생활일보>를 기획했다. 이후 1932년 잡지 <신보월간>, <신보연감>을 발간하고 <신보> 여성 직원 학원과 <신보> 유통도서관을 설립해 여성 직원들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배려했다. 그리고 1934년 11월 10일에는 상하이에서 류식(柳湜),아이스치(艾思奇) 등과 함께 <독서생활> 간행물을 창간했다. 1936년 말, 그가 설립한 도서관의 장서가 2천여 권에서 3만여 권으로 증가했고 독자는 2만여 명에 달했는데 그 중 학생은 4500명이었다.
2.2. 구국회의 7군자
1935년 12월, 상하이 각계 구국연합회가 성립되었다. 리궁푸는 이 단체에 가입해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1936년엔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 집행위원,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모든 내전을 중지하라",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선언물을 발표했다. 그러던 1936년 11월 23일, 국민정부는 국민정부 당국은 구국회 지도자 7인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 리궁푸, 선쥔루, 장나이치, 쩌우타오펀, 스량, 왕자오스(王造時), 사첸리(沙千里)를 체포했다. 이후 국민정부는 위해민국 긴급치죄법에 의거, '비합법 단체를 조직하여 적비와 결탁하거나 파업, 동맹휴교, 불매운동을 선동하고 은밀하게 치안의 요란을 계획하여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죄'로 수감했다.국민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구국회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던 대중의 분노를 야기했다. 중국 각지에서 "7군자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촉발되었고 초공작전을 지휘하던 장쉐량과 봉천군벌은 장제스에게 7군자를 석방하고 초공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끝까지 거부하자, 장쉐량 등은 서안 사건을 단행했다. 그후 서안 사건이 평화롭게 해결되었고 국공합작이 이뤄지면서, 국민정부는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일제와 맞서기로 결의했다. 리궁푸 등 7인은 재판에 넘겨졌다가 중일전쟁 발발 직후 7월 31일에 석방되었다.
2.3. 중일전쟁 시기
리궁푸는 출옥후 산시성을 방문해 공산당 해방구의 실태를 조사했고 저우언라이 등과 면담했으며 항일구국운동을 벌이고 있는 열혈 청년단체와 좌담회를 벌였다. 1937년 10월 10일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전민 동원을 위한 호소문' 등 일련의 문장을 발표하며 "전민 동원이 없으면 전 국민의 전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산시군벌 옌시산의 초청으로 산시성에 가서 민족혁명대학을 설립했다. 민족혁명대학의 10대 강령은 중국 공산당의 '항일구국 10대 강령'과 흡사했고, 공산당원들이 대거 이 대학에 가입해 교직원 수가 금방 5천명으로 증가했고 많은 학생들이 이 대학을졸업한 후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갔다.마오쩌둥은 이런 그를 쓸만하다고 판단했고 리궁푸의 '항일구국 교육조직'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그의 신변을 지켜주기 위해 홍군 출신 베테랑 요원들을 경비원으로 배속시켜줬다. 이에 장제스는 리궁푸가 공산당과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에 분노하고 그를 엄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리궁푸는 국민당의 감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6개월 동안 15개 현과 500여 개 마을을 방문하고 공산당이 설립한 진차지 군사구역이 민주주의적이며 모범적인 항일 근거지이며 미래의 신중국의 시초라고 고평가헀다.
1937년 1940년 1월까지 3년여 동안, 리궁푸는 4만 5천여 자의 항전 연설문을 작성하고 항전교육을 호소하는 사설을 연이어 신문에 발표했다. 이중 '전민동원론', '항전교육의 이론과 실천', '승리의 길을 걷는 산서', '화북 적후-진차지' 등 4권의 저서는 중국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1940년 11월, 리궁푸는 선쥔루의 초대를 수락하고 충칭으로 가서 중국 민주연맹 설립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환남사변이 발발하자, 저우언라이는 리궁푸의 안전을 위해 운남, 미얀마로 가기를 권고하고 비서를 붙여줬다. 리궁푸는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미얀마에 가서 '중국 항일전쟁 현황' 전시회를 개최하여, 교포와 세계 인민들로부터 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이후 그는 쿤밍에서 <북문서옥>을 운영하면서 2년여 동안 각종 진보 문예서적 30여종을 출판했으며 지하 인쇄소에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과 《합동 정부》, 주더의 《해방구의 전장을 논함》을 출판했다.
2.4. 암살
1945년 10월, 리궁푸는 중국 민주연맹 중앙집행위원 겸 교육위원회 부주임을 맡았으며, 중국 인민구국회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46년 1월 충칭에서 타오싱즈(陶行知)와함께 사회대학을 설립하여 부교장 겸 교무장을 맡았다. 그러던 1946년 2월 10일, 국민당 특무는 궈모뤄, 마인추(马寅初), 리궁푸 등 각계 인사 60여 명을 공격해 상당수 인원들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리궁푸는 당국의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자회견을 열어 마인추 등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우리같이 민주운동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희생될 준비가 다 되었다. 우리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갔으며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1946년 5월 충칭에서 쿤밍으로 향한 리궁푸는 국민당 내 반동세력의 음모를 폭로하고 많은 시민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민주연맹은 비폭력적인 혁명 단체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6월 말, 민주연맹과 각계 인사들이 쿤밍에서 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국민정부에게 내전 중단, 민주제도 수립을 요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주장에 따르면, 국민정부는 쿤밍 경비사령부, 헌병 13연대 등에게 "중공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이 긴급한 시기에 민맹은 해당행위를 벌이고 있다. 이 간당분자들을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 쿤밍 경비 총사령관 곽규창(霍揆彰)은 명령을 받은 직후 민주연맹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는데 리궁푸가 1위로 꼽혔다고 한다. 결국 7월 11일 밤, 리궁푸는 부인과 함께 외출하던 중 청운거리 대흥파에서 국민당 특무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중국 문학자이자 민주운동가인 원이둬(闻一多)는 1946년 7월 15일 리궁푸 추도대회에서 연단에 올라 국민당을 강하게 비난하고 그날 오후 민주주간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당이 리궁푸를 죽였다고 폭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국민당 요원의 습격을 받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리궁푸와 원이둬 암살 사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식 역사에서는 리궁푸가 총탄을 맞고 암살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리궁푸의 아내 장만균(張曼筠)이 쓴 <리궁푸 회고록>에서는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이때 뒤에서 가볍게 ‘팍’하는 소리가 나더니 리궁푸가 내 옆에서 쓰러졌다”라고 기술되었다. 또한 원이둬의 아들 문립학(聞立鶴)은 1955년 베이징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죽인 총은 미국산 권총으로 소음제거기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소리가 아주 작아 아무도 주의하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이후 <부친이 난을 당한 상세한 기록>에서 "갑자기 큰 총성이 울리더니 부친은 이미 땅에 쓰러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는 그가 중국 공산당의 압력을 받고 기록을 수정했음을 의미한다.
국민당 군통 특무 선쭈이(沈醉)는 <군통내막(軍統內幕)>에서 “장개석이 여산에서 난징으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 리궁푸와 원이둬 암살에 대해 국방부 정보국 국장 마오린펑(毛人鳳)을 질책했는데, 마오린펑은 누가 한 짓인지 자신도 모르며 이런 일을 하도록 시킨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나중에 원이둬를 살해한 2명의 하위직 헌병 탕시량(湯時亮)과 이문산(李文山)은 상관 곽규창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독단적으로 암살했다고 진술했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리궁푸가 중공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정한다. 1965년 운남대학 언어학과 교수 주걸근(朱傑勤)의 제자 장군달(張君達)이 홍콩으로 도피했다. 그는 ‘천천일보(天天日報)’에 스승 주걸근이 공산당의 음모에 가담했음을 폭로했다.
"나의 은사 주걸근은 중공 중앙사회부 제3처 부처장과 연계되었다. 이 부처가 하는 일은 고급 지식인에 대한 통일전선공작이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주걸근이 내게 진실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찍이 리궁푸, 원이둬 두 교수를 암살하는 비밀공작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오직 대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민주적인 학자를 암살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야만 군중의 정서를 충동질 할 수 있으며 전국 청년들의 반항사상을 유발할 수 있었다. 또 이렇게 해야만 국민정부와 미국의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영향을 끼치며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를 줄이게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 후 미국이 장제스를 자신을 반대하는 인사들을 암살하는 독재자로 인식하고 대중차관협상을 중지하는 동시에 연속적인 조차(租借)법안, 전시 잉여물자 분배, 해군 양성 등 여러 가지 합작항목을 모두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민정부는 세력이 약해졌고, 공산당은 이 틈을 타 세력을 강화했고 "리궁푸, 원이둬를 암살한 잔인한 독재자 장제스를 타도하자"는 선전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임으로서 명분을 획득했다. 다만 현재까지는 리궁푸가 국민당 특무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3. 작품
- <화북적후-진차지>
- <전민동원론>
- <청년의 길>
- <항전교육의 이론과 실천>
- <승리의 길에 오른 산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