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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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矜順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로 염주(鹽州)[1] 일대에서 활동한 호족 혹은 도적[2]으로 휘하에 태평과 윤선을 두고 있었다.고려사 태평 열전에서만 언급되는 인물로, 기록에 따르면 오랫동안 궁예에게 복속되지 않았고 끝내 궁예에 의해 격파되었다고 한다. 그 외의 자세한 행적은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왕륭 등 다른 패서 지방 호족들이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궁예 밑으로 숙이고 들어간 것과 달리 오랫동안 반 궁예 포지션을 고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는 류긍순을 제압하고 염주를 손에 넣기는 하였으나, 염주 일대가 자신에게 오랫당안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 휘하에 활동하던 사람들을 제대로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이런 점을 볼 때에 류긍순이 궁예에게 있어 만만하지 않은 상대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3]
2. 기타
기록상 남아있는 궁예와 충돌한 패서 지역의 호족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다른 염주 출신 인물로 윤선도 있지만 윤선은 패서지역이 아닌 골암성(현 강원도 안변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으며, 류긍순과도 시기상 약 10 ~ 20년 씩이나 차이가 난다. 궁예의 패서복속은 896년 ~ 898년 무렵이고 류긍순을 복속시킨 시기를 904년 ~ 905년[4]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는데 윤선은 궁예 말에 화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나 골암진을 거점으로 흑수말갈을 끌어들여 노략질을 일삼다 궁예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그에게 투항한다.물론 패서 및 패서와 가까운 주변지역 중 이 시절에 궁예에 맞서 싸운 지방세력은 류긍순 이외에도 많긴 했다. 승령현(僧嶺縣, 연천군), 임강현(臨江縣, 장단군), 공암(孔巖, 서울 강서구), 검포(黔浦, 김포시), 혈구(穴口, 강화군) 등의 지역들이 궁예에 저항하였는데, 다만 이 성들에 있던 지도자들은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그 신분도 도적인지 토착 호족인지 고립된 통일신라 지방관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을 뿐이다.
기록은 짧아도 궁예에게 대항한 인물이자 태평의 전 주군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소재거리가 될 법 함에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태조 왕건의 첫 회에서 패서 호족들의 회의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다들 궁예의 급격한 세력확장에 쫄아 별다른 의견 충돌없이 다들 궁예에게 귀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만약 이 인물이 등장했다면 이 회의가 치열한 논쟁으로 전개되어 류긍순 혼자 궁예에게 대항하겠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다.
[1]
현
황해남도
연안군 지역.
통일신라 시기에는 해고군이라는 이름이었으며, 고려시대에 염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는 중앙의 지방통제력이 붕괴된 시점이라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성장했던 만큼 호족과 도적의 경계가 불분명해 실상 다 같은 지방세력가이다보니 누가 호족이고 누가 도적인지 구분은 무의미하다. 실상 패권을 쥔 견훤, 궁예, 왕건의 입장에서 어느 지방의 호족이 고분고분하지 않거나 불쾌하다 여기면 도적이라는 칭호를 붙여놓을 뿐이다.
[3]
당시 류긍순의 휘하에서 서기관의 일종인 기실 직책을 맡았던 태평 또한 병졸로 강등되었지만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왕건의 심복이 되어 고려의 개국에도 일조했고 직후 순군낭중에 임명되었다.
[4]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904년에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고, 궁예 열전에서는 905년 궁예가 패서를 13진으로 나누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