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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 감독 (초대~4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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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1994 | ||||
초대 존슨 ★ |
2대 카르세르 |
3대 요렌테 |
4대 베르나베우 |
5대 베라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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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퀴란테 |
7대 헤르츠카 ★ |
8대 퍼스 ★ |
9대 브루 ★★ |
10대 아르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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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엔시나스 |
12대 킨코세스 ★ |
13대 알베니스 ★ |
14대 킨코세스 |
15대 키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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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알베니스 |
17대 스카로네 |
18대 이피냐 |
19대 페르난데스 ★ |
20대 비야롱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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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카르닐리아 ★★ |
22대 무뇨스 |
23대 카르닐리아 ★ |
24대 플레이타스 |
25대 무뇨스 ( 무뇨스 체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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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몰로니 ★ |
27대 밀랴니치 ( 밀랴니치 체제) ★★★ |
28대 몰로니 ( 몰로니(2기)) ★★ |
29대 보슈코브 ( 보슈코브 체제) ★★ |
30대 몰로니 ( 몰로니(3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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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디 스테파노 ( 디 스테파노(1기)) |
32대 아마로 ( 아마로 체제) |
33대 몰로니 ( 몰로니(4기)) ★★★★ |
34대 베인하커르 ( 베인하커르(1기)) ★★★★★ |
35대 토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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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디 스테파노 ★ |
37대 안티치 |
38대 베인하커르 |
39대 플로로 ★★ |
40대 델 보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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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알 마드리드 CF 감독(41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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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감독 밀랸 밀랴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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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caf17><colcolor=#fff> 감독 | 밀랸 밀랴니치 / 제27대 감독 |
회장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제11대 회장 (1943~1978) |
코치 |
안토니오 루이스 (수석 코치) 스레츠코 라디시치 (피트니스 코치) 후안 산티스테반 (골키퍼 코치) |
주장 |
아만시오 아마로 / 제24대 주장 (1974~1976) 피리 / 제25대 주장 (1976~1980) |
계약 기간 |
1974년
7월 5일 ~
1977년
9월 8일 (3년 2개월 3일 / 1162일) |
계약 종료 (합의 후 사임) | |
연봉 | $150K[1] (감독 / #) |
전술 스타일 |
실용적이고 체계적인 전술 접근 ┗ 강력한 수비 조직과 질서정연함 ┗ 구조적 빌드업과 효율적 점유율 활용 ┗ 빠른 전환과 상대 약점 활용 ┗ 공수 사이의 균형 중시 ┗ 팀의 유대감과 전략적 유연성 강조 |
역대 전적 | 134경기 67승 36무 31패 (승률 50.00%) |
231득점 150실점 | |
우승 경력 |
1974-75 라리가 (우승) 1974-75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1975-76 라리가 (우승) |
3회 우승 |
[clearfix]
1. 개요
레알 마드리드 CF의 제27대 감독 밀랸 밀랴니치 체제를 정리한 문서이다.2. 감독 선임 과정
미겔 무뇨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이후 루이스 몰로니가 1973-74 시즌의 남은 기간을 임시로 맡았는데,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에게 0-5 대패를 당하는 치욕을 당하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 새로운 감독을 찾기 시작했다.베르나베우 회장은 엘레니오 에레라, 밀랸 밀랴니치 등 여러 후보들을 물색했는데 이미 몇년간 레알 감독 후보로 물색하던 밀랴니치를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밀랴니치는 이미 여러 차례 거절한 상태였는데, 15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유고슬라비아 감독을 병행하면서 2년간 레알의 감독을 맡기로 결정했다. 밀랴니치가 레알 감독으로 부임하자 유고슬라비아 일부 언론이 그의 해임을 주장하는 등의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계속 국가대표팀에 남았다. 그리고 조건으로 자신의 동료인 스레츠코 라디시치를 피트니스 코치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면서 라디시치는 레알 역사상 최초의 피트니스 코치가 되었다.
3. 연혁
3.1. 1974-75 시즌
- 라리가 : 우승 (34전 20승 10무 4패, 50점 / 66득점 34실점)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우승 (7전 3승 3무 1패 / 12득점 8실점)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8강 (6전 4승 1무 1패 / 15득점 4실점)
- 합계 : 47전 27승 14무 6패 / 93득점 46실점
- 최다 출전 :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47경기 1골)
- 최다 득점 : 산티야나 (43경기 23골)
새로 레알에 부임한 밀랴니치 감독은 기존 미겔 무뇨스 감독의 단순했던 훈련 방법에 몇 가지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하루 훈련 세션을 1번에서 3번으로 늘렸고, 아침과 점심 시간에는 체력 중심 훈련을 진행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공을 이용한 훈련을 진행했는데 이는 초기에 클럽 내부에서의 많은 불만을 일으켰다. 하지만 밀랴니치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피트니스 코치인 라디시치와 속도와 인내력 테스트 등 여러 체력 훈련을 진행했다. 또한 선수들에게 공을 두 번 이상 터치하지 못하도록 훈련시켰고 팀이 정밀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해 롱패스를 통한 플레이를 원활하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존에 미드필더로 뛰던 피리를 스위퍼로 내려서 기용했고, 피리가 내려가자 발생한 공격적인 공백은 산티야나를 향한 크로스 플레이로 메꿨다. 또, 귄터 네처의 포지션을 공격수로 바꿔 기용했다.
그리고 이 시즌부터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와 비센테 델 보스케가 주전으로 기용되기 시작했으며 FC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파울 브라이트너를, RCD 에스파뇰로부테 로베르토 마르티네스를 영입했고 이외로 알베르토 비토리아를 1군으로 올렸으며 호세 히메네스와 프란시스코 우리아를 영입했다. 그리고 팀의 레전드 이그나시오 소코가 은퇴를 선언하며 팀을 떠났고, 오스카르 마스와 라파엘 마라뇬, 페르난도 순수네기가 팀을 떠났다.
밀랴니치의 훈련 방법과 전술은 효과적으로 발휘했다. 완전히 무너졌던 지난 시즌과 달리 전반기 리그 17경기에서 단 1패 만을 기록했다.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 승리했고, 엘 클라시코도 승리했다. 그리고 10승 6무 1패를 기록하며 6라운드 이후 1위를 차지했고 계속 선두 자리를 지켜냈다. 그리고 리그에서의 좋은 흐름은 계속 이어졌는데, 27라운드까지 무패를 기록했으며 22라운드부터 26라운드까지 5연승을 기록했다. 3월까지 17승 8무 1패를 하며 압도적인 1위를 유지했고 4월 6일 엘체 CF전에 패배하긴 했으나 4월 27일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 무승부를 거뒀다. 그리고 이 경기로 16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지난 1971-72 시즌 이후 3시즌 만에 스페인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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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75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
한편 지난 1973-74 시즌에 루이스 몰로니가 팀을 추스려 FC 바르셀로나를 4-0으로 꺾고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차지해 이번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라운드에 크나츠피르드뉘피엘라이이드 프람을 만나 8-0 대승을 거뒀고 2라운드에서 FK 아우스트리아 빈과 맞붙었다. 홈에서 3-0 대승을 거두고 원정에서 2-2 무승부를 거두며 합계 5-2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만났는데 홈에서 산티야나와 귄터 네처가 득점하며 2-0으로 승리했다.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2차전에는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밀랴니치 감독이 즈베즈다의 선수 출신이자 감독 출신이었기에 "나는 내 마음을 배신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베오그라드 원정에 동행하지 않은 것인데, 결국 밀랴니치 감독은 티비로 경기를 봤고 안토니오 루이스 수석 코치가 대신 감독 대행을 맡아 2차전을 지휘했다. 그리고 2차전에서 드라간 자이치와 오그녠 페트로비치에게 연달아 실점하며 0-2로 패배했고 연장전에도 추가 득점이 나오지 않자 경기는 승부차기로 흘렀다. 레알은 비센테 델 보스케, 귄터 네처, 프란시스코 아길라르, 파울 브라이트너, 루비냔이 1~5번 키커로 나섰고 모두 성공시켰다. 한편 즈베즈다의 키커들도 모두 성공시키며 추가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양 팀의 6번 키커인 브라티슬라프 조르제비치와 고요 베티노가 모두 실패하며 7번 키커로 흘렀다. 즈베즈다의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성공했지만, 레알의 7번 키커 산티야나는 실축했고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레알이 8강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6강에서 밀랴니치의 레알은 CD 오렌세를 만났고 1차전에 무승부를 거뒀지만 2차전에서 3-1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UD 라스팔마스를 만나 1차전에서 0-4로 대패해 4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는데, 2차전 홈에서 5골을 넣으며 합산 스코어를 5-4로 뒤집었고 기적적으로 코파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해당 시즌 라리가 준우승 팀이자 홈에서 레알을 6-1로 대파했던 레알 사라고사였다. 1차전 2-2 무승부를 거뒀으나 2차전에서 2-1로 승리하며 2시즌 연속으로 코파 결승에 진출했다.
1975년 7월 5일,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에서 열린 코파 결승전에서 레알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양 팀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득점하지 못했고, 결국 우승 트로피의 향방은 승부차기로 정해지게 되었다. 레알의 1번 키커 아만시오 아마로는 성공했지만 아틀레티코의 1번 키커 하비에르 이루레타가 실축하며 레알이 유리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양 팀의 2번 키커 피리와 호세 에울레히오 하라테가 모두 성공시켰고, 3번 키커 비센테 델 보스케와 이그나시오 살세도가 모두 실축하며 2-1 스코어가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양 팀의 4번 키커와 5번 키커가 모두 성공하면서 4-3으로 레알이 승부차기에서 승리했고 13번째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1974-75 시즌의 레알은 라리가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더블을 차지하며 1961-62 시즌 이후 13년 만에 메이저 더블을 기록했는데, 밀랴니치 감독은 성공적으로 시즌을 이끌었으나 경기가 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마드리드 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팬들이 불만을 가진다고 해도 성과가 좋았기 때문에 그를 경질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3.2. 1975-76 시즌
- 라리가 : 우승 (34전 20승 8무 6패, 48점 / 54득점 26실점)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16강 (4전 3승 1패 / 7득점 4실점)
- 유러피언 컵 : 4강 (8전 2승 3무 3패 / 14득점 13실점)
- 합계 : 46전 25승 11무 10패 / 75득점 43실점
- 최다 출전 : 미겔 앙헬 곤살레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43경기 / 43경기 1골)
- 최다 득점 : 산티야나 (39경기 18골)
지난 시즌 성공적인 시즌을 치른 후 레알은 발렌시아 CF로부터 수비수 후안 솔을 영입해 수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게리니, 산체스 바리오스, 안드레스, 페드로 코랄 등을 영입했으며 겨울 이적시장에 수년간 레알의 공격을 이끌었던 레전드 라몬 그로소가 은퇴해 팀을 떠났다.
라이벌 FC 바르셀로나가 요한 크루이프, 요한 네스켄스를 앞세우며 강력한 공격력으로 리그 레이스를 펼쳤다면, 레알은 새로 영입한 후안 솔과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수비력으로 리그 레이스를 펼쳤다. 레알의 수비는 1975년 15경기에서 고작 11실점만을 내줬고 클린시트는 초반 4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포함, 무려 7번을 기록해 빛을 발했고 주포인 산티야나와 피리가 각각 리그에서 12골, 13골을 넣으며 바르셀로나에 뒤이은 공격력을 보이며 전반기에 1위 자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패배한 것이 흠이었다.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는 FC 디나모 부쿠레슈티를 만나 홈에서 4-1 대승을 거두고 원정에서 0-1로 패하며 합계 4-2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더비 카운티 FC를 만났는데 1차전 원정에서 PK 2개를 내주며 수비가 완전히 무너졌고, 찰리 조지에게 해트트릭을 헌납하며 피리의 골에도 1-4 대패를 기록했다. 패색이 매우 짙어진 상황이었지만 레알은 포기하지 않았고, 3분 만에 로베르토 마르티네스가 선제골을 넣으며 희망을 살렸다. 하지만 레알은 전반에 1골에 그쳤는데, 2-4의 상황에서 남은 45분 동안 2골을 넣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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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에서 기적과도 같은 역전승을 거두다 |
1976년 1월 4일 그라나다 CF전 승리 이후 레알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라싱 산탄데르에 연달아 0-1로 패하며 3위로 떨어졌지만 이후 8경기 7승 1무를 기록했고 23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전 승리를 기점으로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중간에 레알 사라고사, 아틀레틱 클루브, FC 바르셀로나에 패배하긴 했으나 레알은 1위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고, 강한 스쿼드를 가진 바르셀로나를 5점 차로 따돌리며 17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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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2연패를 달성한 1975-76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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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팀의 4강 1차전, 베르나베우로 입장하는 선수들 |
한편,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4라운드에서 라싱 클루브 데 페롤을 합계 6-2로 꺾고 16강으로 진출했다. 16강에서는 CD 테네리페를 만났는데, 원정에서 0-2로 패배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레알은 이를 홈에서 만회하고자 했으나 1골에 그쳤고, 승리했지만 합산 스코어에서 1-2로 밀리며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75-76 시즌이 종료된 후 밀랴니치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 버티 미 감독의 후임을 찾던 아스날 FC가 밀랴니치를 부임시키기 위해 접근했는데, 아스날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고 런던까지 방문했으나 끝내 아스날의 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레알과 재계약을 체결하며 잔류하게 되었다.
3.3. 1976-77 시즌
- 라리가 : 9위 (34전 12승 10무 12패, 34점 / 57득점 53실점)
- 코파 델 레이 : 3라운드 (2전 1승 1패 / 2득점 3실점)
- 유러피언 컵 : 2라운드 (4전 2승 1무 1패 / 3득점 3실점)
- 합계 : 40전 15승 11무 14패 / 62득점 59실점
- 최다 출전 : 미겔 앙헬 곤살레스 (39경기)
- 최다 득점 : 피리 (36경기 14골)
겨울에 팀을 떠난 라몬 그로소에 이어 Yé-yé 마드리드의 상징 아만시오 아마로도 은퇴하며 팀을 떠났고, 귄터 네처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이적했다. 이어 골키퍼 안드레스 훈게라가 레알 사라고사로, 수비수 토우리뇨는 인디펜디엔테 메델린으로 떠났고 수비수 호세 루이스는 은퇴했다. 레알은 귄터 네처를 대체하기 위해 지쿠, 케빈 키건을 영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네처를 대체하는데 실패했다. 대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헤닝 옌센을 영입했다.
라리가 2연패를 달성했던 디펜딩 챔피언 레알은 이 시즌에 완전히 무너졌다. 아틀레틱 클루브에 FC 바르셀로나에 연달아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리그에서 무려 12번을 패배했다. 그나마 10월에는 4승 1무로 반등해 잠시 2위까지 순위를 올렸으나 거기까지였고, 11월에 1승 1무 2패를 기록하며 6위로 내려갔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유러피언 컵 2라운드에서 클뤼프 브뤼허 KV에게 0-2로 탈락하며 분위기는 더욱 침체되었다.
팀의 상황은 후반기에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여서 1977년 리그 승리가 단 5번이었고, 1월부터 리그가 끝나는 5월까지 5승 7무 7패를 기록했다. 대패도 있었는데, 1월 2일 아틀레티코에게 0-4로 대패했으며 1월 23일 빌바오 원정에서는 1-4로 패배했다. 결국 이 시즌 레알은 9위를 기록하며 리그를 마무리했는데, 이는 1950-51 시즌 9위 이후 26년 만이었다. 그리고 코파에서도 3라운드에서 에르쿨레스 CF에게 합계 2-3으로 패배하며 시즌을 무관으로 마무리했고, 4위 안에도 들지 못하면서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 진출 실패라는 좋지 않은 기록을 쓰게 되었다.
이런 최악의 시즌을 보낸 밀랴니치 감독이었으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감독은 그를 경질시키지 않고 유임시키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게 했다.
3.4. 1977-78 시즌
직전 시즌 최악의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레알은 UD 라스팔마스로부터 엔리케 울프를, 부르고스 CF로부터 후아니토를 영입했다. 그리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베르하르트 비머를 영입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는데, 울리 슈틸리케의 경기를 보고 마음을 바꿔 비머 대신 슈틸리케를 영입했다. 그리고 파울 브라이트너와 마누엘 벨라스케스가 팀을 떠났다.그런데 1977년 9월 8일, 베르나베우 회장이 장 폐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암 진단을 받는 악재가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 레알은 9월 4일 UD 살라망카와의 개막전에서 1-2로 패배했는데, 9월 8일 밀랴니치는 병원에서 베르나베우와 만났고 합의 하에 밀랴니치가 갑자기 사임했다. 이로써 3년 간의 밀랴니치 시대가 끝이 나고 레알은 다시 루이스 몰로니를 선임해 남은 시즌을 맡겼다.
4. 득점 순위
순위 | 이름 | 레알 소속 기간 | 경기 수 | 득점 |
경기당 득점 |
국적 |
1 | 산티야나 | 1971 ~ 1988 | 117 | 54 | 0.46 | |
2 |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 1974 ~ 1980 | 95 | 45 | 0.47 | |
3 | 피리 | 1964 ~ 1980 | 105 | 41 | 0.39 | |
4 | 귄터 네처 | 1973 ~ 1976 | 74 | 13 | 0.18 | |
5 | 파울 브라이트너 | 1974 ~ 1977 | 100 | 10 | 0.10 | |
6 | 아만시오 아마로 | 1962 ~ 1974 | 54 | 8 | 0.15 |
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
시즌 | 라리가 | 유럽 대항전 | 코파 델 레이 | 인터컨티넨탈컵 |
1974-75 |
16 |
UEFA 컵위너스컵 8강 |
13 |
× |
1975-76 |
17 |
유러피언컵 4강 |
16강 | × |
1976-77 |
9위 (▼ 8) |
유러피언컵 2라운드 |
3라운드 | × |
1977-78[2] | 13위[3] | × | - | × |
5.2. 승패 기록
시즌 | 경기 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1973-74 | 47 | 27 | 14 | 6 | 93 | 46 |
1974-75 | 46 | 25 | 11 | 10 | 75 | 43 |
1975-76 | 40 | 15 | 11 | 14 | 62 | 59 |
1976-77 | 1 | 0 | 0 | 1 | 1 | 2 |
합계 | 134 | 67 | 36 | 31 | 231 | 150 |
6. 평가
미겔 무뇨스의 장기 집권으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진 레알이었고 이를 위해 밀랴니치 감독을 선임했는데 요구대로 큰 변화를 일으키며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무뇨스 체제 말기에는 보수적인 전술과 훈련 방식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혁신적인 훈련 기술을 도입하고 체계적인 팀 전술을 시행해 레알을 다시 라리가의 정상으로 이끌었다. 비록 팬들이 원하는 매력적인 축구를 하지는 못했으나 성적으로 입증했고 부임 첫 시즌에는 도메스틱 더블까지 기록했다.그리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비센테 델 보스케 등 유스 선수들을 잘 기용하면서 훗날 이들이 1980년대 황금기의 주역이 되는데 발판을 마련했다. 비록 1976-77 시즌 완전히 무너져내리며 20여년 만에 리그 최저 순위를 기록했지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그의 성과와 능력을 믿고 유임시켰다. 바로 다음 시즌 팀을 떠나기는 했으나 그가 레알 감독을 맡으며 보여준 성과와 구단에 불러온 혁신은 그를 위대한 레알 감독으로 남길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