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01:38

디엔비엔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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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일부
날짜
1954년 3월 13일 - 5월 7일
장소
베트남국, 디엔비엔푸 일대
교전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틀:깃발|]][[틀:깃발|]][[베트남국|]]
[[틀:깃발|]][[틀:깃발|]][[베트남 민주 공화국|]]
지원국 [[틀:깃발|]][[틀:깃발|]][[미국|]][1]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앙리 나바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피에르 랑그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px-White_flag_icon.svg.pn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px-White_flag_icon.svg.png
[[틀:깃발|]][[틀:깃발|]][[보응우옌잡|]]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레쫑떤
[[틀:깃발|]][[틀:깃발|]][[쭈후이먼|]]
병력 16,200명 64,500명
- 전투원 49,500명
- 비전투원 15,000명
피해 2,293~3,000명 전사[2]
6,650명 부상
1,729명 실종
11,721명 포로
항공기 229대 손실
전차 10대 손실
4,000~10,000명 이상 전사[3]
9,118명 부상
792명 실종
결과
베트민의 승리
영향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베트남 전쟁의 서막
파일:external/foreignlegion.info/1bep-cepml-dien-bien-phu.jpg
파일:external/vietstyleholiday.com/dien-bien-phu.jpg
1. 개요2. 배경3. 프랑스군의 전개
3.1. 시작3.2. 베트민군의 공격
3.2.1. 1차 공격 (1954년 3월 13일 ~ 15일)3.2.2. 소강상태 (1954년 3월 15일 ~ 30일)3.2.3. 2차 공격과 진지전 (1954년 3월 30일 ~ 4월)
3.3. 디엔비엔푸 요새 함락과 프랑스군의 최후
4. 결과
4.1. 프랑스군의 패인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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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어: 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戰役奠邊府)
프랑스어: La bataille de Diên Biên Phu
영어: Battle of Dien Bien Phu
한자: ( 전변부전투)
" 그것은 코끼리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호찌민이 <뉴욕타임스> 통신원 데이비드 숀브런(David Schoenbrun)과 한 인터뷰에서
디엔비엔푸는 우리 군이 싸웠던 가장 큰 전투였고,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우리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그리고 동 전투는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보응우옌잡,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4]>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5] 프랑스 제4공화국 간의 전투. 식민지 베트남이 지배자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해체되고, 모든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6] 베트남은 마침내 프랑스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역사적인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남북 베트남의 분할과 20년이 넘는 베트남 전쟁의 서막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육로로 다른 곳에 연결되지도 않은 분지 위에 요새를 만들고 정예병들의 전투력과 오직 항공보급 만으로 버텨보려던 프랑스군에 대항해 인력으로 수만 병력의 보급품과 화포들을 정글과 산속으로 운반하고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수 개월 동안 포위하여 공격한 베트민군의 눈물겨운 사투가 눈여겨볼 만하다.

2. 배경

파일:Toàn_cảnh_cánh_đồng_Điện_Biên.jpg
파일:PHO628daf90-d506-11e3-8991-a1b1b43b68cb-805x453.jpg
항공 정찰 사진 등 디엔비엔푸의 모습.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한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호찌민 베트민[7]과 싸우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트남 북부에 진입한 국민혁명군을 프랑스 정부가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고[8] 군대를 투입해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장악한 프랑스는 베트민을 도시지역에서 몰아내고 호찌민과 베트민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포함한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북부 산악지대로 투입하는 레아작전(Ľopération Léa)을 감행했지만 별 성과를 못내고 철수했다. 이후 베트민은 북부 산악지대에서 서서히 힘을 회복했고 1949년 국공내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찌민의 베트민을 지원했다.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패퇴했고[9]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뒤 1950년 12월 총공격 계획까지 세웠다.

물론 화력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이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1951년 1월에는 하노이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 4개 사단을 투입한 베트민의 공세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사용하여 막아냈고 총공세에 투입됐던 베트민군은 수천명의 사상자만 발생했으며 1951년 2월 베트민군의 총공세는 실패로 끝났다.[10]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정글전과 게릴라전의 특성상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의 전반적인 측면에서는 야금야금 영토가 축소되던 상황이었기에 프랑스군 또한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베트민은 1952년 호아 빈 지역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나싼 전투와 삼네우아를 포함한 라오스 지역과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를 포함한 중부와 남부에서도 여러 전투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1953년에는 북부 지역을 상당부분 장악하고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53년 5월 8일 극동프랑스원정군(CEFEO) 총사령관이었던 라울 살랑의 후임으로 부임한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0월 하노이 남쪽에 위치한 푸뇨꽌(Phu Nho Quan)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베트민은 그곳의 전력을 비운 상황이었고 프랑스군은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에 나바르는 라오스와 월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 6개 대대(제1, 6식민지공수대대,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 제8타격공수대대, 제5베트민공수대대, 제1외인공수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적을 유인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파일:Bataille_de_Dien_Bien_Phu.jpg

▲ 디엔비엔푸 위치 및 프랑스군의 전술도이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은 베트남의 주요 도시와 거점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오지에 분지 지형으로, 사실상 육상 접근로가 없다시피 했다. 즉 평상시 보급도 쉽지 않지만 만에 하나 포위당한다면 구하러 갈 방법도, 도망칠 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평정하지 못하면 전황이 타개하기 힘들다고 보고 항공보급과 공수부대만으로 요새를 건설하게 된다.

프랑스 육군이 이런 전략을 세우게 된 이유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으며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를 거점으로 해서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가진 베트민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화력에 강점이 있는 프랑스 육군이 쉽게 우세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멍청하게 요새에 닥돌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적의 후방 거점이나 교통로의 요지에 병력을 공수강하시켜서 아군 요새를 만들면 적은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요새에 돌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3. 프랑스군의 전개

파일:220px-Vietnam_location_map.svg.png
▲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군 배치도. 비행장을 중심으로 8개의 지원지점(PA, Points ďAppui)이 설치되었다.

주요 방어거점
PA 위게트(Huguette): 제2외인 보병연대 1대대,
PA 도미니크(Dominique): 제3알제리 척후병연대 3대대,
PA 클로딘(Claudine): 제1외인 공수대대, 제8타격 공수대대,
PA 도미니크2(Dominique2), PA 엘리앙(Éliane): 제4모로코 척후병연대 1대대

원격 저지선
PA 베아트리스(Béatrice): 제13외인반여단 3대대 (초반에 함락)
PA 가브리엘(Gabrielle): 제7알제리 척후병연대 5대대 (초반에 함락)
PA 안마리(Anne-Marie): 제3타이대대 (초반에 함락)
PA 이사벨(Isabelle): 제1알제리 척후병연대 2대대 (1954년1월 제3외인 보병연대 3대대 증원)

3.1. 시작

파일:Dien_bien_phu_castor_or_siege_deinterlaced.png 파일:20180507-phap-da-tung-bao-nhieu-quan-tham-gia-vao-cu-diem-dien-bien-phu-2.jpg
카스토르 작전 당시 C-119 수송기편으로 디엔비엔푸로 공수되는 프랑스군.

일단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과 장비 그리고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이유는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엉성하게 끌어모은 병력만으로는 당장 적지 한복판에 공수강하한다는 것 자체부터 자살행위였기 때문이었으며 이 때문에 공수부대를 주축으로 한 정예부대가 결성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작전명 카스토르(Ľopération Castor) 라는 이름으로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C-47 C-119 70여대로 이루어진 수송기들에 탑승시켜 현지 공수강하를 시켰다. 공수작전은 성공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4,195명의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지역에 주둔했던 베트민 2개 중대의 반격으로 프랑스군 3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했지만 얼마 안 가 베트민 부대는 100여 명 이상 전사하고 디엔비엔푸에서 축출되었다.
파일:M2402.jpg 파일:71d1cb25a4b9ef2c70e8dc1d0739bd31.jpg 파일:f8f-bearcat-dien-bien-phu-ii.jpg

디엔비엔푸에서의 베트민 세력 축출과 지역 확보를 목표로 한 카스토르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프랑스군은 즉시 각종 건설자재 및 장비들을 수송하여[11] 이 지역에 있던 구 일본군 비행장을 확장하였고 이를 지킬 요새를 건설했다. 더불어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12] 중심부에는 사령부가 위치한 엘리안, 도미니크, 클로딘, 위게트 기지가 있었고 외곽으로는 안마리, 가브리엘, 베아트리스, 이사벨 총 4개의 전초기지가 있었다.[13]

디엔비엔푸의 기지에 투입된 병력은 16,000여명 정도였고 지원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중장비의 경우 아래와 같다.

이때까지 발생한 손해는 지극히 미미했으므로 프랑스군은 한때지만 이미 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3.2. 베트민군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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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해서 부하들에게 하루만 더 기다리면 미군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 마르셀 비제아 중령[18]
출처: 스티븐의 전쟁영화보고評
그런데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 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 데다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리고 육상교통로를 만들려고 해도 애초에 디엔비엔푸가 하노이 서쪽 300km에 위치한 국경지대이므로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또한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베트민군이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동원해 포위된 프랑스군을 전투 내내 매우 괴롭혔다.사실 프랑스군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 전투들에서 베트민군은 대공포를 비롯한 대구경 중화기를 사용하는데 어설펐거나 그 양이 굉장히 적었기 때문에 프랑스군 지휘부는 베트민군에 의한 화력전은 걱정 할 필요 없다고 최종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의 지원이었다. 중국은 1953년 7월 6.25 전쟁에서 정전 체결하여 일단 종식시킨 이후 남쪽 국경과 닿은 베트남 공산정부가 있는게 덜 위협적이며 북한처럼 아군이 더 늘어나는 거니까 자신들이 사용하던 혹은 UN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 대공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베트민군에게 무상으로 공여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프랑스군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화력 우세라는 전제하에 꾸린 계획이었는데 되려 화력이 열세가 된 상황이기에 치명적인 실패를 겪어야만 했다.

디엔비엔푸 일대는 좁은 협곡과 정글로 둘러쌓인 교통사정이 열악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은 박격포와 대공포를 하나하나 분해해 인력으로 정글과 산을 돌파한 후 프랑스군 모르게 요지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화력전의 준비를 시작했다.이는 프랑스군의 화력에 대응하고 활주로와 항공기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파일:NVN-54-40-R29.jpg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에 있는 요새와 비행장은 잘 건설해 놓은 상태[19]였으나 요새와 방어진지들의 방어력이 썩 좋지 않았다. 애초에 보급로가 하늘에서 오는데다가 무게때문에 철근 콘크리트가 필요한 양의 1/15도 도착하지 않아서 핵심적인 벙커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진지가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수준이었다. 때문에 요새와 비행장을 수비하기 위해 외곽에 조성한 8개의 진지는 불안한 방어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특히 요새를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배치된 병력과 장비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하물며 원래부터 프랑스군이 생각한 요새의 방어력은 게릴라군이 운영할 수 있는 소형 박격포에는 대응이 가능하여 기동전으로 적을 섬멸하기 위한 것이었지, 정규군이 운영하고 박격포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쏘는 대구경 곡사포의 집중사격을 견뎌낼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초기 작전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베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베트민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 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몰아내자며 자발적으로 합류한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파일:Artillery_in_Dien_Bien_Phu.jpg 파일:EZRLCDMHL46AXM6Y6P2VKYLTBQ.jpg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은 여성이 포함된 25만 명을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무기와 물자를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같은 중장비들은 트럭과 우마차 등으로 야간에 인근까지 수송한 뒤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사람이 짊어지고 산 정상까지 가져와서 조립하였다. 군수품 또한 철마여단 등 민간인들이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20]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준 셈.[21]

한편 보응우옌잡 장군은 디엔비엔푸로 3개 사단을 모으는 동시에 1개 보병연대가 증원된 1개 사단을 북쪽 200km 지점에 있던 라이차우로 파견해 프랑스군 2,100명이 디엔비엔푸로 증원되기 전에 격파했고 이들 역시 디엔비엔푸 포위에 합류하였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 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5개 사단, 5만여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민은 마침내 포위전 기본 중 하나인 ' 방어자 대비 공격자의 승리 비율'인 1대 3의 상황을 만들었다.

1954년 1월 초에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도 디엔비엔푸 공격을 결심했고 베트남 인민군 5개 사단이 디엔비엔푸에 집결하여 디엔비엔푸 기지를 둘러싼 산속에 포진했다. 디엔비엔푸에 배치된 베트남 인민군은 2월 중순에는 전투 병력만 51,000명에 이르렀다. 반면 디엔비엔푸를 방어하는 프랑스군과 베트남국군의 병력은 합쳐서 약 12,000명 정도였다. 베트남 인민군이 수적 우위를 점하긴 했지만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춘 디엔비엔푸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 수 있는데 이 결정은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과 7월 27일 6.25 전쟁 휴전협정 체결 이후 급격히 ‘긴장 완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랑스 정치권에서도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협상에 나설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 갔고 호찌민도 11월 26일에 한 스웨덴 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1954년 1월에 베를린 회담에 모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무부 장관들은 4월에 열릴 주네브 회담에서 인도차이나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였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 지도자들로서는 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전까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필요가 생겼다. 독립 열망이 강한 베트민에게 디엔비엔푸 전투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투였던 것이다.[22]

베트민군이 공격을 미룬 이유에는 병력의 집결 외에도 날씨 문제도 있었다. 베트남은 대략 11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이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자연스럽게 바람이 강한 우기에는 항공 폭격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수송 능력도 저하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23]

3.2.1. 1차 공격 (1954년 3월 13일 ~ 15일)

1954년 3월 13일 17:00시. 우리는 힘람 저항거점에 포격을 개시했다. 우리 포병은 16:00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오경, 적이 우리 공격출발진지를 발견하고 일부 부대를 보내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우리 중포병 가운데 1개 부대는 힘람을 포격해 적을 격퇴시키고 우리 진지를 방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런 행동은 므엉타잉 비행장을 공격하면서 정확성을 시험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포격은 힘람 지휘소를 포함한 일부 방어진지와 몇 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힘람 지휘소의 소령 1명과 중앙 방어구역의 대령 1명이 최초 사격 이후 수 분 만에 사망했다.

우리 보병과 포병은 긴밀하게 협동했다. 최초 진지는 1시간 후, 두 번째 진지는 두 시간 후 완전히 궤멸되었다. 북서쪽 방향에서 실시된 3번째 진지에 대한 공격은 힘겨웠다. 적 포병은 처음에는 잠시 무력화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격렬하게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22:30분, 우리는 힘람 저항거점을 완전히 궤멸시켜 적군 300여 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을 생포했다. 힘람의 승리는 디엔비엔푸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고, 작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디엔비엔푸 p.471
1954년 3월 13일 첫 공격으로 PA 베아트리스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베트민은 분당 50발의 포를 발사했다.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하자마자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 육군 제13외인반여단 3대대가 방어하던 북동쪽 PA 베아트리스 방어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당시 훈련 부족으로 장거리 곡사 능력이 형편없었던 베트민 포병은 대신에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숨은 채로 직사 화력을 쏟아부었는데 수적 열세에 있던 프랑스 포병은 엄폐된 적 포병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파일:French_M24s_atr_Dien_Bien_Phu.jpg

기동간 사격을 하는 프랑스군의 채피 부대.

다음 날인 3월 14일 오후 8시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 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PA 가브리엘 진지에 가해졌고 이 알제리 부대는 밤새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 밀려 다음 날 새벽 2시 30분에 철수했다가 1시간 뒤 반격에 나서 12회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결국 철수했다. 15일 알제리 부대를 증원하기 위해 PA 클로딘에 있던 제1외인 공수대대 3, 4중대와 제5베트민공수대대가 M24 전차를 앞세우고 반격을 시도했으나 공격은 이내 저지되어 알제리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극심한 전력손실로 재정비를 위해 참호를 파고 방어로 전환함과 동시에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활주로가 파괴됨에 따라 집중공세 3일째인 3월 15일 비행장이 폐쇄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에 대한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조종사들이 대공포에 위축되어 높은 고도에서 투하하여 회수율은 극히 적었다. 3월 14일에 교전이 시작된 뒤 프랑스군은 4천 명이 넘는 공수부대 인원을 디엔비엔푸에 낙하시켜서 방어 병력을 보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3.2.2. 소강상태 (1954년 3월 15일 ~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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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하지만 워낙 베트민군의 숫자가 많고 정글과 산악이 합쳐진 지역에서 적의 규모와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는 답이 없었다. 게다가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상당해서 요새의 화력으로는 대응하기 힘들었다. 평소 베트민군 포병화력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프랑스군 포병지휘관 샤를 피로 대령은 결국 압도적인 적 포병화력에 대응하지 못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 3월 16일 수류탄으로 자살했다.[24]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프랑스 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으며, 이에 따라 기지에 보급되는 물자 역시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25]

3월 16일 오후 하노이 프랑스극동원정군 총사령부는 제6식민지 공수대대(6 BPC)를 디엔비엔푸에 증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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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3월 전투 상황. 북쪽의 외곽기지 3개가 전부 베트민 수중에 넘어갔다. 결국 중앙의 4개 기지와 남쪽의 이사벨 기지만 남아서 베트민의 총공세를 맞게 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 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가자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 진지[26]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3월 23일 남부지역 PA 이사벨과 연결된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PA 이사벨은 병력 증원 없이 단독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3월 28일 PA 클로딘에서 제8타격공수대대와 하노이에서 증원된 제6식민지공수대대가 반격을 개시하여 적의 공격 기세를 꺾었다.

3.2.3. 2차 공격과 진지전 (1954년 3월 30일 ~ 4월)

1954년 3월 말, 공격진지 건설이 완료되었고 우리는 동쪽 고지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3월 30일 17:00시, 디엔비엔푸 제2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우리는 중부 구역 동쪽의 5개 방어진지를 공격했다. 일련의 거점들은 적의 핵심 방어선으로, 거점들을 상실한다면 디엔비엔푸 방어는 불가능해질 것이 분명했다. 이는 전투가 얼마나 격렬해질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아군은 동쪽 고지군 공격에서 일거에 수 개 대대를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해당 방면 공격은 대규모 전투로 이어졌다. 이 전투는 일련의 포위전을 포함한 복잡한 전투였다. 시작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리했다. 45분 만에 A1진지 부근의 C1진지에 있는 적을 격멸하고 공격 2시간 만에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고지는 북쪽에 있던 적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D2 고지를 탈취했다. 적은 당일 오전과 다음 날에 역습을 감행했으나 모두 격퇴당했다.

중앙구역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최후의 거점이었던 A1고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A1 고지 일대의 치열했던 전투는 1954년 4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는 첫날 야간부터 2/3를 점령했으나, 적은 다음 날 오전부터 그다음 날까지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이 진지를 탈환했다. 3월 31일 밤, 우리는 두 번째 공격을 단행해 4월 1일 아침까지 전투한 끝에 진지의 2/3를 재점령했다.
디엔비엔푸 p.478~479
3월 30일 베트민군의 강력한 공격 준비사격 후 동쪽 진지(PA 도미니크, 엘리앙, 이사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육군 제3알제리 척후병연대 3대대와 제4모로코 척후병연대 1대대는 극심한 피해를 감수하여 밤새 싸웠다. 31일에는 제8타격공수대대와 제6식민지공수대대,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반격에 나서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공수부대의 적극적인 전투태세로 디엔비엔푸에서는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만이 끝까지 싸웠다는 신화를 남겼다. 베트민군은 4월 4일까지 공세를 지속했지만 프랑스 육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결국 공세를 포기한다. 공격군 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은 소극적이고 무능한 지휘관을 즉각 교체하고 재정비에 돌입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진지전 틈틈이 화염방사기로 역공을 가해 적 참호와 중화기 진지를 유린했다. 프랑스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나중에는 총검과 수류탄만으로 싸우기도 했다. 보충병이 없어서 부상병들이 차출되었고 밤낮없이 지속되는 전투로 과로사하는 병력들이 많았다. 이 와중에도 공수부대는 특유의 용맹성에 걸맞은 불굴의 의지로 처절하게 버텼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제6식민지 공수대대의 한 소총분대원 10명이 8일 밤낮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최후 2명의 생존자만 남았을 때 이들은 그때까지도 최초의 진지를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 없게 되었다.[27]

3.3. 디엔비엔푸 요새 함락과 프랑스군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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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계의 공격은 5월 1일 밤에 개시되었다. 우리는 신속하게 C1고지에 있는 적을 소탕해 이 진지를 확보했다. 우리는 넘롱강 좌안에 위치한 동족 고지군 자락에 있던 505, 505-A 거점을 신속하게 소멸시켰다. 서족에서는 311-A진지가 즉각 점령되었다. 남부구역에서는 홍꿈 북쪽에 있던 적 일부를 격멸했다. 5월 3일 밤, 우리는 서쪽에서 311-B 진지를 탈취했다. 우리 공격선과 포위망은 점점 더 추진되어, 어떤 지역에서는 적 지휘소 전방 300m까지 근접했다.
디엔비엔푸 p.488
프랑스군의 발밑에 매설한 폭탄을 터뜨려 A1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것이 1954년 5월 7일이었다. 프랑스군은 마침내 굴복하였다.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전투 중에 준장으로 진급한 까스트리(카스트리) 장군도 자기 지휘소 안에까지 들어온 북베트남군 장교에게 항복했다. 프랑스를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린 베트남은 식민 시대를 영광스럽게 마감했다. 그것도 힘으로써 말이다.
왜 호찌민인가? p.355~356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 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프랑스군 최후의 병력증원은 5월2일~5일까지 중대단위로 축차 투입된 프랑스 육군 제1타격공수대대(BPC)의 절망적인 공수 투입이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정말 사면초가의 뜻과 딱 맞아 떨어지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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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한 베트민 육군.[28]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현장 지휘관이었던 북서부작전단(GONO)장 카스트리 준장[29]은 하노이를 향해 "전투가 끝났습니다"라는 최후의 무전을 송신하였다. 하노이의 사령부는 모든 물자와 무기를 파괴하고 항복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기지에 남아있던 11,721명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혔고 전장을 이탈하여 정글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한 150여명만이 훗날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현지 사정을 아는 현지인 출신이었고 백인 병사 중 구조된 것은 24명뿐이었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전 소식을 들은 호찌민은 다음과 같은 축하 서한을 보냈다.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호찌민이 보낸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축하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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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프랑스군 포로들.

포로중에 4,436명의 부상자들은 적십자가 올 때까지 최소한의 응급처치만이 제공되었고 이들을 제외한 약 8천 명의 포로들은 수백 km 떨어진 여러 포로 수용소로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30] 살아남은 프랑스 포로들은 이후 프랑스군의 폭격을 막기 위한 인간 방패로 이용되었고 훗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고작 3,290명뿐이었다. 약 2개월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약 만여명의 피해가 발생하는 동안 베트민군도 2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피해와 관계없이 승리한 것은 확실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은 포로 교환 당시 그야말로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반면 베트민 포로들은 제법 잘 먹어서 대조를 이뤘다. 프랑스는 포로 학대라고 항의했지만 베트민 측은 당연히 코웃음치며 무시했다.[31]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측은 총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729명이 행방 불명자가 됐다. 참고로 전사자 중에는 미국인 2명도 있었다.[32] 11,721명의 포로 중 8,708명이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 3,013여 명은 프랑스군을 위해 싸운 베트남 현지인 병사들이었는데 이들의 생사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만약 이 3,013여 명 대부분이 생존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동시에 송환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가정한 뒤 계산에서 제외시키면 생존률이 좀 더 올라가기는 한다.[33]

디엔비엔푸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생환했다고 주장한 베트남인이 한 명은 있었다. 바로 남베트남의 팜반푸(Pham Van Phu) 장군으로, 어떻게 생환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며 따로 검증도 되지 않았다.[34] 이 사람은 후에 1975년 북베트남군의 대공세 때 2군단을 말아먹은 후 대세가 기울어지자 따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정확한 정황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의외로 남베트남은 20년이나 존속했는데도 스스로 남긴 기록들이 그리 많지 않아 미국 등으로 도망치지 못한 장교들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56일 간의 포위 끝에 베트민이 승리했고 프랑스는 완벽히 패배했다. 당시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던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을 마음 속으로 존경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전쟁 준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분대에서 중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보병이었다고.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병력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프랑스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미군도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보병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7~98

4. 결과

무장 게릴라 단체로 시작해 정규군까지 도달하는 모든 단계를 밟은 非유럽권 독립운동이 현대 서양 점령자와의 대규모 회전(會戰)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
"the first time that a non-European colonial independence movement had evolved through all the stages from guerrilla bands to a conventionally organized and equipped army able to defeat a modern Western occupier in pitched battle."
- 마틴 윈드로(Martin Windrow)[35]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아직 병력상으로는 프랑스군이 더 많았지만 이미 디엔비엔푸에서 정예병력과 물자, 장비를 몽땅 날려먹은 후라서 현지에 남아있는 병력은 전투의지가 바닥을 뚫을 정도로 크게 떨어지는 베트남 현지민이 주축이 된 민병대밖에 없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만한 물자와 장비, 자금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 전투로 커피, 고무, 주석, 향신료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 등 여러 자원을 착취하던 중요한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36]

미국 미 공군 B-29 수백 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는 실질적으로 선전포고 없는 참전에 해당하는 일까지 검토했지만 1954년 5월에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에게 함락되면서 이미 때늦은 일이라 포기해 버렸다.[37] 프랑스의 합창의장 폴 엘리(Paul Ely)는 미국 합참의장 아서 래드포드 제독과 논의하여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독수리 작전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38] 보응우옌잡 장군은 자신의 자서진인 디엔비엔푸에서 미국의 이런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54년 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디엔비엔푸 p.483~484
일설에는 이 폭격에 원자폭탄까지 사용을 고려했다는 얘기가 있다.[39]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던 펜타곤 관리들은 독수리 작전 계획을 입안하는 한편 원자폭탄 2~3발을 사용하는 방안도 논의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이 후일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3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는데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가 나온 것으로 8년여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프랑스는 1949년 일본군의 통치 때도 등장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한 꼭두각시 정권인 베트남국( 1949년~ 1955년)을 세워 놨고 이를 정통 베트남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베트남에서 손을 뗀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북베트남군의 기본 전략은 전선 구분 없이 무차별로 사방에서 공격하며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이아드랑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유인에 걸려 적지 한 가운데 공중강습한 미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북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경험을 되살려 1968년 구정 공세가 시작되기 10일 전인 1월 21일 케산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전쟁에서 제2의 디엔비엔푸가 재현될 거라고 예견됐던 케산 전투가 일어났다. 당시 케산을 포위한 북베트남군 부대 중에도 이 디엔비엔푸 때 참전한 부대가 있었고 서방 기자단 사이에선 보응우옌잡이 북베트남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케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거 아니냐는 설레발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선 보응우옌잡이 '우리는 현장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직접 부인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직후 대실패한 북베트남의 토지 개혁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주도한 보응우옌지압과 호치민을 위시한 북부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실권에서 밀려난지 한참 뒤였다는걸 생각하면 분명히 설레발에 가깝다.

그러나 미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항공지원과 포격으로 오히려 북베트남군을 개박살내 버리며 포위를 풀어버렸다. 미군 지휘부는 이 전투를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오히려 미국 국민들의 반전정서를 높이는 역효과만 냈는데, 이렇게 어렵게 승리를 했는데도 얻은 게 없었고 얼마 뒤 미군 스스로 케산에서 철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상대로도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지만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와 악과 깡으로 우주방어를 시전하는 1개 중대 규모의 한국 해병대를 상대로 북베트남군 1개 연대가 압도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채 패퇴당해야 했다.

사실 미군의 hit&run 과 한국군의 hit&stay 작전의 차이였는데 주둔군을 배치해 민간인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두들겨 패고 가 버리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은 많지만 알보병을 수십만씩 박아두기엔 인건비나 전사자 압박이 강해서...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이 식민지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의 여타 식민지에서도 거세게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막대한 전비 투입으로 재정 기반이 무너져 버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56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1960년까지 17개 아프리카 국가[40]들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디엔비엔푸에서 정신을 못 차린 프랑스는 알제리만이라도 끝까지 지배하고자 또 다시 전쟁을 벌였으나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독립 의지를 분쇄하는 데 실패했고 그 여파로 프랑스 본국에서 제4공화국 정부가 붕괴되고[41] 제5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62년에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4.1. 프랑스군의 패인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디엔비엔푸 p.452~453
포로수용소에서 우린 베트민 전사들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리고 우린 프랑스의 장군과 지휘관들이 혁명이 뭔지 전혀 모른 채 무려 8년 동안이나 혁명에 맞서 싸워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디엔비엔푸의 패배는 우연히 직면하게 된 운명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내려진 준엄한 심판이었다.
David Halberstam, Ho,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7, p.4.
위의 인용문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을 총 지휘한 보응우옌잡 장군이 자서전에 쓴 내용이다. 프랑스군은 항불전쟁을 거치며, 정규군 수준으로 성장한 베트민을 과소평가했으며 그 결과 패배했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도를 넘은 교만과 적에 대한 괄시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 해에 치른 나산 전투의 승리를 통해 베트민군을 얕잡아보기 시작했고 전투에서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나산 전투의 전술이 베트남 어디서든 통할 것이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후 무앙쿠아 전투에서 칼을 갈고 나온 베트민군에게 무참히 참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여전히 베트민군을 보급도 개판인 열악한 군대로 깔보고 있었으며 포병 전력을 늘려야 한다는 총지휘관 카스트리 장군의 말에 가브리엘 요새의 지휘관 샤를 피로는 "베트민군이 아무리 많은 포를 배치하더라도 현재 전개된 전력만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라고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심지어 베트민군 사단들이 디엔비엔푸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으나 이 또한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시로 정찰을 보낸 수색대는 몰살되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역시 프랑스군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열악하다고 무시한 베트민군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대포를 분해해 인력으로 옮기고 보급을 민간인들에게 맡기는 등 그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오만방자한 프랑스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1973년 1월,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응우옌반티에우는 군사적 관점에서 냉철히 평가하자면 프랑스가 하도 말아먹어서 북베트남이 이기기 어려운 전투도 아니었다고 혹평했다.
  • 부족한 전쟁의 대의명분과 허점투성이었던 카스토르 작전
    베트민군은 독립이라는 충분한 대의명분 하에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얻으며 전쟁에 돌입한 반면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부터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전쟁을 감행하고 있다는 자국과 국제적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앙쿠아 전투의 참패는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고 프랑스는 빠르게 여론을 돌리기 위해 전쟁을 끝내는 대신 지휘부를 교체하는 악수를 두었다. 앙리 나바르 장군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 요새화 작업에 들어갔으나 상술한 대로 공수된 콘크리트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사령부를 제외한 외곽 기지의 벙커들은 토사, 목재, 얇은 철판 등 취약하기 그지없는 재료들을 이용해야 했으며 당연히 이렇게 부실한 벙커들은 베트민의 포격 앞에 날아갔다. 공수된 곡사포, 박격포 등 기타 전력 역시 베트민군에 비해 크게 부족했으며, 그나마도 베트민군의 포격이 계속되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 복잡한 인적구성과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체계
    어느 누가 바오다이 황제를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가? 어느 병사가 미국에 의해 지원받고, 프랑스군에게 훈련받는 대지주와 바오다이의 군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싸우려 하겠는가?



    The Vietnam Wars 1945-1990 p.36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곳곳에서 현지인 식민지 부대를 편성하여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문제는 디엔비엔푸에 투입된 이들의 출신지는 알제리, 모로코, 타이족, 반공주의 성향의 친불 베트남인 등 다양해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의사소통도 안 되는 마당에 단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거기다 대다수 베트남인들 입장에선 프랑스에 협력하는 반공 베트남인들은 식민지 부역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마리에서는 베트민군의 선동에 넘어간 타이족 병사들이 전원 탈영하는 기가 막힌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디엔비엔푸 요새의 총지휘관 카스트리 대령은 기병 출신으로 애초에 방어전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가 지휘해야 하는 부대는 기병부대가 아니라 공수부대와 포병부대였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당신이 공수부대에 대해 뭘 알아?"라는 태도로 일방적으로 카스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스트리가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었다.

5. 기타

  • 디엔비엔푸(Diên Biên Phú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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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피에르 쇤도르페르 감독(Pierre Schoendoerffer,1928~2012)이 도널드 플레젠스 주연으로 만든 영화가 있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합작으로 프랑스 감독과 배우들이 베트남 올로케이션으로 만들었다. 프랑스군의 시각에서 디엔비엔푸의 몰락을 보여주는데 '용감하게 싸운 프랑스 만세!'가 아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의 허망한 모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42]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참고로 쇤도르페르 감독은 젊은 시절 프랑스군 사진병으로 이 전투에 종군하였다가 포로가 된 후 풀려난 경력이 있다.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겪은 일이다 보니 리얼리티가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빵빵쏘고 부수는 액션을 기대했다면 접어두자. 50년대 프랑스군의 장비와 복식을 제대로 고증한 수작으로 고증덕후들은 눈이 즐겁다.
  • 로스트 커맨드(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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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공수부대[43]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로스트 커맨드"에서도 초반 배경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과거에 영화 주인공 이름인 '라스피기'로 개봉하기도 했다. 잠깐이긴 해도 디엔비엔푸 전투의 양상과 처절함을 상당히 살린 편으로, 증원군으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이 전부 베트민군 장악지역으로 떨어져 그대로 몰살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영화의 주 배경인 알제리 독립 전쟁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는 사건에서 용기를 얻은 알제리 인들에 의해 더욱 가속된 것으로 나온다.
  • 7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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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에서 제작된 FPS " 7554"에는 게임 타이틀 자체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난 1954년 5월 7일에서 따 온 만큼 이 전투가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한다.[44] 미션 제목의 영문명이 "Global Impact.(국제적인 충격)"
  • 프랑스 공군 소속의 여자 간호사 주느비에브 드 갈라르(Geneviève de Ga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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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지옥 같은 현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디엔비엔푸의 천사'로 불리며 모든 프랑스군인들의 존경을 받았다.[45] 군인들의 배려로 개인 벙커를 사용할수 있었다고 하며 그녀의 헌신에 감동한 지휘부는 무전으로 상부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신청하여 그녀에게 수여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전으로 끝난 후 베트남에서도 그녀의 지위와 기개를 인정하였고 결국 살아남아 고국 땅을 밟았다.
  • 디엔비엔푸 전투의 상세한 전개 과정을 알아보려면 해당 블로그글을 읽어 봐도 좋다. #1, #2, #3
  • 디엔비엔푸 전투 현장 여행기는 해당 블로그 글을 읽어봐도 좋다. #1 # #3 #4
  • 디엔비엔푸 전투 현장 관련 또 다른 여행기는 해당 블로그 글을 읽어봐도 좋다. #1 #2 #3 #4 #5 #6 #7 #8
  • 2019년 12월 길찾기 출판사에서 보응우옌잡 장군이 집필한 책 두권을 번역하여 디엔비엔푸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간했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던 당사자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과 대한민국에 최초로 출간된 디엔비엔푸 전투 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프랑스군은 전투식량처럼 만든 휴대용 포도주 비노젤을 마셨다. 이는 부족한 보급에서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와 관련되어 공수보급된 비노젤이 적진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열받은 프랑스군이 적진에 떨어진 비노젤을 탈환할 결사대를 모집하자 너도 나도 지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전투 개시 2개월 전인 1954년 1월에 자청한 한국군 전투사단의 파병도 재검토했다. 이승만 정부가 내세웠던 파병 명분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써 도와줬던 프랑스에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공정신 고취 및 강화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주도아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면 반공투쟁을 강화하고 동시에 앞으로 미국과의 군비 강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이승만 정부의 파병 제안을 내부 의논 끝에 정중히 거부했다. 박태균 교수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부는 파병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에게 한국군 20개 사단을 35개 사단으로 증강해 달라고 요청했다.
  • 그런데 놀랍게도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한국인이 몇 명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한 프랑스군 부대들은 6.25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바로 이동하여 전투에 참가했는데 당시 프랑스군 부대에는 한국인 노무자와 카투사와 유사하게 프랑스군 부대에서 복무한 한국군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가 현지 입대 방식으로 프랑스군 외인부대에 입대하거나 부대를 따라 인도차이나로 갔으며 대략 3명 정도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1명이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이었던 전병일 씨는 6.25 전쟁 때 월남해 프랑스군에서 업무를 도왔다. 그러나 휴전 협정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전 씨는 프랑스군을 따라갔다가 입대했다. 이때 월맹을 진압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고, 이후에는 알제리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 후 '북한인'이면서 '남한인'으로서 프랑스에 살고 있다.(출처: 전진배 〈 “한국 땅에서 눈 감을 수만 있다면...”〉, 《중앙일보》 2008. 4. 14.)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비밀리에 참전한 미군 중에 2명이 전사했다. 그 중 한 명은 2004년 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맥거번 2세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민간 조종사로 CIA에 고용된 인물이다. 관련자료 제임스 맥거번 2세
  • 본문에도 언급된 전투가 벌어진 주요 거점들에는 여성의 이름들이 붙었는데 이를 두고 지휘관인 카스트리의 내연녀들의 이름이란 풍문이 있으나 증거는 없다.


[1]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일부 미군 조종사들이 민간 항공업자로 위장 후 참전했다. [2]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5 [3] 4,000명이라는 수치의 경우 베트남 측의 통계고 대략 8,000명에서 10,000명이라는 수치의 경우 프랑스와 서방 국가 측 통계다. [4] 1964년 보응우옌잡 장군이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에 쓴 글이다. [5] 북베트남 정부가 성립되기 전이기에 베트민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6] 단, 완전히 철수한 건 아니고 프랑스 대사관과 병원 시설은 남겨두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대세가 기울면서 사이공이 함락되자 완전히 철수했다. 의외로 베트콩들과 북베트남 정규군들이 한국과 프랑스의 대사관 건물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의 삼색기가 꽂혀진 건물은 피할 정도였다. 반대로 일본 대사관 건물은 일본 대사관인 걸 알게 되자 벌떼같이 들어가서 미군과 같이 철수하지 못하고 남은 일본인 대사관 직원들을 구타하고 발가벗겨 광장에 끌어내 돌과 침 세례를 날렸다.(왜 이랬는지는 기사 참고) 완전히 철수해서 비어 있는 미국 대사관도 마찬가지로 약탈당하고 동상들은 전부 부서졌으며 건물은 불에 활활 타올랐다고 한다. [7] 정식 명칭은 베트남 독립 동맹이다. 1941년 베트남에서 창설됐다. 한자 독음으로는 월맹. [8] 이 과정이 상당히 복잡한데 북베트남 점령을 맡은 중국군은 장제스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운남군벌 룽윈 산하의 부대였으며 이들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북베트남을 괴뢰화하려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국내 사정 수습에 정신이 없던 찰나에 이들이 패권주의적 뻘짓을 하자 열받은 장제스는 운남군벌의 수장 룽윈을 기습적으로 체포하는 등 운남군벌을 숙청해 버리는 한편 프랑스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가 중일전쟁 전 중국에 지니고 있던 이권들을 중국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북베트남을 프랑스 관할로 넘기기로 합의했다. 즉 중국의 국내 사정, 국민정부의 주권회복 외교, 인도차이나를 더 중요하게 여긴 프랑스의 식민정책이 결합된 결과다. [9] 중월 국경지대 동 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받은 바주카포와 무반동총, 박격포로 중무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국공산당이 지원한 무기들 또한 국공내전 6.25 전쟁에서 대량으로 노획한 미군의 무기다. [10] 반면 1951년 총공세 시기 발생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400명의 전사자와 1,200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데 그쳤다. 이후 총공세를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11] C-119를 통해 불도저를 공중 낙하시켰지만 첫 번째는 착지에 실패해 파손되었으며 두 번째는 성공적으로 공수시켰다. [12] 이 건설작업에는 해당 지역에 사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강제 투입되었다. [13] 다만 진지명이 음성 기호처럼 여성 이름으로 된 것이란 반박도 있다. # [14] 승공포로 알려진 대공기관총으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4연장화하였으며 지상공격용으로 이용한다. [15] 현지에 전차가 소수 있고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문제는 그 전차라는 것들이 89식 중전차, 하고, 치하 등등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포 달린 트랙터들뿐이었다는 것. 물론 2차대전 당시 중국 전선 등에서 증명된 사실이지만 포 달린 트랙터 정도라도 대전차화기가 빈약한 3세계 정규군이나 게릴라 등에게는 굉장히 위력적일 수 있다. 실제로 국공내전에서 홍군은 치하로 국부군의 셔먼을 농락하기도 했다. 결국 쓰는 상대나 쓰는 주체가 하기에 따라 굉장히 유용할 수 있다. 실제로도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지 현지의 전차들이 채피가 중형전차로 보일 정도로 약한 것일 뿐이었다. [16] 디엔비엔푸의 비행장에 6대가 배치되었다. [17] 본래 프랑스군은 미국에게 A-26 인베이더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8] 본래 작전 초기에 투입되어 진지 공사 및 안정 작업을 주도하였고 이후 하노이로 돌아와 프랑스로 귀국하려던 찰나 포위가 시작되자 다시 돌아와 함락되는 마지막 날까지 싸웠다. 왜 이렇게 말했냐하면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프랑스의 전비 대부분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 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람만 빼고 다 지원해 주었고 이 문서 하단에 나와 있다시피 실제로 공군을 이용한 폭격을 고려하기도 했다. [19] 일부는 구 일본 육군이 쓰던 비행장을 재개조했다. 현재도 이 비행장은 현대에도 국내노선 공항으로 잘 쓰고 있다. [20] 이 시절 자전거라는 게 현대의 MTB도 아니고 그냥 쌀집 자전거 수준이라 정글과 산악지대에서 타이어가 터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베트민 측은 헝겊을 말아 타이어 대신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해 버렸다. 여기다 베트민군 수뇌부는 작전 동안 필요한 물자로 군량미 4,200톤, 야채류/육류 각 100톤, 소금 80톤, 설탕 12톤을 추산했다. 하지만 보급 결과 군량미 14,905톤, 육류 577톤, 건식품 565톤, 소금 266톤, 설탕 62톤 등 계획의 3배 이상의 물자를 확보했다. [21] 이러한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민간인 동원은 40년대 말 국공내전 당시 인민해방군이 미리 선보인 적 있다. [22] 정재현,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요새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지 제국의 해체」, 『프랑스사 연구』 48, 한국프랑스사학회, 2023, 153~154쪽. [23] 2차대전 말기 벌지전투에서도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항공기가 뜨기 힘든 날씨를 골라 사방으로 기습공격 했을때 독일군은 초반에 승기를 잡는듯 했었다. [24] 이에 대해 상술하면 디엔비엔푸 요새는 험준한 산악에 쌓인 분지에 위치한 요새이기에 고지를 빼앗기면 요새 방어력이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상대를 얕잡아본 프랑스군은 높은 곳을 점령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무시했다. 그래서 주변의 산악지형에는 소수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베트민이 저 정도의 포병전력을 산속에 배치할 줄은 몰랐다. 또한 책임감을 느꼈다고는 해도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데 대령씩이나 되는 지휘관이 자살한 것 -설령 포병전력이 거의 전멸했어도- 은 지휘관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에게 있어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참고로 수류탄으로 자살한 건 한쪽 팔을 잃었기 때문에 권총을 쏠 수 없어서였다. 이로 볼 때 이미 상당한 PTSD를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25] 이후 베트민은 케산 전투에서도 비행장 주변에 37mm 대공포들을 깔아놓고 접근하는 미군 항공기를 노렸으나 구형 프롭기로 깔짝대던 프랑스군과 달리, 마하 1~2를 넘나드는 제트기들을 선두로 케산 기지 일대를 황무지로 만든 미군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 [26] 위의 지도에서 주황색 원 속의 4개 진지 [27] 나중에는 후방 하노이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인원들 중 지원자를 받아 투입할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다. 이들은 행정병과라서 공수훈련을 받지도 못했으나 사지에 갇힌 동료들을 구하겠다는 공수부대 특유의 전우애만으로 자원했다. 하지만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들도 대공포와 포탄 세례를 받거나 강하 도중에 지뢰밭에 떨어지는 등 대다수가 전투에 참가도 못하고 죽어나갔다. [28]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승리 당일 기념 사진 촬영을 까먹고 있다가 다음날에야 정신 차리고 이 사진을 연출해 냈다는 설도 있다. [29] 위에 설명에는 대령으로 나오는데 사실 전투 중반쯤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30] 하루에 미숫가루를 1명당 1줌씩 주었다. 포로 학대라고 반항하다가 죽은 포로도 속출했지만 베트민 측은 " 단두대로 베트남 저항군을 무작정 처형한 놈들에게 무슨 포로 우대냐." 라고 씹었다고 한다. .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프랑스군 포로들 중 베트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적인 생각을 가진 포로들은 다른 포로들에 비해 더 나은 응급처치와 시설 그리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31] 사실 이 전쟁은 누가 옮고 누가 잘못했는지 구별하는 것이 어불성설로, 베트민이 프랑스군으로 위장해 친불 성향 소수민족을 학살하거나 프랑스군으로 위장해 프랑스군 병원을 습격해 부상병, 장교와 군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을 무차별 학살한 전적이 있는등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편의를 위해 식민지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들을 차별하고 학대한 과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애초에 프랑스가 침략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프랑스에서 불렸던 멸칭 그대로, 이 전쟁은 더러운 전쟁이었던 것이다. [32]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00 [33] 하지만 보응우옌잡도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죽었고 이후 이들의 운명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아무 기록도 찾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이들 중 생환자가 있었으면 남베트남 정부에서 선전용으로 사용했을 것인데 어떠한 자료도 없으므로 베트민군에게 그대로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남베트남 입장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존재는 자신들의 프랑스 부역 흑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언급을 꺼렸을 수도 있다. [34] 제네바 협정 이후 월남했다고 한다. [35] The Last Valley: Dien Bien Phu and the French Defeat in Vietnam, Da Capo Press, 2005, ISBN-13: 978-0306814433. [36] 다만 남베트남에서는 친불 성향의 엘리트들이 정권을 잡았기에 70년대 초까지도 프랑스 기업들의 고무 농장등의 자산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는 수익성이 떨어졌기에 결국 하나 둘 철수했고 이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이들은 모두 철수한다. [37] 물론 미국은 그 이전부터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무기나 장비들 중 미국제 무기와 장비가 많았다. [38]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p.383을 참조 [39] 이건 미국이 프랑스에 핵무기를 지원해서 프랑스 주도로 핵공격을 하도록 권유했던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경우 미국의 행위는 말 그대로 전쟁범죄 그 자체가 된다. [40] 튀니지, 모로코, 기니, 니제르,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 베냉,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토고, 차드, 마다가스카르, 카메룬. [41] 결국 제4공화국도 전쟁으로 망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42] 대표적으로 베트남계 장교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 백인 사병들의 모습. [43] 외인부대가 아니고 정규군 공수부대다. 알제리계 장교가 있어서 외인부대 아닌가 오해할 수 있는데 작중에는 정규군으로 나온다. [44] 5457 아닌가 하며 조금 헷갈리는 사람은 일/월/년 순으로 생각하면 쉽다. [45] 원래 환자 이송을 위해 수송기를 타고 왔다가 비행기가 포격으로 부서지는 바람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떠날 수 있더라도 떠나지 않겠다'며 자원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