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심과 성채 (칼레시)
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레일레클리 (율란르 = 뱀) 다리와 구도심 전경
울루 자미 (대사원)의 내부
1. 개요
Niksar튀르키예 북부의 도시. 토카트에서 동북쪽으로 35km, 아마시아에서 동쪽으로 85km, 삼순에서 동남쪽으로 90km, 오르두에서 서남쪽으로 80km 떨어진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니카사르로도 표기되며, 현 지명은 로마 시대의 네오카이사레아 (Νεοκαισάρεια)에서 유래된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인구 4만의 소도시지만 켈키트 (리쿠스) 협곡의 비옥한 토양과 흑해 북안과 아나톨리아 중부 및 동부를 잇는 교통 거점으로써 과거 아마시아, 토카트, 시노프, 트라브존과 함께 폰토스 지방의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 폰투스 속주의 주도이자 기독교 거점으로써 유력한 주교구였다.
중세에는 12세기 다니슈멘드 왕조와 14세기 타제틴 베이국의 수도로 번영하며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다만 오스만 제국기에 인근 토카트 산작에 귀속되며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시내에는 성채, 로마 시대 무기고, 대사원, 야으바산 마드라사, 위레이 뷔윅 사원, 뱀 다리, 크르 크즐라르 영묘 등 유적이 많다. 시가지 동북쪽의 옛 묘지에는 다니슈멘드 조의 창건자 다니슈멘드 가지의 영묘가, 서쪽 10km 지점에는 탈라잔 다리가 있다. 출신 인물로 네오카이세레아를 기독교화시킨 현지 주교 그레고리오스 타우마투르구스와 카파도키아 교부 중 한명인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등이 있다.
2. 역사
2-3세기에 세워진 로마 시기 무기고
옛 지명은 카브리아 (Κάβειρα)로, 켈키트 (리쿠스) 강의 동안 및 파프야드레스 산의 기슭에 자리한 폰투스 지방의 도시 중 하나였다. 카브리아 주변의 마을 아메리아에는 토착신인 멘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는데, 다수의 노예들이 배속되었고 그 제사장은 높은 지위를 지녔다. 도시 자체에는 본래 물레방아, 축사, 사냥터, 광산 정도만 있었으나 기원전 100년경 미트리다테스 6세가 궁전을 세운후 카브리아라는 자체 동전을 주조하는 등 발전하였다. 미트리다테스 전쟁 중 루쿨루스의 아미수스 (삼순) 포위 당시 미트리다테스 6세가 피신해왔으나 기원전 72년 카브리아 전투[1] 후 점령되었다. 한편 후자는 인근 카에논 (Καινόν) 바위 성채에 보물을 숨겨두었는데, 전쟁 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공출되었다.
전후 폰투스 왕국을 속국화한 폼페이우스는 카브리아에 도시 지위를 주었고 디오스폴리스 (Διόσπολις)라 명명하였다. 서기 1세기 40년 이상 폰투스를 통치한 여왕 피토도리다는 도시를 확장하였고, 그리스어로 아우구스타 (황후 등의 칭호)에 대응되는 세바스테 (Σεβαστή)라 개칭한 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서기 60년대 네로 황제는 폰투스 왕국을 멸하고 폰토스 폴레모니아쿠스 속주를 설치하며 세바스테를 그 주도로 삼으며 네오카이사레아로 명명하였다. 다만 티베리우스 대에 이미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며, 한때 하드리아네라 개칭되기도 했으나 네오카이사레아로 고착화되었다. 3세기 들어 일대는 빠르게 기독교화되었는데, 현지 출신의 성직자로 오리게네스의 제자 중 하나인 그레고리오스 타우마투르구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부임시 단 7명의 기독교도가 있던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적극적으로 선교에 임하여 270년 사망 시에는 단 17명의 다신교만을 남겨두었다. 이후 네오카이사레아는 로마 제국의 주요 기독교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열린 지방 공의회 중 314-15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는 안키라에 이어 네오카이사레아에서 개최되었고, 성직자 부임의 연령 제한을 두고 부임 후 결혼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지닌 15개조 강령은 후일 칼케돈 공의회에 반영되었다. 335년에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하는데 공헌헌 ' 카파도키아 교부'들 중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오스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다만 네오카이사레아는 344년 대지진으로 시가지가 완전히 파괴되며 쇠퇴하였고, 499년의 니코폴리스 지진에도 영향을 받았다.
2.1. 중세
1158년에 세워진 야으바산 마드라사 | 1145년에 세워진 울루 자미 (대사원) |
시가지 동북쪽에 위치한 다니슈멘드 가지 영묘. 건물 자체는 12세기 중반에 세워졌고, 본래 돔이 있었으나 1939년 지진으로 무너졌다
동로마 제국기 일개 요새로 유지되던 도시는 11세기 후반 들어 동로마- 셀주크 제국 간의 격전지가 되었다. 1067-68년 알프 아르슬란의 장수 아프신 베이가 점령하여 약탈하였고, 얼마후 동로마 군이 수복했으나 만지케르트 전투 후 ( 아르투크 왕조의 선조인) 아르투크 베이가 재차 점령하였다. 하지만 1073년 동로마 군이 재차 수복하였고, 그후 루셀 드 바이욀의 반군이 점거했다가 1075년 반환되었다. 다만 혼란기를 틈타 다니슈멘드 왕조의 창건자인 다니슈멘드 아흐메트 가지가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고, 튀르크식 지명인 니크사르로 불리게 된 도시는 과학 등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 번영하였다. 1084년 다니슈멘드 가지는 니크사르 부근에서 전사하여 시가지 동북쪽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다니슈멘드 가지의 후계자인 귀뮈쉬테킨은 1100년 멜리테네 전투에서 보에몽 1세를 사로잡아 니크사르에 감금하였고, 따라서 같은 이탈리아인인 보에몽의 구출을 위해 결성된 롬바르드 십자군은 이듬해 니크사르를 목적지로 앙카라를 거쳐 진군했으나 120여 km를 남겨두고 메르지푼 전투에서 무슬림 연합군에게 괴멸되었다. 1175년 마누일 1세의 동로마 군이 아마시아와 함께 니크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얼마후 미리오케팔론 전투와 함께 세력을 확장한 룸 셀주크의 클르츠 아르슬란 2세가 다니슈멘드 조를 멸하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다만 13세기 중반 룸 셀주크는 몽골 제국에게 복속되며 약화되었고, 니크사르는 에레트나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346년 그에 복속한 타제틴 베이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군주 타제틴 베이는 트레비존트 제국과 동맹하여 오르두의 하즈에미르와 싸우다 1386년 전사하였고, 이듬해 에레트나 왕조의 실권자 부르하네딘이 점령하였다. 다만 1398년 후자가 사망하고 티무르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주민들은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에게 귀순하였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어 토카트 산작에 편성되었다. 1461년 트라브존 원정에 나선 메흐메트 2세가 니크사르를 거쳐갔다. 이슬람 왕조들의 수도였던만큼 니크사르의 주민들은 17세기 무렵 무슬림이 대부분이었고, 주교구 역시 오르두로 이전되었다. 1869년 기준 니크사르의 남성 인구는 6천 7백의 무슬림, 650여 그리스계 및 670여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엽 기독교도 인구는 이주되었고 현재는 튀르크계 무슬림만 남아있다.
3. 갤러리
시타델 북쪽의 시가지
시내의 시장 (바자르)
레일레클리 (율란르) 다리
위레이 부육 자미
울루 자미 (대사원)
야으바산 마드라사
칼레시 (성채)
칼레 하맘
크르 크즐라르 영묘
사아트 쿨레시 (시계탑)
뱀 다리의 문양
서쪽 10km 지점 켈키트 강을 가로지르는 탈라잔 다리
구도심의 건물
- [니크사르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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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 크즐라르 영묘 야을바산 영묘
외성
성채 (칼레시)
야으바산 마드라사
울루 자미 위레이 뷔윅 자미 위레이 뷔윅 자미
레일레클리 (율란르) 다리시계탑
로마 시대 무기고
[1]
루쿨루스가 2만의 병력으로 2배의 폰투스 군 격파, 이후 미트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로 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