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0 13:46:06

노희공

노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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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魯)나라 19대 국군
희공
僖公
희(姬)
노(魯)
신(申)
아버지 노장공(魯莊公) 희동(姬同)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27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7년

1. 개요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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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나라의 19대 군주. 노장공의 아들. 노민공의 동생, 노군반의 이복형. 노문공의 아버지. 그는 진(陳)나라에 있다가 계손씨의 조상인 계우의 도움으로 노나라의 군주가 된다. 그는 대숙 해사의 도움으로 중손경보를 자살하게 했고[1] 주(邾)나라에 머물던 애강 제환공이 불러 죽이자 노희공은 그녀를 매장하였다.

2. 치세

노희공 원년(기원전 659년), 계우에게 문양과 비(鄪) 땅에 봉하고 상국에 임명했다.

노희공 4년(기원전 656년), 제환공이 초나라를 초나라를 치자 초성왕은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없어서 대부 굴완(屈完)을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2]

노희공 9년(기원전 651년), 진(晉)나라에서는 진헌공이 죽고 해제 탁자가 순서대로 즉위했는데, 그 이유는 대부 이극(里克)이 차례로 죽였기 때문이다. 이극은 공자 중이(重耳)를 부르려 했으나 희중이(姬重耳)가 거절하고,[3]주면 받지.... 대신 승낙한 공자 이오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혜공이다.

노희공 17년(기원전 643년), 노나라가 항나라를 멸했으며, 최초의 패자(霸者)인 제환공이 죽었다.

노희공 18년(기원전 642년), 송양공 제효공을 세워 주었다. 그리고 제나라가 안정되자 송양공은 제환공 다음으로 패자가 될 마음을 품었다.[4]

노희공 22년(기원전 638년), 송양공이 초성왕과 싸웠으나 송양지인을 쓸데없이 베푸는 바람에, 송양공은 홍수전투에서 시원하게 패했다. 후세 사람 손자가 전투에는 속임수도 마다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랬는지는 불명.[5]

노희공 23년(기원전 637년), 송양공은 전투 중에 생긴 상처가 터져서 죽었다.[6]

노희공 24년(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가 진(秦)목공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노희공 28년(기원전 632년), 진문공은 자신의 진(晉)나라와 제나라, 진(秦)나라, 송나라와 힘을 합치고, 초나라는 위(衛)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연합군과 성복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일을 성복 전투라 했다. 그리고 진문공은 정나라를 복속시켰다.[7]

노희공 33년(기원전 627년), 노희공이 죽고 그 아들 희흥(姬興)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노문공이다.


[1] 그 일로 중손씨는 중손씨라 칭하지 않고 맹손씨라 칭하게 된다. [2] 단 순순히 해준 것은 아니고 주소왕 때 주소왕이 익사한 일을 거론하며 자존심은 세웠다. [3] 이 사람이 훗날 진문공이다. [4] 그것은 패자가 어지간해서는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5] 리동혁 본삼국지의 1권의 부록(구판 기준)인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당시 변화하는 패러다임을 따라가지 못해서 이랬다고 한다. [6] 이때 진문공이 송나라를 방문했다가 송양공이 죽기 직전 초나라로 갔다고 한다. [7] 이것은 진(晉)나라가 패권을 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