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17:51:12

노소공

노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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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魯)나라 25대 국군
소공
昭公
희(姬)
노(魯)
조(稠), 주(裯)
아버지 노양공(魯襄公) 희오(姬午)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10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41년 ~ 기원전 510년

1. 개요2. 치세
2.1. 진(晉)나라에게 굴욕당해 대신 초나라에게 붙다.2.2. 친위 쿠데타2.3. 고생스러운 망명길2.4. 최후와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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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나라의 25대 군주. 노양공의 아들. 희야의 동생. 노정공의 형. 희야가 죽고 노나라의 군주가 된다. 그는 오랫만에 19세의 성인인 노나라 군주이나 그 행동이 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삼환씨 중 하나인 숙손씨의 숙손표는 그 일을 들어 세우고 싶지 않아했으나 계손씨의 계무자는 그것을 무시하고 노소공을 세웠다. 노양공의 상중에 3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1] 그래서 노소공의 끝이 좋지 않을거라고 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삼환을 진압하려 했으나 거꾸러 말려 망명하며 외국을 떠돌며 고생하다가 죽었다.

2. 치세

2.1. 진(晉)나라에게 굴욕당해 대신 초나라에게 붙다.

노소공 3년(기원전 539년), 노소공은 진(晉)나라에서 조회하려고 했는데, 진평공이 안하고 돌아가 노소공은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힘들게 왔는데 허탕치니 당연히 좋지 않은 감정이 들겠지.

노소공 4년(기원전 538년), 초영왕이 신에서 제후들과 회맹했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노소공 7년(기원전 535년), 숙손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올려준 계무자가 죽었다.

노소공 8년(기원전 534년), 초영왕이 장화대가 건립되자 노소공은 그의 부름에 응해 축하하니 초영왕은 그에게 보물을 주었으나 초영왕은 후회하고 노소공을 속여 그 보물을 되찾아갔다. 줬다 뺐는게 제일 치사한 거다.[2]

노소공 12년(기원전 530년), 노소공이 다시 진나라에 조회를 가려 했으나 진평공이 또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분노 게이지 오르겠네.

노소공 13년(기원전 529년), 초나라의 공자 기질[3]이 초영왕을 시해하고 형인 자오를 자결하게 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초평왕이다.

노소공 15년(기원전 527년), 또 다시 진나라에 조회했는데, 진소공의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 이에 노소공은 그 일로 부끄럽게 여겼다. 진나라가 자꾸 무시하니 화날만도 하지만 참아야 한다...... 약소국의 비애여.....

노소공 20년(기원전 522년), 제경공(齊景公)과 안영이 노나라의 변경에서 사냥가다가 온 김에 노나라에서 예를 물었다.[4]

노소공 21년(기원전 521년), 진나라에 조회하려 했으나 좌절당했다. 이쯤되면 해탈했겠다.

2.2. 친위 쿠데타

노소공 25년(기원전 517년), 계평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시켰는데,[5] 계평자는 닭머리에 투구를 씌우고, 후소백은 금속 발톱을 달았다. 이기기 위해서 반칙을 하는 양반들은 예나 지금이나 꼭 있다. 계평자는 크게 노해 후소백의 영역에 침범하자 후소백은 이에 원망을 품었다. 후소백의 아우 회가 후씨를 모함하고 계씨의 집에 숨었다. 이에 후소백은 계씨의 가신을 감금하니 계평자도 후소백의 가신을 가두니 이에 후씨는 노소공에게 그것을 보고했다. 이에 크게 노한 노소공은 같은 10월 무술일(11일) 계씨를 쳤다. 그러나 숙손씨가 그것을 알리는 바람에, 노소공은 패해 제나라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계씨는 후소백을 죽였다.

2.3. 고생스러운 망명길

노소공 26년(기원전 516년), 제경공(齊景公)이 노나라의 운 땅을 쳐 거기에 노소공이 머물게 했고, 노소공을 도우려 했으나 고흘과 자장이 말려서 시행되지 않았다.

노소공 28년(기원전 514년), 노소공이 진(晉)나라로 망명해 진나라의 힘을 빌어 귀국하려 했으나 진나라의 6경과 계평자가 한통속이라 진경공에게 돕지 말라해 진후 땅에 살게 했다. 끼리끼리 놀고, 가재는 게편에, 유유상종이다.[6]

노소공 29년(기원전 513년), 노소공은 운 땅에 되돌아왔다. 이때 제경공이 스스로 주군이라 칭해 노소공은 부끄러워했다. 이쯤되면 동정표를 줘야할 지경이다.

노소공 31년(기원전 511년), 진나라가 노소공을 귀국시키려 했으나 계평자가 방해해 실패했다.

2.4. 최후와 여담

노소공 32년(기원전 510년), 노소공이 병에 걸려 12월 기미일에 죽으니 그 나이가 51세였다. 그리고 노소공의 아우 희송(姬宋)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공자를 등용한 노정공이다. 여담이지만 자치통감 삼국지연의에서 조모 사마소를 치려할 때 왕경이 노소공의 고사를 들며 말렸으나, 조모는 듣지 않아 가충의 부하인 성제, 성쉬 형제에게 죽었다. 노소공보다 더 끔찍하게 죽은 것이다. 쉽게 말해 끔살[7]


[1] 그것이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례에 의하면 부모의 상에는 3년동안 탈상을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상복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상을 미처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당장 조선에서도 부모가 죽으면 남은 자손들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룬다. 이것의 근거가 주례이다. [2] 물론 노나라가 힘이 약해 찍소리조차 하지 못했으나, 이것이 초영왕이 초평왕에게 죽는 명분 중 하나가 된다. [3] 훗날 초평왕이다. [4] 그것은 노나라가 그만큼 예의를 숭상한다는 증거다.주공의 자손의 나라인데 당연하지. [5] 인간이 한쪽 발잡고 하는 그거 말고 진짜 닭을 시켜서 한 닭싸움이다. [6] 이 드립이 틀린게 아닌게, 이들이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어서다. [7] 정사 삼국지에는 그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진의 신하가 된 진수는 서진을 개창한 사마소의 악행을 적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기 때문이다.다만 배송지가 주석을 달때 참조했던 <한진춘추> 등에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