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4:40:25

김용식(축구인)

김용식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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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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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전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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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1991년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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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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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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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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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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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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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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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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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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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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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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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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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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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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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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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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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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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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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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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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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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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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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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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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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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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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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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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Kim Yong-sik.jpg
<colbgcolor=#eee,#222> 이름 김용식 (金容植)
출생 1910년 7월 25일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군
사망 1985년 3월 8일 (향년 7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신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신체 172cm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1]
등번호 -[2]
소속 <colbgcolor=#eee,#222> 선수 숭실전문학교 (1930~1931)
보성전문학교 (1932~1937)
경성축구단 (1933~1940)
조선 축구단 (1934)
와세다대학 (1937)
평양축구단 (1940~1942)
교통부축구단 (1943?~1945?)
경성축구단 / 서울축구단 (1946~1947)
조선전업축구단 (1946~1950)
육군축구단 (1950~1952)
감독 대한민국 대표팀 (1953~1954)
대한민국 대표팀 (1959)
대한민국 대표팀 (1960~1961)
양지 축구단 (1968~1969)
대한민국 대표팀 (1969)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1970)
할렐루야 축구단 (1981~1982)
국가대표 3경기 0골 ( 일본 / 1936)
3경기 1골 ( 대한민국 / 1948~1952)

1. 개요2. 유년 시기3. 선수 생활4. 지도자 생활5. 수상6. 기록7. 기타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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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1세대 축구 선수 축구 감독으로 활약했던 한국 축구계의 최고 원로.

흔히 축구 영웅을 떠올리면 외국의 펠레,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디 스테파노, 한국 축구에서는 차범근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구로 사랑을 받았던 축구인이자, 축구밖에 몰랐던 진정 축구를 사랑했던 축구인. 그가 바로 김용식이다. 축구의 인프라가 전혀 없던 한국에서 실질적으로 축구가 기틀을 잡게 한 한국 축구의 원로이자 전설로 불리고 있다.

2. 유년 시기

대한제국 시절[3]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유명 종교인 김익두 목사[4]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13세에 경성으로 옮기면서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를 바랐지만 김용식은 공부를 싫어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축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김용식은 YMCA에서 공부와 축구를 병행했고, 경신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1928년 11월 경신학교 재학 시절에 개최된 제9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실업전수학교 축구부를 8대 0으로 크게 이기는 데 큰 몫을 함으로써 축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항일 시위였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을 당한 그는 1년여를 숨어지낸 뒤 1930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보연전 경평전을 숱하게 치르면서 많은 무용담을 남겼다.

그 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고, 그로 인해 소속팀이 우승하게 됨으로써 국제무대에 출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국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3. 선수 생활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용식의 명성은 대단했다. 1936년 당시 마라톤 손기정이 있었다면 축구에는 김용식이 있다고 할 만했을 정도였다. 본래 실력으로 1936 베를린 올림픽[5][6] 대표 자리를 꿰찼고[7] 일본 대표팀은 스웨덴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바로 다음 경기인 8강 준준결승전에서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만나 8:0으로 대패 탈락(8위)하긴 했지만 김용식은 이 두 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덕분에 김용식은 와세다대학팀에 속하게 되었지만, 차별대우로 인해 김용식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체육시스템을 모조리 파괴했다. 27세의 나이로 이제 축구 선수로 정점에 오른 김용식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사회부 소속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혼자 공을 다루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마음 속의 본업은 축구였다. 언제든 축구를 위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던 1937년, 일제는 보성전문학교 올스타를 꾸려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4강전에서 일제가 내심 바랐던 대로 보성 올스타는 와세다대학과 맞붙는다. 한때 김용식이 포함되었을 정도인 와세다 대학은 국대를 12명이나 보유한 실질적인 일본 국가대표였고 보성 올스타는 일제의 거듭된 억압으로 축구를 그만둔 사람들도 가득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1935년 경성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1936년 보성전문학교가 다시 준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크게 일제의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제는 일본 제일팀이 조선팀을 뭉개는 것을 원했다. 보성전문학교 팀은 분전 끝에 연장전이 끝날 때까지 2:2였으나 제비뽑기로 와세다 대학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야바위였다. 심판은 보성전문학교 팀에게 제비를 먼저 뽑도록 종용했고 김용식이 뽑아든 제비에는 패(敗)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와세다가 뽑아든 제비에도 같은 패 자가 적혀 있었다. 즉 두 제비 모두 승(勝)은 없고 패만 있었기 때문에 보성에게 먼저 뽑게 시킨 것이었다. 보성 팀에서만 뽑고 발표하면 묻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와세다 팀에서도 뽑아서 들통난 것.

대표적 선수인 김용식의 등장 이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축구에서 만큼은 이겨보이며 실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을 대표로 받아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김용식의 등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대표로 발탁되었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7271001210107000001070100-001.jpg
1940년대에 아버지가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아 다시 고향 신천으로 내려갔고 김용식은 경성축구단을 나와 평양축구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1945년 해방 이후에야 김용식은 다시 서울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용식은 이영민 감독[8]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플레잉코치 자격으로 출전함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국제 대회에 참가하였다. 당시 A대표팀 대회인, 1948년 런던올림픽 축구 1라운드 16강전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5골 5:3으로 꺾으며 기세를 올리고 대한민국 메이저 대회 첫 8강 준준결승전 진출, 8강 상대는 이 대회 금메달(우승)팀 스웨덴에 12:0으로 대패하며 8강 8위로 마쳤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공격편대인 그레 트리오를 막아내지 못했던 것. 그레놀리 트리오는 우리나라 골문에 7골을 폭격하였고 우리나라 올림픽 팀은 그렇게 탈락(8위)하였다. 그러나 김용식은 그 뒤로도 국가대표로 활동했고, 1950년 4월 15일에 홍콩에서 있었던 홍콩과의 친선 경기에서는 국가대표팀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을 기록했는데, 당시 김용식의 나이는 만 39세 264일로 이 기록은 7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역대 최고령 A매치 데뷔골 기록으로 남아있다. 인재풀이 지독하게 부족했던 대한민국 축구 초창기였던 시대에 나온 기록이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깨지기는 어려울 기록으로 보인다.

4. 지도자 생활

1952년에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를 하였고 감독 생활을 하면서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최정민을 발탁해내기도 하였다. 1954년에는 최정민, 민병대 등을 앞세워 감독으로 54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9]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이라도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출전하기에 앞서 선수들을 불러 전의를 다지며 한 말.
애초에 세계의 벽이 높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용식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하지만 조편성에 너무나도 운이 없었던 대한민국. 당시는 물론 역대 월드컵을 따져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최강팀인 ' 매직 마자르' 헝가리를 만나 0:9로 대패하였다. 그리고 다음 튀르키예와의 경기에서 진이 빠진 대한민국은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고 역시나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점수만 보면 실망스러울 경기였지만, 사실 한국대표팀의 저 결과는 그야말로 투혼을 불태운 결과였다. 그럴만한 게 당시 대표팀은 제대로 된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화물기를 얻어타 구석에 처박혀 겨우 스위스로 와서 제대로 연습도 못하고 경기에 임했다! 이러다 보니 외국기자들은 '한 20:0으로 헝가리가 이기겠지?' 이랬고 실제로도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잠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랬던 것이다.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 라며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헝가리는 이탈리아나 잉글랜드 같은 당대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7골씩을 때려박고 안드로메다로 보낸 전력이 있던 말 그대로 공포의 팀이었다. 별명이 괜히 '매직 마자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팀이 한 자릿수 실점으로 막은 건 엄청나게 선전한 셈이었다.[10] 더군다나 헝가리의 다른 경기를 보자면 장난이 아니었는데 그 유명한 서독을 8:3으로 눌러버려 한국전 못지 않게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헝가리는 이 서독을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되려 2:3으로 패하고 만다.

그 이후에도 김용식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양지축구단, 할렐루야 등의 축구팀 등에서 감독을 맡아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0년 AFC 아시안컵 우승도 이루었다.[11]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1951년 FIFA 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1985년, 향년 74세에 지병으로 타계한 후, 체육 훈장 맹호장이 추서되었으며, 이후 2005년에는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홍덕영, 이회택, 차범근, 김화집,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헌액되었다.

5. 수상

6. 기록

7. 기타

  •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출생의 배경도 있고 해서 그는 성실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경신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채금석 선생과 술, 담배, 도박, 여자 등 축구에 도움이 안 될 것들은 일절 멀리하고 40대까지 선수로 뛸 것이라는 약속을 지켰을 정도였고,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떠나는 배에서 우연히 '축구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읽고 그를 지키기 위해 '1만일 훈련 계획'을 세우고 그를 결국 지켜내는 근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한 틈만 나면 외국에서 나오는 축구 관련 전문서적을 구하여 탐독할 정도로 공부하는 축구인이기도 했다.
  • 김용식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외곬으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의 정성과 집념과 헌신이 얼마만큼 빛나는 업적을 쌓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중략) 축구공과 피를 통하고 신경을 나누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든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
  • 김용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칼럼을 참조 바람. ###
  • 이스타TV 축구 골든벨 마지막 문제에서 다루는 인물으로 등장했다. #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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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한 포지션은 센터 하프(중앙 하프백)로 현재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역할이다. [2]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그가 태어나고 1개월 4일 후에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겪고 멸망하였다. [4] 1877~1950.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 및 부흥 활동을 주관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하여 그 유명세를 우려한 북한 당국이 그를 정부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총회장에 추대하여 교세를 견제하려고 했을 정도나, 6.25 전쟁 당시 북진하는 유엔군에 협조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5] 지금이야 올림픽 축구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올림픽은 1930년에 첫 시작한 월드컵과 A매치 세계 메이저 대회였다. 게다가 1930년대의 월드컵은 당시 열악했던 여객선 교통 환경과 비용 등으로 너무 멀리서 열린다는 이유로 출전을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특히,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및 경제 위기로 1930 월드컵에 불참했듯, 1930년대에는 경제적으로 뒷바침이 되어야 월드컵과 올림픽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올림픽과 월드컵이 정기적으로 재개한 이후 월드컵이 올림픽 축구를 역전하고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올림픽 축구는 축구 중심인 유럽과 남미에서 메이저 대회로 평가받지 못하고 주로 공산국가에서 메달을 차지하는 반아마추어성 대회로 그 위상이 추락하였다. [6]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첫 A매치 세계 메이저 대회인 1948 런던 올림픽 18개국 대회에 대한민국이 진출하여 대한민국의 A매치 메이저대회 첫 승리(16강 멕시코전 5:3 승)와 첫 2라운드 진출 기록하였으며(8강 8위) 이 역시도 일본의 ‘베를린의 기적’(1936)과 마찬가지로 한국 축구 초창기에 이룩한 쾌거이다. 이 시절까지는 올림픽 출전 세계 선수들은 준프로로 대우받던 선수들이었으며, 올림픽에 출전한 대표적인 선수로 금메달팀 스웨덴의 군나르 노르달이 있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뤄졌던 1950년 월드컵이 재개하고 월드컵과 올림픽의 격차가 커지면서 올림픽 축구는 메이저 대회로 평가 받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른다. [7] 본디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으나 차별대우에 불만을 표출하며 대표팀을 뛰쳐나갔다. 사실 진짜 실력으로 따지면 두 명도 적다고 국내에서 논란과 비판이 거셌고, 실제로 여운형 같은 사람도 조선인 축구 선수들이 차별받았다고 분개하면서 김용식과 김영근에게 보이콧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8] 한국 야구계의 전설인 대타자 이영민 맞다. 이영민은 야구와 축구를 같이 병행해 선수 생활을 했으며 김용식과 같이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9] 다만 '최초의 월드컵 본선진출/16강'을 이룬 감독은 아니다. 아시아 예선 당시에는 이유형 감독이었고 통과 후 16개국(본선이 지역예선 통과 후 16개국 본선 진출 체제였으니 이게 16강 조별리그 진출) 본선부터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당시 피파는 1938월드컵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무혈입성 참패탈락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 경쟁없이 아시아끼리만 예선을 치러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시켰고,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대만도 기권하고 일본하고만 도쿄에서 1차전, 2차전까지만해서 1승 1무로 일본을 이기고 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54월드컵에서 한국도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튀르키예에 0:7 참패탈락(16위)하자 아시아 수준이 낮다는것을 인지하고, 그 후 1958월드컵 지역예선 부터 아시아는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을 치러야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할 수 있도록 바뀌었고, 한국도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하였으며, 82월드컵부터 24개국 본선으로 확대되고, 1986월드컵 24개국 본선부터 16강이 2라운드로 바뀌었다. [10] 여담으로 스위스에선 한국에 대하여 여러 사정이 방송 보도 되었고, 현지인들이 온갖 생활용품을 전해주었으며 홍덕영 골키퍼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정말로 20골을 먹혀도 될 경기를 선전했다며. 심지어 저 당시에는 규정상 골키퍼를 제외하고 선수교체를 할 수 없었는데, 한국은 탈진과 부상 등으로 경기 중 4명이 이탈하여 종료 시점에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 [11] 이 대회 우승 이후로 한국은 [age(1960-10-23)]년 현재까지 아시안컵 우승이 없다. [기준] 1950년 4월 15일 대한민국 vs 홍콩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