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3:40:00

기타니 미노루

기타니 미노루
木谷實 / Kitani Minoru
파일:external/www.nihonkiin.or.jp/001060.jpg
직업 바둑기사
출생 1909년 1월 25일
사망 1975년 12월 19일 (향년 6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소속 일본기원
출신지 효고현
입단 1924년
일본기원 기타니 미노루 소개 페이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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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바둑 기사.

2. 생애

젊어서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1924년 일본기원이 설립되자마자 참가했다. 그곳에서 중국 출신 우칭위안을 만나 친구이자 최대의 호적수가 된다.

기타니 미노루와 우칭위안은 1933년~1936년 무렵에 '신포석(新布石)'이라 불리는 새로운 초반 이론을 발표했다. 그들은 1939년부터 '세기의 대국'이라 일컫는 '가마쿠라 10번기'를 뒀는데 결과는 6승 4패로 우칭위안의 승리였다. 본인방에 3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하는 등 7대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신포석을 시작으로 새로운 이론을 다수 창안하며 신념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스타일로 바둑계의 존경을 받았다.

기타니의 기풍은 여러 번 바뀌었다. 저단(低段) 시대에는 전투적인 기풍으로 '가이도마루(怪童丸)'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五단 시대에 신포석을 발표하며 품격 높은 바둑으로 변화했다. 1936년 즈음부터 실리를 중시하는 기풍이 되어 우칭위엔과의 10번기에 임했다. 요양에서 복귀한 후에는 먼저 집을 번 다음 상대방의 대규모 진영에 돌입하는 전법을 많이 썼기 때문에 '기타니류 쾅'이라고 불렸다. 모두 인상적인 스타일이지만 특히 신포석 구상이 혁명적인 포석으로 바둑사에 빛난다. 향년 만 66세로 가나가와현 히라츠카시의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숨을 거두었다.

기타니는 많은 프로 기사들을 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의 친가(親家)에 기타니 도장을 열어 아내인 미하루(美春)가 운영했는데, 가지와라 다케오(梶原武雄)가 '사범 대리'로 엄격하게 단련한 것이 크다고 한다. 기타니의 제자들은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타이틀을 석권하며 기타니 일문 황금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제자의 제자까지 포함한 기타니 일문의 프로 기사는 50명 이상, 합계 500단을 넘는다. 말하자면 현대 바둑계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하다. 기타니 일문이 획득한 7대 타이틀과 메이저 세계대회 타이틀은 다음과 같다.
합계 기성
(棋聖)
명인 본인방 십단 천원 왕좌 기성
(碁聖)
메이저
세계대회
조치훈 44 8 9 12 6 2 3 2 2[1]
고바야시 고이치 36 8 8 0 5 5 0 9 1[2]
가토 마사오 31 0 2 4 7 4 11 3 0
오타케 히데오 18 0 4 0 5 0 1 7 1[3]
다케미야 마사키 12 0 1 6 3 0 0 0 2[4]
이시다 요시오 9 0 1 5 0 1 2 0 0
고바야시 사토루 2 1 0 0 0 0 0 1 0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서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 조남철에 이어서 한국 바둑계의 1인자로 군림했던 김인 9단, 윤기현 9단, 하찬석 9단이 모두 기타니 미노루의 제자였다. 사실은 조훈현 9단도 바둑 유학 당시 기타니 일문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그에 앞서 인사차 찾아간 세고에 겐사쿠[5]가 그와 몇 판 두더니 제자로 들이겠다며 낚아채 버렸다. 기타니로서는 황당한 일이었겠지만 바둑계 대선배니 어쩔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조훈현은 1970년대 중반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 한국기원의 기타니 일문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조훈현 시대를 열었으니 묘한 그림이 나온다.

대식가로 어떨 때는 아침 5그릇, 점심 6그릇, 저녁 7그릇의 돈부리를 먹었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때는 스즈키 다메지로(鈴木為次郎)의 하숙에서 점심 식사를 할 무렵이었는데 스즈키에 따르면 밥통을 안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3녀는 고바야시 고이치의 부인이 된 고바야시 레이코로 1996년 세상을 떠났다.


[1] 후지쯔배(1991), 삼성화재배(2003) [2] 후지쯔배(1997) [3] 후지쯔배(1992) [4] 후지쯔배(1988, 1989) [5] 우칭위안의 스승이며, 일본기원 초대 이사장을 지낸 인물이다.